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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올리니스트 김용준이 연주하는 들드라의 <추상>, 이 음악이 끝나도 다른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 <수상록>의 작가, 미셸 드 몽테뉴의 고향을 찾아 ]
보르도라면 누구나 포도주를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명주(名酒)인 포도주는 프랑스에서도 서남부(西南部)의 보르도 지방이 명산지입니다.
보르도 서북쪽, 가론느 강과 도르도뉴 강이 합류해 흐르는 지롱드 강의 서안(西岸)인 메독 지역은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등 세계 최고급 적(赤) 포도주의 주고(酒庫)가 있는 곳.
* 프랑스의 포도주 명산지, 보르도의 메독 지방
보르도 동쪽의 생테밀리용은 포도주 애호가들이 흔히 찾는 상표의 이름입니다. 보르도 남쪽의 그라브나 소테른은 백(白) 포도주로 이름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보르도에서 936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으로 갑니다. 지롱드 강의 두 지류인 가론느 강과 도르도뉴 강이 가지를 벌리며 껴안은 이 길의 연변(沿邊) 일대를 앙트르 되 메르(두 바다 사이)라고 부릅니다.
* 보르도의 또 다른 포도주의 명산지 생테밀리옹 지방
하항(河港) 보르도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때는 앙트르 되 메르 산(産)의 백포도주를 8도 내지 10도의 온도로 마셔야 제격이라던가요. 주향(酒香)이 벌써 코 밑을 간지릅니다.
길 양쪽은 등성이의 비탈마다 포도밭입니다. 밀밭이 둘러싼 숲 사이를 길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나지막한 구릉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도르도뉴 강을 건너 카스티용 라 바티이유까지가 보르도에서 44km. 여기서 소로(小路)로 빠져서 동북쪽으로 9km 더 가면 생 미셸 드 몽테뉴 마을에 닿습니다. 침침한 숲을 헤치고 언덕으로 올라서면 하늘이 트이면서 교회가 막아섭니다.
그 교회 옆에 석비(石碑)가 하나 서 있습니다. < 미셸 에켐 드 몽테뉴를 찬양하여 >. 수상록(隨想錄)의 저자 몽테뉴의 영지(領地)에 온 것입니다.
* 석비
마을이라야 인구 겨우 5백. 지대 높은 곳에 농가들이 띄엄띄엄합니다. 몽테뉴 때는 생 미셸의 교구(敎區) 마을이던 것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본바르 교구와 합쳐져 생 미셸 드 본바르로 불려오다가 19세기 말에 마을이 낳은 대사상가(大思想家)를 기려 생 미셸 드 몽테뉴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고색 짙은 교회는 몽테뉴 일가의 영묘(靈廟)입니다. 안에는 몽테뉴의 아버지와 어린 나이로 죽은 몽테뉴의 자식들, 그리고 손녀, 증손녀들이 무덤으로 줄줄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4백년이란 세월의 퇴적이 한눈에 보입니다.
교회 맞은 편이 몽테뉴의 영지 입구입니다. 고목의 서양삼나무가 두 줄로 도열한 가로수 길이 길게 뻗쳐있습니다. 몽테뉴의 조부가 만들었다는 이 길로 공원같은 녹지를 지나면 막이 열리듯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관(城館)이 나타납니다.
* 성관의 본채
원통형의 높다란 탑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유명한 탑입니다. 탑 바로 밑의 석벽(石壁)에 조그만 문이 달려 있습니다. <수상록>에서 "두드리는 사람에겐 아무에게나 열려 있다"던 문입니다.
본채는 개인 살림집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탑만 공개합니다. 대상인(大商人)의 집안이던 에켐 가(家)는 몽테뉴의 증조부 때인 1477년 이 성관과 영지를 사들여 귀족이 되었으며 아버지 때에 몽테뉴 가(家)로 성씨(姓氏)를 고쳤습니다. 몽테뉴는 이 성관에서 태어나 여기서 <수상록>을 쓰고 죽었습니다.
1885년 가정부의 촛불 부주의로 불이 나 본관은 순식간에 타버리고 따로 떨어진 탑만 살아 남았습니다. 몽테뉴가 태어난 방은 없어졌지만 그가 <수상록>을 집필하던 탑의 서재는 다행히 현존하게 되었습니다.
* 몽테뉴 원형탑 서재
성관은 1811년까지 몽테뉴의 후손이 살고 있다가 팔아 버린 뒤 한때는 소작인들이 관리하여 탑은 창고로 쓰이는 등 버려진 상태에 있기도 했고 1860년 나폴레옹 3세 때의 재상(宰相)이던 마뉴가 사서 지금 그 증손녀의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 본관은 화재 이듬해에 복구하면서 옛 스타일에 새 맛을 가미했습니다.
몽테뉴는 35세 때인 1568년 아버지가 죽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영주가 되었고, 1570년 보르도에서의 법관생활에서 물러난 후 이 성관으로 돌아와 은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몽테뉴의 원형탑 서재
성관의 탑 3층의 서재에 붙은 방에는 벽에 라틴어로 새긴 그때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지금도 또렷합니다.
" 기원 1571년 만 38세에 이른 미셸 드 몽테뉴는 오랫동안의 고등법원의 예속생활에 지쳐 아직 혈기는 있으나 여생의 나날을 편안히 지내려고 한다...."
몽테뉴는 자저(自邸)로 돌아와서부터 탑 속에 스스로 갇힌 채 명상의 생활을 시작하여 내성(內省)의 문장을 수시로 썼고 10년 만인 1580년 2권 94장의 <수상록>으로 묶어 첫 출판을 했습니다.
이듬해 보르도 시장(市長)으로 다시 출사(出仕)했다가 5년 만에 도로 돌아와서는 집필을 계속하여 제3권을 추가한 <수상록>의 신판(新版)을 1588년에 냈습니다. 이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4년 동안은 이 1588년판 한 건을 곁에 놓고 매일 보필수정(補筆修正)을 가하는 작업이 탑에서의 일과였습니다.
* 보르도 시
그가 죽은 후인 1595년 가필한 수정판이 나와 이 <보르도 판>이 오늘날 <수상록>의 결정판입니다. 보르도의 시립도서관에는 몽테뉴가 1천 4백 군데나 손질한 1588년판 <수상록>의 수택본(手澤本)이 진열되어 그의 사상의 각고(刻苦)를 촌탁(忖度)케 합니다.
성관의 탑은 <수상록>의 제3편 제3장에 소개된 것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서재는 3층에 있다. 1층은 예배당이고 2층은 침실과 거기 딸린 방인데 나는 때때로 혼자가 되기 위해 여기서 눕는다..."
맨 아래층의 원형 예배당은 10명 정도가 들어앉을까 말까합니다. 몽테뉴가 태어났을 때 영세 받은 곳이 이 예배당인지 아니면 마을 입구의 교회인지 분명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좁다란 나선형 계단으로 2층의 침실로 오릅니다. 이 침실과 아래층 예배당과는 통구(通口)가 뚫려있어 몽테뉴는 이따끔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예배를 보았습니다. 침실에는 말 안장들과 여행용 궤짝이 놓여 있습니다.
* 원형 탑
<수상록>의 제3권 제9장에서 몽테뉴는 침대 위에서 보다는 집 바깥에서 말 위에 탄 채 죽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방에서 죽었습니다.
3층의 서재는 몽테뉴가 <수천 권의 책으로 둘러 싸인 방>이라던 곳입니다. 그 책들이 지금은 한 권도 없습니다. 몽테뉴의 딸이 어느 수도원에 기증했는데, 1683년 이래 이 책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위치한 몽테뉴 동상
서재에는 낡은 책상과 뼈대만 앙상한 의자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몽테뉴의 사색의 잔해(殘骸)입니다. 천장을 올려다 보면 들보들에다 몽테뉴가 좌우명(座右銘)으로 손수 새긴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명귀(名句),격언(格言)들이 빽빽합니다. 모두 54개나 됩니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내게 이싱하지 않다"-<수상록> 제2권 제11장
"자기가 아는 것을 과신하는 사람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수상록> 제2권 제12장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 등등...몽테뉴는 이따끔씩 이 명귀(名句)들로 붓을 갈며 <수상록>을 이 방에서 썼습니다.
<수상록>에는 "내가 탑에서 거처를 할 때 매일 아침 큰 종이 아베 마리아를 울렸다"(제1권 23장)고 씌여 있으나 탑의 맨 꼭대기에 있던 이 종각(鐘閣)은 지금 없어졌습니다.
서재의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파노라마는 몽테뉴가 여기 섰던 그때나 지금이나 답니다. 2백 헥타르나 되는 성관에 딸린 영지의 들판과 숲이 아득히 시야에 들어옵니다. 맑은 날은 전망이 20km 너머까지라고 합니다.
낮은 언덕들은 리드와르 주(州)의 계곡으로 잦아지고 일대는 여기도 주로 포도밭입니다. 몽테뉴도 "포도밭이 이 고장의 주자산(主資産)"이라고 했습니다.
* 보르도 지도,오른쪽 빨간색의 생테밀리옹 바로 오른쪽에 몽테뉴의 영지가 위치합니다.
지도 왼편에 포도주 명산지 메독 지역이 보입니다
[ 몽테뉴와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프랑스 모럴리스트 문학의 선구자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특색이 인간을 성찰하여 인간성을 분석.탐구하는 모럴리스트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 교본(敎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몽테뉴의 <수상록,에세>입니다.
3권 107장으로 된 수상록은 작자가 읽은 책에 대한 감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自省) 등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많은 예해(例解)와 인용(引用)을 섞어 심사(深思)하고 통찰하여 인간 지식을 집대성(集大成)한 것으로 그 지혜로운 말들은 인류의 고전(古典)이 되어 셰익스피어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혀 옵니다.
"Que Sais Je(끄 세 즈-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한마디는 <수상록>의 제2권 12장에 나옵니다.
[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
다음은 일본의 홋타 요시에가 그의 저서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에서 몽테뉴를 평한 글입니다. 홋타 요시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적 작가이자 사상가로 명성과 존경을 받아 왔으며 지난 1998년 80살로 타계 했습니다.
"세계는 소용돌이치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세계인식은 심각한 진동에 휩싸여 있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혼란은 당장이라도 정치화하여 처참한 전란으로 치닫고 있다.
보편적 세계종교로 자타가 인정하던 로마 교회에 공공연히 저항하고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으로 유럽의 절대적 정신기반인 기독교에 균열이 생긴 전대미문의 사태! 이제 새로운 시대는 칼과 전쟁이 아닌, 지혜와 교양을 가진 인간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미셸 성의 고독한 운둔자이자 프랑스 왕정의 실력있는 시종무관 미셸 드 몽테뉴! 그는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쾌락주의적 천성과 스토아주의적 절제라는 양극적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자연적 이성과 격정적 감성의 충만한 합일을 꿈꾼 자유주의자였다.
<에세>라는 위대한 시대적 유산을 낳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는 극심한 내전의 혼란과 광분의 유혈전장 속에서 정신의 피뢰침을 높이 치켜들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한복판을 그렇게 건너갔다.
너무도 비극적이며 너무도 희극적인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노츨된 그 시대는 이른바 '관절이 어긋난 시대'였다. 광분의 종교적 정쟁이 나은 유혈과 비이성이 이 역사 풍경화의 표면적 테제라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라는 인문주의의 거대한 태동은 이면의 안티테제다.
이 역사에서 유혈만큼 빨리 잊혀지는 것도 없다. 인간의 피는 땅에 흡수되어 흙의 자양분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당시는 최악의 시대였고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도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몽테뉴의 찬란한 글은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량 살육을 저지르고 있던 군주와 귀족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고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정말 훌륭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설령 시대가 최악이었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덧붙여서...(시간 있으시는 분들만 읽어 주세요)
[ 몽테뉴와 글쓰기 ]
프랑스 문학의 특징을 말할 때 앞세우는 것 중 하나는, 그 큰 물줄기 속에 철학(사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입니다. 각 시대에 따른 사조 일반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각 개인의 문학세계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친숙한 예로 사르트르를 들자면, 그는 문학사에서도 크게 다루어지고 철학사에서도 크게 다루어집니다. 이런 전통의 줄기를 더듬어가다 보면, 몽테뉴에 이르러 그 뿌리를 만나게 됩니다. 문학과 사상의 행복한 결혼-이것이야말로 글쓰기의 고귀한 지향점이라면, 그 전통의 문을 연 것만으로도 몽테뉴는 의미심장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몽테뉴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분들은 대개 몇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몽테뉴는 <에세> 한 책으로 문학사의 한 장(章)이 되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에세이'라고 부르는 글쓰기 방식은 몽테뉴의 '에세'에서 유래했다는 것(그래서 문학사전 같은 책을 보면 몽테뉴를 '에세이(수필)'의 비조(鼻祖)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의 <에세>는 흔히 <수상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지만 그가 '에세'라는 용어로 자신의 글쓰기를 규정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입니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마음속에서 걸핏하면 '뺑소니치는' 생각들을 붙잡아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의 글쓰기를 상상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무슨 책을 읽다가 어떤 구절이 문득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자 전에 읽었던 일화며 전에 겪었던 일들이 두서없이 기억에 떠오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왜냐하면 그는 자주 고백하고 있듯이 기억력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얼른 책상 앞으로 가서는, 공책에다 구절을 적고, 일화를 적고, 추억을 적고, 그것들을 자신의 생활 및 사고방식과 비교하여 주석을 덧붙입니다(그래서 몽테뉴는 자신의 책을 몽상과 망상과 추억과 성찰의 '잡동사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체 또한 무슨 거창한 담론을 피력하는 투가 아니라, '우스꽝스럽고, 개인적이고, 간결하고, 난잡하고, 토막토막 끊기고, 밋밋하고, 노골적이고, 상스럽고, 딱딱하고, 거만하고, 유창하지도 않은, 말하자면 '시장바닥에서 쓰이는 말투'인 것입니다..
이런 문체로 쓰인 '잡동사니'를 읽어가다 보면, 어느 결에 우리는 옛 선현들과 만나고 있고, 아픈 현실을 지나가고 있고, 더 나아가 인간성의 본질을 사색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지요.
끝으로 몽테뉴는 한 위대한 작가-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가 프랑스로 건너 온 시대였고, 그 르네상스의 도도한 흐름 속에 종교개혁에 따른 인간 해방이 합류한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종교적 분쟁과 정치적 투쟁이 맞물리면서 '성 바르텔미의 대학살'과 '세 앙리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란과 분열의 시대를 겪게 됩니다. 몽테뉴는 바로 그런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시대가 그랬기에 그는 성탑의 서재에 칩거했고, 회의(懷疑)했고, 망상과 몽상 속에서 사색의 금싸라기를 건져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대가 평온했다면 그는 결코 <에세>를 일궈내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