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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6-19, 09:53
출처 : 조선일보
장준하, 일본유학 6년
각 토론장의 학력경력란에 나오는 일본 동양대학교 예과와 니혼대학교 신학교 유학경력 6년, 박정희 일본육사 2년편입이 문제면 장준하의 일본유학 6년은?
평북 의주(義州)출생. 일본의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日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 그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귀국하여 19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언론인·정치가. 평안북도 선천 출생. 장로교 고려신학파(高麗神學派) 목사 석인(錫仁)의 아들이다.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예과를 거쳐 동경의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에 다니다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
입영 6개월 만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임천(臨泉)에 있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 임천분교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대하였다. 이곳에서 김준엽(金俊燁)과 ≪등불≫이라는 필사본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이 그 해 11월 30일 이곳을 떠나게 되어 잡지 발간이 중단되자, 혹한 속에 도보로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출발, 만 2개월 만인 1945년 1월 30일 도착하였다.
서안광복군(西安光復軍) 제2지대 이범석(李範奭) 휘하에 들었다가, 유엔군 중국전구사령부(中國戰區司令部) 웨드마이어(Wedemeyer,A.C.) 휘하에서 미군 전략정보처(OSS)유격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교포들의 친목지로서 잡지 ≪제단 祭壇≫ 초판 300부를 펴냈다.
광복이 되자 8월 18일에는 광복군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선발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1945년 12월 환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교무처장으로 정계에 잠시 몸담았으나, 그 동안 못다 한 학업을 마치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을 다녔다.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사상≫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1953년에는 피난지에서 무일푼으로 ≪사상계 思想界≫를 창간하였다.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혐의로 검거되어 복역중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공천으로 옥중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사장에 복귀하였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민권투쟁으로 10여 회나 투옥되었으며, 가석방이 되어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민권운동을 전개,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의 무조건 즉시석방, 자유언론의 보장 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생애가 끝날 즈음에는 정당활동보다 민주회복국민회의를 통한 재야운동에 전념하였다. 1975년 8월 등산길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참고문헌≫ 돌베개(張俊河, 靑翰文化社, 1971)
≪참고문헌≫ 외길 한평생(奬學社,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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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표본 친일파 장준하 (펌)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립투사라고 칭송하는 장준하...그는 정말 항일운동가였을까? 일제시절 조선에는 경성제국대학,연희전문,보성전문 등 대학이 많았다. 그런데 장준하는 기어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 비싼 유학비용을 감수하면서... 장준하는 1941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경성제국대학이나 연희전문에도 철학과가 있었는데....그런데 그는 굳이 일본 본토로 유학을 가는 것이다. 얼마나 일본을 숭배했길래 그렇게 행동했을까?
일제시절 조선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없었다. 군사학을 배우고 싶었던 박정희는 할수없이 만주에 있는 육사를 갔다. 이러한 정황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친일의 기준은 그 사람의 속마음으로 정하는 것이지 외형적으로 획일적으로 정할수 없는 것이다.
언론계 지식인들(특히 좌익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정희는 친일파였고 장준하는 독립투사였다”고... 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는 한때 공산주의자였다“고... 이런 믿음은 정말 사실일까? 본인은 이에 대해 수차례 의문을 제기해 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좌익과 싸우는데 방해되니까 박정희의 남로당 문제는 덮어 두라고... 그런데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지금은 냉전기도 아니고 덮는다고 진실이 덮어지는 세상도 아니다. 우익들이 이 문제를 덮으려고만 하는 사이 친북좌익들은 박정희를 “친일과 좌익경력의 대명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글은 친일파 장준하를 비판한 어느 분의 글을 보고 인용하고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뮤지컬 장준하를 만드는 등 그를 미화 우상화하는 자들은 이글을 보고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글을 보면 냉전기시절 재야 반정부투사로 활동하던 장준하(광복군)의 이미지는 여지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장준하를 독립투사로 박정희를 친일파로 계속 선전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장준하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계속 그를 독립투사로 치켜세우고 칭송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한나라당내 일부 정치인과 일부 우파지식인들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장준하를 독립투사로 생각한다. 참 한심한 일이다. 이들의 어리석음은 곧 드러날 것이다.
50년대 반공정권인 자유당정권 시절 장준하는 항일운동가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을 독재 친일파정권으로 몰아 부치며 비판을 했다. 그후 반공정권인 공화당정권 시절에도 장준하는 박정희를 친일파 독재자로 몰아 부치며 반정부투쟁을 계속했다. 그럼 장준하는 그렇게 대단한 항일운동가였을까?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립군 중위라고 칭송하는 장준하...그는 일제시대인 1918년에 태어났다. 박정희보다 나이가 1살 적다. 이러한 장준하의 삶을 살펴보는 이유는 그 당시 조선청년들의 실제 인생을 알기 위함이다. 그래야 역사를 바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장준하의 아버지는 1930년대 초반 평안북도에서 일제의 판임관교원 즉 일본제국의 충성스런 신하인 일본 훈도를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이 그를 친일성향으로 만든 것 같다. 박정희의 아버지가 항일 동학운동의 간부였던 것과 대조된다.(김구선생도 항일 동학운동의 간부였다.)
일제시절의 판임관교원들은 군사부일체라는 사상에 의거 절대적인 존경과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일제의 교원들은 대부분 당대의 엘리트 수재들이었고 일본제국의 사상적 전위대였던 것이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몇몇 교원들을 제외하면 일제의 교원들은 대부분 다 천황의 직계하수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농업사회였던 일제치하 식민지 조선에서 교원들은 화이트칼라를 구성하던 상류층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군사부일체 사상이 남아 있어서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욱일의 기세를 보이며 승승장구하던 일본제국은 조선을 강점한데 이어 1932년에는 만주를 점령하는 등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코우공원 폭탄투척이 바로 이때 1932년 발생한 일이다.
장준하의 아버지는 우리민족의 절망기인 이 시기에 일본제국의 판임관교원을 다년간 역임한다. 우리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때 장준하는 14살이었다. 그는 엘리트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을 것이다. 박정희가 항일운동가의 아들로서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생활을 한 것과 대비된다.
장준하는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인지 일본제국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일본천황이 있는 곳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일본천황을 숭배하던 일제의 판임관교원들을 잘 아실 것이다. 장준하는 가정환경 즉 성장환경으로 인해 쉽게 친일파의 길로 들어 섰다고 보여진다. 독립지사 박정희와 대조된다.
젊은 장준하는 1938년 신성중학교(당시 중학교는 고학력)를 졸업한후 평안북도 정주에서 신안소학교 판임관 교원, 즉 일본제국의 교원(훈도)을 3년간이나 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중등교육에서 조선어학과를 폐지하는 등 내선일체,황국신민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조선의 전통,풍습,언어 등을 말살한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수탈을 더욱 강화하였고 이즈음 일본제국의 교원들 대부분은 일본 천황폐하의 충복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는 자들이었다고 볼수 있다. 몇몇을 제외한 일제말기의 훈도 대부분은 일본천황 즉 덴노헤이까의 교육칙어를 받들어 식민지조선인을 일제에 동화시키는 첨병이었다고 볼수 있다.
궁성요배,신사참배,조선말 사용금지,일본말 사용권장,곡물 공출 강요,놋그릇 수탈 등은 일제훈도의 기본업무였으며 일제의 훈도는 대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뛰는 제1선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는 이때 제1급 친일 민족반역자 생활을 한 셈이다. 이때 장준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박정희는 당시 어떻게 살았나? 아버지를 닮아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교원생활을 했지만 그는 불굴의 애국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구사범 시절에도 박정희는 이순신전기를 몰래 읽다가 책을 일본 사감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교사를 할때 박정희는 일본인 교장 교사들과 항상 반목하며 싸우기가 일쑤였고 감시의 눈을 피해 조선인 학생들에게 몰래 태극기를 가르치고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애국가를 가르치고 했던 것입니다. 조선인학생만 있을 때에는 “우리끼리는 조선말을 쓰자”고 하며 조선인 학생들을 위로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참조)
반면에 장준하는 어땠는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2대가 모두 민족반역자 친일파 인생을 살던 장준하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후 장준하는 더 노골적으로 친일인생을 살게 됩니다. 즉 그는 자기가 숭배하는 나라인 일본 본토로 유학을 가는 것이다. 창씨개명하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변신한 장준하는 1941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친일파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환경과 재력 덕분에 장준하는 일본 본토로 유학가는 행복을 누린다.
이와 달리 박정희는 1940년 만주국(일본의 보호국) 군관학교에 갑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며 가난한 항일운동가의 아들이었던 박정희는 학비가 적게 드는 만주군관학교(만주육사)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육군사관학교는 학비가 가장 적게드는 대학과정인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 본토와 다른 미개척지로서 애국가,국기,훈장모양 등이 모두 일본과 달랐습니다. 반면에 당시 식민지 조선의 애국가와 국기는 일본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조선의 애국가는 기미가요(일본의 애국가)였고 조선의 국기는 히노마루(일장기)였습니다. 조선은 일본과 같은 나라였던 것입니다. 조선에 있는 것이 만주에 있는 것보다 더 친일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을 싫어하여 식민화가 덜된 미개척지 즉 만주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교원직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조선을 떠났습니다. 독립투쟁을 하려면 현대적 군사학을 배워야 한다고 자주 말하던 박정희는 결국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장준하는 일본제국 천황의 본고향 일본 본토로 유학을 갔지만 박정희는 (만,한,조,일,몽) 5족으로 구성된 이방인의 나라 만주국을 택했던 것입니다. 장준하는 일본 본토로 유학가는 길 즉 행복과 성공이 보장된 안일한 친일파의 길을 택했지만 박정희는 독립투쟁을 머릿속에 그리며 험난한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 말기 즉 우리민족의 절망기에 자기만 안일하고 살려고 일본 본토로 유학(철학 전공)까지 간 청년 장준하... 그는 이때 과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일본 본토에서 공부를 더 해서 황국 즉, 대 일본제국의 학부대신이라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 이완용처럼...
일본에서 장준하는 일본에 유학 온 문익환을 만납니다. 이들 모두 유신을 반대한 사람들인데 후에 문익환은 김일성을 찾아가 그를 포옹한 사람입니다. 바로 문성근의 부친입니다. 정말 한심한 군상들입니다. 조선에도 대학이 많은데 무엇을 줏어 먹으러 일본 본토에 유학까지 온 것일까요? 그들은 그렇게 많은 유학 학비를 어떻게 조달했던 것일까요? 궁금합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배하던 일본 천황의 본거지 아니었나요? 자기의 조국을 일본으로 생각하고 일본이 그리워 일본 본토로 유학까지 간 것일까요? 일본 천황이 보고 싶고 그리워 그를 가까이서 보고 덴노헤이까 만자이를 외치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후 장준하는 일본 본토에서 결혼도 하는 등 거기서 3~4년간 빈둥거리며 삽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장준하의 애착은 이렇게 남달랐습니다. 이렇게 희희낙락 일본본토에서 터잡고 살던 장준하는 드디어 일제에 의해 1944년1월 징집(자원했다는 주장도 많음)을 당한다.
일본제국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말기 2차대전기 전쟁풍운의 시절에 자기 신변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여우같이 굴던 장준하는 드디어 일제에 의해 징집을 당하는 것이다. 1년만 더 버텼으면 조선광복이 되어 조선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장준하는 징집을 당하는 것이다.
일제말기는 전쟁의 막바지시기로 일제는 병력이 계속 모자랐고 따라서 대학생인 장준하도 예외가 될수 없었을 것이다. 장준하는 1944년 봄 평양에서 대 일본제국 군인이되는 훈련을 잘받고 중국 중부 지역인 서주 쓰가다부대에 명예로운 대 일본제국 군인으로 배속된다. 여기서 장준하는 4~5개월 정도 일본군 전투병으로 근무한다.
이때 장준하는 조선독립군 토벌전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1930년대 중반부터 만주에서 밀려난 조선독립군들은 중국 내륙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청천,이범석,김학규,조경한 등 민족주의(중도 혹은 우익성향)계열의 독립군들은 1930년대 중반부터 모택동의 공산군을 피해 만주를 떠나 상해로 중경으로 이동해 갔던 것입니다. 상해와 중국 내륙까지 진출했던 일본군들은 남경 등 중국 내륙에서 무차별적인 전투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어땠나? 조선말기 패망의 원인을 문약(부국강병 실패)으로 보고 크게 깨달은 민족의 청년지도자 박정희(당시 25세)는 학비가 적게 드는 만주육사를 갔고 1942년 만주군관학교(만주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조선인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만주국은 조선족,일본족,만주족 등 5개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는데 이런 곳에서 일본민족을 이기고 1등을 했다는 것은 조선민족에게는 경사 중의 경사였던 것입니다. 당시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크게 놀라 경축을 했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나라 민족으로서 위축되어 있던 조선인들은 자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주육사를 1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성적우수자로 뽑혀 일본육사에 입학할 특전을 받고 학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 일본육사에 입학을 합니다. 박정희가 일본에 가게 된 것은 이렇게 비자발적 외부적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박정희의 능력을 보고 그를 친일파로 만들려고 애썼지만 박정희의 독립정신은 더 강화되기만 했습니다. 이는 아마 항일동학 운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그 후에도 보면 알지만 박대통령은 1962년 국한문혼용을 폐지하고 한글전용을 실시할 정도로 독립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육사시절 박정희는 이섭준 등 동기들에게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군사학을 배워야 한다”고 독립에 대해 자주 말하며 군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많습니다. 1944년 3월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만주군으로 복귀해 소위로 배치를 받고 근무를 합니다. 당시 만주국 제8단의 소위 박정희는 중국공산당 8로군을 적으로 놓고 근무를 합니다.
1944년 만주는 중국공산당과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만주의 중공 8로군도 일본군 기세에 눌려 이렇다할 저항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박정희는 만주군 제8단 단장(중국인)의 부관이어서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주군 제8단은 사병이 전부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4명에 불과했습니다.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는 장개석 군대와 항상 싸운 군대입니다. 그들 모두 같은 중국사람들이고 같은 중국의 군대인데 왜 서로 그렇게 치열하게 전투를 했을까요? 그것은 사상적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가족과 민족,자유,종교 등을 모두 부정하며 폭력구테타를 주장하던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정말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조선인들만 있을 때에는 “일본은 망한다”고 말하며 독립군가를 부르던 박정희는 만주국 장교로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항일운동 준비를 합니다. 박정희는 만주군시절 일본인이 없는 곳에서는 “일본과 공산당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고 말하며 독립정신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증언이 많습니다. 이시절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출신 독립투사(광복군사령관) 이청천과 일본육사출신 항일투사 김광서를 떠오르게 합니다. 김광서는 김일성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만주군 시절 여운형을 좋게 보았던 박정희는 일제말기 중도좌파 독립운동가인 여운형(해방후 좌우합작 운동을 함)의 건국동맹과 접촉했는데 연락책은 여운형을 추종하던 박승환과 문용채였습니다. 문용채는 박정희를 몇번 만나 독립전쟁 즉 본토진격작전을 설명하였고 박정희는 이 작전에 참여합니다.
여운형은 최근 친일성향의 글(학병권유문)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베를린 올림픽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대체적으로 독립운동가로 보아 무방할 것입니다. 박승환과 접선된 사람으로는 박정희,문용채,최남근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만주군 제8단에서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방원철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의 접촉이 비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후 박정희의 남로당사건(1948년 말)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로당 사건당시 최남근 중령은 사형을 당했고 박정희(당시 31세 소령)는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남로당 창당시 한 축을 형성했다가 그들과 갈라섰던 여운형은 공산주의자 즉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것이 현재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최남근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은 것으로 보아 빨갱이가 아닙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여운형 지지자였거나 아니면 만주군 친구들과의 친분으로 얼떨결에 남로당에 가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 신분으로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친공좌파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제말기 만주군시절 공산주의자들이 박정희중위에게 “박정희동무”라고 하자 박정희가 화를 벌컥내며 따진 사실이 있고 당시 박정희가 “공산당은 우리의 적”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합니다.
박정희는 자유당 시절(당시 1군참모장,육군소장)에도 자신은 단지 민족주의자였는데 오해받아 곤욕을 치뤘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획일적 평등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그가 동조했을리 만무합니다. 당시 그는 반공좌파(온건좌파)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요즘의 좌익들은 대부분 다 친공좌파이므로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남로당은 처음에는 박헌영의 공산당(극좌),여운형의 인민당(중도좌파),신민당 등 3당이 통합하여 출발했는데 공산주의자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여운형이 남로당과 갈라서고 그후 여운형은 암살을 당합니다. 당시는 남로당에 당적을 두지 않고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도 많았습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은 대한민국이 건국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며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도 없던 시절의 일입니다.
1945~1949년 당시 시대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여운형은 좌익에 의해 암살되었고, 김구선생은 공산당을 포함하는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고,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위험성은 모르고 친일파만 잡겠다고 무모하게 나서고 있었고, 극좌세력은 여순반란과 제주 4.3폭동을 일으켜 그 진압과정에서 3만명 정도의 인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6.25가 발생합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남로당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박정희는 그후 좌파들과 완전히 손을 끊고 이후 30년동안 반공우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1961년 집권후 반공자유체제 즉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굳게 유지하면서도 농민과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배려를 한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은 아마 항일 동학농민운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농민들은 박대통령을 하늘이 낸 지도자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무수히 많습니다.
다시 해방전으로...이렇게 항일운동 준비를 하던 박정희는 1945년 일제가 망하자 할수없이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휘하의 광복군으로 들어가 귀국을 합니다. 김학규장군은 15년 동안 독립운동을 한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박대통령보다 17살 위인 독립투사 김학규장군은 나중에 박대통령을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항상 칭찬했다고 합니다. 독립정신이 투철한 박대통령을 김학규장군이 좋게 평가했다는 증거입니다. 또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한 상해 임정요인 조경한 선생 또한 만주군 소위 박정희의 항일행적을 칭찬했습니다.
이러한 박대통령을 친일파,공산당경력자로 몰아부치던 재야정치인 장준하는 일제말기 당시 청년시절을 어떻게 살았나?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전형적인 친일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고 봅니다. 부전자전이라고 할까? 철학을 전공하며 1944년초까지 일본 본토에서 전형적인 친일파로 살던 장준하는 난생처음 전쟁터에 나가 중국전선에 배치됩니다. 친일파의 아들로서 유복하게 자란 겁쟁이 철학도 장준하는 도피할 생각만 했을 것이다. 그곳은 우리의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서 보면, 만주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탈출하기 좋았을 것이다.
장준하 본인 말에 의하면 일본제국이 미워서 탈출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제말기 그의 친일행적과 여우같은 처신으로 볼때 그 말은 신빙성이 없다. 장준하는 탈출후 운좋게 김준엽을 만나 동행한다.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 소속 한국인 훈련반에 입소한 장준하는 훈련을 받은후 그해 11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된다. 그후 친구들과 함께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가서 1945년 2월 광복군 소위로 임명된다. 이것이 광복군이 되기까지의 장준하의 행적이다.
해방전 장준하의 광복군 경력은 6개월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광복군 중위의 명함을 자랑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 알량한 광복군 경력 6개월도 대부분 OSS훈련 기간이었고 그외 이렇다할 전투경력도 없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독립투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과대포장도 이만저만한 과대포장이 아니다.
실제 그는 해방전 인생 대부분을 일본제국을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파였던 그의 아버지부터 계산하면 장준하부자의 친일인생은 20년이 넘는다. 장준하만 보더라도 1938년 일본제국 교원으로 시작한 그의 친일 인생은 1944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무려 6년이다.
그의 광복군 경력은 6개월뿐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광복군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징집당하여 운좋게 중국대륙 중남부에 배치되자 거기서 탈영하여 이루어진 우연한 것이었다. 그가 만일 필리핀주둔 일본군에 배치되었더라면 탈출이 가능했을까?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장준하는 일제 강점기 우리의 민족암흑기 시절에 그의 아버지를 본받아 일제의 교원으로서 3년간 일본천황의 충견역할을 하다가 1941년 천황의 본고향 일본으로 유학가서 1944년까지 무려 3년간이나 빈둥거리며 친일인생을 산다. 이때까지 장준하는 민족정신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양아치였다고 볼수 있다.
뒷걸음질 치던 소가 우연히 쥐 잡듯이 장준하는 졸지에 광복군으로 변신한다. 즉 그의 광복군 변신은 당시 조선인의 수치스런 뒷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해방은 1945년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준하는 1944년 초까지 전형적인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일 뿐이다. 그의 광복군 경력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가 해방후 김구선생의 비서직을 했다는 것은 김구선생 자체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장준하는 인생 대부분을 친일양아치로 살다가 막판에 우연히 광복군으로 기어들어가 광복군의 명예를 더럽힌 위선자일 뿐이다. 그의 인생 대부분은 민족반역자의 그것이었으니 그를 독립투사로 과대포장하는 자들은 반성을 해야할 것이다.
그의 광복군 경력은 6개월뿐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광복군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징집당하여 운좋게 중국대륙 중남부에 배치되자 거기서 탈영하여 이루어진 우연한 것이었다. 그가 만일 필리핀주둔 일본군에 배치되었더라면 탈출이 가능했을까?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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