밤베르크 여행 - 독일의 동화같은 중세도시
어퍼 프랑코니아(Franconia) 지역에 위치한 밤베르크는 10세기 이후 슬라브 족 특히 폴란드와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12세기 이후 도시 전성기의 건축은 북부 독일과 헝가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8세기 후반에는 헤겔(Hegel)?호프만(Hoffman) 등 저명한 철학자와 작가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남부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밤베르크의 도시 설계와 건축은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이뤄졌는데 11세기 이후 중부 유럽의 도시 형태와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밤베르크는 도시의 배치와 이곳에 남아 있는 교회, 세속 건물 등에서 중부 유럽의 중세 초기 도시의 탁월하고 대표적인 사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일찍이 카롤링거 왕조 후기부터 바벤베르크(Babenberg) 백작의 성이 있었다. 이 성이 세워진 언덕을 둘러싸고 발달한 밤베르크는 906년에 왕실 소유가 되었고, 이후 바이에른 공작에게 양도되었다.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는 1007년에 독일의 왕이 되었다. 그는 밤베르크를 ‘제2의 로마’로 만들겠다는 의도로 이곳을 주교구(主敎區)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동부 유럽의 슬라브 족 특히 지금의 폴란드와 포메라니아의 중요한 연결 지점이었던 밤베르크는 중세의 배치 규칙에 따라 십자가 형태로 설계되었다. 중요한 네 지점에 성 미카엘 성당, 성 슈테판 성당, 성 강골프 성당, 성 야코프 성당이 있다. 주교 오토 1세의 출현과 함께 밤베르크는 12세기 초에 강력한 왕자 주교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밤베르크의 번영기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13세기 초에 대성당을 화려하게 복원하였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입증된다.
밤베르크는 중세 후기에도 계속 번영하였는데 이곳이 유명한 문화적 중심지일 뿐 아니라 마인(Main) 강을 이용한 운송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이 번영에 일조하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디엔첸호퍼(Dientzenhofer)와 발타자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 같은 예술가들의 활약으로 문화가 크게 번성하였다. 밤베르크는 18세기 후반 왕자 주교 프란츠 루드비히 폰 에르탈(Prince-Bishop Franz-Ludwig von Erthal)의 통치 아래 남부 독일의 계몽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3년에 밤베르크가 바이에른의 선거후(選擧侯;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 황제의 선거권이 있던 7명의 제후)에게 이양된 뒤에도 이 도시는 헤겔과 호프만 등 저명한 작가를 통해 지적으로 우월한 지역이라는 위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의 산업화가 밤베르크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역을 경제 기반으로 삼은 이 도시는 특히 홉(hop) 무역에 중점을 두었다. 밤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최초의 민주 헌법 발상지이기도 하다. 밤베르크의 세계문화유산 유적은 도시가 설립되면서 통합된 다음과 같은 세 곳의 정착 중심지이다. 베르그슈타트(Bergstadt)에는 대성당과 교구들, 예전의 왕자주교 거주지,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는 시민 거주 지역, 예전의 포도주 제조자 정착지가 있다. 인젤슈타트(Inselstadt)는 레그니츠(Regnitz) 강을 경계로 하며, 12세기에 세워진 시장과 도시 이전의 정착지가 있다. 토이어슈타트(Theuerstadt)는 주택이 분산되어 있고 넓게 개방된 공간과 시장 정원이 있는 중세 후기 지역이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도시 특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밤베르크는 현재 도시 내의 유통 중심지와 농업[포도원, 홉 정원, 시장 정원]과의 관계도 주목을 끈다. 일찍부터 동유럽과 문화적으로 연계되었던 도시였던 밤베르크는 특히 건축물에 있어 고딕 시기에 북부 독일과 헝가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에 밤베르크의 바로크 양식적 요소는 보헤미아의 바로크 양식 발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또 세 군데의 역사적인 핵심 지역의 거리 설계는 중세적 특징을 잘 유지하고 있다.
Beethoven (1770 -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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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찬우의 아침이 있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