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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다.(9월 1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로마서 14:1-12(신약 258)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거룩이란 구별 되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성도라는 말은 세상과 구별되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구별 되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우리의 삶은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만을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는 엄격하게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서로 각자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각자의 신앙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획일적인 신앙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르게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신앙으로 살아가지만 각자 신앙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는 획일화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은 다르지만 예전에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가면 각자의 취향대로 메뉴를 선택하기 보다 같은 메뉴로 통일 그렇게 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식당에서 메뉴 통일하듯 모두가 같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로마교회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성령으로 충만을 받은 성도이지만 서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1. 비판하지 말라
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앙의 형태가 있습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철저한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돼서 신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성도가 있고, 오래 신앙생활을 했지만 연약한 믿음의 성도가 있는가 하면 교회 나온지 얼마 안 됐지만 열정적인 믿음의 성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이렇게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런 다양한 형태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이 구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여러분이 동료가 되기를 원하는 형제가 있거든 그의 믿음이 약하더라도 따뜻이 맞아들이십시오. 옳고 그른 일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제 막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사람이나 교회 나온지 오래 되긴 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지녀 할 자세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항상 따뜻하게 맞이해 주라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 다닌지가 몇 년이 됐는데 아직도 그 모양이야, 이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보기에 믿음이 부족한 것이 많아 보여도 언제나 따뜻하게 맞이해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아직도 믿음이 없는 것 같이 보이고 초신자처럼 보이고 그렇더라도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성도답게 살아갈 때도 됐는데 하고 비판하고 책망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도 비판하지 말고 따뜻하게 받아주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그 시대 교회에서 먹는 것을 가지고 믿음을 판단했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우상을 숭배했는데 문제는 고기가 시중에 유통되기 위해서는 우상의 신전에서 먼저 제사를 드린 다음에 고기가 유통되기 때문에 고기 먹는 문제가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14:2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런 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14:3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해서 먹지 않겠다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또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다 받아들이셔서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고 말하면서 고기를 먹는 반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마음으로 꺼림직하기 때문에 고기는 못 먹고 채소만 먹는데 그런 상황에서 고기를 못 먹는 사람에게 당신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비판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채소만 먹을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하나님은 다 받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에 우리는 연약한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인정하고 받아주셨는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비판하거나 책망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을 우리가 비판하면 결국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바울 사도는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에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 집에 하인이 있는데 그 하인이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것은 집 주인이 하는 것인데 남의 집에 가서 그 집의 하인이 일을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고 비판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듯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의 하인을 비판하지 않듯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이 약한 성도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남의 종 즉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모두 주님이 받으시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 말한 바울 사도는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말했습니다. 5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앞에서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여기서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안식일 준수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반면 오늘 기독교는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곤 합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안식교 같은 곳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날을 지킵니다. 우리가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과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안식일이든 교회의 전통에 따른 주일이든 그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날에 대한 것은 스스로 확정해서 지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기서 날은 안식일과 주일의 문제가 아니라 절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기를 어느날에 지킬 것이고 어떤 절기를 지킬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도 절기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었고 그럴 때는 나중에 절기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정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날에 대한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모든 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확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믿고 확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나 날을 지키는 문제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확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은 중요한 것은 날을 어느 날을 지키느냐? 고기를 먹느냐? 채소를 먹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인해서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도 감사하고, 먹지 않는 것도 감사하고, 날을 지키는 것도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모두 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이 의무감으로 하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하고 또한 우리는 누구든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7-8절을 보면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또한 우리는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날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삶은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나 죽으나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한 바울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지막 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도 되고 악을 행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음 뒤에 세상에 있고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의 날이 있습니다. 종말의 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9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는 앞에서 말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 이것을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 있는 성도들의 주님이시고, 또한 이미 하나님 품에 안긴 분들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소유권이 예수님에게 있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예수님께서 나의 영원한 구원자이시기에 내가 살아 있을 때도 주님 품에 안길 때에도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한 성도를 비판하거나 또는 믿음이 없다고 업신여기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경멸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범할 수 있는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 한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야? 언제까지 저렇게 어린아이 같은 신앙생활을 할껀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같아. 제발 제대로 신앙생활을 좀 해 이렇게 말하는 것들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서 비판하고, 그들의 신앙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하면 그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받으셨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를 해도 조심해야 하고, 성도가 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생명을 살리는 전도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하는 말이 믿음 없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서로 돌보는 돌봄 공동체, 중보기도 공동체로 세워져 가는 참빛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일을 직고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11-12절을 보면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4: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여기서 직고한다는 말은 자신의 일들을 직접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야기 한다는 의미와 함께 직고라는 헬라어는 계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마지막 때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각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이야기 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해서 하소연 하듯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한 사람들이 우리가 한 비판에 대해서 직고하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계산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판을 당한 사람이 한 직고를 가지고 우리에게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고백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하나님의 종이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중보 하면서 함께 더불어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참빛교회 성도와 가족과 공동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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