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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3일(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누가복음 11:1-13
친구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십니까?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이 설교문은 바나바훈련원 사역자 영성훈련 <제3과. 기도사역> 강의안과 김정호 원장님의 강의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은 기도사역에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어려울 때마다 기도로 그 어려움들을 이겨나갔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고, 가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 부모님들은 교회에 나와 기도했고, 기도원을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제가 아는 충성스러운 권사님은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어린 두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이 권사님은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나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어린아이들을 키울 능력이 없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이 어린 것들을 책임져 주십시오.” 이 권사님은 눈물의 기도로 두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어디 그 권사님 한 분 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위해 흘린 눈물이 모여 오늘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었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한국교회에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단연 기도의 열정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새벽 기도하는 교회이고, 금요 철야하는 교회이고, 모이면 ‘주여, 삼창’을 외치며 뜨겁게 부르짖는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기도의 열정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의 기도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구지 기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먹는 문제, 입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기도했다면,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자,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 제자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절).”
이 제자가 말하는 요한은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고, 이것을 지켜봤던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기도할 줄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기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과 비전을 자신들에게 전수시켜 달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철학과 비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고, 5절부터 8절까지는 기도해 줄 대상을 가르쳐 주셨으며, 9절부터 13절까지는 기도응답의 확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의 주기도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고, 둘째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는 ‘나’를 위한 기도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를 위한 기도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4절).”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5절부터 8절까지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 한 적절한 예화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밤늦게 벗이 찾아왔습니다. 이 벗은 여행 중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다가 용기를 내어 친구의 집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친구에게도 벗을 먹일 떡 세 덩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밤 중에 찾아온 굶주린 벗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집주인은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사는 부잣집 친구를 찾아갑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자, 지금까지의 이야기에는 모두 세 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한 밤 중에 찾아온 굶주린 친구입니다. 이 굶주린 친구를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될까요?
우리 주변에 육신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의 소년소녀 가장, 무의탁 노인, 장애자, 실직자, 노숙자들을 말합니다. 또 지구상에는 연간 1,300만 명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1분에 24명이 굶어죽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굶주림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굶주린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적어도 25억 명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2만 4천 종족 가운데 1만 종족은 선교사도, 교회도 없이 삽니다. 6천 7백 개 언어 가운데 약 3천 개는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책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처: 이강천, 「전략적 중보기도」(서울: 푸른초장, 2008), p. 15.
그렇다면 한 밤 중에 찾아온 굶주린 친구를 맞이하는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주인은 무능력한 교회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세상의 육신적으로 굶주리고, 영적으로 굶주린 친구들을 먹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여기에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돌려보내어 그들로 마을과 촌에서 하루를 묵고,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입니다(눅 9:12).”
여기에 예수님을 따르던 오천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 성인들의 수만 계수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과 노인들, 여자들까지 합산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적어도 일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날이 점차 저물어 가고, 더군다나 그곳은 빈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 많은 사람들을 돌려보내 각자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해결하게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처럼 합리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먹을 주라(눅 9:13)” “네? 제가 잘못 들었나요? 우리에게는 지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가진 것의 전부입니다. 저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 이것이 제자들의 상황으로만 보이십니까? 오늘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굶주리고,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가진 것이라곤 고작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이것은 겨우 한 사람의 도시락 밖에 되지 않습니다.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상황을 다 알고 계셨으니까요?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능력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 이 일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재료들을 사용하셔서 무리를 다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잣집 아저씨는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가서 문을 두드려야 하겠습니까? 모든 것에 부요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빌립보서 4장 6~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또 마태복음 6장 33절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서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집 주인은 굶주린 친구를 위한 음식을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예수님은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친구를 위하여 우리가 기도하되, 대충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간청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굶주린 친구를 위하여 간청의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그저 형식적인 기도만으로는 안 되겠습니까?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더구나 개인주의화 되어 있는 시대에 우리가 남을 위한 이타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낭비처럼 보입니까?
저희교회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는 권사님들은 하루 평균 1시간 이상씩을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권사님들과 대화해보면, 1시간 내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작 본인이 필요한 기도는 못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 권사님들이 은혜가 넘치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 남을 위해 기도하다가 정작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못 드려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보너스로 응답해 주신다고 고백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목회자로서 너무나 귀한 분들을 섬기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우리는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한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남의 문제를 가지고도 나의 문제처럼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까 우리가 주기도문을 살펴보았는데,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고,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기도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간청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한 기도는 믿음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도 필요합니다. 남을 위한 기도는 사랑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2~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해 주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중보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간청의 기도는, 굶주린 친구의 문제를 위해 나의 사랑을 쏟아 붓는 기도입니다. 친구를 위해 사랑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위한 간청의 기도를 말씀하시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9~10절).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때문에 남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의지적으로 사랑을 투입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중보기도란, 이웃의 문제를 내가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이강천, 「전략적 중보기도」, 15).
우리는 건강의 문제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해 사랑을 투입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자녀의 문제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해서도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 우리는 취업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이웃을 위해서도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굶주린 형제를 위해 간청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우리 다함께 한 음성으로 1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의 문제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응답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공통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1).”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이상과 같은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실 성령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친구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때 주시는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맨 처음에는 나의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하여 기도하지만, 기도하다보면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우리를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위한 중보기도의 응답은 이중적으로 일어납니다.
첫째로, 우리가 굶주린 친구의 양식을 위해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하여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친구를 먹이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굶주린 친구를 위하여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하여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기도하는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된 교회는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저절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은 지금까지 나를 위한 기도만 해왔다면, 나를 위한 기도제목을 내려놓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굶주린 친구를 위해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친구의 문제도 해결되고, 우리교회도 성령을 받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한 분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제가 청년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부부가 계십니다. 지금은 이 두 분이 T국 선교사로 사역하고 계시지만, 제가 이 분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이 분들이 강원도 간성에서 사진 현상소를 운영하시며 군 선교사역에 헌신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찬양사역을 할 때, 저는 매년 이 분들과 한두 차례씩 전방지역의 군부대를 순회하곤 했었습니다.
이 부부가 군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운영해 오던 사진현상소를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군인교회 목회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사역이 행사 위주의 사역에 치우치다보니, 정작 군인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사역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이 부부가 바나바훈련원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사랑의 중보기도 사역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매일 밤 9시에, 집에서 관문기도와 군부대 중보기도를 하고, 부대에서는 군종 병들과 기도를 시작하면서 영적인 공격이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마침 군부대 군종참모로 군종법사(스님)가 부임하였는데, 교회행사를 할 때마다 방해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교회행사보고서를 상급자에게 일부러 올리지 않는 등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군종 병이 마귀에게 눌려 기도를 심하게 방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부내 내에서 여러 좋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3개 부대에서 자살사고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목사님 부부와 군종 병들은 더욱 군부대를 위한 사랑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부부가 부대의 영적상황을 위해 중보기도하면서부터 예전에는 전도할 거들떠보지도 않던 병사들 사이에서 전도의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대를 일주일 남겨둔 형제와 상병 선임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불교 군종 병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또 5월에 중보기도를 시작하여 6월 29일에 마치면서, 그 기간 동안 30명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24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리사가 되겠다던 형제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신도 불쌍한 영혼들에게 말씀을 요리하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형제는 부대 공중전화기로 자신이 구원받은 기쁨을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나누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또 어떤 형제는 “사모님, 우리 엄마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몇 명을 전도했노라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변화와 사역의 열매는 바나바훈련원에서 훈련받은 대로, 이 목사님 부부가 굶주린 친구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면서 이루어낸 최전방의 승전보였습니다(이강천, 「전략적 중보기도」, 42~4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굶주린 친구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십니까? 기도는 사역을 위한 준비사역이 아닙니다. 기도자체가 이미 중요한 사역입니다. 중보기도란, 이웃의 문제를 내가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친구를 위해 사랑을 투입하여 간청해야 합니다. 친구를 위한 중보기도는 사랑을 투입하는 기도입니다.
이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구의 굶주림의 문제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친구의 문제를 위해 간청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 신령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