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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새명."
마치 신태훈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교탁을 짚고 있는 녀석의 손이 미세히 떨리고 있었다는 것은.. 나이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싫어."
싫어.
이젠 네 뜻대로 하지 않아.
그 어떤 것이던.
"좋은 말 할 때 나와"
신태훈의 저 말에 정말로 피식- 하며 웃음이 터져나온다.
"쿡. 좋은 말? 웃기고 있네. 네가 오던지."
신태훈의 하얀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되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깨끗한 미간에도 살짝 주름이 잡힌다.
하지만 녀석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절대로.
"나오라고 했어."
"네가 뭔데?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야? 누구보고 오라가라야?"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병신같이 만들어.
"이 새명.. 정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앞으로 .나.와."
태훈은 마지막 말에 악센트를 주며, 이윽고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곧장 나를 노려보며.
녀석이 가까이 오자 그가 지금껏 아래이빨을 악물고 최대한 분노를 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녀석은 지금껏 한번도 이런 대우를 당해본 적이 없겠지.
게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이 보는 데서.
그것이. 아마 지금 무엇보다 녀석을 화나게 한 것 일거다.
녀석은 전혀...
나 따위는 신경 쓰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핫. 반장.. 아니 반장님. 그렇게 잘났냐? 솔직히 네가 그 앞에서 조용히 해라 뭐해라
하는 그 자체가 지랄 같아. 병신, 지가 뭐라고."
"이새명.!"
"컥-"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훈은 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거칠게 들어올려져 조여오는 목을 통해 숨이 탁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마주하는 녀석의 눈동자가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숨결이 닿아버릴 정도로..
그렇게 서로의 공기가 섞여버릴 정도로.
깨끗한 갈색 눈이구나..
그래서 자꾸 시선이 가나 봐..
"...왜...? 때리기 라도 하려고.?"
나의 말에 처음으로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항상 곧고 똑바르기만 했던 눈동자가..
내 앞에서 금새라도 넘칠 듯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하아.. 그만 두자.. "
녀석의 손이 힘없이 내 목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버린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 처럼..
그렇게. 가버릴 거니?
"씨발. 마음대로 시작하고 마음대로 관두냐?
비겁한..
..더러운 게이 새..."
[ 퍽---! ]
"까약--!!!."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가 꽤나 아프고 어지럽다.
뇌가 멍. 하고 정지해버리는 것만 같은 충격과 차가운 시멘트의 감각이 느껴졌다.
[퍽-- ]
그리고 그 충격과 아픔은 계속 이어졌다.
눈앞으로 쏟아지는 크고 아픈 주먹세례에 나는 피할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그만둬 반장!!"
"태훈아 무슨 짓이야!"
"모두 말려~"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져서.
광대뼈가 화끈거리고. 내 엉덩이가 차가워서 나는 녀석에 의해 바닥에 내 팽개쳐진 채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겨우 반 애들이 녀석을 나에게서 떼어놓고도 나는 한참이나 바닥에 그렇게 쓰러져 있었다.
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너한테 맞아서 어금니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나.
머리가 터질듯한 아픔이나.
그런 것들은 조금도 상관치 않아.
내가 이렇게 아픈 것은..
숨도 쉬기 힘들만큼 힘든 것은..
그런 것들 따위가 아니야..
이 나쁜 새끼야..
반하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 12
"내 언젠가 네가 한번 사고칠 줄 알았다, 이새명.
하여간 이번이 처음이니깐 약하게 넘어가는 줄 알어? 앞으로 조심하고..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반성문 10장. 빽빽이 채워놔, 알았어?"
학주는 그 말을 끝으로 대자로 내 머리를 콩- 하고 약하게 때린 후 상담실을 나갔다.
결국 내 앞에 앉아있는 저 녀석, 신태훈에게는 아무런 훈계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나가는 학주의 발걸음 사이로 '7반 반장이 왠일로..' 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져 간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고.
상담실 안에는 남겨진 두 사람만의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녀석은 나에게 시선은 커녕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어 오르는 눈 밑의 살이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나는 팔을 개고 책상에 엎드렸다.
미처 벌어진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다가 교복자켓에 닿는 바람에 '아-'하고 나직이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버렸다.
녀석이 어서 이곳에서 꺼져 주기만을 바랬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나가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의 상처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몹시도.. 부상을 당했다.
중상..수준이야.
-슥삭슥삭.
일정한 속도로 어떤 소리가 들려서 나는 살며시 팔틈 사이로 고개를 들어 녀석을 봤다.
어느새 녀석은 앞에 놓여진 하얀색 종이를 연필을 들고 빽빽이 채우고 이었다.
막힘없이 적어 내려가는 녀석의 반성문을 힐끔 보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차라리 어서 쓰고 꺼져라.
한동안 계속되던 녀석의 필기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종이를 부스럭 거리며 챙기는 소리가 이어져 나는 녀석이 이내 다 쓰고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녀석이 어서 이곳에서 나가주기를.
그리고.
가지 않기를.
모순된 감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안 쓸거니.?"
"..."
녀석의 저 짧은 음성에도 흠칫. 거리는 내 자신이 정말 죽일 만큼 밉다.
태훈은 한동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끼익-하고 걸상을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가버리는 구나.
넌. 언제나 그렇지.
냉정하고 차가워.
절대로 두 번 묻지 않아.
나는 녀석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기를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기를 바라고.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녹슨 문이 삐꺽거리며 내는 마찰음이 아니라, 내 옆에 놓여져
있던 종이를 부스럭- 가져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또 그 예의 연필 적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
나는 왠지 저 소리가 좋다고 느껴졌다.
일정한 속도로 지속되는 나무와 나무사이의 또각또각. 저 정직한 음이 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심장의 소리를 가라앉혀준다.
"..다 썼어."
문득, 태훈이 말했다.
".........."
"..선생님 불러올게."
녀석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팔 위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녀석이 내 대신 내 이름을 적고 번호를 적고. 써내려간 반성문을
내려다 보다 그대로 잡아들어 짝-짝- 찢어버렸다.
"이새..!"
태훈은 뒤늦게 내 손을 잡아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갈갈이 찢겨나간 종이는 바닥에
내 팽겨 진 후였다.
"필요없어."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태훈이 결국 격앙된 목소리로 다그친다.
하지만 난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넌 가. 난 신경쓰지마."
"하아...."
녀석의 깊은 한숨소리가 그 작은 공간에 퍼져나간다.
아마도 녀석은 지금 간절히 담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마 아무리 녀석이라도, 그 모범생 신태훈이 여기서 그런 짓까지는 못하겠지.
항상 자신때문밖에 힘들어할 줄 모르는 녀석이니깐.
남들 눈이 가장 무서운 녀석이니깐.
그럼에도 날.. 모두의 앞에서 때린 것은.. 너도 자제심을 잃을 수 있다는 걸까?
"이새명.. 내말 들어.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거야? 이러지 말고 돌아가야지..
도대체 왜 이러는 데?
너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너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 그날 ..
"닥쳐!!!"
녀석은 나긋이 나를 달래려는 듯 말했지만, 난 더이상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었다. 아니, 그 뒷말을 계속하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새명. 우리가 그날 그런 건.."
"씨발! 닥치라고!!!"
왜냐하면 그 날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나에겐 그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는 고문이니깐.
"잘들어. 신태훈. .
난 돈 받고 대주는 창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결을 바치고 쩔쩔매는 숫처녀도 아니야.
그러니깐..
날 더이상 비참하게 만들지마."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난 녀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또박또박 한단어 한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목소리가 떨려서도 안돼고. 시선을 피해서도 안돼.
난.. 그래선 안돼.
이 모든 건 진심 이니깐.
"신태훈... 나도 너도 서로 그날 일.. 깨끗이 잊어 주고, 기억속에서 다 지워줄테니깐...
너한테 그 어떤 것도 바라는 거 없으니깐.
너 나한테 사과 따위하면...
난 널 죽여버릴 지도 몰라."
나는 힘겹게 말을 마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를 참아야 했다.
다음에서 나올 무언가를..
녀석의 갈색 눈은 한동안 그런 날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었고,
..표정은 없었다.
"하아......."
태훈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다.
녀석의 하얀 얼굴은 화가 난 것도 같았고, 그리고 그 반대인 것도 같았다.
바로 돌아온 녀석의 눈빛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니깐.
그렇게 날 비웃고 있었다.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애초에 사과따위 할 생각없었어.
아니, 내가 왜 사과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피해자 인척하지마.
어차피 엉덩이를 쳐들면서 즐긴건.. 피차 마찬가지야."
뭐..?
심장이..
"아니야?
난 그때 충분히 같이 즐겼다고 생각했는데..
난 널 일방적으로 희롱한것도 강간한 것도 아니야.
솔직히 인정해."
심장을.. 도려내간다.
녀석은 결국 저렇게 끝까지.. 해버린다.
"실망이다, 이새명.
너라면 그런 것 쯤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줄 알았는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랑 처음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어, 네가 말야. “
......
씨발새끼...
"..좋아. 나 먼저 나간다. 네가 알아서 쓰고 나오던지 말던지 네 마음대로 해."
개 새끼...
천하의 나쁜 새끼...
"참.. 그 얼굴의 상처는 빨리 치료하는 게 좋을 거야. 남지 않으려면."
.
.
넌 그렇게 냉정하고.
넌 언제나 그렇게 옳고.
바르고. 똑똑해서 좋겠다.
그래서 좋겠다.
이 개자식....
녀석이 나가버린 텅 빈 상담실 안에서 나는 홀로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있었다.
들리는 것은 .
내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책상위에 똑.똑 떨어져내리는 소리만이 언제까지고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지 모르겠어.
자꾸 눈동자가 뜨거워져 곤란해.
먹먹하다 못해 애려오는 것 같아.
목구멍이 큼지막한 것에 막혀서 금새라도 숨이 막혀버릴 것만같아.
왜 이렇게 온몸을 저리게 하냐?
왜 이렇게 가슴을 아프게해.
너무 아프잖아.
이건.. 씨발..
너무 심하잖아.....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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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한 대만
아직은 조금은 쌀쌀한 4월의 점심시간.
이제는 너무나 당당하고 익숙한 모습으로 당당히 옥상난간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
키가 약간 더 크고 피부가 좀더 창백하리 만큼 하얀 검은 생머리의 소년이
갈색머리를 한 옆 소년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내민다.
- 너 하나 남은 거 봤어.
- ….
본의 아니게 거절당한 키 큰 소년, 주재희는 그러나 더 이상 조르거나 채근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린다.
- ….
- 마지막까지 아껴 두는 타입?
-.. 쓰지 않는 타입. 마지막까지..
.- 흠.. 그렇군.
마지못해, 결심한 듯 담배를 꺼내 건넸다.
더 실랑이를 벌여봤자 이득 볼 것이 있나, 겨우 담배 한 개피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받아든 주재희는 약간의 만족한 표정을 띄우며 다시 불을 붙이고 옥상 난간에
팔을 괴고 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선을 항상 운동장의 그 애를 쫓고 있다.
아. 웃는군..
나도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녀석의 시선을 쫓아 본 그 아이..
'이 새명'
언제나의 그 긴 머리 여자애와 함께 뭐가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다.
같이 있는 여자애보다 더 청량한 미소다.
보고 있는 사람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나올만한 .충분히 예쁜 미소.
- 알고 있어?
- …………?
- 쟤가 웃으면…. 너도 웃고 있어.
- 아…
녀석은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아. 하는 말로 그냥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대화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물론 그 ‘ 특정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화는 커녕,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 아니…
그냥 무….. 인가… 이 녀석, 주재희에게 이 세상은?
그 아이를 제외한.
- 그럼… 저 녀석이 울면.. 따라 우나?
사실, 나의 저 질문은 충동적이었고,
반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난기서린 기분에서였다.
-.....아니…
…. .죽고 싶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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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 참, 이 글의 뒷 편은 연재소설홍보해요? 란에 재희의 이미지컷과 함께 올라가있습니다.~ 아직 안보신분들은 힐끗- 참고해주세요
반장이 너무 재수 없어요. 본심이 뭔지 너무 궁금 하네요. 전 재희를 응원 합니다.
사실 저도 그나마 반장 대사..많이 순화시켜서 몇번을 고쳐서 쓴건지... 반장도.. 아직은 오락가락하는 청춘..이랄까요..ㅠ
반장싫네요ㅠㅠㅠㅠ 재희와 잘 되길~
이번편 반장이 너무 ㅠㅠ ㅠ 재희가 이제 슬슬 활약을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