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당신
이 화 영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지만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을 만나서 기쁘지만 언제 당신을 잊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얼굴은 내가 아는 그녀와 많이 닮아서 자꾸 웃게 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느냐고 어디 사냐고 묻지만 그 순간에도 난 당신을 잊어 갑니다 어느 날은 전혀 모르는 당신이 따뜻했습니다 당신은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잊고 잊습니다 잊는 일은 우리를 만나고 웃게 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합니다 나는 꽃잔디 같은 미소를 짓고 당신은 자꾸 내 손을 만지작거립니다 당신이 떠날 때 당신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지만 나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배웅합니다 모르게 잊고 살다 어느 하루는 당신이 생각나 가만 잠이 듭니다
- 시집〈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천년의시작 -
튤립의 언어
빈 마당 같은 정오였다 뜨거움을 가장한 얼굴을 허공, 먼, 튤립이라 부른다 붉게 얼어 실감 나지 않는 한여름에 내리는 눈, 가는 목 허공에 걸치며 사는 이유 몇 개 떠올리며 붉은 마을회관에 간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다 유모차를 운전하는 몸이 기우뚱거릴 때 발은 난간 위를 걷는듯하다 그녀 입술에 숨은 말 나는 알아든지 못하고 허공, 먼, 튤립이 먼저 마중 간다 여름해가 진다 볼 이쁜 그녀부터 주름까지 그녀를 담은 무수한 자물쇠 찰칵 찰칵 진다 그녀는 흙의 여자 차가운 것은 차가워서 뜨거운 것은 뜨거워서 죽어 나갔다 저녁상을 물리자 그녀가 틀니를 물그릇에 담는다. 입 가리며 웃던 손이 이제 식사 중에도 틀니를 뺐다 본론보다 서론이 긴 숭늉 같은 말을 처음 듣는 말처럼 나는 응응 시늉했다 그녀 곁에 없어도 내 몸에 장착된 그녀는 나를 발사했다 천지사방에서 날아오는 장전된 그녀 그녀에게 가는 길은 좁고 깊어 물고기가 빠져나가듯 부드럽게 유영을 해야 한다. 어느 어종인지 모르겠으나 생각은 허공, 먼, 튤립으로 낭자했다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 예스24
이화영 시인의 시집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가 시작시인선 0511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2009년 『정신과 표현』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침향』과 『아무도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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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시집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천년의시작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