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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하다
행 21:15-26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행 21:15-26 / 며칠 뒤에 우리는 짐을 꾸려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 16) 우리와 동행한 가이사랴의 신도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즉시 우리를 나손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손은 구브로 섬 출신으로 일찍이 신도가 된 사람이었다. 17)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 예루살렘에 있는 신도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18)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 다음날 바울은 우리를 데리고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을 만나러 갔다. 19) 한차례 인사가 끝난 다음 바울은 그의 전도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이루어 놓으신 많은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20)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바울에게 말하였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많은 유대인들도 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유대의 전통과 관습만은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1)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당신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우리 유대인의 관습을 어겨 아이들에게 할례 베푸는 것을 금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22)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도 틀림없이 그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23) 그러니 당신은 이렇게 하십시오. 여기에 하나님께 서원을 한 네 사람이 있습니다. 24) 그들과 같이 성전에 가서 함께 머리를 깎은 다음 그 비용을 모두 대신 물어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유대의 관습을 인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잘 지켜 가고 있다고 믿고 다시는 그들이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25)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라고 요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전에 편지로 써보낸 대로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지 말고,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피를 빼지 않은 채 먹지 말고,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지키면 될 것입니다.' 26) 바울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음날 그 네 사람과 같이 의식을 치르고 성전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정결예식이 끝나는 이레 뒤에는 희생제물을 바치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서약하였다.
가이사랴를 떠난 사도 바울 일행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 동안의 선교를 보고하고 성전에 올라 율법대로 결례를 행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새(15-22) 사도 바울이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에는 예루살렘에 집이 있는 구브로 사람 나손이 함께 동행합니다.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 바울 개인으로서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 입장에서는 아주 조용한 방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입성을 알지 못한 채 바울의 동료들과 헬라파 기독교인들만이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영접합니다. 예루살렘에 여장을 푼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방문합니다. 이는 그 동안의 선교 보고와 함께 연보를 전달하기 위함(고전 16:1-3)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도 바울이 유대인 성도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음을 걱정합니다. 유대의 조상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모세의 규례를 지키지 말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결례를 행하라(23-26)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실인의 서원을 한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 결례의 비용을 사도 바울이 대신하여 지불하라는 것입니다(민 6:13-21). 이는 사도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교적 색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또는 지키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골 2:16-17).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될 수 있음을 그의 서신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고전 9:20-23). 그래서 디모데에게는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였고(행 16:3), 디도에게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갈 2:3). 또한 사도 바울은 서원을 위해서 율법대로 머리를 깎기도 하였습니다(행 18:3).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고를 순종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적용: 당신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증언을 위하여서 당신은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복음에 생명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쉼의 대상은 육체적으로 피곤해있는 사람들이나, 세상 근심 걱정에 지쳐 있는 사람들,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히지 못해 참된 자유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 비록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도 없고 평온히 빈둥거리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묶여서 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지 못한 것이 수고함이요 무거운 짐입니다.
호크마 주석
=====21:15
행장을 준비하여...올라갈새 - 드디어 바울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큐아사메이노'(* )는 신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로 '짐을 꾸리다'(Robertson),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성금을 챙기다'(Bengel), '말의 안장을 꾸리다'(Ramsay) 등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상호 보충적으로 취해질 수 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이고 그 길을 도보로 가기에는 너무 피곤하다는 것, 그렇게 지친 상태로는 예루살렘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물론이고 특히 의사인 누가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교통 수단은 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Ramsay).
=====21:16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 '오랜 제자'라는 표현은 나손이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 즉 오순절의 120명의 제자 가운데(1:15)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Robertson, Haenchen, Bruce). 이럴 경우 바울은 그와 사전에 친분(親分)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가이사랴의 신도들이 소개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서 '나손을 데리고 가니'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나손의 집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로 번역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공동번역, Bengel, Bruce, Meyer). 전자의 개역 성경 같은 번역을 주장하는 학자는 칼빈(Calvin), 베자(Beza), 빈센트(Vincent), 로버트슨(Robertson) 등으로 이 중 로버트슨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나손의 집에서 묵어가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갔다고 본다. 이럴 경우 나손의 집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중간에 묵어가기 위해 사람을 일부러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간에 쉬어가야 할 경우 여인숙 같은 곳에서 묵어가면 되지 구태여 사람을 데려갈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견해는 나손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꺼이 영접해 줄 것같지 않은 상황에서 거처(居處)를 제공해 줄 사람으로 나손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다(Bruce). 후자의 견해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21:17
형제들이...기꺼이 영접하거늘 - 가이사랴에서 함께 한 성도들을 포함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꺼이 환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형제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형제들'을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시켜서 바울이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견해는(Overbeck)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8, 22절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공식적인 접대였다(Lake). 바울의 동료들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사적인 모임을 말하고 있다(Jacquire).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의 성도들이 베푼 환대였다(Beyer). 이들은 헬라적 기독교인들이었다(Knopf). 와 의 견해가 비교적 무난하다.
=====21:18
바울이 우리와 함께 - 여기서는 '우리'와 바울이 구분되어 표현된다. 이는 아마 바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인 듯하다.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하고 할 수 있는 야고보를 방문하였다(12:17).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나 요한, 그밖의 다른 사도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전도나 다른 일을 위해서 출타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Zahn).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Bruce).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장로들 - 이 표현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다.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것이라고 본다(Lenski).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단에 대해, 브루스(Bruce)는 야고보가 그의 행정적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단의 동료 장로들과 함께 일했는데, 20절에서 나타나는 바 교인의 수가 수만 명(공동 번역에서는'대단히 많습니다'로 표현되어 있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예루살렘에는 야고보를 의장으로 하고 70인의 장로로 구성된 일종의 나사렛 산헤드린(Nazarene Sanhedrin)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수석 장로이며 다른 장로들은 바울을 환영하는 자리에 초청된 야고보의 손님들이라고 본다(Robertson). 야고보를 제외한 사람들은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다고 본다(Beg, Zahn). 자료들이 불충분하여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어려우며 단지 잠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아직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상당히 있었다는 점을(22절) 감안할 때 의 견해보다는 나 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21:19
봉사로 말미암아...고하니 - '봉사'(* , 디아코니아)는 '종', '일꾼'을 뜻하는 '디아코노스'(* )에서 파생된 말로 '사명'(20:24), 또는 '직분'(롬 11:13)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그의 역할 가운데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 전달도 포함되었을 것인데, 본문에서 그 사항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성금 전달은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언급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Bauernfeind). 성금을 전달한 것에 대한 효과가 생각한 것보다 미미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후에 바울을 위하여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당국에 대해 한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오랫동안 투옥되었을 때 그에게 동정을 표시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Furneaux).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한편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일들을 세세히 증언하고 있는데, 그는 그 모든 일들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나타낸다.
=====21: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이 문구는 야고보 및 장로들이 바울의 증언을 매우 호의적으로 들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자기의 봉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주체로 있었다고 증언했으므로(19절) 이들이 이야기를 경청한 후 바울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 누가는 야고보의 무리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길들이 많음을 주지시키고 있다(22절). 그런데 '수만 명'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많은'의 뜻을 가진 '포사이'(* )와 '일만', 또는 '허다한 것', '무수한 것'을 뜻하는 '뮈리아데스'(* )가 합하여진 것으로 학자들 간에는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해하기도 하고(Lenski), 불특정한 다수를 과장적으로 서술하는 표현 양식이라고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Haenchen, Robertson). 아무튼 야고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이들은 소위 유대적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을 비롯한 각종 규례들을 소중히 여겨 지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울이 깨달은 바,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다음 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다.
=====21:21
모세를 배반하고...지키지 말라 - 바울을 비방(誹謗)하는 소문이 어떻게 떠돌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이러한 소문의 진원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전통에 철저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모세를 배반한다는 것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뜻한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배반했다는 것은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이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바 없으며 오히려 그는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보았고(롬 7:12)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인정하였다(갈 3:24). 다만 바울은 사람들이 율법 자체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들을 배격(排擊)하였던 것이다(롬 10:3).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주의 또는 완고한 유대주의에 매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엡 2:15). 또한 바울이 할례를 금하였다는 것도 전혀 터무니 없는 허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할례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으며(고전 7:18, 19;갈 5:6), 디모데에는 할례를 받도록 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들은 바대로 오해를 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며 이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21:22
어찌할꼬 - 야고보 및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신변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실은 이제 곧 다른 교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거센 공격조로 나올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21:23
서원한 네 사람 - 서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케'(* )는 '기도하다', '원하다'의 의미를 갖는 '유코마이'(* )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소원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서약이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것이다. 서원에 관한 자료는 구약성경에 많이 있으나, 그 기원은 알 수 없다. 서원은 주로 나실인의 서원과 관계되는데, 부모에 의한 서원이나(삼상 1:11), 본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서원이 있으며 서원의 기간은 영구적인 것이 있고(삿 13:7;삼상 1:11),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것이 있다(민 6:8, 12). 서원자는 서원한 것에 대해 반드시 신속하게 행해야 하며(신 23:23;시 15:4;전 5:4, 5), 남용하거나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잠 20:25;마 15:4-6). 또한 서원한 기간 동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으로는 독주를 마시지 말고 머리를 깎지 말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서원은 본인의 자유 의사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서원이라 여겨진다(Robertson). 서원에 관한 보다 자세한내용은 민 30:1-8 주제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21:24
결례를 행하고...머리를 깎게 하라 - 결례를 행하라는 것은 서원한 자들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서원 기간동안 지켜야 할 규범(23절 주석 참조)을 지키라는 의미이며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은, 결례 기간이 끝나는 날에 머리를 깎고 희생 예물을 드리는 때에 드는 경비(經費)를 부담하라는 말로 이해된다.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년 된 어린 암양 하나,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이었으므로(민 6:1-21) 그 비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자를 위하여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아그립바 I세가 가난한 나실인을 위해 이런 비용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Jos, Ant., XIX, 6:1). 바울에게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은 그의 재력으로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지키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어 그들의 오해와 노여움을 풀기 위함이었다.
=====21:25
우상의 제물과...음행을 피할 것을 - 이 내용은 일찍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결의되었던 것인데(15:20),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상기(想起)시키고 있다. 본문의 내용이 결의될 때 바울도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5:1-20) 그 내용이 여기서 문자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문의 내용이 주로 바울의 동료들에게 전달되기 위한 것으로 보거나 혹은 단지 독자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삽입된 표현이라 간주하기도 한다(H. Marshall).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정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볼 때 이번에는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신자들을 위하여 바울이 양보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21:26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대로 행하였다. 본문의 상황은 바울 일행이 서원의 절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친 후 머리를 깎아 제단 불에 던져 태운 다음(민 6:13-18) 제사장에게 서원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제기되었다. 바울의 행동은 율법주의자들과의 타협이며 그 결과는 실패였다고 본다(Furneaux, Calvin).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순종한 것 뿐이라고 본다(Bengel, Wesley). 바울은 그의 설교 전략 즉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는, 자신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같이 된다는 원칙을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본다(고전 9:20, Meyer, Weiss, Knowling). 바울은 일찍이 예루살렘에 올때 고난이 있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4, 10-14절;20:23),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13절). 그런 바울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율법과 타협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圖謀)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의 견해 가 타당하다고 본다.
< 설 교 >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행 21장 15~26절 / 정용섭목사
예루살렘 입성
가이사리아에서 며칠 묵은 바울 일행은 가이사리아의 신자 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 길은 100km 정도의 여정이다. 가이사리아 신자들이 바울과 동행한 이유는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묵어야 할 장소를 안내해 주는 데 있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키프로스 사람 므나손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누가는 이런 사실을 아무런 해석 없이 15,16절에서 보도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먼 데까지 바울을 데려다 줄 정도로 가이사리아 신자들의 성품이 꽤 괜찮았다거나, 또는 예루살렘에서 숙소를 구하는 일이 아주 어려웠는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약간만 돌리면 여기서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즉 곧 등장하는 야고보나 다른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는 가장 큰 목적은 곧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전달이다. 바울의 일행 중에서는 멀리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곧 모금 전달책임자들이었다. 이런 사실이 명백하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거 교회적으로 이들을 환영해야만 했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 일행의 숙식 문제를 도와준 이들은 그들이 아니라 가이사리아 신자들이었다고 전하고 있을 뿐이지, 예루살렘 교회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바울이 일행이 신세를 지게 된 곳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키프로스 사람 므나손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본문은 므나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1) 므나손은 가이사리아 공동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 2) 그는 오래된 신자였다. 3) 그는 키프로스 사람이었다. 가이사리아 공동체의 대표자가 필립보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므나손도 역시 헬라파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그가 바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바울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누가는 17절에서 예루살렘 신자들이 바울 일행을 따뜻하게 영접했다고 묘사했다. 이런 묘사는 주로 므나손 집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일종의 덕담이라고 보는 게 옳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바울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행을 보면 예루살렘 신자들이 바울을 별로 따뜻하게 맞아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히 마땅히 솔선해서 바울을 보호해주었어야 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건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관계가 아주 미묘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바울의 활동 보고
어쨌든지 바울은 이제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를 찾아갔다. 야고보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이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어긋난다. 이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어떻게 대답할는지 궁금하다. 야고보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공동체의 원로들이 모두 모인 그곳에서 바울은 인사를 한 다음에 자기의 활동을 보고했다. 19절 말씀은 이렇다. “바울로는 그들에게 인사한 다음 자기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해 놓으신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누가는 지금 바울이 행한 아시아와 유럽의 선교에 대해서 매우 간략하게 서술한다. 바울이 필립보, 데살로니카, 고린도 등등, 선교 성과가 특별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 참여한 이방인 공동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을만한데도 누가가 이에 대해 별 말이 없다는 건 의외이다. 특별히 예루살렘 모금 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관한 사도행전의 속사정을 언급하기 전에 저자인 누가가 처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좋겠다. 누가는 초대 교회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객관적으로 알리려는 게 아니라 일정한 집필 목적에 따라서 그 이야기를 편집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누가 앞에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여행일지’가 있으며, 또한 직간접적인 몇 가지 구전들이 있다. 이러한 몇몇 정보에 근거해서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누가 당시에 큰 세력을 형성한 헬라 기독교가 사도의 정통성에 위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변증하고 있는 중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와 원로들에게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 그들에게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 혹은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누가는 잘 몰랐으며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집필 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요소들은 과감하게 생략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호금 문제가 그것이다.
누가가 여기서 구호금 문제를 드러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이방인 사도인 바울과 주로 유대인 선교에 치중한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에서는 당연히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유대인과 율법 문제에서는 입장 차이가 적지 않았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 이 문제는 별로 심각하지 않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바울이 설명했듯이 기독교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가 예루살렘 사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울의 이런 주장은 너무 과격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고 있었으며, 유대교의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율법의 실효성을 여전히 버릴 수 없었다. 유대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이들에게 바울은 이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같은 형제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예루살렘 원로들의 태도
누가는 바울의 보고를 간략하게 처리한 다음에,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대답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짚었다. 예루살렘 원로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들에게 바울에 관한 나쁜 소문이 들릴지 모른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 소문은 바울이 율법을 배척하고 할례를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누가는 이런 대목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지만, 이런 건 듣기에 따라서 아주 민망한 발언이다.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으면 앞으로 협력해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을 텐데,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당신이 여기 온 것을 틀림 알게 될 터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22절). 만약 예루살렘 신자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면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그들을 설득하는 게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가 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대답하고 있다. 우리가 이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바울에 관한 나쁜 소문으로 인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힘들어 한다는 말은 곧 사도를 중심으로 한 원로들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일지 모른다.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유대인 전도가 끝장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또는 바울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박해가 확대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게 그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가 당면한, 그래서 그 공동체가 해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초기 기독교 역사의 이면일지 모른다.
어쨌든지 그들은 바울에게 이런 대안을 제시했다. 예루살렘 신자 중에서 하나님에게 맹세한 나실인 4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정결예식을 행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정결예식을 행할 수 있도록 바울이 옆에서 돕는다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는 바울에 관한 소문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안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궁여지책일지 모른다. 그들이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에 놓인 오해를 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바울을 자신들의 교권 밑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무엇이 진실인지 오늘 우리가 알 도리는 없다. 바울이 이들이 제안대로 정결예식을 행했다는 본문의 보도를 그대로 따른다면 바울이 이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뜨거운 감자, 구호금
바울이 야고보와 예루살렘 원로들 앞에서 왜 구호금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누가가 왜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앞서의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예루살렘 원로들이 바울의 보고를 받고 보인 태도에서 대답을 위한 어느 정도의 실마리는 주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구호금 문제가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문제에 당면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설령 구호금 문제를 거론했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도 지금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 원로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누가는 이런 사실을 감추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긴 하지만 그게 뜻대로 만은 안 된 것 같다. 바울이 체포당하고 심문당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원로들이 바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게 바로 그 증거이다. 바울이 생명을 담보하면서 복음의 열매를 거둔 이방인 공동체가 십시일반으로 모은 구호금에 대해서 예루살렘 원로들이 시큰둥하게 여겼다면, 누가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했을까?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울에게나 예루살렘 원로들에게나, 한참 후에 그 상황을 해명해야 할 누가에게나 똑같이 뜨거운 감자였다.
우리는 지금 그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변호하는 동시에 헬라파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으며, 바울의 편지들은 당연히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할 뿐이지, 실제로 예루살렘 공동체 입장에서 사건을 보도하는 문서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복음서까지도 예루살렘 공동체라기보다는 이방인 공동체 문서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기독교가 원래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시작되었던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와 다르다거나 크게 변질되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한정적인 자료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전승된 자료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꾸준하게 해석해나가는 게 최선이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
양향모목사 / 행 21:15-21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다가 잘못을 깨닫고 목사가 된 사람의 간증이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분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친구들의 소개로 공산당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공산당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를 했는지 그 책들이 한 방에 가득 쌓일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공산당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왜 공산당을 좋아하고 주사파가 되려고 하는가를 보았더니 백성들이 다 잘 사는 그런 사회를 위하기보다는 공산주의가 되면 자기들이 다 감투 한자리 하게 된다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런 운동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전향을 해서 더 이상 그들과 만나지 않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책을 보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더 많은 공부를 해서 그 사상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지식을 가져야 옛날 생각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배우고 알고 체험했던 것들은 항상 우리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다른 것이 들어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전에 배웠던 것 보다 더 많이 배우거나 더 많이 체험을 하거나 더 큰 확신을 가져야 옛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시작될 때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였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이고 유대교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 아주 핵심적으로 하신 일인데도 유대교가 기독교의 방해세력이 된 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조상대대로 수천 년 동안 배워왔던 율법과 제사와 각종 유대교 관습들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 율법에 대해서 성전제사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았고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도 바울은 결국 이 유대교인들에 의해서 결박을 당하여야 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유대교를 배반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까지도 바울을 비난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의 관습 때문에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과 사도 바울의 갈등관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 갈등관계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배우고 경험했던 고정관념들 때문에 율법에 열성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본문 15-20절에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반대하고 만류하였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소아시아지방과 유럽의 입구인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선교를 했습니다. 한번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난 후에 다른 도시에 갔다가 그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오고 다른 복음을 따른다는 소식을 들으면 또 그 도시를 방문하여 복음을 바로 전하고 믿음을 굳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대강 소아시아 지방과 마게도니아 지방에 복음이 정착되고 있음을 확인한 사도 바울은 이제는 전에 결심한 유럽의 중심지인 로마로 또 땅 끝이라고 생각한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패권국가인 로마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이 길은 험난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는 도시들을 다니면서 선교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로마는 다른 도시였습니다. 잘못하면 붙잡혀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에게는 그동안 자신이 한 선교보고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해 주셨음을 보고 함으로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유월절 절기를 택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 가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으나 아직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머물렀던 구브로 사람 나손은 오랜 제자라고 했습니다. 오랜 제자라는 말은 처음부터 제자가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던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예루살렘교회에 중요한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함께 한 형제들이나 장로들 역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행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다닌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신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저 심부름꾼이고 일꾼일 뿐이고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 바울 자신이 만든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이며 그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여서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보고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복음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은혜임을 알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
본문 20-21절에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했으면서도 율법에 열성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키는 것을 계속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을 그런 것들을 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모세를 배반하고 모세를 보낸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 언약을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상들을 통해서 특별히 모세를 통해서 주신 옛 언약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혼란이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서신에 수없이 반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그러면서도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며 믿음으로 인하여 율법은 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율법이 없었으면 우리가 죄인인줄 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율법에 비추어보아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그 뜻을 바르게 알고 율법을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가장 근본적이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줄을 깨닫고 그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대강령이라고 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죄의 흉악함을 아는 사람이 다시 죄를 짓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난 후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믿음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결국은 율법을 지켜야 되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되니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방법으로서는 이미 죽은 것이며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기능도 이미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도 못하고 우리를 정죄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그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면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과거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율법이 시키는 대로 하면 살고 율법을 어기면 죽어야 하는 종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율법 때문에 죄의 종이 되어야 했고 죽음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자유를 주셨습니다. 율법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율법에서 죄에서 죽음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자유입니다. 율법이 시켜서 율법이 우리를 억압해서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한 일을 하고 바르게 살려고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보람된 삶을 위해서 내가 선택해서 내 스스로 착하게 삽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착하게 사는 것이나 교회에 충성을 하는 것을 억지로 하면 그것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람된 일인 줄 알고 스스로 하는 것은 자유인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자진하여서 착하게 살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 왔던 생활 습관 때문에 과거의 일들을 버리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놓지 않고 얽매여 있는 것은 우리들도 그들처럼 종교애 대한 고정관념들을 버리지 못해서입니다. 우리의 유교가 유대교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불교나 무속신앙도 우리가 복음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인들입니다. 고행을 해야 하고 신비한 일을 행해야 복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따르지 못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율법에 사로 잡혀서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유사 종교와는 전혀 다른 진리의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너무나 귀한 진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종교적 관습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선한 일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오래된 제자
유민용목사 / 행 21:15-26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묵고 바울과 그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62마일(100km) 정도 됩니다. 당시에 62마일의 거리는 건강한 성인이 짐없이 걸어도 쉬운 길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0:4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날 때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까지 총 7명이 동행했습니다. 이후 마게도냐에서 누가가 합류했으니 8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이사랴 있던 제자들까지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바울을 포함해서 십여명이 넘는 일행들이 모두 나손의 집으로 갑니다. 개역개정은 나손이 함께 동행한 것으로 번역했는데, 쉬운성경은 나손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당시 나손의 나이를 70세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가 한평생 예수의 길을 따른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일찍부터 제자가 된 나손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가 되었거나,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인 것으로 볼 때에 AD 33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키프로스, 안디옥, 페니키아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을 때 (11:20) 그 무렵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것을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이 침해 받지 않는 범위를 정해 놓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는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옛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도 바울을 반박하기 위한 무리들이 도사리고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10여명이 넘는 바울과 일행들을 머물도록 한 것을 보면 바울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손은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예수께로 온다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듣기만 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단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것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고 평생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구도자입니다. 나손이 아마도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 이것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믿음생활에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 사랑은 섬김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지요.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는 믿음입니다. 당시 유대적 경향은 헬라파 교인들의 접대를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손은 주위에 시선보다는 바울과 일행들에게 섬기는 일을 통해서 주님의 따뜻한 품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손은 예수의 오래된 제자로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9월이면 많은 청년들이 배움의 길을 걷기 위해 보스턴으로 오게 됩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겠지만 익숙했던 지역을 떠나서 새로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학업이라는 큰 산을 넘는 일도 생각해 보면 만만치가 않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도 만나게 되겠지요. 낯선 땅에서 새로움을 직면하는 일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한가지는 조국과 세계를 섬길 인재를 배출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해 온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내는 일에 오랜시간 집중해 왔습니다.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속에서도 교회와 목사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는 눈물의 기도로, 누군가는 기쁨과 성취로, 누군가는 묵묵히 주는 사랑으로 이땅에서 보내게 되는 여정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껏 이 땅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학업의 길에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좌절감을 딪고 일어 날 수 있도록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게 되면 모든 소유가 주님으로 부터 온 것을 깨닫습니다. 섬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때 비로소 시작이 됩니다. 섬김은 우리가 할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수 있습니다. 형제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미소짓고,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섬김입니다. 섬김은 성도들이 행할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18 다음날, 바울은 우리를 데리고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19 서로 문안인사가 끝나자,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이루신 크고 놀라운 많은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바울은 그동안의 전도 여행의 경과를 보고합니다. 2년여 동안의 에베소 지역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제자 양육한 사역, 에베소 지역에 일어났던 엄청난 회개운동, 아데미 신상으로 인한 소동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의 사역들, 드로아에서의 유두고 사건, 밀레도 항구에서의 장로들과 뜨거운 눈물의 시간들, 두로 지역에서 만났던 아가보의 예언과 만류하는 이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등을 보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에 보면 바울의 보고 속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로 부터 모금해온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20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바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듣기로는, 당신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이며, 우리 유대 사람의 관습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합니다. 22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 유대인 형제들은 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오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파송하고 이제 20여년의 세월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는 성도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20절을 보면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탄생한 교회에 성령의 열매보다 율법과 할례에 진심인 사람들이 수만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했지만 교회 내부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려는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보니 교회의 사정은 신앙의 문제로 갈등이 생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지런히 달려와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는데 교회 내부에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비방하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배척하고 할례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할례나 율법의 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20년 전에 유대로 부터 온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이 이방인에게도 율법준수와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쳐서 당시에 바울과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일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했던 사항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롬 2:25-29)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풍속인 율법도 할례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과 할례로 인해 의견이 갈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던 야고보는 사도 바울에게 방법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자비를 들여 서원예식을 구약의 율법대로 시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제안을 순순히 허락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굽힙니다. 바울은 이전에 율법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는 복음의 능력을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너머의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때 자신을 비방하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도 있었지만 비난하는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야고보의 제안에 자신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복음은 진리 안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논쟁하기 보다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믿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를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주께서 먼저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도들의 충고를 들었고,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온유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명은 담대하고 강하면서도 때로는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않도록 해줍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속에서 의견이 불일치 될때가 있지요. 분쟁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사람들의 편이기 전에 주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시고 십자가의 피 흘리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셔서 고통을 참으신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 안에 있을 때 교회가 하나가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원리를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할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구원받은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십시요. 바울처럼 옳은 방향으로 가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랑해 주신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장 좋은 길, 옳다고 믿는 길을 찾아서 보스턴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를 직면하는 것이 이 경험의 토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당시에 모든 이들은 십자가 처형을 피하고 싶고,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는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쉼을 얻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공동체를 통해서 경험하시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배움의 가치를 제자됨에 두었습니다. 교회안의 여러 은혜의 모임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풍성해 지도록 믿음의 기초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세상보다 크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수고를 아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두면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이 걷고 있는 길에서 우리는 나손을 통해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오해를 넘어 주의 사랑을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의 빛이 밝히 비춰집니다. 취약한 이들에게 내 소유를 내어 주는 믿음의 모험에 참여해 보십시요. 주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한주도 여러분이 걷는 그 길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제자입니까?
행 21장 15~16절 / 유영설목사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문명의 혜택을 누려온 유럽과 북미에서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아프리카와 남미, 동남아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지역은 점점 신앙의 힘을 잃어가고 교회는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면 그리고 진실한 제자로 살았다면 그렇게 교회를 이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3년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이 12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승천후 놀라운 열매를 맺으며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며 기독교의 생명력을 가졌던 이들은 떡을 먹으며 즐겨 따라다니던 수천 명의 군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제자의 길을 걸었던 몇 사람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제자는 예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근의 신앙형태는 사람이 교회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교회, 자신이 좋아할 만한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현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생각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은 사명이 되고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동기가 됩니다.
최근의 사회경향은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올바른 길에서 이탈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윤리, 도덕과 함께 강제성을 띤 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무조건적인 자율성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려 할 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그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부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일5:17)
2. 제자는 예수님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무엇에로, 누구에로 부르셨습니까? 바로 당신 자신에게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삶에 헌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그분께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순종 합니다. 순종은 제자로서의 삶에서 적극적 신앙의 모습을 말합니다. '아니오' 나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신앙의 삶입니다.
물론 이런 적극적 신앙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지 않고 순종하는 적극적 신앙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참된 쉼과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 발걸음은 세상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힘을 다하여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분을 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삶의 내용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교회에서 말하는 말씀이 이상에만 그치고 삶의 현장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 들립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 기억해야 합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생기가 그들에게 임하자 큰 군대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오래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손을 표현할 때에 "오랜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12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 그것도 일부분이나 삶의 한부분만이 아닌, 오랜 시간동안 주님을 따랐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된 제자란 두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로, 오랜 제자는 첫사랑을 간직한 성실한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중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잊어버린 교회"였기에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리면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잊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형식적이 되고 권태로움이 몰려 옵니다.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로, 오랜 제자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 훌륭하게 삶을 가꿔온 이가 한번에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흠이 없이 오랜 세월동안 주님을 따랐던 나손은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의 오랜 제자이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둔 변하지 않는 오래된 제자로 서시기 바랍니다. 부름 받은 주님의 제자로 신앙과 삶의 모범이 되고 격려와 용기, 힘을 불어 넣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바울
행 21장 15~26절 / 김영규목사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한 바울
가이사랴에서 얼마간 체류한 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15-16)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km 정도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며칠간의 도보 여행을 위해 여장을 준비했습니다. 숙박이나, 간단한 노숙을 위한 의복이나, 음식, 식수 등을 준비했을 겁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나손이라는 제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나손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지만 단지 오래된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오래 된 제자란 처음부터 믿은 사람, 경력 있는 신자란 뜻입니다. 아마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 멤버, 즉 오순절 날 모였던 120명 중 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바울이 나손을 알게 된 것은, 가이사랴에 머무는 동안 성도들의 소개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혹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그의 안내를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며칠간의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17-18) 야고보의 이름이 언급되고, 다른 사도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많은 사도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고, 혹은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여기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 동생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만, 후일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12:17,15:13, 갈2:9)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야고보를 소개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갈2:9) 바울은 이런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형제들 앞에서의 간증
바울은 먼저 자신이 이룬 전도의 열매들에 대해서 간증했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9-20상) 바울이 간증을 한 사람들은 야고보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아마 일반 성도들 앞에서는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낱낱이 얘기했습니다.
간증은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혹은 지도자들은 상당히 큰 피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음 장면에 나옵니다만,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사도들과 교인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율법을 지키는 문제로 시비를 걸고, 복음으로 나아가는데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럴 때에 바울의 간증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고, 힘이 되었습니다. 처음 안디옥교회가 복음을 받았을 때에는, 예루살렘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안디옥까지 내려와서 오순절의 역사를 간증하면서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바울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간증으로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중요한 목적인 구제금 전달 얘기가 없습니다. 애당초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 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제금 전달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사도들을 만나보고 위로한 후에, 로마로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구제금 전달 얘기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복음 전파얘기나, 혹은 바울 앞에 다가오는 큰 위기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니까, 헌금 전달과 같은 얘기는 오히려 사소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간증, 즉 복음전파 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서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얘기해 줘야 합니다. 첫째로, 전도적인 간증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항상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심문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재판장이 말할 기회를 주었을 때,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예수 믿게 된 과정을 얘기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붙잡으러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변화를 받고, 어떻게 전도자가 되었는지? 그 일을 위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간증했습니다. 바울의 얘기를 들은 아그립바 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 죄수가 변명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재판장에게 전도를 합니다. 재판장이 볼 때는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우리도 그렇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짤막하게 잘 정리해 두세요.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지, 누가 신앙에 대해서 물으면 조리 있게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하는 간증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라고 항상 독야청청 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도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도 고난을 당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중 믿은 사람이 오히려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얘기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얘기함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든, 나중 믿은 사람이든 간증에는 선후배가 없습니다. 누가 성경을 더 많이 알고, 교리를 더 많이 안다 해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얘기하는 것은 똑 같습니다. 오늘 내가 받은 은혜를 숨겨두지 말고 서로에게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오해에 직면한 바울
다음 부분은 바울에게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후로 지속되는 주제입니다.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20-22)
예루살렘에 믿는 사람이 수 만 명이 있었습니다. 큰 박해 중에도 복음이 꾸준히 전파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일,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을 가려 먹는 일, 손을 씻는 성결의 관습, 성전에 대한 규칙 등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 해도, 죽이려 할 정도로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소문은 악의적인 유대인들이 퍼뜨린 것이고,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에 그들의 증오심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오해는 한 마디로 모세의 율법을 버렸다는 겁니다. 모세를 배반했다는 말은 모세의 율법을 배척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음식과 같은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반 이방인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16:3)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의 구원 진리를 전파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방인이 예수 믿을 때에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권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들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18-20)
오늘 우리도 얼마든지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다수가 오해를 할 때, 집단적 오해에 직면할 때, 난감합니다. 그러나 분노하지 마세요. 당황하거나 낙심하지도 마세요. 오해는 항상 있습니다. 그 오해를 극복하고 이기는 것이 성도들의 능력입니다.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은 바울이 당하는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
바울이 율법을 존중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여줍니까? 마침 예루살렘 교인들 중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이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무슨 도움을 줍니까? 첫째는 그들의 성결 예식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둘째는 그들의 성결 예식 비용을 부담하라고 합니다. 대개의 서원은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이 서원에 대해서는 18장 18절에서 자세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서원의 기간은 다양합니다. 일반인들의 경우 보통 8일 정도의 약정 기간이 있습니다. 좀 더 길게 하면 한 달 정도입니다. 이 약정 기간 동안에는 자신을 제어하는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제어, 자기 통제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머리나 수염을 깎지 않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시체나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습니다.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이 서원 기간이 끝나면 일정한 의식을 거행합니다. 서원 기간 동안 깎지 않았던 머리를 깎아서 제단에 태웁니다. 하나님께 정한 몇 가지 제물을 드립니다. 제물은 일 년 된 수양 하나를 번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암양 하나를 속죄제물로, 화목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을 바쳤습니다.(민16:13-20) 가난한 사람에게는 제물의 비용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런 서원자들의 제물 비용을 대신 내주는 것을 아주 큰 자선으로 인정했습니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이런 서원 제물을 대신 내주는 중요한 자선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바로 이런 제물 값을 대신 내주라고 했습니다.
이런 제안에 대해서 바울은 흔쾌히 응락했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행21:26) 바울이 왜 이런 율법적 행위를 했을까? 이런 율법적 행위들은 복음과 상반되는 일이 아닌가?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과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복음 전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괜히 사소한 일로 시비를 하는 바람에 전도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사람들과 시비를 벌이지 마세요. 다투지 마세요. 언제 그 사람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둘째로, 그 일이 신앙의 본질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구원과 별 상관 없는 일입니다. 할례 받는다고 영적 유익도 없고, 안 받는다고 손해도 없습니다. 음식을 가려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려 먹는다고 더 성결해 질 일도 없고, 가려 먹지 않는다고 부정해 질 일도 없습니다. 음식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고전8:8)
셋째로, 복음 전파가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만 있다면, 내가 한 두 가지 별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순교까지 각오했는데, 오해쯤이야 문제도 아닙니다.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오해가 풀리든지, 안 풀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을 당해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영혼을 얻기 위해 용기 백 배 하여 계속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선교 정책
행 21장 15~26절 / 신성종목사
초대 교회를 보면 교회가 바로 선교 자체였고, 선교가 바로 교회의 본질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들은 선교를 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 교회도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온 교인들이 함께 선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나 다 선교하면 부흥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만 그러나 선교를 등한히 하는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의 선교 정책을 살펴보면서 앞으로 우리 교회의 선교정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찾아보면서 선교를 통해서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가 복을 받고, 우리민족이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선교에 가장 큰 성공을 한 인물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적으로 이론화 하였고, 세계적으로 전파한 사람입니다.
1. 바울의 선교는 먼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였다”(행21:19절)고 했습니다.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순종해야 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간증해야 합니다. 예수님 자랑이 바로 간증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은 선교의 주역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주역은 교회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닙니다. 바로 성령이 선교의 주사역자입니다. 우리는 그의 도구일 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이냐 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역사한 것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였습니다.
주님은 행1:8절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는 베드로와 그 밖의 사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방인 전도에 임했습니다 .
그것도 처음에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전도했으나 성령이 금하시고,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인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본 후에는 유럽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결과적으로 유럽을 복음화 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선교정책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자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길을 열어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선교를 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자가 사람이 아니고, 성령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선교의 주인이 되시고, 지도자가 되셔야 합니다.
지금 이민교회에서는 주로 단기선교를 많이 합니다.
재정적인 문제와 함께 교회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저는 단기 선교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유는 선교의 연결고리가 없을 뿐 아니라 단회적 사역이기 때문에 선교의 깊은 곳에까지 취급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기 선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미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연결고리는 이어져 있기 때문에 단기 선교는 선교의 도전과 교육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선교의 부분 전술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는 우리 자녀들에게 선교하려는 마음을 넣어주는 교육적 측면에서 단기선교를 강화하겠습니다.
선교의 최고의 방법은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달란트와 자원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교회 7층 건물에 생겨질 노인 복지 센터를 중심으로 노인들의 선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놓은 곳으로 들어가고 행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제가 쓴 망원경식 성경연구를 중심으로 제자훈련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2. 바울의 선교정책은 먼저 선교의 장애물인 오해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의 내용이 21절에 나옵니다.
(1)첫번째 오해는 [모세를 배반 했다]는 것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을 무시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장애물 이었습니다. 롬10:3절의 말씀처럼 율법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를 배격하였던 것이 이런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2)바울의 두 번째 오해는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할례를 디모데에게 받기까지 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도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결례를 행하도록 모든 비용울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할례에 구원을 위한 어떤 가치를 인정치 않았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갈2:3절에 보면 바울은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게 했습니다. 왜 바울은 이랬다 저랬다 했을까요?
사실은 바울은 이랬다 저랬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례가 구원의 근본이라고 주장할 때는 복음의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디도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과의 좋은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3)바울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조상들의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반대 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 자신들의 관습을 강요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사도회의에 제출하여 다루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사도행전 15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규모는 장로들의 유전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템풀 대학에서 랍비에게서 유대인들의 규모, 즉 유전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전은 크게 두 가지 책으로 나와 있는데 첫째는 [미쉬나]란 책입니다. 둘째는 [탈무드]란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조상들의 규모인 전통을 어떤 때에는 성경보다 실질적으로 우위에 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안식일을 위한 규례들입니다. 물론 이 전통들은 중요 하지만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사용해야지 그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때때로 비판적인 입장에 서있었던 것이 사실 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선교 장애가 무엇입니까? 선교는 교회가 성장했을 때에 하는 것이란 오해 입니다. 또 선교는 시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교는 특별한 교회나 특별한 사람이 한다는 오해 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바로 선교 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주간에 우리 노회 주간으로 가지는 타일랜드에서의 선교 대회에 노회 장으로 갑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타일랜드는 불교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가보면 기와장이 뱀의 비늘 모양으로 되어 있고, 뱀들을 섬기는 경우가 많은 나라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기도로 이번 선교에 동참하여 주셔서 선교 대회가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은 선교의 장애물인 오해를 제거하는 소극적 방법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다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서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 15:20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잘 가지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를 모여서 네 가지의 규정을 정한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관계에 결정적인 장애물을 없애려고 결정한 것입니다. 결코 구원문제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 결정은 잠정적인 것이지 영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영구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을 율법 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1)첫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말합니다. 물론 바울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하도록 맡기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한 것은 혹시나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신앙까지 빗나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먹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가는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에서도 알 수 있고, 오늘날에는 술과 마약과 파티가 끼치는 영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먹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영어에 [ You are what you eat ]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는 대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2)둘째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금지하고 있습니다.(창9:4-6 ; 레17:11). 왜냐하면 피는 구약에서는 생명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레17:11절). 요즈음 테러 사건 이후에 헌혈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도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수혈도 헌혈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피란 말은 구약에 400번 이상 나오고, 신약에는 100번 이상 나옵니다. 물론 피는 생명의 동의어 이긴 하지만 생명자체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피의 용법을 보면 대개가 폭력에 의한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에 피를 타부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만지는 자가 부정해진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번제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그 동물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바친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아니라 그의 생명이 우리들을 위해서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피는 죽음보다는 그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3)셋째는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목매어 죽인 것을 먹으면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개를 잡을 때 과거에는 목을 매어서 잡았기 때문에 그래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를 잡을 때 목을 매어 잡지 않습니다. 이 말은 개고기를 먹으라든지 먹지 말라든지 하는 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개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먹지 않습니다. 지난번 볼고그라드에 갔을 때에도 저 혼자만 먹지 않았습니다.
(예 화) 왜 나는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게 되었는가?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했을 때 노회원들의 권고로 먹게 되었습니다.(A)목이 쉬지 않고, (B)양들을 잘 지키려면 먹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 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먹었지만 설사가 심해서 더 먹지를 못해 아내와 나는 기도원에서 개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밤새 기도 후에 새벽에 내려와 논산 식당에 가서 먹으니 설사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강아지 생각으로 먹지 못한다)
(4)넷째로 [음행을 멀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음행은 십계명에도 어긋나고, 가정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는 음행은 남자들이 돈만 있으면 버젓이 할 수 있는 쾌락이었습니다. 이 음행에는 영적인 음행인 우상숭배와 육적인 음행인 간음이 있습니다. 혼전 성관계나 혼외정사는 다 음행에 속합니다. 성도들은 이 음행을 멀리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선교는 이런 모함과 위험이 항상 따릅니다. 지난 수요일에 페루의 양 주림 선교사가 다녀갔습니다. 알젠틴에서 선교하는 박 성흠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저의 망원경식 성경연구를 스페인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5천불, 스페인어로 번역하는데 5천불, 그래서 제정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저는 바울의 선교방법대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할 예정 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를 부탁합니다.
교회적으로는 금년에 세 번 단기 선교하고 맙니다만 그러나 저는 혼자서라도 계속해서 선교하려고 합니다. 다음 주간은 물론 11월에 두 번 선교에 임할 것입니다. 내년에는 이 선교를 위해서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맺는 말
선교는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세계를 보면 미국이 가장 잘 살고, 다음이 유럽이고, 그 다음은 오스트라리아가 2천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 하였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한 순서대로 잘 삽니다.
러시아를 가보면 중국보다도 못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고, 제일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데 왜 못 삽니까? 선교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제정 러시아가 많은 신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교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공산화되었고, 지금도 선교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거지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선교를 등한히 하면 결국 망하고 맙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선교를 등한히 하면 결국 망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너무도 축복하셨습니다. 일제 36년 동안 연단하시다가 8.15때 은혜로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안 차리니까 6.25를 통해서 정신 나게 하시다가 유엔군을 통해서 지켜 주셨습니다. 월남을 비롯해서 주변의 나라들이 많이 공산화 되었지만 우리를 지켜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교를 하라는 뜻입니다.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하였지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는 한국에 있습니다. 감리교가 영국에서 시작하였지만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도 한국에 있습니다. 게다가 새벽기도가 있는 나라는 한국이요, 철야기도를 하는 나라도 한국이요, 기도원이 제일 많은 나라도 한국입니다. 이렇게 복을 받았는데도 선교를 게을리 하면 우리는 받은 복도 다 잃고 말 것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국가도 선교를 안 하면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도 선교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복음 전도의 길
행 21장 17~40절 / 이동휘목사
1. 바울은 지금의 터키 지역 다소에서 출생한 자로, 당대 최고의 율법사인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대해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그에 대한 증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한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이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행22:3-8)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바울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사명을 받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1차로 전도를 시작한 곳이 안디옥을 비롯하여 구브로 섬을 거쳐 지금의 터키 여러 지역들이었습니다. 이 지역들은 모두 소아시아 지역들로 AD46-48년까지, 약 2,3년에 걸쳐 전도했습니다.(행 13:4-14:28) 그리고 제 2차 전도는 AD49-52년까지, 약 3,4년에 걸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첫 유럽 지역인 마게도냐와 지금의 그리스 지역, 아덴, 고린도 등과 역시 소아시아 여러 지역들에서 이루어졌습니다.(행 15:36-18:22) 이어 3차 전도는 안디옥, 갈라디아, 에베소(두란노), 마게도냐, 예루살렘, 마게도냐, 빌립보, 사모, 구브로, 가이사라, 예루살렘 등으로 AD53-57년까지, 4년여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행 18:23-21:14) 사도 바울은 이렇게 3차 선교 여행을 마쳐 가고자 예루살렘으로 출발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가까이 두로에 머무는 동안 그곳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말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21:13)..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 바울 예루살렘에서 결박되어 핍박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을 향하던 중 또 한 번 가이사랴에서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복음 전도자 빌립(초대교회 7집사 중 하나)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선지자 아가보가 찾아와 수난을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음으로서 바울이 그처럼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행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그러므로 바울을 사랑하고 아끼며 염려하는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던 것입니다.
(행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그러나 믿음의 형제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하였음을 선언합니다.
(행21:13-14)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20:18-31)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예수 믿는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설사 고난과 핍박이 기다린다 해도 성령의 매인 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사도 바울은 여러 성도들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극구 말렸지만, 그것은 성령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예고(豫告)이지,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아주 험악하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먼저 바울과 그 동료들이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뜨겁게 맞아들였습니다. 도착한 그 이튿날, 야고보와 장로들과 만나서 그가 선교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 일어났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인 야고보와 그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 대단히 걱정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믿지 않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안전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증오하고 비난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행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 지역에 전도하면서 그곳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말을 따르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이건 바울은 가능하면 유대인들에게 먼저 갔고, 그 다음에 헬라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이 아닌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불가피한 경우, 즉 회당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된 소문은 바울의 적들이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자기 자신을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빌3:5-6)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한 마디로 정통 유대인, 정통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그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니니 상당수 유대인들이 바울을 율법을 배신한 자로 몰아 호시탐탐 죽여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곧 바로 거짓 소문, 요즈음 말로 가짜 뉴스(Fake News)를 퍼트려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Fact)은 사도 바울이 전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하거나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장로들이 모여, 이 ‘가짜 뉴스’, 거짓 소문으로 바울이 엄청난 핍박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책을 세우게 됩니다.
(행21:22-26)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바울, 당신이 여기에 온 것도 그들이 알게 될 것이 뻔한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하십시다. 우리 중에 하나님 앞에 서약한 네 사람이 있으니 그들과 함께 가서 정결 의식을 행하고 바울 당신이 비용을 들여 그들이 머리를 깎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고, 당신도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란을 피하라는 우리의 결정을 이미 편지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서원한 사람 4명이 있는데, 이들은 율법의 규례에 따라 정결케 하는 의식을 치루고, 머리를 깎아야 하는 절차가 있는데 그 일을 바울이 직접 그들을 데리고 가서 그 결례의식을 행하고, 그에 대한 모든 경비를 바울이 부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대적들이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튿날 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의식을 행하고, 성전으로 들어가 정결 의식이 끝나는 날과 각 사람이 예물 바치는 날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예식에 드는 상당한 비용을 바울 자신이 부담했습니다. 그러나 칠 일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우리를 도우십시오. 이 사람은 어디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성전에 해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방인 헬라 사람까지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습니다.” 바울을 증오하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지독한 편견 속에 바울이 드로비모라고 하는 에베소 사람(이방인)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함을 질러대며 선동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하여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내어 은밀한 곳에 감금하고 바울을 폭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성소를 분리하고 있는 벽에는 큰 팻말이 있었고, 거기에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성소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사형에 처한다.”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어떤 이방인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고, 또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고, 그들이 나가자 문이 닫혔으며, 그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의도로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행21:29-31)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 이러한 사건으로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주둔군 천부장에 보고되자, 로마군 경비대의 장교인 천부장은 군중을 보고서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가 즉시 부하들을 거느리고 현장에 달려가자, 폭도들이 로마군 부대장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 바울에게 폭행하던 것을 그쳤습니다. 천부장은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묶게 한 후,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대답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그들이 외쳐대는 소란 때문에 진상을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부대 안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이 층계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이 너무 난폭해져서, 군인들이 바울을 메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선동된 군중들은 계속 뒤따라가며 그를 없애 버리라고 외쳐댔습니다. 군인들이 바울을 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할 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천부장이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헬라어를 압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켜 4,000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그 애굽인이 아니오?’ 이같은 추궁은 그에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A.D. 54년경 한 애굽인 거짓 선지자에 의해 예루살렘에 반란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스스로를 위대한 선지자로 자처한 이 애굽인은 추종자 3만여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 광야와 감람산 등에 웅거(雄據)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파괴 및 로마군의 멸망을 예언하며,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였습니다. 천부장이 4,000명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 3만여 명 중에 자객으로 선별된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로마 총독 벧릭스(Felix, A.D. 52-58)의 군대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이 애굽인 거짓 선지자는 감쪽같이 도망감으로 해서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의 질문은 바울이 바로 이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 난 유대인이며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에 서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후,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히브리말로 말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 22장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를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자기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전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한 정통 유대인으로, 당대 최고의 율법사인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대해 열심이 있는 사람, 율법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이었고, 이에 대해서는 당시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그에 대한 증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한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이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고 말씀하시었습니다.(행22:3-8)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고 증거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행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사명을 받은 바울이 핍박과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은 바로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라고 자신이 고백했던 대로 주어진 모든 상황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 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 넣어라” 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바울은 ‘잡힌 바’된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는 자기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언제 어디서나 전도했습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되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음을 고백하며, 그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에베소서1:3-6입니다.
(엡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베드로 사도 역시 성도 여러분을 선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2:9입니다.
(벧전2:9)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장차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파에 전심전력을 다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잃어버린 예루살렘교회
전승문목사 / 행 21:17~26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생만 기회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기회입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회가 남아있을 때 붙잡아야지 붙잡지 못하면 영영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기회라는 겁니다.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도 지나가는 겁니다. 가정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 때 가정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복된 가정을 이루어내야 하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때가 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입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무너진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때는 대단한 교회였는데 한때는 엄청난 교회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건 나라도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민족도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도 천지만물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해서 천지는 장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천지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자연은 그 수명의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늘도 오염되고 땅도 오염되고 바다도 오염되고 이제는 공기와 물도 다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이래저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기회가 끝나가고 있는 겁니다. 말세지말! 세상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이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은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라고,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겁니다. 그래서 맡기신 겁니다. 인생을 맡기고 가정을 맡기고 교회를 맡기고 나라를 맡기신 겁니다. 구원하라고, 살리라고, 그리고 끝을 준비하라고, 종말을 대비하라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 66권이 다 그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도 다 그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오신 겁니다. 구원하시려고, 끝을 준비시키시려고, 종말을 대비시키시려고 오신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왔었지만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찾아오셨지만 끝내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땅 끝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먼저 복음을 받은 민족이지만, 가장 먼저 주님을 맞이한 나라지만, 끝내 세상의 끝이 돼버리고 만 겁니다.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인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 것에는 예루살렘교회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예루살렘교회, 그 교회만이라도 제대로 빛을 발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라도 단 10명의 의인만 있었다면 멸망시키지 않으셨을 분이신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교회 그 한 교회만이라도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면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스라엘은 땅 끝이 아니라 땅의 중심 복음의 중심 구원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라! 모세의 나라! 수많은 선지자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나라! 그리고 주님이 오신 나라! 가장 먼저 선택받은 민족! 그 민족이 그 나라가 멸망하고 만 겁니다. 사실 예루살렘교회는 큰 은혜를 경험한 복 받은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눈으로 본 교회이며 120명의 성도들이 오순절에 뜨거운 성령의 불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또한 5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도한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들은 교회이며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던 정말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은혜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줄어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인은 숫자적으로는 거의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교인이 수만 명이나 있었다고 했습니다 :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그랬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교인 수가 수만 명이 넘는 아주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출석교인의 숫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오순절이 가까운 시기였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나고 오십 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유월절 직후였던 겁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로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당시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유대인들이 백만명에서 이백만명 정도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마침 그 시기였던 겁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물론이고 세계각지에서 모여들었을 때였던 겁니다. 그 중에 몇 만 명이 기독교인들이었던 겁니다. 아무튼 당시에 예루살렘교회에는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신도들 중에 바울을 이해하고 바울과 함께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게 기막힌 겁니다. 그토록 많은 성도들이 있었지만 바울의 편에 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야고보를 비롯해 교회의 장로들까지 바울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바울이 옳다는 것을, 바울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바울의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편도 바울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 그들의 생각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각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더 중요했던 겁니다. 진리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겁니다. 그러니 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경험한 교회라도, 아무리 많은 신도가 있는 교회라도 이러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복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가 중심이면 그 교회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내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아무도 진리를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니까, 복음을 증거할 사람이 바울밖에 없었으니까 보내신 겁니다. 비록 그 길이 마지막 길이라 하더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던 겁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기는 대략 AD 60년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AD 70년에 멸망을 당했는데 바울이 그 10년 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여정은 바울의 마지막 여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교회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번만이라도 바울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다시 회개하면 예루살렘교회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한 분,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였고 나눌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정말 최고의 부흥사가, 최고의 선교사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겁니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방문한 겁니다. 그러니 잘 받아들였다면, 잘 모셨더라면, 제대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게만 되면 정말 예루살렘교회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바뀌었을 겁니다. 땅 끝 이스라엘이 아니라, 땅의 중심 복음의 중심 구원의 중심 이스라엘이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그대로 제사장 나라로, 만인구원을 위한 거룩한 나라로,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또다시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 위대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던 그 기회를 놓쳤던 나라가, 끝내 성령충만한 사람 사도바울의 복음마저 놓쳐버리고 만 겁니다.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집에 머물던 바울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Μνάσων)은 바울을 위해 예루살렘까지 직접 동행했습니다. 바울의 이번 여정은 참 평안하고 복된 여정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와도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고, 오는 여정 내내 참 평안하고 복된 여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걸어왔던 길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여정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여정에서는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고, 눈물의 축복을 받고, 어디에서도 받지 못했던 사랑과 위로를 받고,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순조롭게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바울이 경험한 놀라운 일들을 하나하나 말씀했습니다 :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 가운데서 행하신 일을 낱낱이 말씀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세 번의 전도여행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했는지 낱낱이 다 말씀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빌립보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고린도교회는 에베소교회는 또 어떻게 세워졌는지, 얼마나 큰 은혜가 있었는지를 낱낱이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였을까요?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였을까요? 그날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의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정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날 그 이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모금한 거액의 헌금을 전달했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조금만 열었더라면 진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너무너무 좋은 기회였던 겁니다.
하지만 야고보와 장로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그들은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단 한마디의 칭찬도 없었습니다. 또한 이방의 교회들이 정성껏 모금한 헌금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누가가 보기에는 성경에 기록할 만큼 진심어린 감사도 진정한 칭찬도 아니었던 겁니다. 아주 꼼꼼하게 모든 여정을 기록한 누가가 그런 그들의 진심을 빼먹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하신 일은 흘려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이, 이방의 교회들이 정성껏 모금한 헌금은 성의 없이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관심을 갖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그들의 관심은 오직 그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이 바울이 온 것을 듣게 될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큰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그러니 큰일이라고, 바울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고, 염려하는 겁니다. 기가 막힌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흘려듣는 그들이, 하나님의 생각은 외면하는 그들이, 사람들의 생각에는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그야말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더니 기껏 내놓는 해결방법이 참 어이가 없습니다 :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교회 성도 중에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이 4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대라는 겁니다. 나실인의 서원을 마칠 때는 여러 마리의 양과 여러 종류의 음식을 제단에 바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사실 적은 금액이 아니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 중에는 가난한 서원자들을 위해 그 비용을 대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 칭찬하고, 훌륭한 일을 했다고 인정하곤 했는데, 바울에게 그걸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칭찬할 테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이 바울도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인정해줄 테니까,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이것은 누구를 위해 하라는 것일까요? 주님을 위해 하라는 것일까요? 복음을 위해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율법에 사로잡힌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밉보이지 말라고, 그들에게 책잡히지 말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더니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자신들도 안다는 겁니다. 율법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들도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 따로 편지를 보냈다는 겁니다. 율법을 다 지킬 필요는 없고 그저 몇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편지를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는 주를 믿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그렇게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주를 믿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바울이 양보해달라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온 바울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바울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요구니까, 야고보와 장로들의 결정이니까,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루살렘교회는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망한 겁니다. 교회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고... 교인이 수만 명이나 있었지만, 세상의 빛도 세상의 소금도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끝내 땅 끝이 돼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어떨까요?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온전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까요? 바울 당시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기회였다면 지금은 인류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끝 말세지말입니다. 대환난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 기도할 수 있는 기회, 다시 성령 충만할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됩시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 한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 됩시다.
타협(妥協)인가? 전략(戰略)인가?
행 21장 17~26절 / 서금석목사
어느날 한 사람이 스펄젼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교회마다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왜 이렇게 갈등이 많습니까? 문제없는 교회, 갈등없는 교회를 저에게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 말에 스펄젼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형제여, 이 땅에서 그런 교회를 만나게 되면 내게도 소개해 주시오. 당신이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그런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소. 그러나 만약에 형제가 그런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면 형제도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마시오. 나도 그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겠소. 왜냐하면, 형제나 내가 그 교회에 가는 바로 그때부터 그 교회도 문제와 갈등이 생길 것입니다."
교회에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은 교회가 부족해서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인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온통 갈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중에 제일 심각한 것이 종교간의 갈등입니다. 매스컴을 통해 심심찮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전투 장면을 지켜 봅니다. 서로 돌을 던지며 충돌하는 작은 갈등에서부터 비행기와 미사일로 폭격하는 큰 충돌까지 두 나라는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도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인도와 파키스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나라 얘기만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도 갈등이 즐비합니다. 특히 정계를 보면 여야간의 갈등으로 민생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야간의 갈등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그것도 같은 여권, 같은 야권 안에서도 세력 다툼이 대단합니다. 어느 쪽이 잘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 장래는 참 걱정스럽습니다.
나라 뿐입니까? 집안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갈등, 남편과 아내의 갈등, 형제 자매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교회 안에서도 성도간의 갈등, 성도와 교역자간의 갈등-이런 저런 갈등으로 머리가 아프고 장래가 걱정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때 일수록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 26:3-4에서 말합니다.
"3주께서 심지(心地)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신앙의 뿌리가 깊이 내린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평강이 있다는 말씀아닙니까? 믿음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고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의 뿌리를 세상에 둔 사람은 언제나 흔들리며 갈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갈등하고, 분노하고, 화내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평안을 눌리시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드디어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자기 생애에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가 중심 지도자였습니다. 감독이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온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로부터, 특별히 유대인 성도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1. 바울의 선교보고(19)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지금가지 자신이 했던 선교 보고를 합니다. 바울의 선교보고는 내용이나 양에 있어서 대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바울의 선교 내용은 한 절에 딱 두 가지 관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 내용의 주어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갖은 고초와 죽음의 위협을 견뎌내고 이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바울은 자신의 희생과 노력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수많은 이방인을 구원해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어떻게 복음은 전파했는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이방인을 구원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신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생각, 이 믿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도 끝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쓰임받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만약 중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변질되었다면 스스로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고린도 전서 15: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된 것은 누구의 은혜라? 하나님의 은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 이 믿음 중요합니다.
지난 미국 집회 중 두 번째 교회였던 Glendale Korean U.M.C 교회는 제가 유학 생활 중에 주말에 출석하여 교육 목사로 일하던 교회였습니다. 참으로 오래 간 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0년 前) 그때 참 어렵게 유학생활 했습니다. 먹는 것 하나 빼놓고는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주말에 교회에 가서 일하고 주간에는 하루 세 시간씩 학교에서 일하고 두 애들 학교 다니고 아내는 아내대로 일하고, 건강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가난한 유학생인 제게 Vitamin을 대주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나 나서 차가 폐차가 되었을 때 차 사라고 도와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이렇게 사는 것-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까닭입니다. 때로는 직접 제게 역사하셨고, 때로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신앙 생활 할 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신앙은 언제나 주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신앙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는 순간 신앙은 변질되는 것입니다. 사람 냄새가 나면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헌금도, 전도도, 하나님께서 전면에 드러나셔야지 내가 드러나면 벌써 신앙의 길에서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증거되고 있는지 내가 드러나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⑵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의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존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수련했으며, 종교적 열심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교보고에서 자신은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도구에 불과한데 뭐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도자기라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뽑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든 사람이 대단하지 도자기가 대단합니까? 토기장이 손에 들려진 진흙이 무엇은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울의 선교 보고는 이방인 구원 사역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한 것 같고, 그 때에는 내가 수고한 것 같지만 지난 후에 돌아보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자녀 여러분이 다 키우셨어요? 저의 애들보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키우셨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별로 해 준 것이 없어요. 급한 성격에 소리만 질렀지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보고를 하는 바울이나 보고를 듣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과장하지도 않고 가볍게 업신 여기지도 않고 그저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회 일 해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압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도 힘이 들고 남이 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도 힘듭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립시다. 내 자신은 자랑하지도 말고, 남을 비난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합시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2. 변질되는 신앙(20b-21)
"20b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있는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規模)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긴 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개종한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비록 개종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이방선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널리 전했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이방인에게는 믿음의 차원에서 율법과 할례를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수단이 아님을 강조해 왔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 정도일 뿐이지 율법은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개종한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바울의 사상에 우려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과격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해하려는 계획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을 향한 복음 전함으로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매우 의미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율법에 대한 마음을 어느 정도 허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과 같은 경우 학자들은 마태복음 안에 크게 다섯 묶음의 설교가 편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세력을 얻고 있던 개종한 유대인들을 향한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 마태복음안에 있는 다섯 묶음의 설교를 보며 아마도 모세 오경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과 윤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설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 역시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이 시내산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의 신학적 의도가 어찌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에 개종한 유대인들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 역시 이러한 개종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율법과 할례, 규례를 여전히 함께 기키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용납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 아닙니까?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 오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께서 뭐라하셨습니까? "오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습니다. 갔어요.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갑자기 무서움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처음에 주님만 보고 주님 말씀대로 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주위를 보니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주님 대신 거센 바람에 몰아치는 물결이 보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 빠졌습니다. 주님만 보면 괜찮아요. 하나님만 보면 괜찮아요. 그런데 주위를 봐요. 상황을 너무 많이 생각해요. 풍덩 빠졌어요.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불같은 성령 받고 시작되었습니다. 분명하지요? 성령강림 사건이 바로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도록 확증해준 사건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 안에서 출신과 족속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경험에서 율법을 뛰어 넘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율법을 들먹입니까? 어쩌자고 복음보다 율법을 크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변질입니다. 신앙의 변질입니다.
오늘날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초대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배우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전도하고, 나누는 일에 온 힘을 기우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마다, 교단마다 교권에 힘을 쏟습니다. 제도가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은 어디로 갔습니까? 자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처음 영접했을 때의 감격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뜨거움과 사랑이 아직도 있습니까? 처음에는 순수하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시간 지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렇게 기도하는데 아무개는 저렇게 신앙생활해? 장로 권사가 새벽기도도 안나와?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마세요. 그분이 무엇을 원하실까? 무엇을 기뻐하실까? 이것이 참다운 신앙생활 아닙니까?
3. 타협인가? 전략인가?(22-26)
"22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 하였으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와 격한 감정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한 가지 바울에게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택하여 결례를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바울에게 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중히 여기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에 대해 바울은 곧 실천에 옮깁니다.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이튿날 결례를 행합니다. (결례란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보통 한달간 하는데 마지막 일주일은 성전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생활을 합니다. 기간이 차면 제물을 드리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결례 비용 부담하는 것을 신앙의 덕으로 여겼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해서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한 바울이 결례를 행했다는 것은 이방선교는 인정하면서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율법으로 회귀한 것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과 타협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고전 9:19-22)"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타협이 아니라 선교전략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맞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게 전도한다는 것 아닙니까? 왜? 구원하려고. 바울의 단한가지 목적이 있다면 영혼구원이요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정리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사는 것, 이렇게 목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쓰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저만입니까?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 아닙니까? 자녀교육, 사업, 직장생활,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 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바울처럼 열심히 전도합시다. 기도하세요. 사랑하세요. 예수 전하세요. 전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고 전도하세요. 지옥 가는 것 보고만 계시렵니까? 열심히 전도합시다.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②
행 21장 21~26절 / 이재철목사
♬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
1.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를 걸라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2.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능력 주 하나님 나를 바라보시고 능력 준다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3.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능력 주 하나님 주저 말라 하시고 십자가를 지라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희생만이 희생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희생만이 희생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삶이란...
☞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 둘째,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익(복)을 주는 삶입니다.
☞ 셋째,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보람과 기쁨이 있는 삶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해 버리면 그 순간에 불가능이 내 삶에 정착해버립니다.
◈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질적인 귀중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본질적인 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그동안의 선교보고를 합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20-21절에 보면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수만명이었지만 완전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도 함께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이 “모세의 율법도 필요 없고 결례를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며 바울에게 분을 내고 모함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 와전되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방법대로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에게는 굳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무조건 율법을 무시했다고 와전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바울에게 제안합니다.
사람들의 편견을 버리게 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도록 합니다.(22-24절)
바울은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25절) 그렇게 말하고 가르친 적도 없고 결례를 받아야 할 일도 없지만 그 결례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작은 것은 결례입니다.
그렇다면 큰 것, 본질적인 것,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로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은 유대인을 위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에 자유함을 얻었지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소한 것을 따지고 매여 있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양보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중상모략하였지만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것을 버렸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나옵니다. 그는 여덟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울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새는 세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야했습니다.
전장에 나가있는 아들들을 위해 이새는 다윗을 시켜 형들에게 빵과 곡식가루와 치즈를 가져다주도록 합니다.
다윗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며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 위해 전쟁터로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본 첫째 형은 다윗이 전쟁을 구경하러 온 줄 알고 버럭 화를 내며 호통쳤습니다.
우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먹을 것을 내치고 화를 내며 형과 싸우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작은 것은 형이 자신에게 호통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것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민족이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것을 알지 못하고 형을 원망하며 싸웠다면 작은 것에 힘을 소진하고 큰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큰 것을 볼 줄 알았습니다. 그 결과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양향모목사 / 행 21:22-26
3차 전도여행을 마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바른 믿음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와 장로들 그리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은 참 반가운 일이었지만 걱정이 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분명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사도 바울을 만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그 오해를 풀고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이디어 하나를 내어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하는 결례를 행하게 하여서 바울도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견에 동의하고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따라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결례가 복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따라 결례를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나 관습을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율법이나 관습을 주신 뜻을 바르게 이해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왜 율법을 제정해 주셨는지 왜 제사를 드리게 하셨는지 왜 정결의식을 행하도록 하셨는지를 바르게 알고 행하자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행하던 것을 바로잡고 그를 통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사도 바울의 신변을 염려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이 사도 바울에게 결례를 행하여 오해를 풀라고 제시했고 사도 바울은 이를 흔쾌히 수용하고 결례를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본문 22-24절에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변을 염려한 야고보와 교회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의 관례에 따른 결례를 행하라고 권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그 오해를 풀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모세의 율법이나 관습이나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야기 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성경 몇 군데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할례를 고집하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아무런 유익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관습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27)
음식을 먹는 것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이나 제사음식을 먹는 것이나 그것 자체 가지고는 문제를 삼지 말고 그런 관습을 꼭 따를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양심에 따라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지난주에 인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과 죄와 죽음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며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25)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즉 초등교사가 되어서 우리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우리가 더 이상 그 초등교사 즉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반복해서 이렇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하면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흉악한 죄의 사슬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능력을 축소시키고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비난하다가 보니까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하는 말이 힘이 실리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르게 사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고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똑 바로 살아야 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물론 그 중에 비교적 바른 삶을 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도 혹 있겠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도 온갖 욕심 악한 생각들이 기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 바르게 사는 척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회개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어차피 해서는 안 될 불륜인데 내가하면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서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죄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착각하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긴다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차라리 포기하고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가를 인정하고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구원을 받는 확실한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제일 확실한 구원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할례에 관하여 관습에 대하여 이렇게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제시한 결례를 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동안 가르쳤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이나 관습을 폐하자고 하는 것은 율법이나 관습 자체를 무익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롭게 되는 것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또 유대인들이 율법이나 관습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제정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행하고 또 율법을 주신 가장 큰 뜻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서원을 한 사람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유에 따라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제시한 때로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서원’이라는 말은 “기도하다”, “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결심한 것을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 앞에서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따르는 것 보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은 반드시 실천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원은 부모님들이 자녀에 대하여 한 서원이 있고 본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서원도 있습니다. 일평생을 약속하는 서원도 있고 시간을 정하여 일시적으로 하는 서원도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모님이 아이를 낳으면서 목사로 주님 앞에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거나 본인이 결심을 하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평생의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것이나 어떤 일정한 기간동안 특별하게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도 서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서원을 한 사람들이 서원한 사람으로서의 특별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의식을 결례라고 합니다. 서원한 사람은 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거나 독주를 마시지 않거나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서원한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았고 일시적으로 기한을 정한 서원은 그 기간이 끝이 나면 머리를 깎고 끝났음을 보고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그 기간 동안 금식을 하거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거나 오락이나 가무를 삼가거니 특별하게 선한 일을 하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망설이지 않고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이런 결례를 행한 것은 그것이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특별한 삶을 살고 약속이 달성되었을 때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런 것 자체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서원들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평생을 해야 하는 목회자가 된다든지 하는 그런 서원은 신중하게 잘 생각하고 하셔야 됩니다. 부모님들이 너무 쉽게 서원을 하고 본인이 너무 쉽게 서원을 해서 후회를 하거나 실천을 하지 않거나 하고 나서도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직분을 맡거나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하기로 서원을 하는 일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냥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고 결심을 하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사는 일에 있어서도 서원을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술 마시고 담배피우는 것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고 안마시고 안 피우면 더욱 좋습니다. 술이나 담배가 우리의 육신의 건강이나 정신의 건강 더 나아가서 신앙에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다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본문 25-26절에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도바울에게 결례를 행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율법이나 할례나 관습을 지키는데 대하여 유대인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이지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해야 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라고 하면서 과거에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의를 통해 내린 결론에 변함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15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일부 주장 때문에 바울과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의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이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아도 되고 다만 성도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오늘 본문에 그 결론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 것,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 것, 그리고 음행을 피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금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은 금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또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금한 것은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음행을 금한 것은 가족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구원을 떠나서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주셨고 그 원칙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고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며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더 잘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을 받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쉽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 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아무렇게나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임을 안다면 보란 듯이 더 바르게 더 선하게 더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저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 바르게 더 잘 살아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전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이나 할례나 유대인의 관습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르고 더 선하게 살면서 더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을 믿는 믿음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런 큰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더 잘 실천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행 21:15-2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가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 가치를 깨닫고 이 땅에서도 묵묵히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 들이 세 가지 길을 간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마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살아가는 것은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가니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며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가니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 사람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따라 갑니다. 유행 따라 갑니다. 인본주의로 빠집니다. 자기주의에 모든 것을 맞추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제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아니하십니다. /믿/
세 번째는 '하나님의 길,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명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의 주역 바울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제 3차 선교여행을 은혜롭게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습니다. 이유는 환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일사각오는 대단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의 그리스도를 향한 단호한 결단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말리던 성도들도 '주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바울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5절에서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15-16절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쌔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이 여러 날 후'란 말은 가이샤라 성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서 있었던 날들로 그곳에서 상당한 동안 지내면서 기도로 로마의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행장을 준비했다'는 말은 짐을 샀다는 의미로 '짐을 뿌리다.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한 성금을 챙기다. 말의 안장을 꾸리다' 등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Km인데 그 길은 도보로 가기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당시 교통수단에 쓰였던 말을 타고 갔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가는 길은 죽음을 각오한 길이요, 그의 인생 길에 마지막 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마지막 길을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이샤라의 몇 제자와 나손'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말렸던 사람들입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 테면 혼자 가시오! 사람이 고집을 부려도 분수가 있지!' 기분이 나빠서 돌아서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혼자 잘 해보시오!' 무관심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샤라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도 역시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길이 험한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따라 나서고 있습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 일꾼들입니까?
그런데 또 한 분이 바울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동행하신 줄 믿습니다. 바울은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절대로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마28:20절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 여러분, 참으로 능력의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걸음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늘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14: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두렵지도 않습니다. 사도바울과 동행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기 '오랜 제자 나손'에서 오랜 제자라는 표현은 그가 예수 믿는 자가 오래 되었다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그를 70인의 제자 혹은 120문도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보다 훨씬 앞선 사람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바울을 따랐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제자로서 배우는 자세로 산 자입니다. 그의 이름은 '회상함'이란 뜻입니다. 그는 주님 생존시의 사람이요, 다락방 기도에 참가해서 오순절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겸손히 한 시대의 하나님의 종인 바울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그의 겸손함에서 온 것입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섬기기 위해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일꾼이요, 주님에 고난에 동참하는 자요, 마지막 바울의 선교사역에 충성스럽게 봉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손을 보면서 주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시 무명인의 나귀를 타시고 올라간 사건이 연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무명인의 나귀를 쓰신 것처럼 주님은 나손과 그의 집과 재물과 그의 믿음까지도 바울을 위하여 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손은 ⑴'오랜 제자'였습니다. 그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도들과 함께 오래 동안 사역한 신실한 복음의 동역자였습니다.
⑵그는 바울과 그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그의 집은 바울과 그의 일행이 기숙할 만큼 넓었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정치자금도 후원하는 것도 귀합니다. 교육을 위해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도 귀합니다. 불우한 자들을 위해 복지 사업에 헌신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⑶그는 환란 중에 헌신했습니다. 평온하고 시절이 좋을 때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때는 바울 곁에 있으면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불이익을 당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 바울과 그 동역 자들을 돕는 것은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이 있는 것처럼 바울과 동일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17절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바울사도는 영적인 개선장군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향하여 힘차게 입성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선교 현지 인들이 자원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 들려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땅을 역으로 나아가 소아시아는 물론 로마의 동남부 통치구역인 그리스까지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확보하였습니다. 남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알렉산더가 사용했던 칼과 같은 무기도 그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란 유대인들의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 복음의 정복자가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을 한 것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 이르니'란 말은 마침내 바울과 그의 일행은 예정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다섯 번째 되는 예루살렘 방문이요, 아울러 최후의 예루살렘의 방문입니다.
성령은 당신의 종을 당신의 뜻대로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형제들이 와서 기쁘게 저들을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지칭이 첫째가 '그리스도인'이요, 둘째가 '제자'요, 셋째가 '형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또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많은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제자도'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제자라고 하면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 모두는 다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형제'입니다. 이 말이 초대교회에 상당 기간 계속 쓰입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형제입니다.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까 형제입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 하나님 앞에 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형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믿었든 나중에 믿었든 다 형제입니다. 특별히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보다 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에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했을 때를 기꺼이 영접해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에 항상 악독함을 알고 두려워했고, 경계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잘 설득하여 사귀게 되었습니다(행9:26-27).
▶18절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여기서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찾아갔습니다.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일행과 함께 갔습니다.
그 일행 중에는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도 포함되었으며 구제 헌금을 모은 자들도 포함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야고보가 있었는데 그 야고보는 이미 순교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본문의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초대감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베드로보다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방문한 것입니다.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겠으나 먼저 교회를 찾고 지도자를 찾아갑니다. 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덕스럽습니까?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초청하여 하나님의 권속(가족)으로 삼으시고, 이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사역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가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특권과 함께 소명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에 사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십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이십니다. '모든 족속, 전 세계를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부름 받은 특권이 있으면 보냄 받은 소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멘!/ 바울 일행이 그곳에 도착하자 장로들이 따뜻하게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보고를 하기 위해 간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영접을 한 것입니다.
▶19절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바울이 문안하고' 먼저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를 정중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의 서열로 본다면 바울은 12제자 밑입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깍듯이 예절을 갖추어 인사를 올린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선교보고를 합니다. 제3차 선교여행 중에 교회를 세우고 또 세워졌던 교회들을 돌본 보고, 그 보고 가운데는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교회' 등에서 나타난 기적과 이적을 보고했을 것이고, 또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감격은 체험한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또 모 교회를 돕고자 성금을 거두었을 때, 그들은 어려웠지만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동참해 준 성도들의 고마움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밀레도의 마지막 고별설교도,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바울은 자기가 사역한 일을 '봉사'(디아코니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봉사는 '종', '일꾼'을 뜻하는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사명'(20:24), 또는 '직분'(롬11:13) 등으로 번역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교회와 사람들에게 봉사했습니다. 그것을 '사명' 또는 '직분'을 감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 말은 '나의 봉사생활, 나의 수고, 나의 봉사를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알 것인즉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내 입을 통하여, 내 말을 통하여, 내가 하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고 내 지혜를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하여, 내가 뿌린 눈물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내가 당한 많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것뿐입니다. 그 시작도, 그 과정도, 그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요, 나는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낱낱이'란 말은 '각각에 따라서, 항목 별로'란 뜻으로 여러 곳에서 일어난 가지 각종의 하나님의 성령 역사를 세밀하게 보고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고한다'는 말은 '헤아린다'는 뜻으로 선교사역의 회상과 그 내용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보고 속에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보고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보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했다고 떠벌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내가 몇 사람에게 전하고, 내가 몇 사람을 세례 주고 어느 어느 교회를 세우고…' 이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하고 보고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역사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루신 일, 그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되어 진 사건 전부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겸손을 발견할 수 있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도의 덕목을 만납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그 모든 일들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세상에 보냄 받은 '소명자'이므로 그가 행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자신은 보냄 받은 자로 봉사한 것이라는 고백이요, 자신이 최선을 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최선을 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차원 높은 덕(德)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거짓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다 짓습니다.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추수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농부의 땀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사는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를 빌리셨을 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십시오. 그러나 늘 마침 부호를 잘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아멘!/
여기서 덕(德)이란 그리스도인이 생활 중에 갖추어야 할 품성입니다. 노자(老子)는 덕을 우주의 원칙인 도(道) 다음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볼 때 말씀(道)이 단연 위이고, 사람이 말씀을 따라 갖추어야 할 인격이 믿는 자의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벧전2: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
▶조선 중종 때 반석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은 겸손하고 청렴하여 덕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원래 종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격과 학문을 갖추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주경야독을 합니다. 이를 아름답게 생각한 주인 이 참판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어느 몰락한 양반 집의 수양아들로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거지 몰골을 하고 있는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 앞에 넓죽 엎드려 큰절을 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란 놈입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자신의 옛 노예 신분이 노출됨으로 모든 특권이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에 감동한 신하들과 임금의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고 그가 추천한 이오성도 사옹원(司饔院) 별좌(別座)라는 좋은 벼슬을 얻었다고 합니다.
덕이 있는 한 사람이 존재함으로 온 나라를 훈훈하게 하고, 덕이 있는 한 사람이 가정에 존재함으로 온 가정이 훈훈하게 되고, 덕이 있는 한 사람이 교회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온 교회가 훈훈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용장입니다. 인류 역사에 그를 추월할 거목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하여 감화를 받는 까닭은 믿음에 덕을 세우는 그의 인품 때문입니다. /할/
▶20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저희가 듣고' 예루살렘교회의 감독과 지도자입니다. 그들은 정중히 보고를 받았습니다. 우리 합동정통 총회 때 보면 각 선교사들이 나와서 교회의 총대들 앞에서 선교보고를 합니다. 보고가 끝나면 총대들은 격려의 박수를 아낌없이 쳐줍니다.
본문에도 바울의 보고가 끝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도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종이란 모든 영광을 주인에게 돌리는 법입니다. 즉 모든 수고는 내가 하고, 모든 영광은 주인에게 돌리는 것이 바로 종의 자세입니다.
보고가 끝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뒤에 예루살렘교회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바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교회 성도 가운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신자 수만 명이 바울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수만 명'으로 표현한 신자는 예루살렘 시내와 그 근동에 있는 성도들이 오순절 절기 예배로 드리러 온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 숫자로 그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지만 몇 가지 약점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모세 율법에 열심히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에게 오해를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할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의식 법으로써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주장했지만 그 율법은 폐지 한 것이 아니고 '몽학선생' 역할로서 율법이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 인간의 연약함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선생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할례문제도 그렇습니다. 유대교에서 거짓 이단들이 기독교에 들어와 할례 받지 않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들을 충동질함으로 한 때 교회들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때 바울이 할례의식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른 복음 관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16:19), 베뢰아에서(17:4), 고린도에서(18:1-2), 특히 에베소에서(19:26) 유대인들의 고의적이고, 계획적이고 집단적인 박해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선교지에서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의 공격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와서는 바울은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또 공격과 핍박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마는 아직까지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선민의식의 우월감에 빠져 참된 복음의 진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21절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배반했다는 말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버리라고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바울에게 반감을 받고 그를 비방하던 자들이 만들어낸 소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외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 자신이 무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모세의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망각하고 단지 그 형식만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의 삶을 경고한 것입니다.
롬2:17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그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즉 21-21절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사(우상숭배 시 제물)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책망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짓기를 28-29절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러니까 무늬만 율법주의자지 지키지 않는 너희는 율법주의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망각하고 단지 그 형식만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경고한 것입니다.
할례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행함이 구원의 목적이 아닌데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잊어버리고 할례 의식만을 중요시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은 만약의 사태를 염려한 것 같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를 통해 유대인들의 난동을 보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의 유대교 개종자들이 바울을 좋게 보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지금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울 사도를 보호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꾀를 짜낸 것 같습니다. 그런 꾀보다는 오히려 '당신이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그 복음을 전하시오!' 했더라면 더 빛났을 테인데 그곳 지도자들은 오는 소나기를 피해야 된다고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22절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바울 사도가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당장 달려들어 쥐어뜯을 것이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뒤에 나옵니다만 사도바울이 잡혀갈 때, 그들이 마구 바울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번쩍 들고 들어갑니다. 잘못 하다가는 맞아죽겠다 싶어서 군인들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번쩍 들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순간까지 마구 두들겨 팼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미리 알고 그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어찌할꼬!' 이 말은 그들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3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야고보가 지도자로서 바울보다는 선배입니다. 그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로 따라 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마음이 꺼림직 했지만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 그들의 제안에 따른 것 같습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1장에서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할 만큼 그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나, 혹은 생활 문제나, 의식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합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또 고전9:22-23절에서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여기서 서원이란 나실인의 서원을 말합니다. 나실인은 '억제하다, 성별 하다'라는 뜻입니다.
민6:1-21절을 보면 나실인의 기원이 나옵니다. 나실인의 규정을 보면 ⑴죽은 자의 몸과 접촉하지 않고 ⑵포도주나 그 밖의 독주를 마시지 않고 ⑶삭도를 머리에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관습이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머리를 깎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6개월 동안 서원하기도 하고 1년 동안 서원하기도 하고 삼손과 세례요한 같은 사람은 평생 나실인이었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이런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이 네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24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민6:9-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에 따르면 한때 서원하여 나실인이 된 자들이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결례의 기간이 지난 후 머리를 밀고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때 드리는 예물은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한 마리나 속죄 제물로 어린 양 한 마리, 화목 제물로 수양 한 마리, 그리고 그에 따르는 소제물과 전제물이 필요했는데(민6:13-15),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난한 서원자를 대신하여 부자들이 그 비용을 보상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결례의식에 참석하여 서원한 네 사람의 예물을 대신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아! 바울이 우리의 결례를 무시하지 않고 그도 행하는구나!' 안심을 주자는 제안입니다.
▶25절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 말은 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 때, 결의된 것으로 이방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할례문제를 논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를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고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멀리할 것과 음행을 피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결례에 참석하여 유대인들 앞에서 율법을 지켜 행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가로 야고보가 바울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정책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것입니다.
▶26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서원한 기한이 끝난 그 네 사람의 모든 비용을 대주고 또 제단에다 머리칼까지 태우는 제사까지 다 끝내고는 서원한 나실인의 기한이 끝났음을 공포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복음이 후퇴된 것 같지만 교회의 화평과 또 자신으로 인해 복음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언약한 유대인 성도들의 약함을 담당하고 복음의 확장을 위해 적극적인 전도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무리를 충동하여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길이 아직도 멉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25절의 강조는 '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너희들도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라고 그 목에 멍에를 씌우느냐?' 그들에게 자유를 주자는 의미에서 바울이 각 교회에 편지한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입니다. /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 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암 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이었으므로(민6:1-21) 그 비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 자를 위하여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의 사역
행 21장 17-26절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살아가면서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옳고 그른 일은 개인의 차원은 넘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관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4:20-2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덕을 위해 배려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행동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그동안 선교 여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바울에게 율법을 파괴한다는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한 일을 위해 정결례에 동참하길 제안합니다. 바울의 그 제안에 순종해서 정결례를 진행합니다.
선교 보고와 예루살렘의 반응(17-20a)
영적인 부분이 자신의 신앙과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인위적인 판단으로 정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이방인들은 한 형제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받아 들렸고, 이방인 지역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사명에 대해서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은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을 환대하는 예루살렘(17)
바울은 마음 한편에 우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지역 사역에 대한 반응에 따라 복음의 역사가 중요한 기로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에서 공식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은 공인(公認)되었지만,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인 성도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느냐는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형제들이 바울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의례적인 환영이 아니라 기꺼이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과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한 역사(役事)에 대해 성령의 역사로 인정한 것입니다. 만약 인정받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이방인 지역에 사역했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우려와는 다르게 예루살렘 유대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울은 흔쾌하게 환영하며 받아 주었습니다.
(2) 바울의 선교보고(18-19)
이튿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격인 야보고를 만나로 갑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장로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선교 여행의 놀라운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고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지역에서 이루어진 사역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온갖 핍박을 겪으면서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작은 공로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청지기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20a)
바울의 3차에 걸친 이방 지역의 선교 보고에 대해 예루살렘의 유대 장로들의 반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20b)
종종 교회의 분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분열의 근원은 대부분 견해 차이로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함으로부터 분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 동안 ‘화평케 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0b…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0b)
바울의 우려하는 마음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지역에서 선교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의 우려는 예루살렘에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아직 유대교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의 사역을 오해를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의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이 항간에 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지역에서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며,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주장했다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오해로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금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율법을 준수한 사람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이 충분하게 이해되지 못한 과도기의 초대 교회에는 구약 율법과의 연속성을 놓고 신학적 대립이 심각했습니다(10~11, 14~15장).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당수의 유대인 신자들은 야고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고, 반대 입장에서 있던 바울은 율법 파괴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학적 대립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나가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일행과 함께 유대의 전통 결례를 행하기를 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이 모든 오해를 풀고 불필요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나실인 서원을 했던 네 명의 유대인과 함께 정결을 위한 율법의 예(禮)를 행합니다. 또한 그들을 위한 엄청난 제물 비용(민 6:13~21)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이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지혜로운 접근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서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획일적으로 같은 모양을 가질 순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과 달란트를 인정하고 그것의 특색에 따라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기고, 더 나가서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21-26)
교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히 좋은 점을 수용하십시다. 당신은 교회의 제안이나 권고에 겸손하게 순종합니까?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당신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한 이방인 지역에서 행하신 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바울에 관한 나쁜 소문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까지도 아직까지 율법에 대한 닫힌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이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거짓 소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까지 오해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세평에 대한 우려(21)
바울은 이방 지역에 대한 모든 3차 선교 사역을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 가운데 사도직을 행하게 하시고,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공회가 열렸을 때도 이방인 사역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15:12; 갈 2:8-9). 그들은 영광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 바울에 대한 잘못된 세평을 우려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도들까지도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가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잘못된 소문만으로 판단한 것을 참으로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해한 바울에 대한 악평은, 이방 각 지역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배척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며 유대인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잘못된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악평이 점점 더해지면서 예루살렘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모함하는 자들은 악평을 더해 갔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유대교와 율법을 파괴하면서 가르쳤다면, 이는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에도 유대인에게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율법주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을 모함하는 죄는 유대인에게는 다가오는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죄였습니다.
(2) 장로들의 정결례 제안(22-25)
바울에 악평 때문에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침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감진한 유대인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임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에게 나실인의 정결례를 제안합니다. 정결례를 통해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실인의 정결례는 단순하게 머리만 깎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유대 문헌에는 나실인에 대한 규정과 서원을 마칠 규정은 민수기 (6:13-21)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정결례를 행하려면,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들이 필요했습니다(민 6:14-15). 그만큼 상당히 많은 비용이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던 네 사람들도 비용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권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다는 것은 율법을 준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고는 인간의 두려움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의 제안을 겸손하게 따릅니다. 바울이 서원을 기다리는 네 사람의 비용까지고 지불할 것을 제안에 대한 받아들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유대 율법주의자처럼 율법을 성실히 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새 시대가 열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파하라고 결의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15:20). 유대인의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이해하고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율법의 결례를 행하도록 한 것은 모두를 배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권면에 바울은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3) 정결례를 마침(26)
바울은 정결례의 제안을 받아들여 7일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제안한 네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정결례를 온전히 행하고 정결례의 절차에 따라 마쳤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이것은 이미 정결례를 마친 후 보고라기보다는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완결하기 직전의 보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민 6:13-14).
바울은 정결례를 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바쳤던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을 얻고자 유대인의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20).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자기 시간과 재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신앙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단점을 보안해주며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배려함으로 분란을 잠재우도록 노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정결례를 행함으로 주위와의 마찰을 없애고 복음만 증거되도록 철저히 헌신했습니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표현입니다. 연약한 자들도 섞여 있으므로 그들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성도들이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