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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민권이 있음을 말하다
행 22:22-29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행 22:23-29 /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벗어 공중에 내던지며 흙 먼지를 움켜서 던졌다. 24) 이 광경을 본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들어가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그의 죄를 밝혀 내라고 명령하였다. 25) 군인들이 채찍으로 치려고 결박하자 바울이 한 장교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오?' 26) 이 말을 들은 장교가 파견대장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어떻게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파견대장이 와서 바울에게 `정말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다. `예, 그렇소.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 28)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나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29)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자 그를 채찍으로 치려고 서 있던 군인들은 곧 물러갔다. 파견대장 또한 바울을 결박하여 매질하라고 명령한 것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본문은 바울이 죽음의 위기, 잔인한 채찍 형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폭도로 돌변한 군중(22-24)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울의 변증은 끝났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혐오의 대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일 뿐입니다. 그런 이방인들을 구원하라고 주님께서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셨다는 바울의 말은 조용하던 유대인들을 순식간에 폭도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만큼 선민의식에 빠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용하던 군중은 이 말을 듣자마자 폭동을 일으켜 사울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린 행동은 그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천부장은 통제 불능의 군중으로부터 바울을 구출합니다.
채찍 형으로부터 구조되는 바울(25-29) 바울은 폭도로부터 구출되었지만 또 다시 채찍 형을 받게 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천부장이 채찍 형을 지시한 의도는 바울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채찍’은 울퉁불퉁한 금속이나 뼈를 단 무시무시한 고문도구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채찍에 맞다가 간혹 죽는 경우도 있었고, 불구가 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이 위기에서 바울은 지혜롭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시민권자가 죄목도 모른 채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질 경우 천부장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가 부패한 로마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시민권을 산 반면,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천부장의 이름에 ‘글라우디오’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그가 글라우디오 치세 하에서 시민권을 부정한 방법으로 매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23:26). 백부장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천부장은 부랴부랴 자신의 조치를 철회하였습니다. 한편, 바울은 이러한 로마 시민권의 특권을 염두에 두고 빌립보서에서 하늘의 시민권자의 특권을 언급하였습니다(빌 3:20). 로마의 시민권자가 로마 정부로부터 특혜를 누린 반면, 하늘의 시민권자는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돌보심을 받는 특혜를 누립니다.
적용: 모든 사람에게는 감정적으로 흥분하기 쉬운 아주 민감한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을 특별하게 화나게 하는 민감한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주님께 그 부분을 내려놓고 기도해 보세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아기의 호흡을 터뜨리기 위해 간호사들이 아기의 엉덩이를 살짝 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하나님과 동거하지 않아 속사람이 온전히 호흡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전에는 뜨거웠지만 세속에 파묻혀 살다보니 호흡하는 법을 잃어버린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린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근처에만 가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만 다가가도, 그분의 후광 근처에만 가도 우리 영의 호흡은 터지고 생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 위대한 아우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호흡을 터뜨리기 위해 엉덩이를 살짝 때리실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호크마 주석
=====22:22
이 말하는 것까지...살려 둘 자가 아니라 - 바울의 조심스러운 연설을 잠잠히 듣던무리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소명(召命)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다시금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21:36).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첨가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배타적이며 완고한 선민 의식과 이방인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전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22:23
떠들며...던지고...날리니 - 연속되는 세개의 현재분사형(* , 크라우가존톤, * , 립툰톤, * , 발론톤)은 격렬한 분노와 흥분으로 인하여 종잡을 수 없이 설치고 날뛰는 난폭한 군중들의 모습을 매우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의 표현은 극한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대개 비통, 울분, 애통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묘사된다(욥 2:12;삼하 16:13;계 18:19). 혹자는 본문에 묘사된 군중들의 상태가 바울을 돌로 쳐죽일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Preuschen), 지금의 상황은 로마 병사들이 지켜 서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덤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다만 즉각적인 본노의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22:24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 바울이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 아람어로 말했으므로(21:40), 천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군중들의 흥분으로 보아 바울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채찍은 가죽 끈에다 쇠조각과 뼈를 매단 것이며 이것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까지도 하였다. 이 채찍질은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나 노예를 심문할 때 사용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채찍질을 가하여 심문하였다고 한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전도 활동 중에 매를 맞는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笞杖)을 세 번 당했고 한 번은 돌로 맞았다고 한다(고후 11:24, 25).
=====22:25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 당시에는 혐의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기둥이나 말뚝에 채짹질하기 좋은 위치와 자세로 묶었다. 이때 채찍질의 표적은 대개 등이었다. 로마 사람 된자 -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발레리안 법(Lex Valeria)과 포르시안 법(Lex Porcia)에 의해 보호를 받았는데,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뿐만아니라 쥴리안 법(Lex Julia)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아무런 혐의도 없고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당한 채찍질을 가하려 한 데 대해 항의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22:26
백부장이...천부장에게 전하여 -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고한 로마 시민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것은 명백한 범법(犯法) 행위였고 그것에 대한 처벌이 어떤 것인지는 백부장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2:27
네가 로마 사람이냐...그러하다 -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상당히 당황한 듯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의자인 바울을 자기에게 불러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상례일텐데 지금은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 , 쉬 로마이오스 에이)에서 '네가'(* , 쉬)의 위치가 강조적인 자리에 있는데 이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천부장의 당황한 모습을 반영한다. 이에 비해 바울의 대답은 담담하고도 단호하다. 그는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거나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한다. 천부장은 바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해 더이상 의심을 갖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데서 드러난다. 한편 당사의 로마 시민들은 '토가'(toga)라는 긴 겉옷을 걸침으로써 로마 시민임을 나타냈다. 그러나 토가는 착용이 불편했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등이 있을 때 외에는 잘 착용하지 않았다. 만약 바울이 이 토가를 입고 있었다면 로마 군대에 의해 연행되지도 않았겠으나 그는 앞의 이유외에도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예루살렘이었으므로 더더욱 그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22:28
돈을 많이 들여...시민권을 얻었노라 - 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로마인이 아니고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자격이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은 정부의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졌다. 그런 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당한 명예와 권리를 누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민권이 뇌물에 의해 주어지기도 했고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기도 했다. 특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치부(致富) 하였다고 한다(Dio Cassius, History LX). 이 천부장의 씨족명이 글라우디오(Claudius)인 것을 감안할 때(23:26)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시민권을 산 것으로 보인다(Bruce, Longenecker). 이렇게 말하는 천부장의 생각에는 자기는 많은 돈을 들여 시민권을 샀는데 전혀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 초라한 바울의 외양을 볼 때 어떻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나면서부터로라 - 이 말은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문이 언제,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대체로 그 가능한 방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측된다. (1) B.C.171년경 다소가 헬라의 시(市)로 편입될 때 그 도시의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되었는데 바울의 선조도 그 엘리트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2) 바울의 선조중 누군가가 로마의 행정관이나 장군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여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3) 바울의 선조가 돈을 지불하고 취득하였을 것이다.
=====22:29
천부장도...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심문하려던 자들은 물론 심문을 명령했던 최고 책임자 천부장도 두려움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로마 시민을 결박하거나 매질을 가하지 못한다는 로마 법을(25절 주석 참조) 어겼기 때문이다. 천부장은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위 보고서를 총독에게 보냈다(23:26,27)
< 설 교 >
로마 시민권
정용섭 목사 / 행 22:22-29
유대인들의 분노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군중들에 의해 일종의 테러를 당하던 바울은 지금 파견대장에 의해서 구출을 받고 병영으로 끌려가던 중에 파견대장의 허락을 얻어 군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중이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낼 터이니 어서 가거라.” 하는 말씀을 들었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자 유대 군중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소동을 일으킨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런 놈은 아예 없애 버려라. 죽일 놈이다.”(22절) 그리고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내던지며 공중에 먼지를 날렸다고 한다. 일반적인 이야기의 진행에서 본다면 이들의 이런 소동은 두 가지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1. 바울의 이야기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자신이 유대교에 철저했던 사람이라는 사실과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했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이방인 선교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선교활동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더구나 누가가 21장28절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바울이 고발당하게 된 이유가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고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바울의 연설은 자신의 신앙에 관한 일반론에 떨어지고 말았다.
2. 그런데 바울의 연설은 유대인의 감정을 특별히 자극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의 이야기는 이제 본격적으로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모였던 유대 군중들이 바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이방인에게 보낼 터이니” 이후에 실제로 바울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실제로 율법과 성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는데, 의외로 그들은 연설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와서 소동을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연설이 누가의 고유한 신학적 착상에 의해서 고도로 편집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가는 당시의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판단으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유대교를 거부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변증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앞서 55과 공부의 결론에서 지적했듯이 누가의 이런 신학적 판단에 의해서 보도된 바울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그걸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두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선교의 역사를 가능한 대로 객관적인 사실성에 근거해서 찾아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를 읽는 것이다. 첫 번째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며, 두 번째의 흐름에서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기원 70년) 벌어진 시오니즘의 부흥 운동과 연관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가 도움을 줄 것이다.
최소한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바울의 연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면서 소동을 일으킨 군중들을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는 지금 유대인들의 동정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 연설 장면을 훨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동정심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교를 향한 유대교의 적대감을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의 이런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는 그 당시에 일상적으로 일어날만한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폭력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처한 상황은 성전에서 체포되던 그 위험한 순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제 안정의 책임이 있는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는 바울에게 채찍질을 해서라도 실상에 관해서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다. 누가의 이 짤막한 묘사에도 국가권력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로마 권력은 일단 국가 체제의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하기 때문에 소수자를 박해하기 마련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 주민의 대부분이었던 유대인들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바울을 억압하는 게 최선이었다. 로마 권력은 ‘폭력’을 통해서도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한다. 지금도 완전히 민주화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나, 또는 특별한 상황에서는 최고의 민주국가에서도 역시 이런 비인간적인 폭력은 자주 일어난다.
국가 권력이 국민들에게 행사하는 폭력만이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행사하는 폭력, 그리고 가부장적 질서에서 행해지는 폭력, 생태계를 향한 인간의 폭력, 정치와 경제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이르기 까지 폭력의 양상과 깊이는 실로 다양하다. 최근에는 성폭력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일상에 침투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행사하는, 그리고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 폭력도 위험한 수준에 도달한 것 같은데, 여기에는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도대체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 이 문제는 사회과학, 심층심리학, 범죄철학 등, 많은 부분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만 짚도록 하자. 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폭력은 본질적이다. 카인의 아벨 살해 사건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이 사건을 제사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 근본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유인원 시절부터 다른 동물과의 경쟁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무의식이 호모 사피엔스 이후의 인간에게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폭력이 인간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강도는 문명과 정비례한다는 게 에릭 프롬의 진단이다.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프롬은 문명 이전의 고대인들에 비해서 문명이 발달한 시대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파괴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고고학적 증거나 역사학적 근거로 정확하게 논증한 적이 있다. 녹색평론사에서 출판된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곳의 삶은 전적인 평화가 지배한다. 간혹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그 자리에 있던 제삼자가 판결을 내린다. 그 삼자가 어린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그 판결대로 따른다고 한다. 그것은 곧 고대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들이 오늘 문명사회의 사람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평화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폭력적이었던 로마 권력의 폭력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움으로써 피했다. 군인들이 자기를 결박하려고 하자 바울은 백인대장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25절) 지금 바울이나 그를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누가는 아직 이런 권력의 속성을 절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시대는 가부장주의가 당연했듯이 제국주의도 당연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로마 정권에 대해서 심각하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과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내세웠다는 것을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 운운하자 백인대장은 파견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파견대장은 바울을 결박했었다는 사실이 걱정되어 현장으로 다시 출동한다. 그런데 파견대장과 바울이 나눈 대화가 매우 한가하게 들린다. 파견대장은 시민권을 돈으로 샀다고 했으며,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라고 했다. 고문을 통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시급한 상황에서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건 바울의 로마 시민권을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조치였을 것이다. 어쨌든지 바울은 로마의 폭력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견대장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법과 율법
로마의 폭력이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합법적이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지금 바울이 그 폭력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로마 시민을 보호하는 로마의 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법은 말이 좋아서 법이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운용될 때가 많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로마의 법은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를 위한 법이었다. 로마의 평화를 인정하는 민족과 종교는 로마에 의해서 보호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민족과 종교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로마의 평화라는 게 다른 민족과의 충돌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이 유지되는 한 다른 나라의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법에 어느 정도 정통했기 때문에 율법의 문제도 정확하게 뚫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율법도 매우 합리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마법이 로마 제국을 가장 효율적으로 견인해낼 수 있는 규칙이었던 것처럼 율법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규칙이었다.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식일 법을 보자. 그들은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멈추었다. 실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노동만이 아니라 먹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이나 거리 이동에 필요한 노동도 금지시켰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 나그네, 종, 심지어 집짐승들에게까지 노동을 금지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강제 규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로마법이 합리적이었지만 현실의 역사에서는 패권의 수단으로 작용했듯이 유대인들의 율법도 역시 그들의 역사에서 종교적 억압 수단으로 작용했다. 생명의 현실을 담아내야 할 율법이 오히려 생명을 파괴하게 되었으며, 더불어서 샬롬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율법이 종교적 독선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율법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됨으로써 율법의 근본정신은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한 율법은 결코 폐기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서 율법의 이중성이 노출되었지만 율법은 여전히 이 땅의 삶에 필요한, 일종의 필요악이다. 바울은 오늘 그 필요악인 로마 시민권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아무리 하늘의 생명에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 땅의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늘 상대화되어야 한다.
부름 받은 자와 보냄을 받는 자
서정호 목사 / 행 22장 22~29절
미국인 울린 뇌사 엄마
급성뇌종양으로 뇌사판정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뇌사상태에서 딸을 낳았던 미국의 한 여성이 아기가 태어난 다음날 아침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의료진이 산모의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낸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남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아기의 몸무게가 1㎏이 안 되는 미숙아이지만 건강한 상태라고 합니다. USA 투데이는 코네티컷 의료센터의 연구 자료를 인용, “미국에서는 뇌사상태의 산모가 아기를 낳은 경우가 9번 있었지만 암세포가 뇌에 전이된 산모가 낳은 아기가 살아남은 적은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영국, 캐나다 등 의학이 최고로 발달한 선진 각국에서도 이 경우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산모가 의식을 잃자 의료진은 산모와 태아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충고했지만 남편은 의사의 충고를 거부한 다음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의 병실에서 3개월을 보냈고, 의식이 없는 아내에게 2살 된 아들의 생활을 말해주고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의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야 한다는 사실은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아기가 태어나는 날은 바로 우리에게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내는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또 다른 생명이 숨지는 교차점에 놓여있던 이 이야기는 생명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렵게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부름 받은 생명이 이제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계획 속에 보냄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귀한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여기 믿음의 사람으로 존재하기 까지는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과 기도가 있으므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이솝의 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가 산에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사흘을 굶으면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토끼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숲 속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 "나 좀 살려다오. 내가 죽는다." 그러니까 토끼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굴려서 그 곳에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의지하고 사자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와서는 토끼보고 하는 말이 "내가 몹시 배가 고픈데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 토끼가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의리 없는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 죽을 것을 살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시비가 벌어졌는데 마침 여우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여우가 지혜를 내었습니다. 사자보고 "사자 왕이여, 이 토끼가 임금님을 구원해주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습니까?" 사자가 함정으로 풍덩 들어가더니 "이렇게 하고 있었지" 그랬습니다. 여우가 "그럼 그냥 그렇게 계십시오" 라고 한 후에 "토끼야 가자"하고 그냥 갔다고 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본래성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도대체 내가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유로움은 마음의 선택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가운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유로움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내 재물이 많아질수록, 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내 삶의 경륜이 커질수록, 더 큰 자유나 더 높은 자유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가 줄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순한 마음의 태도이며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 현실에 대한 속상한 일들, 사람에 대한 섭섭함들, 병마에 대한 섭섭함들 다 접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아주 힘들게 살거나 아주 복잡하게 사는 사람, 인생에 여러 사람을 흔들어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모든 인생은 이래야 된다, 모든 사람이 저래야 된다”는 어리석은 자기 판단이나 어리석은 자기편견의 결과일 뿐입니다. 선택이란 지불할 고통과 극기할 용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는 그것이 항상 나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결과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조금은 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 선택의 결과를 항상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수도사가 인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은 자동차와 같아서 어디로나 갈 수 있다. 높은 곳에도 갈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란 자동차 앞에 누워있어서 때로는 인생이란 자동차에 깔려서 다치기도 하며 자동차에 다친 후 사고 때문이었다고 불평한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하면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주어진 자동차를 타고 멀리도 가보고 높은 데도 올라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할 때 참 인생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좁은 공간 속에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이란 차 앞에 도리어 누워있습니다. 그저 모두가 편안한데 안주하려고만 하고 좁은 삶의 공간 안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 결과는 서로 치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상대방 과실이라고 책잡기 바쁜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인생이 아닐까요?
이에 반해 참으로 축복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인생이란 자동차를 타고 멀리 떠나가곤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높은 곳에도 가보고 추운 지방에도 다녀오고 무더운 곳에도 가봅니다. 사막지대에도 가봅니다. 그리고 높은 곳이나, 추운 곳이나, 무더운 곳이나 사막지대, 그 어디서나 하나님의 축복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참으로 인생을 바르게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기도 중 비몽사몽간에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당신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좋지만 예루살렘 밖에서도 다들 자기를 아는데 자기의 증언을 들을 리가 없다고 주님께 하소연합니다.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아나이다."
이때 주님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명령하십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이 주님의 명령이 사도바울을 뒤집어 놓았고 온 세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주님의 이 명령을 듣고서 그냥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온 세계를 뒤집기는커녕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에게 붙잡히던지 유대인에게 붙잡혀서 큰 곤혹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한 살인자라고 비방할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납니다. 그는 높은 산, 넓은 들, 사막지대, 깊은 물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그리고 곳곳마다 임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사도바울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새 세계를 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떠나간 사람입니다.
인생이란 자동차를 타고 멀리 높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사막으로, 정글 속으로 떠나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장엄한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자동차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와 혹은 보낼 때를 동시적으로 아니하시고 기간의 차이를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그 예수는 핍박받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결심을 주님 앞에서 밝히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서 이방으로 속히 떠나가라고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기는 다메섹으로 가는 노중에서 부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시자 마자 즉시로 이방인의 사도로 보낼 수 없었던 것이 주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개한 것처럼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을 떠난 적이 없고 그 성 안에 있는 유명한 율법 학교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열심으로 공부를 해서 성적이든지 또 그 율법대로 사는 모든 행동이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자신만만했던 이 사람으로서는 예수님이 볼 때에는 사도의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바울은 저 이방에 사는 사람들을 개 취급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만 자랐고 엄한 율법의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사도로 세운다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앞서서 먼저 이방의 실상을 알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 이 순간까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예수에 관하여 인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마땅히 죽을 자로 알았으니 복음을 전혀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냥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 복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한다고 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스데반을 비롯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죽일 때 피 묻을까봐 벗어둔 옷을 보관해주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길도 복음을 전하러 갔던 길이 아니고 복음의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갔던 사람이니 어떻게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 엘리트라고 되는 것도 아니며 복음은 학점만 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을 받았다고 바로 사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바로 큰 능력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를 비롯한 그들은 대체적으로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잘 따져보면 베드로도 처음 예수님이 등장할 때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는데 세례 요한은 율법에 대하여 엄하게 가르쳐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베드로가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께서 그를 어부이던 중에 불러 가지고 바로 종으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삼년 동안 나가지 못하게 하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바울도 율법에 대하여서는 굉장한 사람이었고, 그 율법대로 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가 큰 빛을 보고 한 번 못 보게 되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유명한 그런 바울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열둘 제자와 못지않은 기간을 가지고 많은 훈련을 받은 후에 오늘날 우리가 위대하다고 하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가 부름을 받았지만 부름 받은 즉시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더 배우고 현지를 파악하고 봉사의 일을 다 마쳤고, 충분한 기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일을 충분히 한 후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 만났고 또 부름을 받았다고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부름 받은 후에 상당한 기간 동안 본방만 알고 있던 이 바울이 이방을 경험하였고 이방을 다 경험한 후에 성령이 그에게 임하셔서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 유명한 바울이 되도록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내륙 선교회 캐서린 밀러의 글
주님의 선택이 더 나았습니다. 나라면 햇빛이 비치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 장미꽃이 흩뿌린 듯 피어 있고 앞을 가로막는 구름도 없으며 근심의 그림자도 전혀 없는. /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길을 택하셨습니다. / 햇빛이나 향내 나는 장미 대신 머리 위에는 구름이, 발밑에는 가시가 있는. /
그래서 비록 발은 베어 아프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깊은 기쁨을 누리고 있으 니/ 그건 샤론의 꽃 예수님 때문이랍니다. / 햇빛에 관한 한, 그분의 아름다운 얼굴 자체가 제게는 완전한 햇빛이지요. / 나라면 보다 능동적이고 강인하며 지칠 줄 모르는 인생을 택했을 것입니다. / 가난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인생을. /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인생을 택하셨습니다. / 그것은 고통이 자주 수반되는 인생이요 힘이 가장 필요할 때 주어지지 않으며 / 얻는 대신 잃어버려야만 하는 인생이랍니다.
주님은 내게 다른 종류의 일을 주셨는데 / 그건 내 생각과 너무 다른 일로 그분이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위해/ 그분과 함께 하나님께 탄원하는 일이랍니다. /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그 분이 선택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 우리가 우리 인생을 그분 손에 맡겨 두기만 하면 / 그분은 실수 하나 없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눈이 먼 우리는 절대로 어둡고 험한 길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절대 발견하지 못하겠지요. / 좌절과 곤란과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변함없는 그분에게로 돌아섭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신실하며 사랑 많으시고 지혜로운 분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는 무엇인가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아니하든 우리는 지금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결국 우리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결정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르고 유익하고 성숙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부름 받는 자의 가치
우리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으며 실패라는 이름으로, 실수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 모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가치를 부름 받은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 받은 자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진정 원하시고 계획하시고 기뻐하시는 곳으로 보내시려는 뜻에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보냄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 시민권자의 특권
김영규 목사 / 행22:22-29
바울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흥분
안토니아 요새 계단에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한 바울의 설교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회심한지 3년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장면까지 얘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예루살렘을 떠나라!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을 향해 나가라!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22-23) “이 말하는 것까지” 즉,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흥분했습니다. 이방인이란 말에 유대인들은 알레르기적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방인은 개나 돼지 같이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도 지키기 않는 이방인이, 단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말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리질렀습니다. 저놈을 죽여라! 살려둬서는 안 될 사람이다! 고함 쳤습니다.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흙을 공중에 뿌렸습니다. 극도로 분노한 표시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처럼 바울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가만 놔두면 돌팔매질이 시작될 지경입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군 영내로 데리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영내로 들어온 천부장은 즉시 바울을 심문하려 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떠들어대는가? 사유가 궁금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24) 가장 손쉽게 자백을 받아내는 방법은 고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무조건 결박하고 채찍질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가죽 줄로 바울의 손을 붙잡아 맸습니다. 로마 시대의 채찍은 짐승을 다루거나 노예를 다루는 데 사용했습니다. 채찍은 단단한 막대 끝에 가죽 줄을 매고, 그 가죽 줄 끝에 금속이나 뼈 조각을 매달았습니다. 한 번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채찍에 맞다가 죽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채찍의 상처는 일 년이 가도 잘 낫지 않았고, 평생 불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젊잖던 천부장이 왜 갑자기 혹독한 채찍질을 하라고 했을까요? 본래 천부장은 폭도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군의 영내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군중들을 향해 말할 수 있도록 바울에게 변명의 기회도 줬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천부장이고 뭐고 막 대들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게 생겼습니다. 천부장은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바울이란 사람이 어떤 범죄자란 말인가? 일단 심문하여 이유나 알아내자! 그는 손쉬운 방법으로 채찍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당시 이런 식의 범죄자 고문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아주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로마 시민권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바울이 내민 것은 로마 시민권입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25-26) 로마 시민권자를 재판도 없이 잡아매거나 때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로마의 발레리안 법(Valerian Law, BC509)이나 포르시안 법(Porcian Law, BC195)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자를 재판 없이 붙잡아 매거나, 때리거나, 일체의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의 조치는 명백한 불법입니다. 재판을 하지 않고 범죄자로 몰아 손을 묶은 것도 불법이고, 때리라고 한 것도 불법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백부장은 당황했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시민권자라고 합니다!
천부장은 깜짝 놀라 반문합니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27) 이어지는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고 대답하니까 천부장은 엉뚱한 말을 합니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28) 바울은 외형상 잘 생긴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척 보면 미남에 인텔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잖아요? 대학 공부를 못했어도 유학 갔다 온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 있잖습니까? 천부장이 볼 때 바울은 꾀죄죄하게 생긴 것이 천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로마 시민권자라니? 그 얻기 힘든 로마 시민권을 저렇게 초라한 사람이 갖고 있을 리가 있나?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한 말이 바로 자신의 로마 시민권입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도대체 너는 어떻게 로마 시민이 됐나? 바울의 대답은 더 놀랍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다!
로마 시민권을 얻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생득적 시민권입니다. 로마 시민의 자녀는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이 됩니다. 둘째는 후천적 시민권 획득입니다. 로마 제국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거나, 혹은 사회적 지위와 돈이 있어 매수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경우입니다. 생득적 시민권자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부모가 로마 시민권자였을까? 어떤 학자들은 이런 추측을 합니다. 바울의 부친, 혹은 조부가 로마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바울의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다소입니다. 당시 길리기아의 다소는 헬라적인 문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로마화 되면서 아마 바울의 부친이나 조부가 로마의 폼페이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천부장의 경우는 두 번째 경우입니다. 그는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합니다.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23:26)입니다. 로마식으로 발음하면 클라우디우스 루시아입니다. 클라우디우스란 이름은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부인이었던 Messalina는 로마 시민권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권을 샀던 사람들은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서 클라우디우스란 이름을 많이 붙였습니다. 천부장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루시아입니다. 그는 헬라인이었는데 돈으로 로마 시민권을 샀고, 로마군의 고급 지휘관이 될 만큼 지위도 얻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평소 생각이 바울에게 시민권을 얻은 경위를 얘기하게 된 배경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 제국에서 신분보장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로마 시민권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마음대로 묶고 때리라고 했으니 속된 말로 모가지 감입니다. 백부장이나 천부장이 두려워 한 것은 당연합니다.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29)
천국 시민권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결론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 시민권입니다. 세상 시민권이 아무리 좋아도 천국 시민권만 못합니다. 세상 시민권은 세상에서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현세와 내세에 효력이 있습니다. 세상 시민권은 신체적 신분, 외형적 신분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영혼까지 보장 됩니다. 세상 시민권은 한시적 시한부 시민권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영원한 시민권입니다. 여러분! 천국 시민권을 갖고 계십니까?
1. 중요한 것은 시민권의 획득입니다.
세상 시민권은 출생으로 얻을 수도 있고, 돈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세상 어떤 수단으로도 얻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혈통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가려먹는다고 해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천부장은 돈과 권세로 시민권을 샀습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다 해도, 제아무리 많은 돈을 많이 가졌다 해도 돈으로 시민권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천국 시민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다 공짜입니다. 숨 쉬는 공기가 공짜입니다. 밟고 다니는 땅이 공짜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고,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는 지구라는 공간이 공짜입니다. 계절이 바뀌고 각종의 식물이 생산되는 생산능력이 공짜입니다. 난지도에 쓰레기를 가져다 쌓아놓는 것은 인간이 한 짓이지만, 그 쓰레기 더미에서 각종 나무와 식물이 자라나서 생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서울시로부터 돈 한 푼 받지 않으셨습니다. 공짜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영생을 돈으로 따지면 도저히 지불할 수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재산 다 털어 바쳐도 조족지혈입니다. 오체투지 해서 온 몸이 걸레가 된다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생을 거저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주십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공회원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거듭난다는 말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고 하나님께 용서 받는 일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혹시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세요. 시민권 따려고 얼마나 애씁니까? 만삭 된 몸을 이끌고 미국까지 가서 애를 낳습니다. 우선 천국 시민권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천국 시민권자의 신분보장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께서 그 신분을 보장하십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을 때 아무도 함부로 손대지 못했습니다. 어디서나 보호를 받았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시민권도 대단합니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면 세계 어디든지 다닐 수 있습니다. 비자 면제 국가도 상당히 많습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 미국 캐다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북미, 남미, 중미의 거의 모든 나라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국가, 남아공,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주요 국가들이 비자 면제 국가입니다. 대한민국 여권만 가지면 어디를 가든지 신분 보장이 됩니다. 세계 12위 이내의 경제 대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에게 미국 시민권을 가지게 하려고 원정 출산을 합니다. 국력이 클수록 시민권의 가치도 큽니다. 그만큼 신분보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자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눅21:17-18)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12:6-7) 완전한 신분 보장입니다. 육신만 지켜주시는 게 아닙니다.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121:7)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면 로마 시민권 내밀지 말고, 예수님 이름을 대세요. 즉,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청하세요.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하나님은 천국 시민 개개인을 위해서 보디가드처럼 천사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사람마다 그 천사가 날마다 따라다니면서 보호하고, 내 일상을 낱낱이 하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
3. 천국 시민권자의 삶의 질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이 바로 삶의 질입니다. 그러나 그 질이란 것이 대부분 육신적인 겁니다. 어제 우리 고덕 5단지 재건축조합 사업자 선정을 위한 설명회가 바로 이곳에서 있었습니다. 본당이 꽉 차도록 사람이 많이 왔습니다. 저는 머리털 나고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무식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마다 전문 지식이 많아요. 그런데 그 내용이 대부분 건축물의 구조나 금전적 이해상관에 관한 겁니다. 업체들의 설명대로 된다면 타워팰리스 저리 가라 정도의 최첨단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최상의 웰빙 조건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최첨단 아파트에 살면 최상의 행복이 이루어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진정한 웰빙이 뭡니까? 세상 환경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평안하고 기쁜 삶을 사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우리의 삶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불황이 오든지, 천재지변이 나든지, 전쟁이 나든지,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91:5-7)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영혼의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알아요. 영적 세계를 보는 자는 물질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4. 세상 떠날 때 천국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삶!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세상에서의 삶을 누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4,16) 돌아갈 곳이 있는 천국 시민권자로, 세상에서 소망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가슴에 있는 것
서금석 목사 / 행 22:22-30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하거나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를 일컬어 견원지간(犬猿之間)-개와 고양이 사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일찍부터 가축화되어 함께 살아 왔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개와 고양이는 서로 어울리지를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 동물의 의사를 표현하는 신호 형태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개는 상대에게 호감을 표시할 때 꼬리를 세우고 흔드는데 고양이에게는 꼬리를 세우는 것이 위협의 신호입니다. 개가 놀자고 앞발을 올리는 동작이 고양이에게는 공격의 준비 신호라고 합니다. 개는 귀를 뒤로 젖혀서 복종의 뜻을 나타내는 반면 고양이는 공격할 때 바로 그런 자세를 취한다고 하니 하나에서 열까지 서로 반대요 맞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도 아니고 경쟁 관계도 아닌데 개와 고양이 사이에 생긴 오해와 견제는 쉽게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이 품고 살아가는 오해란, 눈에 보이는 행동을 보고 말만을 듣고 판단하는데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기 기준으로만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오해와 갈등으로 세상은 갈수록 소란스럽고 서로 발톱과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나와 다릅니다. 내가 기준이 있는 것처럼 당신에게도 기준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만 인정한다 해도 사람들 사이는 훨씬 부드러워 질 수 있지요. 그리고 내가 상대방의 눈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고 삽시다.
20절까지는 바울이 회심이야기를 하자 비교적 잠잠하게 듣기만 했는데 21절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에게로 보낸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합니다.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바울의 회심 간증을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중에 또 바울의 간증을 듣고 감동받고 회개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는 없애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고함치며, 옷을 벗어 던지며, 공중에 먼지를 날렸다고 했습니다. 여기 옷벗어 던지며 먼지를 날렸다는 표현 있지요?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투우-TV에서 보신 적 있으시지요? 소가 화가 나서 덤벼들기 전에 반드시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발로 땅의 먼지를 일으키지요. 그리고는 목표물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티끌을 날렸다는 것은 악에 받쳐서 바울을 사정없이 죽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형판결이나 사형 집행은 반드시 로마법에 의해 시행해야만 했습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던 이유도 예수를 죽이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도 만일 저들이 바울을 돌로 쳐죽이면 로마법에 의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는데도 그런 것 상관치 않고 '바울을 우리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울의 회심 간증에 감동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같은 설교, 같은 말씀을 듣고 '아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구나' 감동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더 마음이 강퍅해져서 '왜 시간만 되면 나를 치느냐?' 눈 흘기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말씀들을 때마다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참으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궁금한 것이 생기지 않습니까?
1.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없애려고 했을까요?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무리들도, 바울도 다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율법을 숭상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꼭 죽여야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선민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간증하면서 '자기는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유대인들이 잘 듣지 않으니까 이방인에게로 가라 하셨다. 왜? 이방인을 구원시키려고'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유대인들을 못 견디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자기들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이 사상이 지나쳐서 이방인들을 짐승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특별히 미워한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과는 도저히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을 제쳐놓고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시키시려고 바울을 보내셨다고 하니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 유학 가서 첫 학기에 겪은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곧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던 한국 학생에게 물어보니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Quiz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Quiz인줄 알았지 그게 시험인줄 몰랐습니다. 또 시험을 본다고 하긴 하는데 어디까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낙담해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물론 남자 천사였습니다. 자세하게, 또박또박 설명해 줬습니다. 고맙고도 고마웠습니다. 눈물나게 고마웠습니다. 참 미국 사람들 마음 좋다, 착하다, 역시 좋은 사람들이구나. 얼마 후에 성적이 나왔습니다. 영어가 문제이지 신학공부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니 점수가 잘 나왔습니다. 미국 친구가 성적이 어찌되었느냐고 묻기에 자랑스럽게 얘기했더니 그 친구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는 무엇을 물어봐도 잘 가르쳐주질 않아요. 알고 봤더니 그 친구보다 내가 성적이 좋았습니다. 한쪽 구석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안 됐고, 뭔가 도와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도와줘야 할 상대가 아니라 경쟁의 상대라고 여겨지니까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려워 보일 때는 도와주지만 비슷하게 여겨지면 경쟁의식을 가지고 철저하게 맞서 나갑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안 돼 보일 때는 미워하기까지는 아니했지만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구원의 대상이라고 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 이웃에 사는 사람에게 망치를 빌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안 빌려 줘요. 그냥 왔습니다. 며칠 후 이웃 사람이 톱을 빌리러 왔습니다. 빌려줘야 합니까? 빌려주지 말아야 합니까? 안 빌려 주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망치가 필요할 때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톱을 빌려줍니다'하고는 빌려줬습니다. 잘한 일입니까? 잘한 일입니다. 그러면 톱 빌려간 사람이 좋아해야 합니까? 글쎄요. 내가 빌려주지 않으면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되니까 내가 빌려 줍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대단한 교만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마음 바탕에 바로 이 교만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이 자기와 똑같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기들은 평생 율법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는데 이방인들은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기들과 똑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선민의식 - 잘못된 우월감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릅니다. 우리 중에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은근히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사람 없습니까?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 사랑, 예수 사랑을 수없이 말하면서도 아직도 다른 사람이 나와 같아지는 것, 나보다 높아지는 것, 잘 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까? - 예수 헛 믿은 거예요.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더불어 기뻐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정말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입으로 유대인의 교만을 꾸짖으면서도 나는 더 교만하지 않습니까?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면 값이 떨어집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값있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먼저 웃으며 아는 체하면 못난이 취급받습니까? 주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기독교가 유대의 종교에서 세계의 종교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겠습니까? 한 가정의 개종도 힘이 드는데 한 민족을 상대로 한 개종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유대인의 완고함 때문에 유대인을 건너서 이방인에게로 바울을 보낸다고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격분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들기보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가슴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말씀들을 때마다 '회개할 것이 생각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좋았다. 나빴다. 은혜가 됐다 안됐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회개하고 고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앙이 여러분에게 뜨거운 능력이 될 것입니다.
2. 채찍질하는 천부장(24)
"24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며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드니까 천부장이 그 이유를 알려고 바울을 영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명합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니 로마 사람인 천부장이 무슨 소린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흥분하는 것 보니 무엇인가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만 관심을 가져 보려 합니다.
여기 나오는 채찍은 단순한 매가 아닙니다. 채찍은 가죽 끈에 다가 쇠조각과 뼈를 매단 것으로 이것으로 주로 등을 때렸는데 한번 맞으면 살이 가죽끈에 묻어 나와 뼈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 지시며 가는 중에 로마 병정에게 맞은 것도 바로 이런 채찍이었습니다. 채찍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이 채찍은 로마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나 노예들에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게도 공공연하게 빠른 자백을 얻어내려고 심문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천부장을 보면 좀 지혜롭지가 못한 사람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궁금했다면 무지막지하게 채찍으로 때리라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바울을 붙잡고 물어보든지 아니면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유를 물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느냐? 죽일 만한 무슨 이유가 있느냐?' 그런데 천부장은 이도 저도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먼저 때려놓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고문부터 시작합니다. 왜 고문합니까? 사실을 알아내려고. 세상이 악해지고 사람들이 악해지니까 사실을 알려고 고문하기보다는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고문하는 세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죄를 정해놓고, 죄가 있는지 먼저 밝혀 놓고 벌을 주던지 때리던지 해야지 매 먼저 때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않습니까? 천부장이라면 당시에 점령지에서는 대단한 힘이 있는 자리였는데 힘이 있을 때에 지혜롭게 지도력을 발휘해야지 무지막지하게 힘부터 쓰고 본다면 대단히 미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힘쓰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워야 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막 나가는 천부장에게 바울이 쓴 카드가 뭐였습니까?
3. 로마시민권? 천국 시민권?(25-29)
무서운 채찍질이 시작되려 할 때 바울은 자기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죽 줄로 묶는 백부장에게 자기가 '로마 사람된 자'-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이 당시는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로마시민권을 획득하는데 몇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① 원로원에서 유공자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군인들에게도 주었습니다.
② 부모가 시민권자인 경우에 자녀는 자연적으로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28절에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 시민권자였다'고 말합니다.
③ 로마 국가에 특별한 의무를 다하는 자유시에 출생하는 자에게 시민권을 주기도 했고
④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에게 엄청난 돈을 받고 팔기도 했고 투자이민처럼 돈 많이 내고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천부장의 경우에는 스스로 자기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로마 시민권 얻기가 쉽지 않았다-어려웠다는 것은 그 만큼 로마 시민권자에게 특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로마를 배경으로 한 시민권자에게 돌아가는 특혜도 그에 상당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먹고살기가 쉬웠습니다. 노예로 잡혀온 전쟁포로들을 로마 시민권자 들에게 배당해 줬습니다. 주인은 크게 일하지 않아도 노예들이 다 해줬습니다.
로마 시민은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채찍질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찍질하려 했으니 부당하다고 항의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로마 시민을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로마시민은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도 있었고 -처형당한다 해도 끔찍한 십자가형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목 베임을 당했고 십자가형은 받지 않았습니다. 또 로마시민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매질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을 채찍질하려 했으니 천부장도 얼마나 당황이 되었겠습니까? 29절에 보니까 천부장도 결박한 것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30절 같이 봅니다. "30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들이 그를 송사 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산헤드린 공회에 넘기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로마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육체적 고통은 비켜갔지만 여기서부터 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되었던 바울이 왜 구태여 로마시민권을 내세우며 위기를 벗어났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준비는 되어 있긴 하지만 자기 생명을 무모하게 던져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전도해야 하기에 그 방편으로 로마시민권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로마시민권을 한껏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천부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위기를 피해 갑니다. 성도 여러분. 시민권/국적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서 줍니까? 대사관, 나라가 나서지요. 왜? 국민이니까! 미국 국민이 문제 생기면 온 나라가 나서서 해결하지요. 이것이 나라의 힘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적, 영주권, 시민권 등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성도라면 적어도 '천국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마 시민권, 미국 시민권보다는 천국 시민권-영원한 천국에 살 수 있는 천국 시민권이 더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영생을 누릴 수 있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고 위험에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심을 약속해 주는 천국 시민권.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현실이 힘들더라도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또 하나 바울이 이처럼 환난과 고통 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수없이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가슴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 중세에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도사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고도 놀라운 것은 이 수도사가 문제가 있는 곳에 가서 특별히 하는 행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가서 조용히 침묵하고 그 사람 곁에 그냥 앉아 있다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이 낫습니다. 한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가정에 가서 하루를 지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납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 고을에 문제가 있다면 언덕 위에 올라가 그 고을을 바라보고 조용히 침묵하다가 몇 날 후에 떠납니다. 그러면 그 고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런 사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성을 배우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수도사는 몰려든 사람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 함께 가서 노동하고, 농사짓습니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가 되면 그는 나무 밑에 가서 침묵하기를 즐겨합니다. 기다리다 못해 제자들이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스승님의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성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이 무엇을 묻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마디 대답 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정리>
겸손하게 말씀을 들읍시다.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변화된 성숙한 인격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 들을 때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변화됩니다.
예수 믿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예수는 죽은 예수 아닙니까?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일도 만나고 궂은 일도 만납니다. 쉬운 일도 만나고 어려운 일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꼭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꼭 간절히 기도하며 사모해야 할 것은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게 하옵소서"입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평생 소원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행 22:23-23:11 / 박성환목사
믿음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입성한 믿음의 열조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후대에 본이 되는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족장들),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사사들), 다윗, 사무엘 처럼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도 있는 반면에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의 행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는”(히 11:33-34) 추앙받을만한 영웅적인 행동들도 기록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다가, 진리를 전하다가 당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어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갖히는 시련을 받았으며(예레미야) 돌로 치는 것(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과 톱으로 켜는 것과 같은 시험을 당하고(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악한 왕 므낫세에게 이런 죽임을 당하였다고 함)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에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5b-38)
초대 교회-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이후 시작된 오늘날 개신교 교회의 원형-성도들은 예수님 믿는 신앙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문화 가운데 살고 있는 이웃과 가족으로부터, 황제 숭배 사상을 강요한 난폭한 로마 황제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다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명예와 재산을 잃게 되고 가족들과 이웃들로 부터 추방당하고 안정된 직장도 포기해야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로 부터 돌에 맞에 죽기도 하고 감옥에 갖히기도 하고 로마 당국자들의 핍박을 피해 오랫동안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 동굴(카타콤)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의를 행함으로 고난 받는 1세기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기를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4, 17b)고 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마음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고 권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벧전 1:7)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일의 양심’으로 불리우는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중 조국 독일의 교회가 나치 정권에 의해 조정당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대항하는 교회 저항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독일 고백 교회가 세운 ‘목사 후보생 교육 기관’의 책임자로 섬겼는데, 1937년 나치 정권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자 장소를 옮겨가며 1940년 3월까지 목회자 양성 교육을 계속했습니다. 그 후 잠시 미국에 갔을 때 자신의 신학교 은사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 박사가 신학교 교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미국에 망명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독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치 정권하에서 고통받는 독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43년 히틀러 암살 모의 혐의로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나치 정권이 붕괴하기 3주전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말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들과 다른 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생활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사도 바울이 환난 가운데서도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 천부장 앞에서 담대한 바울 (22:22-29)
바울의 증언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욱 소리지르며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띠끌을 공중에 날립니다’ (22-23) 21절에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말이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의 감정을 더욱 격노케 한 것입니다.
천부장은 사태가 더욱 심각하게 되자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고 명하고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유대 군중들이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 심문하기 위해 바울에게 채찍질하라고 합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채찍(라틴어. Flagellum)은 “울퉁불퉁한 금속이나 뼈를 달아 무겁게 만들었으며, 단단한 나무 손잡이에 붙어 있는 가죽끈들로 된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 채찍에 맞아 죽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평생 불구자가 될 정도였습니다.”
로마 군인이 바울을 채찍질하기 위해 가죽줄로 바울을 매자, 바울이 곁에 서있던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인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유죄 판결을 받기 전에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고 전합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들의 권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만약 로마 시민인 바울을 적법한 절차 없이 고문한다면 그는 로마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이 진실임을 확증하기 위해 그가 로마 시민인지 직접 묻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천부장은 자신은 돈을 주고 시민권을 샀다고 말하자 바울은 자신은 태어나면서 부터 시민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많은 혜택과 특혜가 주어진 로마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로마에 뛰어난 공을 세운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시민권을 살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로마 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부모가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마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심문하려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물러나고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를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문이나 학문, 경력이나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으로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리며 살았지만 예수님 만난 이후에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보다는 ‘하늘 나라 시민’이 된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권리를 자랑하며 살았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빌 3:20)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의 사역 중에 처음으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로마 군인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의 과거를 자랑하고자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복음 전파를 용이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세상 권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임을 당당히 밝힘을 통해서 부당하게 고문당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믿음 생활하는 중에 부당하게 핍박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분과 지위,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라기 보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힘으로 부당한 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처럼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세상의 권리를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ex.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31개월만에 풀려난 캐나다 국적의 임현수 목사님의 간증)
• 공회 앞에서 담대한 바울 (23:1-6)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기 위하여 공회를 소집합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인 바울을 직접 고문하여 그 이유를 알고자 했으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을 통해서 진상을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의미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존경받는 유대인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공회원들은 70-100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공회 앞에 세우자 바울은 공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증언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하나님을 섬긴 진실한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아나니아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여전히 평생동안(회심하기 이전 뿐만 아니라 회심한 이래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겨온 훌륭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 짐작됩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에게는 교만의 극치이며 신성 모독의 극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대제사장을 오히려 책망하며 담대히 맞섭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23:3) ‘회칠한 담’은 튼튼하게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금방 무너지고 마는 벽을 말하는데 겉 모양은 그럴 듯하나 속은 불결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위선자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던 대제사장 앞에서 두려움 없이 오히려 그의 악함을 꾸짖고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 조차 뛰어넘는 복음의 열정이 그를 사로 잡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권력자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바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공회의 사람들이 바울에게 상대가 대제사장임을 알려주자 바울은 즉시 자신의 무례함을 인정하고 대제사장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출 22:28) 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바울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왜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아 보지 못하였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 존 스토트 목사님은 바울의 시력이 나빠서 의장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공회가 일부는 사두개파 사람들, 일부는 바리새파 사람들로 구성된 점을 알고, 자신의 심문 이유가 부활 증언에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이것은 바울의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빠뜨리지 말하야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은 자의 소망, 부활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혼란에 빠진 무리들 (23:7-10)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자 공회를 구성하고 있던 두 그룹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었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는 현실 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둘 사이에 바울이 끼어 그들 간의 분쟁으로 인해 바울이 찢길까 염려하여 공회에 군인들을 투입하여 그를 구출한 다음 요새로 데려갑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부활의 성경적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부활 논쟁으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오히려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부장을 통해서 바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바울과 늘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 부활의 신앙 가운데 굳게 서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고 믿지 않을 지라도 부활의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욥 19:25)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그 날 밤에 바울 곁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 (23:11)
혼란스럽고 힘든 하루를 보낸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11)
예상은 했지만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분노한 유대인들의 적대감과 폭력으로 인해 바울은 심적으로나 육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날 밤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그의 앞에 펼쳐질 그 심한 핍박을 그가 이겨 낼 수 있을 지, 로마에 까지 복음 전하고자 하는 그의 비전이 이루어 질 수 있을 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는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그 밤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염려하지 말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고난 가운데서도 나의 일(복음)을 증언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에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로마로 가는 배 안에서(“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바울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준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에게 천군만마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로마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환난과 고난 중에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설교 초두에 언급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님이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성탄절에 약혼자에 마지막으로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를 가사로 하여 독일 교회 음악가 지그프리트 피에츠(Siegfried Fietz)가 곡을 붙여 만든 찬양곡이 있는데, 곡의 이름은 “선한 능력으로”입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 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 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죽음의 공포가 그를 휘감고 있는 차디찬 형무소 감방에서 그는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능력이 그를 다스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 모두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기를”,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네가 로마 시민이냐
양향모목사 / 행 22:24-29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끄러움을 이용한 상술이라고 할까요? 장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사고를 치거나 시끄럽게 해서 장사가 잘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해서 로마까지 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일부러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용히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사건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 유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에 조용히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면 사람들이 별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나마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공개적으로 성전에 들어가고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왔다 날 잡아보라고 공개적으로 도전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상한대로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을 하고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접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아는 몇몇 사람들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자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바울을 죽이려고 덤볐습니다.
사건이 이렇게 크게 벌어지자 로마 군인들이 개입을 하게 됩니다. 로마군의 천부장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사태를 지켜보고 바울을 유대인들의 손에서 건져주고 유대인들 앞에서 변명할 기회도 주었습니다.
바울의 변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서 말을 끊고 오히려 더 흥분하고 소리를 지르고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면서 덤벼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노이즈 마케팅 같은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보호되었고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고 로마에까지 무사히 가게 되었고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변명을 했지만 오히려 더 흥분하고 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을 보고 천부장이 바울을 로마 군인이 주둔하는 영내로 불러들입니다. 천부장이 직접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지 그 죄상을 알아보고 벌을 내리든지 풀어주든지를 결정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뜻밖에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밝힙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이 정통 유대인임을 강하게 주장을 했는데 로마인들에게는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네가 로마시민이냐”라고 되물었는데 이 질문이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본문 24절에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에 데리고 들어와서 도대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군인으로서 바울의 죄를 자신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말할 때 히브리어 또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썼던 아람어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로마인이었던 천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그냥 조용히 물어보면 될 것인데 흉악한 죄인을 다루는 것처럼 바울을 다룹니다.
채찍질을 하면서 먼저 겁을 주고 심문을 하면 고분고분 바르게 실토하리라 생각하고 채찍질부터 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저렇게 극렬하게 흥분을 하면서 대들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엄청난 죄를 지은 흉악범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바울 한 사람을 놓고 격분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바울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을까요? 자기들이 그동안 믿고 있었던 것을 바울이 아니라고 하니까 화가 났을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에서의 제사가 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율법을 부인하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부인하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유대교를 비난하고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아주 나쁜 사람이며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하던 것이나 그렇게 믿고 있던 것들을 누가 뭐라고 한다고 쉽게 바꿔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알고 믿었던 것을 끝까지 믿고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이 자신이 알고 믿고 따르던 것이 진짜이고 정말 바른 길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우리를 불행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 때 교회 안에도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서 잘 살아야 된다는 기복신앙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복 받을 일을 많이 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것을 배운 사람들은 지금도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서 바른 삶을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시당합니다.
저급한 신비주의 때문에 교회가 무당집처럼 바뀌었습니다. 가짜 은사들이 범람하고 가짜 방언 가짜 신유은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고집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바르게 알지 못하고 착각하고 사는 것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혹 잘못 배운 것 때문에 엉뚱한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본문 25-26절에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바울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가죽 줄로 매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이 곁에서 그 일을 하는 백부장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내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인데 로마시민인 나를 죄도 확정하지 않고 죄인처럼 채찍질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가서 보고를 합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보고를 합니다.
당시 로마는 천하를 다스리는 막강한 나라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굉장한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특별히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정식 재판하여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기 전에는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은 죄가 있든지 없든지 쥐인 취급하고 죄를 뒤집어 씌어서 죽이기도 하고 인간답게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할 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도 보통 유대인이 아니고 아주 정통적인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에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가졌고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로마인들은 로마인들대로 로마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나라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특별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당시의 가장 중요한 두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게 해주셨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고 육신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유대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성전도 모르고 제사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면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로마 치안군도 바울을 쉽게 처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두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과거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달리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부터 우리에게는 의인들만 가질 수 있는 천국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주민등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막강한 나라로 인정을 받아서 세계 어느 곳이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지금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나라 시민권을 가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만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통하여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선교헌금도 많이 하시고 직접 선교도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중으로 시민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귀한 것을 받고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만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특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28절-29절에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가졌다고 하자 놀랐습니다. 생긴 것이 유대인처럼 생겼기 때문에 원래 로마인은 아닌 것 같고 로마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인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 로마시민권을 받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했습니다. 로마를 위해서 아주 큰 공을 세웠거나 로마의 큰 유익을 준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공로가 없으면서도 시민권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 돈을 주고 공로를 조작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한두 푼이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꿈도 못 꿀 정도로 큰 액수의 돈을 들여야 시민권을 살 수 있었습니다.
천부장도 돈을 들어서 시민권을 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돈을 들여서 시민권을 샀는데 바울의 행색을 보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아닌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시민권을 얻었는데 너는 어떻게 시민권을 받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나는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을 가지고 났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가운데서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 때부터 유대인이었고 동시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날 때부터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특별한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대한민국 백성이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과거에 나라가 가난할 때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별로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조금은 자랑스럽습니다. 세계에서 1등하는 것도 많고 한류 바람이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은 어떻게 받게 되었습니까?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고 받았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일 많이 하고 착하게 살아서 공로를 많이 세우고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영원한 하나님나라도 또 그 나라의 시민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시작이 되면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우리가 가진 이 세상의 시민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민권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기뻐 뛰며 춤을 추는 사람과 어두운 곳에서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불행한 삶을 사는 차이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우리도 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을 하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공로를 세워야 한다거나 거기에 맞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면 우리는 이 시민권을 가지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며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가 없이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그 시민권을 가지게 해주셨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그 믿음까지도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 주셨고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영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사람들은 그 마음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특별한 것을 넣어주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유전인자 같은 것을 영혼에 넣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로마 시민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나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 시민권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시민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유민용목사 / 행 22:22-30
바울이 자신의 간증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말을 이어가는 순간,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끊어 버렸습니다. 바울의 연설이 특별히 자극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친듯이 고함을 질러 대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흙을 움켜 쥐고서 공중에 던졌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는데, 개역개정은 ‘이 말하는 것까지 듣다가’, 쉬운말 성경은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는’이라고 기록합니다. 이후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며 바울을 살려 두지 말고 죽어야 마땅 하다고 소리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경건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들을때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바울의 말은 너무도 불쾌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끊고 종교적 경건을 빙자하여 바울을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우고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면 613개로 분류됩니다. 248개의 계명은 “~하라”이고, "하지 말라"의 계명이 365개입니다. 그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형식은 있는데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러하지요. 서로를 향한 마음과 사랑이 없이 원칙만 세워놓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관계는 늘 엄격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22절에 하반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완고한 마음에 어떻게 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종교적 행위만 있었지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허상뿐인 하나님이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복음은 죽어가는 마땅한 죄인까지 되살려 새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기독교 믿음은 실제적 관계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함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지만 다시 일으켜 주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는데, 주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에서 있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은 완전히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따르는 옛질서를 붕괴시키고,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다시는 사망의 세력이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달라지게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테켈 형무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새장속의 새처럼 불안해 하고, 그리움에 지쳐서 병들고, 목을 졸린 것처럼 숨을 쉬려 발버둥 치고…사소한 모욕에 분노를 떨고…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시는 히틀러에 저항하며 옥중에서 자신을 깊이 바라보며 고백한 시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통찰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니까 마음 중심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문자를 뛰어 넘어 주께서 실제적으로 함께하시는 믿음의 관계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후 찢어지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보며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옛모습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의인되게 하려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이라도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았어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며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멈춰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듣기도 전에 귀를 막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매사에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경주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그날에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믿어 보다가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평생 말씀을 묵상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고소거리가 되고, “돌로 치지 말라”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십니다. 이후 예수를 고발하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찔려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를 책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죄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작은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누군가를 돌로 치라고 외치는 세상입니다. 정치 사회의 현상만 봐도 이러한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교회 안이라고 이런 일이 없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제대로 통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따르게 되면 예수를 고발하려고 찾아 온 유대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으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경건의 모양은 하고 있는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돌로 치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며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은 여인은 매순간 선택과 곤경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돌에 맞게 된 여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자신의 생명과 교환해 주셨습니다.
24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빨리 데리고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를 채찍으로 심문하여,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유대인의 일상 언어는 히브리 언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전통 유대인들이 하는 히브리 말로 전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천부장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다시 난폭한 군중들로 변하니까 바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죄를 정하지도 않고 채찍부터 들도록 명령을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고 바울을 채찍질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채찍질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고, 바울 곁에 서 있는 백부장은 얼른 가서 천부장에게 보고합니다.
26 이 말을 듣고, 백부장이 얼른 천부장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천부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천부장이 놀라워하며 바울에게 와서 물었다. “그대가 정말 로마 시민이오?” 바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28 천부장이 말했다.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바울이 대답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의식 안에 주님을 전하는 일로 온통 가득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자신의 시민권을 잊고 전도를 했는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시민권이 바울의 삶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사역을 마칠때 쯤이니 노년의 나이었을 것이고, 채찍에 맞는다면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순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은 여섯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었는데, 끈 하나마다 납덩이가 달려 있어서 채찍에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채찍으로 맞을 경우 바울은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생각나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때에 로마 시민들은 재판도 하지 않는 상태에 매질을 하지 못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로마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행정구역이던 다소에서 바울이 태어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도, 한평생을 살다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로마의 시민권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로 사용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영주권. 시민권이 주는 힘과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부장은 큰 돈을 주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소유와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할 것입니다. 천부장이 획득한 로마 시민권은 로마 황제의 사람일 뿐이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속에서 살아 가지만 실제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분명하게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쓰이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천국 시민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들의 권세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삶의 목적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백년 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삶을 드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세상속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시민권을 그 자리에서 발급한다고 증거합니다(요 1:12) 성경은 천국 시민된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증거합니다(살전 2:9)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국 시민 된 성도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28:19.20)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로 사는 인생은 매일 매일 가르침 받고 배워가는 삶입니다. 나를 증명하며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삶의 주관자가 하나님 되어 주시기에 그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때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이며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목적을 알고 걷는 길은 흔들릴수는 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심을 믿고 주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삶속에서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한주도 삶의 이유가 되시고, 삶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