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본래비조백(本來非皂白)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마하대법왕이여
짧지도 길지도 않도다.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건만
곳에 따라 푸르고 누런 색을 나타내도다.
거울에 모든 물건이 오는 대로 비춰주는 거와 같다. 일체의 모든 만물이 한 마음인데, 어째서 이건 볼펜이라고 하고, 이건 시계라고 하고, 이건 땅이라고 하고, 이렇게 모든 모양이 다르고 이름이 다른가?
그건 한마음의 변형으로 모든 천태만상의 모양이 나타나는 거다. 그 모양마다 이름을 달리 붙였을 뿐이다(異名). 볼펜이다, 시계다, 하늘이다, 이렇게 일심(一心)의 변형(變形) 이명(異名)이다.
그러면 일심이라는 그 실체가 어떤 거냐?
여기서 "별다른 법이 없고, 시작이 없던 때로부터 일찍이 생긴 적이 없으며 또한 사라진 적도 없다. 푸르지도 않으며 누렇지도 않다" 하였다.
부처님이 일심이 어떤가 6년 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신 거고, 역대 조사스님들이 일생 동안 '나는 무엇인가' 한 게 바로 그거다.
이름하여 일심(一心)이니, 한 물건(一物)이니 하는데, 그런 말을 전제해서 붙이는 것이 잘못됐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한테 가르쳐 주려면 그냥 입 닫고 있어서는 안되니, 그래서 가짜로라도 일심, 일물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 조사선에는 그런 게 없다.
"어떤 것입니까?“
"호래호현(胡來胡現) 한래한현(漢來漢現)이라.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나타내고, 검은 것이 오면 검은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자기를 깨달아 본 사람이 하는 소리다.
어떤 스님이 한 거사 집에 탁발 차 찾아가니 거사가 방으로 안내했다.
스님이 방에 앉으니 장자가 인사를 하고 앉아서 물었다.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대답을 바로 해 주시면 탁발해 가져갈 것이고 대답을 바로 못 하면 탁발을 해 가실 수 없습니다.” 스님이 장자에게 “물어라” 하니 장자가 마음 심자(心)를 써놓고 이게 무슨 자냐고 물었다.
그 스님이 대답하기를 “마음 심자가 아니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자는 부인을 불러 물었다.
“여보, 이게 무슨 글자입니까?”
“마음 심자 아닙니까?”
“당신도 암주가 될 만한 자격이 있소.”
그리고는 장자가 스님에게, “스님과 제 부인의 경지가 같으니 시주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스님은 장자로부터 시주를 받지 못했다.
여러분 같으면 마음 심자를 놓고 "무슨 자입니까?" 하고 물으면 뭐라 하겠는가?
내가 뭔가를 공부해서 확실히 안목이 터졌다면 그런 때에 한마디 해야 자기 생명이 사는 것이고, 거기서 한마디 못하면 자기는 죽은 목숨이다. 예전에 월래 관음사에서 공부할 때 향곡스님이 이 대목을 나한테 물으셨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하니, 지금까지 그렇게 대답한 사람이 없었는데 아주 훌륭한 멋진 대답을 잘했다고 하셨다.
간화선이나 묵조선이라는 건 전부 한마음이 뭔가 이걸 바로 깨닫는 거다. 일심은 각성(覺性)의 마음이다. 이런 각성의 마음의 실체를 바로 본 일이 없으니까, 생각이 많이 일어나는 가상적인 망상심을 우리는 진짜 마음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 일어나는 생각 이걸 착각하고 참나라고 하는데, 우리는 공부를 해서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알아서 계합이 돼야 된다. 허상, 망상, 그런 가짜를 진짜 나라고 속지 말고 진짜 내가 뭔가를 바로 알아봐야 된다.
“마음이 일어난 즉은 모든 일체 반연이 다 일어나고, 마음이 멸한 즉은 일체의 모든 반연이 다 없어진다.”
그러니 망심은 중생심이고 식심이고, 불심은 우리의 각성심인데, 그러면 묵조선 간화선에서는 왜 선을 하느냐?
선이라 한다고 해서 닦는다고 이렇게 말하면 그건 선을 모르는 사람이다. 선이라는 자체는 닦는 게 아니다. 그런데, 깨달음[覺]과 깨닫지 못한 중생[不覺]의 두 가지 길이 갈라지면서, 깨닫지 못한 중생 차원[不覺]에서 신수 대사처럼 '때때로 털고 닦아야 된다'는 그런 말이 나오게 된다.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그런 말이 안 나온다. 이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요새 중생들이 참선한다고 앉아 있고, 또 참선이 힘들다고 해서 명상이니 관법이니 별게 다 나온다. 그런 것이 전부 다 뭐냐? 허망한 망상에서 하는 짓이라. 만약에 그게 닦아서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조작(造作)이다. 그게 뭔 말이겠는가? 시커먼 숯을 하얗게 만들려고 닦는다면, 숯이 다 닳도록 닦아도 희어지겠는가? 닦아서 희어지는 게 있다면 시작이 있고 마치는 게 있다. 만약에 닦아서 깨달아서 마치는 게 있다면 그건 조작이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간화선이 어렵다 하면서 이러는데 기가 차는 것이다. 이게 자기가 눈이 어두워가지고, 더 눈이 어두운 짓을 하는 걸로 끌고 가고, 더 눈이 어두운 걸 만들어 나가는 짓이라. 만들어서 될 일 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드는 것은 시작이 있고 나타나는 게 있고, 나타나 있는 거는 변형해서 쇠퇴해서 무너지는 것이다. 만드는 거, 닦아서 이루어지는 게 있다면 유의법이다. 천만 년 해도 소용이 없는 거다.
왜 이 말을 해주느냐? 이 말해주면 알아들어야 된다. 이걸 여기서 퍼뜩 알아듣는 사람은 의심할 게 없고, 궁금하게 생각할 일이 없다. ♣
(학산 대원 대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