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밤에 봐요
“제 이름 채연이라고...저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아...네...네...”
“기억 되게 못하시네?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녀들의 이름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이름 알아내려고 일부러 회원가입시켰...
......
...농담이다.
그러나 사실
이 상황에서는 이름을 몰라야,
알아도 모른 척해야 정상이 아닌가.
분명히
10여분 전까지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알고 있는
피씨방 알바생과 손님일 뿐이었으므로.
사실
그녀가 인사를 하면서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 이름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애초에 내 이름을 물어본 것 자체부터가
상당히 어색한 일이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적절한 핑계거리를 찾자면,
그녀들에게 나는
매일 가는 피씨방에서 매일 보는 한 명의 알바생,
나에게 있어 그녀들은
하룻밤 사이에 드나드는 수십 명의 손님들 중 한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은 이상
한 번 들었을 뿐인 이름 정도는
모르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히 매일 관심을 가졌으니까;
“뭐, 앞으로는 기억하고 있으세요. 매일 볼 거면서.”
“아...네. 죄송해요.”
“아뇨. 죄송할 것까지는 없죠.”
말을 마친 그녀는
쿡쿡
하고 혼자 웃어버린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아...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발걸음을 돌려
큰 길 쪽을 향했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 이십분을 지나고 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식당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식당을 찾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뱉어낸다.
“일한지는 오래 됐어요?”
“아뇨...한달...조금 넘었어요.”
“아, 그래요? 우리랑 비슷하네.”
비슷하다는 것은
피씨방에 드나들기 시작한 날짜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을 시작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할 거예요?”
“네? 무 무슨...”
“피씨방 알바요. 언제까지 할 생각이에요?”
글쎄.
특별히 날짜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굳이 일을 해야겠다는 의무감보다는
제대한 이후 복학하기 전까지
집에서 놀고만 있기가 민망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므로.
그나저나
굳이 내가 얼마나 일할지를
궁금해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알바를 하는 날만큼
그녀들을 대하는 날도 많아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나와 마주할지
계산해 보는 것인가.
“아...글쎄요...아마...복학하기 전까지...”
“아! 저기 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24시 콩나물해장국’이라는 간판이 달린
자그마한 식당이 보인다.
내 말은 이미 씹힌 후다.
결국
아무 의미없이 물어본 거였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당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졸린 눈으로 맞는다.
시간상으로 봐선
우리가 첫손님이거나 마지막 손님.
어느 쪽이든
가장 피곤한 손님일 것은 명백하다.
식당 안은
여러 개의 둥근 테이블이 있고
안쪽으로는 방이 있어
앉아서 먹을 수도 있도록 되어 있다.
나는 구석의 테이블로 가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뻔뻔하게도
신발을 벗고 있었다.
먼저 신발을 벗고 방으로 올라선 그녀는
방의 한가운데 테이블 양쪽에
방석을 깔고는 낼름 앉아버린다.
성격의 차이일까.
나는 언제나 입구와 가장 먼 곳,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를 선호하지만
그녀는 손님이 전혀 없는 식당임에도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앉는다.
“뭐 드실 거예요?”
메뉴를 보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콩나물해장국 뿐.
다른 메뉴들은 죄다
삼인분 이상의 고가 음식들이다.
“전 콩나물해장국 먹을 테니까 재석씨는 딴거 먹어요.”
“네...네?”
딴거 먹으면
둘이 먹어도 배터질 텐데
나 혼자 딴걸 먹으라고?
“콩나물해장국밖에...없는 거...같은데요?”
그러자
장난기어린 얼굴로
슬그머니 내 얼굴을 주시하더니
이내 풉
하고 웃으며 말한다.
“알았어요. 그럼 재석씨도 콩나물해장국 먹어요. 한번 봐줄게요.”
이 여자는
이제는 당당함과 뻔뻔함을 넘어서서
또라이기질;마저 보인다.
어떻게
특별히 아는 사이도 아닌
별로 대화도 해본 적 없는 남자에게
이런 농담같지 않은 농담을 할 수 있을까.
“여기 콩나물해장국 두개 주세요.”
주인 아주머니가
물통과 물컵, 물수건을 들고 오자
씩씩한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보통은
남자가 주문하지 않나?
식사를 기다리는 중에도
그녀의 말은 멈출 줄을 모른다.
마치
입에다 신형엔진을 장착한 것 같다.
“언제 복학해요?”
“네?”
“복학할 때까지 알바한다면서요. 언제 복학하냐구요.”
아
듣고 있었구나.
씹힌 게 아니었구나;
“내년 봄에요.”
“흠...그래요? 왜 이번에 안했어요?”
“네?”
“이맘때쯤 가을학기 개강하잖아요. 왜 이번에 안하고 그때 해요?”
“뭐...그냥...바로 복학해봐야 적응도 안될거 같고...”
“내년에는 될 거 같아요?”
“아...네?”
“내년에 복학하면 뭐 달라질거 같아요? 어차피 예비역인데.”
“그...그래도...아무래도 사회생활에 좀 적응하면...”
“나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복학하는게 편할 걸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연신 미소를 짓고 있다.
마치
학교 후배를 약올리는 듯한 표정이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지는
잘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것이 왜 궁금한가.
그리고...
그녀는 대학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가.
“복학하면 몇 학년이에요?”
“네? 아...삼학년이요.”
“그럼 이학년까지 마치고 군대갔어요?”
“네...좀...늦게 갔죠.”
역시나
같은 종류의 질문이 이어진다.
그녀는 아무래도
대학이란 곳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재미...있었나 봐요?”
“네? 뭐 뭐가요?”
“학교생활요. 이학년씩이나 마치고 군대갈 정도면 학교가 재미있어서 그런거겠죠?”
“네...뭐...나름대로...”
확실히 그녀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전까지의 대화가 모두
자잘한 일상에 대한 것이었던 것에 비해
식당에 들어온 이후로는
줄곧 나의 학교생활에 대한 질문뿐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저는...별로 재미없었거든요.”
순간
무언가 뒤통수를 크게 때리고 지나간다.
특별한 반전은 아니지만
나는 처음부터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녀들이 대학생활 따윈
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걸까.
“아...그 그래요. 사람마다...학교생활하는게...다르니까...”
그녀는 슬며시 웃음을 보이지만
조금 전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씁쓸한 미소를 띠고 있다.
마치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 양.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장난기어린 농담으로
밝기만 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무언가 화제전환이 필요하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야겠다.
“아...저...저...그런데...왜 맨날 밤에...피씨방 오세요?”
“......”
아 이런.
역시 나는
그냥 씨발 입다물고 있어야 된다.
그녀들의 정체에 대해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질문은 분위기를 망칠 거라는 것을
왜 예측하지 못하는가.
역시나 대답이 없다.
씁쓸한 미소가 무표정으로 바뀌더니
갑자기 예의 그 장난어린 미소를 슬며시 보인다.
어라?
“우리...무슨 일 하는 줄 알아요?”
의외의 반응이다.
그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당연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라도
그녀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힐 필요는 없다.
물론
그때까지도 확신은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어쨌거나 매일 피씨방에서 밤을 새는 이유가
떳떳한 일은 아닐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네? 네...아 아니...그게 잘...아 아뇨. 몰라요.”
그냥 당황스런 모습으로
어영부영하며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한번 싱긋 웃어 보이고는
조용히 말한다.
“몰라도 돼요.”
......
또 장난질이구나;
하긴
밝히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거리낌없고 당당하더라도
또 행여나 그녀들이 하는 일이
떳떳한 일일지라도
굳이 오늘에야 대화를 나누는 나에게
말해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곧
해장국 두 그릇이 나온다.
조용히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밥을 먹는 내내 서로 말이 없다.
물론 그것은 곧
그녀가 입을 닫았다는 소리다.
그전부터 이미
내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으므로.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또 분위기마저 가라앉은 상황에서
뜨거운 것을 먹다보니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상황이다.
다 먹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앞을 보니
그녀는 이미 수저를 내려놓은 상태다.
뚝배기 속의 해장국은 반 이상이 남아 있다.
“아...다 드셨어요?”
“네.”
내가 고작 먼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겨우 이 정도다.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다가
잠시 멈칫한다.
이 밥은 내가 사야 하는 건가?
조금 전에 오렌지주스도 얻어먹었는데...
이런 내 고민에는 아랑곳없이
그녀는 조용히 오천원짜리 한 장을 내민다.
사실
오렌지주스와 해장국은
그 차이가 너무 크다.
절대로 내가 쫀쫀해서
안 사는 것은 아니다;
계산을 하는 동안
그녀는 먼저 밖으로 나간다.
만원짜리 한 장을 주면 되는 것이므로
나도 곧 뒤따라 나섰다.
처음 이곳까지 함께 걸어올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고작 밥 한끼 먹는 사이에
다소 어색해져 있었다.
“전...이쪽으로 가야 돼요.”
“아...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식당을 기준으로
우리집과는 전혀 반대쪽이다.
아침인데다
또 특별한 사이도 아니니
바래다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네...들어가세요. 다...다음에 뵐게요.”
“재석씨도 잘 들어가요.”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그녀가 돌아서기를 기다린다.
그래도 남자가 돼서
먼저 등을 돌리기는 뭐하다.
그녀도 또한 돌아설 생각을 않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조용히 말한다.
“이따...밤에 또 봐요.”
그래요.
우리 밤에 만나요.
이거 뭔가 말이 되게 야하다.
첫댓글 저,대신 올려주셨네여^^ 잘읽었어여..ㅎ담편 올라오길 기다려용~~
예전에 고딩이랑 ....내사랑 싸가지인가??그거 이후로 정말 잼나게 읽고있습니다..팍팍 업댓점 해주세용^^:;
헉...닉네임 바꿨는데...기억하시네여~^^ 네...잼난글있으면 또 올릴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