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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게로 보냄 받았음을 증언함
행 22:12-21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2:12-21 / 거기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며 다메섹의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곁에 서서 `사울 형제여. 눈을 뜨시오' 하고 말하자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 그러자 아나니아가 내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메시야를 만나게 하시고 또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려고 당신을 택하신 것입니다. 15)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각 지방에 나가서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16) `자, 이제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일어나 주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당신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17-18)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의 일입니다. 어느 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나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서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라. 네가 내 말을 전하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 그들은 제가 회당마다 돌아다니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매질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 게다가 주님의 증인인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는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그 일에 찬송하였고 그를 돌로 치는 사람들의 겉옷을 지켜 주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 나는 너를 멀리 이방 사람에게로 보내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유대인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아나니아의 증언(12-16) 여기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설명하는 동안에 바울은 유대인 군중의 성난 정서를 고려합니다. 예를 들면,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의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최대한 유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의 동질성을 애써 강조합니다(고전 9:20). 그리고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 아나니아가 자신을 세례교인이 되게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나니아가 악명 높았던 사울에게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의 회심을 인정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표시로써 아나니아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행 9:18). 아울러 바울은 아나니아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회심이 조상들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을 선택하신 결과이며, 자신의 복음 전파가 자신의 눈과 귀로 들은 확실한 증거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이론이나 이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분명한 사실(Fact)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의 계속된 증언(17-21) 세례 교인이 된 이후의 일을 바울은 계속 증언합니다. 여기서 ‘후에’란 아라비아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난 이후, 곧 회심 후 ‘3년 뒤’를 뜻합니다(갈 1:18019). 3년 후 그는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 변증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주’라고 호칭함으로 여호와와 예수님의 관계를 확실하게 연결짓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멀리...보내리라’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안에 머물렀던 사도들과 달리 사도 바울이 이방의 먼 지역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방 선교는 바울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거절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마지막 말이 유대인들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 군중은 유대인과의 동질성을 강조한 바울의 말을 잘 들어왔으나 바울이 ‘이방인’을 언급하자 더 이상 듣기를 거부합니다.
적용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계심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고백한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점점 사라져 감을 묵묵히 기뻐하는 자..
자신이 망해가는 것을 기뻐하며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자..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기 의를 버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삶을 포기하며, 돈과 명예와 재물을 숭배하던 내면의 질그릇을 부숴버려, 죽음의 자리로 향하던 그곳, 거기에서 그는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목도합니다. 성경은 향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호크마 주석
=====22:12
경건한...아나니아 - 9:10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는 것으로 되어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는 것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만큼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변증하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22:13
형제 사울아...쳐다보았노라 - 바울이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과정이 9:17, 18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보라'(* , 아나블려손')는 명령은 '아나블레포'(8 )의 부정과거 명령형인데 더 분명하게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이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同時性)을 강조해 준다. "그를 쳐다보았노라"는 말은 '나는시력을 회복하여 그를 쳐다보았다'(I received my sight and saw him, RSV)는 의미이다. 바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22:14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2절;21:40),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잘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3절),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택하여...알게 하시고...보게 하시고...듣게 하셨으니 -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케이리사토'(* )는 '미리 손으로 잡다'란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세 가지를 행하셨다. 첫째는 '당신 뜻'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갖게 될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해야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다. 둘째는 '의인' 즉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하셨다. '저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이셨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것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만든 체험인 동시에 그의 사도직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고전 9:1;15:8)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다(7, 8절).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이다.
=====22:15
모든 사람 앞에서...증인이 되리라 -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지니는 증거의 포괄성과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enski), 9: 15와 26:17에 비추어 볼 때 이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바울이 증거해야했던 내용은 '보고 들은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본 바를 충실히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다(4:20).
=====22:16
왜 주저하느뇨 - 이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됨이 더 적절하다. 주의 이름을 불러...죄를 씻으라 - 2:38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세례와 죄 씻음이 연결되어 언급된다. 이것은 세례 의식이 죄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세례 그 자체가 죄 씻음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비로소 죄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예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죄사함을 상징한다(19장 주제 강해, '물 세례 연구' 참조).
=====22:17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 이 때를 바울이 회심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때,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9:2;갈 1:17-19)라고 보는 견해와(Bruce) 두번째 방문(11:30)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Ramsay) 전자가 유력하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정성(眞正性)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22:18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9:29에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한 예일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22:19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때리고 -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8:3)을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에서 그의 진정한 거듭남을 볼 수 있다.
=====22:20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이다(7:57-60).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직접 죽이는 일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再評價)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증인'(* , 마르튀로스)은 계 2:13;17:6에서 처럼 '순교자'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데(Robertson, Haenchen), 실제로 흠정역에서는 '순교자'(martyr)로 번역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어떤 학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그러나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때 감히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22:21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19, 20절),주님은 재차 그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는 본 명령이,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의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다.
=====22:22
이 말하는 것까지...살려 둘 자가 아니라 - 바울의 조심스러운 연설을 잠잠히 듣던무리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소명(召命)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다시금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21:36).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첨가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배타적이며 완고한 선민 의식과 이방인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전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 설 교 >
아나니아의 역할
행 22:12-16 / 김영규 목사
주님을 만난 직후의 사울
지난 주 말씀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장면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은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모습 앞에 눈이 멀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은 일행의 손에 이끌려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 캄캄한 눈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이 갑작스런 주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12-13) 사울이 예수님 앞에 엎드러진 이후에를 인도한 사람은 아나니아란 사람입니다. 아나니아가 누구인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는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될 때에 믿게 된 신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다메섹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본래 다메섹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전도를 받고 다메섹으로 돌아간 경우입니다. 둘째로, 그는 본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다메섹으로 피신하여 거주한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아나니아는 유대인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가 율법에 경건한 사람이며, 다메섹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지금 사울은 예수를 전한 것 때문에 분노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변론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아나니아가 유대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으로 존경받으려면 우선 율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고, 토라를 외우고, 정결 예식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나니아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와서 눈을 뜨게 해 줬습니다.
사실 아나니아는 좋아서 사울을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세요.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나니아는 망설였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은 살기등등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아닌가? 그런 사람을 왜 찾아가란 말인가?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행9:13-14) 아나니아가 망설일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는 사울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해줬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아나니아가 기도할 때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눈을 떴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눈을 뜨게 된 내력을 얘기해 줬습니다.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 네가 만난 분은 예수님이시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을“저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울은 예수님을 유대교를 파괴하는 이단 교주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아나니아는 의인이라 불렀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지금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의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사울에게 보낸 분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믿는 하나님, 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타난 이단자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눈을 뜨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할 일도 가르쳐 줬습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15-16)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두 가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줬습니다. 첫째는 그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해야 될 직무입니다. 둘째로,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공적 표식이요 절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는 사람들 앞에서의 증표입니다. 세례는 믿음의 결과로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믿고 죄를 씻었기 때문에 받는 표식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반드시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울에게 새로운 인생길을 가도록 안내해 준 아나니아의 역할입니다. 아나니아는 최초로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두 가지 획기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첫째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일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준 것보다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안목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물질관, 새로운 우주관, 새로운 가정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둘째로, 그가 해야 될 직무를 가르쳐 줬습니다. 즉,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진로를 결정해 줬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사울 앞에 나타셨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은 어느 날 사울이 잠자는 동안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반드시 어떤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신실한 신자로 만들어 가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홀로 믿어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인도를 통해서 사도답게 변화되었습니다. 사울의 생애에 영향을 준 인물은 아나니아 뿐만이 아닙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을 사울에게 보여줬습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키워줬습니다.
저에게는 목사가 될 때가지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청년기에 제게 예수님을 전해주신 집사님입니다. 제가 병들어 학업을 중단하고 낙심해 있던 시기에 끈질기게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제가 싫어하든지 말든지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어떤 때는 집사님 집에서 정성스런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그렇게 깔끔하게 잘 차려진 밥상은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 장소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 교회 부흥회에 인도하셔서 감동적인 간증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교회 생활에 정착할 때까지 항상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셨습니다.
두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제가 처음 등록을 하고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제가 예수님께 푹 빠지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은사를 받도록 지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제가 차분하게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도록 지도해 주신 일입니다. 처음 은혜 받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니까, 물불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당장 대학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가려고 했었는데, 차근차근 공부하여 목회자의 소양을 쌓으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길지는 않지만, 직장생활 사회생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만일 아무 경험도 없이 목회에 뛰어들었더라면 여러 면에서 부족한 목회자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목회의 길을 가면서 그 목사님께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2년차 서리집사였던 저를 신학교에 보내주신 목사님이십니다. 저는 여러 차례 목회자로 헌신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보니 가족을 먹여 살리는 문제가 큰 과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위로 할머님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고, 결혼하여 아내와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식구들의 생계 대책도 없이 목회의 길을 간단 말인가? 그런 가운데 마음도 슬슬 변했습니다. 꼭 목사가 돼야만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인가? 평신도로서 교회를 잘 섬기면 되지!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을 스스로 저버리려고 했습니다. 그 무렵 제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강하게 권면해 주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결단을 내리도록 도와주셨고, 신학교에 보내주셔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 나올 때까지 저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목회자가 되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영향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제게 중요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영향을 받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제게 많은 감화를 주신 분들이 바로 선생님들이셨습니다. 저는 6.25때 월남한 피난민의 자녀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시고 제 어려운 형편을 보셨습니다. 손수 노트와 연필을 사주셨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 변두리 중랑천 판자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에 3년 동안 학비를 받도록 도와주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런 교육에 대한 제 생각이 은연중에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자식 셋이 다 선생이 되었고, 자부들까지 다 선생입니다. 어린 시절에 어떤 사람에게 받은 영향이 일생에 영향을 주고,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누구를 변화시키실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런 영향은 오랜 접촉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짧은 기간의 만남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나 역시 그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중하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누구의 삶을 바꿔 놓으실까? 나 때문에 자식들의 삶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내 직장 동료의 인생길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친구들의 삶이 바뀔 수 있고, 나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사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직업이 바뀔 수도 있고, 가정이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실족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용기를 얻고, 나 때문에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게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죄 짓던 사람이 회개하고, 나 때문에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사람은 사람에 의해 다듬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성도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신앙이 달라집니다. 인격이 달라집니다. 생각과 사상, 가치관이 변합니다. 사상이 변하면 사는 방식도 변합니다. 직업도 변하고, 하는 일이 변합니다. 오늘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아나니아와 같이 결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행 22:17-23 / 양향모 목사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며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온통 그런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왜 우리에게 메시야가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그 메시야를 어떤 경로를 통하여 보내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그 메시야로 오셨다는 사실과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맞이해야 하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받을 은혜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또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사도행전 22장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변증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정통적으로 성경의 율법을 배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던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 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극히 반대하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며 자신들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짐승들과 같은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좀 더 의미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기독교가 어디서 온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기독교는 서양에서 온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속종교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나 무속종교가 뭘 하면 좋게 생각하고 기독교가 뭘 하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섬기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 유대인들의 종교를 우리가 왜 따라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도 아니고 유대인들만 따르는 유대교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만물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 속에서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신 은혜의 복음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본문 17-18절에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좀 힘이 듭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회심 후 3년 동안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보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고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고 아라비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찍혀서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동안 바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기독교인들을 때리기도 하고 잡아가서 죽이기도 했기 때문에 바울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회심을 했다고는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회심한척하고 접근했다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 붙잡아가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편을 이해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의 화가 좀 풀어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이 바울이 확실히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다고 믿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3년 정도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이 두 그룹의 사이에 끼여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이제 시간이 적당히 흐른 후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하나님을 배반한 이단종교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떳떳하게 성전으로 들어갔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 들어와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즉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좋은 말로 설명을 해도 내게 대해서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괜한 고생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지금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들을 설득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데 30년 전에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예루살렘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바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 이런 일들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이렇게 왔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시 예루살렘에 왔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19-21절에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시자 바울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한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를 당할 때도 유대인들의 편에 서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성을 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회당마다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내고 그들을 구타하고 잡아다가 가두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말을 하면 들어볼 것이고 좀 깊이 생각해 보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기독교를 반대하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냈던 사람이 복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을 하면 좀 들어나 보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에서 살펴 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그런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증언을 한다고 해도 그냥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성품이 참 착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귀한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다 복음을 잘 알고 복음에서 나오는 바른 교훈의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경건한 삶을 자랑하고 꼭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사람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셔야만 복음의 비밀을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은 이방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계만방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그래도 유대인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이렇게 예루살렘까지 다시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된 것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이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고를 하고 노력을 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면서 까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사실은 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 구원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을 하는 이유도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복음을 모르는 세계 만만에게 선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본문 22-23절에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사도 바울이 정말로 해야 할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정작 전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중간에 말을 못하게 막고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극도의 분노를 나타낼 때 주로 하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격렬한 분노로 인하여 흥분하고 날뛰는 사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화가 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낸다는 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할 것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불쾌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바울을 살려둘 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할 사람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없어져야 할 사람은 자신들인지도 모르고 고함을 지르는 유대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 참 많이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없어져야 할 사람인지 모르고 우리보고 없어지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은혜로 구원의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유일한 길이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믿는 일입니다. 이 믿음이 없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존재하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는 간다고 하면서 세상에 살 가치도 없는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라고 말은 하면서 진실 되게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교회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가지고 있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 복음을 바르게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갚으려는 심정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며 서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가라
김영규 목사 / 행 22장 17~21절
그들이 네 말을 듣지 않으리라
오늘도 안토니아 요새 계단에서 바울이 유대인 군중들을 향해 하는 설교 장면이 계속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어떻게 눈을 감았다가 떴는지,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 얘기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17) “후에”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지 약 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 3년 동안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 있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7-19) 아라비아에 가 있던 시기는 아마 개인적인 사색과 기도 기간으로 생각됩니다. 특별히 주님을 믿는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무엇이 다른가?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후일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성경은 기독교 교리 체계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중요한 교리 체계를 확고하게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라비아에서의 3년이 지난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황홀한 상태에 빠지고 주님의 환상이 보였습니다. “황홀한 중에”란 말은 헬라어로 엑스타시인데, 개역한글판에는 “비몽사몽간에”라고 번역했습니다. 보통 잠을 잘 때 보여지는 것을 꿈(dream)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시에 보이는 것을 환상(vision)이라고 합니다. 환상은 영적으로 어떤 황홀함 속에서 보여집니다. 바울은 이런 환상을 본 경험이 많습니다.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18)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인을 전도하는 일에 매달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전도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19-20) 바울이 얼마나 열심 있는 유대교도였는지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면 관심을 갖고 돌이킬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배신자로 여겼고 분노하여 대들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을 싫어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유대교도들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 바울이 기독교를 대적하던 과격분자였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도든 그리스도인이든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유대인에 대한 자신감은 착각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가 있습니다. 처세술에 능하거나, 대인관계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감을 가져라! 자신 있게 말하라! 확신을 가져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네 말을 들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누구도 내 말을 경청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니까, 혹은 엄마니까 자식들이 내 말을 듣겠지? 내가 사장이니까, 내가 상사니까 부하들이 내 말을 듣겠지? 내가 담임목사니까 교인들이 내 말을 듣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말이 합리적이니까, 혹은 좋은 일이니까 내 말을 듣겠지?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으니까 내 말을 듣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말세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를 막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슥7:11)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7:57)
요즘 “소통부재”라는 말을 엄청 많이 사용합니다. 왜 소통이 없느냐? 소통부재의 책임은 대개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대통령에게 따집니다. 부모에게 따집니다. 스승에게 따집니다. 경영자에게 따집니다. 당신 때문에 의사 소통이 안 된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볼 때에 소통의 문제는 현대인의 의식구조의 문제입니다. 우선 내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즉, 소통부재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천안함 사건을 보세요. 다국적 조사단이 면밀히 사건을 조사하여 결과를 내놨습니다.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입니다. 대부분이 조사 결과를 인정하고 전 세계 다수의 나라들이 규탄성명을 냈습니다. 그런데 유독 김정일이 하고 대한민국 안에 사는 몇몇 사람들이 못 믿겠다고 유엔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겁니다. 심지어는 6.25 전쟁을 남침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사적 fact까지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세태의 변화는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마찬가집니다. 저는 세월이 지날수록 목회가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세대 전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든지 잘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요즘은 어떤 사실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남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려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저 잠잠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진정으로 내 말을 경청하겠습니까? 누가 내 말을 듣고, 변화를 일으키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듣게 하시는 사람이 듣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는 사람만이 듣고 변화됩니다.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욥36:10)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행22:14)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남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괴로우십니까? 소통이 안 됩니까?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자식들이 내 말을 듣지 않습니까?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마음의 귀를 열어주시면 듣습니다. 하나님 듣는 귀를 열어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탄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듣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듣지 않는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 바울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판단에 절대적인 의미를 두지 마세요.
바울의 생각이 뭡니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적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타당한 이유도 많았습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정통파에 해당하는 랍비 힐렐과 가말리엘의 계보에 속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가장 타당한 일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적대적인 박해자였습니다. 본문에 언급했듯이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에 돌 던지는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로 다메섹까지 쫓아다녔습니다. 그런 사람이 돌변하여 예수를 믿는다면 꽤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셋째로 그는 자기 동족 유대인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는 동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이런 극단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내 동족이 구원받는다면 내 자신은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그 정도로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인식도 큰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이방인을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각은 폐쇄적입니다. 만일 메시아가 세상에 온다면 유대인을 구원하러 오시지, 이방인을 구원하러 오실 수는 없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이 볼 때 이방인은 개나 돼지 정도로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합니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 신자들조차도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사도에게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라고 했을 때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행10:14) 하나의 비유입니다만, 이방인과는 접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10:15) 베드로는 이방인을 찾아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리 부정한 이방인도 주님이 깨끗하게 하시면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했던 바울 역시 유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4-5) 유대인은 이방인들보다 타고난 축복이 많습니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우선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유대인의 특권을 무시하고,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이 부정하다는 사고방식은 유대인의 판단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의 혈통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세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은 인류 구원입니다. 어느 혈통, 어느 족속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인종과 종족, 가문, 문명인이든지 미개인이든지, 남녀노소,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은 계속됩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려는 것은 애당초 복음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 내게 이방인은 누구인가?
그러면 오늘 내가 찾아가야 될 이방인은 누구일까요? 그들에게 내가 할 일이 뭡니까? 결론적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내가 찾아가서 만나야 될 이방인은 아직 복음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복음 밖에 있다면 다 이방인입니다. 비록 혈육이라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영적 이방인입니다. 세상에서는 매일 함께 살지 몰라도 죽는 순간부터 영원히 다른 곳에 살아야 합니다. 친구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서 친구라고 영원히 친구는 아닙니다. 천국에 함께 가지 못하면 결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아직 복음을 받지 않은 영적 이방인들, 내 곁에 있는 이방인들을 최우선적으로 만나서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적인 만남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복음을 알리는 것이 우리 만남의 목적입니다. 인생 살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납니다. 다양한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취미 생활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학연이나 지연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혈육이기 때문에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접촉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믿는 예수님을 전해서 함께 천국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현재 누리는 천국, 내가 장차 들어갈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바울의 생애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찬을 나누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피고인으로 재판받는 자리에서 재판장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 만남이 복음을 전하고 축복을 나누는 삶으로 이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누가 내 얘기를 듣고 안 듣는 일에 대해서 과도히 마음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안 듣는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진리를 항상 깨닫습니다. 전도하다가 실패했다고 낙심 마세요. 누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 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듣게 하시면 듣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열어주시지 않는 사람들에게 백날 얘기해도 소용없습니다. 담대하게 전하되 실패에 대해서는 자책하지 마세요.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 지십니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겔3:11)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가시고, 만나게 해 주시는 사람 만나시고, 좋은 열매 맺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에
행 22장 17~21절 / 신성종목사
조금 전에 읽은 17절에 보면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있다가 돌아왔을 때에 제일 먼저 한 것이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할 때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성경 읽으라, 기도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도대체 기도가 뭐기에 툭 하면 기도하라고 하고, 새 해가 되거나 고난주간이 될 때에 의례히 하는 것이 특별 새벽기도입니다.
도대체 기도가 뭐기에 그처럼 해야 되는 것일까요? 왜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동안 기도했으면 됐지 뭐 또 기도를 해야 합니까? 오늘은 기도의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란 무엇인가?
(1) 기도란 하나님의 영적 대화입니다.
우리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간의 대화가 꼭 필요하고 또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 그의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은 모양,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뜻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중에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대화의 대상으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형상대로 그의 모양대로 창조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2) 기도란 천국 창고의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천국 창고에 가득 쌓아두시고, 필요한 때에 언제나 사용하라고 그 열쇠를 우리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 열쇠가 바로 기도입니다.
(예 화) 저의 할아버지는 살림을 직접 하셨습니다. 매번 식사 준비할 때 열쇠로 열고, 쌀과 보리쌀과 잡곡을 섞어서 내어주면 그것으로 밥을 지었습니다. 며느리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손자며느리를 믿지 못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손자며느리가 살림을 잘 자 그처럼 아끼던 열쇠를 다 맡겨주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집의 열쇠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지금도 그 열쇠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란 열쇠입니다.
(3)기도는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잠거 두는 자물쇠입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에 2002년에 도둑이 들어와서 저의 컴퓨터와 저의 집 사람의 모든 보석을 다 훔쳐갔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이얼식의 열쇠로 바꾸었습니다. 아직까지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탄이 우리의 모든 부분마다 들어와 속이고, 유혹하고 있는데 이것을 방지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문을 잠거두는 최고의 자물쇠이기 때문입니다.
2. 왜 기도해야 하는가?
(1)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때로는 영적으로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기도하면 영적 고독을 면할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감란 산에서 기도하셨을 때에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버지요 할만하시거든 내 잔을 옮기시 옵소서”즉 기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서입니다.
(3)승리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세상과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여기서 승리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산을 옮기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4)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동행자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행합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3.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기도는 소리를 내서 기도할 수도 있고, 묵상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금식하면서 기도할 수도 있고, 속으로 작은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2)기도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전혀 모르시는 것처럼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도매금’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 하고
(3)기도는 의심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6-7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4) 기도는 간절히 해야 합니다.
적어도 삼단계로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첫째는 구하는 단계, 둘째는 찾는 단계, 셋째는 문을 두드리는 단계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5)기도의 목적이 선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해서는 안 됩니다.
4.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는가?
크게 세 가지로 응답이 됩니다.
첫째로, 그래(yes)하면서 응답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했을 때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로, 안 된다(no)하고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구할 때에는 안 된다고 응답하십니다. 안 된다는 것이 응답인 것을 깨닫고, 또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기다려라(wait)하고 응답하십니다.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닌데 믿음이 없어서 미리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다려라 하고 응답하십니다.
[맺는말]
신자의 생활에 기도만 잘해도 반은 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라기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능력 있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승리하는 생활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간증
행 22장 17~23절 / 전승문목사
신앙생활은 아주 유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유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단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해줍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예수님을 잘 믿으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만으로도 신앙생활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줍니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또한 신앙생활은 가정도 변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말씀하는 겁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도 나라도 나아가 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은 어떤 변화를 경험하셨습니까? 새로운 인생이 되셨습니까? 새로운 가정이 되셨습니까? 혹시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은 아닌가요?
사람은 참 오묘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살면 한없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정말 짐승만도 못한 사람, 악마와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잘 살면 한없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깨끗하고 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 변화의 간극이 정말 극에서 극입니다. 악마보다 더 악해질 수도 있고 천사보다 더 깨끗해질 수도 있는 겁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마 같은 사람으로 살다가도 천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생을 살다가도 얼마든지 새 인생을,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변화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쳐서 40년이나 숨어살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구원해내는 출애굽의 영웅 위대한 모세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모세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민 12:3). 살인자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겁니다. 또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된 겁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때려죽이고 믿는 사람들을 끔찍하게 괴롭히던 박해자 사울이 주님의 사도 바울이 된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잔인한 박해자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래서 변화된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변화된 바울이 자신의 변화를 간증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것을 간증하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실인의 서원을 한 네 사람을 돌보던 바울이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바울을 붙잡고 사람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그러자 성전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묻지도 않고 확인하지도 않고 무조건 때리기 시작한 겁니다. 살기가 가득해서 때려서 죽이겠다고 매질을 시작한 겁니다. 처음 만난 사람을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무조건 죽이겠다고 한꺼번에 달려든 겁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얼마나 잔인하고 흉포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잘해야 합니다. 제대로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잔인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바울이 매를 맞고 있는데 로마 군인들이 출동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라는 로마의 천부장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겁니다. 사실 그가 바울을 구출하려고 출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을 체포하려고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지명수배가 내려진 애굽인 도망자가 아닐까 싶어 출동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예루살렘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한 애굽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면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로마군이 전멸할 거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추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전재산을 바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그의 추종자가 3만 명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란은 총독 벨릭스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굽인은 4천명의 열혈추종자들과 함께 달아났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이 그 애굽인일지도 모릅니다고 생각해서 출동한 겁니다. 그를 붙잡으면 큰 상급을 받을 것이기에 서둘러 군사들을 거느리고 직접 출동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붙잡자마자 쇠사슬로 결박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답은 저마다 다 달랐습니다 :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입니까?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때리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때린 겁니다. 그것도 죽이려고 때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살기가 가득하고 미움과 증오가 팽배한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던 겁니다. 사실 그때는 이런 반란과 이런 혼란이 아주 비일비재했습니다. 아노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로마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바울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물었습니다 :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내 말 좀 들어보겠습니까?’ 이렇게 물은 겁니다. 바울의 헬라말에 깜짝 놀란 천부장이 되물었습니다 : “네가 헬라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대답했습니다.“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 유명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일찍이 그리스 최고의 비극작가 유리피데스(Euripides)가 다소를 지칭하며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천부장에게 아주 고급진 헬라문화적 표현으로 말을 건넨 겁니다. 그러자 더욱 놀란 천부장이 바울에게 발언할 기회를 허락했습니다.
바울은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던 무리들에게 히브리 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부형들아! 아버지들과 형제들이여! 전형적인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독특한 표현인 겁니다. 이분이 바울입니다. 헬라인에게는 헬라말로, 유대인에게는 유대말로, 헬라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헬라식 표현으로, 히브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20~23)” 이분이 바울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어떤 사람도 어떤 모습도 될 수 있는 분이었던 겁니다. 누구든 품을 수 있는 사람, 어떤 사람에게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정말 큰 사람이셨던 겁니다.
“부형들아!” 아버지들과 형제들이여! 나의 동포들이여! 바울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아주 다정하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기등등한 그들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요?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그렇습니다. 바울 안에 바울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게 변화된 겁니다. 이게 거듭난 겁니다. 이게 새사람이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변해 바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밝은 태양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촛불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진리를 만난 사람, 진리를 품은 사람은, 그래서 자유함을 얻는 겁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겁니다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바울은 어떻게 이런 자유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처럼 두려움에서 미움에서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바울의 간증이 시작된 겁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은 지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예전에는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대제사장들과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형언할 수 없는 밝은 빛 가운데서 그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래서 그날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바울의 이 간증은 그 자리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똑같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아! 유대인들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너희들이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바울이 이 간증을 하는 동안에는 모두가 입을 다물고 경청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아주 강권적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던 겁니다. 기회! 이스라엘의 마지막 기회가 그렇게 찾아왔던 겁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바람과 같은 역사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강하게 불어온 겁니다. 바울의 이 설교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이 설교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는 복음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간증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였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주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명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 거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바울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 모두에게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겁니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마음에 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던 그들은 끝내 바울의 마지막 복음마저 또다시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30년 전 예수님께 했던 그대로 또다시 바울에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은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겁니다. 복음은 자신들만의 것이니까, 구원은 자신들의 전유물이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자신들만을 향한 거니까, 절대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태 10:14~15)”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 12:32)” 그렇게 이스라엘은 성령을 거역하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의 이 간증은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한 결 같이 증언한 똑같은 간증이었을 겁니다. 갈라디아에서도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고린도와 에베소에서도 똑같은 간증을 말씀했을 겁니다. 그곳에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엄청난 일들이 수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그랬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엄청난 은혜가 임한 말씀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은 간증, 똑같은 말씀인데 어째서 이렇게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일까요? 마음 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가 닫히고 보는 눈이 감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태 13:15)” 도대체 누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일까요?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겁니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귀가 이들이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귀가 열려있습니까? 눈이 열려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사람은 참 오묘한 존재입니다. 짐승만도 못하고 악마보다 더 악해질 수도 있고 천사보다 더 깨끗하고 거룩해질 수도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바울처럼 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변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 잘 합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교회가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이 마지막 시대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도 바울처럼 누구에게나 간증할 수 있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행 22:12-21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그냥 남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 않은 인간의 잘못된 심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왜 하필이면 ”사촌“인가? 왜 형제도 아니고 육촌도 아니고 사촌인가? 형제는 한 집안식구이지만 사촌은 친척이지 한 집안식구가 아니다. 그러니까 친형제가 잘되면 내 일처럼 좋아하고 축하할 수 있지만 사촌의 경우는 한 핏줄이면서도 다른 집안 식구이기 때문에 은근히 우리 집과 우리 집안 식구와 견주는 경쟁심리가 있다.
그러면 사촌이 땅을 샀는데 “배가 아픈가?” 이 말은 속이 편치 않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인데 왜 그런가? 그가 “나보다 먼저” 땅을 샀으니까 배가 아픈 것이다. 그가 “나보다 많이” 가졌으니까 기분이 나쁜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의 경우 만약에 내가 먼저 땅을 사면 당연히 그에게 으시대고 자랑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이런 것을 벗어나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자기보다 미국에 늦게 온 사람이 자기보다 가게를 먼저 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프고 괜히 미운 생각이 든다. 자기보다 미국에 늦게 온 사람이 영어를 더 잘 하는 것을 보고 괜히 속이 상한다. 자기보다 가게를 늦게 시작한 사람이 자기보다 집을 더 먼저 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프고 화가 난다.
나보다 못난 줄 알았던 사람이 나보다 결혼을 먼저 하고 더 좋은 사람하고 했다든가, 나보다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던가, 나보다 돈을 더 잘 번다든가 하면 갑자기 아침 먹은 것이 올라오려고 하고 실제로 갑자기 아랫배가 살살 아파서 화장실을 가야 한다. 심하면 가슴이 송곳으로 콱 찌르는 것 같이 아프고 머리까지 깨지듯이 아프다. 갑자기 손발에 힘이 쫙 빠지고 어지럽고 밥맛도 없어지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우리들의 심성에서 이런 것을 벗어버려야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나보다 늦게 예수를 믿고 나보다 늦게 세례를 받았는데 나보다 먼저 은혜 받고 나보다 먼저 복을 받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한다. 나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고 나보다 더 목사님께 인정받는 것 같고 나보다 더 헌금을 잘하고 더 전도 많이 하고 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속이 별로 편하지 못하다. 더구나 나보다 못난 것 같고 나보다 잘나지 못한 것 같은 사람이 나보다 먼저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잠을 못 이룬다. 그래서 지금은 잘 못하면서 옛날에 열심히 잘했던 이야기를 자꾸만 늘어놓아서 자기를 좀 내세우고 상대를 깎아내리고 내 배가 아프고 속이 아픈 것을 고쳐보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과 삶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만족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제대로 풀리기 시작한다.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것을 버리고 이런 것을 믿음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이겨야 신앙이 자라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며 먼지를 날리면서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달려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의 말에서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사실이 17-21절에 나오고 있다. 특히 21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셨다”는 대목이 그렇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그들의 선민의식이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장차 올 메시야 왕국은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짐승같이 여겼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해주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먼저 전한다고 하니까 그만 자존심이 상하고 큰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만 사랑하시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다른 모든 민족들도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만을 사랑하시는 편애와 편견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이 신앙을 떠나고 양심을 마비시키고 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나만이 잘 믿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 믿는다는 식의 생각은 큰 교만이다. 우리 교회만 제대로 믿는 것이고 우리 목사님이 제일 목회를 잘하고 다른 교회는 무언가 잘못되고 다른 목사님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된다.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내 교회 목회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잘못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덕을 끼치지 못한다. 그리고 잘 믿고 있는 다른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잘못된 신앙을 가진 집단들이 기성교회와 기성목회자는 다 틀렸고 자기들 집단에만 구원이 있다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우리 민족에 대한 잘못된 선민의식도 주의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교회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교회성장의 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마지막 때에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명을 주신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선민은 아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명의식에 투철해야 한다. 하나님을 널리 전하라는 사명을 떠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듯이 우리도 사명을 떠나면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명의식에 투철한 한국교회, 한국민족이 되자.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화를 낸 또 하나의 이유는 기득권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유대인으로 귀화를 하고 개종을 해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예수를 믿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고 핍박했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고 더 심하게 핍박했다. 이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핍박하기도 했고, 바울이 전도해서 세워 놓은 교회마다 찾아 다니면서 할례도 받지 말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틀렸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다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율법주의적 신자로서 갈라디아서는 이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주장을 사도 바울이 강력한 어조로 반박한 말씀인 것이다.물론 이런 주장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최초의 교회회의에서 바울과 베드로 등의 주장에 의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잘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를 무시하고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만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했으니 다른 사람도 다 내 뒤를 따라와야 하고 그리고 나는 앞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결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은,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믿는 것은 못 보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더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
이런 자세가 개인의 신앙성장과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큰 방해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곧잘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기득권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를 높여 주고 알아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종류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라도 자기가 충고를 하려고 한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고 신앙이 앞서가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잘되는 것을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진리이다. 먼저 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고 맥을 놓고 있으면 나중 된 사람들이 신앙이 자라서 앞서간다. 그럴 때에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함께 기뻐하고 오히려 격려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라. 그리고 자극과 도전을 받아서 나 자신도 다시 힘을 내고 그들과 함께 앞으로 달려나가면 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도 자극과 도전을 받지 않는 무감각이다. 남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보고 나도 다시 열심을 내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어떤 실수를 할 때에 이렇게 말한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새벽기도를 하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자기도 안 나온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생활이 달라지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면 생활을 고치라고 해야지 새벽기도가 필요없다고 하면 안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루에 한 끼 금식을 하거나 하루나 이틀 금식을 하는 것을 보고 “금식을 하려면 40일을 해야지 그 정도 하고서 무슨 금식을 했다고 하느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한 끼도 금식하지 않는다. 단 한 끼라도 지금 실제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 나중에 40일을 하겠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믿음에 열심을 내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자극과 도전을 받으라. 그리고 자극과 도전을 받을 때에 잘못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라. 용기를 내고 일어나서 앞으로 나가서 함께 주를 기쁘시게 하라.
그 다음을 보자. 바울의 히브리어연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군대의 천부장은 소란이 일어나자 바울이 정말로 중죄인인 줄 알고 심문을 해서 자백을 받으려고 그를 결박하고 채찍질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혀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의연하게 채찍을 맞고 고난을 받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는가? 조금 비겁해 보이는 행동은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것이 그의 지혜였다. 그 당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결박하거나 매질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나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돈을 주고 사기도 하였다. 바울은 아마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때에 로마시민권을 얻어서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바울은 사도행전 16장에서 보는대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을 때에는 왜 자신이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는가? 그리고 왜 지금은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는가? 우리가 어디까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고 어떤 경우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기준이 무엇인가?
그 기준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가이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 하나님께 유익인가를 기준으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되더라도 당장 나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오면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지금 다치거나 죽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여기서 이 채찍의 고난을 피한 후에 그의 삶은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로 잡혀서 2년 간 갇혀 있었고 로마에까지 가서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순교했다.
그는 나의 생명은 하나 뿐이고 언젠가는 주님을 위해 이 목숨을 드려야 할텐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생을 하다가 목숨을 잃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23:11, 27:2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네가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편안을 위해서나 자신의 필요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필요를 위해서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에서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대로 채찍을 맞으면서 감옥에 갇혔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간수까지 구원하게 되었다. 그리 나중에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혀서 아무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놓고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예루살렘에서는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먼저 밝혀서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고 있다.
6.25 때 공산당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온 목사님들이 있었고, 끝까지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겠다고 고집하고 남아 있다가 순교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이들 중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이것은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다. 양쪽 다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주님을 섬겼다. 끝까지 남아서 교회와 교인들을 지킨 분들도 충성한 것이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피난 나온 성도들을 섬긴 분들도 충성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필요를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서 결정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신앙이 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주시기를 구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사명을 따라 살기 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한다. 나의 유익과 나의 필요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서 산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과 삶을 기쁘게 받으시고 길을 여시고 책임져 주신다.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살아가자.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
행 22:12-29 / 더온누리교회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들려준다(12~16절).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17~21절). 예수는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선언하셨다.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고, 청부장과 로마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 사실을 듣고 두려워한다(22~29절). 본문은 바울의 세 개의 자기 변론 설교 중 첫 번째이다(24:10-21; 26:2-23). 바울의 첫 번째 변론은 다메섹과 성전에서 경험한 두 번의 계시 사건을 다룬다. 두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청중 유대인들을 향한 회개를 촉구한다. 바울은 자신을 택하신 분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이 죽인 예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었으며, 성전에서 그 예수가 계시를 주었다고 증언한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수를 의인으로 주장하는 것까지는 참았지만, 성전에서 계시하시는 이를 예수라고 언급하자 즉각 폭발하고 만다. 한편 본문은 로마 시민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로마 시민의 지위에 관한 내용이다. 바울은 자신에게서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고, 자신은 로마 시민인데, 무고하게 결박과 매질을 당했다고 백부장에게 따진다(24~29절). 이렇게 백부장에게 항의하는 이유는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며, 매질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행위이며, 살육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의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또, 천부장은 상당한 금액을 주고 시민권을 샀다고 말하는데, 이는 중요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뇌물의 일종이었다. 천부장은 황제가 임명하는 지위였기에 그는 군대에서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뇌물을 주고 시민권을 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바울은 날 때부터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니, 돈을 지불하고 로마 시민권을 얻은 천부장은 눌리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 아나니아와 바울의 새 인생(12~16절)
바울은 자신을 만난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소개한다(12절). 사도행전 9장에서는 예수의 제자로 소개되지만(9:10), 본문은 유대 청중들을 고려하여 그가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았고,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칭찬받던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경건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바울의 경험을 인정한 것은 청중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와서 “형제”라고 부르며 그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환대해 준다(13절). 그리고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라고 말하자 바울이 시력을 즉시 회복해서 아나니아를 볼 수 있게 된다. 큰 빛의 영광을 보고 시력을 잃었던 바울이 아나니아의 말로 시력을 회복하였으므로 바울은 아나니아가 앞으로 말하는 것 역시 주께서 주시는 메시지로 확신할 수 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택하신 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아나니아와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며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진정한 상속자들이다. 아나니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신 목적을 세 개의 부정사(~을 위하여)로 알려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려고, “그 의인”을 보게 하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려고” 바울을 택하셨다(14절). 바울은 이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모든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증인, 목격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15절). 사도행전 23~26장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유대인들(행 23:11)과 이방인 통치자들(24~26장) 앞에서 예수를 증언한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아 죄를 씻으라고 지시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의미하고, 세례는 죄를 씻음 받은 사건, 곧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의미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셨고(14절), 예수가 파송하신(15, 17~21절) 사도다. 예수는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 앞에서 전하도록 바울을 구원하여 증인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예수를 만났고 그의 음성(또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다(14절). 예수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씻음 받은, 곧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보냄 받은 자가 증언하고 전달해야 할 메시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만나고, 회심의 은혜를 간직한 사람이 참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2. 성전에서 환상을 경험하는 바울(17~21절)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에 “황홀한 중에(엔 에크스타세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이 시기는 다메섹의 경험이 있은 지 3년 후로 보인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을 나가라고 명령하신다(18절).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에 대해 증언하여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핍박받으면서 이전에 성전에서 예수가 경고하신 내용을 떠올린 것이다. 바울의 핍박은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이며,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바울의 부르심이 선명하게 확인된다. 바울은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바울에 대한 예수님의 소명이 성전에서 주어지는 것은 이사야 6장에 자세히 묘사된 이사야의 환상과 연결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던 것처럼(사 6:9~10), 지금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자신의 이전 행적을 말하면서 속히 떠나라는 주님의 음성에 대답한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투옥했고 회당에서 때렸고 주의 증인인 스데반을 죽일 때 찬성했을 뿐 아니라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20절). 그렇기에 자신이 예루살렘에 있어도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셨다(행 13:46; 18:6; 롬 11:13; 갈 2:2, 7).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에 열정적이었던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해 멀리 가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개입” 밖에 없었다. 또, 유대 청중 중 누구도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에 열심이었던 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일어났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이방인들에게 보내진다. 부름을 받은 종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인생이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부르시며,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예수를 만남으로 알게 하신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졌던 예배와 기도는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뜻을 깨닫는 통로였다.
3. 유대인의 반응과 로마 시민임을 밝히는 바울(22~29절)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 자신을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저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외친다(22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위해 바울을 보내셨다는 말에 극도로 분노했다. 군중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린다(23절). 군중이 광분하자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바울을 빨리 영내로 데려가라고 명령한다(24절). 그러면서 군중을 자극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때려서 심문하라고 명령한다. 채찍질로 심문하는 것은 당시 사실을 파악하려고 외국인에게 가하는 고문의 형식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힌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리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되물었다. 천부장은 먼저 바울에게 로마 시민이 맞는지 직접 확인한다. 자신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샀노라고 말한다(28절). 심문하려던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물러간다(29절). 천부장도 로마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결박한 것 때문에 염려한다. 당시는 로마 시민이라도 공공의 질서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면 체포해서 결박할 수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도록 만드는 것은 합법이 아니었다. 나는?-하나님은 바울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명을 알려 주셨다. 아나니아를 통해 알리심으로 공동체가 함께 알도록 하시기도 했고, 성전에서 기도할 때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시기도 했다. 한 번은 “모든 사람”을 전도의 대상으로 말씀하시더니, 다음에는 “멀리 이방인에게”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 말씀만이 아니라 신비적인 환상으로도 알리신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을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들은 일의 증인으로 삼으신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며, 자신의 사명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바울의 “나의 복음” 간증은 단지 경험만을 말하지 않았고 경험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섬세한 준비와 인도하심까지 자상하게 전하고 있다. -바울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다메섹 도상에서뿐만 아니라 성전에서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계시하셨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여전히 유대인처럼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였다.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만나주셨고 사명을 주셨기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빛이 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을 심문하고 채찍질하려는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힌다. 동족 유대인의 핍박에는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으로 여기며 참았으나, 로마 관리의 민심 무마용 졸속 재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불의나 무질서에 무조건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나 온유함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을 향한 소명을 한 번은 아나니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주시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직접 환상을 통해 알려주셨다. 선교 대상을 말씀하실 때도 한 번은 “모든 사람 앞에서”라고 넓게 말씀하시고, 또 한 번은 “멀리 이방인에게로”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과 상황과 공동체와 상식을 통해 다양하게 역사하신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 하셨지만, 바울은 자신이 성도들을 박해한 일(특별히 스데반의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피신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통한 이방인의 구원까지 내다보고 계셨다. 핍박을 마다하지 않는 바울의 각오도 아름답지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욱 값지고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없애려고 격렬히 요구한다.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방해했다가 거짓 고소에 모두 합당한 반론을 제시했지만 수용하지 않았다. 진리와 진실이 들어서지 못하는 마음에는 살기와 분노만 남을 뿐이다.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 여전함을 보며, 오늘 나에게도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인,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완악함과 패역함이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말씀이 예리하게 역사하심을 외면하는 인생이 가장 서글프고 안타까운 인생이다. *바울은 불법으로 매질하려던 로마군을 향해 로마 시민의 법적 권리를 주장한다. 무조건 고난 당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선교 자체가 조롱당하는 위기의 때에 교회와 선교사들에게 거룩한 지혜를 주시도록 겸손하게 빌어야 하지 않을까?
+ 기도제목
* 주님,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며 사명의 길을 가도록 이끄시는 사랑을 붙잡습니다.
* 주님, 말씀을 통해 사명의 길을 듣게 해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 믿음으로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순종함이 가장 먼저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