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업계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정승혜'라는 이름 석글자가 그저 낯설기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 해도, 우리는 분명 어디선가, 그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의해 탄생한 영화 카피문구에 이끌려 극장에 가 영화를 고르고, 또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에 참여한 영화들을 보며 울고 웃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렇게 그녀가 떠나갔다는 소식에 충무로가, 대한민국 영화계가 슬퍼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고작 그녀의 영화와, 그녀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일뿐이다. 네이버 커버스토리에서 그녀의 에너지로 생명을 얻었던 영화들을 되돌아본다.
故정승혜 대표는
영화제작사 '영화사 아침'의 故정승혜 대표는 지난 1989년 2월 신씨네에서 영화<행복은 성적순이아니잖아요>의 영화 마케팅을 시작으로, 지난 5월 17일 운명을 달리 하기까지 20년 동안 800여 편에 달하는 광고 디자인과 카피를 맡아 명카피라이터로 명성을 떨쳤다.
고인은 1991년에는 이준익 감독이 대표로 있는 씨네월드로 적을 옮겨 영화 <간첩 리철진><아나키스트><달마야 놀자> <황산벌> <왕의 남자> 등의 히트작 제작을 담당했다.
이후 2005년에는 영화사 아침을 설립하고 <라디오 스타> <궁녀> <님은 먼곳에> 등을 제작하였다. 이 밖에도 <키드캅>미술참여, <베를린 리포트><공포택시> 기획참여 등 고인은 충무로에 없어서는 안되는 전천후 팔방미인이자 대표 여성 영화인이었다.
오늘 그의 발인과 장례를 지켜보았습니다. 빈소에 허겁지겁 들어섰던 그날처럼, 장례식에서도 영정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었습니다. 지난 10여년간 수없이 보았던 웃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그 웃음이었습니다.
그의 작은 몸이 담긴 관을 실은 차가 청파동 성당을 떠나 벽제로 향한 뒤에도 조문객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빈소와 장례식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흘린 진심 어린 눈물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마흔 해가 넘는 삶을 살면서 그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그를 가족처럼 여겼던 영화인들이 이렇게나 많았음을 고스란히 보여줬습니다.
부음을 알리는 많은 기사들이 기록했듯, 지난 20여년간 그는 최고의 영화 카피라이터였습니다. 그리고 '라디오 스타'를 비롯해 시대를 위로해준 영화들을 많이 만든 제작자였습니다. 그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다름아닌 인간성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 조철현 타이거픽처스 대표와 함께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이 무엇보다 성품의 영화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 '아침'의 작은 방은 한국영화계의 사랑방이었습니다. 그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저 역시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을 찾아온 사람들의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들으며 웃고 울어주었습니다. 가끔가다 그 역시 자신에게 생긴 기쁜 일을 말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슬픈 일은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사 '아침'이 들어선 그 빌딩에는 제 사무실도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1년간, 답답해질 때면 종종 한 층 위 그의 사무실로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껏 저는 그렇게 맞장구를 잘 치고, 그렇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그때의 저에게, 무엇보다 그는 너무나 좋은 이웃이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그는 모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부터는 몸이 눈에 띄게 부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며 건강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간단히 답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습니다. 자주 만난 편이었지만, 그는 암환자의 고통에 대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난 3월 말에 본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역시 그는 밝았고 유쾌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아직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써온 카피처럼 짧고 열정적인 삶이었고, 자신이 사용해온 '암사자'란 아이디처럼 위엄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와의 진한 추억 한 가지씩을 저마다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제게 그것은 '정승혜체'라고 불렸던 그의 유명한 글씨입니다. 다니던 회사를 떠나 독립했을 때 그는 제게 명함을 2천장이나 선물했습니다. 그 명함의 앞면에는 제 이름이 그의 손글씨로 예쁘게 박혀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누군가에게 명함을 드릴 때마다 그의 따스함까지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년 전 그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던 어느 청년을 애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일간지 기자였던 제게 부탁했습니다. 그건 '스피드 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충무로의 택배 기사를 기리는 내용으로, 그가 신문에 처음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 담긴 그의 아름다운 마음은 많은 영화인들을 울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그 추도의 글을 받았던 제가 그 글을 썼던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추모해야 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그 가을 같은 봄날에,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사 이름처럼, 아침에 떠났습니다. 그 순간 영화계는 가장 믿음직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장 좋은 이웃을 잃었습니다.
2009년 5월 19일, 이동진-영화평론가
'모르는 척, 안가본 척, 처음인 척'(산부인과. 1997)
'인생은 타이밍이다'(광복절 특사. 2001)
'버티기와 밀어내기'(달마야 놀자. 2001)
'꿈에서 해도 죄가 되나요'(몽정기. 2002)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매트릭스2. 2003)
'결혼만 하면 할줄 알았다?'(어린신부. 2004)
'하늘한텐 비밀이야'(신부수업. 2004)
'받은 만큼 드릴게요'(친절한 금자씨. 2005)
'조선 최초의 궁중광대극'(왕의 남자. 2005)
'당신 가슴속에 남을... 두 남자'(야수. 2005)
'어서가서 웃.기.자'(투사부일체. 2005)
'이 사람이다 싶을 때 잡지 않으면'(사랑을 놓치다. 2006)
'너를 떠올리는 달콤한 기억'(각설탕. 2006)
'쎈놈만 살아 남는다'(강철중: 공공의 적1-1. 2008) 등
<도마뱀>과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궁녀> 네 편과 故정승혜 대표의 유작이 된 <비명>
정승혜의 카툰극장(생각의나무, 2003)
정승혜의 사자우리-사랑과 인생에 관한 물음과 느낌(스크린M&B, 2006)
노는 여자(웅진지식하우스, 2007)
<신년인터뷰> ⑦충무로 아이디어뱅크 정승혜(2005년 12월 22일 연합뉴스)
'충무로 흥행 조율사'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2008년 7월 31일 부산일보)
[조두진이 만난 사람들] (주)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2007년 2월 22일 매일신문)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