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화(자본주의화)의 시점
세계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을 하늘 같이 섬기는 한국의 뉴라이트들은 일제 강점기를 한국 역사의 근대화로 여긴다.
그들의 그러한 의식에 민족주의자들은 기가 막힌 듯 놀란다.
그런데, 가만히 민족이라는 개념을 내던진다면, 뉴라이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그 시점에 일제 강점기가 있기도 하고, 그 시기가 제국주의 국가들이 맹위를 떨치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민족주의자(국가주의자)들 만큼이나 협소하다. 뉴라이트들의 역사에 대한 시선은 서양에 머믈러 있고 민족주의자들의 시선은 피해자의 자격지심에 머믈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해자 피해자의 위치만 다를 뿐이지, 역사를 보는 관점은 권력이라는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근대화의 시기는 박정희 군사정부이다.
그 시기는 농촌이 새마을 운동으로 산업농으로 전환하고 수출이 국가 경제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은 영국의 종획운동과 너무나 흡사하고 무역이 자본주의 경제적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주도가 된 경제 질서는 전쟁을 없애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전쟁은 제국주의 각국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대신한 것이 국제연합 국제법 국가간 군사동맹 국제 사법재판소 등 정치적 기구들과 IMF 세계은행 무역결제 기준을 제시한 BIS 등 경제적 기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미국이 중심이 된 선진국 위주의 제도일 뿐이다.
이 제도는 식민지를 지배하는 노력과 경제력이 없어도 제 3세계를 착취할 수 있는 간편한 도구이고 합법적이고 효율적인 것이다.
이 체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나라는 미국과 유럽국들은 가차없이 응징을 하게 된다.
석유로 풍요를 누리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나라들 중에 달러를 결제화폐를 사용하지 않은 나라들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나라들에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미국이 전쟁을 벌인 나라들이다. 이란, 이라크,시리아,리비아 등.......
물론 북한도 미국이 손 보아야 할 나라 중에 하나지만, 나는 누구 보다도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있다. 만약, 북한 정권에 정권유지가 확실하게 보장이 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미국이 마련해 준다면, 북한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종북의 주사파나 종미의 극우파를 같은 족속들이라 보고 있다.
노름을 좋아하고 평생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맑스와 휴머니스트 점잖은 영국 신사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였다.
물론, 맑스는 부정의 눈으로 아담 스미스는 긍정의 눈으로 바라 보았지만, 합리성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것이 20세기 국가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진영으로 나누게 된 원인이 되었지만, 그 시대의 천재였고 진보주의자였던 두 사람 역시 옹졸한 시선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한 곳에만 머믈러 있었다.
그들은 그래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여겼고 이론을 책으로 만들었다.
아담 스미스의 자본주의 시장의 자기 조정 능력과 비교우위론은 세계 대전으로 거짓임이 밝혀졌고, 맑스의 사회주의는 러시아 중국이 자본주의에 어느 국가 보다도 열을 올리고 있고 돈을 너무나 밝혀 인민들까지 혹사 시키는 북한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富를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그것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차이였을 뿐이다. 그것을 법과 제도나 혹은 그것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대신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부가 폭력이었고 음모였고 사기였고 전쟁이었고, 평화로운 아나키 사회를 파괴한 장물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분석한 책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 사회주의 역시 그렇다. 모든 것이 권력을 염두에 둔 과학적 사고 방식인 것이다.
인간 사회를 분석이 가능한 과학적 시선이야말로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과 같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를 과거 전통의 아나키 사회에서 찾고자 한다. 특히, 인디언들의 아나키 민주주의는 미국 민주주의와 러시아 연방의 단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망가진 원인은 법과 제도로 무장한 권력이었지만 말이다. 아마, 인디언들의 민주주의를 그대로 모방하기만해도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스스로 조직하고 살아가는 수 많은 공동체가 국가라는 틀 속에서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협동조합 운동, 지역화폐, 로칼푸드 운동 등등 지금도 지구 곳곳에 이러한 시도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미래 사회의 대안일 수 있고 진보 운동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고, 국가를 다시 보는 새로눈 시선일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사회가 안착 된다면, 이석기류, 국가 정보원 댓글, 검찰 총장 채동욱 사건 같은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아마, 미래의 사람들은 과거 한반도에 있었던 그런 웃기는 일을 역사 교과서에서 보았다면 배를 잡고 웃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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