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9:1~9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사람이 보입니다.
프롤로그)
토마스 핸드라는 아빠는 여덟 살배기 딸 에밀리가 하마스의 폭격으로 사망하자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아니 어찌 자기 딸이 폭격으로 죽었는데 미소를 지을 수가 있을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마스의 잔인함을 아는 이라면 차라리 단숨에 폭격에 의해 죽는 편이 우려한 가능성 중 가장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에 굶긴 채 가둬두었다가 악랄하게 고통을 받고 죽게 하는데 그중의 가장 무서운 것은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이랍니다. 이번에도 키부츠에 있던 수많은 아이와 여성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제발 단숨에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울, 잔인한 사람)
그런데 이렇게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 사람이 사울입니다. 돌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은, 죽이는 사람도 차마 선뜻 할 짓이 못될 정도로 잔인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인으로 서 있는 사람 역시 이미 인간의 본성을 상실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자입니다. 바로 복음을 증거 했다고 스데반을 그렇게 죽였고, 그렇게 죽이도록 증인을 선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이 안찼는지 그가 다메섹으로 달려갑니다. 250키로 미터나 떨어진 곳, 나귀를 타고 가면 5일 정도 걸리는 그 거리를 말을 타고 갔는지, 아니면 걸어갔는지 속히 가서 모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려는 심산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간섭)
이러한 사울을 예수님이 작정하고 만나십니다. 큰 빛을 둘러 비치게 하시고 그에게 소리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러한 장면을 행전에서 4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그만큼 틀림없는 사실을 밝히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자신만 목격한 게 아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까지도 소리를 들으므로 틀림없는 사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생각을 가능케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 제 아무리 강하고 무섭다 해도 예수님의 빛 앞에는 고꾸라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포스와 위엄 앞에 가끔은 압도당해서 전의를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 선수들이 시합 전에 상당히 위협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당대 위엄과 권세는 그리스도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사방으로 흩어지던 차에 사마리아로 다메섹 등으로 피해갔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울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선 얼마 작고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행전 9:3절부터 이렇게 말씀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아무도 보지는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차에 사울은 아마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을 본 듯,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 본 빛으로 그의 눈이 멀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본 것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능력 권세가 우리 주님의 권세입니다.
사울이 겨우 한다는 말 하나가 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정도입니다.
내 눈을 이렇게 멀게 하고, 나를 한 순간에 내동댕이쳐 놓을 수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냐? 는 것이죠.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이렇게 해서라도 사울을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분이 마음먹으면 빛을 비춰서라도 멈춰 세우시고, 그 분이 뜻하시면 왕의 야욕을 이용해서라도 고레스를 나오도록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는데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 분의 섭리, 그 분의 뜻이 천지를 움직이고, 천하를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깨달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명분하에 내가 계획하고, 나의 뜻한 바를 실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죽이고 핍박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사울로 충성한 게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신앙을 실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통 속에 집어넣은 거죠, 그리고 정결하고 깨끗한 스데반은 돌무더기 속의 죽음으로 삶을 마친 것이고요. 사울이 천국 가서 먼저 간, 이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정말 정신 아찔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신앙은 내 생각이 기반이 돼서 하면 여러모로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영적으로, 그리고 주님의 심장으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고도 겸손하게 신앙생활 해야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누군가를 쓰시고자 할 때 사울 같은 살인자도 쓰시는 데 나 같은 사람을 쓰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쓰신다!’ “그러면 살인자를 쓰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구인들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인물, 학벌, 인격, 신앙의 정도를 봐가며 자리에 배치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물론 보편적으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하나님은 거기에 맞는 그 누군가를 쓰시고 싶으실 때, 그 사람을 고치고 바꿔서라도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입견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 사람은 안 될 거야!’ ‘왜 목사님은 저 사람을 거기에 배치하시지?’ 하는 내 생각을 내려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만 쓰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또 누군가도 동일하게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섬기며 협력하는 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뤄 드리는 일인 줄 믿습니다.
세 번째, 이왕부름 받았다면 사울같이 목숨 걸고,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이 부름을 받은 후 그는 살인의 위협에서 거의 한 번도 제외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달게 여기며 충성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때 핍박하던 것이 생각났을 겁니다.
‘나도 깨닫지 못했을 땐 저랬는데!’ 하면서~ 그래서 그렇게 핍박하는 자들을 더 구원받게 해 주려고 더욱 열심히 전도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안타까움이 얼마나 큰지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고 나중에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몸부림을 치다가 로마 오스티아(Ostia) 항구로 가는 길목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그는 정말 전도의 전령이 되어 불사조같이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후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 아멘^^
저는 그래서 깨닫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고 봅니다. 깨닫고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한 시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순서가 바뀌니 돈, 명예, 학벌이 목적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수단이요, 통로인 것을 깨닫기에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는 줄 믿습니다.
영어가 재밌는 것 중의 하나는 우선순위가 바뀌면 아주 내용이 고약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Star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오늘 날 한국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스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단어가 바뀌어 Scar가 되면 상처흉터로 변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영어로 'GOD'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나에게 God이되고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그 글자의 순서를 뒤집게 되면 'DOG'가 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우선주의로 살 때 하나님은 자신에게 God 됩니다. 아니, 나의 여호와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면 그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Dog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개와 같이 짐승처럼 오직 먹고 마시다가 가는 삶으로 끝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짐승으로 끝나는 삶을 살다 가서는 아니 될 줄 믿습니다.
모두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은혜에 보답하다 가서 칭찬받고 상급 받는 영화로운 존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게 하소서
그러기 위해서 좀 더 은혜 받고 깨닫는 인생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