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ys*
고주희
비는 힘을 가졌지
늙은 소철나무의 잎을 부드럽게 하는 힘
초록을 더 짙은 초록으로 끌어올리는 힘
그럴 때 손을 내밀면 베이거나 찔리지 않고 그냥 흐르지
가까이서 보면 작고 나약하고
역겹게 보이는 것들
뿌리 밖으로 긴 발가락을 움직여
기척을 보내오는 제 안의 모든 벌레를 지켜내지
뭐든 가까이 있으면 흠집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너로부터 두어 발짝 뒤로
나무 아래 더 작은 나무
더 작은 나무 아래 들꽃, 넝쿨지어 기어오르는 새순
높이를 쪼개며 낮아지는 빗방울
개미가 두 배로 커지는 투명 볼록 거울
또 그 아래 장식용 코끼리처럼 춤추는 구름
내가 서 있는 이 한 줌의 평온
비좁은 풀의 간격을 재는 일처럼 소용없고
간절히 바라던 일의 결말과는 먼
비 갠 뒤 어둠은
어디선가 회색빛 자두를 키우고
해변을 입양해서 돌보는 노인들이
밤새 알을 부려놓고 사라진
거북이들의 미래가 된다
하루에 일곱 번 물빛이 바뀌는 바다
바다의 물빛이 전시된 미술관
푸른 현판이 되어 내걸린 사철나무들
한차례 소나기를 만난 전생이
대책 없이 또 붉게 젖는다
* 김보희 ‘the Days’ (2014년 作)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고주희 시인
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 『시골시인-J』 공저가 있음.
[출처] the Days - 고주희 ■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신작시ㅡ통호 제170호|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