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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작안(東京炸案)
일본의 안방 동경에서 왜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할 계획이라는 말이다.
東 : 동녘 동(木/)
京 : 서울 경(亠/)
炸 : 터질 작(火/)
案 : 책상 안(木/)
'동경(東京)'은 일본 수도 도쿄를 말하고, '작안(炸案)'은 폭탄투척 계획이란 뜻이다. 항일투사 이봉창(李奉昌)이 왜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진동전세계동경작안지진상(震動全世界東京炸案'之眞相)은 김구의 발표다.
중국 '신강일보'는 한국청년 이봉창이 왜왕을 저격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일본의 안방 동경에서 왜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일은 세계를 진동시킬 일이었다.
이봉창은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손씨의 둘째아들로 현 서울 효창동118-1번지에서 살았다. 1915년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과점원을 거쳐, 1920년 용산 역무원 때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4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퇴직하고 그 해 9월,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폈다. 1925년 범태(範泰) 친형과 일본 대판(大阪)에서 철공일을 하다, 일본인 양자가 돼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臧)로 바꿨으나 조선인으로 밝혀졌다.
1928년 일왕 히로히토를 보기위해 나갔다가 일경수색에서 한글 편지가 발견되어 10일 동안 구금당했다. 이때 불온한 사람이라는 혐의를 받자 심정의 변화를 일으켜 조국을 위해 투신하리라 다짐했다. 내 작은 힘이지만 조국의 원수를 처단할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1930년 12월 동지들과 뜻을 모아 일을 도모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 결기에 찬 마음으로 김구를 만나 심중을 털어 놓았으나, 거동을 수상히 여기며 의심하는 눈치였다.
술자리에서 봉창이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왕을 왜 안 죽이느냐! 원흉의 우두머리를 처단해야 하지 않느냐!'며, '내가 작년에 일왕이 능으로 가는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 내 손에 폭탄이 있었다면 일왕을 죽일 수 있었다'고 했다.
이에 김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키고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했다. '이 군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하자 겸손한 태도로 '나라를 위해서라면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김구 말꽃 모음'에 기록했다.
1931년 12월에 김구는 폭탄 2개를 구입하여 안중근의 동생 공근 집에서 선서식을 갖고, 양손에 폭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도쿄로 건너간 봉창은 1932년 1월 8일 '물건은 틀림없이 팔린다'고 연락하고 만주의 황제 부의(溥儀)와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하여 폭탄을 던졌다.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30일 일본 최고 재판소 1심에서 사형을 확정하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에 교수형을 당했다.
비록 목적달성엔 실패했지만 일왕 폭살기도는 천지를 진동시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특호활자로 대서특필 했고,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의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고 중국인들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했다. 세계 각 신문들도 앞다투어 톱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1932년 5월 10일 김구는 로이터통신을 통해 '이봉창에 대한 애도문'을 싣고 김구 자신과 임시 정부가 배후임을 밝혔다. 1946년 이봉창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치했다.
◼ 東京炸案의 진상
발표의 이유
본년 1월 8일 동경 櫻田門前에서 三島의 천지를 진동한 大霹靂聲이 있은지도 어느덧 9個足月이다. 그동안 본 愛國團의 사업으로는 한국내에서 적의 ○○○○, ○○○○안이 있었고 上海에서 통쾌한 虹口公園炸案이 있었고 최근으로 5월 24일 大連에서 本庄, 內田, 山岡 등 암살미수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늘 성명한 바와 같이 절박한 환경의 필요를 인식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한 외에 일정한 시기까지 나는 내 사업에 대하여 절대로 함묵하기로 하였다.
그러면 이에 동경작안의 진상을 발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본월 16일에 東京大審院에서 이의 본안에 대한 제1회 공판이 열리고 그 결과로 李義士가 미구에 차세를 떠나게 된 것은 즉 본안의 진상을 영원히 몽롱한 무중에 감출 필요가 없을 뿐아니라 본안에 관련된 언론으로 왜적에게 靑島의 市黨部가 搗毁되고 상해의 『民國日報』가 영구 폐간됨으로서 中國四萬萬民衆의 그 진상을 알고자 하는 요망이 더욱 큰 까닭이다.
애국단의 최선봉
한국의사 李奉昌! 1 · 8의 동경작안!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니 그 한가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한가지를 연상하게 된다. 그럼으로 이제 다시 1 · 8안의 주인이 누구라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같은 이유로 이봉창 의사가 韓人愛國團 단원임도 말할 것 없다.
다만 이에 말하려 하는 것은 그가 吾團의 최선봉장이라는 것 뿐이다. 내가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혁명사업에 헌신한지 범40년에 1일이라도 暴烈행동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이러한 행동으로만 우리의 혁명사업이 전부 성공되리라고 생각하는 바는 아니지만 참담한 사선에서 처한 우리로서 최소의 力으로 최대의 效를 收할 것은 此途 이외에 제2도가 없다.
그럼으로 나는 오직 이 방면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동안 실패함도 적지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성공함이 오히려 많았다. 그러나 輓近 수년래로는 경제의 극곤과 사상의 혼란이 계속하여 사업진행에 지장이 불소하였고 인재를 광구할 길가지 없었다.
나는 이를 개탄하여 捲土重來의 세로써 나의 사업을 부흥시키고자 하여 쇄신한 정신과 삼엄한 훈련 하에 한인애국단을 비밀히 조직하였다. 본단에 최선 가입한 단원이 李의사이다. 그는 가입하는 즉시로 적황 裕仁을 도륙하고자 匹馬單騎로 동경을 향하여 충살하였다.
출생지는 龍山
이의사의 祖先世居地는 京城 남쪽 水原郡이었다. 그의 엄친 鎭奎선생은 광대한 祖宗의 유토를 철도부속지라는 명목 하에 왜적에게 강점을 당하고 생계가 未由하여 부득이 全家를 솔하고 경성부 용산에 이주하였다.
이의사는 公曆 1900년에 용산에서 출생하였고 그가 본국을 떠날 때의 최후 주택은 용산 錦町 118호에 있었다. 빈한한 가정에 태어난 그는 석학의 도까지 잃었다. 그럼으로 幼時에 가정에서 약나의 문자를 학습하고 10세 이후에야 처음으로 용산의 文昌小學校에 입학하여 4년만에 필업하였다.
현재 그의 중형 範台씨는 한국 淸津에서 처자를 거느리고 주거하며 그의 1女姪은 大阪 모 여교에서 수학하며, 진규선생은 청진에서 2년 전에 작고하였다 한다.
청춘은 혈누로
꽃봉오리가 눈서리 맞은 것과 같이 인생의 고미를 맛본 어린 이의사는 기아선에 직면하여 소학을 필한 후에 모 日糖果商의 용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천진난만한 그 유년시대에 사람으로 당하기 어려운 일인의 학대를 직접으로 받기 시작하였다.
19세에는 南滿철도회사에서 경영하는 용산車站의 전철수 학습원이 되었다. 일인의 능멸과 후욕은 형언할 것도 없거니와 무리한 착취와 압박은 날로 심하여지매 이의사의 철권은 하루도 몇번씩 움직였다. 용산벌 어둔 밤 처량한 기적성에 홀로 짓는 피눈물이 어찌 한 두번이였으랴.
그러나 가정에서 적지 않은 老幼가 그의 부양을 기다리고 있으매 긴 한숨을 지으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하였다. 참고 참아 4년 동안을 지내다가 각골의 심한을 더 참을 수 없으매 猛然한 결심으로 용산차참에서 퇴직하고 곧 일본 대판으로 건너갔다.
大志는 이로부터
복구! 혁명! 조국의 자유! 민족의 해방! 이 모든 환상이 이의사의 머리 속에 종횡할 때는 일인에게 몸소 학대를 당하던 용인생활시대다. 그가 차참에서 복무하던 첫해 곧 공력 1919년은 한국에서 전국적 독립운동이 발발하던 때니 이에서 그는 더욱 큰 자극을 얻어 그 환상이 점점 실제화하여 드디어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할 대결심이 되었다.
대판으로 향할 때의 이의사는 벌써 力拔山氣蓋世의 당당한 철혈남아요, 진로를 찾고자 방황하는 일개 무명소년은 아니었다. 그는 不入虎穴이면 安得虎子리오 하는 각오로서 도일하였고 대판에 도착되는 그때부터 가정과 완전히 관계를 단절할 뿐 아니라 32세의 금일까지 독신으로 流離轉輾하였으니 오직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큰 까닭이었다.
그가 일본에 간 뒤에는 각 도시에 표박하면서 혹은 勞働(動) 혹은 공창의 공인이 되어 구차히 구복을 채우며 겸하여 적정을 살피었다. 이역풍상에 과도한 노동은 정 없는 병마를 유인하여 도일한지 미구에 그로 하여금 사고무친한 名古屋市에서 1년 동안이나 위석하게 하였다.
그 정경을 생각하면 뉘 아니 동정의 누를 금하랴. 絶處逢生으로 모 舊友가 그를 간호하여 병세는 점감하고 該友는 또한 극력 주선하여 모 일인에게 婿 양자가 되도록 하였으나 이의사는 단연히 거절하였다.
그는 병이 완쾌함을 기다리어 다시 동경, 대판 등지로 유력하며 기회를 엿볼 새 이때에는 언어동작이 일인과 호말의 차이이 무함으로 드디어 성명을 木下昌藏이라 속칭하니 이로부터 그를 한인으로 알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립든 上海로
大志를 품고 적국에서 6 · 7년의 긴 세월을 하루같이 지내온 이의사는 복구의 기회가 농숙함을 보고 먼저 적괴 裕仁을 도륙하고자 하였으나 혼자 하기 어려운 이 일을 누구보고 의논할 데나 있었으랴.
그가 다시 한인으로 행세할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兄弟叔姪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일어가 유창하고 일인과 교제가 빈번하였음으로 인근인에게 전가가 친일파로 지목을 받아 본래 우국지사와는 접촉한 일이 없었으니 이때 다시 동지를 구할 뜻도 없었다.
이어 이의사는 평일에 그립든 상해! 임시정부 소재지인 상해! 다수한 독립운동자가 집중된 상해!를 향하여 떠났다. 작년 1월 중순에 상해에 도착되었으나 人地 생소한 그로서 어찌 용이히 동지를 만날 수 있었으랴.
조급한 가슴을 움켜쥐고 노상에서 방황하다가 요행히 성명부지의 一한인의 지시로 비밀한 임시정부의 통신처를 홀로 찾아오게 되었다. 곳은 으슥한 弄堂집, 때는 어두운 밤인데 그 집 위층에서는 마침 밀회가 있었다. 오기는 바로 왔으나 일어 반 섞은 한어로 내력 없이 들어온 이 不知客이 친절한 태도를 보일수록 더욱 의심을 사게 되었다.
필경 누하에 있던 數三 청년 동지는 그를 적으로 혐의하여 구축하려하고 그는 아니가려고 간구하여 일시 양방의 성음이 높아졌다. 내가 친히 누하로 와서 그와 數語를 교환한바 그의 태도가 자못 비범함을 보고 근처의 소객잔에 안주시키도록 명하였다.
취중에 진담
그가 소객잔에 안주한 후 나는 비밀리에 그를 자주 심방하였으나 보통 한담이외에 용이히 간담을 피력하지 못하였다. 그가 정부 통신처에 자주 옴으로 다수한 동지는 그와 친근히 지내는 나를 불가하게 생각하였다.
하루는 그가 또 와서 수삼의 직원과 함께 식당에서 주효를 준비하고 통탄하였다. 그는 취흥이 도도하여 그 동지들에게 향하여 묻기를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하였다.
만좌한 동지들은 비웃는 태도로 코웃음을 치고 그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용이할진대 아직까지 왜 못 죽였겠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연전에 동경에 있을 때 어느 날 일황이 葉山에 간다고 하기에 往觀하였는데 일황이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나에게 총이나 작탄이 있으면 어찌할까’하는 감촉이 얼른 생겼었습니다”하였다.
이 대화를 밖에서 귓결에 들은 나는 도저히 무심할 수 없었고 도로혀 만심탄희하였다. 그러나 좌석이 번요했으므로 모르는 체하고 말았다.
그 작호는 ‘일본 영감’
이의사의 취담을 들은 나는 수일 후 그의 객잔으로 다시 가서 비로소 진정진의를 탐한바 세인이 혐의하고 주목하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대지를 품은 것을 확지하였다. 취담이 진담인 것을 의심치 아니하게 되매 피차에 심지가 상조하여 늦게 만난 것을 탄식한 후에 일황을 작살할 대계를 암정하였다.
이것을 비밀히 진행하기 위하여 나는 그로 하여금 한인사회를 떠나서 虹口 일인사회로 가서 일인 행세를 하고 일인에게 신임을 얻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來扈한지 약 1개월 후사였다.
즉시 그는 木下昌藏이라는 성명으로 먼저 楊樹浦 모 일인 인쇄공장창의 機匠이 되었고 수삭 후에 다시 홍구 일인의 대악기점인 榮昌公司의 점원이 되었다. 그는 나와 처음에 약속한대로 3 · 4삭에 1차씩 비밀 내회하였다.
그가 올 때에는 반드시 주육을 사서 자기를 아직도 의심하고 싫어하는 그 동지들과 서로 마시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한번은 왜의 목이를 신고 왔다가 정부의 용인 중국 공우에게 구축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험구의 청년동지들은 그를 기소하여 ‘일본영감’이라고 칭호하였으며 일반 동지들은 그와 같은 잡류를 기관에 드린다고 나에게 정면공격을 하였으나 사정을 표백할 뜻이 없는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웃기만 하였다.
그 소질은 영웅
이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和靄하지마는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대인담론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주는 무량이고 색은 무제였다. 더구나 일본가곡은 무불능통이었다.
그러므로 홍구에 거주한지 미만 1년에 그의 친붕이 된 왜녀왜남이 불가승수였다. 심지어 왜 경찰까지 그의 股掌間에서 현혹하였고 ○○영사의 내정에는 무상출입하였다.
그가 上海를 떠날 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지은 아녀자도 적지 아니하였지만 부두까지 나와 일로평안을 축하는 친우 중에는 왜 경찰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 가왜인 목하창장이가 왜황을 죽이려고 2개의 작탄을 품고 가는 것은 그와 내가 알았을 뿐이었다.
최후의 일별
때는 작년 말 월초이다. 우리가 고대하던 기회는 왔다. 수개의 작탄을 만드는 동시에 약간의 금전도 얻었다. 그 금전은 美布墨에서 노동하는 교포들의 혈한으로 된 것이니 본래 그들이 특무에 사용하라는 조건하에 정부로 보낸 것이다.
‘동월 11일에 열강의 군대는 黃浦靈頭평화신상 앞에서 허위의 화평을 축하하였는데 나는 진정한 화평을 실현할 준비를 하고자’ 중흥여관에서 방을 정하고 이의사를 불러왔다. 그에게 만반이 준비됨을 고하니 그는 비상히 기뻐하였다.
그 밤에 적황을 작살하는 우리의 실제계획을 의정한 후 나는 걸인의 의복같이 더럽고 떨어진 두루마기에서 은전 다량을 내어주고 곧 홍구로 돌아가서 동경으로 출발할 행장을 급급히 정돈하게 하였다. 2일후 즉 13일에 그는 다시 와서 행장이 정돈됨을 보하였다. 그날 그는 정식으로 愛國團에 입단하고 적황을 도륙할 것을 정중히 선서한 후 기념사진까지 박았다.
그 밤에 우리는 다시 여관에서 동숙하면서 계획의 미진한 것을 구체적으로 논정하고 나는 그에게 “이미 준 돈은 동경까지 갈 노비로 쓰고 동경가서 수요되는 돈은 다시 청구하라.” 부탁하였다.
그때에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재작일에 그 돈을 받아갖이고 왼 밤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대관절 나는 어떻게 믿고 거액을 주였습니까. 그날에 부르심을 받아 먼저 정부기관 집으로 간즉 직원들이 밥 못 먹는 것을 보고 내가 돈을 내놓았는데 그 밤에 선생님이 남루한 의상 중에서 거액을 나에게 주심을 보고 놀랐습니다. 만일 내가 그 돈을 낭비하고 다시 아니 오면 어찌하시려 하였습니까. 과연 관대한 도량과 엄정한 공심을 뵙고 탄복하며 감격하여 긴 밤을 그대로 새웠습니다.”하였다.
그 익일에 우리는 狀元樓에 가서 최후의 축배를 들어 성공을 축하며 내세의 재견을 기약하였다. 다시 안면은 대하지 못할 지라도 사진으로나 차세에 함께 있자하는 의미로 우리는 최후의 사진을 박았다.
사진을 박으려할 때 나의 안색이 부지중 처참함을 보고 그는 나에게 은근히 말하기를 “우리가 대사를 성취할 터인데 기쁜 낯으로 박읍시다.”하였다. 나는 이에 감동되어 마음을 굳게 가지고 안색을 곧 고쳤다. 그 다음에 우리는 최후의 악수로서 작별하고 그는 자동차에 올라서 흔연히 홍구로 돌아갔다.
상품은 1월 8일에
이의사는 홍구로 돌아간 뒤 수일 만에 여러 왜우 환송 중에 상해를 떠나 무사히 일본에 상륙하였다. 우리는 서신과 전보로써 소식을 통하며 그가 안전하게 활동하는 것을 알았다. 금년 1월초에 그가 동경에서 최후로 발한 전보 중에는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부탁이 있었다.
이 전보를 본 나는 8일이 오기만 손을 꼽아 기다리었더니 과연 9일 朝에 기쁜 소식은 신문지상으로 전래하였다. 이때의 쾌감이야 과연 형언할 수 없었다. 불행히 적황을 명중치 못하고 副車를 오중 작상하였으나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은 충분히 발휘하고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할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유감이 되는 것은 그때의 우리 역량이 홍구공원에서 윤의사가 사용했던 그 거탄을 만들 수 있었더라면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회는 쉬지 아니하고 오나니 미구에 이의사의 한을 우리 단원중에서 풀어줄 것을 확신한다.
장엄한 그 의기
1월 8일 櫻田門前에서 자기가 던진 작탄이 폭발함을 본 이의사는 현장에서 가슴에 품었던 국기를 두루며 ‘대한독립 만세’를 삼창하였다. 적에게 부로가 된 후 그는 자기의 성명, 연령, 원적이며 자신이 韓人愛國團 단원으로 해단의 사명으로 적황을 도륙한 뜻을 광명정대히 선포하였다.
그 이외에는 금일까지 함구하고 있으며 적관이 소위 심문을 행코자 하면 엄사로써 질책 왈 ‘나는 여황을 대수로 하였거늘 여등 鼠雛輩가 언감히 나에게 무례히 하느냐’하였다.
그러므로 안건 발생 후 9개월에도 필경 예심을 행하지 못하고 본월 16일에 소위 제1회 공판을 열었는데 법정에 선 이의사의 태도는 더욱 삼엄하여 적의 법정위신이 말살되고 법정 내외가 소연하매 적관은 황당하며 개정한지 5분 만에 방청금지를 선언하고 몽매지중에서 공중을 기편하여 왈 공판이 잘 진행된다 하였다.
듣건대 적은 본월 말에 이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리라 한다. 이 영광의 죽음! 억만인이 흠앙치 아니할 리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단두대상의 한 점 이슬이 될지라도 그의 위대한 정신은 월일로 더불어 천추에 뚜렷이 살아 있을 것이니 우리는 도리어 우준한 적을 일소할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은 그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남을 기념하기 위하여 적이 그에게 형을 집행하는 날에 전체가 一頓의 飯을 절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천하 혁명동지여! 그날에 우리와 희비를 함께 하자!
1932. 10. 11. 夜半. 한인애국단단장 金九
▶️ 東(동녘 동)은 ❶상형문자로 东(동)은 간자(簡字)이다. 東(동)의 옛 모양은 전대에 물건을 채워 아래 위를 묶은 모양인데, 나중에 방향의 東(동)으로 삼은 것은 해가 떠오르는 쪽의 방향이 동이므로 같은 음(音)의 말을 빈 것이다. 옛 사람은 東(동)은 動(동; 움직이다)과 같은 음(音)이며 動(동)은 봄에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春(춘; 봄)은 동녘과 관계가 깊다고 결부시켰던 것이다. ❷상형문자로 東자는 '동쪽'이나 '동녘'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東자는 木(나무 목)자와 日(날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해(日)가 떠오르며 나무(木)에 걸린 모습으로 해석하곤 했었다. 그러나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에는 東자가 보따리를 꽁꽁 묶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東자의 본래 의미는 '묶다'나 '물건'이었다. 그러나 후에 방향을 나타내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동쪽'이나 '동녘'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다만 東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여전히 보따리와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보따리에는 곡식의 씨앗이 가득 들어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東자가 쓰인 重(무거울 중)자나 種(씨 종)자, 動(움직일 동)자, 量(헤아릴 량)자, 衝(찌를 충)자는 모두 곡식이 든 보따리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東(동)은 (1)동쪽 (2)동가(東家)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동녘 ②동쪽 ③오른쪽 ④주인(主人) ⑤동쪽으로 가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서녘 서(西)이다. 용례로는 동쪽 방면을 동편(東便), 동쪽을 향함을 동향(東向), 동쪽의 땅을 동토(東土), 동쪽 지방을 동방(東方), 동쪽의 바다를 동해(東海), 어떤 지역의 동쪽 부분을 동부(東部), 동쪽으로 옮김을 동천(東遷), 동쪽으로 난 창을 동창(東窓),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동풍(東風), 동쪽에 있는 이웃을 동가(東家), 동쪽을 향함을 동향(東向), 동쪽에서 옴을 동래(東來), 동쪽 마을을 동촌(東村), 동쪽의 땅을 동토(東土),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방(東邦), 봄철에 농사를 지음 또는 그 농사를 동작(東作), 동쪽 방면이나 동쪽 편을 동편(東便), 동산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은퇴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 재기하여 다시 세상에 나옴을 일컫는 말을 동산재기(東山再起), 동산에 높이 누워 있다는 뜻으로 속세의 번잡함을 피하여 산중에 은거함을 이르는 말을 동산고와(東山高臥),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는 뜻으로 탐욕스러운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동쪽을 묻는 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으로 묻는 말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대답을 이르는 말을 동문서답(東問西答), 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뛴다는 뜻으로 사방으로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님을 이르는 말을 동분서주(東奔西走), 동양과 서양 그리고 옛날과 오늘 곧 어디서나 또는 언제나의 뜻을 이르는 말을 동서고금(東西古今),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니는 일을 일컫는 말을 동행서주(東行西走), 이리저리 닥치는대로 부딪침 또는 아무 사람이나 구분하진 않고 함부로 맞딱뜨림을 일컫는 말을 동충서돌(東衝西突), 못생긴 여자가 서시의 눈썹 찌푸림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시비나 선악의 판단 없이 남을 흉내냄을 이르는 말을 동시효빈(東施效矉), 서쪽으로 뛰고 동쪽으로 뛴다는 뜻으로 사방으로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님을 이르는 말을 동서분주(東西奔走), 이르는 곳마다 실패하거나 망한다는 말을 동패서상(東敗西喪), 말의 귀에 동풍이 분다는 뜻으로 아무런 감각이나 반응이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동풍취마이(東風吹馬耳),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님을 일컫는 말을 동표서랑(東漂西浪), 동서로 정벌한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여러 나라를 정벌함을 이르는 말을 동정서벌(東征西伐), 봄에 농사를 지어 가을에 거두어 들임을 일컫는 말을 동작서수(東作西收), 동쪽과 서쪽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안개 따위가 짙게 끼어서 주위를 분간하기 어려움 또는 몽매하여 아무 것도 모름을 이르는 말을 동서불변(東西不變), 동에서 번쩍 서에서 얼씬한다는 뜻으로 이리갔다 저리 갔다 함을 이르는 말을 동섬서홀(東閃西忽) 등에 쓰인다.
▶️ 京(서울 경)은 ❶상형문자로 亰(경)의 본자(本字)이다. 언덕 위에 집이 서 있는 것을 본뜬 글자이다. 옛날에는 높은 곳에 신전을 모시고 그 둘레에 사람이 모여 산 데서 서울을 뜻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京자는 '서울'이나 '도읍', '크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京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돼지머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京자의 갑골문을 보면 기둥 위에 큰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큰 건물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京자의 본래 의미는 '높다'나 '크다'였다. 높고 큰 건물을 그려 '높다'나 '크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읍에는 큰 건물들은 많았다. 그래서 京자는 후에 '도읍'이나 '수도', '서울'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京(서울 경)은 (1)억(億)의 1억 배(倍). 곧 조(兆)의 1만배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서울, 도읍(都邑), 수도(首都) ②언덕, 높은 언덕(=原) ③경관(京觀: 전공(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 무덤) ④곳집(곳간(庫間)으로 지은 집), 큰 창고(倉庫) ⑤고래(고래목의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鯨) ⑥경, 수의 단위(單位)(=兆(조)의 만 배) ⑦근심하는 모양 ⑧크다, 성하다(盛--: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⑨높다 ⑩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⑪가지런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저자 시(市), 도읍 도(都), 고을 읍(邑),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시골 향(鄕) 등이다. 용례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주위의 땅을 일컫는 말을 경기(京畿), 서울과 지방 또는 나라 전체를 경향(京鄕),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을 경읍(京邑), 도읍의 성 또는 서울의 옛 이름을 경성(京城), 서울과 인천을 아울러 일컫는 말을 경인(京仁), 평양을 달리 이르는 말을 유경(柳京),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옴을 상경(上京), 서울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귀경(歸京), 닷새 동안의 경조윤이라는 뜻으로 오래 계속되지 못한 관직 또는 그런 일을 일컫는 말을 오일경조(五日京兆), 동과 서에 두 서울이 있으니 동경은 낙양이고 서경은 장안을 일컫는 말을 동서이경(東西二京), 옥황상제가 산다는 천궁을 이르는 말을 천상백옥경(天上白玉京), 서울과 시골을 오르내리면서 널리 교제함을 일컫는 말을 경향출입(京鄕出入), 번화한 서울에서 온 귀한 손님을 일컫는 말을 경화귀객(京華貴客), 서울과 시골을 오르내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함을 이르는 말을 경향출몰(京鄕出沒), 번화한 서울에 사는 대대로 번영한 집안을 일컫는 말을 경화거족(京華巨族), 번화한 서울에서 귀하게 자란 반반한 젊은이를 일컫는 말을 경화자제(京華子弟) 등에 쓰인다.
▶️ 炸(터질 작, 튀길 찰)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불화(火=灬: 불꽃)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乍(사→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炸(작, 찰)은 ①터지다 ②폭발하다 그리고 ⓐ튀기다(찰) ⓑ튀김(찰) ⓒ튀긴 음식(飮食)(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터질 탁(坼), 터질 탄(綻), 터질 균(龜) 등이다. 용례로는 발사하면 어떤 목적물에 맞아 폭발시키는 작용을 하는 화약을 작약(炸藥), 화약이 폭발함을 작발(炸發), 터져서 산산이 흩어짐을 작렬(炸裂), 작약을 넣은 탄환 또는 작약을 통 속에 넣어 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을 작탄(炸彈), 국수와 고기를 넣어 중국 된장에 비빈 중국 음식을 자장면(炸醬麵) 등에 쓰인다.
▶ 案(책상 안)은 ❶형성문자로 桉(안)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安(안)이 합(合)하여 책상을 뜻한다. 나무로 만들어 단단히 안정시켜 놓은 것으로 책상을 뜻하고,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생각하므로 案(안)을 문서나 생각 따위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案자는 '책상'이나 '생각', '안건'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案자는 木(나무 목)자와 安(편안할 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安자는 집안에 여자가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편안하다'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앉아있는 모양만이 응용되어 있다. 案자는 이렇게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安자에 木자를 결합한 것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을 뜻하고 있다. 책상은 공부나 업무를 보는 데 쓰이기 때문에 '생각'이나 '안건', '장부', '공문서'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案(안)은 (1)안건(案件) (2)앞을 막아서 가린 산이나 고개, 또는 담이나 벽 따위 (3)생각한 계획(計劃) 등의 뜻으로 ①책상(冊床) ②생각 ③안건(案件) ④지경(地境: 땅의 가장자리, 경계) ⑤초안(草案) ⑥인도하다(引導--) ⑦상고하다(詳考--) ⑧어루만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상 궤(机), 책상 황(榥) 등이다. 용례로는 인도하여 내용을 알려 줌을 안내(案內), 토의하거나 연구하려고 글로 적어 놓은 거리를 안건(案件), 앉을 때에 벽에 세우고 몸을 뒤쪽으로 기대는 방석을 안석(案席), 책상의 한쪽 가를 안두(案頭), 책상에 쌓이는 문서들을 안종(案宗), 술을 마실 때 곁들여 먹는 음식을 안주(案酒), 생각하여 낸 안을 안고(案考), 얼굴을 마주 대함을 안대(案對), 글의 뜻을 생각함을 안문(案文), 책상 위를 안상(案上), 책상 아래를 안하(案下), 초안에 쓰는 용지를 안지(案紙), 생각하여 냄을 안출(案出), 반딧불이 비치는 창과 눈에 비치는 책상이라는 형창설안(螢窓雪案),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