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책이다. 비상게엄과 탄핵 이후 우리 사회의 민낯이 보인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국회를 우린한 내란수괴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이 사회에 상식이 존재하나/?라는 의문이 든다. 나라의 소멸위기를 앞에 두고 그에 대한 대책에 몰두해도 부족할 판에 당리당략에 의한 꼬라지라니
외환 위기 이후 심화된 양극화는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시대를 낳았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극단적인 경쟁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산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도, 탈락한 다수도 행복하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없다. 바야흐로 희망 소멸 사회다. 결혼, 출산이 줄고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는 청년 세대가 희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청년들은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서울로 향한다. 그리고 지방은 차츰 말라 간다. 청년들이 계속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지속가능한 대안이 있을까? ‘떠나는 청년을 붙잡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는 청년을 행복하게 하자’로 정책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구 소멸, 지방 소멸 같은 위기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불안정해졌고 한국은 지정학적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더 심각한 위기들이 마치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덮쳐 올 수도 있다. 가장 명확하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후 위기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기후 악당’인 한국은 매년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 폭우와 폭설 등 기후 재난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생명과 재산의 직접적 피해도 문제지만, 에너지 전환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는 ‘수출 한국’의 경제에 구조적 타격을 가한다. RE100, 탄소 제로 등 수출 제조업 제품에 대한 국제적 규제 기준이 탄소 배출이 될 것이지만 친환경 에너지원이 부족한 한국 기업 상당수는 탄소 중립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또 다른 위기는 바로 전쟁의 위협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나 다자주의 질서가 만들어 온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힘에 기반을 둔 패권 경쟁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뒤를 이어 중국-대만과 한반도가 새로운 전장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 파병, 미국의 트럼프 정부 2기 출범은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국가 경영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과 정부, 국회와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인구 소멸, 세계 질서의 변화,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환에 아무 관심이 없다. 자기들이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상대를 심판하는 프레임에 매달리고 있다. 심판 프레임에 머무는 한 여야는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할수록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가 만연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정치가 없어서 문제다.
어쩌다 우리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한국의 정치가 팔팔 살아 있을 때가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포퓰리즘이 미국과 유럽을 삼키고 있던 2016년에 한국의 촛불은 폭풍우 속 외로운 등대처럼 민주주의를 지켰다. 그러나 8년여가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변했고 한국의 민주주의 신뢰도와 정치 효능감은 빠르게 후퇴했다. 그 원인으로 선거 제도나 권력 구조, 정당 정치의 퇴조, 미디어 환경의 변화, 전 세계적 포퓰리즘의 흥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정치에서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보고 배제하거나 말살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해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포퓰리즘과 팬덤 정치, 당내 계파 싸움에 몰두한다. 옳고 그름보다는 이기고 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게임과 스포츠에는 룰과 존중이 있지만 지금 한국 정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반칙을 해서라도 이기는 게 우선이다. 과거 계파 정치에는 정치적 가치와 노선이 있었다. 지금은 권력 획득을 위한 패거리 집단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정치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명예와 긍지가 아니라 공천과 자리라는 실질적 보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공천 개입이었다는 사실은 당시나 지금이나 무척 의미심장하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 능력 부재도 심각하다. 이태원 참사, 잼버리 사태, 엑스포 유치 실패, R&D 예산 삭감, 의료 대란 등 행정과 위기 대응 역량은 처참한 수준이다. 특히 이 정부에서는 적극적인 경제, 재정, 산업, 복지 정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게다가 실무 일선에서는 적극 행정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적극 행정을 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일어난 많은 사건 사고들, 국내외적 실책들은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검사라는 특이한 사법 엘리트 기술 관료와 포퓰리즘이 결합한 ‘사법 관료 포퓰리즘’은 윤석열 정부가 완성한 검찰 공화국의 대표적인 통치 수단이다. 정치적 상대방과 정치적 공방을 벌이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의 영역으로 끌고 와서 단죄하는 방식인데, 정치 혐오 정서를 강화시키면서 정치 자체를 사법적 판단의 하위에 놓으려는 반정치적 기획이다. 궁극적으로 정치가 소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 소멸의 원인이 비단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무능과 무책임에만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국민의 지지는 야당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은 한국에서 정치의 실패와 소멸이 단순히 대통령이나 어느 한 정치 세력의 전적인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정치 소멸을 막고 나아가 대한민국 공동체의 소멸을 저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오늘날 한국 정치에는 국민을 잘살게 하고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정책 경쟁이 없다. 오로지 상대를 적대화해 정치적 이익만 누리려는 태도만이 확고하다. 지금의 정치는 민주주의적 경쟁이 아니라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인기투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정치가 바로 서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바꿔 나갈 전환점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근본적 문제들을 치유할 비전과 대안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한 합의를 이뤄 내야 한다.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정부 위촉으로 사회 보장에 관한 문제를 연구·조사한 보고서)와 그것을 실천할 공동체의 연대도 필요하다. 특히 정치를 왜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언제든지 물을 수 있는 정치,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정치, 소수의 지지자가 아니라 다수 국민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정치가 절실하다.
정치가 스스로 복원되지 않는다면 헌법적 주권을 가진 시민들이 새로운 정치를 촉구하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숙의와 토론이 가능한 공론장이 필요하다. 다음 세대에게 희망 없는 무한 경쟁 세상을 물려줄지, 지속가능한 행복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지는 시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 혐오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소멸 위기는 단순히 한 국가의 소멸, 공동체의 소멸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근대적 민주주의, 무제한적으로 팽창하는 자본주의, 더디기만 한 기후 위기 대응 노력으로 보건대 마치 인류는 파멸을 향한 돌진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소멸하는 것은 대한민국 공동체가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 첨단에 서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