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던 날
소설을 나흘 앞둔 십일월 셋째 토요일이다. 올가을은 이상 고온이라 할 수 있을 만치 서늘한 기온을 보이질 않아 남녘에서는 며칠 전에야 무서리가 내렸지 싶다. 그간 기온이 높고 일교차가 크지 않아 거리 가로수나 시야에 들어온 근교 산자락 단풍은 곱게 물들지 않는 듯했다. 그제 저녁에 겨울을 재촉한 비가 내리더니 간밤에 기온이 곤두박질쳐 새벽은 빙점 아래로 내려갔다.
날이 밝아와 베란다 바깥을 보니 새벽에 첫눈이라 하기 미미한 적설량이어도 눈발이 날려 쌀가루를 뿌려 놓은 듯했다. 눈이 귀한 우리 지역에서 이만큼 설경도 어딘가 싶어 베란다 창으로 다가가 정병산 산세와 아파트단지와 인접한 중학교 교정을 살짝 덮은 눈을 폰 카레라 앵글에 담았다. 아침 식후 어제 가려고 하다가 미뤄둔 도서관을 가려고 업무 시작에 맞춰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바깥을 나서니 주차장의 차량 지붕은 하얀 눈이 덮여 연방 녹는 중이었다. 남녘에서 기상 기록상 남은 첫눈으로 비교적 이른 십일월 중순 강설이었다. 하루 중 기온이 최저점을 찍는 새벽녘 날린 눈발이 하나도 녹거나 밟히지 않고 모두 고스란히 쌓여 짧은 시간이나마 설경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뜨면서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 시내 도로는 빙판이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외동반림로 반송 소하천을 따라 걸어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관통해 교육단지 전문계 공고를 지나 도서관에 닿았다. 본관에 딸린 별관 책담으로 들어 2층 열람실로 올라갔다. 가끔 내가 들리면 그 시각은 업무 개시와 같아 지정석이나 마찬가지인 창가의 자리를 먼저 차지했다. 창밖 1층 뜰로 내려다보니 북향 응달이라 잔디밭과 정원에는 눈이 보얗게 쌓여 있었다.
그동안 집으로 빌려 갔던 책 가운데 ‘조선 선비의 산수 기행’은 못다 읽어 아침나절 도서관에서 마저 읽고 반납 처리 예정이다. 휴대폰은 진동으로 해두고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우리나라 명산을 찾아 한문으로 남긴 기행문을 한글로 풀어놓은 책을 펼쳤다. 성리학자 주세붕과 이황이 남긴 기행문도 봤고 삼수갑산이나 제주도로 유배 간 정객의 백두산이나 한라산 등정기도 읽었다.
분단 상황이라 백두산은 중국으로 우회 등정이 가능하고, 금강산으로는 한때 방문 기회가 주어졌으나 지금은 오를 수 없는 처지다. 나는 그나마 폭설이 파묻힌 금강산은 어떤 계기 다녀와 호란 충신 김상헌 증손 창흡이 남긴 발자국을 조금이나마 더듬을 수 있었다. 한강 정구는 청량산 열두 봉우리를 순례하면서 ‘근사록’이나 ‘운곡기’를 가져가 산행 중 읽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점심때가 되어 휴게실로 가 가져간 고구마와 컵라면으로 한 끼 때웠다. 구내식당이 없는 휴게실에는 어린아이와 동행한 젊은 부모들에게 마음속으로 성원과 격려를 보냈다. 컴퓨터 게임이나 텔레비전 화면 앞이 아닌 도서관에서 책과 보내는 시간이 더없는 영양가 만점 시간 활용이었다. 나이 지긋이 들어 보인 중년 부부가 간식과 차를 마셔 아름다운 황혼으로 부러움을 살 만했다.
휴게실에서 열람실로 돌아와 오전이 읽은 책은 반납하고 서가에서 새로운 책을 골라냈다. 도서관을 찾을 때마다 부모님 손을 끌고 완구점을 찾아간 아이가 갖고 싶은 장난감이 많아 뭘 고를지 몰라 설레는 기분과 마찬가지다. 이극로 전집 외 몇 권을 가려 놓고 이극로 선생이 월북 전 남쪽 행적에 대해 살펴보는 중 지기로부터 뵙자는 연락이 와 휴게실로 가 차담을 나누다 왔다.
열람실로 와 책장을 넘기는데 1층 공연장에서는 뮤지컬 배우가 방문해 가창력을 뽐내 다수 청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오후에 도서관을 찾아온 지기와 귀가 중, 집 근처 카페에서 꽃대감 친구와 커피잔을 앞에 두고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다 집으로 왔다. 현관 앞에 울산 친구가 부쳐 준 고성 하일 자란만 홍가리비 놓여 있었다. 김이 서리게 익혔더니 식감이 부드럽고 짭조름했다. 2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