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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14-17
14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나는 너희를 이 성읍에서 하나,
저 가문에서 둘씩 끌어내어 시온으로 데려오겠다.
15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16 너희가 그날 그 땅에서 불어나고 번성하게 될 때, ─ 주님의 말씀이다. ─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 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며,
다시 만들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17 그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의 옥좌’라 부를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씨를 뿌리시는 주님.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님의 옥좌’라 부르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날이 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며,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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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들에게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예레미야는 유배의 끝을 알리며 이제 예루살렘이 ‘주님의 옥좌’가 될 것이기 때문에 계약의 궤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결실이 다르다(복음).
오늘의 묵상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에는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 비유는 농사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말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흙이 많지 않은 돌밭과 가시덤불 때문에 씨가 자라지 못하는 땅과 좋은 땅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이미 뿌려졌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비유의 해설은 가장 먼저 ‘나는 어떤 땅일까?’를 묻게 만듭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우리의 상황은 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각자 다릅니다. 말씀이 달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비유의 설명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호소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고 언제든지 좋은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귀 기울여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찾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꾸준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도 ‘좋은 땅’이 되어 갈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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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성령께서 주신 신앙 감각의 은사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전해 받은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올바른 판단으로 그 믿음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믿음을 실생활에 더욱 충만히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교회 헌장 12항 참조).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매 순간 듣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일상의 다양한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집니다. 성경 말씀을 직접 읽거나 읽은 말씀을 기억할 때, 동료 신자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과 만나면서도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거리에서도, 일터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은 늘 우리 곁에 머뭅니다.
이렇게 매 순간 뿌려진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밭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 성장은 결정됩니다. 말씀을 듣고 새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 말씀을 듣지만 마음에 새길 줄 몰라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면 외면하는 사람, 말씀을 듣고 새기는 즐거움을 머리로는 알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내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형태는 언제나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결심하면 마음 밭에 좋은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여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습관은 제2의 본성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이기적이며 세상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본성이라면,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 말씀에 맛 들이는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덧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덕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부터 성경 구절 하나라도 기억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습관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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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는 것은 옛날 팔레스티나 지방의 일반적인 농경법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빈 밭에 먼저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 보습으로 갈아엎어서 흙을 덮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는 동네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생긴 길 위나 가시덤불 위에도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 갈아엎는다고 합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에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합니다. 물론 많은 씨앗들이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의 대부분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의 마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 배척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실패와 성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판과 반대에 부닥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신뢰하시며 결코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역시 수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앗에 대해 꾸준히 기다리면 엄청난 결실을 내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복음 선포의 성공 여부는 하느님께서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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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 밭에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씨앗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 밭을 잘 일구어 싹을 틔우고,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 밭을 잘 일구지 못한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 오면 곧 넘어지고 맙니다. 또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 밭은 어떤 상태입니까? 씨앗이 잘 자라도록 손질하여 일구고 있습니까? 아니면, 돌이나 자갈이 많아도 치우지 않으며, 엉겅퀴나 잡초들이 무성한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비유의 내용을 마음 깊이 새겨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 밭이 제대로 일구어져 있지 않으면, 이제라도 정성스럽게 일구어, 주님께서 뿌리신 씨앗이 제대로 싹 틔우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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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끊는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입니다. 때로는 가야 할 장소이고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혹도 많습니다. 힘이 부치면 즉시 ‘태클’을 걸어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결심하고도 무너졌는지요?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청해야 합니다. 왜 이런 결심을 주시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끊을 생각을 불어넣어 주신 것인지 모릅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라고 욕심을 조절하게 이끄신 것인지 모릅니다.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면 ‘좋은 느낌’도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이제는 말씀이 뿌리내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유혹은 늘 도전합니다. 스승님을 유혹한 사탄입니다. 사십 일을 단식하신 그분께 사탄은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런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천상 능력을 가진 당신이 이렇게 애쓴다고 누가 인정해 주겠습니까?” 유혹의 본질은 이렇듯 ‘누가 알아주나요?’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건너뛰어야 합니다. 좋은 땅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 자연스레 다가오는 ‘결과’입니다. 유혹을 겸손하게 물리쳤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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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좋은 땅일까요? 유혹이 없고, 삭막함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땅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장애 요소를 만났기에 더욱 기도했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은 만들어진 땅입니다. 처음부터 특별히 좋은 땅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땅과 똑같은 씨앗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대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으로 바뀝니다. 정성과 애정을 쏟아야 바라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이 사실이 좋은 땅의 비결입니다.
우리 각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막연하게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아침 기도를 드리고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하루 한 가지씩 선행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면 다른 느낌으로 주일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은총의 체험입니다. 이러한 생활의 연속이 좋은 땅으로 가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일 때 미래는 달라집니다. 좋은 땅의 결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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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좋은 땅’이 그 결론입니다. 유혹이 없고 삭막함과 가시덤불이 사라지는 땅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땅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고, 사도들도, 훗날의 성인들도 모두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만났기에 더욱 자주 기도하였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니 좋은 땅은 만들어진 땅입니다. 누구나 같은 땅과 씨앗을 받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이 됩니다. 정성을 들여야 바라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이 사실이 좋은 땅의 비결입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막연하게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를 바치고 선행을 실천하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면 또 다른 느낌으로 주일을 맞게 됩니다. 은총의 체험인 것이지요.
믿음 역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뛰어넘고 도약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것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작하면 늘 새 땅이 됩니다. 이것이 좋은 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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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정한 습관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이 좋은 습관일 수도 있고, 나쁜 습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쁜 습관은 쉽게 몸에 길들여지는 반면, 좋은 습관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안타까운 것은 좋은 습관을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순식간일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한테 질문을 던져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은 무엇이고 몇 개나 될까? 어쩌면 내 습관을 살펴보는 것은 소박한 피정과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일상의 반복에서 무의미하게 지나쳤던 이러저러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습관과 오늘 복음 말씀을 연결시켜 보면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좋지 않은 습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이 내 안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 때가 많다. 길에 뿌려진 씨앗은 꾸준하지 못한 나쁜 습관을,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어려움이 닥치면 포기하는 나쁜 습관을,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은 영원한 기쁨보다도 순간의 기쁨을 추구하려는 나쁜 습관을 뜻하는 것 같다.
좋은 습관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좋은 것을 하나씩 만들려는 모습이 아닐까? 사람이 순식간에 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 달에 하나씩, 그것이 부담이 된다면 일 년에 한두 개씩 좋은 습관을 만들려는 마음이 좋은 습관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일 년, 이 년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면 좋은 습관이 내 몸에서 자라고 있고, 그것은 분명 덕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덕으로 인해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으리라.
박상병 신부(대전교구 전의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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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가을에 풍작을 기대하고 봄에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마음의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마음의 밭이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이들만이 마지막 날에 구원될 것입니다.
후배 신부와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진짜로 했을까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입고 있었던 옷과 그때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기억이란 만들어진 기억이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르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에 오류를 지적하면 상대를 거짓말쟁이, 위선자로 몰면서 관계를 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처음의 생각을 바꿔서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원하는 기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그때는 너무 어렸고 판단력이 부족했다며 사죄했습니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30년 전의 기억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지금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설명해주십니다. 씨가 뿌려진 곳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한 곳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욕심으로만 채워졌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면서 단죄하는 데 힘을 쏟는 곳은 어떨까요? 이러한 마음이 좋은 땅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씨가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서 씨를 뿌리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면서 씨를 뿌렸을 것입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 주님의 기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기대라면서 콧방귀만 뀌겠습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하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분명히 맺을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 나답게 되는 법을 아는 것이다(미셸 드 몽테뉴).
성적표.
시험 보고 매 맞고
성적표 받고 매 맞고
내 다리 장한 다리
45년 전, 어느 신문에 실린 경상도 어린이의 시라고 합니다. 우연히 어느 책에서 본 시로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회초리를 맞았나 봅니다. 그것이 꽤 많이 그리고 아프게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아픔을 참은 자신의 다리를 칭찬합니다. 어마어마한 긍정적 마음이 아닙니까?
때린 사람을 미워하는 부정적 마음을 갖지도 않고, 나쁜 성적을 맞은 자신을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니 부정적 마음이나 자책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아이, 아니 45년 전이니, 지금은 50대 중후반 이상의 나이일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사시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보다 자주 우리 인생의 밭을 뒤집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팔레스티나 지방 농법과 우리의 농법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이랑을 잘 만듭니다. 씨앗이 묻힐 골도 적당히 파줍니다. 그리고 나서 씨앗을 심고 흙을 덮어줍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들은 파종 때가 오면 큰 씨앗통을 들고 무작위로 여기저기 흩뿌립니다. 재수가 좋으면 좋은 땅에 떨어져 살고,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무척이나 성의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농법입니다.
눈높이 교육의 전문가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삶의 배경들을 놓치지 않고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총 4부류의 사람들로 분류하셨습니다.
① 길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들을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시선, 세속의 논리로만 말씀을 대하니 도무지 먹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선포해봐야 목만 아플 뿐입니다. 마치 길에 뿌려진 씨 같습니다.
씨를 뿌리자 마자 득달같이 새들이 날아와 먹어치우니 괜한 헛고생입니다. 말씀을 향한 마음이 굳게 닫혀 있으니 그 어떤 명 설교도 허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② 돌밭에 뿌려진 씨: 선포되는 말씀을 우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지를 못합니다.
씨앗이 돌밭에 뿌려지다보니, 말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 즉시 좌절하거나 실망합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잡목들을 제거하다보면 정말 괴로운 것이 가시덤불입니다. 뾰쪽뾰쪽한 가시들을 피해가면서 일하려니 얼마나 성가신지 모릅니다.
신앙 안에서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쓸데 없는 걱정이나 근심입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입니다. 시선이 온통 그리로 가 있으니 말씀이 제대로 뿌리 내릴 수가 없습니다. 풍성한 결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얼마 간의 수분과 바람과 햇빛에 힘을 얻어 무럭무럭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무한 노력을 다합니다.
작은 씨앗 하나, 작은 모종 하나 심었을 뿐인데, 몇달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결실을 맺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결실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도 흐뭇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옥하고 탐스러운 토양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우선 인생과 신앙의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가시 덤불들(불신과 의혹, 미움과 상처)을 걷어내야죠. 작물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돌들(게으름과 나태함, 분노와 악감정)을 말끔히 골라내야 합니다. 양질의 퇴비를 흩뿌린 다음,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보다 자주 우리 인생의 밭을 뒤집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고착화되고 편협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과감히 뒤집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좋은 삶의 토양을 마련하고, 백배의 열매를 위한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메뚜기가 될 것인가, 청개구리가 될 것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다시 ‘씨 뿌리는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길과 돌밭과 가시밭에 뿌려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좋은 밭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녀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뿌려주시는 말씀도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씨앗 안에 행복의 열매가 있음을 믿지 못하고 허튼 데에 정신을 쓰는 데 있습니다.
벼가 익어갈 무렵 한 시골 중고등부 주일학교 수업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은 3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고등학교에 가더라도 주일학교를 계속 나올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게 나오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공부는 왜 하려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유명한 사람 되려고요.”,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애인 얼굴이 바뀌어요.”, “돈 많이 벌어 부모님 호강시켜드리려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만약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니?”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 “성당은 따분해요. 어렸을 때부터 성당 다녀도 전해 행복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라고 말해요. 맞는 말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오늘은 용을 만드는 작업을 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창호지로 멋진 용을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철사로 틀을 만들고 창호지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그림을 그려서 멋진 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부님이 메뚜기를 각자 한 마리씩 잡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메뚜기를 잡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용의 배 부분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의 메뚜기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꼬리 부분에 메뚜기가 빠져나오기에 충분할 만큼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메뚜기들이 이 종이 용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니?”
아이들은 한결같이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들은 그 강한 발과 턱으로 종이를 뚫기 위해 사정없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들은 지쳐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메뚜기들을 무식하다고 놀렸습니다.
신부님은 미리 잡아두었던 청개구리 몇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용의 배 밑으로 그 청개구리를 넣고 막았습니다. 청개구리들은 뛸 생각도 안 하고 엉금엉금 기어 입과 꼬리 부분으로 다 빠져나왔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유명해지면, 예쁜 여자와 결혼하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 믿지? 이것이 메뚜기와 같은 생각이란다. 너희 힘을 너무 믿는 나머지 뚫을 수 없는 창호지를 머리로 계속 들이박는 거야. 그런 것이 행복이라는 믿음은 너희 안에 있는 탐욕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것이란다. 너희가 아는 명예를 얻어 유명해진 사람 중에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지? 결혼한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니? 또한,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란다. 너희들은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어. 그런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야 해. 우리나라에서는 청개구리는 시키는 것과 반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 너희들이 메뚜기처럼 사는 대부분 친구와는 다른 청개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야. 그러나 너희를 메뚜기로 만드는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있지. 성당은 청개구리가 되는 지혜를 주는 곳이란다. 너희에게 행복의 열매가 열리는 결과는 너희가 메뚜기와 청개구리 중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어.”
아이들은 모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당에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아라는 용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이 헛된 꿈을 조장합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우리는 결코 뚫을 수 없는 행복을 얻겠다고 머리가 깨지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길의 교만’과 ‘돌밭의 육욕’과 ‘가시밭의 물욕’에서 벗어나야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머리를 들이박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못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때 밥 먹는 것보다 축구 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에 남들 밥 먹을 때 저는 혼자 공을 들고 운동장에서 놀았습니다. 그때 끼니를 거르면 키가 안 큰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그때 행복한 것에 집중했을 뿐이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그렇게 키가 커야 할 시기는 그렇게 지나버렸습니다.
우리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창호지를 뚫는 데 쓸 것인지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데 쓸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허튼 데에 에너지를 쓰면 열매를 맺을 에너지는 남지 않게 됩니다. 참 행복은 메뚜기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청개구리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진리란 참 행복은 세속-육신-마귀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30배, 60배, 100배의 행복을 누리려면 메뚜기의 삶을 버리고 청개구리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9년 한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아이리스’를 보았습니다. 20부작입니다. 당시에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좋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아름다운 영상, 감미로운 음악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드라마는 ‘원칙과 기준’을 이야기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대통령과 정보요원이 있습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전진하려는 사람입니다. 거대자본과 군산복합 산업으로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정부를 전복하기도 하는 ‘아이리스’라는 조직입니다. 외부의 적은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싸울 수도 있지만 내부에 있는 적은 막기도 어렵고, 싸우기도 어렵습니다. 아이리스는 내부에 적을 심어놓은 조직이었습니다. 잘못된 원칙과 기준은 하나의 신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은 윤리와 인권의 ‘틀’마저도 버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기에 ‘광신’은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켜도, 사람을 죽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거대한 자본과 군산복합 산업으로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일으키고 사람도 죽이는 ‘아이리스’처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유혹하여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성공, 명예, 권력을 미끼로 욕망의 씨, 거짓의 씨, 교만의 씨를 뿌립니다. 사탄의 깃발에 빠진 사람은 그릇된 신념으로 다른 사람까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시련과 고통까지도 받아들였던 대통령과 정보요원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함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믿음, 희망, 사랑의 씨를 뿌립니다. 이 씨는 자라나서 교회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복음의 씨는 어둠에 빛을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피정을 하고, 강론을 듣지만 성당을 나가면 곧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직책, 나이, 능력, 성별과 상관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주로 그렇게 됩니다. 피정을 하고, 강론을 들어서 새롭게 변화되지만 시련과 갈등이 오면 다시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세례를 받은 햇수, 성당에서의 직책, 수도자와 성직자와도 상관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는 사람이 주로 그렇게 됩니다. 피정을 하고, 강론을 들어서 새롭게 변화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혼자여도 상관없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주로 그렇게 됩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눈다면 그것이 복음화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유의 결론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말하며,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는 것입니다.
지난봄에 해바라기 초화화분에 씨앗을 하나하나 심고, 그것이 자라나 모종이 되자 잔디밭 가장 자리에 일렬로 심어 놓았는데 지금은 그 해바라기 꽃들이 다 피어서 익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해바라기는 꽃 한 송이에 엄청나게 많은 씨앗이 박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정말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자신의 마음의 땅에 뿌리고 가꾸게 될 때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씨앗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첫째 밭은 잘 일구어야 합니다. 흙을 고르고 돌멩이나 잔뿌리, 잡초들을 걷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밭에 굳은 땅을 고르고 다른 욕심들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물과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거름을 주어야 작물이 튼실해지듯이 내가 늘 기도와 성사를 통해서 지속적인 양분 섭취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바람도 있어야 합니다. 작물이 자라나는 데에 있어서 바람이 없다면 작물은 점점 약해지면서 죽어가게 됩니다. 곧 늘 바람과도 같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도와주실 때 그 말씀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왜, 그리스도인인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람의 인성은 좋은 땅이어야 한다. 사람은 지식, 재능, 인성을 지닌다. 사람에게 지식과 재능은 인격이라 한다면 인성은 품격이다. 자라나며 사람의 꼴을 갖추면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다. 인격은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식과 재능이다. 품격은 그 사람의 품성이고 그 사람의 인성이다. 인격은 한 사람을 드러내는 일부분이어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사람의 질은 품격에 담겨진 품성을 말하는데 정신적인 태도이며, 사고방식의 드러남이다.
인간만이 실존한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어떻게 실존하느냐가 문제이다. 실존하는 인간, 세 부류로 구분해 보자, 첫째,동물적 본능으로 실존하느냐? 두번째, 무신론을 펴며 내 주먹을 믿겠다라며 자기방식으로 실존하느냐? 세번째, 하느님을 향해 존재의미를 담고 성장과 성숙으로 완성하며 사는 실존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세례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다. 세례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자라났어야 하는데 첫번째 해당하는 사람으로 무덤덤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또 세례받고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인간 이성으로 자기 실존의 의미를 찾고, 한계에 다달으면 무당이나 잡신을 찾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를 멈춘 두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다. 또 미션과 비전을 갖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아 하느님께로 드높여가는 세번째의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적극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이루면 인격과 품성은 고도화되고 실존은 향기를 낸다. 이쯤 되면 사람은 좋은 땅이 된다. 세례받고 그리스도가 심겨지면 그리스도인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기에 왜 나는 그리스도인인가의 질문과 그 답을 찾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의 실존의 의미는 커가고 열매 맺을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13,23)
내 혼과 진지하게 얘기해 봐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은 세상에 씨앗 뿌리지만 사람들이 잘못 키우면 재앙도 닥칩니다.
물론 좋은 씨앗으로 자유 존엄성 귀천 영원성 혼 이런 성능일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든 각양각색 울타리조건 등이 장애물 노릇 합니다.
인류의 울타리 국경선 정치제도 같은 데에 악마들이 덫을 깔아놨겠죠.
육신 벗으면 혼은 하느님찬양 천국과 악마들이 괴롭힐 지옥 갈리겠죠.
육신 죽으면 다 끝날 줄 알지만 세상전부 아니란 것 혼은 이미 알았죠.
세상의 진상이 허무하다 인생비관 말고 내 혼과 진지하게 얘기해 봐요.
이런 인생의 코스를 직접 겪으신 하늘말씀님을 내 혼과 찾아 나섭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말씀의 씨앗을 품는 우리 마음 밭을 돌보라고 이끕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성실한 사랑이 돋보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예레 3,15).
주님은 우상 숭배와 유배로 흩어진 이들을 다시 모아들이시고 그들에게서 다시 하느님 백성의 정신을 일으킬 목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목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나 그들을 실질적으로 이끌 임금, 예언자이기도 하고, 또 혼을 불어넣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예레 3,17).
이스라엘 백성은 지식과 슬기로 자신들을 돌보는 목자와 매일 접하는 말씀의 도움으로 다시 주님께 돌아와 신의를 다해 그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백성들 편에서 무엇보다 먼저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하지요.
"악한 마음을 고집스레 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지름길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심겨 스며들 수 없는 냉랭하고 척박한 박토와도 같지요.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셋 다 말씀의 씨앗을 제대로 품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무수한 세상 욕망의 스침과 진동으로 길바닥처럼 다져졌거나, 이기적 자아가 돌처럼 뭉쳐 굳어졌거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무성하게 번져 영혼을 칭칭 감고 있는 땅에는 말씀이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의 악한 상태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곧 적극적으로 악을 고수하는 죄일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마태 13,23).
좋은 땅은 말씀을 품어 썩히고 싹으로 밀어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경청하고 몰입하며 머무르는 상태지요. 열매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맺히는 선물입니다.
악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거처를 찾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는 쉽사리, 게다가 번번이 걸려넘어지기 일쑤지요. 어느 추락은 선택적이기도 하지만 어느 실패는 불가항력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우리가 주님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무수한 죄악이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붙어도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레 따르지 않는 것"(예레 3,17)에서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다가오시는 말씀 앞에서 건조해지고 냉랭해진다면, 불편함과 거부감이 든다면, 못 들은 척 건너뛰고 싶다면,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오히려 그 말씀을 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대단치 않아 보여도 이로써 악에 고착하려는 고집이 순간 힘을 잃지요. 악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이 들어간 고집에 피식~ 하고 바람을 빼는 것, 이는 좋은 땅이 되려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을 품고, 말씀을 품고, 세상을 품는 좋은 땅이 되도록 힘껏 애써 봅시다. 아무리 척박하게 보이는 땅이라도 돌을 골라내고 거름과 퇴비를 주고 가꾸다보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답니다. 사실 하느님 모상인 우리는 원래 좋은 땅이었고, 지금도 부단히 그 원초적 풍요와 비옥함을 회복해가는 중이랍니다. 이를 믿고 희망하며 나아가는 벗님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금요일>(2020. 7. 24. 금)(마태 13,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단순히 사람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설명하는 비유가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을 때, 자신의 상태가 어디에 해당 되는지를 반성해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좋은 땅’으로서 살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교만과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8-19).”
악마의 공격, 또는 악마의 유혹 자체는 악마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쪽의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굴복하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악마가 공격을 하든지 유혹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물리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악마의 공격과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길’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으니, ‘길’은 악마의 공격과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사람입니다.
비유에서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마가 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서 ‘깨닫지 못하면’은 ‘믿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입니다. 실천 가운데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믿는다면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믿으니까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악마에게 말씀의 씨를 빼앗긴 상태를,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지금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더라도,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돌아가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절차 같은 것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악마의 유혹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서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를 원한다면, 즉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악마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은, 간절한 마음 없이, 마치 취미생활을 하는 것처럼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환난과 박해가 없는 편안한 시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잘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면 금방 넘어집니다. 신앙에 대해서 간절함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 ‘간절함’은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도 ‘기도’가 정답입니다. 사실 환난과 박해로 넘어지는 것과 악마가 와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조금 다를 뿐이고, 실제로는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도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도 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평소에 기도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믿지 말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신앙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환난과 박해 때에 넘어졌더라도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의 ‘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악마가 와서 신앙인에게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나 환난과 박해가 신앙인을 넘어뜨리는 것이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신앙인 안에 있는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를 뿐이고, 실제로는 다 같은 것입니다. (박해가 없는 요즘에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박해로 작용합니다. 또 악마는 그런 걱정을 통해서 유혹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은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이고,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는 “믿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할 의지와 힘을 빼앗아 버려”입니다. 가시덤불의 경우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막혀 버린 ‘말씀의 숨’을 회복시켜 주는 ‘성령의 인공호흡’ 같은 것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결국 숨이 막혀 죽을 것입니다. (구원의 길과는 반대쪽으로 나 있는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과는 다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은 생존에 대한 걱정이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와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바치는 기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걱정은 하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이고, 욕심을 채우려고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성인聖人이 됩시다” -희망, 회개, 공부, 은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는 장마철답게 하루종일 비가 내린 날입니다. 오후 비가 한창 내릴 때 연락을 받았고 이어 20년이상 알게 모르게 수도원 일에 큰 도움을 주었던 형제의 중장비인 굴착기를 축복했습니다. 성수를 약간 뿌리며 나눈 유머를 잊지 못합니다.
“진짜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리시는 비, 성수로 축복했으니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제가 성수를 뿌린데다가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이렇게 성수의 비로 온통 굴차기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형제님이 성인이 되어 보답하는 길뿐입니다.”
중장기 축복식후 요지의 덕담과 더불어 집무실에 안내하여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서 예수님과 함께 사진도 찍어 나눈 문자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세례자 요한 형제님!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성인이 되어 사세요!”
“신부님 말씀대로 포크레인으로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포크레인으로 사랑을 전하는 요한이 되겠습니다.”
“예,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참 기쁘고 기분 유쾌한 날이었습니다. 사실 형제의 포크레인 기술은 탁월하며 신앙심 또한 깊은 분입니다. 하여 내심 착안했던 강론 제목, ‘평생학인’에서 즉시 ‘성인이 됩시다’로 바꿨습니다. 혹시 덕담의 인사를 드린다면, ‘성인이 되십시오!’ 인사말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성인이, 하느님 불러 주신 고유의 참나가 되는 성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성소는 이런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주변 가까이에서 성인답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어떻게 성인이 됩니까? 고맙게도 오늘 제1독서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설명 복음이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7월12일 주일 삼종기도후 일반 알현중 복음 묵상 나눔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생은 문장으로 하면 ‘주어없는 문장’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로 환히 계시되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은 말그대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분도 규칙에서 분도성인은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 실망하지 마라’(성규4,74)고 강조하십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실망, 절망, 원망의 삼망이란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낙관적 긍정적 인생관을 지니게 됩니다. 이런 생명의 샘,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기쁨과 평화요 위로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둘째, 끊임없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있기에 회개도 겸손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광야인생중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광야인생 셋 중 하나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여 광야인생 성인이 되든지, 하느님을 잊어 괴물이나 폐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하여 저는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세상 것들에 잘못 미쳐 중독이 되면 괴물이 되든가 폐인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입니다. 하여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제1독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하늘의 별들처럼 교회 하늘에 가득한 참 좋은 목자 성인들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한 무수한 살아 있는 착한 목자들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들의 교회 가르침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겸손입니다.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를 지닐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다음 묘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미사가 거행되는 이 거룩한 교회의 성전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의 옥좌’라 부를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주님의 옥좌가 상징하는 바,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신 하느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옥좌, 궁극의 희망을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셋째,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하느님을 공부하고 나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더불어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평생학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비유 설명이 참 심오합니다. 씨들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타고난 좋은 땅의 마음밭은 없습니다. 하느님 탓할 것이 아니라 나를 탓해야 합니다. 잘 들여다 보면 결국은 내가 문제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방치하면 길바닥 마음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믿음을 앗아가는 분심거리는 얼마나 많습니까. 온갖 이념들, 뒷담화 등 바로 분심으로 침묵의 열정도, 묵상도, 주님과 대화의 기도도 사라진 경우가 바로 길바닥 같은 마음밭입니다.
돌밭같은 마음 밭은 일시적 열광으로 곧 닥치는 어려움이나 불편, 혼란으로 좌초되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경우입니다. 용두사미로 끝나고 시종여일 항구하지 못합니다. 어디 뿌리 내리는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집니까? 바로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도 일시적 열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데 있습니다. 불암산 바위에 뿌리 내린 푸른 솔들이 참 좋은 정주 믿음의 스승입니다.
가시덤불 같은 마음밭은 재물, 성공, 세상적 관심사, 탐욕의 잡초들 무성한 마음밭을 상징합니다. 바로 밭을 방치해 두면 곧장 잡초 우거진 밭이 되듯이 마음밭도 방치하면 그대로 탐욕들 무성한 잡초밭이 됩니다. ‘풀과의 전쟁’ 농사이듯 ‘탐욕의 가시덤불과의 영적전쟁’이 인생농사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탓이 아닌 내탓입니다. 이런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땅같은 마음밭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어찌 이런 마음밭에 주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좋은 땅이 바로 성인의 마음밭이고 바로 우리의 공부에 달렸습니다. 머리 공부, 마음 공부뿐 아니라 몸의 실천까지 포함한 전인적 공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의 수행으로 영적거름도 주고 영적농약도 하고 잡초같은 탐욕을 예초刈草하며 끊임없이 마음밭을 돌보고 가꾸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이렇게 절실히 간절히 항구히 노력하면서 결과는 하느님 은총에 맡기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침내 우리는 좋은 땅의 마음 밭을 지닌 성인이 될 것이고 백 배 열매의 성인, 육십 배 열매의 성인, 서른 배 열매의 성인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닌 과정의 충실도를 보시며 그에 맞는 성과의 열매도 주십니다. 똑같은 성인이 아니라 각자 고유의 자기 모습대로의 성인입니다.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공통점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 주님의 종들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아멘.
보고 듣고 깨달은 사람은 많은 결실을 맺는다< 마태,13/18-2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게 되면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알아듣고 믿는다고 해도 실천이 없으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깨닫고 실천을 하면서 보고 배운바가 혀과를 내는 것입니다. 어떤 결실을 내어야 할까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징표로 십자가에 지으셨으면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불쌍한 처지를 돌보아 주셨으면 우리도 자비를 구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어날 어떤 교화의 새로운 주임 목사님이 부임하게 되어 사람들은 잔치 준비를 하고 환영식을 준비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 각정하며 기더리던 중 강당에 선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사서 내가 새로운 주임 목사하고 하여 나타난 사람은 얼마 전까지 예배당 잎에서 동냥을 구하는 거지 노인이었습니다. 새 목사는 저는 이런 준비 않된 교회에서 사목할 수 없다고 하시며 모두에게 회두를 강요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이유는 이 목사님이 변장를 하여 상전 앞에서 구걸을 하였는데 아무도 걷을더 않고 미워하고 쫒아내고 하여 이 목사는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새 목사 자리에 나셨습니다. 시도들은 모두 자기 가슴을 치며 믿기만 했지 결실 없는 믿음을 스스로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뉘우쳤다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열매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살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미소한 형제에게 베푸는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라는 말을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보고듣고 하여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지 못하여 결실 없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겊데기 신앙입니다.
이번 코로나 전국에 조심조심 길을 떠나 갔은 데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의식하지 못 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어디나 사람이 있고 조심성 없이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여기저기에 코로나 확진 환자가 생기고 대부분은 조심성 없는 사람들의 전파라 합니다.
우리도 믿음에 있어 교회와 멀리하고 종교적 의무를 소흘이 하는 동안 믿음을 멀리할 까 걱정입니다. ㄱ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사는데 더 좋은 기화가 왔다고 봅니다. 이곳저곳 어려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복음을 실천하고 해야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입니다. 배고픈 사람 와로운 사람 친구돠고 도움을 주고 하여 태양을 찾아 가듯이 어려운 사람 찾아 만나고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도록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Lib. 10,43,68-70: CCL 27,192-193)
참다운 중개자는 은밀한 당신의 자비로써 겸비스런 자들에게 보내 주시고 보여 주신 그분! 우리로 하여금 그를 본받아 겸손을 배우게 하시니, 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을 죄인들과 아니 죽으시는 거룩한 님과의 사이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죽으시되 하느님과 더불어 의로우신 분. 이로써 그분은 - 의로움의 삯이 생명과 평화인지라 - 하느님에 이어진 의로 의화된 죄인들의 죽음을 쳐부수고자 그들과 공통된 죽음을 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중개자가 옛 성인들에게 계시되기는 마치 우리가 이미 지나간 그의 고난을 믿는 것처럼 그들은 장차 수난하실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기 위함이었나이다.
그분은 인간이시기에 중개자이시나 말씀님으로서 사이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니 하느님과 같으시고, 하느님 안에 계시사 같은 한 하느님이신 까닭이니이다. 좋으신 아버지여, “당신 외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내주시기까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 “당신과 같으심을 강탈로 여기지 않으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시었으니” 그분만이 죽은 이들 가운데 홀로 자유로우시고, “그 생명을 내놓으실 권을, 그리고 다시 쥘 권을 가지고 계시나이다.” 그는 당신 앞에 우리를 위한 승리자요 희생, 희생이기에 승리자! 당신 앞에 우리를 위한 사제요 제사, 제사이기에 사제! 당신께로조차 나시사 우리를 섬김으로써 우리를 종에서 자식으로 당신께 바치신 분이 그분이시니이다. 당신 오른편에 앉아 우리 위해 빌으시는 그분을 보아 내 모든 병을 낫우어 주시리라는 여기에 진정 내 희망이 굳사오니, 그렇지 않으면 절망하고 말 것이니이다. 크고 많은 병, 그렇습니다. 크고 많사오니 더 더욱 큰 당신의 약이 있는 것이옵니다. 당신의 “말씀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살지” 않으셨던들 인간과는 동떨어지신 줄로 알아 우리의 희망이 끊어질 뻔하였습니다.
허구한 내 죄악, 내 비참에 몸이 떨려 마음속으로 헤아리기를 광야로 도망이나 쳐볼까 하였었으나 님은 내 힘을 돋우어 주시며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심은 사는 이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기 위함이니라.” 주여, 이젠 나 살고자 내 걱정일랑 당신께 맡기고, “당신 법의 묘함을 생각하오리다.” 둔하고 병든 줄을 님이 아시오니 가르치소서, 낫우어 주소서. 당신의 외아드님,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 있는” 그분께서 그 피로써 나를 속량해 주셨나이다. “오만한 자들이 내게 하리놀지 말 것이,” 나는 내 몸값을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나누어 주며, 저 먹고 배부른 그들 가운데서 나 가난할망정 그분으로 배부르려 하노라. “그분을 찾는 이들이 주를 찬미하리로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씨 뿌리시는 분께서
이미 나에게 귀한 씨를
아낌없이 뿌리셨으니
씨를 뿌리시라고
보채지 말고
씨가 왜 이러냐고
투정부리지 말고
씨를 정성껏 품어
싹을 틔우고
열매 맺도록
묵묵히 애쓰는 거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얼핏 생각하기에는 신자들은 누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하며 살 것같은 데 실제로는 다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 사람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서 비난 받을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렇지 않다고 내일도 안 그럴 것이 아니고, 오늘 부족해도 내일 주님의 은총으로 또 다시 일어설 것을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9)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산다.’ 라고 생각하고 사는 이도 있나 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절) 어떤 이는 열매를 맺으려고 시도했지만, 한 번 했다가 여러 사람의 반대와 눈치를 받아서 그만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신자가 신자의 제일 큰 반대자요 장애물일 때가 있습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따라 살기 시작했지만, 곧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나 좋은 여건이 되면 즉시 그리고 넘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기는 하지만, 먹고 살기에는 다른 사회 방식이 있고, 더군다나 나 하나는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자식을 키우고 살려면, 학군 좋은 곳으로 가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당장 그 행동이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의 한계가 그 정도일뿐이며, 주님의 은총으로 언젠가는 다시 또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23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오랜 시간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꾸려는 진실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좋은 일이고, 사회 방식대로 사는 것은 죄인이라고 멀리하거나 낙인을 찍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사는 것일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반대로 살거나 일부러 부정하고 거꾸로 살아가지만 않는다면, 주 하느님께서는 일체 탓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00 퍼센트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 존재의 삶 자체가 불완전한 조건으로 태어났고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사회에서 살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혼란과 역경과 좌절과 희망의 길고 긴 복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기쁘게 바라보시고, 대견하게 여기시고, 우리의 작디 작은 열매도 큰 열매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그분의 말씀을 실현해 나갑시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주시며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멀게만 느껴지는 복음의 길이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차분하게 묵상할 줄 아는 깊이가 있는 영혼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다져진 길 위에 씨앗이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잖아. 나만 유별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다수의 행동이라면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자기 기준으로 삼는 사람의 마음밭에서 씨앗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가 기준인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 없이 빼앗길 것입니다. 누군가 옆에서 보살피며 ‘원래 다들 그렇게 해’라며 안심시켜주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는 허약한 신앙입니다. 질문할 줄 모르는 믿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개방된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분이 귀에 거슬리는 질문을 하시고, 과감한 결정도 요구하시겠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깊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충분하게 응답할 줄 모르는 마음밭을 만났기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오래 머물러 묵상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유로운 의지로 응답하기 전까지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뿌리내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씨앗이 자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깊이가 있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묵상하는 삶, 바로 제자의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 민족은 대대로 집을 짓기에 적합한 살기 좋은 땅을 '명당'(明堂)이라고 부르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좋은 땅'으로는 '배산임수'의 자리, 즉 앞에는 강이나 하천을 두고, 뒤에는 산을 둔 곳을 꼽았지요. 그리고 주택이나 건물을 배치할 때에는 이 '배산임수'의 원칙에 맞도록 배려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치는 건물 뒷면을 높은 곳, 건물 앞면을 낮은 곳을 향하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마치 집이 산의 품에 안긴 모습이 되어 안정적이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처럼 풍수를 보기 시작한 이유는 자연의 흐름을 이해하여 안정된 터를 찾기 위함입니다. 조상들이 말하는 '좋은 땅'의 조건에는 그밖에 다른 것들도 많습니다. 해와 달이 환히 비추고, 바람과 비가 고르며, 주변의 산은 깨끗하고 아담한 곳이어야하고, 산맥이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부담없이 편안한 곳이어야만 '좋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약하고 부족한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 자체를 바꿀만한 능력이 없기에 이처럼 땅의 '좋고 나쁨'을 많이 따지지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은총의 씨앗을 심으실 때 땅의 '좋고 나쁨'을 따지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농부들이 그러하듯, 하느님께서는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당신 말씀과 은총의 씨앗을 골고루 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의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땅의 상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 영혼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상태가 '길'이라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 이야기'처럼 듣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상태가 '돌밭'이라면 주님의 말씀과 뜻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겪는 일이 생기더라도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그 노력을 계속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내 마음상태가 '가시덤불'이라면 마음 속에서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걱정'을 '비우기'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욕심은 '딱 이것까지만 하고 그만해야지'가 되지 않습니다. 욕심냈던 부분이 채워지면 더 큰 것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그렇게 계속 욕심을 쫓다보면 그 욕심이 무한히 커져 주님께 가고자하는 나의 마음을 가로막게 됩니다. 그것은 '걱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벳 속담중에 이런 말이 있지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내가 걱정하는 그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고 점점 더 커지기에 내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비결은 오직 내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한 노력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이 따르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노력, 주님과 나 사이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욕심과 걱정을 비워내기 위한 노력. 우리가 열심히 노력할수록 말씀의 씨앗, 은총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크게 잘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열매 하나
하나에도
스며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열매가
됩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의 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으로
건너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열매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게
하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말씀은
듣고 깨닫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열매를
맺게합니다.
모든 열매는
말씀이 빚어내는
열매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분리할 수 없는
경청과 깨달음
말씀과 열매입니다.
말씀으로 열매맺는
우리의 인생이길
기도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선친으로부터 산을 물려받았는데 글쎄 이 산에서 어마어마한 금광이 발굴된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고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은 금광을 물려받았으니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워낙 검소해서 평소와 똑같이 사는 것일까요? 그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 금광에서 금을 채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아무리 금광이라 할지라도 금을 채굴하지 않으면 보통의 산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금을 채굴해야지만 비로소 물려받은 산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나의 삶 안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을까요? 그냥 단순히 의무감만을 가지고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삶 따로 신앙 따로의 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생활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소홀하지 않습니다.
지금 전국성지순례를 하면서 과거 순교자들의 믿음에 대해서 묵상을 많이 합니다. 그들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기쁘게 내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해주십니다. 다양한 종류의 토양은 믿는 사람들의 영혼이 여러 가지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으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로 좋은 씨를 의미합니다. 금광을 물려받아도 채굴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씨라도 좋은 땅이 아니면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요?
우선,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말씀이 내 안에서 큰 가치를 드러낼 수 있도록 내 영혼을 좋은 상태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바로 주님을 가진 자이고,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욕 나무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가장 튼실하게 자란 나무를 골라서 해마다 ‘욕 나무’로 정한다고 합니다. 이 부족에는 이런 규율이 있었거든요.
“사람 앞에서는 절대 욕을 해서는 안 된다. 정하고 싶다면 욕 나무에 대고 해야 한다.”
이 욕 나무 앞에는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요. 그런데 그렇게 튼실한 나무이지만 허구한 날 욕만 먹으면서 점점 비쩍 마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고사한다고 합니다.
나무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을 우리는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무도 욕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욕을 먹는 사람도 좋아질 수는 없겠지만, 입에 욕을 담고 있는 사람 역시 상태가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욕 대신 사랑을 말하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춥고 외로우며, 신산(辛酸)하고 서글픈 예언자로서의 삶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하겠습니까?
나이는 16세, 아직도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갑자기 그분께서 부르셨습니다. 아니 그분께서 던지신 그물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가거라.”
“네? 가기는 어디로요?”
“국회의사당으로!”
“아니, 아직 저는 학생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거기 가서 뭘 하라고요?”
“가서 그들의 비리를 고발하여라! 백성들의 주린 배는 뒷전이고, 자신들 배만 채우기 위해 골몰하는 거짓 지도자들의 악행을 낱낱이 밝혀라!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제 힘만 믿고 설쳐대는 그 사악한 자들에게 멸망을 선포하여라!”
너무나 당혹스런 나머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이제 중3입니다.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말주변도 없습니다.”
너무나 기가 차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저는 절대 안됩니다.”하며 도망을 가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도망가 봐야 그분 손바닥 안입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작은 인형 하나 돌려놓듯이, 하느님께서는 즉시 원위치시키실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국회의사당으로 갔습니다. 정문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힐 것입니다. 경비 업무를 보는 분이 야단을 칩니다.
“학생이 지금 학교에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가?”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장에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기가 팍 죽었습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 TV 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비호처럼 단상에 올라 서서 마침내 외쳤습니다.
“여러분! 빨리 회개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악행 때문에 진노하셨습니다! 그릇된 길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서십시오!”
앉아있던 사람들은 다들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웬 또라이가 하나 나타나서 떠들어대지?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맛이 갔구먼! 빨리 저거 끌어내!”
위대한 대 예언자 예레미야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거절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예레미야 1장 6절)
그러나 주님께서도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라고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미야 1장 7절)
이렇게 예레미야는 울며 겨자먹기로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을 유다 고관대작들, 유다 의회 의원들, 지도자들에게 건네자, 즉시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요, 물벼락, 욕설이요 악담이었습니다. 예언자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어느날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 15장 10절)
예레미야는 원래 착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남들처럼 이웃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살아가는 서민적 삶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선포하라고 건네시는 예언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위선자들에 대한 신랄한 고발, 조국의 처절한 파괴와 멸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뿌리채 뽑히고, 산산히 허물어지는 과정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완전히 파멸된 그 위에 주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이 너무나 벅차고 힘겨웠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때로 자신을 부르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멀리 도망가고도 싶었지만, 결국 우리 인간은 옹기장이이신 주님 손에 들린 옹기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예언자로서 거듭납니다.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은 본래 그렇게 춥고 외로우며, 신산(辛酸)하고 서글픈 것인가 봅니다.
우리는 최근 또 다른 한 예언자의 슬프고 혹독한 운명 앞에 크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일관되게, 우리 시대 가장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로 살아오셨던 분, 위선자들과 삯꾼들에게는 단호하고 준엄한 예언자로서 살아오셨던 그분을, 자비하신 주님께서 따뜻히 당신 품에 안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씨를 받을 좋은 땅이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조각을 잃어버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한 쪽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에이야 디야 내 이제 찾아 나섰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구르다 마주친 벌레와 이야기도 나누고, 잠시 쉬며 꽃향기도 맡고, 지친 나비에게 등을 잠시 빌려주어 쉬게도 합니다. 잃어버린 한쪽을 찾는다는 설렘에 산을 오르는 것도, 숲을 헤치는 것도, 더위도 추위도 힘들지 않습니다.
결국 오랜 여행 끝에 잃어버린 한 쪽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한쪽은 “나는 당신의 일부분이 절대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한 쪽을 만났는데 너무 헐거워 빠져버렸고 또 다른 한쪽은 너무 뾰족하고, 다른 것은 너무 커서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정말 딱 맞는 한 쪽을 찾았습니다.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너무 꼭 맞다보니 아주 빠르게 구를 수 있어서 벌레를 만나도 이야기를 못하고 꽃향기를 맡을 여유도 없고 나비를 등에 태워줄 시간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래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차아구나, 마치내 차아그느, 어시구나 저시구느. 마치내...”
딱 맞는 잃어버린 짝을 찾은 동그라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살며시 한 쪽을 내려놓습니다.
‘이게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갑니다. 벌레와 이야기도 하고 꽃향기도 맡으며 나비도 쉬게 해주며...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에이야 디야 내 이제 찾아 나섰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참조: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쉘 실버스타인]
동그라미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보다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면서도 끊임없이 관계가 필요하다고 노래합니다. 어찌 보면 이 동그라미가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관계란 것이 나의 무언가가 침해당함을 감수해야만 깊어질 수 있는데,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내어주면서 외롭다고 말합니다. 내가 당하는 손해를 상태의 탓으로 여깁니다.
관계가 유지되려면 내가 상대 때문에 잃는 것에 비해 상대 때문에 얻는 것이 더 많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안엔 영원한 불만족이란 자아가 있어서 관계 때문에 얻는 행복을 잊게 만들고 손해 본 것만 생각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아기를 보면서는 태어나주어 감사하고 잠자는 모습까지 좋다고 하지만 학생이 되면 공부는 안 하고 잠만 잔다며 나무랍니다. 내가 한 것에 비해 아이에게서 오는 것이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혼해 주어 감사해야 하겠지만 살다보면 그런 것은 사라지고 상대 때문에 고생한 생각만 남아 상대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습성이 고쳐지지 않으면 영원히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이별을 반복하며 외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저 벌레와 꽃과 나비만을 주위에 두고.
예수님은 우리 밭에 심겨지시는 씨앗입니다. 씨앗이 심겨지면 밭의 영양분을 빼앗아 당신이 그 밭을 차지하게 됩니다. 작은 씨앗처럼 뿌려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길로 상징되는 사람은 아예 씨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자신을 걸어 잠그는 사람입니다.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관계 안에서 상처를 아주 심하게 받아 큰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돌밭으로 상징되는 사람은 육체적인 사람입니다. 관계를 육체에 한계지어 생각하니 육체적인 만족이 사라지면 이내 다른 상대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고 십자가를 내미는 때가 되면 가차 없이 밀쳐냅니다.
가시밭으로 상징되는 사람은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이용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적인 손해를 끼치게 된다면 예수님 탓을 하며 밀쳐냅니다.
좋은 밭도 30배, 60배, 100배의 각기 다른 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관계라 해도 다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위해 얼마를 잃어도 되는가에 따라 그 친밀함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도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우선 내가 혼자 지내는 게 좋은지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좋은지 결정해야합니다. 만약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내가 상대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은 잊어야합니다. 그 관계가 유지되려면 상대에 대한 무한 감사만 남겨야합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상대는 나를 변하게 하기 위해 씨가 되어 오는 것입니다. 상대는 나에게 오기 위해 죽어 내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대를 변하게 하려면 씨앗이 되어 나도 상대 안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죽는다는 말은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좋은 땅이 되려면 상대가 내 안에서 일으키는 변화를 죽은 듯 감당해내야 합니다. 좋은 땅은 불만이 사라지고 감사의 순종만이 남은 땅입니다. 관계 맺을 준비가 된 땅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애가 있는 아들 때문에 걱정하는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아들이 장애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장애가 있는 아들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아들을 잘 돌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죄가 있어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순간포착 세상의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가슴이 뭉클한 사연을 보았습니다. 31년 동안 장애가 있는 딸을 돌보는 부모님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딸을 정성껏 돌보고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숨을 쉬고, 눈을 껌뻑하는 것이 딸이 하는 일입니다. 딸 앞에서 연극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연극을 보고 딸이 웃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딸이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딸에게 분유를 먹이고, 씻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기적이 일어나서 딸이 ‘아빠’라고 한 번만이라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딸은 비록 말은 하지 못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아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일을 하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지만, 더없이 풍요로운 가정입니다. 비록 딸이 건강하지 못하고, 31년 동안 누워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땅에 씨가 뿌려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정입니다. 좋은 땅은 명예, 권력, 재물로 포장된 땅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건강한 외모가 아닙니다. 좋은 땅은 학벌과 가문이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말씀 안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좋은 땅입니다. 주어진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좋은 땅입니다. 신앙 안에서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말씀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라는 시편의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허황한 꿈, 노력하지 않는 성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권을 과도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권구입 한도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의미로 복권을 사거나, 주택복권처럼 내가 사는 복권이 무주택자에게 주택마련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약간의 복권을 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과도한 복권구매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또 하나 저의 사제생활을 이끌어주는 말씀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련이 다가와도 저를 일어서게 해 줍니다. 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기뻐하면 기쁠 일들이 생기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을 해 주신다는 믿음은 저에게는 많은 재산보다, 권력보다, 명예보다 더 큰 힘이 되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메말라서 황폐하게 되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에 떠밀려가는 나뭇잎처럼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씨를 뿌리는 파종법은 우리가 밭을 고른 다음 씨를 뿌리 것과는 달리 씨앗을 바람에 날리면서 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 혹은 가시밭, 그리고 좋은 밭에 떨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분에 꽃과 나무를 키운다고 했을 때 빛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토질이 어떤 것인가가 참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다육식물의 경우는 대개가 마사토를 쓰면서 물이 잘 빠지는 흙을 써 줘야 뿌리가 썩질 않습니다. 그리고 반면에 물가에 있는 식물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항상 물을 머금고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어떤 식물을 키우더라도 흙을 잘 준비해야 잘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잘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길가처럼 하느님의 관리 밖으로 튀어나가선 안 되고 하느님의 밭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그리고 돌밭처럼 메말라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을 머금지 못해서도 안 되고 고운 흙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처럼 하느님의 주시는 은총의 빛을 가리는 다른 방해요소들이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그 방해요소들을 걷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삶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며 많은 은총과 사랑을 쏟아 부어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 모습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아 그분 보시기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욕심내지 말되
안주하지 말고
하루에 하나만이라도
여린 뿌리 내리는 거야
거센 폭풍우조차
송두리째 뽑을 수 없는
아름드리나무가 되기 위하여
서두르지 않되
주저하지 않고
하루에 하나만이라도
잔가지 뻗는 거야
푸른 잎사귀 품은
굵디굵은 줄기 가득한
풍성한 나무가 되기 위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땅속 깊은 뿌리 끝에서
하늘 향한 가지 끝까지
힘차게 움직이는 거야
소중한 열매 가득 맺어
뭇 생명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산 나무가 되기 위하여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풍성한 결실을 내느냐, 아니면 싹도 못 내고 죽이느냐, 싹은 내지만 즉시 죽이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생활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이 말씀은 쾌락과 이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 걱정”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지닌 것이며 지금의 상태,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많은 결실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흥분하고 감격도 해가면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잘 성장,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마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작년에 주임 신부님의 소개로 인터넷에 있는 박경철 의사의 ‘W’ 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 강의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전문의가 되고 나서 백수 친구와 함께 서울에 있는 경제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연자는 ‘W’, 곧 웹에 대한 강의를 했다. 머지않아 웹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90년대 초의 이야기인데, 강연을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강의장을 나가 버렸다. 그런데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백수 친구는 W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W가 말하는 세상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메일링 서비스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W는 2조 벤처 기업의 대표가 됐고, 백수 친구는 사업을 시작해 결국 테헤란로에 빌딩을 세 채 소유한 유력한 기업인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이런 반성을 했다.
‘나는 왜 W와 백수 친구가 본 것을 볼 수 없었던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제레미 러프킨의 말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인류문명은 0.1%의 창의적 인간과, 0.9%의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은 수동적으로 이를 따라왔을 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답이 확실해진다.
‘W’는 0.1%의 창의적인간이었고, 백수 친구는 0.9%의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99%의 수동적인 ‘잉여인간’이었다.
실제로 인류문명은 1%의 창조적이고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
역사를 돌아보니 그랬다.
경제사만 놓고 봐도 그렇다.
200년 전 영국에 모직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든 창의적인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은 ‘저런 기계가 있나보다.’ 했는데, 일부는 모직의 재료가 되는 양털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것을 감지하고 감자밭을 뒤엎어 양 목장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모직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양 목장주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100년 전에 헨리포드가 자동차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기차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포드는 자동차의 유용함을 확신했고, 그를 W로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록펠러다. 그는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주유소를 만들기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라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고, 그 사업에 협력한 록펠러는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W가 있고, 그에 협력하고 동참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발견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동참하는 사람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 ... 쓸 데 없는 짓 한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네. ...’ 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그리고 생명의 열매를 백배 예순 배 서른 배로 낼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한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훈련이 뭘까요?
오늘 복음 중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귀 있는 사람, 곧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듣는 훈련이 필요할 텐데요.
예를 들면 이런 거와 비슷합니다.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음악을 듣게 되면 지루하고 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악이나 클래식과 같은 장르가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음악 감상하는 법을 익힐 때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음악의 맛을 알게 되겠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면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작은 감동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노력을 해 보셨으면 좋겠는데요.
첫 번째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겁니다.
그 시간은 아침에 일어나는 첫 시간일 수도 있고, 일과 중에 잠깐잠깐 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 될 수 있겠죠.
언제 어느 장소에서라도 괜찮습니다.
따로 시간을 떼어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면 됩니다.
그렇게 시간을 내어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주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기본적인 표현이고 실천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고요하게 집중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미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읽는 겁니다.
말씀을 읽는 것이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일 텐데요.
매일 조금씩 꾸준히 말씀을 읽고 묵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많은 양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하루에 한 구절이라도 매일 꾸준히 읽고 묵상하다보면, 말씀을 통해 때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체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정을 회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방향을 제대로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는 거 같습니다.
세 번째는 정말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신자 분들에게 ‘아침에 보는 말씀 문자를 읽고 묵상해 봅시다.
저녁 9시에 서로를 위해서 주모경을 바칩시다. 평일 미사에 나옵시다.’ 했는데, 아침에 문자 메시지가 왔을 때 ‘말씀 문자네...’ 하며 신경쓰지 않거나, 9시 알람이 울리는데도 여전히 내 할 일에만 몰두해 있거나, 평일 미사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이 제 말을 정말 듣고 있는 걸까요? 아니겠죠.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들은 그 말을 실천해야 정말 듣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들은 말씀을 삶으로 실천해야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금요일 저녁 미사 안에 성시간이 있었다.
형제님들은 그냥 평일 미사인줄 알고 안 나오시려고 했던 거 같다.
자매님들이 전화해서 10분 정도 늦게 미사에 들어오셨는데, 나중에 한 형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지한 미사인 줄 알았으면 진작 나왔지~”
땅을 일구는 사람의 비유
김기환
T. 평화를 빕니다.
더운 여름날씨에 잘지내고 계십니까?
계속 되는 찜통더위에 건강 유의 하시길 바랍니다. 전 반농담으로 출신이 대구라서 아직도 제 방 창문을 닫고 지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서 비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곧 좋은 땅에 떨어져야 말씀을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좋은땅에 떨어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좋은땅에 떨어진 씨앗이야 많은 열매를 맺는것은 당연하지만 척박한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수는 없을까? 척박한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뿌려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할수는 없을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수련기때 수련받을 때 일이었습니다.
대전 목동 수련소에서는 뒷마당에 넓은 텃밭이 있습니다. 하대동 요양원 뒷마당에 있는 텃밭의 15배정도 가량되는 텃밭입니다. 어느날 씨를 뿌리기 위해서 밭을 일구어야 할 때가 되었는데 그 밭은 잡초와 돌들이 무성했습니다.
우선 척박한땅의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고 돌들을 가려내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밭에 거름을 골고루 뿌려주고 마지막으로는 거름이 뿌려진 밭을 삽으로 떠서 위아래로 솎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수련기때 했었던 척박한 땅을 거름진 땅으로 바꾸는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전문 농사일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이 방법이 맞는지는 잘 모르나 저는 그렇게 한 기억이 납니다.
여기에서 저는 척박한 마음의 땅을 거름진 마음의 땅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번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몇십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땅을 일구는 작업이었습니다.
첫번째의 작업은 바로 잡초를 뽑고 돌들을 가려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기쁨과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마음의 잡초를 뽑고 지금 이순간 하느님께 나아가는데에 장애가 되는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마음의 돌을 가려내어 마음밖으로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두번째의 작업은 바로 그렇게 해서 정리가 된 밭에 거름을 골고루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에 골고루 뿌려질 거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기 보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마음의 밭에 뿌려질 거름입니다. 우리는 이 거름을 마음곳곳에 골고루 뿌려져야만 합니다.
세번째의 작업은 그렇게 해서 거름이 뿌려진 밭에 삽으로 퍼서 위아래로 솎아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밭에서 솎는 작업은 바로 항구하고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신것도 모자라 우리를 위해서 죽기 까지 하셨던 그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묵상하지 않을수가 없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마음이 서로서로 솎아주게 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땅은 척박한 땅에서 거름진 땅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짧은 시간내에 단번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닙니다. 항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밭도 항구하고 끊임없는 묵상과 기도로써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름진 좋은땅으로 가꾸어진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십배의 열매를 맺으며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연이어 더운 여름날씨는 계속 됩니다. 건강조심하시고 마음의 텃밭을 잘 가꾸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절망은 없다. -끊임없는 회개와 수행의 노력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부분 학자들은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을 초대교회의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발설하신 원래의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반면, 오늘 비유에 대한 설명은 씨가 뿌려지는 ‘토양’에 중심이 주어집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에겐 공감이가고 교훈이 되는 복음입니다. 문제는 말씀의 씨에, 씨뿌리는 자에 있는 것도 아닌 토양인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탓할 것은 씨뿌리는 예수님도, 말씀의 씨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네 유형의 비교가 참 재미있습니다.
-첫째 유형;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씨를 빼앗아가니 바로 길같은 사람이다.
둘째 유형; 말씀을 들으면 기쁘게 받아 들이나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하고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장 넘어지는 사람이 바로 돌밭같은 사람이다.
셋째 유형;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니 바로 가시덤불같은 사람이다.
넷째 유형; 말씀을 듣고 깨달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열매를 맺는 좋은 땅같은 사람이다.-
저절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입니다. 과연 네 경우의 밭중 나는 어느 유형에 속하냐 하는 것입니다. 길입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덤불입니까? 좋은 땅입니까? 누구나 소망하는 바, 좋은 땅의 사람일 것입니다.
결론은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답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수행의 노력이 답입니다. 네 유형은 고정불변이 아닙니다. 절대 비관론적 숙명론자가 되어선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다보면 늘 한결같이 좋은 땅의 때와 장소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길같은 때와 곳도, 돌밭같은 때와 곳도, 가시덤불같은 때와 곳도, 좋은 땅의 때와 곳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때와 곳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닙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필수입니다. 한결같은 항구한 수행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이와 더불어 길같은, 돌밭같은, 가시덤불같은 마음밭도, 서서히 좋은 땅 마음밭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노력과 은총의 결과입니다.
바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에 대한 답입니다. 이처럼 살면 됩니다. 우선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십시오. 낙관적 긍정적 인생관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희망을 두십시오. 그리고 한결같이 충실하고 항구한, 간절하고 절실한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두가 수행입니다. 수행아닌 것이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참된 수행자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모든 수행들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랑의 수행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마음의 겸손과 순수입니다. 길같은, 돌밭같은, 가시덤불같은 마음밭도 마침내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됩니다.
이런 변모작업은 평생과정입니다. 죽는 날까지 주님의 평생전사의, 평생학인의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방심放心, 방치放置하면 좋은 땅의 마음밭도 길같은, 돌밭같은, 가시덤불같은 마음밭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마음밭은 고정불변이 아닌 유동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맹활약중인 야구선수 추신수의 “항상 지금 이 공이 내 야구인생에 마지막 공이라 생각하고 집중한다.”는 좌우명과 더불어 미국 한 유명선수의 ‘작은 것에 집중하라(Attention to details)’는 교훈도 생각납니다.
하여 제가 간곡히 권하는 바, 기도와 공부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일과표의 준수입니다. 비록 수도원 일과표와 같지는 않더라도 각자 삶의 자리에 적합한 기도와 공부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일과표에 따른 규칙적 항구한 수행이 좋은 땅의 마음밭 마련에는 제일입니다.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일과표에 의한 ‘삶의 궤도’ 따라 항구할 때 삶의 중심과 질서도 자리잡게 되고 영육의 치유와 건강도 뒤따릅니다. 서서히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됩니다. 그러니 일과표에 따른 구체적 수행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회개를 촉구하는 ‘희망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이 참으로 적절합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우리의 참 목자 예수님께 초점을 둘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목자들중의 목자가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로 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항구한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결과의 열매는 주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주어진 수행의 노력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렇게 살게 해주시며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3, 18-23(연중 16주 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사 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보아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루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원하는 열매인 것이 아니라, 씨앗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것을 과업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씨앗(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가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밭이 열매를 일구는 줄로 알지만,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를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가시덤불 밭이 되는 것입니다.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가 지금 나는 어떤 밭인가를 말해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이다.”라고 표현하고, 특히 “성모님을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
말씀이 자라고 있는가? 나 자신의 허영이 자라고 있는가? 나는 어떤 밭인가?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의 먼지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땅을 지배하지 않는 윽박지르지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도와주는 사람.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사람.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랄 수 있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열매를 맺는 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소서!
기꺼이 죽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명심銘心, 마음에 새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으라는 말씀을 헤아리는 거로부터 묵상을 시작하려합니다.
어떤 말을 새기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말씀이기에 새기는 거지요.
제가 관광지에 갈 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저 혼자서 온 양 짓떠드는 것이 그 하나이고 누군가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몇 백 년 전의 사람인지 최근의 사람인지 모르지만 욕하면서도 그 이름을 보게 된다는 것이 웃깁니다.
이것이 새김의 효과이고 힘인데 오래 갈 수 있는 돌에 새기면 그 효력이 오래 가지요.
그런데 비유를 새기라는데 어디에다 새기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느님 나라 비유를 어디에다 새겨야겠습니까?
모세의 십계명도 잊지 않기 위해 돌 판에 새겼는데 우리도 우리 집 정원의 돌 판에 새기면 되겠습니까?
돌 판에 새기는 것까지는 어렵다면 서각을 하듯 나무에 새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형제들 중에도 서각을 잘 하는 형제가 있고 유명인들 중에도 서각을 아주 열심히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여 대충 살지 않고 중요한 말을 놓치지 않고 살려는 거지요.
그런데 선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나무에 새기기보다 자기 마음에 새기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이나 나무에 새기는 것보다 내 마음에 새기는 것이 더 낫고 오늘 주님께서 새겨들으라는 것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느님 말씀의 텃밭이 되고 그래서 명심까지 하면 좋은데 우리 마음이 종종 콩밭에 가 있어서 하느님 말씀이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첫 번째로 드신 비유, 곧 말씀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며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하느님 말씀을 개떡같이 취급하는 것인데 우리는 개떡 같이 알아듣지 말고 찰떡 같이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요.
두 번째 비유, 돌밭에 떨어진 것은 초심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려고 하나 박해나 환난이 닥치면 그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자 집안에 안 좋은 일이 거푸 생기면 하느님의 말씀 따라 살겠다는 결심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분심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근심걱정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내 마음을 차지하는 경우지요.
불교로 치면 화두를 잡아야 하는데 화두를 못 잡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것임에도 그 말씀을 가지고 침잠하려 하면 하찮은 생각들, 특히 근심걱정들로 인해 결국 잡생각에 빠져들고 마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허다하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밭이 하느님 말씀의 문전옥답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 밭을 가꾸어야 하고, 반대로 얘기하면 우리의 마음 밭이 저절로 옥답이 되거나 쉽게 옥답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뽑아내는 노력과 정성을 오랫동안 기울여야지만 우리 마음이 전심全心이 되어
하느님 말씀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옥답이 될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미국에서 공부할 때 총장 신부님께 ‘이 큰 학교의 직원들과 학생들을 다스리는 리더십’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맺어온 관계가 어떠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길에 뿌려진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해서 악한 자에게 빼앗긴 사람이고,
돌밭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 사람 안에 아직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곧 걸려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고,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제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마태 13,18-23 참조)
우리 안에 주 예수님께서 심어주신 말씀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아울러 그 씨가 형제자매들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이끌고, 어느 정도 깊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내가 맺은 복음과 사랑의 열매가 선교의 씨를 얼마나 피우고 있는지도.
비유의 새로운 현대적 의미 <마태 13, 18-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비유를 좋은 땅이 되어 많은 결실을 내야 한다는 뜻으로만 들으면 부족합니다. 땅의 1/4만 쓰고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져 결실을 내지 못하는 땅은 버리라는 말이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사라져 버리게 버려두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요사이 농기구의 발달로 시멘트 길도 갈아엎어 땅을 만들듯이 씨 뿌리는 사람이 매년 씨앗을 소모하게 하지 말고 좋은 땅을 만들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못 쓰는 것을 쓰도록 만드는 진보적 시대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체주의를 따르는 공산당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합니다. 들리는 말에 회의 중에 잠을 잤다고 총살했다는 북쪽의 소식, 우와 좌는 서로 네가 없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서로 없어져야 한다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면서 네가 없어져야 내가 산다고 하면서 제거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사는 사람들 안에 살고 있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손상을 받습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는 자기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고 벌주고 냉소하는 삶은 자기 자신이나 모두에게 고통입니다.
우리 수도원에 몸과 마음이 약해져서 침상에 누워 생활하는 수사님에게 아침에 봉성체 해드리며 “수사님 규칙이 먼저입니까? 사람이 먼저입니까?” 수사님 “사람이 먼저입니다.” 저는 “수도자로서 은수자도 있고 독수자도 있습니다. 움직이기 힘들면 그대로 수도자로 생활한다고 자신감 있게 사세요.”라고 말하고 내 방에 들어와 부족한 사람을 집으로 보내거나 못쓴다고 버려두는 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가정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일반 사회와 교회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는 쓰지 못할 것은 없애고 소외시키지만 교회는 죄인을 위해 오신 주님을 따라 죄인들 안에, 가난한 사람 안에, 무지하고 몽매한 사람들 안에 살며 그들에게 재생의 길을 열어줍니다.
농촌 운동을 할 시기 먹는 것 중요하여 양계장, 양돈장, 염소, 협업으로 쌀농사, 채소 농장, 농촌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신용조합, 청년들 교육 등을 할 때 농촌개발협의회라는 공동체도 만들어 운영도 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바티칸 2차 공의회가 사목헌장에서 결정해주었습니다. 씨앗이 흩어져 소비되는 것을 막고 더 넓은 땅에서 더 많은 수확 하도록 노력하고 못 쓰는 땅을 쓸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버리지 마세요. 거두어들이세요. 주변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갑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 23)
오늘 이 하루도
말씀이 간절한
말씀의 하루입니다.
말씀의 긴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말씀과 함께
해야할 우리의
삶입니다.
말씀은 뿌리를
내리고 드디어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말씀으로
피어나야 할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말씀을 사랑하는
좋은 땅의 여정입니다.
좋은 땅은
주님 말씀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더 좋은 땅이
되게 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를 위한
생명의 말씀임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싶으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좋은 땅 좋은 사람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저는 스마트폰이라고 불리는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스마트폰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합니다. 전화와 문자메시지 발송은 기본이고, 여기에 인터넷이 연결되어서 웹 서핑과 함께 E-Mail 확인 그리고 각종 SNS 활동을 도와줍니다. 또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일상 삶 안에서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해서 그럴까요?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 버립니다. 그래서 보통 저녁때가 되면 ‘배터리가 10퍼센트 미만입니다.’ 식의 경고 메시지를 보게 됩니다. 이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 배터리가 없어서 쓸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따라서 얼른 충전하라는 메시지인 것이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경고는 자주 주어집니다. 특히 여러 가지 일들을 쉬지 않고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죽어라 앞으로만 달리는 사람은 마치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 방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쉬라고 몸이 아프기도 하며, 우리의 바쁜 일상 삶 안에서 또 다른 식으로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님께서 제시해 주십니다.
그 쉼의 시간, 자신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충전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로 주님 안에서 채워야 합니다. 문제는 그 충전의 시간을 단순히 세상의 기준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자고 있으면 충전이 될까요? 또 요즘이 극성수기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휴가를 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보내는 곳에 함께 할 때 충전이 될까요?
많이 잔다고 해서 피로가 꼭 풀리던가요?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쉬어야 한다면서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나 완벽하게 자신의 피로를 잠으로 완전히 지울 수 있었습니까? 또 사람들 많은 휴가지에 가면 피로가 풀릴까요? 어쩌면 사람들에 치여서 오히려 피곤함만 안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또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 삶을 충전할 수 있으며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씨 뿌리는 사람 비유 설명을 해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말씀하시지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언제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족한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으며,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부분을 채우는데 항상 유념해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오늘이 되십시오.
깊게 뿌리내리는 만남이든지, 가볍게 스쳐 지나는 만남이든지, 모든 만남은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며 인생의 사계절을 가르쳐 주는 지혜서다(이해인).
언제 기도해요?
신앙생활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청년이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날은 언제에요?”
이에 할아버지는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날은 네가 죽기 전이야.”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청년은 놀라며 대답하지요.
“할아버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죽는 날을 알 수가 있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변을 해주십니다.
“그래. 네 말대로 아무도 자기 죽는 날을 알 수 없지. 그래서 매일 기도해야 하는 거야.”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자기 죽는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일 꾸준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모님의 그늘에서 우리가 성장했듯이
말씀의 그늘에서 우리는 무한한 사랑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성모님께 하느님 사랑을 가득 일깨워 준
요아킴과 안나 축일입니다.
이렇듯 부모는 평생 자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말씀의 마음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말씀의 사랑입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언제나 말씀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창조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깊게하는 것은 언제나 말씀입니다.
말씀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모두가 고마운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부모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말씀을 향하고
말씀은 부모를 향합니다.
생명을 나누는 것이 탄생이듯
말씀을 나누는 것이 탄생입니다.
자식을 올바르게 기르기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부모님의 사랑처럼
그렇게 주님 말씀을 깨닫는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부모님 사랑에 고개 숙여 감사하듯
말씀에 고개 숙여
듣고 깨닫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말씀을 일깨워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주님 말씀을 일깨워 주는 부모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노부부가 결혼 6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부부는 성대한 축하식을 했지요. 이 축하식을 마친 뒤 고단한 몸으로 베란다에 앉아 있는데, 기분이 좋아진 할아버지께서 60년 동안 함께 산 할머니에게 감사의 말을 담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멈, 당신한테 내가 미쳤나보오.”
그런데 이 할머니께서 마침 보청기를 끼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크게 말해요. 보청기가 없어서 안 들리니까.”라고 말했지요. 그래서 다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미쳤다고!”
그런데 큰소리로 말하다보니 얼굴이 찡그려졌겠지요. 이 모습을 본 할머니는 화를 내시며 큰소리로 대꾸하십니다.
“흥! 나도 당신한테 지쳤소!”
잘 들리지 않아 이러한 오해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 너무나도 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오해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이 오해들을 줄이고 싶어도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이 또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이해하고, 더욱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뜨겁고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이해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능력보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지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좋은 씨를 잘 받아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하는데,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섣부르게 판단하고 결론 맺으면서 아픔과 상처를 서로에게 전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처럼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 안에서 진정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지금 땅에다가 씨를 심고 난 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싹이 텄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씨를 심은 뒤 싹이 트고 또 나중에 열매를 맺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씨가 심어진 뒤 곧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맺어질 열매를 성급하게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통해서 맺어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이상의 열매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을 더 크게 만드는 건 고통 없이 살고자 하는 환상이다. 고통을 수용하지 못하는 생각이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안젤름 그륀).
인생키워드(강헌구, ‘가슴뛰는 삶’ 중에서)
책의 내용이 좋아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 동기부여 연설가 브라이언 트레이시, 전설적인 풋볼 코치 루 홀츠, 더바디샵의 설립자 아니타 로딕, 심신의학 전문가 디팩 초프라 등과 같은 초일류 인사들은 한 번 강의에 3~5억 원 정도의 강의료를 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보수가 엄청나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뿐, 그들이 그런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리더십, 성취동기, 몸, 건강이라는 한 단어, 운명의 가닥을 잡게 해준 숙명적인 하나의 키워드에 최소한 6만 시간 이상을 쏟아 부었기에 그런 초일류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인생은 키워드다. 한 단어만 찾으면 된다. 비전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런 숙명적인 하나의 키워드를 찾아내는 것이다.
라이트 형제의 숙명적인 키워드는 ‘비행’이었다. 토마스 에디슨이 선택한 키워드는 ‘전구에 불을 켜는 것’이었고, 알프레드 노벨은 ‘화약’, 쇼팽은 ‘피아노’. 애니카 소렌스탐은 ‘골프’, 오프라 윈프리는 ‘토크쇼’, 장보고는 ‘해상무역’, 운보 김기창은 ‘그림’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키워드에 인생의 승부를 걸었다. 운명을 건 키워드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고, 그 키워드에 관해서 만큼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내 자신의 키워드는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 안에서 그 키워드를 찾아갈 때 우리들은 참 행복이라는 것도 함께 얻게 될 것입니다.
생태적 예수
이동훈 신부님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 주의 컴버미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마돈나 하우스 (Madonna House) 라는 공동체의 본부가 있다. 이 공동체의 창립자인 러시아 출신 캐서린 여사는 1947년 농장을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세웠다. 그녀는 공동체가 농장을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복음적인 삶을 사는 데 농장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으며, 시골이나 농촌에서 사는 것보다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농부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태어났고, 생애 대부분을 시골에서 자랐기에 예수님의 복음은 농사와 땅, 자연에서 취한 예화와 비유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뭄 · 가시 · 겨자씨 ·곳간 · 광야 · 꽃 · 나뭇가지 · 누룩 · 둥지 · 마을 · 무화과나무 · 밀 · 밀가루 · 벌레 · 벼이삭 · 백합 · 별 ….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 (농부) 등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야말로 농사꾼 냄새가 솔솔 나는 단어들이 가득하다.
농부는 자연의 이치를 배운다. 철따라 무엇을 심어야 하는 지 아는 철든 사람들이다. 자연의 움직임에 기민한 농부들은 그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쉽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치는 것이다.
농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키우는 작물들 또는 동물들의 마음을 살핀다. 그것들이 지금 물을 원하는지 ? 음식을 원하는지 ?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농사는 관상기도의 훌륭한 연습이 된다. 농부뿐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관상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물들을 관상한다면 우린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예레 3, 17)
동물을 잡을 때 어디를 잡을까요? 생각해보면 동물마다 잡는 부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어디를 잡을까요? 귀를 잡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귀가 아닌 목덜미를 잡아야 합니다. 도마뱀은 어떻습니까? 만약 꼬리를 잡는다면 잘려진 꼬리만 손에 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동물마다 적당한 부위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그 동물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사람을 잡으려면 어디를 잡아야 할까 라는 의문을 던져봅니다. 즉, 사람의 어느 부분을 잡아야 내 편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과연 사람을 잡을 때 어디를 잡습니까?
정답은 ‘마음을 잡아야 한다.’ 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잡기보다는 서로 멱살을 잡아채는데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비어 있는 마음, 이렇게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만이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길과 같은 마음,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실천하지 않는 돌밭과 같은 마음,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이러한 마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에만 주님으로부터 내 마음을 온전히 잡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의 마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과연 나의 마음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어떠한 열매를 그리고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반성들을 통해 내 마음은 점점 좋은 땅과 같은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주님께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은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고, 영혼은 우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세실 박스터).
잃어버린 손가락의 교훈(‘행복한 동행’ 중에서)
샤이아 라보프는 영화 ‘트랜스포머 1’의 주인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08년, 만취 상태로 트럭을 몰다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하는 상대 차량에 트럭 문이 으깨지면서 왼손 약지가 순식간에 날아간 것이다. 곧바로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신경이 너무 많이 손상돼 엉덩이 뼈와 피부를 이식해 손가락을 성형해야만 했다.
‘트랜스포머 2’의 촬영을 2주 앞둔 시점에 일어난 이 사고로, 라보프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갓 스물을 넘긴 그가 영화의 성공에 취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질타했다. 실제로 라보프는 아역 시절부터 10년 동안 배우 생활을 해 왔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만나 ‘트랜스포머’, ‘인디아나존스’, ‘이글아이’ 등에서 굵직한 배역을 따내기 전까지는 그리 지명도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사고는 분명 그가 성공에 취해 벌인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였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뒤 비로소 라보프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번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 적 없이 살던 지난날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에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았으니까요. 운도 없었고, 생각도 잘못됐고, 태도도 안 좋았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요.”
찌그러진 트럭은 폐차했지만, 라보프는 자신의 손가락을 으깬 트럭 문짝을 여전히 보관 중이다. 잃어버린 손가락을 상기시키는 채찍질인 동시에, 자신의 안일했던 마음을 일깨워 준 일종의 상징으로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면서 라보프는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만, 한층 성숙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김 맛세오 수사
성거산에 살면서 나무 작업을 많이 합니다.
수십 년 아름드리 소나무들 주변에 담쟁이 넝쿨하며 가시가 달린 넝쿨 식물이 제법 많아, 아무리 키 큰 소나무라도 타고 올라가 얼기설기 감아 버리면 소나무의 멋진 가지들은 맥을 못추고 죽어 버리고 맙니다. 좋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담쟁이나 가시덩굴 식물과 같은 세속의 걱정과 재물에 찌들려 허덕이다 결국 숨을 못 쉬는 가련한 사람들!
우리네 삶이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결국 동전 한 닢 가져가지 못하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환히 열려진 파아란 하늘을 향해 마음껏 자라는 곡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자신을 비우고 베푸는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가시덤불이 자라지 않도록 늘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묵상에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육신의 정념에 휩싸여 유혹을 받게 된 성인은 가시가 많은 장미덩굴에 몸을 던져 뒹굴었습니다. 그 가시에 온몸이 찔렸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요.
그 후로는 그 장미에 가시가 돋지 않았답니다. 지금도 뽀르치웅꼴라 성모 성당에 가 보면 수도원 내 한 구석 장미 정원에 가시없는 장미가 매년 아름답게 피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 신부님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박경철 의사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 강의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전문의가 되고 나서 백수 친구와 함께 서울에 있는 경제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연자는 ‘W’, 곧 웹에 대한 강의를 했다. 머지않아 웹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90년대 초의 이야기인데, 강연을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강의장을 나가 버렸다. 그런데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백수 친구는 W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W가 말하는 세상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메일링 서비스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W는 2조 벤처 기업의 대표가 됐고, 백수 친구는 사업을 시작해 결국 테헤란로에 빌딩을 세 채 소유한 유력한 기업인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이런 반성을 했다.
‘나는 왜 W와 백수 친구가 본 것을 볼 수 없었던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제레미 러프킨의 말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인류문명은 0.1%의 창의적 인간과, 0.9%의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은 수동적으로 이를 따라왔을 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답이 확실해진다. ‘W’는 0.1%의 창의적인간 이었고, 백수 친구는 0.9%의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99%의 수동적인 ‘잉여인간’이었다.
실제로 인류문명은 1%의 창조적이고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 역사를 돌아보니 그랬다. 경제사만 놓고 봐도 그렇다.
200년 전 영국에 모직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든 창의적인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은 ‘저런 기계가 있나보다.’ 했는데, 일부는 모직의 재료가 되는 양털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것을 감지하고 감자밭을 뒤엎어 양 목장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모직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양 목장주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100전에 헨리포드가 자동차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기차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포드는 자동차의 유용함을 확신했고, 그를 W로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록펠러다. 그는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주유소를 만들기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라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고, 그 사업에 협력한 록 펠러는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W가 있고, 그에 협력하고 동참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발견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동참하는 사람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 ... 쓸 데 없는 짓 한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네. ...’ 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그리고 생명의 열매를 백배 예순배 서른배로 낼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말씀의 가치를 깨닫는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분심 없는 들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런 경우는 하늘나라에 관한 듣지 못하는 세 가지 유형 중에, 즉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중에 어디에 속할까요?
어제는 미사를 드리면서 내내 소음 때문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아침 그리 덥지도 않은데 왜 에어컨을 킨 것인지, 키더라도 미사를 시작하면 소음 때문에 끄기로 했는데 왜 계속해서 틀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분심이 들었습니다.
分心이란 마음이 갈렸다는 뜻인데, 마음 한 편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 하지만 마음의 다른 한 편에서 딴 것이 깔짝대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제는 소리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소음을 탓하고 짜증을 내다가, 듣기 싫으면 듣지 말지 왜 소음을 듣고 있느냐고 하다가, 누가 듣고 싶어서 듣나 듣지 않을 수 없으니 듣지 하다가,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탓을 소음에 왜 돌리냐 하다가 미사가 끝났습니다.
들리는 것을 안 들을 수 없고 그래서 소음이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어떤 경우 어디에 몰두하면 물리적으로는 소리가 나는데도 전혀 듣지 못하니 소음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듣고 안 듣고는 자기에게 달린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옛날에 다방이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서 사람을 만날 때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그날따라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바뀌면 얘기하자고 하고 다방 안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저 편에서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시끄런 음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소음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소음이 오히려 둘을 바짝 붙어서 얘기를 나누게 하고 소음이 더욱 그들을 서로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소음을 이겨내고 대화를 성공시킵니다.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몇 년 전 경향 피아노 경연이 있었습니다.
영 한우리 아이들이 몇 참여하고 또 가까운 곳에서 하기에 격려차 갔습니다.
저는 본래 음악회에 잘 가지 않습니다.
기대를 하고 갔다가 실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악적 만족을 위해서는 아예 가지 않고 아는 사람 격려 차원에서만 몇 번 갔는데 이번에도 격려 차원에서 간 것입니다.
같은 곡을 몇 십 명이 연주하는데 처음 듣는 곡인데도 저는 잘못 연주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잘못 연주한 것만 들리는지 듣고 있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노릇은 우리 아이들이 연주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 없이 욕심으로 들으니 판단이 되어 지고 연주의 잘잘못이 들리는데 사랑으로 들으니 그저 연주가 들린 것이었습니다.
판단을 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듣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이고 사랑의 작용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갖가지 장애로 인해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면 온갖 장애가 있어도 듣고야 맙니다.
결국 분심은 사랑 없음의 결과입니다.
어떤 배우가 5년 동안 고생한 끝에 마침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 무대에 서는 영광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무대에 나타나서 말합니다.
“자네가 이 사람이 살해되는 걸 봤단 말이지?”
그러면 그는 주인공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제가 봤어요.”
수주일 동안 그는 이 한 마디를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제가 봤어요. 제가 봤어요......”
발성법을 연구했고, 얼굴 표정과 억양을 아주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 날이 왔습니다. 주인공이 무대에 나타났고,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힐끗 보고는 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묻습니다.
“자네가 이 사람이 살해되는 걸 봤단 말이지?”
그 사람은 연습한대로 주인공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긴장을 해서인지 이렇게 말했네요.
“제가 봤다고요?”
딱 두 글자가 바뀌었을 뿐인데, 연극의 내용과 분위기가 원래의 것과 정반대로 나아가게 되었겠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세상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즉, 나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별 것 아닌 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별 것 아닌 것은 그냥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다보니 끊임없는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사실 씨 뿌리는 사람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으로 별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 안에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아주 작은 일상의 모습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것 중에서 쓸데없는 것이 있을까요?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현재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담겨 있으니까요.
그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기지 맙시다.
자신에게 보내는 칭찬의 박수('좋은 글' 중에서)
작은 우물에는 물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몹시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습니다. 우물가에 물을 떠서 마실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얼마 후 다른 한 사람이 우물가에 왔습니다. 그는 물을 떠서 마실만한 게 없는 것을 알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물을 떠 마셨습니다.
만일 앞에 온 나그네가 성냄을 죽이고 조금만 더 생각을 했다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차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냄과 분노를 참아내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더라도 그 순간에는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십시요. 화가 나는 순간 앞뒤없이 내뱉는 말은 독을 뿜는 뱀의 혀끝처럼 상대에게 큰 상처를 남김과 동시에 자신마저도 헤칩니다.
다툼은 한쪽이 참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철을 타면서 예전과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노약자석의 정확한 분리라는 것이지요. 노약자석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들만 있고, 일반석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젊고 늙음의 구분이 이 전철 안에서 확연하게 구분되면서, 마치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노약자석이 없었던 몇 년 전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는 연세 드신 분이 전철을 타시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리를 내어 드렸지요. 그러나 이제는 노약자석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 앞에 연세 드신 분이 있어도 자리를 내어 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즉, 나이가 많으면 자기에게 오지 말고 노약자석 쪽으로 가라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자리에 앉아 계시던 어떤 중년의 형제님께서 자신의 앞에 있는 여학생의 가방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학생, 가방이 무겁지? 내가 들어줄게.”
그러자 그 여학생은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바라보면서 “됐어요.”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전에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서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머리 위까지도 가방을 들고서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방을 들어준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세상인가 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따뜻한 인간미보다는 보이지 않는 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산책을 하다보면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많아진다는 뜻일 텐데,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일까요?
따라서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다시 새롭게 심어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사랑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 안에 받아들였으면 이제는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세상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제거하고, 사람이 좋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바로 나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 양보도 해보고, 무거운 사람의 짐도 좀 들어주고, 만약 목욕탕에 가신다면 모르는 사람의 등도 밀어주는 등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을 해보면 어떨까요?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너무나 좋아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남들 앞에서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유리하게 바꿔 보자고 생각한 뒤에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엔도 슈샤쿠)
만남과 인연은 아름다워야(‘아름다운 이야기’ 중에서)
그대 숨 쉬는 하늘 아래
그대 머무는 세상에서 추억 한줌으로 살 수 있음도
행복이라면 행복이지요
욕심부려 무엇합니까
미우면 미운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세상사 순응하며 살 일이지요 성급한 걸음으로
앞서 갈일 있겠습니까
사랑이 부족했다면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지요
해답 없는 사랑 규칙 없는 사랑일지라도
만남은 소중해야 합니다
인연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젖은 어깨 털어주고 때묻은 마음 헹구어내
잘익은 봄의 가운데로
함께 걸어가야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를 좁히고
"믿음"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친구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그 거리를 멀게 하여
무관심이란 비포장 도로를 놓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가슴을 잇닿는 그 거리
믿었던 사람에게서 그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질 때 내 삶은
상처입고 지쳐갑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소망합니다.
그들이 높게 쌓아둔 독을 허물기 위해
오늘 하루도 미소 지으며
내가 한 걸음 먼저 다가가서
서로의 가슴에
끝에서 끝까지 잇닿는
강을 틔워 내겠다고
그리하여 그 미소가
내가 아는 모든 이의 얼굴에 전염되어
타인이라는 이름이 사라져가는 소망에
사랑을 가져봅니다
우리의 새로운 인연으로 변화하렵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남은 세월을
아름답게 만끽하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깨달음의 행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뜻밖의 행운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 행운들 가운데 가장 큰 행운은 아무래도 ‘깨달음’이란 행운이 아닐까요?
삶의 전환점, 삶의 기폭제가 되는 깨달음, 새로운 진리에 눈을 뜨게 해주는 깨달음, 그간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게 해주는 깨달음,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깨달음, 우리 삶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이끌어주는 깨달음...이런 깨달음은 돈 주고도 못사는 정말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아무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니더군요. 깨달음이란 내 인생 안에 새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허무는 일입니다. 낡고, 비좁고, 비새고, 배관도 엉망이어서 냉난방도 안 되는, 그래서 더 이상 거처할 수 없는 낡은 옛집을 과감하게 허무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기존의 그릇된 사고방식, 오류와 아집, 교만으로 가득 찬 옛집을 허무는데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깨달음을 통해 소중한 인생의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다 끝난 것은 또 아닙니다. 발견한 진리를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의 원칙을 살아내는 일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저 좋다 좋아, 하고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투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길, 새로운 이정표, 새로운 삶의 대원칙을 발견한 행운아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은 그분이 사신 것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자취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한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으로 그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은총에 도달한 사람으로서의 자세이며,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삶의 폭, 삶의 지평이 광대해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놀라울 정도로 관대해집니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 앞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크게 깨달은 만큼 큰 그릇이 되어 삶의 모든 국면들을 관대하게 수용합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문제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습니다. 미움덩어리인 사람도 그저 안쓰럽고 측은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인생의 역풍 앞에서도, 먹장구름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여유가 생깁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내 안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기에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힘겨운 삶의 순간들도 사랑으로 엮어갈 줄 압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은 때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때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십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셔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우리의 노력은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황지원 신부님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저에게 하느님의 넓은 품을 다시금 바라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지형적으로 돌이 많고 밭을 경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돌을 골라내어 씨를 흩어 뿌리는 형태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람이 불면 씨앗이 경작된 땅뿐만 아니라 돌무더기에도 떨어지고 길에도 떨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그 말씀이 어떤 땅에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뿌려 씨앗을 낭비하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조금 어리석은 농부처럼 여겨질 정도로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땅에까지 당신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길바닥에 떨어졌거나, 돌무더기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고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아직 경작이 덜 된 땅이어서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다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말씀을 뿌리시며 기대하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봅시다. 삼류 농부는 밭을 탓하지만, 일류 농부인 하느님은 밭을 고르는 분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열매 맺게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꺼이 좋은 밭을 일구는 일꾼으로, 그리고 그분 말씀의 씨앗이 온전히 열매 맺는 땅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겠습니다.
깨달음 2
박후임 목사
보는 눈이 있고 들을 귀 있어 행복해하는 제자들에게 들을 수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신다 . 비유로 들어주시는 길가·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공통점은 모두 땅이다 . 땅은 하늘의 짝이다 . 하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땅으로 내려왔는데 그 땅이 단단하고 돌이 많거나 가시덤불이 무성하다면,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 네 가지 마음 밭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하늘말씀(씨앗)을 통해 내 안의 단단함, 돌, 가시덤불을 보고 그것들을 치워 하느님이 원래 만들어 주셨던 좋은 흙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닐까?
귀농한 지 4년째 되지만, 아직 왕초보농사꾼인 나는, 씨앗을 뿌려놓으면 싹이 나올 때까지 궁금하다. 흙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며칠 몇 날이 되어도 싹이 올라오지 않으면 걱정이 된다. 혹시 물을 너무 많이 주어 씨앗이 썩은 것은 아닐까, 하고 슬며시 흙을 파헤쳐 본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 발아되는 데는 개개의 씨앗에 따라 다른 줄 모르고 말이다. 씨앗(생명)은 신비롭다. 그 단단한 흙을 가르며 올라오는 여린 잎을 보면 숨이 멈추어질 정도로 놀랍기만 하다.
주님, 생명의 씨앗인 당신과 하나 되도록, 늘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비옥한 땅, 겸손한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병원에서 치아 신경치료를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금으로 때운 곳이 아파서 열어 보았더니 그 안이 썩어가고 있어서 신경을 죽이고 금으로 새로 씌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치아에 신경이 몇 줄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하나가 썩은 것은 확실하고 나머지 신경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일이 찔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뜩이나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치료대 위에 누워서 언제 올지 모르는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워서 따끔따끔한 고통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신경을 더 긁어낸다고 하였습니다. 전번에 느꼈던 고통 때문인지 처음부터 더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고통을 줄 것 같아서 더 긴장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절로 벌려진 입이 다물어 졌습니다. 급기야 선생님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게 하는 기계를 제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위를 볼 수 없었고, 그렇게 입을 한 시간 동안 벌리고 있으면서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첫 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치료시간은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마취를 할 때, “좀 따끔 할 겁니다.”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지만 그런 말 하지 않을 때도 자주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아! 내가 느끼는 고통의 90%는 내가 상상하는 것에서 오는구나!’입니다. 실제로 의사를 믿고 내 자신을 맡겼다면 한 시간 내내 긴장하면서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치료 받는 한 시간 동안 미리 예고 된 두세 차례 짧게 따끔 했던 것을 제외하곤 특별히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곧 의사 선생님을 믿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다고 할 때만 긴장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참기가 수월하였습니다.
내가 바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가 의사가 되어 내가 상상하고 그래서 긴장을 하고 있을 때는 참 힘들었지만, ‘그래, 어차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맡기니 편해졌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무엇을 깨달아야 삶이 바뀌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성경 구절을 듣고 묵상해도 ‘진정 깨닫지 못하면’ 삶이 바뀌지 않고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땅, 바로 겸손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교만을 버릴 때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됩니다. 깨닫고 믿어야 삶이 변화됩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할 때 결혼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라는 말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냥 들으면 별것 아닐지라도 저는 ‘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참아내야 할 것이 있는 거구나! 그러면 나는 인간적인 애정을 참아내는 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삼고 살아야겠다.’라고 깨달았고 그것으로 신학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성경 구절이 깊이 다가와 ‘아!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즉 기도만 하면 그 분으로부터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 내 안에 저절로 성령으로 가득차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구나!’라고 깨닫고 기도에 목숨을 건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임을 믿게 되었고 사실 그렇게 해 보니 예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씀을 듣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도 않고, 또 모든 사람이 기도에 목숨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겸손히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게 될 때 비로소 삶이 변화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들어도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 유다도 있었습니다. 이는 마음이 겸손한 땅이 아니면 아무리 그 마음 안에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깨닫지 못하고 삶도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갈고 거름을 주어 씨를 뿌리기에 적당하게 만들지 않는 농부는 없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그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믿고 받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겸손한 좋은 땅만 있으면 말씀으로 인한 삶의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 밭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주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처음 듣는 듯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신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시지만 당신 좋을 대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열매는 마음 밭이 어떠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해서는 안 되고 내 마음 밭이 어떤지 따질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마음 밭일까?
저의 마음 밭은 길바닥 같습니다.
솔직히 매일 말씀 나누기를 하면서 유혹이 있습니다.
말씀 나누기를 그만 할까 하는 유혹입니다.
제 마음 밭이 길 바닥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것을 저에게 은밀히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말씀인 양 시장 바닥에 내 놓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이유식이 따로 없던 옛날에 많이 보던 것처럼, 즉, 마치 엄마가 음식을 씹어서 아이가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저는 먹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먹기 좋게 해준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런 느낌 여러분은 이해하시나요?
얼마 전에 여론조사 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서 성인 남녀들을 대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그런데 조사대상의 66.9%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공부를 그때 더 열심히 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선 공부가 내 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공부는 내 과거의 한 순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도 계속해서 공부를 통해 알아 나가야 하는 것이고, 부족한 면이 있다면 지금해도 늦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늦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과거의 행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지금 행복하고 근사한 삶을 살고 있을 텐데…….’라는 후회만 하고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과거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멋진 미래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 머지않은 미래에는 또 하나의 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가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이런 상태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서 키워나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나갈 때, 수많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열매는 미래에 맺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훌륭한 열매가 많이 맺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이 중요합니다. 과거만을 후회하면서 과거의 내 모습이 다시 되고 싶다는 생각만을 간직한다면 좋은 열매는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 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감사의 시간이었지요. 사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지난달 생각보다 피정에 참석하시는 분들의 수가 적어서, 이번에도 적게 오시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음악을 담당하시는 분들도 전격적으로 교체했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했지요.
하지만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걱정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충실 하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바로 현재에 충실한 모습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미래의 한 순간인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만, 그 시작은 바로 지금에 있음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대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더욱 더 충실하십시오. 바로 그 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인생을 낭비한 죄(영화 '빠삐용'중에서)
빠삐용: 전 결백합니다. 죽이지 않았어요. 증거도 없이 뒤집어씌운 겁니다.
심판자: 그건 사실이다. 넌 살인과는 상관없어.
빠삐용: 그렇다면 무슨 죄로?
심판자: 인간으로서 가장 중죄, 즉 인생을 낭비한 죄!
빠삐용: 그렇다면 유죄요, 유죄... 유죄... 유죄... 유죄...
쓸모없이 뿌리시지는 않는다.
남상근 신부님
얼마나 아까운 씨앗인데 씨 뿌리는 사람은 함부로 뿌립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열매 맺을 만한 땅을 골라서 씨를 뿌려도 될까말까인데, 아무 곳에나 함부로 씨를 뿌린다기에 그렇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선택적으로 파종하지 않는답니다.
길가에도 뿌립니다.
돌밭에도 뿌립니다.
가시덤불 속에도 뿌립니다.
사방 천지 곳곳에 뿌린다는 얘기지요.
불필요한 일이고 쓸모없는 헛수고인데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왜 하는 걸까요?
뿌려진 씨는 말씀, 구원을 주고 생명을 선사하는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 씨를 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땅을 골라서 씨가 뿌려졌다면 내가 어찌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은혜롭게도 온 땅에 씨를 뿌리시기에 내가 그 씨앗을 품게 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땅도 절로 좋은 땅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땅도 예전에는 길가였고, 돌밭이었고, 가시덤불이었습니다. 자갈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내고, 거름을 넉넉히 넣어주어서 비로소 열매 맺을 만한 땅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영 열매 맺을 기미라곤 없음에도 꾸준하게 씨앗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열매 맺는 삶
임인자
얼마 전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성당에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우의 자녀 결혼이라 당연히 성당에서 하겠거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관면혼배만 하고 동네에 있는 호텔에서, 그것도 주일 12시 30분에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날이 길일이고 시간이 그때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사 후 서둘러 결혼식장에 갔더니 주례도 신부님이 아니라 다른 분이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라고 떳떳이 말하면서도 친정어머니가 봐온 신수에서 좋은 말은 꼭 되새기고, 나쁜 얘기를 듣게 되면 은근히 걱정이 되고 불안해집니다. 별자리로 한해의 운수를 보고 풀이해 주는 후배가 있는데, 재미삼아 하는 것인데 어떠랴 싶어 온 가족 것을 부탁해서 봅니다. 그러고 나선 좋은 소리는 좋은 소리대로, 나쁜 소리는 나쁜 소리대로 마음에 담아두게 되어 괜히 봤다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유혹이 올 때마다 단호히 끊지 못하고 미풍양속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합리화할 때도 있습니다. 또 불안한 마음에 십자가를 집에도 걸고 차에도 걸고, 보이는 곳마다 묵주를 놓아둡니다. 그러면서 정작 기도는 잘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습관이고 선을 행하는 것도 습관인데 남는 시간이 없다고 남는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미룹니다. 내 안의 나쁜 습관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를 하고, 잠들 때마다 나쁜 습관을 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다 보니 나쁜 것을 최대한 피해 보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어떻게 좋은 길, 편한 길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불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라는 말씀처럼 욕심을 버리고 기쁜 일도 힘든 일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나누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열매를 맺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요?
신앙의 열매
여성국 신부님
말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한 사람 안에서도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유혹에 약한 우리이기에 언제나 항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안의 근심 걱정에 짓눌려 자라지 못하기도 하고, 여러 다른 세속 일에 밀려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나 좋은 밭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밭을 일궈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씨를 뿌려야 하고, 그 씨앗이 잘 자라게끔 부지런히 돌봐줘야 합니다. 좋은 밭이 되기 위해 양심성찰과 고해성사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수확을 얻기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은 성경 말씀을 부단히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으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좋은 밭과 품질 좋은 씨앗, 그리고 돌봄의 손길 이 모두가 조화를 이뤄야 좋은 수확을 얻듯이 우리도 매일의 양심성찰과 정기적인 고해성사, 매일 성경을 읽는 것, 그리고 기도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탓? 아니며 내 탓?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지난 수요일에 들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좋은 땅 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에 씨를 뿌립니다.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좋은 땅만 가려서 뿌리면 낭비하는 씨가 하나도 없이 모두 많은 열매를 맺을텐데, 모든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이렇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은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졌기 때문에, 이제 이 말씀과 은총이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은 하느님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씨가 땅에 심어져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가지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농부가 뙤약볕 아래서 무수한 땀을 흘리면서 추수의 날을 준비하듯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내야합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에 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해서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거룩한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순간 반짝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을 잘 가꾸어 갈 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복권이 당첨되어, 아니면 땅 값이 갑자기 올라서,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는 결코 이러한 요행수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만약 어떠한 요행수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원한다면, 이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열매맺게 하는 좋은 땅이 아니라, 길바닥이요 돌밭이며 가시덤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녕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마음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풀며,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작은 일들에 충실할 때 우리 모두는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복된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정원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도 실패할 때가 많았고, 신자들의 생활을 살펴보아도 부실한 면이 많은 쓰라린 현상을 체험한 곳이다. 믿음이 사라져 좌절하고 실망에 빠져 있던 공동체에 용기와 희망을 주고 격려하려는 의미에서 복음이 형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믿음은 발전한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믿음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것을 반성할 때 믿음은 성장하고, 체험을 통하여 신앙인으로서 성숙해 간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한 마음, 말씀을 들으면 기쁘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마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 그리고 열매를 백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맺는 마음도 있다.
마음이라는 밭에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 믿음이 있어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믿음이 성장해 간다. 믿음이 있어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커간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믿음이 발전해 간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심고 살아가야 할까 하고 묵상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마음밭에 믿음이 자라도록 믿음을 심자!
이영창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지난 수요일 들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러 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씨 뿌리는 이'에 견주고 있습니다. 씨는 바로 기쁜 소식 즉 ‘복음(福音)’이며, 여러 가지 밭은 그 말씀을 듣는 ‘여러 청중’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그 방법에 따라 결과(열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의 결과는 듣는 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같은 씨(말씀)가 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뿌려지지만, 듣는 자의 반응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자신의 편견과 아집, 옛 것을 고수하려는 마음, 새 것을 덮어놓고 싫어하고 위험시하는 근시안적인 자기폐쇄, 그리고 부도덕한 생활, 교만과 자아도취, 특히 진리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를 소경으로 만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졌으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사탄이 낚아채가서 냉담해 버리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세례까지 받았지만 얼마 뒤 “성당에 다니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하면서 완전히 세속 생활로 빠져버려 하느님과는 이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얄팍한 인생관을 가진 자로서, 깊이 생각하는 일도 없이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덮어놓고 좋아는 하지만, 즉시 싫증을 내고 끝을 맺지 못한 채 도중에서 그만둡니다. 그들은 시작하는 것은 많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쉬 더웠다 쉬 식어버리는 자들입니다. 즉,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왔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경우인데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실제 자신에게 위기와 화가 닥쳐오면 이내 얼굴을 바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이익으로 계산하게 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봤지만 너무 힘들어. 달라지는 것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이내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마치 두 주인, 아니 셋 넷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에 분주하여, 참다운 가치관을 터득치 못한 자들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은 여기에 속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 일에 바빠, 기도하는 시간도, 성경을 읽을 틈도, 성당에 나갈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밀어냅니다.
이처럼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주변의 가시덤불에 덮여 도저히 열매맺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세례를 받긴 받았으나, ‘산도 가야지, 바다도 가야지, 운동도 해야지, 파티도 가야지, 술도 마셔야지’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죽을래야 죽을 시간이 없다’며 세상 걱정과 유혹이라는 덤불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마지막 부류는 옥토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언제나 배우려 듭니다. 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듣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친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도덕적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심사숙고하여 세상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그가 듣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깁니다. 그런 사람은 좁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청중들 가운데 우리는 어떠한 부류에 속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의 씨앗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 있는 자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사랑의 열매를 맺어갑시다. 주님의 씨앗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나아가야할 참 진리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아멘.
마음 밭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히브리서 4,12절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환히 비춰주는 살아있는 거울이요, 영육(靈肉)의 최고 치유제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영육의 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의 위력도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은 공동협력자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의 씨도 길바닥 같은 마음 밭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지면 도저히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 밭이 좋아야 합니다.
탓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마음 밭입니다.
몸을 가꾸고 돌보는 데는 그렇게 정성을 다하면서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데는 왜 그리 소홀한지 모르겠습니다.
밭의 이치와 마음 밭의 이치는 똑같습니다.
좋은 땅도 방치하여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곧 잡초 우거진 거칠고 굳어버린 밭이 되듯이 마음 밭도 냉담으로 방치하여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곧 거칠고 어둡고 차갑고 딱딱한 마음 밭이 됩니다.
애당초 타고난 좋은 마음 밭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마음 밭도 길바닥 같을 때도 있고, 때로는 돌밭 같은 때도,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래서 항구한 수행이, 말씀 공부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 밭의 현실에 개의치 말고 늘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행하는 노력이 있을 때, 점차 좋은 땅의 마음 밭으로 바뀌어 갑니다.
잘 들어야 좋은 제자입니다.
마음 밭이 좋아야 잘 듣습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들어라(Obsculta)'로 시작됩니다.
겸손과 순종의 정신으로 잘 듣는 제자 있어야 좋은 스승도 나옵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 볼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하느님은 참 스승이자 착한 목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마음 밭을 좋은 땅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풍부한 말씀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가8,15)!”
아멘.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초라한 인생의 결실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것 저것 작물들을 잔뜩 심어만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보지 않는 제게 한 전문 농부께서 이렇게 ‘뼈있는’ 충고를 하셨습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크는 법이라네. 틈만 나면 자주 가봐야혀.”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섞고,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약을 치고, 잡초를 뽑아주면서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은 어찌 보면 농부에게는 자식, 혹은 분신과 다름없습니다.
이번 수해로 한 순간에 그 ‘아까운 것들’ 다 날렸을 뿐만 아니라, 논이고 밭이고 살아갈 터전이고 형태도 없이 사라져버려 망연자실해있는 농부들의 그 허탈한 마음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오를 뿐입니다.
주님의 위로에 우리의 위로가 보태져서 그분들, 조금이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해복구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주민들의 말씀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오셔서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많은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께 해주시니, 따뜻한 마음 보여주시니,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에,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마음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유난히 제게 크게 다가옵니다.
불과 서너 달 전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호박 모종 몇 개 심었을 뿐인데, 지금은 넝쿨이 자라나 꽤 큰 언덕을 다 덮고 있습니다. 큰 호박잎 밑 비밀스러운 곳에는 축구공보다 더 큰 호박덩어리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이른 봄 제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던 가냘픈 깻잎 모종 조금 심었을 뿐인데, 지금은 자라고 자라서 제 키 만해 졌습니다. 그간 따먹은 깻잎만 해도 리어카로 몇 리어카는 될 것입니다. 가지, 고추, 상추...꽤 쏠쏠한 재미를 봤습니다.
제대로 된 결실을 맺은 작물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고맙습니다.
반면에 그렇게 ‘쌩고생’하면서 돌보고 키웠는데 전혀 협조하지 않고 수확은커녕 말라비틀어져버린 작물들을 바라보니 화가 날 뿐입니다. 모종 값만 해도 얼만데...하며 본전 생각이 납니다.
우리를 이 땅에 심으시고 돌보시는 우리의 주인이시자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탐스런 열매를 가득히 맺는 인생 앞에 하느님께서는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전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생 앞에서 하느님께서도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나는 이 한 세상 살아오면서 별로 이룬 것도 없고, ‘이거다’ 하는 결실도 없는 초라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어쩌나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타고난 토양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결실도 다릅니다. 주어진 그릇이 다르기에 수확의 양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류 발전을 위해, 타고난 달란트를 바탕으로 한 생산을 통해,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결실만이 다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결실, 기도의 결실, 희생의 결실, 인내의 결실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타고난 이 세상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도 나름대로의 결실을 거두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있어 결실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만 해도,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결실입니다.
우리 각자의 나날 안에서, 우리 각자의 오늘 처지 안에서,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무가 열매에 의해서 구분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결실을 통해서
김태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묻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십니다. 똑같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결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설명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듣는지 그 듣는 태도를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이 듣는 태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유치부 어린이들과 만날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을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춰서 해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 줘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의 답답함은 정말 큽니다. 복음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악한 자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사람. 환난과 박해에 넘어지는 사람. 그리고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허덕이는 사람 모두를 안타까워 하십니다.
말씀을 잘 들은 우리는 들은 것으로만 끝내버릴 수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뿌리 깊이 내린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정확한 평가를 받습니다. 복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기만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으로만 그친 사람은 고난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커다란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찾는 분들이 부럽습니다.
혹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힘없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염려가 무엇인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걱정으로 나를 옭아매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나무가 열매에 의해서 구분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결실을 통해서 평가됩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어야 인정받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어야 인정을 받습니다. 이름만 사과나무일 뿐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쏘시개로 밖에 쓰이지 못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씨와 밭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을 맺도록 만들어 주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들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이 가리워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는 먼저 열심히 말씀을 듣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반드시 꽃을 피우고 그 꽃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삼십배, 육십배, 백배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려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더욱 크게 자라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나에게 허락된 삶터에서 듣고 깨달은 복음을 실천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비유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
박상대 신부님
예수님을 직접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관한 현실감을 좀처럼 체감하기 어려웠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라고 했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는 곧 하느님 존재의 신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을 직접 보는 눈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이는 갈수록 어떤 신비스러운 것으로부터 이탈해가고, 심오한 것을 마치 미신(迷信)으로 여기듯 하는 현대의 우리들이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의 비유 중에서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미 말씀해 주셨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밝혀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사실은 비유설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겠으나 설명해 주시는 이유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우선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福音)이다.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복음선포자이다. 그 씨앗이 뿌려지는 곳은 네 곳으로 언급된 바 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으로서 선포되는 복음말씀을 듣는 청중과 그 청중의 내적 조건을 의미한다. ①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의 밥이 된다고 했다. 길바닥이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경우를 말하며, 이 때 그 씨앗을 먹어치우는 새는 악한 자, 즉 사탄을 의미한다. 결국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청자의 마음 밭이 세속적인 지식이나 교훈, 과학이나 철학이념으로 다져져 있어 복음을 받아들여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떤 마음의 바탕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들이 씨를 쪼아 먹는 새에 비유된 사탄인 셈이다. 사탄은 곧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 살고 있는 교만이나 자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씨앗의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돌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조건이다. 강한 햇볕 속에서 피운 싹을 부지하기란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이런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 뿌리가 마음속에 내리지 않아 그 말씀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이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는 경우이다. 복음말씀과 신앙 때문에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③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도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다고 하여 걱정과 유혹거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크고 심각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런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것을 향유하면서도 집착과 과욕을 제어하고 천상의 것에 대한 감각을 늘 유지하고 성장시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④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좋은 토양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좋은 토양은 복음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의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는 모두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경우를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말은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싹이 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그 뿌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견디어 내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돌밭과 가시덤불 속의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해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햇볕과 알맞은 수분이 토양과 더불어 훌륭한 가실(佳實)을 이루어낸다. 그렇다고 좋은 땅이 아닌 곳에 떨어진 씨앗이 결코 열매를 맺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비유 속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비유의 설명 속에서는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들과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암층의 절벽에서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 있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이유이다.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켜 고정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고, 환난과 핍박과 박해의 온갖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으며, 세속의 온갖 걱정과 유혹거리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묵상하며, 사랑하고 선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신앙에 항구하고 지구(持久)하는 것이다.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하느님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열매를 맺는 일에는 깨달음을 행동으로 수행하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좋은 땅(마태 13,18-23)
유광수 신부님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씨가 길에 뿌려진 이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우리 나라에 많은 크리스챤들이 있는데 왜 사회는 점 점 더 악해지고 있을까? 카톨릭 신자들만도 2백만명이 넘고, 개신교 신자까지 합하면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수효는 우리 나라의 3분의 1은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종교인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성적으로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부정과 부패, 살인과 폭력, 음란과 사치, 물질적인 탐욕과 이기주의 등이 그 도를 더해 가고 있다. 오히려 옛날의 따뜻한 마음과 친절 그리고 양심적인 생활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고 삭막함과 서로간의 불신, 이혼과 마약 등이 우리 사회를 물들여가고 있다. 왜 그럴까? 그토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일이면 미사 참례하고, 예배를 보고, 아침 저녁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성직자, 목사, 수도자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복음적이지가 못할까?
내 개인적인 영성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또 활동도 많이 했는데 왜 나의 영적인 수준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할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발전한 것이 없고 오히려 내가 처음 영세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을 때보다도 더 믿음이 약해졌고 기쁨도 없다. 왜 그럴까? 왜 나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기쁨이 없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을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고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을까? 왜 저 사람은 매일 똑같을까? 아침저녁 기도를 하고 매일 미사 참례를 하고 레지오 활동도 하고, 봉사하러도 많이 다니는데 왜 저 사람은 그렇게 차갑게 사람을 대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자기 것만 알고 나누지를 못할까? 저 사람은 성당에서 반장 구역장, 레지오 단장이다, 회장이다 모든 감투는 다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인색하게 사는가? 사랑이 없을까? 아무튼 우리는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되고 의문을 갖을 때가 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 그런데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 열매를 맺었다. 왜 그럴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와 열매를 맺는 씨의 차이는 무엇일까? 씨는 같은 씨이다. 즉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다 같은 씨이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고 못 맺고 하는 것은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떨어진 장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아무리 좋은 씨이라도 즉 열매를 낼 수 있는 씨이라도 그 씨가 뿌려진 장소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이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그 씨란 무엇인가? 그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요 길, 돌밭, 가시덤불 속, 좋은 땅이라고 표현된 장소는 바로 우리 마음 즉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는 이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가 길,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은 자세로 들었기 때문이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사람은 좋은 땅처럼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을 때에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영적으로 성숙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지성, 활동이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늘 나라에 고나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뿌리가 없으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면 결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직 좋은 땅 즉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지름길이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결코 활동에, 아니면 막연한 신심에. 미사 참례나 겨우 왔다 갔다는 하는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에 대해 눈이 뜨인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의 소리가 들린다. 깨달아야 죽었던 내 영혼이 다시 부활한다. 깨달아야 병들었던 내 영혼이 치유 된다. 깨달음이 있어야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깨달아야 영적인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깨어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우리가 매일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고 웃으면서 봉사할 수 있다. 깨달아야 이 세상의 것에 얽메이지 않고 어떤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 초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초연할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고 가슴 벅찬 충만함이 밖으로 베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르게 도와 줄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입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나오고 하느님의 글이 나오고 하느님의 말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무디어진 나의 마음이 깨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 사람들은 내 안에 맺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 깨달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장 취약점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달음이 없이 듣는다는 것이다.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식 없이 듣는다. 아니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봉사한다고 나서고, 기도한다고 앉아있고, 바쁘다고 여기 저기 다닌다.
내가 시골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때 한 형제가 아침 식사 때에 와서 "신부님, 밭이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였다. "무슨 밭이 없어져?"라고 물으니까 "봄에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 밭이 없어졌어요."라는 것이다. "그럼 그 밭이 어디갔느냐?" 라고 물으니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는 하나도 자라지 않고 풀만 무성하게 자랐어요."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어 놓고 공부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 고구마 싹이 나오기도 전에 풀이 자라서 고구마 밭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밭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씨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독서> : 십계명의 비밀 : 당신은 복받은 약속의 백성입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여러 책들 중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탈출기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탈출기는 참으로 소중한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통하여 나 자신을 실상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탈출기의 중심은 시나이산입니다. 탈출기는 이집트의 고센에서 출발하여 시나이산에 도착하여 약속의 말씀을 받아 성막을 세우는 일까지의 기록입니다. 탈출기는 20장 십계명을 전후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이집트를 빠져나오는 탈출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시나이산 약속으로 주어지는 성막문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십계명에 대한 총론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계명의 각론적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십계명이 주어질 때 시나이산에 일어났던 일과 십계명 서두에 주신 말씀의 의미와 십계명 전체의 중심사상과 오늘날 십계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 십계명이 주어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은 먼저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탈출 19,3)고 했습니다. 먼저 모세를 불러서 시나이산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Orientation)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하느님과의 계약 체결을 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① 백성들은 3일간 옷을 빨고, 여인을 금하며, 성결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탈출 19,10-11. 15).
② 백성을 위해서 사방으로 경계를 정하여 이를 위반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으며, 오르는 자는 반드시 죽게 했습니다(탈출 19,12).
③ 모세가 산을 오를 때 70원로들과 아론을 적당한 거리에 두었으며, 여호수아는 조금 더 동행케 했으며, 자신은 정상으로 나아갔습니다(탈출 24,13-14).
이상과 같은 준비가 끝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약속한대로 시나이산에 강림하셨습니다.
① 성부 하느님이 시나산에 현재하신 것입니다. 옹기점 연기같은 구름이 온 산을 뒤 덮었으며, 번개가 뻔쩍이며, 우뢰소리와 같은 나팔소리에 산이 진동했습니다(탈출 19,16-19) 온 산에 주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탈출 24,16-18). 그 모습이 얼마나 장엄했던지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탈출 20,18-19).
② 성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하늘의 천사가 동원되었고(루카 2,14), 구원활동을 완성하실 때도 갈바리아의 지축이 흔들렸으며(마태 27,51-52), 후일에 재림하실 때도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오실것입니다(1테살 4,16).
③ 성령 협조자가 마르코 다락방에 강림하실 때에도 홀연히 일어난 급한 바람으로 대진동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사도 2,1-4).
인간에게 특수한 사명이 주어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지에 충만하신 하느님이 특수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임재하실 때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간혹 국가의 원수들이 방문할 때 야포를 쏘며 빵파레를 울리면서 환영을 합니다. 그 권위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시편 128,1)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신전의식의 인격자로 살아가는 자가 복된 인간입니다.
둘째: 십계명의 서론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십계명 서론은 이러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젠 바로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성민의 신분과 이들의 처소가 이집트의 고센이 아닌 약속의 땅 가나안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이들이 지켜야 할 법이 바로의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명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세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① 십계명은 종의 윤리가 아닌 아들의 윤리입니다.
종에게는 자유와 안식과 상이 없습니다. 종의 노력은 지극히 당연한 수고입니다(루카 17,7-9). 그러나 아들은 자유함과 안식과 상이 있습니다(루카 15,22-23).
② 십계명은 이집트의 문화가 아닌 성민의 문화입니다.
이집트의 문화는 우상숭배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성민의 문화는 약속의 문화요, 하느님께 영광돌리는 삶입니다.
③ 십계명은 저주의 규례가 아닌 축복의 법칙입니다. 당신은 바로의 명령대로 우상숭배하면서 살면 결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세의 인도로 파스카 어린양의 피 아래서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느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면 영육간에 복을 받습니다(신명 28,1-14).
당신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의 생애에 잊을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출애굽 사건입니다. 파스카 어린양은 바로의 권세를 짋밟고 당신을 마귀에게서 풀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단권세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 은혜의 감사와 감격으로 남은 여생을 살면 십계명은 당신에게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셋째: 십계명의 중심사상은 이러합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진 열가지의 계명입니다. 이는 성문계시의 표본이요, 모든 율법의 근원입니다. 시나이산 이전의 족장 시절에는 하느님이 때마다 필요시 신실한 족장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나이산 약속으로 하느님의 감추어진 비밀한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그 언약을 보고 지킬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언약은 계시의 첫 열매가 되어서 이후로 수 많은 계시가 예언자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계명의 중심사상은 어떠한가?
십계명의 중심사상을 세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느님은 인격적인 신이심을 가르칩니다.
구약의 제사나 신약의 예배(미사)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속적인 무속종교와 다른 점은 인격과 비인격의 차이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비인격적인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행위입니다.
② 인간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의 닮은 모습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 멀리하는 것이 인생의 불행이요, 비극의 원천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은 하느님입니다. 계시의 순서는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③ 삶의 행위에 있어서 그릇된 욕망의 절제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행위로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이 계명을 분석하면 적극적으로 지켜 준행할 것은 두가지이며, 그외 여덟가지는 모든 금지법입니다. 처음 에덴에서 주어진 창조명령은 전부를 허용하고 주권의 상징으로 하나를 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열가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어떻게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비밀한 것을 가르쳐 주어서 이 모든 계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 계명과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은 하나의 새계명을 주심으로 모든 계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계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넷째: 십계명의 오늘날 의미는 이러합니다.
당신은 십계명을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는 구속사의 완성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루지 못한 율법의 빚나간 부분을 바로잡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 3,31)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사는 이러합니다.
① 주님은 의식적인 제사를 십자가로 완성하셨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를 갈보리에서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단번에 청산하신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히브 9,12)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소나 양의 피를 가지고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② 주님은 구약적인 규례를 부활사건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적 안식일을 부활의 주일로 바꾸었으며, 의식적인 제사를 찬양의 미사(예배)로 바꾸었으며, 할례를 세례의 씻음으로 전환했습니다.
③ 주님은 육체적 행위의 법을 성결한 마음의 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덕질 하지 말라는 육체적인 행위의 법을 성결한 마음의 법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마태 5,21-32).
오늘날의 그리스도 교인들의 윤리의식이 어떠한가? 우리는 구약적인 약속의 법도를 무시하고 신약의 은혜와 사랑만 강조하다보니 죄를 피하여 의롭게 살기보다는 범죄한 이후에 베풀어지는 용서에 너무 쉽게 길들여져서 기독교인의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사를 완성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주신 십계명보다 더 엄한 윤리의식을 산상설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이 십계명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이는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넌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고귀한 법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고 구름기둥 불기둥 아래 있는 자 만이 이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 어떠한 보호를 받는가? 이 법 아래 있으면 하느님의 주권적인 간섭을 받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법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산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막문화였습니다.
성막의 중심이 바로 법궤(언약궤)입니다. 지성소에 보관된 법궤에 하느님이 항상 현재해 계셨던 것입니다. 사제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 계명을 지키면 날마다 하느님의 현재(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어제 저녁 미사 후에 집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좀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운동 삼아서 걸어서 다녀오기 위해 집을 나섰지요. 그런데 비가 내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산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우산이 제 차 안에 있었는데, 그 차를 제 동창신부가 잠시 빌려 갔었거든요. 그래도 지금은 비가 오지 않았고, 만약 비가 오면 가게에 들러서 우산을 사면되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다행히 그 집에 갈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 축복을 하고서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그 집이 아파트였는데, 새 아파트 단지라서 길을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하늘에서는 구멍이 났는지 비가 쏟아 내리지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이 길로 가면 막혔고, 또 저 길로 가도 막혔고요. 그래서 아주 잠깐 동안 쏟아지는 비에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아파트 단지를 나온 상태에서 제 모양은 형편없었지요. 이 상황에서 우산을 사기 위해서 가게에 들어선다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당까지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가 멈춘 상태였거든요. 또한 우산이 있는데, 우산을 사는 것도 낭비인 것 같었고요. 하지만 저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왜 이렇게 아는 분들을 많이 만나는지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제 판단이 틀렸고, 비 오면 가까운 가게에서 우산을 사면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역시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잘못 판단해서 스스로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을 안일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어려움 속에 빠진다는 것이죠.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 말씀을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더욱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곳에 좋은 씨앗을 뿌리십니까?'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곳에서 좋은 씨앗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농부는 좋은 땅을 찾아서, 만약 좋은 땅이 아니라면 자신의 온 힘을 기울여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든 뒤에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농부는 게으른 농부일까요? 귀찮아서 씨앗이 자라지 못하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곳에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비유되는 좋은 씨앗은 올바른 사람의 마음에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고 차별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 씨앗을 어떻게 일구어 나가는가 라는 것이지요. 안일하고 섣부른 생각으로, 또한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내 마음을 길가, 돌밭, 가시덤불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중하게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 나간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내 마음의 밭을 기름지게 하고 풍요롭게 해서 싹틔워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과연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혹시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 내릴 수 없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은 아니겠지요?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합시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윤지종 신부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에모토 마사루가 오랫동안 물의 결정사진을 찍은 것을 소개해 놓은 책입니다. 그에 의하면, 물의 결정은 눈의 결정과 마찬가지로 하나하나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물의 결정은 사람의 말에 반응을 하며 변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유리병에 물을 넣고, 그 물을 향해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 그렇게 해주세요, 너 정말 예뻐 등 따뜻하고 긍정적인 말들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이 아주 아름답고 깨끗하고 잘 정돈된 결정을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조건에서 물을 향해 망할 놈, 짜증나, 죽여 버릴거야, 하면 안돼, 니가 싫어 등 차갑고 부정적인 말들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은 무질서하게 변하거나 파괴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력적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몸이 70퍼센트가 물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사람의 말이 이처럼 중요하고 위력적이라면 하느님 말씀은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는 물을 향해 성경 말씀을 들려주는 실험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어떤 말을 들려주는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깨끗하고 정돈된 결정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의 기쁜 소식이고 사랑과 희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1독서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이루어지고야 마는 가장 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성서를 읽거나 미사에 참여해서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들은 우리들 안에는 지금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이 그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이 우리 삶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기쁘게 살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이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의 말씀이고 사랑과 희망의 말씀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진실로 힘이 있다면, 하느님 말씀을 들은 우리에게는 분명히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우리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물도 사람의 말에 반응하고 변화하는데, 어찌 물구디인 사람이 감히 하느님 말씀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솔직히 우리 중에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무언가를 깨닫고 변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달라지는 기색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태도, 곧 마음의 밭의 상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밭은 어떻습니까? 혹 겸손치 못한 길바닥이거나 묵상하고 성찰하지 않는 돌밭이거나 온갖 세상일과 현실적인 욕심에만 사로잡혀 있는 가시덤불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말씀을 좀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며 적극적으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며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희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살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하여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씨앗과 토양과 열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해도 뚜렷한 결과가 없는 때가 있다. 특별히 '신앙농사'에는 투자 한만큼 거둔다는 등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때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내가 기대하지도 못한 결실이 언젠가는 꼭 맺힌다는 것을 . 다만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의 결실이 맺히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투신이 의미 있음을 믿는다.
뿌린 만큼 거두어 지는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 "심은 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인생사에 있어서 성실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게 됨을 믿게 하는 말인 반면, '한강에 돌 던지기'라든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눈에 보이는 결실이 전혀 없음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없고, 모든 것이 공허해 보이는 경험을 예수님께서도 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적으로 엮은 것이 아니고 비슷한 내용들을 함께 묶어놓은 것이다. 아마 오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하신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은 온 갈릴레아와 이방인 지역까지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지만, 믿고 따르는 사람들보다는 반대자들과 무관심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자신의 말씀을, 그 초대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안에 수많은 결실을 맺는 선의의 사람들도 있음을 동시에 인정하신 것이다.
2.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토양이다.
입시 때가 되면 보통 때보다 자녀들을 위해서 미사를 청하는 신자들이 많아진다. "신부님, 저는 우리 본당 신부님께 미사를 청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또 미사 한대 청하려고 왔습니다."하는 신자들이 가끔 있다. 이들은 미사의 은혜가 오로지 미사를 드리는 신부님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미사뿐 아니라 모든 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그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성사를 청하는 (받는) 사람의 믿음과 준비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얼마나 큰 믿음과 준비로 충분히 통회하며 성사를 보느냐에 따라 그 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의 많고 적음이 결정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도 우리에게 뿌려지는 말씀의 씨앗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토양이다.
어떤 본당신부님이 주일 저녁에 그 날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복음 말씀이 무엇이며 신부님 강론의 요지는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더니, 강론 말씀은 그만 두고라도 낮 미사 때 들었던 복음의 내용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신자는 10명 중 2명뿐이었다고 한다. 대개의 신자들은 몸은 성당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성당 문밖을 나서면 신앙생활은 끝나고 이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서로 겉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말씀을 마음에 모시고,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인은 드물다. 형식적인,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래도 말씀은 선포해야 한다.
길바닥이나 자갈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씨앗이 많더라도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을 돋아 자라게 하며,.....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사 55,10-11). 말씀의 선포에 몸바친 사람들이나 하느님 자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각 개안의 마음의 토양도 끊임없이 회개의 눈물로 적시고, 속죄의 밭갈이를 계속해야겠지만, 더 넓은 밭인 이 사회와 세상의 토양도 바꾸어야 한다. 불의와 착취와 인권유린 그리고 악법과 구조악(構造惡)이 얽힌 자갈밭과 가시덤불 같은 이 세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로마8,21)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밭이 변화되어 새로워 질 때 인간이 사는 이 세상과 물질계도 구원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세상을 새롭게 할 말씀의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랄 세상의 토양을 일구는 일은 세상에 파견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서공석 신부님
예수님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유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즐겨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농부의 행위에 비유하여 복음 선포를 설명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에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같은 복음을 선포하지만, 받아들이는 땅에 따라 실패와 장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는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을 만나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비유를 회상하면서 그들 자신은 과연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인지를 반성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자로 돌아가셨고, 그 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은 그들이 홀로서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그야말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이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복음 선포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뿌렸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노력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무위로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죽음 후 교회라는 별도의 종교 조직으로 독자적 길을 갈 만큼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신 후 제자들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시던 대로, 유대교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차차 그들의 언행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추방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당국이었고, 그 제자들을 내어 쫓는 유대교 회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 공동체는 안식일 다음날, 곧 오늘의 주일에 따로 모여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 대해 회상하고, 그분의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대단히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건물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집회는 그들 중 주거 공간을 여유 있게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서로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신뢰하고 봉사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함께 나눈 바가 오늘 우리 미사의 말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눈 식사가 형식을 갖추어서 오늘 미사의 성찬전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삶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사는 데 필요한 행동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제물봉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노동의 대가와 자기 이웃을 바라보고 그 노동의 대가를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율법과 제물봉헌은 사람들을 단죄하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을 구실로 사람들을 단죄하고, 제관들은 제물봉헌을 핑계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부담이고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을 버리고 단죄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루가 4,19)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여 자기 한 사람 죄인이 되는 불행을 피하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 사로잡힌 이, 눈먼 이, 억눌린 이들”(4,18)을 위해 은혜로운 사람이 되는 데에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은혜로우신 분이기에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은혜로운 실천을 합니다. 그 실천으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루가 6,21-21)들이 행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잔치는 참여한 모든 이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장소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과 함께 나눕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강요당하는 백성은 목자를 잃은 양들과 같은 측은한 군중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며 측은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9,36). 인간의 슬기로움과 똑똑함은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고 풀을 죽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슬기로움과 똑똑함의 산물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셨다”(마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돌아가셨듯이, 초기 신앙 공동체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 앞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들이 뿌리는 말씀의 씨는 좋은 땅을 만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로마 4,18)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은 권위도 아니고 허세도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은혜로우심을 스스로 실천하여 그 신뢰를 자기 삶의 현실로 만듭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사람들이 대면하게 하는 말씀과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과 실천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일하실 것을 비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55,10-1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여,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말씀과 실천을 우리가 뿌리면. 그것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과 다음 주일 전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는 듣기만 하고 그것을 깊이 통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충분치가 못하다. 여기서 사도들은 군중들과는 달리 통찰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마태 13,11). 이것은 사도들의 자세에 대한 보상이다.
복음: 마태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께서는 비유를 먼저 말씀하시고(3-9절) 나중에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18-23절).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있었다”(2절). 예수께서 이렇게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은, 아마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을 더 가짐으로써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배에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팔레스티나 상황에서 사실에 근거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든 좁은 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거친 땅이지만 모두 죽어버리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씨를 뿌렸다.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시고자 주변상황을 들어 설명해주시고 계시다. 이는 그래서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려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역사 속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나라의 구원적 힘은 힘차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이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우선 신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각별한 정성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는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등에 집착되어있을 때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23절)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신학적 통찰력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 말씀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밭에 있는 모든 돌과 잡초 가시덤불을 없애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 이 수고가 없으면 수확은 실패할 것이다. 수확이 실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말씀’을 지체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땅’, 즉 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독서: 이사 55,10-11: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처럼...
제1독서에서도 제2 이사야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지혜나(잠언 8,22; 지혜 7,22) 성령(이사 11,2)처럼 인격화되고 있고 오직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야 돌아오는 사자(使者)에 비유되고 있다. 비와 눈의 의미는 그 ‘말씀’의 풍부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이 야훼의 말씀도 구약에서는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사야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의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위험이 있다.
제2독서: 로마 8,18-23: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모든 만물이 생겨 나온(창세 1장)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18.22-23절).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들에게서 그 말씀이 결실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삶을 통한 결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신앙을 가진 나에게서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실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의 씨앗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밭에 있는 자갈이나, 잡초, 가시덤불 같은 장애가 되는 것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수고’가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 수고가 없이는 결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뿌리내리는데 방해가 되는 세상과 세상의 이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토양으로 준비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 13,8-9).
희 망 별 곡
이재희 신부님
삶에 대한 가치관이 우뚝 서 있어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온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으로 하루를 살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희망을 품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시간입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학살 할 때에 시장에서 한 노인이 빈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사 가세요!"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노인장! 아무것도 팔 것이 없지 않소?" 그러자 노인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는 희망을 팔고 있소. 우리 민족의 꿈과 비전을 팔고 있소. 희망을 사가시면 반드시 희망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희망이 무엇이요 나에게 파시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입니다. 희망!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희망의 시작이요 과정이요 영광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는 예수님 공생활 말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떠나고 당신이 행하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열두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중단해야 하지 않느냐는 절망의 이야기가 들려왔고,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꿈을 말씀하십니다.
씨앗은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반대와 거절을 당함으로써 분명한 실패처럼 비춰지지만 성공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씨앗의 생명력을 질식시키려는 반대 세력들도 있지만(길바닥, 새들, 돌밭, 가시덤불) 경험이 풍부한 농부는 그래도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백배의 열매를 맺는 한톨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은 희망입니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그분께 대한 희망이 있다면 그 절망도 비상을 꿈꾸는 희망을 품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로마 8,24)
"나는 매일 몇 톨씩의 씨앗이라도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때가 되면 누군가는 거두게 될 테니까." 요한 23세 교황 <말씀이 나의 두 손에> 중에서
주님의 옥토에 뿌리를 내려라.
배광하 신부님
돌밭 가시덤불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악마를 쫓아내실 때, 악마들이 정확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악마는 알아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무엇이고 그 일을 행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 일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여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언제 죽느냐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 안에 살기로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같이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빈 껍데기에 불과한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아직 영생의 부활을, 그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이제 막 맺어진 씨앗이 나의 생각과 실천에 따라 뿌려질 밭도 갈리게 됩니다.
하느님을 그저 알아만 보는 것, 내 뜻만을 관철시키는 삶, 평화를 기다리기만 하는 무능하고 게으른 삶, 내가 원하는 바를 기복신앙으로 하느님께 청하기만 하는 믿음, 늘 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할까 전전긍긍하는 일상, 아는 것은 많고 들은 것도 많은데 실천에는 옮기지 않는 무력한 지식, 죽음마저도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이승에서 가꾸어 나가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인생, 하느님 안에서 살지 않고 세속에 얽매여 사는 삶은 모두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말씀의 씨앗이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진 불행한 씨앗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씨앗은 가지고 있지만 결국 구원의 밭으로 가지 못하고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까닭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 14~15).
좋은 땅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 8~9).
이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관한 궁극적인 희망으로 사는 이들에게 세상이 주는 환난과 박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씨앗은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좋은 땅에 뿌려졌기 때문에 뿌리가 튼튼하여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의 뿌리와 토양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새벽 빛이 아닙니다. 당신은 새벽 빛을 기다리는 땅입니다. 당신의 하느님께서 새벽 빛이십니다. 조금 있으면 여명이 밝아오고 좀더 있으면 한낮이 됩니다. 당신은 그 빛을 기다리는 땅입니다. 당신은 손에 분필을 들고 당신을 향해 오는 그 설계사의 분필을 기다리는 흑판입니다.
고통과 어둠에 찌든 당신의 마음이 당신이 벗어난 이 땅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걸지 않도록 하십시오. 눈물이 당신의 메마른 신앙을 촉촉이 적시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참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 앞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에게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밭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저 우리는 그분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씨앗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분께 내어 맡기며 참된 믿음을 가지고 그분 좋은 땅에 내 씨앗이 떨어지도록 기다리거나 섭리에 순명할 줄 몰랐습니다. 그분 말씀의 땅은 모두가 옥토였는데, 내가 밭인 줄 착각하였기에 생에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인간적인 욕망에 쏟아 부었던 온갖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뒤에야 내가 씨앗인 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거름이 촉촉한 옥토였는데 내 씨앗이 세상의 욕심을 향하여 떠돌았던 것입니다.
많은 고집의 착오 속에 다시금 주님께 돌아와 이렇게 고백하는 처량한 탕자가 되었습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로다”(코헬 2, 22~23).
우리는 분명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싹을 키우는 작은 몫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열매를 맺는 삶
송봉모 신부님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하늘나라는 한 농부가 씨를 뿌린 것에 비유됩니다. 여기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전혀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이지만 잠시뿐, 그 말씀으로 인해 어떤 곤란이 생기면 말씀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귀담아들으나,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부귀에 대한 집착으로 말씀을 질식시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편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도 우리 대다수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가리키는 씨앗을 마음 밭에 심고 잘 가꾸어 열매를 맺으려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 정신이 팔려 거름 주는 것과 잡초 없애는 것을 태만히 하였고, 그 결과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바른 곳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원수 마귀가 뒤에서 우리를 헷갈리게 했음을 의미합니다. 다음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맹수조련사가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들을 조련할 때 몽둥이나 총 대신 네 발 달린 의자를 거꾸로 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맹수 앞에서 의자를 돌립니다. 맹수의 눈에는 네 개의 의자다리가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맹수는 네 개의 다리에 초점을 맞추려고 무지 노력하게 됩니다. 이쪽에 맞추고 저쪽에 맞추고 위에 것에 맞추고 아래 것에 맞추고, 그러다 보면 너무 헷갈리면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어 서서히 유약해지고 온순해집니다.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되고, 섬길 수도 없는데, 우리의 초점을 흐려 놓음으로써 두 주인을 섬기도록 만듭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을 품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쭉정이 농사만을 짓도록 만듭니다.
마태오복음 6장 22-23절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눈이 성하면”이라 할 때 “성하다”는 그리스 말로 “하나의 초점을 갖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하나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은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 삶
이기양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지요. 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서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다가 말라죽었으며,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져서 뿌리는 내렸지만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말씀하시지요.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 말씀을, '밭'은 우리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말씀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옥토는 농부의 피와 땀의 결실입니다. 끊임없이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주고 거름을 주는 등 한여름의 피땀이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어느 고고학 팀이 오래된 무덤을 발굴했는데 관 속에서 약 2000여 년 전의 꽃씨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재미삼아 그 꽃씨를 땅에 심어보았는데 한 달이 지나자 놀랍게도 씨에서 싹이 나고 잎이 자라더니 꽃까지도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면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이치를 여실히 증명해 준 사건이었지요. 이는 또 반대로 아무리 좋은 씨라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어떤 본당의 신부님이 주일 저녁 미사가 끝난 후에 무작위로 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복음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바르게 대답한 사람은 20%밖에 안 됐다는 군요. 미사가 끝나고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성당을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미사에 안 나온 사람은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도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께 전화 한 번 해 볼까요?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이 1독서와 2독서 그리고 복음과 강론을 통해 풍성하게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밭이 기름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토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밭은 길바닥이요, 돌밭일 수밖에 없지요.
바로 이 자리에서 오늘 비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끝나고 뭐하지? 왜 이리 덥나? 오늘 저녁에 비가 오려나?'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뿌려지는 말씀의 씨앗은 뿌리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에 비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한 주 동안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 맺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행실이 형편없던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과거의 삶을 고쳐나가려고 애를 썼지요. 그런데 애를 쓰면 쓸수록 주변 사람들은 '당신이 그래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는가?'하며 조롱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전에 사귀던 친구들을 만났는데 친구들은 그를 보자마자 대뜸 조롱 섞인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너 세례 받았다며? 야, 놀랍다. 그래 네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 좀 해봐라."
우물쭈물하며 마땅히 대답을 못하는 그를 친구들은 계속 괴롭혔지요.
"요즘 우리와는 어울리지도 않고 하느님만 찾더니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도 못해? 정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를 대보게. 나도 좀 믿어보게."
한참 후에 남자가 말했습니다.
"나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네. 나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가 무직자로 거리를 떠돌면서 아내와 아이를 몹시 괴롭히면서 살아왔는데 지금은 술도 끊었고 직업도 구했다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지금은 가족들 모두 나를 좋아하고 있다네."
바로 이것이 말씀이 뿌리를 내려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의 모습입니다. 진정 여러분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여러분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십니다.
농부의 희망
이요한 신부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몰이해와 비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난이 답답하고 힘이 빠질 만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농부는 자신이 뿌린 씨가 잘 자라 많은 소출을 거두기를 바라면서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농부의 바람과 달리 어떤 씨들은 길에,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 씨들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안타까웠겠지요. 그럼에도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잘 자라지 못하는 씨들이 있는 반면에, 많은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이 희망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심지어 비난하고 박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들을 귀가 있어 당신의 말씀을 따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십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 당신의 뜻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는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십니다. 이 희망이, 힘든 공생활 걸어가실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이 희망의 힘으로 오늘도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보면 암담한 현실에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자라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 미안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온갖 걱정과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 성당을 나서자마자 그 말씀들을 잊어버리는 못난 내 모습,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린 정치 지도자들, 사랑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에 절망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비록 못난 나 자신이지만 내 안에 분명 좋은 땅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내 안의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뿌린 씨가 때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도 있지만,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하기에 희망을 가집니다. 이 희망으로 내 안에, 이 사회 안에 복음의 씨를, 하느님의 뜻을 뿌립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좋은 마음의 땅과 풍요로운 결실
곽승룡 신부님
예수님은 호숫가 배에 올라서 계십니다.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물가 주변에 서 있습니다. 마치 호숫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무대 위에 계시고, 물가에 서 있는 군중들은 원형 경기장 객석에 있는 듯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복음의 미래를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들어 소개합니다.
씨앗의 미래와 운명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은 분명히 비유입니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인 길가,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잘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요롭게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이렇게 다양한 땅의 환경과 결과(미래)를 말합니다. 한 편에서 실패를, 다른 편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비유는 하느님의 숨겨진 신비들과 하느님 계시의 표현 방법이 밝혀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비유들입니다. 비유는 하느님 나라 신비가 숨겨져 있는 그 형태를 발견하게 도와줍니다. 듣지만 이해 못하고, 쳐다보지만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딘 마음을 가졌으며 회심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씨 뿌리는 사람이나 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어떤 땅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위에 씨가 떨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복음은 열매를 맺는 수확의 전제 조건을 결국 의지적으로 강조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입니다. 어떤가요? 우리 마음의 땅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 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제가 강의를 하거나 강론을 할 때 잘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순서를 재미로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가 제일 잘 받아들이는가?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수련 수녀님들이었습니다.
말을 시작하면 눈이 초롱초롱하고 조금만 웃겨도 까르르 웃습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입에 있는 사탕 빼 먹으려고 하듯 아직 하지 않은 얘기나 하지 않으려 했던 얘기까지 빼먹으려는 듯 내뱉지 않은 말까기 무슨 말일까 기다리고 있다가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즉시 낚아채듯 받아들이고 즉시 이해했다는 표시로 머리를 끄떡끄떡합니다.
수련 수녀님들은 귀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눈, 코, 귀, 입, 머리, 가슴, 전 존재로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다음은 4-50대 어머니들입니다.
들으려는 의지나 태도나 능력이 수련 수녀님들 못지않게 훌륭하고 아멘 하고 맞장구치는 면에서는 수련 수녀님들보다도 훌륭하나 이해력이 수련 수녀님들보다 떨어지고 성긴 체 마냥 들어왔다 금시 빠져 나갑니다.
그래서 수련 수녀님들은 제가 해 준 말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눈에 환히 보이는데 엄마들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 다음은 수련 형제들입니다.
이성적, 구도적인 측면에서는 받아들이는 태도와 능력이 수련 수녀님들이나 어머니들보다 훌륭하나 전 존재적으로 받아들이는 면에서 못 미칩니다.
그래서 제가 해 준 말이 어머니들에게보다는 더 살과 피가 되지만 가슴을 키우는 쪽이라기보다는 머리를 키우는 쪽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서를 매긴다면
20대 청년들,
아이와 청소년들,
할머니들,
중년기 이후 수녀님들의 순서가 되고
마지막으로 남자들이 자리합니다.
남자들은 우선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존재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귀로나마 제대로 듣는 것인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귀로 듣지만 말씀이 마음에 전혀 와 닫지 않는 냉철한 사람,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시건방진 사람,
먹고사는 근심걱정으로
말씀이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는 고단한 사람,
자기생각과 주장 너무 강하여 어떤 말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완고한 사람,
가르치려 들기에 전혀 들을 구석이 없는 교만한 사람들이 보통의 중년 남자들이고 중년 남자 중에서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더 그러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특별히 나누고 싶은 것은 나이 계층을 불문하고 어떤 말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거나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즉 반응체계가 고장 난 사람에 대해서입니다.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상처주고 고통을 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아예 아무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말, '보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는 말이 바로 이 뜻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오늘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듣고 싶은 말에만 반응을 하는 장애도 있습니다.
위로, 칭찬, 축복과 같은 말에는 솔깃하지만 질책, 비난, 저주와 같은 말은 들은 바 없습니다..
가려서 듣는 사람이 아예 듣지 않는 사람보다 더 괜찮은 사람들일 듯하지만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는다는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듣고 싶은 말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박상대 신부님
주지하다시피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일상 가르침과 행적을 묵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철학과 그 정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마지막 수난, 죽음, 부활사건을 뺀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대략 대여섯 개의 군락으로 엮었다. 이를 크게는 다섯 개의 설교집성문과 한 개의 기적사화집성문으로 나눌 수 있다. 마태오는 우선 굵직한 10가지 기적사화를 8-9장에 모아 놓았고, ① 5-7장에는 산상설교를, ② 10장에는 파견설교를, ③ 13장에는 비유설교를, ④ 18장에는 공동체설교를, ⑤ 24-25장에는 종말심판설교를 모아 엮어 놓았다. 오늘 복음은 세 번째 설교집성문인 비유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데, 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② 가라지의 비유, ③ 겨자씨의 비유,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 ⑥ 진주의 비유, ⑦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가 집성한 비유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모두 하느님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비유설교에 등장하는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나라의 특성과 성격을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알려준다. 비유설교의 부차적인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나라의 지상 선포자(宣布者)요 구현자(具現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느님나라의 신비(神秘)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란 말 그대로 신비(神秘, mystery)이다. 신비란 인간의 이성적 이론(理論)과 인식(認識)을 초월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주려 하신다. 그러나 신비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도 지식도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자. 여기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이다.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씨가 뿌려진 장소와 그 결과를 비교한다면 비유자체는 쉽게 이해된다. 즉, 길바닥 -> 새의 밥, 돌밭 -> 말라죽음, 가시덤불 -> 숨 막혀 죽음, 좋은 땅 ->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란 표현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보조관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면에 나타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다른 어떤 지식이나 슬기로움이라기보다는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알아들을 귀’(9절)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머리로 깨달아 마음에 심는다면 복음은 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 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을 열매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땅위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할 씨앗이기 때문이며,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는 텃밭임을 명심해야 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예수님은 나자렛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농사도 짓고 양과 염소도 키우는 평범한 시골 생활에 익숙해서인지, 그분 말씀에는 이런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이 배여 있습니다. 특히 하늘나라를 소개하실 때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야 비유의 심오한 뜻이 생동감 있게 살아나 청중들이 귀를 기울일 테니까요. 예수님께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내면에서 뭔가를 움직이게 하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배에 앉아 말씀하시고 군중은 물가에서 말씀을 경청합니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2절) 처음에는 제자들이 따르고 그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공생활 초반에 인기가 높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에 경탄한 나머지 여기까지 왔지만 모두가 그분한테서 사랑과 정의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뿌린 말씀의 씨앗은 그들 마음의 밭 어딘가에 떨어질 것입니다. 기름진 밭일지 삭막한 가시밭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ㄴ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씨를 뿌리고 나서 땅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뿌린 씨는 좋은 땅은 물론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도 떨어집니다. 이런 식의 씨 뿌리기는 태반이 헛수고입니다. 새들이 와서 쪼아 먹거나 해가 솟아오르자 말라버리고 무성한 가시덤불이 숨 막히게 합니다. 그러나 수확은 훌륭합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절) 겉보기에는 이러한 농사법이 낭비로 보이지만 수확의 결과는 낭비를 능가합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결실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열매를 맺기만 한다면 하나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11절)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 비유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비유는 알려진 것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아듣게 도와줍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11절)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이해하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식별력이 주어집니다. 그분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절) 예수님은 한 번씩 비정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돈이라는 현실을 하늘나라의 신비를 일깨우는 지식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곧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는 더 넉넉해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더 말씀에 굶주려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13절) 저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어려운 말이어서가 아니라 자기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14ㄴ-15ㄱ절; 이사 6,9) 신앙의 귀와 눈을 열어준 예수님의 기적을 만방에 알릴지라도 정작 자신은 하늘나라의 말씀에 마음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 아래 있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16절)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18절) 앞의 비유 속 상징을 하나하나 우의적으로 해석해 주십니다. 씨가 마르코복음에서 ‘말씀’이고, 루카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면,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의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이러한 소소한 일상에서 따온 표상과 연결됩니다. 첫 말씀에서 씨 뿌리는 농부의 자세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씨앗과 씨앗을 받아들이는 토양에 중점을 둡니다.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은 말씀을 전하는 데 따르는 수많은 난관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듣기는 했으나 하늘나라의 깊은 의미를 자신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쉽게 악의 논리에 넘어가 말씀의 씨앗을 빼앗깁니다. 기쁘게 말씀을 받아들였다 해도 말씀이 돌밭에 떨어져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환난이나 박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은 뿌리칠 수 없는 세상 이익의 달콤함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누리게 될 하늘나라의 결실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다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23ㄴ절) 깨닫는 것,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마음을 열고 따르는 것입니다. 온갖 장애물에도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듯이 그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말씀의 열매를 맺습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결과는 놀라울 만큼 훌륭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실패만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결말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대에 적극 응답하라”
허성 신부님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다른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서 싹이 돋아나기는 했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솟아 오르자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고 또 다른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가시덤불이 우거지자 그 숲이 막혀 버렸지? 그러나 또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배, 어떤 것은 삼십배의 열매를 맺었으니 귀가 있는 사람은 새겨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당시 이스라엘의 농경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밭을 갈고 나서 풀과 돌들을 골라내고 씨를 뿌리고 흙으로 씨를 덮지만은 그 당시 그곳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고 풀과 돌을 골라내었으므로 우리와는 완전히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길가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본래는 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길이 있어도 빨리 가기 위해 질러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같은 곳으로 질러가다 보면 자연히 밭이 길같이 굳어져 밭을 갈아도 쟁기가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길같이 남아있는 곳이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밭을 간 다음에 작은 돌을 골라낼 수 있지만 깊이 박힌 큰 돌은 골라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위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릴 수 없어 햇볕에 마를 수 밖에 없다. 가시덤불은 일반적으로 뿌리가 깊고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밭을 간 다음에 추려낸다 하더라도 일부 남아 있는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떨어진 씨앗에서 새싹이 나서 곡식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잘 자라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비록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셨건만 주님의 초대 보다는 엉뚱한 곳에 더 관심과 집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차려놓은 잔치상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세례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수계 신자들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 중에는 바쁘다는 이유가 가장 많다. 바쁘다는 내용 중에는 정말 생계유지를 위한 일과 직장 때문에 바쁜 사람들도 많지만, 너무 잘 먹고 편안한 생활을 한 까닭에 불어난 체중을 주체할 수 없어 돈주고 살 빼러다니느라고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주5일 근무제가 늘어나면서 바쁜 사람들은 더 늘어나서 성당은 점점 더 썰렁해지고 있다.
주일학교 사정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부모들 조차도 주일학교 보다는 학원에 비중을 더 두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주일학교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의 신앙에 정성을 기울여도 장성한 다음에 신앙이 식는 경우가 많은데 어려서 부터 그 모양으로 방치해 버린다면 자녀들이 성장한 다음에 과연 신앙의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구미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가톨릭국가에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톨릭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옛날의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들은 기도하는 사람들보다는 관광객들이 더 많은 것을 볼때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 많은 신자들 중에는 일생에 세번만 성당에 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첫번째는 태어난 후에 부모의 품에 안겨 세례 받으러 가고, 두번째는 애인과 함께 결혼하러 가고, 마지막에는 죽은 다음에 관에 담겨져 다른 사람들 손에 운구되어 장례미사를 치르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웃은 적이 있다.
그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우선순위가 저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사업과 영광을 빙자해 자기의 사업과 영광을 찾는데 더 심혈을 기울이는 이들도 있다.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에 음식 시중을 드는데 정신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님의 발치에 한가롭게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던 동생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자기 동생을 시켜 자기의 일을 거들게 해달라는 청을 드렸을 때 예수님은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분주하다만은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서른 번의 가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려움에 처한 여자청소년들을 위해 사목하시는 존경하는 수녀님께서 체험하신 일입니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엄청 많은 상처를 받아온 아이였겠지요. 아무리 기를 써도 그 상처가,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필요 했던가 봅니다. 아이는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을 거듭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악영향, 가출할 때 마다 파생되는 심각한 문제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 성가시기도 할텐데, 수녀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가출한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수녀님, 저예요.”
“응, 너구나. 지금 어디니?”
“**예요.”
“거리 가만 있거라. 내가 바로 나갈게.”
수녀님께서는 아이에게 왜 나갔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왜 거기 있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데려오는 것,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는 것, 그것만 하십니다. 수녀님은 어떤 면에서 씨 뿌리는 농부이십니다. 살아계신 돈보스코이십니다.
농사 중에 가장 큰 농사, 가장 중요한 농사는 사람농사입니다. 언제나 물이 새는 것 같습니다. 무의미한 투자 같습니다. 도저히 싹이 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람농사의 특징은 그 속도가 아주 느리다는 것입니다. 아주 천천히 씨앗이 발아됩니다. 싹이 올라오는 속도가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립니다. 성장도 어찌 그리 더딘지요. 그래서 사람농사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저희 수도원 뒷마당에는 꽤 넓은 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그 밭은 당시 저희 아이들과 수사님들 삶의 일부였습니다. 이른 봄부터 저희는 그곳에 매달렸지요.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농약도 치고 잡초도 뽑으면서 땀도 많이 흘렸지요. 그 오랜 투자 끝에 가을이 오면 저희 모두는 얼마나 흐뭇해했는지 모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던 탐스런 가을의 결실들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정말 신기해했지요.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습니다. 봄에는 우리들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는 씨앗 하나, 키가 한 뼘도 되지 않던 가냘픈 묘목 하나가 자라고 또 자라서 마침내 아이들의 키를 넘어섰습니다. 가을이 되면 뒷마당은 얼마나 풍성했는지, 그 그늘에서 아이들은 숨바꼭질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씨앗의 수백 배 수천 배 크기로 성장한 가지들에서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열매들이 수도 없이 계속 결실을 맺었습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변화는 씨 뿌리는 사람들-부모나 교사-들의 인내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아무리 부족해보이고, 아무리 맛이 갔다 하더라도 수확하실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꾸준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의 변화에 가장 좋은 밑거름입니다.
풍성한 인생의 결실을 위해 기나긴 겨울날들을 잘 견딜 필요가 있겠습니다. 봄날의 투자도 필요하며, 여름날의 땀은 더욱 중요합니다. 풍성한 결실은 좋은 생각이나 계획만으로는 불가능하지요. 하루 온종일 빈둥거리며 공상만 하면서 지내다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회색빛 가을뿐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릴 곳을 달린 바오로 사도의 황혼이 그리도 아름다웠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잘 견뎌낸 우리의 가을 역시 가슴 설레고 흐뭇한 가을이 될 것입니다.
고유석 신부님
만약 내 아이가 밖에서 얻어맞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의 모습이 나타나리라 여겨집니다.
1) 장 중심(의지 중심)
힘없이 맞고서 울며 들어온 아이에게 우선 화가 난다. 그리고 거칠게 아이 손목을 잡고 자기 아이를 울린 상대 아이를 쫓아가 혼을 내주는 행동파.
2) 가슴 중심(감성 중심)
우는 아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저리고 아프다. 우선 억울하고 분한 느낌을 가진 아이를 품에 안아주면서 달랜다.
3) 머리 중심(이성 중심)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서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보다 먼저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눈물 뚝!”하고 말한 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이 글을 읽는 님께서는 어떤 모습이십니까? 우리는 태중에서부터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그리고 장년 시절을 보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또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성(理性)과 감성(感性) 그리고 의지(意志)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면서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드러냅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복음말씀을 들었을 때 각 사람의 반응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말씀에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토양이 모두가 같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말씀을 해석하고, 분석하기보다 선포된 주님 말씀을 굳건히 믿고 묵묵히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요, 또 다른 사람은 “오! 주님 오직 당신만이 나의 구세주요, 나의 희망이십니다!”하며 행동보다는 감성적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도 할것입니다. 끝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보다, 마음으로 주님과 통교하기보다 “왜, 어떤 상황이었기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건네셨을까?”하며 학문적·이론적으로 다가서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조화롭게 균형 잡을 때 가능해 지리라 여겨집니다.
신앙의 여정 안에서 공부하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을 함께 만들어 가기를 청해봅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이형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믿음의 씨를 어떻게 꽃피워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로 매일의 삶을 기도와 희생, 베푸는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선물을 잘 키워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선물로 받은 몇 개의 작은 화분이 있습니다. 그냥 물만 주면 잘 자라는 줄 알았습니다. 물을 자주 주면 안 되고 화분의 흙이 마를 때쯤 물을 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자라지 않고 모양도 이상하게 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또 물을 주는 것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방에 두었을 때는 가끔 물이라도 주면서 신경을 썼는데 바깥에 두면서는 신경도 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화분의 식물을 가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의 씨앗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을 때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합니다. 관심과 노력 없이는 꽃을 피울 수 없고 시들어서 보기 흉한 모습만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믿음의 씨앗을 키워나가는 것은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의 기도와 희생, 봉사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물만 주고 알아서 크라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강하게 키운다는 것도 어쩌면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일미사만 나온다고 우리의 믿음이 커지지는 않습니다. 또 마음으로 기도드리지 못하고 입으로만 기도드린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씨앗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음의 씨앗에 사랑을 통해서 빛을 주고, 기도와 희생, 봉사를 통해서 물과 거름을 주어 꽃을 피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또 하나의 화분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미 예쁘게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또 다시다짐을 합니다. 잘 키워보겠다고. 그동안 받았던 것들과 함께 잘 가꾸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