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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잡히다
행 21:27-40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행 21:27-40 / [성전에서 체포된 바울] 이레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 있는 바울을 보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은 후에 말하였다. 28)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우리 말을 들어주오. 이 자는 우리 민족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치고 있소. 게다가 이 신성한 성전에까지 이방인들을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히고 있소.' 29)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온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온 줄로 알았던 것이다. 30)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란을 피우며 들끓기 시작하였다. 몰려든 군중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자 성전 문이 곧 닫혔다. 31)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예루살렘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말이 로마군 파견대장의 귀에 들어갔다. 32) 그는 즉시 장교와 군인들을 인솔하여 현장으로 갔다. 군인들이 오는 것을 보자 폭도들은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33) 파견대장은 바울을 체포하여 부하들에게 두 겹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한 뒤 군중을 향해 바울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34) 그러나 군중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떠들어대기 때문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파견대장은 이런 소동과 혼란 속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바울을 병영으로 연행하라고 명령하였다. 35) 그러나 층계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점점 더 난폭해져서 바울을 메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36) 군중은 `그 놈을 죽여라. 죽여 버려라!' 하고 뒤에서 떠밀어 대며 소리 질렀다. 37-38) [바울의 해명] 병영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파견대장을 보고 `부탁을 드려도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파견대장은 놀라서 `헬라 말을 할 줄 알다니, 그러면 바로 당신이 수년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4천 명과 함께 광야로 도망친 그 애굽 사람이오?' 하고 반문하였다. 39) 바울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꽤 큰 도시인 저 유명한 길리기아의 다소 태생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40) 파견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들이 곧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로마군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사도 바울을 체포합니다.
바울이 붙들리다(27-2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서 모세의 율법대로 결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그 결례의 기간이 거의 마쳐질 무렵 또 다른 오해로 인하여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이 붙잡힙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알아봅니다. 더욱이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이 시내에서 드로비모와 함께 있음을 보고 동행자로 여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구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가장 중심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 밖으로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성전의 가장자리에 여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 1.5미터 정도의 담 너머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오로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배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를 어기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 정부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헬라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30-40) 온 성이 소동합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은 천부장이 소동이 일어났음을 알고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고 바울을 체포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위기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천부장은 바울을 범죄자로 여겨 결박합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의 함성은 천부장으로 하여금 소동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진상을 파악하고자 우선은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하지만 백성의 무리가 바울을 죽이고자 따라갑니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성경은 바울이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을 합니다. 바울을 이전에 소요를 일으킨 애굽인으로 착각한 천부장에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임을 밝히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임 알리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나사렛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을 설명하며 또한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적용: 사도 바울은 어느 때이든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주의 복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주의 복음 앞에 온전히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예측과 상상을 한참 벗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 수 없으며 그분의 계획을 측량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어떤 일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기이하기도 하고 어떤 일은 도무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지함속에서 그 도우심을 거부하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다시 세우시기 위해 간구하되 끝까지 기도하되 전부 내려놓고, 엎드리되 목숨까지 내어 드리고 깊이 들어가는 간절함을 필요로 하십니다.
호크마 주석
=====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 바울과 네 명의 서원자가 7일 간의 결례를 거의 마감할 무렵을 가리킨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 - 이들은 에베소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몰랐을 터인데 이들은 보자마자 바울을 즉시 알아보았고(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더구나 이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9절). 무리를 충도하여 - '충동하다'의 헬라어 '슁케오'(* )는 일찍이 에베소에서 이방 종교인들이 일으킨 소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말로(19:23-41), 바울을해하려는 이 무리들의 포악함을 시사한다. 성전 - 이곳은 성전 영내의 '이스라엘의 뜰'(the Court of Israel)로 제사장이나레위인이 아닌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21:28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 - 에베소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보자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르며 바울을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신성한 율법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인 성전을 거스리는 내용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3요소에 대한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분노를 촉발시키려 하였다. 거룩한 곳을 더럽게 - '거룩한 곳'은 성전을 가리키고, '더럽게 하였다'(* , 케코이노켄)는 '평범하게 만들다'의 뜻을 갖고 있는 '코이노'(* )의 현재완료형으로서 이방인을 성전의 '이스라엘의 뜰'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거룩한 성전을평범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더럽혀진 효과가 이미 시작되어 지속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성전에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 뜰'(이방인의 뜰)이 구분되어 있어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뜰'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로마 당국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종교적 금기(禁忌)였다. 만약 이방인이 이 금기를 어기고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갈 경우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양쪽 뜰을 가르는 울타리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울타리를 넘어 침입해 들어가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Bruce). 이런 절대 금기의 규율을 바울이 어기게 하였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분노를 분출시키기에 충분했다.
=====21:29
전에 - 이 표현이 지시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 즉 에베소에 있을 때를 가리킨다(Lenski).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Bruce).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드로비모...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 바울의 적대자들이 선동하기 위해 외친 소리가 사실의 목격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설명되고 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서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지레 짐작하기를 드로비모가 그를 따라 성전에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 바울에 대한 적대감(敵對感) 더 나아가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가 없이 이러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것은 순간적이고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그를 죽임으로써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명을 중지시켜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과 선민 의식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획된 행동으로 짐작된다. 사도로서 바울의 고난은 터무니없는 거짓 증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을 뒤따르는 것이었다(막 14:55-59).
=====21:30
온 성이 소동하여 - 드디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적대자들의 의도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소동하여'(* , 에키네데)는 폭력적인 행동과 격앙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 '키네오'(* )의 제 1부정과거형으로서 24:5에서는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곧 닫히더라 - 사태는 매우 과격하고도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돌변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단 한마디의 자기 변호도 허용하지 않고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다. 여기서 '끌고'(* , 헤일콘)는 '헬코'(* )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바울을 사정없이 끌고 나가는 행위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문을 닫은 것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문을 닫은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분노한 군중들이 성전으로 밀려 들어와 그곳에서 바울을 살해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살해 사건이 있게 되면 이는 곧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서는 그런 일을 피하려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이 제단 뿔을 잡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제단 뿔은 제단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뿔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살륙(殺戮)이 행해질 수 없다고 믿어져 왔다(왕상 1:50).
=====21:31
죽이려 할 때에 - 바울을 끌어낸 무리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몰고가고 있는 장면이다. 최소한의 형식적 재판 절차도 없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 무리들이 종교적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반발과 군중 심리적 흥분으로 극도로 포악해져 있음을 말해준다. 군대의 천부장 - 바울이 연루되어 성전에서 발생한 소요는 민첩한 정보망을 통해 그 지역의 치안 책임자인 천부장에게 즉각 전달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오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던 터라 그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천부장은 보통 1000여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키며 이 부대의 구성은 보병 760명과 마병 240명으로 되어 있었다. 23:26에 의하면 이 천부장은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였다.
=====21:32
군사들과 백부장들 - 이 군대의 군영(軍營)은 성전 북서쪽의 언덕 위에 세워진 안토니아 성에 있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즉시 사건 현장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백부장이 대략 100명의 군대를 지휘하였고, '백부장들'로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최소한 200명 이상의 군대가 출동한 것이 된다(본서 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대 제도' 참조).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 바울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던 위기의 상황은 천부장과 그의 부하들의 출동으로 일단 모면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 군대가 출동했을때 바울을 죽이려던 행위를 중단하였던 것은 그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산헤드린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후에도 빌라도에게 다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던 예수의 경우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마 26:66;27:1, 2).
=====21:33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 이것은 마치 한 피의자의 양팔에다 두 형사가 자기의 팔목과 피의자의 팔목에 수갑을 채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당시에 군인들은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 체포용 쇠사슬을 가지고 다녔고 죄수의 도주를 막기 위하여 자기와 함께 묶었다. 천부장이 폭력을 당하고 있던 바울을 묶으라고 명한 것은 일단 그가 죄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12:6), 군중들로부터 바울을 분리시킨 것은 그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법의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11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21:34
무리 가운데서...부르짖거늘 -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게 한 후 무리들에게 바울의신상과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33절). 그런데 무리들이 매우 소란스러운 가운데 여러가지 말을 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그 사건의 실상을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부르짖거늘'(* , 에페포눈)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재판할 때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큰 고함소리로 미친듯이 부르짖는 것'을 뜻한다(눅 23:21). 영문 안으로 - 광적으로 흥분하여 외쳐대는 무리들의 소란은 사실을 알고자 하는 천부장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그리하여 천부장은 무리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 심리(審理)를 하기 위하여 바울을 일단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여기서 영문은 군대의 주둔지인 안토니아 영문을 가리킨다.
=====21:35
층대...들려가니 - 이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에서 안토니아 영안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가리킨다. 이 계단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무리들의 난폭함이 극에 달하여 로마군인들이 바울을 손으로 높이 들어올리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들려갔던' 이유를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보지만(E. Haenchen) 근거없는 추측일 따름이다.
=====21:36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 무리들의 포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이들은 연행되어 가는 바울을 향하여 '그 놈을 죽여라'(공동 번역)고 외치며 따라갔다. 한편 '따라감'의 헬라어 '에콜루데이'(* )는 '아콜루데오' (* )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되어 있어 무리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바울을 죽이라고 외쳐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여기선 한번으로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고(22:22;28:19),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의 수난 때에도 그러했다(눅 23:18;요 19:15).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였었다(눅 11:47, 48). 실로 이 백성은 역사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거역(拒逆)하여 '그를 죽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21:37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 로마 병사가 바울을 연행하여 영문(34절)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때 바울은 헬라어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며,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 할 줄 아는 것을 의외의 일로 생각하여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당시에 헬라어는 '코이네'(* )로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 언어였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 국한되었다.
=====21:38
난을 일으켜...애굽인 - 바울이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천부장은 한편 놀라면서 다른 한편, 그렇다면 바울이 과거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였다. 천부장이 말하는 이 난(亂)은 역사가 요세푸스가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A.D. 54년경 한 애굽인 거짓 선지자에 의해 예루살렘에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위대한 선지자로 자처한 이 애굽인은 추종자 3만여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 광야와 감람산 등에 웅거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파괴 및 로마군의 멸망을 예언하며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였다. 본문에 나오는 사천 명은 그 가운데 자객으로 선별된 무리들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음모는, 로마 총독 벧릭스(Felix, A.D. 52-58)의 군대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이 애굽인 거짓 선지자는 감쪽같이 도망감으로 해서 좌절되었다. 그러니까 천부장의 질문은 바울이 바로 이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21:39
길리기아 다소 성 - 바울은 자신이 천부장이 말한 애굽인이 아니라 혈통은 유대인이며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다소 성이라는 사실을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출신지인 길리기아 다소 성이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다소는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훌륭한 대학이 있는 문화적 수준이 높은 도시였다. 바울이 다소 출신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는 제롬(Zerome)의 기록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바울의 부모들은 본래 갈릴리의 기스칼라(Gischala) 출신이었다. 그런데 주전 1세기 경에 로마군에 의해 북부 팔레스틴이 침탈을 당한 후에 바울의 부모들이 길리기아 다소로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 된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여 천부장의 의혹을 해소한 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다. 그는 사실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것이다(13절).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히브리 방언으로 - 백성들에게 말할수 있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바울은 자신과 복음에 대해 변증(辨證)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영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계단 맨 윗부분에 쇠사슬로 그의 양팔을 결박한 채 함께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흥분한 무리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수백명의 로마 병사들이 서 있고 그 뒤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흥분된 감정을 큰소리로 표출하고 있다. 이때 바울은 그의 양손을 들어올려 백성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히브리 방언'은 구약성경 시대의 히브리어와는 다른 것로 포로기 이후 아람어화한 언어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이 아람어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상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바울이 이 언어로 말한 것은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함이었다.
< 설 교 >
체포된 바울
행 21:27-40 / 정용섭 목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
사도행전 독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이미 20:17절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제 그 시련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결의식은 곧 율법 문제로 인해서 불거진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을 풀어보기 위해서 바울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누가가 서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진행을 따르면 이 정결의식이 오히려 바울에게 닥친 시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바울이 정결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시빗거리가 불거졌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본문 27절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난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로가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고.” 군중을 선동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에페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에페소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큰 선교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 대극장에 모인 군중들은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 하고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쳤다고 한다.(19:34). 사람들은 천성에 따라 살기도 하지만 문화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런 열광적인 도시 에페소에서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제 지난날 그들이 에페소에서 경험했던 그런 방식으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군중들을 선동하는 중이다.
원래 바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에 들어가 공개적으로 정결의식을 행한 이유는 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품었던 의혹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부정한다는 이 의혹이 이번의 정결의식으로 인해서 해소되었는지 아닌지, 누가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대신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등장시켰다. 왜 그랬을까? 누가는 바울과 사도들 사이에,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율법 문제로 인해서 벌어진 갈등 구조의 방향을 바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싸움으로 바꾸려 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헬라파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사이에 놓인 갈등이 아무리 심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건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별로 지혜롭지 않았을 것이다.
에페소 출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가한 비난은 이미 앞에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야고보와 원로들이 바울에게 충고한 내용과 다를 게 없다. 바울은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28절). 다만 에페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할례 대신 성전을 강조했다는 사실만 다르다. 이렇게 할례 문제가 성전문제로 바뀐 이유는 이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상대화한다는 소문만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힘들다고 보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실증을 앞세운 것이다. 29절에서 우리는 그들의 음모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바울로가 시내에서 에페소 사람 드로피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필경 바울로가 그 이방인을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죄는 이렇게 어림짐작으로부터 시작된다.
로마군 파견대장의 개입
에페소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에 따라서 예루살렘 온 도시가 소란해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전통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힌 사람은 죽여야만 했다.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 성전 문지기는 더 이상 성전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을 닫았다. 누가는 31절에서 거기에 모여들었던 군중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증거도 없으며, 최소한의 종교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는 건 약간 과장된 진술로 보인다. 특히 그 당시에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이 로마 총독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로 바울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미 앞에서 바울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쳐온다는 사실을 예고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그 예고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로마군 파견대장이 예루살렘 성안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백인대장들을 대동하고 직접 현장에 출동했다. 파견대장이 출현하자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린치는 그쳤다. 파견대장은 바울을 체포하고 쇠사슬 둘로 그를 결박했다. 거의 죽음 일보 직전에 이를 정도로 가혹행위를 당한 바울을 다시 두 개의 쇠사슬로 묶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조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누가는 이를 통해서 행 21:11절이 성취되었다는 걸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베드로도 감옥에서 두 명의 간수 사이에서 쇠사슬로 묶였든 적이 있다.(행 12:6).
폭동으로 비화할 수 있는 현장을 일단 제압한 파견대장은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군중들에게 질문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군중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며 소란을 피워서 진상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34절)고 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어떤 분명한 죄목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른 소리’를 내지르고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내의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되었을 것이다. 바울을 공격하는 그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단지 교회 공동체를 시끄럽게 만들 뿐이었다고 말이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으로 끌어가게 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난폭하게 굴어서 바울을 끌고 가던 군인들은 바울을 둘려 메고 난간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런 장면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군인들이 바울을 둘러멘 채 흥분한 군중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지금 그런 장면을 정확하게 기술하려는 게 아니라 그때의 분위기만을 전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자연스런 묘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중들이 뒤따라오며 “그놈을 죽여라!”(36절) 하고 외친 장면은 에페소 군중들이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라고 외친 장면과 흡사하다. 바울은 이렇게 비이성적인 집단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반론 기회를 얻는 바울
군중은 선동에 약한 법이다. 에페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서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미친 듯이 떠드는 군중을 뒤로 한 채 바울과 파견대장은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 병영 문 앞까지 끌러간 바울이 먼저 파견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한 말씀 드려도 좋겠습니까?”(37절). 그는 왜 로마 파견대장에게 로마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말을 걸었을까? 그는 출생 때부터 로마 시민권 소지자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가 헬라어를 구사한 이유는 그 당시에 라틴어보다는 헬라어가 훨씬 고급의 언어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이 대목은 바울의 학문과 지성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현대 신학계에서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차치하고 그가 당대에 최고의 석학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의 복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을 통한 신학화 작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곧 바울을 통해서 일어난 기독교의 헬라화가 기독교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인간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헬라와 로마 문명이라는 토대에서 해석하고 적용한, 그래서 논리화한 바울의 신학 작업을 기독교의 변질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바울의 고급 헬라어를 전해들은 파견대장은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오? 그렇다면 당신이 얼마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파견대장이 거론하는 이집트 사람은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이 사람은 펠릭스 총독의 재임 기간 중에(52년부터) 반로마 무력투쟁을 이끌었다고 한다. 본문에 자객으로 번역된 ‘시카리’는 ‘시카’, 즉 단도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예수의 제자 중에도 여기 출신이 있었다.
바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르소 출신의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39절). 바울의 이 대답이 실제로 바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으며, 또한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이 대답에서 누가의 신학을 읽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 바울을 무력혁명가와 비교한 파견대장의 말은 그 당시에 헬라파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로마 정부의 의혹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 또는 기독교를 적대하는 어느 집단이 퍼뜨린 소문의 일부일 수도 있다. 누가는 차제에 이런 의혹을 완전히 불식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반로마 무력투쟁의 두목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직할인 다소 출신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반(反)로마가 아니라 친(親)로마라는 뜻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어떤 관계였는가를 파고들려면 한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매우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수의 공생애와 원시 기독교와 교부들, 급기야 밀랑 칙령으로 기독교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로마 제국과 숙명적으로 얽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지 않았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부정될 때는 순교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투쟁했지만, 그것이 인정될 때는 지나칠 정도로 로마 제국에 협조적이었다. 어쨌든지 지금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반로마 무력투쟁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이다.
군중들에게 한 마디 하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을 파견대장이 받아들였다. 바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답지 않게 흡사 파견대장과 같은 권위로 군중들을 조용히 시켰다. 누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들이 아주 잠잠해지자 바울로는 히브리말로 연설하였다.”(40절).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첫째, 로마는 기독교에 우호적이다. 로마의 권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둘째, 유대인들은 결국 바울의 영적인 권위 앞에서 잠잠해질 것이다. 바울의 복음 선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드디어 체포된 바울
사도행전 21:27-22:1 / 서금석 목사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바울이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며 바울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결례를 네 사람과 함께 지키며 그 비용을 부담해서 바울로 하여금 율법과 규례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타협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은 유대인에 맞게, 이방인은 이방인에 맞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 제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놓고 보니까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체포되어 죽을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전략은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략은 실패한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신앙생활하는 데는 전략이 꼭 필요한 것입니까?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왕 예수 믿으려면 고지식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너무 융통성이 많아지면 신앙의 힘, 능력을 잃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편협하게 예수 믿느냐?", "왜 그렇게 촌스럽게 예수 믿느냐?" 이렇게 비판해도 개의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독하게 믿으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성 수하세요. 아무리 급한 일 있다 하더라도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부터 드리세요. 주일에 예배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아직 신앙이 제대로 자라잡지 못한 것입니다. 십일조-이왕 하려면 철저히 하세요. 남에게 한 두마디 들은 것 가지고 말하지 마세요. 자녀 교육-신앙중심으로 철저히 하세요. 조금 조금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다 빼앗겨요. 존경받는 지도자의 자녀가 교회에 잘 다니지 않으니까 '주일만 지켜라' 타협했습니다. 나중보니까 주일도 안 지켜요. 아닙니다. 철저하게 가르쳐 해요. 가끔 보면, 남의 얘기 가지고 자기 소신인양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자신이나 잘 믿어요. 이왕 믿으려면 '전략이다 적당한 양보다'하지 말고 고지식하게, 독하게 예수 믿으세요. 바울을 보면서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 믿으려면 처음부터 독하게 믿으세요. 새벽기도도 하고, 청소도 하고, 등.....
1.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이유(27-29)
사도 바울은, 바울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까지 대라는 야고보의 제안대로 성전에서 결례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유대인들에게 붙잡힙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할까요? 성경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에베소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쉽게 알아보았지 않습니까? 에베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하던 곳이었습니다. 기적과 능력도 많이 나타나긴 했지만, 소란과 역경도 많았습니다. 바울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비상한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자 에베소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두려워하여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에베소에 3년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에베소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사랑과 열정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온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열심히 전도했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은혜를 주먹으로 갚는 격 아닙니까? 바울이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인생 살다 보면 우리도 가끔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문제삼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28절) 유대인은 이방인과 가깝게 지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못할 짓 했다 이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으라' 해 놓고서는 '율법으로는 구원얻을 수 없다' '이방인은 할례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으니,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다르지만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에게 '할례 받으라' 권한 것도 바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율법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까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성전을, 이방사람인 헬라 사람과 함께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힌 것 아니냐?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지성소와 제단, 제사장의 뜰, 유대인의 뜰(남자들만), 유대 여인의 뜰, 그리고 계단 내려가 낮은 곳에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방인들은 이방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큰 벽이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 이상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뜰 사이에는 '이곳을 지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된다'는 경고문도 있습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보존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방인을 멸시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제로 이방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유대법으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형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29절을 보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어요. 바울이 이방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성전에도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것이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울이 미웠어요. 어떻게든 바울을 없애버리고 싶었어요. 무슨 건수만 있으면 잡으려 했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니-마음 바탕에 이런 마음이 깔려 있으니 지레 짐작하고는 "옳지 됐다"하고는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리 싫어했습니까? 그리 미워했습니까? ·하나는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비주류 유대인이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사니 이방인과는 크게 상관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온 세계에 퍼져 사는 유대인들이었기에 언제나 이방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제기 했지만, 직접 들고 나선 것은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추측됩니다. 그 밑바닥에는 주류, 비주류의 감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지성인이기 때문에 미워했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철학자였습니다. 공부도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무시해도 될 터이지만 높은 학문을 쌓은 지성인이 주장하면 따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돌로 맞기도 했어요. 바울을 죽이려고 악착같이 쫓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단순하게 신앙의 문제만이었을까요?
여러분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지요? 없으면 좋겠지만 갈등이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그 갈등이 서로 간에 신앙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입니까? 신앙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들도 많지 않습니까?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보다 인간성, 사람됨됨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유대인과 바울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감동으로 복음을 통해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구원받게 하는 바울을 유대인들은 그냥 봐 줄 수가 없었어요. 수많은 군중들을 휘어잡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왜요?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결국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시기심과 질투심-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 질투하면서 공부해요. "질 수 있느냐?" 시기 질투하면서 사업해요. 운동도 이기려고만 하니 운동이 제대로 되겠어요? 목회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해 뭣하겠어요? 마음이 잘못되면 오해하기 쉬워요.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 오해한 내가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눈으로 바울을 보니까 드로비모가 들어가지도 않은 성전에 함께 있었다고 짐작하고 사실처럼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세상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여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서기관이 되고, 장로가 되고, 그래서 교회에서 존경받게 되었는데, 한순간에 바울이 나타나서 외치니 백성들이 다 그리로 쏠려요. 그러니 볼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경계할 것 -시기질투입니다. 시기질투 때문에 신앙이 무너집니다. 시기질투 때문에 평안이 깨어집니다.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은 시기 질투 뒤에는 반드시 마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기 질투 버리세요. 사랑하세요. 세워드리세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주십니다. 명심하세요. 많은 경우에 마음에 평안이 없는 까닭은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이기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핍박받는(두드려 맞는) 바울(30-36)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말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왜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을까요?
성전 내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성전 밖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는 바울을 죽이겠다는 적극적인 표현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 성전 뿔을 잡는 자는 누구도 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 성전 뿔을 잡는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성전 뿔을 잡지 못하도록 재빨리 끌고 나간 것입니다. 30절 후반절 봅니다. 바울이 성전 밖으로 끌려나가자 성전의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구나' 무슨 생각했을까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돌 던지는 사람 뒤에서 '잘한다'하면서 옷 지키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울-바울 아니었습니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나왔고, 성전 문은 닫혔고, 이제 끝장입니다. 32절 끝을 보니 천부장과 백부장과 군사들이 오기까지 바울은 두드려 맞았어요. 왜 때렸어요? 31절 보니까 죽이려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죽음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은 이미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붙잡힌다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의 고통과 절망은 어떻겠습니까?
이때 천부장이 백부장과 군사를 거느리고 소요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천부장은 로마군 1000명의 지휘관이죠. 백부장은 100명의 지휘관입니다. 오순절에는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세계 각 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도시에 수십 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든다는 것은 정치가들, 치안 담당관들에게 퍽이나 신경쓰이는 일이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위쪽에 안토니아 탑이라고 하는 로마군의 망대에서 천부장이 치안 질서 유지를 위해 진두 지휘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란하다는 정보가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군사와 백부장을 거느리고 현장에 당도해보니 바울이 죽도록 두드려 맞고 있었습니다. 천부장과 군사들이 도착하니 그들을 보고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33절로 35절을 보면 우선 바울을 결박하여 격리시킨 후에 이 사람(바울)이 누구며 무슨 일로 때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군대의 병영 안으로 끌고 가는데 36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봅니다. "큰 무리가 따라오면서 '그 자를 없애 버려라!'하고 외쳤다" 바울 죽이려고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시기질투처럼 무서운 것 없어요. 마귀 짓입니다. 이겨야 해요.
여기서 하나 생각합니다. 동족에게 맞아 죽어가는 바울을 구해 준 것이 누구였습니까? 천부장이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천부장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부장을 통해 바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세상 살면서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 때에 누구 구해 줍니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돈이요? 돈으로 다 되는 것 같아도 못하는 것이 더 많아요. 지식요? 아는 사람이 더 답답하고 불안한 법 아닙니까? 의사요? 고치는 병도 많지만 못 고치는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위기의 때에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 성경 말씀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의 가시밭 길 같이 느껴질지라도 분명히, 반드시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바울과 천부장(21:37-22:1)
영문을 모르게 되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교양있는 헬라어 엑센트로 말하자 깜짝 놀라 묻습니다.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주후 54년 경 한 애굽인이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이 사람은 선지자 행세를 하면서 유대인들을 로마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동하여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축제기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정치인과 관리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슴에 단도를 몰래 품고 다니던 4000명이 있었는데 '애국적 암살단'이라 칭했습니다. 유대인들 마음에 로마사람들에 대한 한(恨)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로마군의 즉각적인 진압으로 흩어졌고 주모자는 몰래 도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천부장은 바울이 바로 그 사천명의 자객을 거느렸던 애굽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애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명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작은, 촌 동네가 아니라 길리기아의 지방의 수도 다소 태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바울 시대의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이 상당히 수준 높은 도시였습니다. 신분과 출신지역을 분명하게 말하고는 천부장에게 말합니다. "부탁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한번 말할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천부장이 기회를 주어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사도행전의 다음 본문 아닙니까?
여기서 저는 두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천부장이 오기 전까지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죽이려는 마음으로 때렸으니 온 몸이 피투성이었을 것입니다. 천부장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이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 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천지에 바울을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도 없었고, 편히 쉴 곳도 없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천부장이 지켜 줄 수 있고 이 영문이 쉴 곳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피곤하고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은 그냥 주저앉지를 않았습니다.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이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천부장에게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 놓고 실컷 두들겨 팼으니 그들이 승자입니까? 아니면 피묻은 얼굴로 그들 앞에 다시 선 바울이 승자입니까? 누가 승자입니까? 누가 패자입니까? ·또 하나 도대체 바울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백성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너희 구원은 너희 문제다'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내 할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서고 있습니다. 왜였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사도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예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중요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내게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나 자신이 중요합니까? 묻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필요한 것입니까? 믿음의 딜레마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수준에 우리 믿음이 머문다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다니면서도, 예수믿는다 하면서도 내 입장과 내 형편이 먼저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예수 믿는 기쁨은 언제나 절반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 접어두고, 자존심까지 접어두고, 피투성이가 되어 백성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정리하면서
신앙생활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때나 지금 우리의 때나 시기와 질투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신앙을 무너뜨리고 평안을 깨뜨립니다. 시기와 질투 뒤에는 반드시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천부장을 통해 바울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믿고 따라주는 자를 선한 길로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백성들 앞에 선 바울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아니었습니까? 고지식하게 예수 믿고 전하는 바울. 우리 신앙은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고지식하게 신앙생활해 보세요. 신앙은 산보가 아닙니다. 독하게 신앙 생활해 보세요. 믿음이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죄 없는 죄수
행 21:27-22:1 / 김 조 목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롬3:10) 하심으로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할까요? 하심은 예수를 시험코저함이라. 그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하심으로 양심에 가책 받은 자가 다 가버렸고 예수님도 여인을 용서해 준 것이 요8:1-11에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 되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의 대적자가 되어 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하니 달려온 천부장과 군인들이 군중 속에서 바울을 구하며 누구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쇠사슬로 결박하자하여 죄수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죄수”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합니다. 왜 죄 없음에도 죄수처럼 되었을까를 생각하여 은혜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배경을 보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교회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부터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았고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바울사도가 결박과 환란을 당한다고 성령의 감흥으로 말했으나 사명 다 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와서 그 동안의 선교 보고 했을 때 예루살렘교회 감독이었던 야고보가 바울 사도를 오해하는 유대인을 위해 나실인 결례를 청하므로 바울도 평화를 위해 결례를 행하게 하였으나 성전에서 바울을 본 에베소에 온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죽여야한다고 충동하였다. 그 때 천부장과 군인이 달려와 그를 결박했다. 그럼에도 소리치는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서 죄 없는 바울사도가 왜 죄수처럼 되었을까?
1. 잘못된 신앙적 오해로 죄수처럼 되었습니다.(27-30절)
유대인들은 선교지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아니해도 된다. 할례 받지 말라했고 예루살렘 성전도 무시하여 성전의 신성함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의 추측으로 이방사람 드로비모를 성전에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갈 뜰이 있고 “바깥뜰”이라는 이방인들이 갈 수 있는 뜰도 있었는데 그 때에 선을 그어 놓고 이방인이 조금만 범해도 실제로 돌로 쳐서 죽였던 선민사상, 우월주의로 가득 찼기에 성전 모독이 되었다. 예수님께도 이렇게 죄목을 붙였는데 예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라.”하심으로 형식만 같은 율법이 아니라 그 참 뜻을 이루어 갈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바울 사도도 할례 받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으니 할례냐 무할례냐는 형식이 문제가 아님을 (고전7:18-19)말했고 실제로 디모데에게 할례 받도록 하게도 했었으나 형식만을 추구한 잘못된 신앙적 오해로 죄 없는 바울을 죄수취급하게 했습니다. 성도여!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선민의식의 자만과 형식에 빠진 율법주이가 하나님의 참된 뜻은 저 버리고 의식만으로 행함으로 구원 얻고자 하는 일은 우리는 없는가? 살펴봄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바로 바로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로운 성도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 전파에 열심히 죄수처럼 되게 하였습니다.(39-2:1)
자기의 사명이 복음전파이기에 상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만큼 열심히 전했고 유대인들의 오해로 천부 장에게 결박을 당하였으니 저들에게, 말하게 해 달라 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보면 복음전파의 열심히 그들 죄수처럼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죄수처럼 결박당한 이래로부터 약 5년 동안에 옥중생활이 시작이 되었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면서도 거기서도 복음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언제 어디서나 식어지지 아니 하였기에 죄수처럼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도 이러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공격도 있고 억울한 일 당해도 사명 다하려고 하는 자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복 주십니다. 우리도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자 되어 언제 어디서나 승리하시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위해 죄수처럼 되었습니다.(31-33절)
현상적으로 볼 때 바울사도가 결박당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니 온 성이 소동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천부장과 군인들이 결박한 것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로 호송되어 갈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바울을 통해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사도를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이 법도 무시한 채 죽이려 했고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 군중 심리적으로 혼동을 받아 온 성이 소동되었으며 훗날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가 40여명이나 된다고 했으니(23:12,13) 군인들이 보호하지 아니하면 로마를 갈 수 없었으니 죄수로 결박당한 것도 로마 가기 위한 것이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 통해 전 세계 복음화가 시작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작은 환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됨이니 감사와 찬송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 하는 바울사도를 왜 죄수처럼 쇠사슬로 결박을 당하게 하셨는가? 잘못된 신앙의 오해가 자기 교만 판단으로 죄수처럼 되게 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신앙생활 돌이켜야 합니다. 사명 다하려는 그 열정이 죄수처럼 되었으니 우리에게 이 열심 주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를 이루시기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죄수처럼 되게 하심이니 우리 삶에 작고 큰 문제를 인제 낙심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아멘-
과격파와 성전 모독의 문제
김영규목사 / 행 21:35-36
죄수로서의 바울의 사역
본문부터 사도행전 28장 마지막까지는 바울이 체포당하여 죄수로서 보낸 기록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예루살렘에서(21:27-40) 보낸 기록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가이사랴에서(24장-26장) 보낸 기록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로마로 가기까지, 또한 로마 도착 이후의 기록입니다.(27장-28장)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머물렀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세분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로마군에게 인계 되기까지입니다.(21:27-40) 둘째는, 유대인 군중들에게 해명하는 장면입니다.(22장) 셋째는,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장면이고(23:1-11), 넷째는,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장면입니다.(23:12-35)
오늘 읽은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에게 체포당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와 유럽에 수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인으로서의 사역 못지않게, 죄수의 신분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19-20)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수로 있을 때에 몇 권의 성경을 기록하여 보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죄수 아닌 죄수가 되었는지, 그 배경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 없는 로마 시민권자였으나, 붙잡혀서 심문 당하고 로마까지 압송당하여, 순교당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과격파 유대인들의 선동
바울이 체포당하게 된 시발점은 과격파 유대인들의 선동입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27) 유대인 중에서도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주동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란 에베소를 수도로 하는 지금의 터어키의 한 지역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나, 초막절, 혹은 오순절과 같은 절기에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이때는 아마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다수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회다 싶어서 갑작스럽게 소리 높여 고발했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28) 이들이 바울을 고발한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비방했다는 죄목입니다. 둘째는 율법을 비방했다는 죄목입니다. 셋째는 성전을 비방했다는 죄목입니다.
물론 이들의 선동은 전혀 거짓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비방한 적이 없고, 성전을 비방한 적도 없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 바울이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추정일 뿐입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 함이러라.”(29) 예루살렘 시내에서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본 것으로, 성전에도 함께 있었다고 추론했습니다.
종교가 됐든지, 사상이 됐든지, 목적 달성을 위해서 폭행을 선동하는 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거짓 죄목과, 군중 동원, 폭동으로 맞섰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랑의 희생으로 마주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을 대적한 무리들도 예수님을 대적한 무리들과 똑같습니다. 거짓 고발, 군중 동원, 폭동의 수순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30,31)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5-36)
인간 세상에 과격파가 항상 문제입니다. 과격파들은 인간보다 그들의 목적을 더 중시합니다. 과격파는 사람의 생명보다 이념이나, 사상을 앞세웁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깁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스탈린, 김일성, 김정일, 킬링 필드의 폴 포트 같은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수 천 만에서 수 백 만 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테러를 저지르는 알카에다, 스킨헤드, kkk, 북한 공산당도 마찬가집니다. 이들은 앞에 종교나 민족을 내세우지만 명목 뿐입니다. 회교도들을 보면 자기네 종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무참히 죽이고 죽습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 해도, 인간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 국민을 폭력 아래 굶어죽게 만드는 북한 정권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는 과격파 운동가들도 그렇습니다. 사회를 개선하는 것은 좋지만 사람을 제물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과격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목표지만, 강제로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 전파가 목표지만 강제로 전파하지는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좋은 목표가 있다 해도, 누구라도 서로를 적대시 하면서 이루어 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유 불문하고 과격파는 되지 마세요. 온건파가 되세요. 온유함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온유함은 모세의 성품이고 사도 바울의 성품이요 대인관계의 지침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3:2)
선동을 받은 군중들은 이유도 모른 채 떠들고 날뛰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선동하는 아시아 유대인보다, 선동 당하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더 문제입니다. 무리들은 이유도 모른 채, 바울을 붙잡고, 때렸습니다. 천부장이 죄수가 누구이며, 죄목이 뭐냐고 물으니, 도대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34) 요즘 거리로 나서서 선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동가들은 어떤 목적으로 선동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선동가는 있습니다. 히틀러도 선동가이고, 트로츠키도 선동가이고, 모택동이도 선동가이고, 김일성이도 선동가이고, 오늘날 툭 하면 거리로 나서는 무리들도 선동가들입니다. 문제는 선동에 놀아나는 군중들입니다. 선동자들이 자빠지든 엎어지든 선동에 놀아나지 말고, 차분히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 모독의 이슈로 죽이려 하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성전 문제입니다.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 함이러라.”(28-29) 성전을 더럽혔다! 다른 어떤 이슈보다 유대인 군중들을 자극하는 발언입니다. 성전 문제는 예수님 당시부터, 사도행전에 말미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왜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그렇게 특별한 주제가 되었는가? 성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광야 시절에 성전은 이동식 성막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이 성전을 역사적으로 제1성전이라고 합니다. 제1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 586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군대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지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들이 성전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는 시편 84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4,10) 성전 처마에 둥지를 튼 참새나, 제비를 부러워할 정도로 성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B.C.520년경 다시 돌아 와서 성전을 세웠는데 이를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성전 이라고 부릅니다. 스룹바벨 성전 역시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제2성전은 급하게 지은 것이어서 솔로몬 성전처럼 화려하고 견고하지는 못했습니다. 곧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이후 성전이 다시 세워진 것은 헤롯 시대입니다. B.C.20년경 유대지역의 왕이었던 헤롯대왕에 의해서 성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헤롯성전 혹은 제3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헤롯은 절반은 에돔인 절반은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거창하게 재건했습니다. 일차 공사는 약 9년간의 공사 끝에 마쳐졌습니다만, 주변 공사는 계속되어서 예수님 당시에도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당시에도 착공한지 46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 공사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서 착공한지 82년이 지난 주후 63년경 알비누스 총독때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거창한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명절 때면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이 성전으로 몰려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모독과 함께 성전 모독을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도 성전 모독죄로 죽임을 당하셨고,(마27:40,막14:58) 스데반 역시 성전 모독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행6:13-14) 바울 사도 역시 성전 모독 죄에 걸려들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은 성전에 끌어들였다는 죄목입니다. 당시 성전의 구조를 보면 영상으로 보여드린 그림과 같습니다. 헤롯 성전은 대단히 넓은 구역에 세워졌습니다. 성전 대지는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에 이릅니다. 이 대지 한 복판에 동서 방향으로 성전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성전 건물은 14개 계단을 거쳐 올라가야 되는 약간 높은 위치에 지어졌습니다. 이 성전 건물 지역과 계단 아래의 외부 지역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습니다.
이 울타리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분리의 벽입니다. 이 울타리 바깥 마당을 “이방인의 뜰”이라 불렀습니다. 이방인은 성전 내부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 벽은 상징성이 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영원히 하나 될 수 없다는 유대인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 보세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4-19)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벽을 십자가로 허물어버리셨습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만일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였다면 얼마나 큰 처벌을 받아야 할까요? 당시 이방인의 뜰과 성전 지역을 나누는 울타리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경고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1871년과 1935년에 울타리에 붙어 있던 헬라어로 된 경고문이 발굴된 바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만일 누구든지 이런 일로 체포당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헬라어와 라틴어로 씌여 있는 것은 비유대인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한다는 경고입니다. 라틴어는 로마의 언어입니다. 지배자였던 로마 정부가 이런 경고 문구를 허용한 것은 그만큼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계율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로 결심한 이상 이 죄목은 벗어날 수 없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의 성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 성전 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이 성전은 영원히 닫혀지고 맙니다. 주후 70년 로마군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82년에 걸쳐서 지어진 성전이, 완공 된 지 불과 7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입니다.
이 없어질 성전 때문에 군중들은 외쳐댔습니다. 없이 하소서!(눅23:18, 요19:15) 죽여라! 죽여라! 예수님을 향해 외치던 소리, 스데반을 향해 외치던 소리가, 이제 바울을 향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이 바울을 보호하다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31-34)
아이러니 하게도 바울을 구한 것은 로마 군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지역의 서북쪽 모퉁이에 헤롯이 건축한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습니다. 이 요새에는 약 600명에서 1천 명 이내의 로마 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이나, 폭동을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전 뜰에서 일어난 소동은 즉각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몇 명의 백부장과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백부장의 수가 複數로 된 것을 보면 최소한 200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 죽이려 한 바울을 이제 로마 군이 구출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완수하시기까지는 아무 원수들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어떤 자들도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간적인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명에 매달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져 주십니다. 사명에 죽고, 사명에 사는 사람들이 되세요. 복음 전도의 사명, 교회 건설의 사명, 자녀 교육의 사명, 사회 정의의 사명, 사명에 충성하세요. 환경이 어떻든지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개의치 마세요. 오직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옛 성전은 헐고 새 성전을 지으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성전의 이슈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성전 때문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 역시 성전 때문에 체포되어 로마까지 가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뭡니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성전에 대해서 뭐라 하셨습니까? 옛 성전을 헐어버리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정말 존중받아야 될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정말 존중 받아야 될 성전은 주님의 몸 된 성도 여러분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건물, 눈에 보이는 물질 때문에, 사람을 홀대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기 위해 힘쓰세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눈에 보이는 성전에 매달리다 보면, 온갖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다툼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다 건물 때문입니다. 예배당 짓는다고 다투고, 시비를 일으키고, 반목합니다. 건물은 적당히 간수하면 됩니다.
더 소중한 진짜 성전은 성도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인격의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신앙의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이런 성전을 짓는 사람은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남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화평을 이루고, 영혼을 얻습니다. 위대한 교회 건설자가
응답받은 바울
헹 21:27-36 / 신성종 목사
여러분들 가운데서 주님 앞에서 기도의 응답의 체험을가지신 분들은 한번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마음으로 믿어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참 재미는 기도가 응답될 때에 옵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그처럼 기도했던 로마방문의 기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응답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응답됩니다. 다만 기도응답의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기도응답은 크게 세 가지로 응답됩니다. 첫째는 [그래 원하는 대로 주마 (Yes)]하는 응답이 있고, 둘째는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아니다 (Wait)]하는 응답이 있고, 셋째는 [안된다. 그것은 너에게 해롭다 (No)]의 응답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래 원하는 대로 주마]라고 할 때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에 하나님께서 긍정적 응답을 하십니다만 그러나 방법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한다는 점입니다.
돈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돈을 줄 때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돈 대신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믿습니까?
1. 바울의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활동의 세계가 너무 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전혀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릇이 크다 작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것은 기도의 범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고, 자신과 가정은 물론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고, 가장 그릇이 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의 사람입니까? 그릇이 큰 사람이기를 축원합니다.
행 19:21절에 보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린 후에 로마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땅 끝을 서바나(스페인)로 생각하였는데 그리로 가기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가야만 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하는 대로 금방 기회가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선교가 끝날 무렵에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로마를 금방 갈 수 있는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법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로마서 1장 10절에 보면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바울의 로마 방문의 소원을 기록하고 있고, 그 다음 11절에는 로마 방문의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22~25절에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바울의 소원은 세상끝인 서바나까지 선교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로마를 교두보(beachhead)로 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에서 교두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수영에서 [diving]이란 종목이 있는데 이 때에 발판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전쟁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 그 중에서도 파키스탄을 교두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항공모함을 교두보로 사용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교두보의 활용은 목회에서도 그렇고, 선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선교사들이 여기 저기 많이 흩어져 있는데 이들이 바로 선교의 교두보가 됩니다. 저는 뉴욕의 줄리아니 시장을 얼굴도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9.11 테러사건으로 인해서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힘들지만 그것이 줄리아니 시장에게는 기회였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어려움이 많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회인 것을 믿으시고 선교와 전도의 기회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셨는가?
바울이 기도한 그대로 로마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기도응답의 방법은 바울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생활의 신비입니다.
■ 저의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유학생활이 끝나고, 제가 항상 기도했던 제목은 “하나님, 제에게 세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기도가 응답되지않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수로서 있을 때에 제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회 만년에 [망원경 식 성경 연구]라는 책을 쓰게 하시고, 다음에는 한국에 보내셔서 국민일보를 통하여 많은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성경이야기는 이미 출판이 되었고, 이번에는 평신도 신학이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런책 을 통해서 세계의 여러 선교 지와 교회에서 가르칠수 있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젊어서는 저를 그냥 내버려두셨던 하나님께서 늙은 뒤에 사용하시는 점이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마치 모세를 젊어서는 버려두셨다가 늙어서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바울이 원하는 대로 로마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너무도 신비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는 다섯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1.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기 때문에 많은 높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만약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로서 로마를 가게 되었다면 그는 일반 사람들만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감으로 인해서 [수많은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왕들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재판한다는 이유로 벨릭스 총독, 베스도 신임 총독은 물론, 아그립바 왕도 만나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바울이 할 일은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재판기록을 보았습니다만 그러나 바울의 재판 기록은 그 자체가 성경이고, 간증이고, 전도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로마 방문은 바울이 원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선교사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간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다.
2.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했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선교사로 로마에 갔다면 로마로 가는 중간에 암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천부 장까지 동원하여 그를 보호했습니다.
천부장을 거느리고 가는 것은 황제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십 부장 (열 사람의 우두머리), 오십 부장 (오십 명의 우두머리), 백부장(백명의 우두머리), 그런데 본문에는 천부장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외형적으로는 죄수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로마 병정들의 보호 아래에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죄수의 몸으로 보냈다는 말입니다. 참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방법입니다.
3.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한 것이 재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솔직히 로마로 선교여행을 할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가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국고 비용으로 배도 타고, 음식도 먹으면서 갈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천부 장이 함께 갔기 때문에 수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요, 계산방법입니까? 따라서 바울은 로마의 재정으로 로마의 선교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놀라우신 방법입니까?
4.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된 것이 홍보적인 차원에서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선교를 하려면 홍보를 잘해야 하는데 바울은 천부 장 같은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갔기 때문에 [홍보가 자동적으로] 되었습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갈 때 천 부장을 비롯한 수많은 군인들이 따라갔으니 아마 저들은 수군수군했을 것입니다.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잡혀간데? 그런데 왜 저렇게 많은 군인들이 둘러싸있지? 극악 범인가? 아니래, 예수를 믿는다는데,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렇게 잡아간데? 하면서 민간 홍보가 저절로 되었을 것입니다.
저도 따지고 보면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매번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여 저를 홍보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보다 더 광고가 되었고 유명해졌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름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5.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갔기 때문에 [최고의 시설을 갖춘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마이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 가서 제가 본 것은 수 만 명이 함께 모여도 다 들을 수 있도록 자연적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선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개인 전도를 하였고, 또 때로는 재판형식의 간증집회를 하였고, 또 때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변명형식의 복음증거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계속되겠습니다만 바울은 최고의 시설을 갖춘 선교를 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까?
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방법에 순응하면서 날마다 기도의 확신과 계속적인 기도생활을 가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최고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먼저 [기도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요 14:14절은 저에게 기도의 확신을 주신 말씀입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만 확신을 줍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다음은 마7:7~8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더 이상의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이 두 구절은 저에게 항상 기도의 확신을 주는 구절입니다. 솔직히 저도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의심을 가질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제게 음성으로 응답하십니다. 할렐루야.
2. 다음은 [계속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기도가 응답 받게 된 이유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은 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호흡처럼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통]을 하라는 것입니다. 호흡은 항상 합니다. 의식적으로도 하고 무의식적으로도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꿈으로 응답하실 때도있잇고, 음성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음은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다가 쉴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쉽니다. 피곤해서 쉽니다. 시험을 받아 쉽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기도에 응답을 받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돈 한 푼 드리지 않고, 선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우리들에게도 이런 응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양향모 목사 / 행 21:27-34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을 반갑게 맞이해주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되는 것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교회에 있는 유대인들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율법이나 제사제도나 관습들을 지키지 말라고 선동하여서 모세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만나면 혼을 내주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비롯한 교회의 장로들이 사도 바울에게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게 하고 그로서 그들이 바울도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게 하여서 잘못된 오해를 풀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서원을 하고 그에 따른 결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복음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배반자로 여겼고 유대교를 없애려고 하는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부터 그런 유대인들과 사도 바울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유대교를 옹호하고 율법과 성전을 옹호하는 유대인들과 하나님께서 율법이나 성전을 통해서 주시고자하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사도 바울과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도 성전에 왔다가 사도 바울을 발견하였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잡아서 죽이든지 항복을 받든지 하여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 때가 유월절 절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절기를 지켰고 사도 바울도 더 많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절기에 맞춰서 예루살렘에 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충동해서 사도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을 붙잡아서 성전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까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거기 모인 유대인들이 나쁜 사람들이거나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저 멀리 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을 말함)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만사를 제쳐놓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죄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율법을 비방하고 이곳(성전)을 비방하고 헬라인 즉 이방인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방인들을 데리고 성전에까지 들어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선택해서 특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주셨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신들에게만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을 주셨다는 것이 엄청난 자랑이었고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과 거기 따른 여러 가지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의인이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때가 언제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흉년을 피해서 가나안 땅에 살지 않고 애굽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400여 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을 거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만 섬기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애굽에서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400년 동안을 사는 동안 그들에게는 노예로서의 근성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법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개나 돼지와 같은 짐승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사는 법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이 율법입니다. 애굽 사람들처럼 온갖 잡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노예에게 대하는 것처럼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때리고 죽이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두 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주신 법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입니다. 노예처럼 살지 말고 노예를 학대하는 애굽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자유인으로서 자유를 누리며 서로를 사랑하면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잡신들을 섬기지 말고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길 때도 우상숭배를 하는 것처럼 섬기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 또 다른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고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착취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니까 율법을 지키기는 하는데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지키는 시늉만 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없고 공의만을 내세우고 자기 의만 세우고 다른 사람은 정죄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율법을 다 잘 지킬 수가 없는 타락한 인간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식적인 사람이 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 더 큰 죄인이 되게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합니다. 율법의 가장 큰 뜻이 이것인데 이런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가졌다는 자부심만 내세우고 그 뜻을 알려주는 사도 바울을 오히려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내 모습을 비추어 보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이 죄악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며 그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알 수 있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몇 가지 지켰다고 착한 일 좀 하면서 살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속에는 시커먼 죄악들을 가지고 살면서 겉으로 착한 척해서 자신은 의로운 사람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알량한 몇 가지 의로움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고 믿음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바보들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따라 바른 삶을 삶으로 세상의 종 사탄의 종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의 제사도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고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짐승처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인이며 장차 저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도 하나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불러 주셨는지를 그들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복을 주신 것은 그 후손들을 통해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을 멸시했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유대인을 배반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나만 구원 받으면 되고 나만 신앙생활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복음을 주신 것은 특별히 우리 광성교회처럼 복음을 확실히 알게 해 주시고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해 주신 것은 이 복음의 위대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복음을 받고 이렇게 믿음이 위대한지를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귀한 일을 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된 일꾼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기쁘게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위해서 이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본문 31-34절에 “31.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죽이려고 달려들자 이로 인해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동이 천부장에게까지 들렸다고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치안유지를 위해서 로마 군인들이 파송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대의 천부장은 부하를 천여 명을 거느린 부대의 장을 말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23장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소란한 현장의 소식을 들은 천부장이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가게 하셨습니다. 천부장이 달려가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치고 죽이려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이 사도 바울을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에게서 격리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사람을 치고 죽이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모인 유대인들이 뚜렷하게 바울의 죄상을 말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어떤 사람은 저런 말로 소리만 지르니까 진상을 알 수가 없어서 바울을 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잘 따져보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잘 살펴보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가 선동을 하니까 그 말만 듣고 흥분해서 이성을 잃고 달려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같이 시내로 다니는 것을 보고 이방인을 성전까지 데리고 갔다고 오해를 하고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사도 바울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바울을 싫어하는 몇몇 사람의 선동에 의해서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 이성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가 못합니다.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그냥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들이 하면 그것이 유행이라고 다 따라하고 남들이 입고 다니고 남들이 들고 다니면 다 그냥 따라하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좀 생각을 해보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따져보고 따라하든지 말든지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싫어하실 일인지를 분명히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이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성전에서 끌고 나와서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에서 파송된 군대의 천부장을 동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개입을 하시지만 특별히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에 함께 하셨듯이 우리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우리의 삶에 역사하십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셔서 천부장을 통해서 그들 손에서 사도 바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고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이 성경의 핵심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역사하심을 믿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힘써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 21장 27~40절 / 유민용목사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은 20장부터 계속 예고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한주간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실제적으로 바울에게 찾아온 죽음에 가까운 고난을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유를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올 때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소망의 이유가 되시는 분께서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두려운 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의 이유는 성도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됩니다.
바울을 붙잡고 끌고 나간 후에 성전 문이 닫혀졌습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라고 번역합니다. 굳게 닫혀진 문은 바울을 향한 유대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 간 바울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달려 들었고 죽을 만큼 맞게 된 상황입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좌절하고, 불안에 짓눌려 떨고,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불안에 짓눌려,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는 묵상하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내 몸이 아프면 비로소 아픈 사람들이 보여집니다. 바울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이 닫힌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관계속에서 굳게 닫혀진 마음의 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아픔과 슬픔, 이런 환경이 직면하게 되면 인생의 문이 닫혀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 문은 바울을 향해 열려진 문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주도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예수님의 겸손함으로 다리 놓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바울의 모습을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하며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2천년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본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주일간 결례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결례가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전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단지 추측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성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성전 밖에서 죽을 만큼 맞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로마의 천부장이 수하의 백부장과 군인들을 인솔하여 달려와서는 때리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이미 현장은 소동으로 인해 바울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사태 파악이 안되니까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천부장의 체포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은 그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순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상황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견된 일이었기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부장에 의해서 체포되어 죽음을 모면하게 됩니다. 당시 바울의 생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40절에 나타나는데요.
“저 사람들에게 제가 잠시 한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군중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죽도록 맞고도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간증입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부르신 상급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는 온통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어 보입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르며 추위와 헐벗음을 당하며 견디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 동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다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도대체 바울 안에 있던 예수의 생명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생명은 예수께서 주신 생[生]을 살라는 명령[命] 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 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다는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요. 죽고 사는 시간적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누려집니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해서 이제 자신의 자랑거리는 자랑할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신분과 정체성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귀했으면 지금으로 보면 바울의 출신은 대통령 집안의 출신 배경이었고, 유대교 3대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며, 학벌도 최고 자랑거리인데, 좋은 학벌과 집안 배경들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요?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인생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구원 받는데 어떤 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뜻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임이구요. 세상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의 컨디션에 따라 우리가 지닌 자랑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다해서 전하는 마지막 외침의 그 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1933년 1월 15일 독일의 한 교회 저녁예배에서 본훼퍼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하는 자는 이미 그 속에 빠져 든 것입니다. 두려움은 악의 그물입니다. 악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 다음에는 두려움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 보다 크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강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죄는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두려움은 그 당시 독일 땅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도 지금 예배 드리는 이곳에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땅끝까지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바울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바울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1.4m 높이의 돌로 된 벽을 만들어 쌓았습니다. 그곳에는 헬라어, 라틴어로 외국인은 성전과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 문구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 체제에 갇혀 살던 이들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이 되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빈 마이어가 쓴 Saving Jesus from the church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교회에서 구출하라입니다. 마이어는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예수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수고와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입술로만 경배 하는 신앙은 복음을 교회의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이고 복음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는 것을 넘어 행동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좀더 사랑하며 살걸 그랬나, 좀더 베풀며 살아야 했나 후회하는 삶이 되면 안됩니다. 인생의 종착지에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은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키는 일에는 힘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들의 화려한 성전에서 이미 떠났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와 시기심, 미움과 정죄하는 마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희생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어서, 실수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의 자리에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명은 울면서라도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정결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로 여겼던 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심으로 그 사람의 부정함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려 내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살아갈수록 우리 앞에 문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성밖으로 내쳐진 듯 우리를 외롭고 고독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 가운데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에 이끌려 지속적으로 깨달으려고 달려간다고 절절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 고난이 오고 삶이 힘들어 지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는 고난 가운데서 넘어질 수 있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경쟁에서 이기고 빨리 달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자기욕심과 욕망의 도구도 아닙니다. 고난이 올 때에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영생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장미빛 같이 붉게 물든 십자가와 푸른 하늘처럼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눈물겨운 수고가 없다면 어떻게 영혼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을 가르켜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남겨진 과업은 저와 여러분이 이뤄야 할 사명입니다. 한주도 사명자들이 걷는 걸음 걸음마다 주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간증
유민용목사 / 행 21:27-40
사도행전은 AD 30-63년 사이의 기록입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누가는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만 어떤 사건들은 사도행전에서 과감히 생략합니다. 예를 들어 3년여 기간의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시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임에도 21장에서 체포되는 과정부터 유대 군중들을 향한 바울의 간증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무려 43절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된 13장에서 28장까지가 대략 17년간인데 이를 날수로 따지면 대략 6,205일입니다. 그런데 13장부터 28장까지가 총 569절입니다. 따라서 43절에 해당하는 분량은 대략 7.5%가 됩니다. 수치적으로 볼때 누가는 바울의 간증을 평균치의 몇백배 이상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에 있어서 바울이 받는 소명과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에 대한 43절의 기록은 바울의 위대한 간증이기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실제적 경험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몇년 전에 받은 은혜의 기억으로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몇달전에 몇년전에 먹는 밥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양식을 통해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새부대에 매일의 말씀을 담는 것이지요. 어느날 수없이 읽던 구절이 내 마음에 다가오고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니 반짝이는 별빛처럼 마음 속에 쏟아져 내려 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 자녀가 진짜 부모가 맞는지 매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거짓이 없는 하나님 사랑을 경험할때 인생에는 간증이 시작이 됩니다.
바울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1절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들에게 바울은 ‘형제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기전에 자신을 심문하는 최후 진술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용했던 호칭입니다. 영어성경은 brothers and fathers라고 번역했고, 유대인들을 향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행동에 비하면 참 온유한 언어입니다. 헬라어로 아델포스(αδελφός) ‘형제’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연합된 형제인데, 바울은 핍박하는 너희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배척당하면서도 ‘사랑하는 내 형제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의심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임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의 빛과 음성이 보이고 들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윤복희씨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아실겁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윤항기 목사는 1978년 폐결핵 말기 판정으로 6개월 선고를 받았는데, 동생 윤복희가 이혼의 아픔을 겪고 힘들어 할때 절망속에서 희망을 놓지 말자는 취지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를 만듭니다. 한 방송에 나온 윤복희씨의 인터뷰를 들었는데요. 노래 가사의 위로, 등불, 벗, 형제, 노래, 기쁨이 되어 주겠다는 고백은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임을 약속하는 내용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기쁨이 이런것 아니겠습니까?
주안에서 우리는 형제를 품어 안으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번 학기 금찬을 시작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도전이 되는 메세지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간사님들의 모습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지체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과 기대하는 마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합니다. 바울과 스데반에게서 영혼을 바라보는 애통함이 묻어납니다. 복음을 향한 열린마음을 갖으십시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에게서 자유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는 죄수의 몸으로 체포되었고, 몸은 상처로 가득했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와 담대함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경험했기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에 더 큰 세계가 열려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뜻을 깨닫게 될 수록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유대인들은 편협한 확신과 종교적 열심으로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죄가 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경험은 자신의 이성과 종교적 열심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는 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살면서 빛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한 채 살았던 바울에게 참빛이 되시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오자 자신 안에 빛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예수를 거부하던 어리석음을 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주의는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옵니다. 물질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현대사회는 과다한 자원의 개발로 인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질주의로 인한 과도한 소비주의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안에 물질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저마다 물질만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이신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과는 다르게 예수를 아는 빛을 알도록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은 예수의 빛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만약 인간의 양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면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확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려고 했지 바울의 고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깨닫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연구해도 이 신앙적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있는 인격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성경은 이전에 읽던 관점과 완전히 달려져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열어 준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만들어진 예수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고 순교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던 바울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까워하지 않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구약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언약이 발견되고, 옛언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울은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바울은 이사야 66장 20절을 새언약의 계시로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류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바울은 이사야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양이나 소는 제단에 바쳐진 순간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경험은 바울에게 생애 전 존재의 변화요, 세상과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예수를 믿고 이사야 66장 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7:47-49) 예수님을 경험하고 난 스데반의 마음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스데반 집사의 마음의 성전에 거하시며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바울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인격적 간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성전에 계시면 간증이 시작됩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예수께서 함께하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의 간증들이 넘쳐나는 것은 주님을 통해 성경과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없이도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오랜 시간 연구하다 보면 성경적 지식이 쌓여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3인칭 시점일 것입니다. 오늘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도 지성이 없어서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지성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근본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간증은 언제나 1인칭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받아들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먼저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택 받았다는 확신속에서 다른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데 그들의 확신은 걸림돌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분명한 경험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져야 비로소 땅을 보며 살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탐욕, 불의, 합당치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감격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신앙적 경험이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지요. 그래서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인 것입니다. 바울의 간증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선량한 유대인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교육 받았고, 랍비 가말리엘의 엄격한 지도 아래 우리 종교의 전통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처럼 나도 항상 열정적으로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나도 이 예수의 도와 관련된 사람은 누구나 맹렬히 공격해서, 하나님을 위해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그들을 잡아 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최고의회의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려고 우리 형제들이 있는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형을 받게 하는 권한이 부여된 공문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오쯤 다메섹 외곽에 이르렀을때,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강하게 비쳤습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고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느냐?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동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그 대화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주님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내가 처음 계획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는 눈이 멀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내 손을 잡고 데리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메섹 유대인공동체가 다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그가 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들어 보시오하고 말했고, 내가 눈을 들었는데, 어느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대를 택하셔서 그분의 활동계획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대는 의롭고 죄가 없으신 분을 실제로 뵈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핵심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 세례를 받으십시오. 죄를 깨끗이 씻어내고, 하나님과 직접 사귀십시오. 정말로 아나니아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에 어느날 나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잠겨 기도하다가 그분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죄 없으신 분을 뵈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유를 묻지 말고 거거라.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노년에 쓴 디모데서를 보면 그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백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지성을 압도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덮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을때 비로소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아나니아를 만났던 경험들 말입니다. 믿음생활 안에 있는 수많은 간증들은 실제로 가슴 떨리는 고백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쉽게 생각하면 얕은 감격만 누리게 됩니다. 인간은 한시라도 주님의 은혜를 떠나면 서로를 비방하고 비판하며 평가하는 흉악한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겸손해 지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가 설수 있는 은혜의 감격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 실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을때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그 지혜를 가르치시겠습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며 자라가십시오. 존재의 변화없이 우리가 어떻게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받은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고후 6:2) 변화된 성도들에게 은혜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의 새로운 눈이 떠지고 ,그 빛이 인도하시는대로 하나님께 은혜 받는 일,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행길에 만나게 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간증을 채워가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양향모목사 / 행 21:35-40
폴 존슨이라는 영국의 유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가 쓴 “지식인의 두 얼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명한 지식인들의 감쳐진 좋지 않은 뒷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아주 그럴듯하고 훌륭한 철학이나 이론들의 글을 발표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유명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주장이나 그들이 쓴 글과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동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론을 만든 루소라는 사람은 아이를 키울 때 교육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식들을 고아원에 내다버렸다고 합니다.
노동자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마르크스는 그의 가정부를 45년간이나 월급도 주지 않고 착취하였다고 합니다.
사회운동가요 소설가인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드나들고 멋진 저택에서 화려한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병적일 정도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척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행세하고 다니지만 그의 삶을 살펴보면 나쁜 일도 많이 하고 삽니다. 특별히 유명한 사람일수록 똑똑한 지식인일수록 나쁜 짓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도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사람들 앞에서는 착하고 멋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뒤에서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같아서, 뭔가 좀 더 많이 알면 남을 더 잘 속이고 좀 더 많이 가지면, 나쁜 짓도 더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타락한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인간들의 이론이나 철학처럼 거짓되거나 이중적이지 않고 진실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인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왕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잘한 점도 기록을 하지만 잘못한 것들까지도 그대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허위가 아닌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기준으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도 인간들의 그런 위선적인 행동이나 거짓고백이 아니라 진실 된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선행을 좋아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런 위선보다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을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는 진실 된 고백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은 우리 기독교가 무엇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 세계로 펴져나가고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유대인들의 지도자들과 기독교의 지도자인 사도들이 무엇을 가지고 서로 대항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 제사를 드리고, 할례를 행하고 관습을 따라 사는, 이런 행위에 중점을 둡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을 따라서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선한 척 의로운 척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예수님께 듣고 배운 진리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일평생을 온갖 고생을 하면서 핍박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으로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부 잘못된 교회의 지도자들도 자기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인간의 선행이나 충성을 더 많이 가르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본인 스스로는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본문 35-37절에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기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도바울은 성전에서 반대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율법이나 할례나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고 외치고 다니는 바울이 얄미워서 만나면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가 성전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유대인을 배반한 바울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함께 이 사람을 성전 밖에 끌고 나가서 죽여 버려야 한다고 외치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소동의 소식을 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현장에 달려와서 사태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그들에게서 분리하고 쇠사슬을 채우고 병영 안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며 따라오고 있습니다. 바울을 없애버려라 바울을 죽여 버려라 하고 외치면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겨우 바울을 그들에게서 데리고 나와서 병영 안으로 들어가려고 계단을 오르는데 군중들이 바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따라오기 때문에 군인들이 바울을 높이 쳐들고 계단을 올라야 했습니다. 겨우 계단을 올라온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 당신에게 이야기 좀 해도 되는가? 라고 했더니 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헬라어를 할 줄 아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헬라어를 아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바울의 지식 상태를 물어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그냥 나쁜 짓이나 하다가 도망 다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인가를 물어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헬라어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세계적인 언어였습니다. 헬라는 그리스를 말하는데 지금은 소아시아 터키의 건너편 유럽의 초입에 있는 나라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유럽과 소아시아 애굽 그리고 인도까지 점령한 패권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점령지마다 헬라의 문화와 언어 종교를 전했기 때문에 바울 당시 헬라가 망하고 로마가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도 헬라문화와 헬라어는 세계적인 언어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이 잘 전파 되도록 정지작업을 미리 하셨습니다. 그 일 중에 하나가 알렉산더 대왕을 통하여 문화를 통일하고 언어를 통일하는 일이었습니다. 헬라어가 세계 공통어가 되게 하시고 그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헬라어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통하여 정치를 통일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게 하신 것은 모든 나라들이 로마의 속국이 되게 하심으로 전도자들이 마음대로 세계로 다닐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에서 전 세계로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하신 다음에 그 때를 맞추어서 “때가 차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위해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 시민권자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세계적인 언어인 헬라어와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다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하셨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바울 같은 사람도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런저런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준비된 지식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다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인이 되게 하셨으며 헬라어로 신약의 절반이상을 기록하도록 헬라어를 잘 아는 지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안일을 위해서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거짓말이나 하고 남이나 속이는 그런 두 얼굴의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그 지식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였으며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이 핵심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알게 해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한 지식인이 자기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면서 이 복음을 전하려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킨 애굽인이 아니냐
본문 38절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쫓기는 것을 보고 그저 나쁜 짓을 한 힘없는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말을 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천부장에게 언뜻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애굽 사람이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다가 도망간 사건이 있었는데 바울보고 네가 그 애굽 사람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혹은 자기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을 모으고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5장에 드다나 유다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 5:36-37)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온갖 환자들을 고치면서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때 유대교 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려고 할 때에 가말리엘이라는 유대교 율법 교사가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제자들을 놓아주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키다가 도망간 애굽인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혁명을 일으켰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 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였고 혹시 바울이 그 애굽인이 아닌가 하고 물어본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하는 과정은 과히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웠던 율법이나 제사나 할례나 모든 관습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른다는 것은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세상 사람들이 일으켰던 그런 혁명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들은 다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혁명도 결국은 자신과 그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민주주의로의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또한 독재자가 되고 그 독재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들과 자기들을 추종하는 주동 세력들만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혁명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또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하나같이 고난을 당하고 대부분 순교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중세시대에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많은 개혁자들도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서 성도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천국까지 바로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른 목회자요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본문 39-40절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어를 한다고 하니까 천부장이 애굽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은 유대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시골사람이 아니고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2장에 들어가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자세히 사도 바울의 출생이나 자란 배경이나 그가 겪은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가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천부장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는 지리적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무역도시였습니다. 무역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던 도시이며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아주 유명하고 잘 사는 도시에서 태어났고 또 많은 학문을 접할 수 있는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히브리어란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언어가 된 아람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방인들의 언어인 헬라어도 능통했고 유대인들이 쓰는 아람어도 능통했으며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식인이었고 혁명가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나라의 성도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은 온갖 수모를 당하며 목숨까지 그 일을 위해서 바친 순교자였습니다. 그런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오늘 우리도 이렇게 복음을 전해 듣게 되고 그 복음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 상속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그럴듯한 말들을 하여 우리들을 현혹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은 그 말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우리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말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은 못한다고 해도 주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신성종목사 / 행 21:37~22:11
우리가 하는 일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또 자기만이 해야 하는 두 가지의 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따라만 가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꼭 해야 할 일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주저하게 되고, 망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만이 해야 할 일에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시체 말에 “종이 아무리 많아도 주부가 할 일은 따로 남아 있다”고 했듯이 교역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당회장을 대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당회장의 할 일은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회개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설교는 제가 미주성산 교회에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한 내용입니다. 제가 미주 성산 교회에 간지 꼭 만 6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때에 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떠나게 되어 참 마음이 기쁩니다. 또 7층 건물의 에스크로도 끝이 나서 부채에 대한 부담도 줄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또 저를 모함하는 재판도 승리로 끝이 났기 때문에 저의 남은 인생을 거기서 다투면서 허비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약한 저의 집사람에게 여러 가지의 전화를, 통해서 걱정하게 해서 의사의 최후통첩에 가까운 경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에서의 목회는 실제적으로 끝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장래를 생각하면 에베소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주님의 경고가 생각나서 걱정이 많았고, 그 염려대로 제가 떠난 다음에 4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1. 주님을 만난 바울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가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다메섹도성에서의 체험을 세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에 먼저 나오고 다음은 오늘의 본문이 두 번째 기록이고,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6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중요합니다. (1)만남의 중요성 우리에게는 일생동안 다섯 번의 주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들의 어린시절의 기본적인 성품과 운명이 결정됩니다. 둘째는 배우자의 만남을 통해서 일생의 동역자가 결정됩니다. 히브리의 격언을 보면 “악처는 백년의 흉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중요합니다. 셋째로 그러나 더 주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들의 이 세상과 내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넷째는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 어떤 성도들을 만나느냐, 쉽게 말하면 어떤 교회를 만나느냐에 따라 주님과의 사역의 동지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다섯째는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함께 일할 동료가 결정되고, 또 우리의 이웃이 결정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만남은 우리들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과의 만남이 여러분들의 영성발전에 도움이 되고,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주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22:7-11)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들은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7절)하는 주님의 음성 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믿게 될 때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환상 중에 듣고 체험은 다 다릅니다. 저는 환상과 음성을 다 들었습니다. 빨간 십자가 위에 가시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저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그 날 성가대의 찬양의 가사였습니다. 찬송가 185장의 가사였습니다.“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내 몸을 희생하건만 너 무엇 하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꺼굴어졌고, 목사가 되기로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인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죽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핍박이요 하나님께 대한 죄란 것을 부활의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음성을 들어야만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느낌으로 들을 수도 있고, 환경으로 깨달을 수도 있고, 환상으로 보게 할 수도 있고,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체험만을 고집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바울은 환상과 음성을 들었는데 그 때 그가 물은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첫째는 “주여 뇌시니이까?”(22:8절)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인 것을 아는 것,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2)둘째는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22:10절)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의 발견은 바로 나의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본 예수님은 바로 역사의 주관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우리가 열왕기상하와 역대기상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네가 얼마나 사업을 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정치를 얼마나 잘 했느냐? 자녀를 얼마나 낳았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물은 것은 네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 성전과 관련해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오늘 저도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교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까? 가끔, “나는 그동안 교회를 위해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ABC도 모르는 분들입니다. 우리의 쉼은 생명이 끝난 뒤입니다. 바울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두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한 뒤에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누가 이르리라”(10절)고 말씀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을 준비하셔서 먼저 바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다음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21절에 보니까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그 사명을 모르고 있다면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 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직접 들려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려주기도 합니다.
3.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과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의 시간표를 어떻게 작성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구상 중에 있습니까? 저 개인의 기도 제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저는 금년 21004년에는 중국 심양에 가서 선교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교두보를 만들고,
(2) 금년의 남은 날에는 국민일보에 쓰고 있는 글을 4권의 책으로 출판하고,
(3) 2005년도에는 study Bible을 완성하고,
(4) 2006년도에는 저 나름대로 성경 번역을 혼자서 시작해서 끝을 내고, 저의 공적 삶을 끝내기를 원합니다.
(5) 일단 공적 삶이 끝나면 자서전을 써서 후배들에게 유익을 주도록 하려고 합니다.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주님이 누구신지 깨달아야 바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재능도 다르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주인이 되신 주님께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후회가 없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은 일회적입니다. 이 일회적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려면 먼저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고 다음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라기는 주님을 만나서 여러분들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사명을 가진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변론, 믿기전의 행적
김영규목사 / 행 21:37-22:5
바울의 변론 요청
본문은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 당한 직후에 행한 첫 번째 변론입니다. 바울은 우선 천부장에게 발언의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21:37)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은 천부장은 짐짓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유창한 헬라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37) 헬라어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요 문화어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영어쯤 되는 말입니다. 천부장이 놀란 것은 바울을 무식한 범죄자로 알았다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은 계속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38) 천부장의 질문은 약간 엉뚱해 보입니다. 소요는 무슨 소요이고, 자객, 애굽인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천부장은 지금 당시로부터 약 3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후 54년 경 자칭 선지자였던 한 애굽인 사이비 교주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약 3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모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명령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되면 성안으로 쳐들어가서 로마군을 몰아내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는 오히려 총독 벨릭스의 군대에 의해 4백 명이 죽고 2백 명이 포로가 되자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바로 그 애굽인 교주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답변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39) 애굽인이라니, 광야로 가다니, 무슨 소리요? 나는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 출신이오. 다소는 당시 소아시아의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무식한 자가 아닙니다. 교양 있고 양식 있는 문화도시 출신의 시민입니다. 바울은 이제 당당하게 요청합니다. 내가 이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좀 주시오! 천부장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바울에게 변명을 허락했습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21:40)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22:1) 바울은 층대 위에서 군중들을 향해 발언합니다. 층대에서 말하게 된 것은, 바울이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안토니아 요새의 병영으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 서북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계단이 높기 때문에 군중들을 바라보는 강단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군중들에게 “부형들”이란 호칭을 사용합니다. 유대 사회의 원로들도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예의를 갖췄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말로 변론을 했습니다. 바울이 굳이 히브리말을 사용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청중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상당 수는 히브리 말을 모르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 고유 언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조차도 히브리어 성경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잘난 척 하고 바울을 반유대적이라고 몰아세우니까, 바울은 오히려 히브리어로 받아쳤습니다. 너희가 유대인이냐? 나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다! 바로 그런 감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논조는 바울 서신에도 가끔 나타납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고후11:22)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식쟁이들이 아닙니다. 상식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서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조금 배웠다고, 기독교를 무식쟁이 종교로 예단하지 마세요.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한다고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니까 놀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남보다 못나서, 혹은 뭔가 모자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바울의 개종 이전 신앙
바울은 자신이 중죄인이 아님을 얘기하려고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발언 내용을 보면 변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우선 자신이 과거에 유대교도 였음을 얘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17:22) 당신들은 참으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종교성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원을 사모하고,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고, 경배합니다. 원숭이나 침팬지가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신앙 가진 것을 보셨습니까? 오랑우탄이 뭔가 향해 빌고 절하는 것 봤어요? 오직 인간만이 영적 존재이고 종교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종교,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각별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22:2-3) 바울은 누가 보든지 자랑할 만한 것이 꽤 많았습니다. 첫째로,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입니다. 그는 문화 도시 다소 출신입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뉴욕이나, 파리, 런던 쯤 되는 도시입니다. 도시 출신답게 바울은 문학, 철학, 예술, 스포츠 등의 각 분야에 출중하고 교양이 많았습니다. 둘째로, 종교적인 특별 교육입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제자입니다. 가말리엘은 랍비의 계보에서 탁월한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상 7인의 라반(요20:16) 중에 한 사람입니다. 라반은 랍비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랍비의 호칭입니다. 가말리엘의 부친은 라반 시므온이고, 조부는 유명한 라반 힐렐입니다. 힐렐은 샴마이와 더불어 바리새 종파의 양대 산맥입니다. 샴마이는 강경 보수파이고 힐렐은 온건파입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사실은 그가 율법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개종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과거 다른 종교에 탁월한 지식이 있었던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졌다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를 가졌거나, 종교에 열심 내는 사람은 그만큼 종교성이 강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어야 합니다. 다만 내가 가진 신앙이 정말 진리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겸손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신령, 무당, 일월성신, 고목나무 귀신, 부뚜막 귀신, 온갖 귀신들을 믿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믿는 것이 가장 옳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과거에 어떤 종류든지 신앙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무신론자였습니다. 대충 아무 것이나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어떤 신앙, 어떤 종교를 가졌었든지 상관없습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베뢰아 교인들처럼 이것이 진리인가 깊이 생각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인으로서 가졌던 우월감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바울이 가졌던 종교적 우월감입니다. 바울이 유대교에 열성이 있었던 것은 자타가 공인합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했던 동기도 바로 유대교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였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22:4-5)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기독교를 유대교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지구상의 어떤 종교보다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은 모든 것이 儀典的이고 종교적입니다. 의전적이라는 말은 종교 의식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루 세 끼 먹는 식생활이 儀典的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채소, 육류, 우유, 계란, 양념이나 향료 하나까지 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으로 구별합니다. 이렇게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리는 작업을 새로운 음식이 생겨날 때마다 랍비가 다 합니다. 조리 방식이나 그릇을 사용하는 것도 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유를 담았던 그릇에 고기나 계란을 요리할 수 없습니다. 주거 생활도 儀典的입니다.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에 메주사란 성구 상자를 매달아 놓고 출입할 때마다 입을 맞춥니다. 의복과 차림새도 의전적입니다. 모든 남자는 바지를 입고, 모든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합니다. 남자들의 허리춤에는 반드시 율법에 명시한 옷단의 술을 달고 다닙니다. 머리털이나 수염을 밀지 않고 기릅니다. 초막절,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과거 출애굽의 역사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613개 조항의 율법 조문들 중에 상당 수는 농사나 추수와 관련된 계명입니다. 안식일과 같은 휴식의 방법도 儀典的입니다. 안식일에 따르는 계명이 30가지가 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활방식은 너무나 철저합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이 얼마나 철저한가 하는 것은 이런 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입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어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기 위해 군수송기를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이들을 본국으로 이주시킨 것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피부는 검은 색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토라를 외웁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 먹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아프리카로 건너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서 동떨어진 채로 살았습니다. 10년 20년이 아닙니다. 100년 200년이 아닙니다. 무려 수 천 년이나 떨어져 살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삼국시대 초기에 헤어진 사람들을 동족이라고 데려 오겠습니까? 생활은 얼마나 변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생활 방식은 별로 변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과거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할 때에도 많은 유대인들을 본국에 이주시켰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언어가 다르고 피부가 다른 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생활 방식, 儀典的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종교적 생활방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선민이 된 것이요,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구원 개념이 없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를 통해서도 상당한 우월감을 갖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는 것 자체를 세상 다른 종족들과 다른 선민의 표식으로 생각합니다. 요즘 가진 사람들의 우월감이 뭡니까? 남보다 돈 많은 사람, 남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남보다 유명한 사람. 이런 사람들일수록 내가 남보다 다르다는 표식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나는 너희와 달라!” 그 표식이 뭡니까? 비싼 집, 고급 승용차, 명품 사용, 뭐 이런 것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려고 애씁니다. 유대 사회는 양상만 다를 뿐 똑 같습니다. 유대인의 모든 삶의 주제어는 세상 모든 종족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유대인의 생활방식은 곧 선민의식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신앙이 항상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삶 자체가 종교 의식입니다. 먹고, 입고, 일하고, 거주하고, 즐기고, 휴식하는 모든 삶의 순간마다 신앙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자녀 교육도, 비즈니스도, 농사일도, 다 종교적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도 삶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전수됩니다. 특별히 신앙교육 시간이 없어도 매 순간이 종교 교육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신앙이 의식이나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의식을 행하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마음에는 없으면서 의식만 거행하는 껍데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 변질된 의식을 사수하기 위해 더 중요한 신앙의 내용을 배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냅니다.(마23:24)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전의 본체인 예수님은 배척하여 죽이고 무너질 예루살렘 성전은 사수하려고 열심을 낸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를 거부한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구원받으라고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4:17) 도대체 뭘 회개하란 말인가? 도대체 선민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무슨 구원을 받으란 말인가? 다른 종교라면 몰라도 유대교인들에게 이런 말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이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3-36)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혈통이 선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저절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에 태어났다고 천국 자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사람 자녀로 태어났다고, 혹은 유명한 집안의 사람이라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자녀라고 저절로 하나님 자녀가 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우월하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우월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더군다나 명품 종교의 탈을 썼다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 유명한 교회에 속했다고 저절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내면의 회개도 없이, 종교 의식이나 모양새를 갖췄다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바라보는 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는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는 자만이, 참다운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우월감을 버리세요. 아집을 버리세요. 제대로 회개하고 하나님 자녀 된 사람들을 괜히 박해하지 마세요. 겸손하세요.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는 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여 있는지를 깨닫는자, 내가 멸망의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자임을 깨닫는자, 내게 구원이 얼마나 절실한 가를 인정하는 자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③
행 21장 37~40절 / 이재철목사
♬ 주여 우리의 죄를 ♬
1.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여 나의 죄를 위하여 주여 주여 십자가를 지셨네
주님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2.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여 나의 죄를 위하여 주여 주여 십자가를 지셨네
나의 생명 다하여 주를 위해 살리라 벙어리가 되어도 찬양하며 살리라
◈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한 시대를 바꿔놓는 삶을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성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우리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바울을 해하려 하자 로마의 천부장이 사도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천부장에게 얘기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은 생각지 않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하였습니다.
천부장이 발언 기회를 주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기회를 내 맘대로 살아버린다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① 내게 주어진 곳에서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알게 해 주십니다.
사도바울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도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였는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실과 이방인의 복음을 위해 쓰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니 이것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아봐 줄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자신을 제지하는 그 사람들과 싸울 수도 있었지만 바디메오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보고 치유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도를 해도 응답하지 않은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내 눈의 장애물과 다른 사람의 장애물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나에게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은 목소리였습니다.
기회는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② 기도하면 기회를 알아보게 해주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열심만 있으면 피곤함 밖에 없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행 21장 27~40절 /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우리 각자가 돈을 어디에 가장 많이 쓰는가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쓸 수 있는 돈이 생길 때 주로 어디에 사용하십니까? 한국 뉴스를 보니까 휴가철이 되면 많은 젊은 직장 여성들이 휴가인데 어디로 놀러가는 대신 성형외과에서 시술을 받는다고 합니다. 1년 내내 힘들게 돈을 벌어서 아끼고 저축하는 이유가 성형수술을 해서 예뻐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외모지상주의가 가득한 사회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거 봐라. 저렇게 휴가도 안 가고 성형수술 하는데 돈을 쓰고 그래서 되겠는가?’ 하며 비난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형수술만 아니다 뿐이지 다른 데 돈을 씁니다. 옷과 가방과 신발 등 명품에, 또 어떤 사람은 전자제품에, 또 어떤 이들은 오디오나 자동차에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주님의 일보다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내가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가를 보면 인생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어디에 여러분은 남는 시간을 많이 사용하십니까? 골프나 낚시나 드라마나 영화 등 많이 있습니다. 또 게임이나 인터넷 샤핑도 있고, 한국 같은 경우는 맛집만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 특별히 성경은 조금 다릅니다. 페이지 수가 많다고 꼭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떤 사건을 특히 많이 조명하는가를 보면 그 강조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말씀의 삶> 공부도 하고 있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솔로몬 이후에 나뉜 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여러 왕들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도 훌륭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같은 사람은 나라를 엄청나게 부강하게 만들고 정치적, 외교적으로 뛰어났으며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단 몇 절로 평가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람이나 사건인데도 성경은 아주 길게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4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어디에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가? 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년 정도 공적 사역을 하셨는데, 앞부분은 간략하게 쓰고 주로 마지막 일주일에 일어난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더 많이 할애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도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이야기처럼, 사도 바울이 고난당한 이야기를 꽤 길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시작점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28장 끝날 때까지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로마까지 가는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성전에서의 폭동과 바울의 환난
지난주 본문에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에 따라,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특히 유대인으로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의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정결예식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네 명의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이 서원을 지키는 일에 바울이 돈을 대주도록 권면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그들을 위해 돈을 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7절)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의 소동에 잡혀서 끌려 나갑니다. 이것은 물론 야고보가 언급한 사람들, 즉 율법에 열심을 가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벌인 소동이 아니라, 27절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인들, 특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아시아’는 지금의 아시아가 아니라 그 당시의 아시아 주인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통 ‘아가야’는 그리스 남부의 고린도를 말하고, ‘아시아’는 에베소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을 보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조언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봅니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해 종종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 장로교회 같은 경우는 당회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또 위원장들과 함께 모이는 확대회의인 연석회의에서도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모든 제직들이 모이는 제직회를 통해서도 여러 일을 의논하며 나아갑니다.
23절에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고 했지만, 이것은 무조건 자기들 말을 따르라고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리더가 무조건 자기 말만 들으라고 강요해서는 곤란합니다. 교회 일이든 영적 조언이든, 충분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이것이라고 결론이 지어질 때 서로 함께 의논해서 합당한 결정과 조언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되어서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에 선출되신 분들을 비롯하여 매년 선출되는 분들, 특히 안수직이 그런 결단과 헌신을 가지고 직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을 이해해주시면서, 지도자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또 때로는 ‘왜 저런 결정을 하나?’ 할 때도 있음에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선교에 대해 보고하고 그들의 말을 존중하며 그들의 제안을 따른 모습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효과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결정이 내려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노골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면, 지도자들의 최선을 다한 결정과 리더십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체포한 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뭐라고 소동을 일으킵니까?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8절)
그들이 선동한 내용을 보십시오. ‘이 사람(바울)은 곳곳에 다니며 우리 백성, 즉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을 모욕하고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자’라고 합니다. 6장에서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이 바로 이런 죄목으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비난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그 자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똑같은 죄목으로 고발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까지 성전에 데려 왔으니 이는 성전을 더럽힌 거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성전의 이방인 뜰이 있고 거기를 넘어가서는 안 됐습니다. 그래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 이 구역을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히면 누구라도 죽음을 당할 것이며, 그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다.’라는 경고문을 헬라어와 로마의 라틴어로 돌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1871년에 발굴되었고, 지금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 즉 이방인 뜰을 넘어 성전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돌로 쳐 죽여도 좋다고 한 규정은 로마 사람들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도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것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그런 고발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 역시 ‘가짜뉴스’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29-30절)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왜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까?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에베소 출신인 드로비모를 알고 그가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 드로비모가 지금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자기들이 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약간 떨어진 저 아래 시내에서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지금 이 성전에도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나는 저기서 그 사람을 봤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여기도 있는 게 틀림없다.’ 이게 맞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저쪽 시내에 있던 사람이 당연히 여기도 왔을 것이라고 어떻게 자동으로 추정합니까? 그런데 너무 확신하고 있습니다. 틀림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성전 안에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도 바울과 같이 있었다면 분명히 같이 잡아들였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드로비모는 거기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온 게 아닙니다. 이처럼 증거도 없고 확인되지도 않은 모함으로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때 이 폭력적인 사태에 당황한 성전 안의 자체 수비대가 성전 문을 잠근 것으로 보입니다. ‘문이 닫혔다‘(30)고 되어 있는데, 자동으로 닫힌 게 아니라 수비대가 닫은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소동이나 폭력이 일어나서 피를 흘리는 일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문지기 레위인들이 성전 문들을 닫아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유혈사태로부터 성전의 거룩함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 바울이 여러 성들, 특히 마게도냐의 여러 성들을 돌아다닐 때 여러 차례 성령님이 알려주시고 또 선지자들도 예언해준 것처럼, 사도 바울은 결국 결박되어 체포되고 끌려가는 환난을 정말로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이 알려주셨다’고 한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은 성취되었고,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그 길을 선택해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바울이 체포된 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보와 오해와 미움과 증오로 인한 것이란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2천 년이 지나서 민주국가, 법치국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현대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숙한 법치사회가 되어서 그런 일이 안 벌어질 것 같은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세상은 똑같고 사람도 똑같다는 것을 요즘 많이 보지 않습니까?
2-3년 전쯤에 한국에서 이전 정권에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건이 터졌고, 그 전 정권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금 정권도 비슷한 의혹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배우들을 침대 위에 벗고 있는 남녀 사진에 얼굴을 합성해서 슬쩍 흘리는 일을 정보기관이 하여 그들의 이미지를 떨어뜨려서 방송에 못 나가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너무 놀랄 일입니다.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이방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시내에서 함께 있었으니까 당연히 성전에도 같이 왔다는 식으로 선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이 사실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면서 온 성이 소동하여 움직입니다. 그리고 비울이란 표적에 마치 벌 떼처럼 ‘백성이 몰려들어’ 공격합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조금만 선동하면 군중이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뉴스를 보십니까? 틀림없습니다. 어떤 뉴스가 탁 나오면, 내가 별로 동의하지 않고 듣기 싫은 소리면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귀에 아주 좋은 내용이면 열심히 읽으면서 ‘이것 봐라. 현실이 이렇다.’ 하며 흥분하지 않습니까? 내가 듣기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진짜 사실이라도 틀렸다고 하면서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미디어를 통해서 선동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특히 공영방송 TV의 힘이 아주 막강하고 주요 일간지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권력을 잡는 사람들마다 언론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특히 독재국가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개인별로 다 SNS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도 합니다.
지난 8월 중순부터는 한국에서 어떤 분이 장관후보자가 되어서 전부 그 사람 뉴스밖에 없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 한 사람을 놓고 언론이 힘겨루기를 하고, 국회도 그렇고, 온 나라가 나뉘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대학생들까지도 일어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성향의 소리에는 귀를 닫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중간 입장에서 보면 너무 경이롭습니다. 분명히 똑같은 사건인데도 한쪽에서는 ‘모든 의혹이 이제 다 해결됐다.’라고 하고, 다른 쪽은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똑같은 일을 그렇게 보는지 신기합니다. 또 다른 게 나오면 이것은 뭐가 잘못됐고 전달한 사람이 잘못됐다 하고, 저쪽은 사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어서는 안 되고,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옮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도 카톡 같은 것으로 많이 보내지 않습니까? 대부분 확인이 안 된 것들입니다. 가짜뉴스들이 너무 많습니다. 크리스천들이 그런 것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확인을 해야 하고, 확인이 되었어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정도는 몰라도 남에게까지 퍼나르고 강요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Peter Parker)가 존경하고 따르던 삼촌 벤 파커가 강도에게 당해 죽어가며 한마디를 남깁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유언적 대사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나는 장난인데 개구리 입장에서는 생명이 달린 일이라는 겁니다.
소위 요즘 가장 유명한 통신이 ‘카더라‘ 통신입니다. 유언비어뿐 아니라, 소위 공영방송이나 유명한 신문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가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요동을 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고, 특히 무슨 일이 나오면 악성댓글, 상처를 줄 만한 말들, 욕설들은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저 멀리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거기에 연관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가 아닌 것을 퍼 나르다가 또는 그것을 주장하다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곡 기억해야겠습니다.
정치적인 일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다 카더라. 그렇다 카더라.’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카더라’가 아니라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를 늘 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특히 확인되지 않은 일이나 그냥 소문만 가지고 편을 나누고 상대를 모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성경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극히 일부만, 내 눈앞의 보이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벌어진 일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과 마음의 중심까지 꿰뚫어보시고 의도까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유일하게 하나님만이 심판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2. 로마군의 개입으로 보호되는 바울
성전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이 더 이상 성전 안으로 들어갈 경우 어떤 죽임을 당해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돌판을 붙여 놓았다고 했습니다. 로마 당국도 그것을 허용해주었습니다.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정말 싫어했습니다. 이전에 성전 내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군대 일부가 성전에 들어갔다가, 군인들이 돌을 맞고 도망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큰 군대를 출동해서 진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린 겁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출동합니다. 이렇게 신속한 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 당시 로마 군대가 성전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된 안토니오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가보았을 때 보니까, 안토니오 요새 터가 성전 터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천부장은 보병 760명과 기병 240명, 즉 천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린 사람입니다. 로마에서는 군대 호민관과 같은 급의 고위 군사직, 즉 높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천부장은 나중에 나오는 23장 26절을 보면 그 이름이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성전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던 소요를 비롯한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던 고위급 장교였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출동했는데(32), “백부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휘하에 100명을 거느린 백부장이 두 명 이상이라는 말이니까, 최소 200명에서 수백 명의 군인들이 출동한 것입니다. 성전에는 유대인 자체의 경비대가 있었지만 동조를 한 것인지 통제를 못한 것인지, 수백 명의 로마 군대가 출동하니까 비로소 소동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고 나와 있습니다(32).
그러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뭘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폭행을 한 겁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바울이 얼마나 많이 다쳤겠습니까? 굉장히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군대가 출동하니까 그때에야 멈췄습니다.
문제는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은 28-29절에 나온 것처럼 바울이 성전에 헬라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헛소문으로 인한 소동이었습니다. 진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선동으로 인한 헛소문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사람과 시내를 다녔다는 것만 보고 그렇게 한 것이고, 바울이 평소에 가르친 것을 봐서는 틀림없이 같이 갔을 것이라고 추정한 데서 비롯된 오해였습니다. 추측으로 이렇게 된 겁니다. 추측만 하고 일을 벌이면 항상 이렇게 억울한 피해자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지금 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3-34절)
바울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을 천부장이 보았으니까, 우선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선 바울을 잡아, 12장 6절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쪽에 로마 군사 한 명씩 붙어 두 명에게 쇠사슬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결박했습니다. 12장에서 베드로가 잡힐 때도 그런 식으로 결박되었는데, 바울도 한 명씩 양쪽에 두 명의 군인들에게 쇠사슬로 연결되어 잡혀가게 됩니다.
또 이 장면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쓴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 22장(52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물론 성전 경비대장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갔던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그 차이점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로마군 경비대에 직접 체포되어 결박당해 끌려간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경비대 호민관인 로마 천부장은 피의자를 우선 확보하고 보호한 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다음 단계로 그의 신원과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폭행을 했는데, 오히려 로마 천부장은 합리적으로 절차를 지켜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흥분하면 막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안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에서 질서대로 나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종종 있어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진상 파악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서는 이러고 저기서는 저러며 막 소리를 지릅니다. 히브리어로 소리치고 헬라어로 소리쳐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진상 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 수비대가 있던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가라고 명합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5-36절)
흥분한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이 바울을 데리고 갈 때 따라가면서 옆으로 달려들어 바울을 뒤에서 또 옆에서 계속 때리며 갔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칼로 찌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아예 바울을 들고 보호하면서 갔습니다. 계단에서 들어메고 갔습니다. 바울은 정말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여기서 떠오릅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네가 그리스도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고, 23장을 보면 빌라도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그때 무리들은 “없애버려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던 장면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바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를 죽여라’ 하는 사람이었을 텐데, 지금은 ‘바울을 죽여라’ 하는 예수님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색의 선동에 의해 폭동이 일어났을 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폭동을 진정시켰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여러분이 이러면 좋지 않습니다. 당신들에게 손해가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무마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도 완전히 근거 없는 누명을 쓰고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아마 바울이 속으로 ‘아,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에베소 서기장이,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로마군 예루살렘 수비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와 그의 군인들이 와서 보호해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다 주님께서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로마까지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의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때로 결박과 환난과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보호의 손길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호의 손길이 같은 믿는 사람들일 때도 있지만, 이처럼 세상의 권력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굉장히 힘들었을 2차 전도여행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18:10)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는 사람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뭐가 내게 유리한가 하며 그리로 가는 게 아니라, 내게 불리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좁은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갈 때 분명히 고난이 있지만, 고난 속에서 지켜주시는 손길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갈 때는 전혀 알지 못하던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큰 은혜와 놀라운 유익을 얻게 됩니다.
3. 스스로 변호하는 바울
군사들이 바울을 둘러메고 계단을 지나 로마군 수비대 영내로 들어가기 전에 바울이 놀랍게도 천부장에게 말을 겁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7-38절)
개역개정성경에는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약간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투로 번역해놓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천부장은 지금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의 중심에 있고 유대인들이 폭행을 가하던 그 사람이 헬라어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 하니까, 유대인이라 히브리어만 하는 줄 알았다가 헬라어를 유창하게 하니 깜짝 놀라서 “당신이 그리스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은 겁니다.
로마의 장교인 천부장이 사용하던 언어는 당연히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였습니다. 그런데 헬레니즘 문화의 발생지인 그리스의 언어가 헬라어니까, 그 당시 세계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은 이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어를 구시하는지 놀라면서 즉시 들었던 생각은 이전에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객 4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들어간 애굽인이 생각났습니다. 이전에 자객 4천 명을 데리고 소동을 일으켰다가 메시아 운동을 위해 광야로 들어갔다고 하는 이집트 출신 유대인이 있었는데,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라고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받아서 얻어맞을 뿐 아니라, 이제는 로마군대의 천부장에게까지 자객 4천 명을 거느리던 이집트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여기 ‘자객’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terrorist’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카리’입니다. 식칼을 품고 다니던 사람들이어서 시카리입니다(?). 실제로 단도를 품고 있다 꺼내어 죽이는 자객이었습니다. 그런 극렬한 유대주의자들의 괴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오히려 고린도에서 배 타고 오려다가 바로 그 시카리들을 고린도 유대인들이 고용하여 그들이 유대에서 와서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저 북쪽 마게도냐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냐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고, 아주 위험한 순간입니다.
비록 벨릭스 총독이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그 무리는 진압되었지만, 그 우두머리였던 이집트 출신 유대인은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저 난리를 치는 것을 보니까 혹시 이 사람들이 그 이집트 출신 유대인을 잡은 게 아닌가 추측한 겁니다. 이때 위험하기도 하고 바울이 화가 날 만도 한데, 그는 차분히 자신을 소개한 후 정중하게 한 기지 부탁을 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39-40절)
‘나는 결백합니다’ 하며 무죄를 주장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때를 오히려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지금 굉장히 얻어맞고 폭행을 당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로마군대가 구출해주어 ‘아휴 나 살았다. 다행이다.’ 하고 갈 순간인데, 돌이켜 자기를 때리던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하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복음 증거입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이게 되겠습니까? 정말 바울은 복음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 신변이 위험하고 천부장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푹 찌르면 복음만 나올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했을 때 보통 뭐라고 합니까? 큰소리 치면서 “여기 책임자 누구야? 나오라고 해!”라고 하거나 “매니저 불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이 상황조차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습니다. 바울은 생각이 정말 우리와 다른 사람입니다. 저 같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왔으니 너무 위험하다.’라고 할 텐데, 바울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왔으니 너무 잘됐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합니다. 매 맞고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복음을 전하는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그 애굽 사람이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전에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유대인이고 동시에 길리기아 지역 대도시인 다소 시의 시민이다.‘라는 것을 밝힙니다. 아직까지는 로마시민인 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위기 때는 밝히지만 처음부터 신분의 힘을 이용해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조용해진 겁니다. 그는 히브리 방언, 즉 아람어로 말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의 속주였던 길리기아 지역 다소 시민이며, 아람어와 그리스어 등을 다 하는, 언어에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상 경력이나 신분이나 능력이 우리에게 자랑거리나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들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오 요새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성전과 요새 사이를 연결한 통로 충계처럼 불편한 상황에서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와 복음을 그들에게 들려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못하지만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었든지 전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자신부터가 상황이 좋든지 안 좋든지 어떻게든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왜 그렇게 애를 썼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들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 이 순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헌신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에 바울과 같이 복음을 향하여 이러한 헌신과 결단으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박당한 바울!
행 21:27-40 / 송수천목사
사도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초대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바울은 총회 앞에서 자세하게, 낱낱이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들을 간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 하였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의 겸손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흥분한 유대인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율법의 의식 법을 지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런 오해를 풀어주는 계기를 삼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란 바로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유대인들의 율법의 관습을 행하지 말라고 했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바울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바울 자신은 무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의 모든 제사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고 그들과 함께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포함한 다섯 사람이 드리는 특별예배 기간은 7일간이었는데 처음 6일은 방해받지 않았지만 마지막 7일이 되는 날, 소아시아 지방에서 무교절을 지키려고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발각되어 성이 소동이 일어나고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잡아 결박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성전 출입이 됩니다. 그는 세계를 누비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에 돌아오면 반드시 유대사람으로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바로 지금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그는 체포되어 끌려나옵니다. 더욱이 본문에는 아주 비참한 장면이 나옵니다.
30절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 결박이 사도바울을 로마로 후송하여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이 결박은 로마로 가기 위한 결박이었습니다.
▶27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 이례가 거의 차매"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나실인의 서원 예식이 7일간 계속되는데 그 마지막 예식이 거의 끝나 가는 무렵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의식 법에 동참한 것은 교회의 평안을 위하시고 또 동족인 유대인들이 바울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드렸는데 역시 본문에 보면 시간 낭비에다 돈 낭비까지 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 아시아란 소아시아로서 에베소, 비시디아, 갈라디아 지방을 말하는데 그곳에 가서 선교활동을 할 때. 제일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서 전했습니다.
에베소에서도 3년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바울의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고 확실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듣고 여러 곳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지만 이방 땅이기 때문에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가 이제 본토 예루살렘에서 만났으니 좋은 기회다 하여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 핍박자들의 끈기가 정말 무섭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따라왔다면 모르지만 죽이기 위해서 악착같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 이게 보통 극성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렇게 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디에 있을 때 붙잡혔습니까?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붙잡았습니다. 여기 성전은 성전 구내에 이스라엘인의 뜰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성전은 지성소 앞에 '제사장의 뜰, 유대인의 뜰, 부인의 뜰, 그밖에 한 층 낮은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 사이에는 높은 담으로 경계가 되어 있어,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시 그것을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고 헬라어와 라틴어로 쓴 표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3대 자랑거리가 있는데 '선민의식, 율법, 성전'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주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여기에서 '충동'이란 '함께 쏟아 붓다, 혼란시키다.'라는 뜻으로 마치 저 에베소에서 오장색 메데드리오가 운동을 일으킨 사건과 같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선봉자 유대인 몇 사람이 각 나라에서 올라온 유대인들과 본국에 살면서 명절을 지키러 온 모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향하여 핍박과 환란을 함께 쏟아 붓도록 선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붙들고'란 이 말의 뜻은 '정식으로 그에게 달려들어서 전격적으로 그를 사로잡은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범인으로 체포하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28-29절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 이러라."
여기서는 바울의 죄목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성전 모독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즉 신성을 모독하는 반대주의자라고 선동한 것입니다.
"외치되" 선동가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우리와 함께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울을 가리킨 말이고 '각처에서'는 바울이 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중대하고 무서운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의 세 가지 자랑거리인 '선민의식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⑴'우리 백성과'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하는 선민 우월성을 말합니다.
⑵'율법과'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저들을 위하여 받은 '선민 계율의 헌장'을 의미합니다.
⑶'이곳' 곧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성전을 말하는데 안식일과 명절에 저들만이 예배드리는 곳으로 신성시 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바울이 세계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이 세 가지를 모독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유대인들의 골수를 건드리는 말이요, 몇 번 죽여도 한이 차지 아니하는 치욕적인 죄목들입니다.
또 28절 이하를 보면 '이 거룩한 곳'이 나오는데 여기서 거룩한 곳은 성전을 말하는데 '유대인의 뜰'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과거에 성전이 있었던 터에서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 엄격합니다. 하물며 초대교회 당시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심지어 로마의 시민이라 해도 성전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도록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가 유대인들의 종교를 보장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29절을 보면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지래 짐작으로 잡아넣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모두 다 사단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요8: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드로비모'는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의 흉년 만난 형제들을 돕기 위해 구제 헌금을 가지고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갔다 하여 자신들이 자랑하는 '이방인들과의 구별'이 무너졌다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건물 숭배자들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거룩해야 할 곳은 건물과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심령과 영혼입니다. /믿/
▶30절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폭력적인 행동과 격양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말로 당시 분위기가 바울을 죽일 상황인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가 아니라 온 성이 다 소동하고 흥분했습니다. 바울을 잡아 가지고 성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성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죽일 분위기입니다. 뒤에 보면 다 나옵니다만 그냥 두면 바울은 죽습니다.
이때 천부장이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바울을 잡았습니다.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울을 잡은 것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마치 다니엘이 모함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자 굴속에 들어간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다니엘을 잡은 것이 아니라 다니엘을 보호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일곱 배나 뜨거워진 풀무 불 속에 던져진 것은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불 시험이 와도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아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믿/
본문에 '바울을 잡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 말은 문학적으로 보면 바울을 사정없이 끌고 나가는 행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비정함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문을 닫은 것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문을 닫을 것을 가리키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노한 군중들이 성전으로 밀고 들어와 그곳에서 바울을 살해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이것은 곧 성전을 더럽히는 큰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울에게 변호의 자유와 신변안전 보장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전의 지성소 안에는 다윗의 뿔들이 있는데 이것을 제단 발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뿔로서 어떠한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성전 안에 있는 이 제단 뿔만 잡으면 그에게 일단 변호의 자유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즉 구약의 도피성과 같은 것입니다. 민35: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도피성을 정하여 피의 보복을 막게 했습니다.
도피성은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식구들을 위하여 방주를 예비하신 것과, 기생 라합의 가정을 위하여 구원의 붉은 줄을 허락하심같이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같이 구약의 도피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도피성입니다. 신19:2-3절에 보면 도피성의 위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지역의 중앙에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서나 가까운 곳으로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도피성은 높은 산간에 두고 그 길은 항상 잘 닦아 두게 했습니다. 쉽게 찾고, 쉬게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큰 글자로 써서 이정표를 만들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눈에 띄게 하기 위함입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제단 뿔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죽습니다.
본문에서 문을 닫아 버린 것은 바울 사도에게 변호의 기회를 막은 것이고, 신변보장을 불허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에게도 허락한 이 은혜의 뿔을 유대인들이 막음으로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막아버린 것입니다.
▶31-32절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여기서 생각해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몇 년 전에 자신이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바울은 조용히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 참으로 정확하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죽는구나.' 어쨌든 얼마 전에 스데반을 죽인 바로 그 방법으로 이제는 바울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정식 재판도 없이 바울사도를 죽이겠다고 요란을 떠니 그 소요가 온 성에 퍼졌나갔습니다. 급기야는 공권력을 가진 치안담당자인 천부장에게도 그 소문이 들렸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오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던 터라 그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보고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보통 천여 명의 명령을 통솔하는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키며 이 부대의 구성은 보병 760명과 마병 24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행23:26절에 의하면 이 천부장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입니다. 이 군대의 본부는 성전 북서쪽의 언덕 위에 세워진 안토니아 성에 있었습니다.
그 천부장이 직접 백부장들을 대동하고 현장에 갔다고 했는데 적어도 2-3백 명 이상 출동한 것 같습니다.
바울 한 사람만 붙잡으려면 한 10여명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데모나 폭동 때에는 몇 사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많은 군사가 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천부장의 군대가 오기까지 계속 얻어터지고 있었습니다. 천부장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바울을 치기를 그쳤다고 했습니다. 왜 그쳤습니까? 바울을 죽이려던 그들의 행위가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일차의 착오도 없습니다. 빈틈이 없으십니다. 이대로 두면 바울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이 오니까 흥분한 사람들이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멈추었는가? 만일에 백부장이 보는 데서 돌로 쳐죽였다면 이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돌을 든 사람이나 처형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당국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서는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산헤드린 유대 종교재판에 의하여 사형 판결을 받은 후에도 빌라도에게 다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던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33절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드디어 바울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 백부장과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체포한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놓아두면 바울이 죽겠으니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아시겠지만 2년 동안을 재판도 없이 가이사랴에 가두어둡니다.
왜 바울을 2년 동안 재판도 없이 가두어 놓았을까요? 왜냐하면 내놓기만 하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좌우간 바울을 죽이려고 벼르고 벼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이 흘러갑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자 같이 그야말로 소리소리 지르면서 복음 전해야 할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재판도 없이 이렇게 갇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로마에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체포될 때에 왜 그렇게 체포되어야 했는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했는지, 왜 거기서 그렇게 썩어야 했는지'를 말입니다.
그가 후에 빌1:12절에서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갇혀 지내는 그 파란을 겪으면서 로마까지 왔고, 감옥에서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당한 일, 이 많은 고통과 긴긴 시간, 이것은 잘못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쇠사슬로 결박한 바울을 보면서 끝장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잡은 것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한 것입니다. 폭도들로부터 보호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방 군대도 동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결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바울을 도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②바울을 폭도들에게서부터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③사실을 심문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바울은 결박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고,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그만큼 로마 시민권의 권위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땅히 쓸 수 있는 권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절제한 것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묶어 놓고는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며, 무슨 일 때문에 너희들이 죽이려고 했느냐?'고 묻습니다.
▶34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천부장의 질문에 무리들이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을 더럽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을 범했다'고도 하고, 별별 소리를 다 하니까 천부장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고 또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해서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부르짖거늘' 이 단어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할 때 쓰는 단어로 큰 고함소리로 미친 듯이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천부장이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합니다. '영문'안은 군대의 주둔지인 안토니아 명문을 가리키는데 광적으로 흥분하여 외쳐 되는 무리들의 소란 때문에 제대로 심문을 할 수가 없어서 일단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35-36절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데려가는 군인들을 좇아가며 바울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군사들은 성난 군중들의 폭행을 피해 바울을 들고 가야만 했습니다.
'층대에...들어가니' 이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안토니아 영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말합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판 받을 때, 오르내리신 층계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러니까 본문의 사건의 27년 전에 그 장소에서 성난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그 자리에서 오늘은 사도바울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37절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여기서부터 바울의 변론이 시작됩니다. 지금 로마 안토니아 부대가 있는 계단으로 쇠사슬에 묶여 군인들의 손에 끌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 있는 위치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이라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오는 폭도들의 모습이 잘 보이는 장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장소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선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변론의 기회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사명감을 보게 됩니다. 그의 관심은 매를 맞든 안 맞든 좋은 형편에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관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오직 우리들의 관심은 출세요, 성공이요, 세상적 쾌락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쇠사슬에 결박된 죄인의 몸에서 너무나도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는 헬라어의 악센트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깜짝 놀란 천부장은 '당신이 헬라 말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에 헬라어는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언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게 국한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무식한 폭동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천부장의 관심은 치안 책임자로서 치안을 방해하는 사람을 체포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4천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갔던 애굽 사람이 아직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보고 혹시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들어서 그에게 묻습니다.
▶38절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애굽인은 주후 54년 경 네로황제 때, 3만 명을 거느리고 감람산에 웅거하여 로마정부를 정복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의 명령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고, 또 로마군대를 내어쫓고 유대를 독립시킨다고 호언장담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며 군중 속에 섞여 다니다가 저명인사들을 암살하는 로마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거짓 선지자입니다.
본문에는 사천 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의 인원은 삼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총독 벨릭스 군사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그러다가 이리저리 흩어져서 광야를 거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때에는 한 사천 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부장은 바울이 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여 물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이 물음에 사도 바울은 '아니요 나는 유대사람입니다'하고 자기의 정체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39절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나는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천부장이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는 물음에 분명히 대답한 것입니다. 그 난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라' 바울은 자기가 시골 촌놈이 아니고 다소성의 시민권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다소는 소아시아 지방의 헬라사상의 중심지로 교양 높은 도시로서 훌륭한 대학이 있고, 큰 도서관이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다소성에서 출생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의 고향이나 문화의식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천부장의 오해를 빨리 풀고 자기가 서 있는 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선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알리면 즉시 풀어 주어 그를 안전한 곳에 피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현장 복음 증거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기 때문에 천부장에게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청원입니다. /할/
▶40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 하니라"
천부장이 허락을 했습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바울이 계단을 강단 삼아 지금까지 헬라 말을 하던 것을 히브리말로 유대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고국어로 말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반 유대주의자로, 신성모독 자로, 반 율법주의자로 오해를 받고 저들에게 붙잡혀 성전 밖으로 끌려나와 반 죽도록 구타를 당했습니다. 지금 바울 앞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발광하는 유대인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도자 바울은 그 동족들을 구원하고 갈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복음 전도에는 언제나 순서가 있습니다. '유대인 다음에 헬라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은 바로 동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말로입니다. 오늘 본문은 22:1절로 이어집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여기 '부령들'이란 말은 '형제들과 선배여러분!'이라는 말로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 사용한 호칭과 동일한 것입니다.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 하니라' 본문은 천부장의 보호 하에 바울이 성난 유대군중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변명인 동시에 변증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곧 설교요 전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귀중한 시간에 전도를 하려듭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섰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나 한 몸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마는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것은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성난 군중들도 다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 옛날, 자기가 돌로 쳐죽였던 스데반의 죽던 장면을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일장 설교를 했습니다. 긴 설교를 합니다. 그것을 누가 듣겠습니까? 들을 사람 없을 것 같은데도 성난 군중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설교를 하고, 그리고 돌에 맞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충격이 바울에게 되살아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 받은 충격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사도 바울은 아무리 저들이 성난 얼굴을 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찢어 죽이려고 대들어도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저들 가운데에는 모르고 행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하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저들을 향해서 설교를 합니다. 자기변명을 합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성난 군중들을 향해서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22:1절부터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평양의 대동 강변에 가면 옛날에 토머스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배를 타고 전도하러 왔다가 순교를 당했던 순교 유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쪽복음(마가복음) 성경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횃불을 던지고, 불덩이를 던지는 바람에 배가 그만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토머스 선교사는 성경책을 계속해서 강물에 던졌습니다. 자기는 죽지만 이 성경책은 받아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성경을 몰래 주어다가 읽고 예수 믿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복음을 받는 맨 처음 사건입니다.
'나는 이대로 전도하고 갑니다. 그러나 이 복음만은 믿으세요'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만히 보니까 지금이 성난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무사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맞아 죽어도 좋소,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들으시오' 하고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 위탁하고 종말론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사명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행 21장 27-40 / 생명의 삶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그가 백성과 율법을 비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폭행할 때, 천부장과 군인들이 바울을 결박해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요청해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얻어 히브리 말로 말합니다.
1. 바울의 체포와 하나님의 보호 (27~36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이에 천부장(글라우디오 루시아, 23:26)과 군인들이 그 진상을 알고자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해 데려가려 합니다. 이는 아가보 예언의 실현이며(21:11), 이때부터 바울은 미결수 신분이 됩니다. 바울의 체포와 재판 과정은 사도행전 내용의 4분의 1에 해당하며, 공회와 벨릭스 총독, 베스도 총독, 헤롯 아그립바왕 앞에서의 재판 과정은 결국 바울을 로마로 이끕니다. 위기.구원.결박.재판의 모든 과정을 허용하고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맡기신 사명을 다할 때까지 친히 복음 전도자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 바울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신 하나님 뜻은 무엇일까요? 내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주고 계시나요?
2. 천부장이 바울의 변호를 허락함 (37~40절)
수많은 무리의 비방과 위협 속에서 바울은 청중이 모인 때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는 헬라어로 천부장에게 말을 걸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만듭니다. 소요를 일으키는 폭력배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오직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화목하게 하는 사도의 직분(고후 5:18~19)을 감당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어를, 다소 시민으로서 헬라어를 할 줄 알지만,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이기에 히브리 말(아람어)로 연설합니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길(빌 3:8) 정도로 바울에게 복음은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가진 것,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모두 활용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 바울이 히브리어로 유대인 청중에게 연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신 친척 혹은 이웃을 찾아가 복음 전파 기회를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보세요.
오늘의 기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완벽한 섭리로 저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처럼, 복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급박한 사건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 일을 주님 전파하는 기회로 삼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