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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성 | 상사성 |
A ↙↓↘ a1 a2 a3 | a1 a2 a3 …… |
이것은 시뮬라크르의 개념에 이르면 더욱 확실해진다. 시뮬라크르는 순간적인 것, 지속성을 가지지 않은 것, 자기 동일성이 없는 것, 이런 것들이 시뮬라크르이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에 아주 낮은 위상을 부여하였는데, 시뮬라크르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서구철학의 뒤흔드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서구의 철학은 존재와 가치에 대한 판단이 섞여 있다. 플라톤에게 무엇인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방 혹은 재현은 원본의 성질의 일부분을 재-현한 것이며, 그 성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가치가 높은 것이며, 덜 가지면 가질수록 나쁜 것이다.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가장 가치가 없는 위상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있다/없다는 존재론적 판단의 문제는 좋다/나쁘다라는 가치론적 판단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4. 브레히트, 낯설게하기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에 관해 스스로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낯설게하기의 목적은 관객에게 연극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검토해 보는 비판적인 태도를 길러주려는 데 있다. 낯설게하기 효과의 사용의 전제조건은 무대와 관객석에서 모든 마술적인 요소를 말끔히 씻어내고 최면에 걸릴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핵심은 관객 스스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찾는 것이며, 낯설게하기는 그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경이 되는 것은 앞서 계속 언급했듯이 차이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는 서구의 전통적인 예술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비판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희곡을 비아리스토텔레스 희곡이라고 명명한다. 비판의 핵심은 시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감정이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라트리스를 통해 비극이 공포와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을 모방함으로써 관객을 그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정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객이 예술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감정이입이 오늘날의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어떤 개인의 감정에 몰입하는 것과 그 성격이 동일일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들을 현재의 시각에서 전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비판적으로 해결하려는 관중의 태도는 카타르시스의 바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관객 스스로 무대 위에 묘사된 사건이나 묘사 자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비판적 자세를 가질 수 있게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을 그려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극예술은 우선 관객에게 사건 경위의 놀랍고 낯선점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만한 관객들에게 연극 속으로의 몰입을 시도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산만한 관객은 그들 스스로 연극에 참여하고자 하며, 작가는 낯설게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그것을 실현한다. 낯설게하기에 의해 실현된 연극을 브레히트는 서사극이라고 하여 기존의 희곡적 연극과 차별을 두고자 하였다. 제 스스로 만든 도식을 살펴보면 낯설게하기의 목적과 의미가 명확해진다.
희곡적 연극 | 서사적 연극 |
무대는 하나의 사건을 구현(재현)한다. 관객을 사건 속에 몰아 넣는다. 관객의 능동성을 소모시킨다. 관객의 감정을 일으킨다. 관객에게 체험을 전달한다. 관객은 줄거리 속에 감정이 이입된다. 극적 환상이 주요 도구 감정의 축적 인간은 이미 알려진 존재로서 전제된다. 인간은 변화불가능한 존재 결말에 대한 긴장감 다음 장면을 위한 장면 직선적인 사건 진행 진화적인 사건 진행의 필연성 현존하는 세계 인간 행위의 필연성 충동(본능) 사유가 존재를 규정 | 무대는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객관적)한다 관객을 관찰자로 만든다 관객의 능동성을 일깨운다. 관객에게 결단을 강요한다. 관객에게 지식을 전달한다. 관객은 줄거리를 마주 대하고 있다. 논증이 주요 도구 인식의 단계까지 몰고 간다. 인간은 연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가변적이고 변화시키는 존재 사건 진행에 대한 긴장감 장면마다 독립 곡선적인 사건 진행 사건 진행의 도약성 변화되어야 할 세계 인간이 해야 할 일 (행위의) 동기 사회적 존재가 사유를 규정 |
벤야민과 브레히트가 공히 그들의 예술론을 주장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판단 근거가 있는데, 이것은 현대도시사회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실험극(교육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처럼 다이나믹하게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오락이 주는 자극도 급속도로 둔화된다. 관객의 감각이 둔화됨에 따라 새로운 자극이 생겨야 한다. 정신이 산만해 있는 관객들을 재미있게 해주기 위해 연극은 우선 관객의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상기해야할 것은 보들레르가 산문시라는 장르를 만들어 내면서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운문시가 씌여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오늘날 『파리의 우울』 또는 『소산문시』라 불리우는 시집은 보들레르의 만년의 산문 작품 50편을 시인의 사후 1869년 간행한 산문시집을 말한다. 이 시집에서 파리라는 근대도시와의 관련 위에서 인간 생활이 포착되어 있으며 대도시의 산문적인 현실에서 시를 추출해야 하는 어려움에 도전하는 독창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근대세계의 무질서가 시인에게 강제하는 뭇어려움에 대해 그는 산문시에서의 접근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근대 생활에 다붙는 무질서는 보들레르에게 있어서는 그의 운문시의 완결성을 내측으로부터 훼손함으로써 그에게 무질서에 산문시라는 미완결의 형식에 의해 접근해 가도록 강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예술 특히 연극에서 감정이입 대신에 등장하는 방법론이 바로 낯설게하기다. 감정이입 대신에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낯설게하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상을 낯설게함으로써 잘 알고 있던 자명한 사실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리는 효과는 바로 역사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이나 인물을 지나간 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역사화시킴으로써 인물들이 그들의 운명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고정불변의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관객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주위 상황이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 또 인간이 이렇고 이렇게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구나라고 관객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는 서사극이 완벽한 형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연극을 어떻게 하면 오락적이고 동시에 교훈적일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신적인 마약 거래에서 벗어나 환상의 장소를 경험의 장소로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자유와 지식을 갈구하는 금세기의 무지하고 성숙치 못한 인간이, 이 끔찍스러운 금세기의 핍박당하고 이용당하는 영웅적인 인간이, 발명의 두뇌가 있으며 자신을 고칠 줄 알고 또 세상을 변화시켜 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신과 세계를 극복해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극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낯설게하기를 연극에서만 국한시켜 생각하지 말고, 일반예술론과 문학 창작방법론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문학에서는 동일한 거울로 다른 시대를 비추어 볼 수 없다. 표현수단들이 바로 당대의 기술적 수준과 어떻게 일치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않다. 받아들일 수 있는 문학적 기법이 되려면 그 표현수단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기술적 수준과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브레히트의 인식은 루카치와 벌였던 표현주의 논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톨스토이나 발자크로부터 무엇을 배우기는 어렵다.(배우는 바가 더 적다.) 그들은 오늘날과 다른 과제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러한 과제의 상당한 부분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들을 경모하며, 그들이 자신의 과제를 처리해낸 방식에 대해 경탄한다. 고 말한다. 오늘의 과제와 그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늘날의 독자와 사회에 있다. 문학은 그 사회의 거울이며, 그 사회를 반영한다는 리얼리즘의 오래된 명제에 브레히트는 단지 반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새로운 시대에 부여된 과제에 대한 촉각을 세우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또 한번 강조한다. 발자크를 읽는 즐거움을 가르치려는 노력과 새로운 현대소설을 쓰기 위한 지침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혼동한다면, 이는 커다란 오류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발자크의 소설들을 전체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숙명은 좋은 옛날 것 위에 건설하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건설하라는 브레히트의 좌우명에서 읽을 수 있다.
아름다움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브레히트의 대답 역시 지금까지 이어 살펴본 소외와, 차이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브레히트는 아름다움을 행위로 보았다. 우리가 어떤 음악 작품이 왜 아름답게 들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 곡에서 어떤 행동이 아름다운지 해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이제 우리는 음악 연주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연주는 어려움이 해소되는 연주 행위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겨난 음악은 언제나 어려움을 해소하게끔 북돋우는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오랜 기간 동안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움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이러한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며,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은 여러형태로 아름다우며 또한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예술론이 함축되어 있는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보자.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 사랑 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보기 좋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 땅의 토질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 못생겼다고 욕한다.
해협을 떠다니는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들어 올 뿐이다. / 왜 나는 오직 / 나이 마흔에 허리가 굽어 버린 40대 소작인 처가 걷는 모습만을 이야기하는가? / 처녀들의 젖가슴은 /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이 /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모순이 없고 조화로운 세계를 다루는 것은 그 세계로의 몰입을 독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시키는 것이며 독자들에게 수동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반영에 의해 모순이 드러나는 시는 시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마당이 굽은 나무를 얘기해야 하며 그것이 나무의 모양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자라고 있는 토양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며, 독자들이 그 모순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5.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지금까지 헤겔의 자기소외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창작방법론인 낯설게하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도정이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업화시대에서 전기시대로 넘어선 오늘날, 그 변화를 예견한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이것이 왜 충격적인 발언이냐 하면 과거에는 '형식'이라는 것이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전달되는 내용이라고 여겼다. 기술과 도구는 그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 맥루한은 반기를 든다. 원자력 자체는 이용하기에 따라 인류 복지의 에너지일 수 있고 인류 멸망의 무서운 힘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또한 텔레비전은 그 내용에 따라 사회를 순화시킬 수도 있고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이지 매체 자체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이라는 종래의 이론에 그는 도전한다. 즉 매스미디어의 내용이란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의 테크놀러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사실상 사람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내용이 인간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매체의 문제가 사용의 문제에 달려있다는 것은 감각이 마비된 기술백치의 태도라 말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내용이란 실제로는 정신의 집을 지키는 개의 주의를 끌기 위해 강도가 손에 들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와 같은 것이다. 하나의 미디어는 다른 미디어가 나용으로 주어짐으로써 그 효과를 높이고 강력해진다.고 말한다. 물론 매체의 효과는 그 내용에 의해 보다 강화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과 함께 핵심적인 주제는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를 구별 짓는 것이다. 핫미디어로는 라디오와 영화 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쿨미디어로는 전화와 텔레비전을 예로 들수 있다. 핫미디어란 단일 감각을 높은 정세도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높은 정세도라는 것은 자료가 충족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 테면 사진은 시각적으로 높은 정세도를 갖는다. 만화는 극히 적은 시각적 정보가 제시되므로 낮은 정세도를 갖는다. 전화는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으므로 쿨미디어, 혹은 낮은 정세도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적고, 듣는 쪽에서 상당량을 메워가야 하므로 낮은 정세도에 있는 쿨미디어이다. 그러나 핫미디어는 듣는 쪽이 참여하는 정도가 낮고, 쿨미디어는 참여, 혹은 보완하는 정도가 높다.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거니와, 라디오와 같은 핫미디어는 이용하는 사람에게 전화와 같은 쿨미디어와는 다른 효과를 주게 된다. 즉 핫미디어는 정보의 정세도가 낮아서 수용자의 높은 참여도를 요구하는 매체이고, 핫미디어는 전달하는 정보의 정세도가 높아서 수용자의 낮은 참여도를 요구하는 매체이다. 여기서 정보의 정세도라는 것은 메시지의 충실밀도를 의미하며 참여도라는 것은 메시지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상상력의 투입을 의미한다. 또한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는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의 구분을 이해하는데는 다음을 생각하면 한결 쉬워진다. 맥루한은 쿨미디어인 텔레비전 시청자보다 핫미디어인 책을 읽는 사람이 더 수동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재래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는 이론이다. 책은 논리적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읽기만 하여도 다 흡수할 수 있으나 움직이고 명멸하는 텔레비전의 화면은 가만히 있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미개국은 쿨하며 문명국은 핫하고 동양문명은 쿨하며 서양문명은 핫하다. 전기미디어의 출현, 특히 텔레비전의 출현으로 핫문화는 쿨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이다. 매체는 인간의 지각, 감각의 확장된 영역이라는 것이다. 차량은 다리의 확장이며, 사진은 시각의 확장이며, 옷은 피부의 확장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감각은 확장되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무수히 발생하는 무수한 복제물들간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6. 나오면서
지금까지 살펴본 맥루한의 두 가지 큰 쟁점은 앞서 살펴본 벤야민과 브레히트의 두 가지 쟁점에 빚지고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나타나는 아우라의 상실은 내용의 가치가 형식의 가치로 전이되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와 독자가 스스로 모순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낯설게하기는 정세도가 낮아 참여도가 높은 문화로의 이행을 예견하는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라는 명제에 빚지고 있다. 근대 이후의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서두에서 논의한 소외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우라로부터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끊임없이 소외된 것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 모순을 찾아가는 도정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소외와 아우라의 상실을 근대의 특징이라고 설명하고서는 다시 본질을 찾아나서고 있다는 모순. 다음의 인용으로 마무리하고자한다.
근원관계 속에서 현전의 미학과 시뮬라크르의 미학은 서로 보족한다. 존재, 진리, 언어는 근원에서 하나가 되고, 이 하나가 역사 속에 들어오면 개별 언어와 이념들로 나뉜다. 이 개별자들 사이에는 불연속이 존재하기에, 그것들을 체계로 종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근원적인 것은 오직 차이의 놀이, 즉 번역가능성, 비평가능성, 복제가능성을 통해서만 현전한다. 벤야민은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사이에 있다. 데리다는 존재의 현전을 부정하며 오직 존재자들의 차이만 인정한다.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의 현전이다. 반면 벤야민에겐 존재의 현전이 존재자들의 차이 속에서 섬광처럼 이루어진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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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외. 홍승용 역. 「루카치에 대한 반론」.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실천문학사.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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