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푼이 며느리의 추억 내 아버지는 함경남도 출신이고 막내인 나까지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백일 만에 서울에 내려와 쭉 성장했다. 내 아버지는 귀향을 꿈꾸는 실향민의 대표로 남북간 철도가 개통되면 서울에서 원산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청량리역 앞에서 병원을 개업하고는 제일 먼저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안고 사셨다. 60년대 청량리역은 전차 종점이고 내 남편집은 마포 종점이다. 그러니 나는 종점에서 종점으로 시집을 간 꼴 이다. 친정과 시집이 양끝인 것처럼 내 아버지와 시아버지도 성격과 모습이 전혀 달 랐다. 내 아버지는 양의사였고 시아버지는 한의사였다.(나중에 사업으로 전업했음) 내 아버지는 키가 크고 멋진 풍모에 지도자적인 성격에 명 연설가였지만 노래만은 빵점이다. 순 서울토박인 시아버지는 체구가 왜소하고 눈빛이 형형한 분이 사람들 앞에서는 말수가 적은 분인데 목청이 좋아서 판소리부터 회심곡까지 명창이셨다. 집도 우리 집은 양옥 집이고 시집은 건물평수가 180 평이나 되는 커다란 고옥으로 정말 사극에 나오는 집 같았다. 시집 6칸 대청마루 대들보에는 한약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감기 고뿔 걸렸다 하면 시아버지는 패독산 (감기 고뿔에 사용되는 한약재)을 다려서 먹였다. 내 기억에는 한약 중에 제일 쓴 약이 패독산이다. 그처 럼 다른 두 분이지만 나는 두 분 모두에게 끔직히도 사랑을 받았다. 시아버지는 옷 이 좋으면 소매치기가 따른다면서 옷을 허름하게 입고 다녔는데 항상 돈이 많았다. 돈도 꼭 두 몫으로 나누어서 신문지에 싸고 또 누런 시멘트 봉투에 싸서 양쪽 안주 머니에 나누어 넣고 다녔다. 그래야 나쁜놈 손이 타더라도 소리가 나기 때문에 금 새 알 수 있단다. 이렇게 돈 간수를 잘 하는 시아버지도 내게만은 항상 돈을 빼앗겼 다. 시아버지가 공장으로 사용되던 공덕동집에서 대흥동 살림집으로 점심 드시러 오면 나는 점심상을 갖다놓고 시아버지를 지키고 앉았다. 시아버지가 식사를 끝내면 나는 돈 필요하니 돈 내놓으라고 떼를 쓴다. 시아버지는 네가 나한테 돈 맡겨 놓은 것 있느냐, 내가 너한테 빚진 것 있느냐등 하면서 슬그머 니 일어나 갈려고 하면 나는 시아버지 허리를 꽉 끌어 안고 놓지를 않았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내 앞에서 뒤돌아 앉아서 부스럭 부스럭 돈 싼 봉투를 풀어서 천원 한 장 을 “옛다”하면서 등뒤 뒷 손짓으로 던져준다. 그러면 나는 이걸 갖고 어디다 쓰냐고 펄펄뛰면 결국 시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주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난 너만 보면 강원도 산속에서 한밤중에 범 만난 것보다 더 무섭다.”라고 했다. 내가 시집오기 전에는 새해 정초에도 밖에 나가 식사하기를 즐기셨다는데 내가 시집 온 후로는 점심을 매일 집에서 드셨다.내가 시집오자 시아버지가 내게 처음 물어 본 것이 한문 읽을 줄 아느냐면서 신문(그 당시는 신문에 많은 부분이 한문을 같이 썼다.) 을 읽게 했다. 시아버지는 한의사였기 때문에 한문 필체가 아주 명필이였는데 내가 한 문을 아는 것이 흡족했는지 매일 점심마다 벌써 다 읽은 신문을 갖고 와서는 나보고 소리 내어 읽게 하면서 그날 신문에 난 사건을 갖고 나랑 논쟁하기를 즐겼다. 연쇄 살인 범 김대두 사건이 났을 때는 너무 화가 난 시아버지가 “얘, 얘, 이런 놈을 어떻게 죽여야 옳단 말이냐. 저자 거리에 내다 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바늘로 찔러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아니냐.”며 펄펄 뛰셨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닭모가지 하나도 비틀지 못한다. 시아버 지가 닭잡기 위해 닭모가지 위에 물통을 올려놓았는데 닭이 죽기는커녕 꽥꽥거려서 쩔쩔 매다가 내 남편이 와서야 닭을 잡았다. 그래도 장난스러운 데가 있는 시아버지는 대청마루 밑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개를 두 손으로 번쩍 곧추 세워 들고는 “너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오유월에 개탈을 쓰고 나와 이 고생이냐.”며 쯧쯧 혀를 차고 곧추 세워진 개는 두 눈을 휘번덕 거리면서 낑낑댄다. 이런 장난을 잘하는 시아버지는 나랑 점심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신문에 난 기사를 갖고 논쟁할 때마다 시아버지는 당신 밥주발위에 손바닥을 쫙 펴 가린다. 왜냐면 내 침이 튈까봐 그런단다. 당신과 내 의견이 다르면 “얘가,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펄펄 뛰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의견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점심 마다 나랑 논쟁하기를 즐기신 시아버지께 지금은 모른 척 가끔씩 져드렸어야 했는데 하는 때 늦은 후회를 한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온 후에 시동생이 정말 착하고 얌전한 예의바른 아내를 맞았다. 그 작은 동서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시아버지께 정성껏 점심상을 차려 올려도 시아버 지는 형님 이야기만 하면서 젓가락으로 상을 탁탁 두드리며 이유 없이 역정을 내서 시아버지 가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나 같은 버릇 없는 말괄량이 며느리도 그렇게 사랑했는데 착하고 예의바른 작은며느리를 왜 못마땅해 하는지 그런 시아버지가 이해가 안됐다. 그런데 지금 생 각하니 나는 예의범절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시아버지를 친정아버지로 여긴 팔푼이 며 느리였기 때문이다. 철딱서니 하나없는 팔푼이 며느리가 시아버지는 어쩌면 친딸같이 여겨 졌는지도 모른다. 철들고 나니 그토록 보고 싶은 시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신다. 이제 어디가서 만나 뵈올꼬-----(옮김)
첫댓글 샤론님! 안녕하세요?!!!저도 철딱서니 하나없는 팔푼이 며느리 시절이 있섰답니다 ㅋㅋ. 이젠..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신 만나뵐수 없는 그리운 아버님들!!!..어느덧, 올해도(2014년.갑오년),그렇게 가 버리고 새해(2015년 을미년)가 슬며시 우리 곁에 닥아오고 있네요얼굴도 모른채, 사이버공간에서, 샤론님과 나는 서로가 마음이 통했던것 같아요.ㅋㅋ식당에서, 아주 잠깐, 나 "샤론"이예요 , 라는 말을 들었슬땐 난 깜짝 놀랐섰지요. 서로가 바빠 바로 헤어진후 얼굴을기억하려니까 떠 오르지않아 애를 태웠답니다그러던 우리가 어느덧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네요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열심히 사역에 동참해요샬롬!
후배님 우리 만난지 어느듯 일년...세월 정말 빠르네요.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아침 저녁 한시간씩 통화..넘 재미있지않아요 넘치는 기쁨과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그대 항상 넘 고맙습니다.새해에도 보다 보람된 날들을 기대하며 활기차게 립시다..샬롬..메아리님 어젯밤에 고열로 힘드신 것같서 오늘 정숙님과 통화하면서 많이 걱정했답니다. 드디어 공포의 주사 맞는 일을 감행하셨군요. 를 보냅니다. 안무섭죠차도가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주사 기운에 반짝 좋을 수도있으니 잘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어젠 편찮으신데도 댓글 오늘도 연이어...넘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세요...샬롬...
첫댓글 샤론님! 안녕하세요?!!!
저도 철딱서니 하나없는 팔푼이 며느리 시절이 있섰답니다 ㅋㅋ.
이젠..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신 만나뵐수 없는 그리운 아버님들!!!..
어느덧, 올해도(2014년.갑오년),그렇게 가 버리고 새해(2015년 을미년)가 슬며시 우리 곁에
닥아오고 있네요
얼굴도 모른채, 사이버공간에서, 샤론님과 나는 서로가 마음이 통했던것 같아요.ㅋㅋ
식당에서, 아주 잠깐, 나 "샤론"이예요 , 라는 말을 들었슬땐 난 깜짝 놀랐섰지요. 서로가 바빠 바로 헤어진후 얼굴을
기억하려니까 떠 오르지않아 애를 태웠답니다
그러던 우리가 어느덧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네요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열심히 사역에 동참해요샬롬!
후배님 우리 만난지 어느듯 일년...세월 정말 빠르네요.어제에 이어서 넘치는 기쁨과 항상 넘 고맙습니다.립시다..샬롬..
어젯밤에 고열로 힘드신 것같서 오늘 정숙님과 통화하면서
를 보냅니다. 안무섭죠
오늘도 아침 저녁 한시간씩 통화..넘 재미있지않아요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그대
새해에도 보다 보람된 날들을 기대하며 활기차게
메아리님
많이 걱정했답니다. 드디어 공포의 주사 맞는 일을 감행하셨군요.
차도가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주사 기운에 반짝 좋을 수도있으니
잘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어젠 편찮으신데도 댓글 오늘도 연이어...
넘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세요...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