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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모데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소치영 목사
G의 안아주심(신 1장 31절) 231203 주일설교
도입 이진희 목사
몇 년 전 데스 밸리를 거쳐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갔었다. 사막을 지나는 4시간 가는 내내 아내는 힘들어 짜증 냈다. 가도 가도 사막이니 진력. 아내는 언제 사막이 끝나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 계속 묻고 불평. 운전하는 동안 “데스 밸리(Death Valley)” 옆에서 잔소리하는 아내 때문에 데스 밸리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못 쉬고 계속 액셀 밟아 한참 달려 어느 순간 앞에 푸른색 거대한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드디어 광야를 나온 것. 그제야 아내가 안도의 한숨 쉬며 찡그린 얼굴 폈다. 사막 지나는 4시간 너무 힘들어하는 아내 보며 40년 동안 광야 헤맸던 IS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내가 4시간 동안 광야를 지나며 했던 행동들 IS이 40년간 광야에서 했던 것들과 닮았다. 그후,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을 때마다 아내와 함께 했던 사막 여행이 생각나 더욱 실감이 났다.
광야를 통과해야 가나안에 들어간다. 라스베가스에서 아름답고 장엄한 요세미티를 가려면 암갈색 죽음의 땅, 사막을 통과하는데 요세미티는 가고 싶은데, 사막은 지나가기 싫은 것이다. IS도 마찬가지 가나안에는 들어가고 싶지만 광야는 싫었으나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광야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G의 방식이다.
1번 경로 : 제일 좋은 길. 국제 고속도로 비아 마리스가 나 있다. 이 길로 가면 40일 걸린다. 그러나 이 길은 애굽 군대가 주둔 이 경로를 선택 않았다.
2번 경로 : IS은 이 길을 통해 가데스바네아까지 갔다. G은 그곳에서 바로 중앙 산악 지대로 올라가라고 하셨다. 이 길로 갔더라면 2년 만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정탐꾼 사건으로 인해 40년을 광야에서 지냈다.
3번 경로 : 가데스바네아에서 에돔 땅을 통해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으나 길을 비켜 주지 않아 이 길로는 갈 수 없자 수많은 사람이 먼 길로 돌아 간다고 불평하다 불뱀에 물려 죽었다. 이 길로 갔더라면 불뱀에 물려 죽은 사람들도 모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4번 경로 : 3번 경로로 가지 못하게 되자 홍해 길로 내려와서 다시 광야 길을 지난 다음 ‘왕의 대로’를 통해 올라가서 마침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다.
어느 경로로 가든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가려면 광야를 거쳐야만 한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 쯤 광야를 경험한다. 가정 문제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건강 문제 때문에, 사업이나 직장 문제 때문에 인생의 광야를 경험할 때. 다들 가나안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지만, 나만 광야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지 않다. 나만 어렵고 힘들고 시련과 고통 당하지 않고 광야를 걷는다. 누구나 문제와 어려움, 시련과 고통 있다. 모세도 애굽 떠나 40년간 광야생활 다윗도 사울에게 쫓겨 13년간 광야생활 했다.
베두인만 광야에서 살지 않고 우리도 나름 광야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실패나 이별, 배신, 가난, 외로움, 두려움, 우울증 같은 것이 다 살면서 통과해야 하는 광야이다. 광야를 지나는데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속히 지나가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IS이 광야를 지날 때 큰 광야와 작은 광야를 지났다. 예, 시내 광야 큰 광야에는 작은 광야들이 많다. IS이 수르 광야 지날 때 물 발견했지만, 마실 수 없었다. 신 광야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 떨어져 굶어 죽 상황에 IS은 애굽에 무덤 없어 광야로 데려 왔나 원망. 르비딤 광야를 지날 때 물이 없자 모세와 G을 비난 원망했다. 아말렉 족속과 전쟁해야만 했다.
광야에서 두려움 경험. “날마다 주어진 공포심을 극복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교훈을 아직 덜 배웠다”(에머슨)
모세 광야생활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G L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절)
IS 눈에 광야생활이 G품에 안겨서 걸어가는 삶 죽지 못해 끌려가고. 하루하루가 고되어 모세가 “너희는 지난 여정동안 G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 광야를 지나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G L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절).
그러면 어떻게 80세의 모세는 IS과 다른 시각을 가졌을까? 모세는 수백만명의 IS의 생사를 책임진 지도자로서,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날의 연속이었음에도 그는 다른 점이 있었다. 광야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않고 G의 품에 안겨서 걷는 은혜의 통로로 봤다.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백성들은 숨 막히는 환경만 쳐다보며 절망했으나 모세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G을 향해 눈을 고정했다. IS은 눈 앞의 현실만 보는 반면, 모세는 위의 것, 곧 G의 약속을 쳐다보았다. IS과 모세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옥한흠, 안아주심 p.241-42)
황량한 광야에서 키우는 양떼들 G의 약속을 붙들었던 대표적인 사람 모세, A, 다윗 꼽을 수 있음.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양 쳤고, A은 네게브 사막 경계 지역인 브엘세바에서 양을 쳤다. 다윗 역시 유대 광야의 경계 지역인 베들레헴에서 양 쳤다. 황량한 광야에서 양을 쳤다. IS에 나무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험한 산에 양치는 모습.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주변 지역이 황량한 유대 광야, 지금도 거기는 많은 베두인들이 양치며 살고 있다.
뉴질랜드에 끝없는 평원에서 양 키우려 옮겨 다닐 필요 없다. 양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 않는다. 늑대나 이리 때문에 두려워할 안전하게 울타리가 쳐져 있어 “내겐 목자가 없어도 부족함이 전혀 없도다.”
시 23편 양들은 척박한 광야에서 “L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노래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부르는 노래 보다, 황량하고 삭막 한 암갈색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갈릴리 호숫가보다 유대 광야의 노래다. 시 23편 양들은 뜨거운 해를 피할 그늘 찾기 어려운 광야에 산다. 때로 험한 산길 지나기도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한다. 생명의 위협 당 한다. 상처받고 병들어 치료받기도 길 잃지만 그런 광야에 살면서 “L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양들은 광야에서 양이 할 일 없다. 정말 혼자 할 것 없다. 먹을 꼴도 찾지 못한다. 길도 잘 못 찾고, 다른 동물들과 맞서 싸우지도 못한다. 도망도 못간다. 양털 주기적으로 깎아주지 않으면, 털이 많이 자라 생명의 위협으로, 양은 스스로 살 능력이 없다. 동물학자들은 G이 만드신 것 중 인간이 돌봐주지 않았으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졌을 피조물 양이다.
양은 문제지만 그들 아무 문제없이 광야에서 잘 산다. 어떻게 아무것도 자기 혼자 할 수 없는 양들이 험한 광야에서 살까? ‘목자’만 있기애 문제가 해결된다. 목자 100% 책임져주기시기에 광야에서 “L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한 여선교사의 일화 아프리카의 선교기지에서 위독한 병에 걸렸다. 게다가 한달 동안 생활비도 없어 매일 보리죽과 깡통에 든 분유로 겨우 연명. 주님의 사랑을 의심했는데 30일 정도 지나자 건강이 회복, 생활비도 도착 정상적 생활 했다. 몇 년 후, 안식년으로 귀국한 선교사가 당시 힘들었던 경험 간증. 예배가 끝나자 한 의사가 찾아와 말하기 “선교사님 생활비가 제때 왔더라면, 선교사님은 돌아가셨을 것. 그런 소화장애 질병은 30일간 보리죽 처방해야 낫는 병” 그제야 G이 얼마나 놀랍게 자기를 인도하며 돌봐주셨는지 깨달았다.
광야는 G을 만나는 장소 <광야를 읽다> 이진희, 두란노 중에서
“L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민 1:1) 광야는 ‘미드바르’이고, 말씀하셨다는 ‘다바르’ 두 단어가 비슷, 광야(미드바르)의 어원이 ‘입(말하다)’의 뜻의 다바르다. 광야와 입이 같은 어족, 흥미롭다. 민 1장 1절 G이 말씀하신곳? 시내 광야다. 광야는 G이 말씀하시는 장소다. G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시내 산은 광야 한가운데 있는 산. G은 이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양 치던 모세를 찾아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IS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G의 말씀을 들었다. 광야는 G의 음성 듣고 G의 말씀을 받아 그들에게 광야가 G이 말씀하시는 장소였다. G의 음성 들으려면 광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
유대인들은 예언자가 있을 자리는 광야다. 어떤 예언자가 광야에 있다면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참 예언자로 여겨 ‘아, 그 예언자가 광야에 있다고? G의 음성 듣기 위해 광야로 나가 야지. 그가 참 예언자라면 광야로 나가 그가 G께 받은 말씀을 들어야겠구나’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진짜 예언자라로 믿고, 신뢰했다. 그가 G의 음성을 듣기 위해 광야로 나간 모습을 보고 전적으로 신뢰.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으로서 누릴 존귀와 영광을 다 벗고 광야로 나가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진짜 예언자로 신뢰한다.
예언자들이 왜 광야에? G의 음성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다. 예언자들에게 들려주신 G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다. 광야는 G의 음성을 듣는 장소다. G이 말씀하시는 장소다.
양진순의 성경 한 사형수가 국민일보 주최 성경 쓰기 대회에 응모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존파와 함께 사형 집행된 서울 구치소 2616번 양진순 1989년 9월 친구들과 함께 가정집에 들어가 살인과 흉악범죄 사형선고 교도소 복역 중 인생에 회의 마음에 동요를 겪던 중 전도 받았다. 매일 성경 읽고 흔들리는 마음 추스렸다. 영혼은 날로 새롭고 교도소의 전도사로 알려질 정도로 복음 전하는 삶 살았고, 불신 가족 전도로 가정 복음화 됐다. 성경 쓰기 대회 응모 감방에 성경 펴놓고 신약 차례로 썼다. 매일 7-10장씩 간간이 눈물 자국이 편지지에 배어 보는 이들 마음이 찡했고 편지에 ‘갇힌 자 된 것을 감사한다’고 썼다.
조지뮬러의 말씀의 힘 15만 명의 고아를 말씀과 기도로 먹인 ‘고아의 아버지’는 성경 2백독 성경의 사람. 어느 날 기자가 “어떻게 엄청난 일을 했나?” 그가 “내 사역의 힘은 성경에서 비롯. 영적 생활의 활력은 날마다 성경 읽느냐 안 읽느냐의 문제와 정비례. 66년간 삶의 체험으로 담대히 말한다. 처음 신앙생활 한 3년은 성경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 당시 내 삶은 기쁨 없는 죽은 사람 같았고, 내 생애에 잃은 날들, 성경을 매일 묵상한 후 마음에 기쁨이 넘쳤고 G의 복을 경험했다. 성경을 사랑한다.” G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 기쁨, 하루를 말씀으로 마무리하는 행복 말씀 가까이 하는 사람만 알 수 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는 뜻은? - 옥한흠 목사
입으로 G 아버지라 불러도 G 아버지 품에 안긴 사실이 믿지 않는다면, 안아 주시는 은혜가 뭔지 모르면 내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는 빈껍데기 X인이다. 누군가에게 안긴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 포옹 한 후 집에 돌아와 아직도 안겨 있는 듯, 흥분 속에 깨어나지 못함과 같은 감정이다. (p.249)
그러나 한번도 보지 못한 G의 품에 안김은 머리가 아니다. 안김은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아무리 영적 부분이라도 내 전(全)인격을 흥분시킬 문제요, 나의 전(全) 인격이 느끼고 확인할 행위이지 막연히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p.250)
누가 속사람이 건강할까? 험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할까? 누가 험한 세상에서 자유로울까? 누가 두려움없이 문제를 극복할까? G 아버지 안아주심을 느끼고 체험한 사람 (p. 251)
1. 안아주심의 은혜를 매일 누리려면: 먼저 아버지 되심을 묵상하라
G이 나를 안아 주시는 은혜를 매일 누리기 위해서 적어도 두 가지는 실천하라. 첫째 ‘G이 아버지가 되심’의 말씀을 찾아서 묵상하라. 이런 말씀은 구약보다 신약에 훨씬 많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 읽고 그냥 덮거나 혹 몇 장 읽고 끝내지 마라. 마치 입에 음식을 넣고 씹듯이 읽는 본문을 묵상하라. (p.252)
신 1장 놓고 묵상. 모세는 험한 광야생활에서 G을 신뢰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G 품에 안겨 살았다. 묵상이란, 모세처럼 해보고 싶어, 모세처럼 되고 싶어 선택하는 방식이다. 모세는 광야에서 G의 안아 주심을 체험했다. 나도 그런 은혜를 받고 싶어 말씀 앞에 마음을 여는 노력이 바로 묵상D이다. 말씀 속에 모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고백하고 기도다. (p. 253)
G은 우리에게 G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G을 “아빠 아버지”(롬 8:15)라 부르는 양자의 영, 아들의 영을 주셨다. 종은 눈치 보며 늘 두려운 맘으로 주인을 바라보디만 아들ㅇ은, 언제나 자유롭게 G을 부르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아들의 영을 받았다. (p. 223)
우리는 구약시대에 모세보다 엄청난 복을 누린다. 율법의 시대에 위대한 모세도 은혜의 시대에는 작은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G이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시다’는 사실 모세가 안 것보다 우리가 더 자세하게 알고, 더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46)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G은 우리의 ‘아버지’다. 이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 J이시다. 이전에 모세는 몰랐느나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p.247)
은 세상에 계신 동안 날마다 G을 향해 “아빠, 아버지”고 부르셨다. 요 17장 J이 세상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고별사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이다. J은 G을 서른아홉 번이나 “아버지”라고 불렀다. 우리는 J의 모습을 통해 G이 아버지 되심을 배웠다. (p. 247)
이런 묵상은 모세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광야의 고난이 축복임을 깨닫게 해주시는 G의 은혜를 맛보게 된다. 이렇게 묵상할 때 성령님이 기름 부으시고 G의 안아 주심을 체험하게 해주신다. 굽히고 안아주시는 G을 만나게 해주신다. G의 품에 안겨 광야를 통과하는 모세처럼 황홀함을 느껴 보리. 이것이 묵상이 주는 은혜다 (p. 254)
G의 말씀을 깊이 묵상이야말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G의 안아주심을 체험하는 첩경이다.
무디의 T.P 어떤 사람이 부흥사 무디에게 ‘당신의 성경책 좀 봅시다’ 요청 무디는 그에게 성경책을 보여주주며 성경 펼쳐 보니 구구절절 색연필로 여백에 묵상으로 가득했는데 성경 곳곳에 T.P라 적혀 었다. “T.P가 무슨 뜻이냐?”묻자 무디 “그것은 실천해 보았더니 입증되었다(Tried and Proved)는 뜻이다.” 말씀대로 실천했더니 말씀이 진리인 것이 증명되었다는 고백이었다. 진정한 X인은 말씀 사랑, 묵상, 삶에 적용 G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2. 자녀처럼 행동하라 둘째, 안아주심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처럼 행동하라. ‘마치 무엇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마음에 새겨 두라. 세르반테스가 쓴 유명한 돈키호테(Don Quixote) 소설 주인공은 중세 유럽에 만연한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 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기사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마치 기사가 된 것처럼 행세했다. 학자들은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가 놀랍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사가 되고 싶으면 기사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p. 256)
어떤 신학자는 “성자가 되고 싶으면 성자처럼 행동하라.”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으면 예수의 제자처럼 행동하라. G의 품에 안기 자녀처럼 행동하라.” (p. 256-57)
‘무엇과 같이 행동하라’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 ‘믿는다’면 그렇게 된 줄 알고 행동하는 것. J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G 앞에 간절히 구했다면, 구한 것을 받은 자처럼 행동하라. (p. 257)
성경에 참 많은 명령들이 나온다. G께서 제일 많이 하신 명령은 “두려워 말라” 신명기에서도 중요한 고비마다 모세는 IS에게 “두려워 말라”고 명령했다. 왜? G의 자녀는 G의 넓은 품에 안겨 광야를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크고 따뜻한 아빠 품에 안긴 아이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는 떨지 말고 G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p. 258)
G의 약속을 믿어라. 사 1장 G은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나는 네 G이 됨이라”는 두 가지 이유 G의 존재만으로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근거다. G께서 내 뒤에 계시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G은 행동하신다. “굳세게 해주겠다” “도와주겠다” “붙들어 주겠다” 내가 움직이기 전에 G이 먼저 우리를 위해 움직이신. 위험과 어려움 앞에서 내가 먼저 어떤 일하기 전에 G께서 이미 움직이고 계심을 믿으라. (p. 231)
빅토리아 알렌의 기적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The Will to Survive) 책 식물인간에서 깨어나 꿈을 이루기까지 기적을 만든 빅토리아 알렌(Victoria Arlen)의 이야기다. 수영을 좋아했던 빅토리아 알렌은 11세에 갑자기 자가면역 질환으로 뇌 손상. 급기야 의식 없는 식물인간 상태. 의사는 회복 가능성 없다고 판정했지만 가족들은 포기 않고, 집으로 데려와 기도 그녀의 귀에 말씀을 들려주었다. 4년째 되던 2010년, 빅토리아가 의식을 회복했다.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가족들이 자기에게 해 준 말을 기억. 식물인간 때 반응할 수 없었지만 모든 상황 보고 듣는 것이 가능 의식은 돌아왔지만 척추신경 손상으로 하반신 마비 휠체어 생활. 좋아하던 수영 못하자 상심. 가족들 그녀의 몸이 수영 기억할 줄 믿고 수영장에 던졌는데 위급한 상황에 놀랍게 수영. 물속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녀 2012년, 미 대표로 런던 패럴림픽에 100m 자유형 금메달 석권 후 걷기 노력 10년 만에 걷는 기적. 2015년 미 스포츠 방송 ESPN에 입사 캐스터 되고, 배우, 모델, 강연자로 활동 후 빅토리아 알렌은 전국에 ‘G이 나의 힘 되셨다’고 간증. G을 의지하는 자에게 힘 되신다. 힘든 일, 불가능한 일에 막혔습니까? ‘내 힘 되시는 G’을 고백 믿음으로 행하면 어려움 극복할 것.
3. 환대하라
광야와 환대 베두인은 환대로 유명한 사람들. 나그네나 낯선 사람을 정성껏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 낯선 사람에게 잘 대접하는 민족이 베두인. A이 지나가던 낯선 세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 그들이 천사였기 때문 아니다. 누구인지 모르면서 그들을 대접했다. A이 특별히 믿음의 사람이어서 나그네를 환대함이 아니라 대부분의 유목민들은 A처럼 나그네를 환대한다. 모세가 사람 죽이고 광야로 갔을 때, 우물에서 양들에게 물 먹이던 이드로의 딸들을 만남. 낯선 남자의 환대 집에 가 아버지에게 알리자 이드로가 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출 2:20).
베두인들이 환대를 중요시하는 이유. 광야는 혼자서 살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든 손님으로 맞아 대접 한다. 또 내가 언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을 잘 대접한다.
베두인은 낯선 사람에게 사연도 묻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인다. 이름도 성도 묻지 않고, 또한 일단 손님으로 받아들이면 목숨 걸고 지켜준다. 백여 년 전 터키 IS 요르단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을 때 터키 군인들이 베두인 장막에 죄수가 숨었다는 정보를 입수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죄수를 내놓으라 했지만, 주인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내줄 수 없다. 군인들이 강제로 집 수색하려 하자 주인은 총 꺼내 자기 말을 쏴 죽이고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말을 죽였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도 죽였는데 내가 못하겠소. 어디 한번 들어 보시오.”
이것이 유목민들의 환대 문화다.
신약에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 4:18)
베두인들은 차를 즐겨 마신다. 종일 차 마신다. 손님에게 차 대접. 이유가 뭘까? 광야는 비타민을 공급받을 수 없다. 농사 지을 수 없어 비타민을 공급받을 방법은 차 마시는 것.
그래서 낯선 사람이 방문하면 차부터 대접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남자가 차를 대접하는데 첫 번째 잔은 안전함을 보여 주려고 자신이 마신다. 두 번째 잔은 손님에게 맛보게 한다. 세 번째 잔은 가득 부어 손님에게 건넨다. 손님을 맞이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들은 쉽게 마음을 열어 누구와도 금세 친해져서 대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문자나 기록보다는 전승과 구전을 중요시하며, 이야기에 능한 민족이다.
미우라 아야코 한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 구멍가게 낸 그녀는 정직, 친절 소문나 손님 많다. 나중에 물건이 달릴 정도. 트럭으로 물건 사 종일 정신없이 팔 지경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물건 파는 아내에게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손님이 별로 없다네. 저 건너가게는 곧 문 닫게 되었다” 이에 부인은 깨달았다.
트럭으로 주문하던 물건을 트럭 주문 않고 파는 물건 종류도 줄였다. 손님이 오면 “그 물건은 저희 가게에 없고 건너편 가게에 사세요.” 그 후 손님 줄었고 수입도 줄었다. 그녀 역시 바쁘게 장사로부터 벗어나 시간 많아 좋아하던 독서 즐겼다. 틈틈이 글도 쓰고 <빙점>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젊은 시절.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마음이 복으로 다시 돌아올 것.
광야는 무사통과하는 곳
20-30대 인생이 산에 오름과 같다. 인생이 노력하면 다 할 줄 안다. 정상에 서려는 야망 40-50대 인생이 달라 보인다. 인생은 정상을 향하지 않고 언제 끝날지 모를 사막을 지나는 것임을 깨닫고. 인생은 뭔가 성취하기 위해 살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임을 절감한다.
송호근의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이와우) 중년의 서글픔과 뜨거운 눈물에 대한 이야기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어느 날 대리운전을 불러 집에 가는 길에 운전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운전기사는 송 교수와 나이가 같은데, 잘 나가던 회사에서 정년퇴직 알바로 대리운전. 그 후 둘은 친구가 되었고, 세대의 중년이 겪는 아픔을 담은 책이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이다.
40대들은 막 인생의 광야로 들어가고. 50-60대들은 끝이 안 보이는 광야를 지나는지. 70-80대 광야를 통과해 20-30대 때 인생이 중년에 접어들면 인생은 산이 아닌 광야다.
성공학 처세술, 자기개발에 관한 책들 인생을 산에 오름. 지그 지글러≪정상에서 만납시다≫(See You at the Top) 어떻게 정상에 오를지, 어떻게 성공할지 그 비결을 알려준다.
성경은 정상에 오르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떻게 광야 길을 무사히 걸어갈지, 어떻게 G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는지 성경은 성공은 인생의 정상에 오름보다 가나안에 들어감.
지금까지 인생을 산에 오름으로 생각.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산에 오를까?ʼ ‘어떻게 남이 올라가지 않은 산에 올라갈까?ʼ 고민했는데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보다 광야를 지남과 많이 닮았다. 결혼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결혼생활은 광야를 통과함. 아이 낳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광야를 통과함. 직장 들어가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 직장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
인생은 광야가 더 많다,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 것. 더 빨리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을 것 광야인 줄 모르고 산을 오르듯 살기에 힘들고 지치고 낙심한다.
달라스에 한 건물 안에 50년 된 나무 50년 동안 실내에서 자랐다. 최적의 온도와 충분한 햇빛, 수분 공급 온실에서 자랐다. 대개 나무는 밑동이 굵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는데 이 나무는 위아래 굵기가 거의 일정하고 가지들이 힘이 없어 축 처져서 여기저기 줄로 매 고정해 놓았다. 바람을 맞지 않고 자라 자기 몸 하나 가눌 힘조차 없다. 나무는 바람을 맞을수록 뿌리를 깊이 내리고 가지가 튼튼해진다. 바람을 견뎌 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강해진다.
아프리카 한 부족은 아들이 성인식 때 아빠가 아들 데리고 어둔 밤 밀림으로 데려가 칼 한 자루만 주고 돌아온다. 아들은 밀림 속에 혼자 밤새 맹수들의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신경 쓰이고 두려움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보낸다. 밤이 가고 어렴풋이 주위를 분간할 시간이면 아이는 놀란다. 왜?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가 완전무장 자기를 지켜봄 때문. 아이 아하, 난 혼자 무서운 밤 혼자라 생각했는데, 아빠가 옆에 함께 계셔 밤새 날 돌봐주셨음 깨닫고 아이는 어디를 가도 두려워 않는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도 어딘 가에 항상 자기를 지켜 돌보아 줄 것 믿기에.
믿는다는 것은 낙심하지 않는다.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나 빛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라”(막2:11)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라”(막3:5) 하고 명령하셨다.
도쿄대학교 교수인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 책에 그 책 쓴 동기는 둘인데 하나는 극도의 신경증을 앓으며 생에 대해 번민하던 아들이 스스로 생을 거두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몇 달 후 일본 동북 지방을 덮친 대지진과 원전사고였다. 한 순간에 2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사라진 믿기 어려운 사태를 맞이한 후 그에게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이런 비참을 겪고도, 그래도 살아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는 살 이유를 진진하게 모색. 책의 말미에 독자들에게 행복 추구 지금을 성실히 살라며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는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돼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특별히 적극적인 일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191쪽)
BC 7C 이사야의 예언. 당시 IS은 범죄와 타락 국운이 쇠하고, G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분위기. 실제로 얼마 못 가서 바벨론에게 멸망 포로 됨에도 G은 약속. “IS은 회복될 것!”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 귀환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J을 통한 구원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교회의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IS은 70년간 광야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시온이 G의 크신 능력으로 회복. 고레스를 통한 IS민족 해방은 기적. G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가장 큰 기적은 출애굽의 노예 해방이나 민족 해방이 아니라 마귀의 권세 아래 있던 죄악의 노예 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해방이다. X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 사람들에게 가로등 하나가 얼마나 도움 되는지 설득하려고 아름다운 등을 하나 샀다. 유리를 잘 닦아 자기 집에서 길가로 길게 연결한 등 받침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등을 올려놓았다. 해가 지고 어두움이 거리를 덮자 그 등에 불 지피자 동네 사람들이 프랭클린 집 앞에서 길 비추는 따뜻한 등불을 보았다. 그 집에서 좀 멀리 사는 사람들도 그 불빛에 호감 갖었다. 그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길바닥에 솟아오른 돌멩이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피해갈 수 있다.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도 등을 자기 집 앞에 내놓고 필라델피아는 길거리를 가로등으로 환하게 만든 미국의 첫번째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