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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jjhāna(nijjhāyati) 개념 연구 — ‘마음에 담음’의 작용과 선정(禪定)으로의 전개 —
【초록】
본고는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nijjhāna(nijjhāyati) 개념의 의미를 어원적·문맥적으로 분석하고, 이 개념이 단순한 ‘응시’나 ‘숙고(생각)’를 넘어 ‘마음에 담음(적재·품음)’이라는 근원적 작용을 지시함을 밝힌다. 아울러 이러한 해석이 ‘선정(禪定, jhāna)’의 본질을 이해하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함을 논증한다.
nijjhāna는 대상과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근원적 작용으로, 그 대상과 담는 방식에 따라 번뇌의 불길이 될 수도, 지혜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이해는 참선(參禪) 수행을 ‘무엇을 어떻게 마음에 담는가’에 대한 집약적 훈련으로 재조명하게 한다.
【서론】 문제의 소재
불교 경전, 특히 니까야(Nikāya)에는 √jhā를 어근으로 하는 다양한 파생어들이 등장한다. 1)
그중에서도 접두사 ni-가 결합한 nijjhāyati와 그 파생형 nijjhāna는 여러 중요한 문맥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기존의 연구와 번역에서는 nijjhāna를 대체로 ‘깊이 숙고함(profound contemplation)’,
‘응시함(gazing)’, ‘관찰함(observing)’ 등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어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첫째, 언어적 형성(口行)인 ‘생각’이나 ‘본다’는 시각적 은유에 치우쳐
마음의 내적 작용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둘째, 동일한 어근이 탐욕적 응시(upanijjhāyanti)와 지혜적 숙고
(dhammanijjhānakkhanti)라는 상반된 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
셋째, ‘선정(禪, jhāna)’ 개념과의 연관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nijjhāna를 관통하는 핵심 의미를
‘(마음에) 담다, 태우다, 적재하다, 품다’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이 해석이 다양한 경전 용례들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불교 수행론의 정수인 ‘선정’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본론】
1. 어원적 고찰: jhāyati의 두 의미와 그 통합
팔리어 동사 jhāyati는 산스크리트어 kṣāyati(√kṣai, 태우다)와 dhyāyati(√dhyai, 명상하다) 두 어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Dictionary.sutta.org』에서도 “jhāyati [jhe + a] meditates or contemplates;
[jhā + ya] burns; to be on fire”라고 하여 두 의미를 병기하고 있다.
이 두 의미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에 담음’이라는 은유는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한다.
· ‘태움’의 측면: 무엇을 마음에 담되, 탐진치(貪瞋癡)라는 가연성 法을 담을 때 마음은 불타오른다. 이는 경전에서 upanijjhāyanti가 탐욕이나 진에로 인한 ‘응시’의 문맥에서 사용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 ‘명상’의 측면: 무엇을 마음에 담되, 지혜(paññā)라는 방법으로 법(法)의 의미를 담을 때 마음은 맑아지고 깊어진다. 이는 dhammanijjhānakkhanti의 문맥과 일치한다.
즉, jhāyati는 ‘대상을 마음에 담는 근원적 작용’을 지시하며, 그 대상과 담는 방식의 차이가 두 상반된 결과를 낳는 것이다.
2. 경전 용례 분석: ‘마음에 담음’의 다양한 양태
2.1. 탐진치(貪瞋癡)를 ‘담는’ 경우: upanijjhāyanti
『Brahmajālasuttaṃ』(DN 1)와 『Pāthikasuttaṃ』(DN 24)에 등장하는 마노파도시카(manopadosikā) 신들의 예는 ‘담음’의 부정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santi, bhikkhave, manopadosikā nāma devā,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i.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ā aññamaññamhi cittāni padūsenti.”
(비구들이여, 마노파도시카라는 이름의 신들이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오래 서로서로를 응시한다.
그들은 지나치게 오래 서로를 응시하여 서로의 마음을 더럽힌다.)
여기서 upanijjhāyanti는 단순한 ‘바라봄’이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瞋)을 마음에 ‘가득 담는’ 행위이다. 그 결과 마음은 더럽혀진다.
『Aggaññasuttaṃ』(DN 27)에서는 남녀 간의 경우가 묘사된다.
“itthī ca purisaṃ ativelaṃ upanijjhāyati puriso ca itthiṃ.
tesaṃ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taṃ sārāgo udapādi,
pariḷāho kāyasmiṃ okkami.”
(여자가 남자를 과도하게 응시하고, 남자도 여자를 과도하게 응시한다.
그들이 과도하게 서로를 응시하여 탐욕이 생겼고, 열병이 몸에 들어갔다.)
이 경우에는 ‘탐욕(貪)’이라는 방법으로 마음에 담음으로써 몸까지 달아오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Upakkilesasuttaṃ』(MN 128)에서는 삼매 수행 중 발생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atinijjhāyitattaṃ kho me rūpānaṃ udapādi,
atinijjhāyitattādhikaraṇañca pana me rūpānaṃ samādhi cavi.”
(참으로 나에게 형상들에 대한 과도한 응시가 생겼고,
그 과도한 응시를 원인으로 하여 나의 형상들에 대한 삼매는 떨어졌다.)
선정 수행 중 나타나는 표상(相, nimitta)조차도 ‘과도하게 담는(ati-nijjhāyita)’ 집착이 생기면 삼매가 무너진다. 이는 ‘담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담는가’가 핵심임을 시사한다.
2.2. 지혜(paññā)로 법(法)을 ‘담는’ 경우: nijjhānaṃ khamanti
『Alagaddūpamasuttaṃ』(MN 22)에서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nijjhāna의 긍정적 역할이 드러난다.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nti.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그들은 그 법을 완전히 배운 후, 그 법들의 의미를 지혜로써 철저히 검토한다.
그들이 지혜로써 의미를 검토할 때, 그 법들은 nijjhāna를 견딘다/허용한다.)
자주 오역되는 “nijjhānaṃ khamanti”구문은 ‘법들이 (수행자의) nijjhāna를 견딘다’는 의미이다. 즉, 수행자가 법의 의미를 마음에 ‘담으려는’ 시도에 대해 법이 그 ‘담음’을 허용(용인)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납득(understanding)이며 확신(conviction)이다.2)
같은 맥락은 『Cakkhusuttaṃ』(SN 25.1)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yassa kho, bhikkhave, ime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yaṃ vuccati — ‘dhammānusārī’.”
(비구들이여, 만약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법들이 이와 같이 지혜로써 nijjhāna를 견딜 만한 것이 된다면, 이 사람을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마따소(mattaso: 적당히, 어느 정도)라는 부사는 ‘담음’의 정도를 나타낸다. 지혜라는 방법으로 법을 ‘적당히, 어느 정도’ 담을 수 있게 될 때, 즉 ‘이해하는 만큼’ 그는 法隨者이고
만약 그 (66)法들3)을 직접 알고 보게 되면(知·見) 예류자(須陀洹)의 경지에 들어선다.
반면에 자신의 견해에 의한 해석(diṭṭhinijjhānakkhanti)은 삿된 견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4)
2.3. 공성(空性)을 ‘담는’ 경우: nijjhāyeyya yoniso5)
『Pheṇapiṇḍūpamasuttaṃ』(SN 22.95)는 nijjhāna의 가장 심오한 차원을 보여준다.
“tamenaṃ cakkhumā puriso passeyya nijjhāyeyya yoniso upaparikkheyya.
tassa taṃ passato nijjhāyato yoniso upaparikkhato rittakaññeva khāyeyya,
tucchakaññeva khāyeyya, asārakaññeva khāyeyya.”
(눈 밝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응시하고, 지혜롭게 검토한다.
그렇게 그가 보고, 응시하고, 지혜롭게 검토하는 동안에,
그것은 그에게 그저 공허한 것으로, 텅 빈 것으로, 알맹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nijjhāyeyya는 이어지는 요니소(yoniso: 지혜롭게, 근원적으로)라는 부사와 연결되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마음에 담는 작용을 한다.
그 결과 담겨진 내용은 ‘공(空)’이다. 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가 아니라, 집착할 만한 실체가 ‘담겨 있지 않음’을 깨닫는 통찰이다.
3. ‘마음에 담음’과 선정(禪定, jhāna)의 관계
초기불교에서 바른 삼매는 색계 선정(jhāna)이고 심일경성(心一境性, cittassa ekaggatā)을 핵심으로 한다.
이는 ‘하나의 대상을 마음에 담아 유지하는 능력’이 아니라 ‘여러 선한 마음의 요소들을 균등하게 놓고(/두고: sam-ā-√dhā) 담아 한 방향으로 모여진’ 안정된(定)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Mahācattārīsakasuttaṃ』(대사십경, MN 117)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yā kho, bhikkhave, imehi sattahaṅgehi cittassa ekaggatā parikkhatā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itipi, saparikkhāro itipi."
(비구들이여, 이것이란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기억이다.
비구들이여, 이 일곱 가지 요소들에 의해 준비된(parikkhatā) 마음의 집중(cittassa ekaggatā)이,
비구들이여, 이것을 성스러운 바른 삼매(ariyo sammāsamādhi)라고 한다.
그것은 또한 원인을 가진 것이라고도 하고, 필요한 것을 갖춘 것이라고도 한다.)
‘집중'이란 첫째는 '여럿(다수의 요소)이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收斂)하는 현상'이고,
둘째는 '하나(한 주체)가 특정 대상을 향해 정신적 에너지를 지향(志向)하는 행위'이다.
전자는 영어의 'concentration'에, 후자는 'focus'에 각각 상응한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집중을 의미하지 어떤 특정대상에 대한 집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第2禪의 정형구는 三昧(定)라는 표현과 禪(담음)이라는 표현이 함께 나타난다.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생각과 숙고의 가라앉음으로써 안으로 맑게 가라앉은, 마음의 단일하게 된,
생각이 없고 숙고가 없는 안정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의, 두 번째 담음.)
『Upakkilesasuttaṃ』에서 atinijjhāyitatta로 인해 삼매가 무너지는 이유는, ‘담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과도함이 ‘균형(安定)’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결론】
본고는 nijjhāna(nijjhāyati) 개념의 핵심 의미를 ‘(마음에) 담다, 적재하다, 품다’로 파악하고, 이러한 해석이 다양한 경전 용례들을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설명함을 보였다.
1. upanijjhāyanti는 탐진치라는 독소를 마음에 담아 타오르는 상태이다.
2. dhammanijjhānakkhanti는 지혜의 그릇에 법의 의미를 담아내어 이해하는 상태이다.
3. nijjhāyeyya와 이어지는 yoniso는 현상의 실체 없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통찰의 상태이다.
이러한 ‘담음’의 개념은 선정(jhāna) 수행의 본질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선정은 ‘여러 선한 마음의 요소들을 균등하게 놓고 담아서 한 방향으로 모여진’ 마음 상태를 위한 훈련이며, 위빠사나는 그렇게 담고 있는 법을 있는 그대로 분류하고 나누어 보는 훈련이다.
그리고 참선(參禪)은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수행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담음’과 ‘비움’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집약적 수행법이다.
결론적으로, nijjhāna는 불교 수행론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개념이며, 이를 ‘마음에 담음’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경전의 가르침과 실제 수행을 보다 긴밀하게 연결 지을 수 있다.
【참고 문헌】
· Dīgha Nikāya (장부)
· Majjhima Nikāya (중부)
· Saṃyutta Nikāya (상응부)
· Aṅguttara Nikāya (증지부)
·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
1) jhāyati에서 유래된 단어로는 pajjhāyati, nijjhāyati, apajjhāyati/avajjhāyati가 나타난다.
apajjhāyati:『Māratajjanīyasuttaṃ』 (MN 50.) / 『Gopakamoggallānasuttaṃ』 (MN 108.)
avajjhāyati:『Mahācundasuttaṃ』 (AN 6.46) / 『Saddhasuttaṃ』 (AN 11.9)
2)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에서의 nijjhāna와 nijjhāpenti(nijjhāyati의 복수 사역형)는
문맥상 納得(이해)으로 해석된다.
"te na ceva aññamaññaṃ saññāpenti na ca saññattiṃ upenti,
na ca aññamaññaṃ nijjhāpenti, na ca nijjhattiṃ upenti.
그들은 서로 서로 동의(같이 앎, 想)하게 하지도 않고 동의하게 되지도 않는다.
또한 서로 서로 納得(이해)하지도 納得 되지도 않는다." 『Kosambiyasuttaṃ』 (MN 48.)
"paṭibalo hoti ubho atthapaccatthike saññāpetuṃ paññāpetuṃ
nijjhāpetuṃ pekkhetuṃ pasādetuṃ
그는 양쪽이 서로를 동의(想)하게 하고 잘 알게(般若) 하고
납득하게 하고 보게 하고 가라앉게(鎭定)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Ubbāhikāsuttaṃ』 (AN 10.33)
3) SN 25는 六六法이다.
六六의 기본형은 한역『六六法經』과 『MN 148』(Chachakkasuttaṃ)에서 찾을 수 있고, 유사한 흐름의『SN 25』 (Okkantasaṃyuttaṃ)와 『SN 27』 (Kilesasaṃyuttaṃ)에 열거된 본문의 59법(6內處 - 6外處 - 6內識 - 6內觸 - 6內受 - 6外想 - 6外思 - 6外愛 - 6界 - 5蘊.)에 대한 교설에서는, 이러한 법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예류자(Sotāpanna)의 증득이며, 이 법들에 대한 욕탐(chandarāga)을 버리는 것이 出離(출리 nekkhamma, 욕계를 벗어남) 즉 불환자(Anāgāmi)의 경지임을 시사한다.
4)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ṭ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ṇo no garūti.
yadā tumhe, kālāmā, attanāva jāneyyātha —
‘ime dhammā akusalā, ime dhammā sāvajjā, ime dhammā viññugarahitā,
ime dhammā samattā samādinnā ahitāya dukkhāya saṃvattantī’”ti,
atha tumhe, kālāmā, pajaheyyātha.
깔라마 사람들이여, 와서 보라.
전승(전해들은 것)만으로, 계승(스승의 스승)만으로, 소문만으로, 경전의 전수만으로,
논리적 추론만으로, 논법(방법)만으로, 외형에 의한 숙고만으로,
견해에 의한 납득만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외관만으로,
‘사문이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이유만으로 (판단하지 말라).
깔라마 사람들이여, 너희가 스스로 분명히 알게 될 때 —
‘이러한 법(현상)들은 불선(不善)하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법들은 현자들에게 비난받고, 이러한 법들을 완전히 받아들여 행하면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끈다’라고 —
그때에야, 깔라마 사람들이여, 너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Kesamuttisuttaṃ / Kālāma-sutta』 (AN 3.66) /
『Sāḷhasuttaṃ』 (AN 3.67) / 『Bhaddiyasuttaṃ』 (AN 4.193)
"saddhā, ruci, anussavo, ākāraparivitakko, diṭṭhinijjhānakkhanti —
ime kho, bhāradvāja, pañca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edhā vipākā.
api ca, bhāradvāja, susaddah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saddah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api ca, bhāradvāja, surucitaṃyeva hoti. pe. svānussutaṃyeva hoti. pe.
suparivitakkitaṃyeva hoti. pe. sunijjhāy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nijjhāy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바라드바자여, 믿음, 선호, 전승, 이론적 추론, 견해에 의한 납득 —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현생에서 두 가지 결과를 가진다.
바라드바자여, 어떤 것은 잘 믿어졌을지라도 그것은 공허하고 헛되고 거짓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은 잘 믿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참되고 진실하며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바라드바자여, 어떤 것은 잘 선호되었을지라도... (중략) ...
어떤 것은 견해에 의해 잘 납득되었을지라도 그것은 공허하고 헛되고 거짓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은 견해에 의해 잘 납득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되고 진실하며 다르지 않을 수 있다."
『Caṅkīsuttaṃ』 (MN 95.) / 『Devadahasuttaṃ』 (MN 101.)
5) yathā yathā nijjhāyati, yoniso upaparikkhati.
rittakaṃ tucchakaṃ hoti, yo naṃ passati yoniso.
그가 (그것을) nijjhāyati 지혜롭게 검토하면 할수록,
지혜롭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텅 빈 것이 된다."
『Pheṇapiṇḍūpamasuttaṃ』 (SN 22.95)
Cf. passato nijjhāyato yoniso upaparikkhato: 봄 ← 이해(nijjhāna) ← (의미) 검토 (← … 들음)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반야지혜로써 의미를 잘 검토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nijjhāna를 허용들 한다.'
----이하 참고 자료----
jhāna(禪)
jhāna는 후대 禪宗에서는 參禪이라고 번역하였고, 음역으로는 선나(禪那), 의역으로는 정려(靜慮)로 표현하여 '생각'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初禪의 尋伺는 口行(생각)에는 해당되지만 제2禪 이후는 적용되지 않는다. 冥想(명상: 고요히 생각함)이라는 번역도 같은 어감이다.
또한 동사형에 대한『https://dictionary.sutta.org』의 영어 번역에서도
"jhāyati [jhe + a] meditates or contemplates.[jhā + ya] burns; to be on fire."
jhāna를 同音異義로 설명한다. 하나는 본 考의 주제인 禪이고 다른 하나는 燃燒이다.
영어 번역도 대체로 '깊은 생각'(심사숙고, 선택에 대한 고민)이라는 어감이다.
jhāna는 대체로 '생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jhāyati에서 유래된 단어로는 pajjhāyati, nijjhāyati, apajjhāyati/avajjhāyati가 나타난다.
apajjhāyati:『Māratajjanīyasuttaṃ』 (MN 50.) / 『Gopakamoggallānasuttaṃ』 (MN 108.)
avajjhāyati:『Mahācundasuttaṃ』 (AN 6.46) / 『Saddhasuttaṃ』 (AN 11.9)
이중 nijjhāyati에서는 upanijjhā-, atinijjhā-, diṭṭhinijjhā-, dhammanijjhā- 등의 용례가 나타난다.
그래서 jhāna의 의미를 nijjhāna(nijjhāyati)에서 찾아보겠다.
"santi, bhikkhave, manopadosikā nāma devā,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i.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ā aññamaññamhi cittāni padūsenti.
비구들이여, 마노파도시카(意가 오염된 자들)라는 이름의 신들이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오래 서로서로를 응시한다.
그들은 지나치게 오래 서로를 凝視하여 서로들 마음에게 더럽힌다."
『Brahmajālasuttaṃ』 (DN 1.) / 『Pāthikasuttaṃ 』(DN 24.)
upanijjhāyanti : upa(가까이) +ni(아래로) + j + jhāyati(禪)의 3인칭-복수-현재-능동태-직설법.
문맥상 이 표현은 분노(kodha; anger)에 의해 빤히 쳐다보는 것(凝視, stare)을 의미한다.
"itthī ca purisaṃ ativelaṃ upanijjhāyati puriso ca itthiṃ.
tesaṃ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taṃ sārāgo udapādi, pariḷāho kāyasmiṃ okkami.
te pariḷāhapaccayā methunaṃ dhammaṃ paṭiseviṃsu.
여자가 남자를 과도하게 응시하고, 남자도 여자를 과도하게 응시한다.
그들이 과도하게 서로를 응시하여 탐욕이 생겼고, 열병이 몸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 열병을 원인으로 하여 음행을 저질렀다." 『Aggaññasuttaṃ』 (DN 27.)
"mātugāmassa cakkhunā cakkhuṃ upanijjhāyati pekkhati" 『Methunasuttaṃ』 (AN 7.50),
앞에서의 upanijjhāyanti가 瞋이라면 여기서는 貪과 연관된 凝視이다.
" “idha pana, bhikkhave, ekacce kulaputt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nti.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te na ceva upārambhānisaṃ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na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anubhonti.
tesaṃ te dhammā suggahitā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saṃvattanti.
taṃ kissa hetu? s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九分敎 법을 배둔다. …
그들은 그 법을 완전히 배운 후, 그 법들의 의미를 지혜로써 철저히 검토한다.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그들은 비난을 위한 이익을 위해서 법을 배우지 않으며,
또한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익을 위해서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법을 배우든, 바로 그 목적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잘 잡은 그 법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익과 행복을 위해 이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법들을 잘 잡았기(捕捉했기) 때문이다."
『Alagaddūpamasuttaṃ』 (MN 22.)
"nijjhattibalā 인욕(견딤)의 힘" 『Paṭhamabalasuttaṃ』 (AN 8.27)
· dhammanijjhānakkhanti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반야지혜로써 의미를 잘 검토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nijjhāna를 견디다/허용한다.'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검토한다.
"te taṃ adhikaraṇaṃ ādiyitvā na ceva aññamaññaṃ saññāpenti na ca saññattiṃ upagacchanti,
na ca nijjhāpenti na ca nijjhattiṃ upagacchanti.
te asaññattibalā anijjhattibalā appaṭinissaggamantino tameva adhikaraṇaṃ thāmasā
parāmāsā {parāmassa (sī. pī.)} abhinivissa voharanti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ayaṃ vuccati, bhikkhave, adhammavādinī parisā." 『parisavaggo』 (AN 2.43-52)
"te na ceva aññamaññaṃ saññāpenti na ca saññattiṃ upenti,
na ca aññamaññaṃ nijjhāpenti, na ca nijjhattiṃ upenti.
그들은 서로 서로 동의(같이 앎, 想)하게 하지도 않고 동의하게 되지도 않는다.
또한 서로 서로 nijjhāpenti(nijjhāyati의 복수 사역형)하지도 되지도 않는다."
『Kosambiyasuttaṃ』 (MN 48.)
"paṭibalo hoti ubho atthapaccatthike saññāpetuṃ paññāpetuṃ nijjhāpetuṃ pekkhetuṃ pasādetuṃ
그는 양쪽이 서로를 동의(想)하게 하고 잘 알게(般若) 하고 납득하게 하고 보게 하고 가라앉게(鎭定)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Ubbāhikāsuttaṃ』 (AN 10.33)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에서의 nijjhāna와 nijjhāpenti(nijjhāyati의 복수 사역형)는 문맥상 納得(이해)으로 해석된다.
"idha, bhikkhave, saddhājāto upasaṅkamati, upasaṅkamanto payirupāsati,
payirupāsanto sotaṃ odahati, ohitasoto dhammaṃ suṇāti, sutvā dhammaṃ dhāreti,
dhatānaṃ {dhātānaṃ (ka.)} dhammānaṃ atthaṃ upaparikkhati,
atthaṃ upaparikkhato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 dhammanijjhānakkhantiyā sati chando jāyati, …
<sāpi nāma, bhikkhave, dhammanijjhānakkhanti nāhosi; sopi nāma, bhikkhave, chando nāhosi;>
tathāgatappaveditā cassa dhammā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pi cassa ime dhammā honti,
seyyathidaṃ —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dhammānusārī.
그리고 그에게 여래께서 선포하신 법들은 아는 만큼 납득한다. …
이 사람을 법을 따르는 자(法隨者)라고 한다." 『Kīṭāgirisuttaṃ』 (MN 70.) /
『Paṭhamasaraṇānisakkasuttaṃ』 (SN 55.24) / 『dutiyasaraṇānisakkasuttaṃ』 (SN 55.25)
여기서도 'dhammā … nijjhānaṃ khamanti' 형식으로 나타난다.
· diṭṭhinijjhānakkhanti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ṭ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ṇo no garūti.
yadā tumhe, kālāmā, attanāva jāneyyātha —
‘ime dhammā akusalā, ime dhammā sāvajjā, ime dhammā viññugarahitā,
ime dhammā samattā samādinnā ahitāya dukkhāya saṃvattantī’”ti,
atha tumhe, kālāmā, pajaheyyātha.
깔라마 사람들이여, 와서 보라.
전승(전해들은 것)만으로, 계승(스승의 스승)만으로, 소문만으로, 경전의 전수만으로,
논리적 추론만으로, 논법(방법)만으로, 외형에 의한 숙고만으로,
견해에 의한 납득만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외관만으로,
‘사문이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이유만으로 (판단하지 말라).
깔라마 사람들이여, 너희가 스스로 분명히 알게 될 때 —
‘이러한 법(현상)들은 불선(不善)하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법들은 현자들에게 비난받고, 이러한 법들을 완전히 받아들여 행하면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끈다’라고 —
그때에야, 깔라마 사람들이여, 너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Kesamuttisuttaṃ / Kālāma-sutta』 (AN 3.66) /
『Sāḷhasuttaṃ』 (AN 3.67) / 『Bhaddiyasuttaṃ』 (AN 4.193)
"saddhā, ruci, anussavo, ākāraparivitakko, diṭṭhinijjhānakkhanti —
ime kho, bhāradvāja, pañca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edhā vipākā.
api ca, bhāradvāja, susaddah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saddah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api ca, bhāradvāja, surucitaṃyeva hoti. pe. svānussutaṃyeva hoti. pe.
suparivitakkitaṃyeva hoti. pe. sunijjhāy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nijjhāy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바라드바자여, 믿음, 선호, 전승, 이론적 추론, 견해에 의한 납득 —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현생에서 두 가지 결과를 가진다.
바라드바자여, 어떤 것은 잘 믿어졌을지라도 그것은 공허하고 헛되고 거짓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은 잘 믿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참되고 진실하며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바라드바자여, 어떤 것은 잘 선호되었을지라도... (중략) ...
어떤 것은 견해에 의해 잘 납득되었을지라도 그것은 공허하고 헛되고 거짓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은 견해에 의해 잘 납득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되고 진실하며 다르지 않을 수 있다."
『Caṅkīsuttaṃ』 (MN 95.) / 『Devadahasuttaṃ』 (MN 101.)
"tatra, bhikkhave,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sassato attā ca loko ca,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tesaṃ vata aññatrev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paccattaṃyeva ñāṇaṃ bhavissati parisuddhaṃ pariyodātan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비구들이여,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헛되다’라고 말하고 주장하는 사문 바라문들이 있다.
그들에게 참으로 믿음과 다르고, 선호와 다르고, 구전과 다르고, 이론적 추론과도 다르고,
견해에 의한 납득과도 다른
청정하고 순수한 자기 스스로의 지혜(아빈냐, 證智)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Pañcattayasuttaṃ』 (MN 102.) / 『Atthinukhopariyāyasuttaṃ』 (SN 35.153)
"…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Kosambisuttaṃ』 (SN 12.68)
· atinijjhāyitatta
"tassa mayhaṃ, anuruddhā, etadahosi —
‘atinijjhāyitattaṃ kho me rūpānaṃ udapādi,
atinijjhāyitattādhikaraṇañca pana me rūpānaṃ samādhi cavi.
참으로 나에게 형상들에 대한 과도한 응시가 생겼고,
그 과도한 응시를 원인으로 하여 나의 형상들에 대한 삼매는 떨어졌다."
『Upakkilesasuttaṃ』 (MN 128.)
nijjhāyeyya [동사, 능동태, 제3인칭 단수, opatative]
"seyyathāpi, bhikkhave, ayaṃ gaṅgā nadī mahantaṃ pheṇapiṇḍaṃ āvaheyya.
tamenaṃ cakkhumā puriso passeyya nijjhāyeyya yoniso upaparikkheyya.
tassa taṃ passato nijjhāyato yoniso upaparikkhato rittakaññeva khāyeyya,
tucchakaññeva khāyeyya, asārakaññeva khāy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스 강이 큰 거품 덩어리를 떠내려가게 한다고 합시다.
눈 밝은 사람이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응시했고, 지혜롭게 (그것을) 검토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보고, 응시하고, 지혜롭게 검토하는 동안에,
그것은 그에게 그저 공허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저 텅 빈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저 알맹이 없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 ye dūre santike vā taṃ bhikkhu passati nijjhāyati yoniso upaparikkhati.
…
yathā yathā nijjhāyati, yoniso upaparikkhati.
rittakaṃ tucchakaṃ hoti, yo naṃ passati yoniso.
그가 (그것을) 응시하고 지혜롭게 검토하면 할수록,
지혜롭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텅 빈 것이 된다."
『Pheṇapiṇḍūpamasuttaṃ』 (SN 22.95)
<Cf. passato nijjhāyato yoniso upaparikkhato: 봄 ← 응시(nijjhāna) ← (의미) 검토 (← … 들음)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반야지혜로써 의미를 잘 검토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nijjhāna를 견디다/허용한다.'>
"yassa kho, bhikkhave, ime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yaṃ vuccati — ‘dhammānusārī,
okkanto sammattaniyāmaṃ, sappurisabhūmiṃ okkanto, vītivatto puthujjanabhūmiṃ;
abhabbo taṃ kammaṃ kātuṃ, yaṃ kammaṃ katvā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pettivisayaṃ vā upapajjeyya; abhabbo ca tāva kālaṃ kātuṃ yāva na sotāpattiphalaṃ sacchikaroti’.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pajānāti evaṃ passati, ayaṃ vuccati —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ti.
비구들이여, 만약 어떤 사람에게 반야 지혜로 아는 만큼 그 법들은 nijjhāna를 견디다/허용이 된다면,
이 사람을 일컬어 '법을 따르는 자(法隨者)'라 하고,
바른 길에 들어선 자, 선인의 경지에 들어선 자, 범부의 경지를 넘어선 자라 한다.
그는 어떤 행위를 행하여 지옥이나 축생의 태나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게 될 그러한 행위를 행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는 예류과를 실현하기 전까지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죽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러한 법(진리)들을 이와 같이 꿰뚫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知 · 見),
이 사람을 일컬어 '예류자(흐름에 든 자)',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성질을 가진 자, 확정된 자, 완전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자라 한다."
『Cakkhusuttaṃ』 (SN 25.1)
SN 25는 六六法이다.
6內處(眼耳鼻舌身意) - 6外處 - 6內識 - 6內觸 - 6內受 - 6外想 - 6外思 - 6外愛 - 6界 - 5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