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일 자연학교
예비고사에서 학력고사를 거쳐 1994년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명칭이 바뀐 지 30년 흘러 새로운 평가제도 도입이 논의 중이다. 2005년 해운대 누리마루 에펙 정상회담, 2016년 진도5 경주 지진, 2021년 코로나 사태. 이 세 가지는 시차가 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적 대사로 치르는 대입 수능일이 불가피하게 제날에 시행 못하고 한두 주 뒤로 미뤄졌던 해다.
매년 11월 둘째 목요일은 수능일이다. 현직을 떠난 지 이태 흘러가도 지난날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교단 현장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자연학교로만 부지런히 나다니고 있다. 겨울로 드는 길목이긴 해도 아침 기온이 그다지 춥지 않아 야외로 나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수험생이 고사장 입실이 완료되었을 시간에 동정동으로 나가 대산 들녘으로 다니는 2번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도계동 만남의 광장을 지나면서 몇몇 손님이 타 용강고개를 넘어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사무소 앞을 거쳤다. 주남삼거리를 지난 동판 저수지 가장자리 낙엽이 진 갯버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가월에서 판신을 지나자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녘이 드러났다. 대산산업단지를 앞두고 승객은 거의 내려 상등에서 가술을 거쳐 남모산부터는 혼자서 타고 북부리로 가 동부마을에 내렸다.
들녘엔 벼를 거둔 뒷그루로 비닐하우스 당근 농사를 준비했다. 예전에는 겨울철에 비닐하우스 수박 농사를 지었으나 근래 작목이 당근으로 바뀌었다. 먼저 트랙터로 논바닥을 갈아 골라 놓고 휘어진 철골을 꽂아 비닐을 덮어 보온 터널을 만들었다. 여기다 당근 씨앗을 뿌려 싹이 트면 물을 공급해 잎줄기를 키워 이듬해 늦은 봄과 초여름에 당근 수확 때는 일손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이른 아침이라선지 동부마을 들녘으로 나와 일하는 농부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그간 여러 차례 찾았던 북부리 팽나무가 선 마을이다. 작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가 방영되기 이전으로 4대강 사업으로 둔치에 자전거길이 생기기도 훨씬 전이다. 동부마을 어귀에서 먼발치서 이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를 바라보고 둑을 넘어 갯버들과 물억새가 무성한 둔치로 내려섰다.
날씨가 흐리고 오후에 강수가 예보되어선지 자전거 라이딩을 나선 이들을 아무도 없었다. 느티나무 가로수가 줄지은 강둑이 아닌 자전거길을 뚫어둔 둔치로 내려 물억새 열병을 받으면서 걸었다. 광활한 둔치 한복판에는 절로 불거진 자연석 더미 위에 날렵한 지붕을 씌운 쉼터 정자가 나왔다. 여름날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들이 쉼터로 올라 풍광을 조망하고 떠나기도 하는 곳이다.
자연석 더미 쉼터로 올라 사위를 조망하니 가을이 이슥해진 풍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빛과 갈색이 적절히 뒤섞인 물억새 물결이 일렁거렸다. 강줄기가 휘어져 돌아가는 무선공원 언저리는 빼곡한 대숲이 어우러졌다. 하늘에서 춤을 추던 신선이 하강한 곳이라 춤출 ‘무(舞)’에 신선 ‘선(仙)’을 붙인 무선이었다. 유등마을로 가는 야트막한 언덕이 무선공원으로 주민 쉼터이기도 했다.
유등과 인접한 유청에 이르러 술뫼 농막에서 전원생활을 누리는 지인에게 전화를 넣었다. 시간을 내서 강변 산책을 나서 유청 근처에 닿았다고 했더니 점심을 같이 들 수 있다고 했다. 차를 몰아 나타난 지인과 함께 들녘의 유일한 식당인 한식 뷔페에서 도로공사 현장 인부들과 섞여 배식받아 한 끼 점심을 때웠다. 끝물 고춧잎을 삶아 데쳐 무친 나물에는 수저를 한 번 더 집었다.
점심 식후 지인이 머무는 술뫼 농막을 찾아 텃밭 채소를 둘러봤다. 무와 배추는 싱그럽게 자라고 고추와 가지는 무서리에 시들어 갔다. 가을에 심은 시금치와 유채는 싹이 파릇했다. 지인은 농막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영상으로 편집해 유튜브에 올려 격조 높은 노후를 보냈다. 거실에서 전망이 탁 트인 강변을 바라보며 결명자차를 들고 환담을 나누다 한림정으로 가서 열차를 탔다. 23.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