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귀여워요
오늘도 지각이다.
시계바늘이 열시를 가리키고
뻐꾸기 녀석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으므로
가게에 도착하면 오늘도
정확히 십분을 늦게 될 것이다.
채연과 함께 아침밥을 먹은 것이
핑계라면 핑계였다.
퇴근해서 들어가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어도
삼일에 한번 꼴로는 늦잠을 자던 녀석이
다른 동네까지 가서
게다가 아침밥마저 먹고 들어왔으니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평균취침시간을 훨씬 넘겨버린 후였다.
더군다나
배가 부른 채로 누워 버리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므로
조금이라도 배를 꺼트리기 위해
모닝카트라이더를 즐긴 것이 실수였다.
그때부터 운전을 4시간이나 했으니;
야간근무의 피로와 장거리운행의 피로가 겹쳐
제 시간에 일어날 리가 만무했다.
지각도 습관이라면 습관인지라
이제는 경림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라도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정하고 침착하게도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댈까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니나다를까
테이블을 닦는데 쓰는 걸레가
쐐액-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온다.
겨우 걸레 따위에 맞아줄 내가 아니다.
이래봬도 운동신경을 꽤나 있는 편이므로
빛의 속도로 날아오는 걸레를
비호같은 몸동작으로 잽싸게 피한다.
두 번째, 세 번째까지 피하고 나서야
몬스터가 카운터에서 서서히 일어선다.
“일루 와.”
“거기서 말해.”
“이리 오라고.”
“그냥 거기서 말하라니까.”
난 바보가 아니다.
말못하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분명 저 여자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것이다.
내가 문 앞에서 끝까지 버티자
경림은 휴우-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카운터에 앉는다.
“오늘은 또 왜?”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어. 그 안에 갇혀 있다가 겨우 나온거야.”
“......”
“......”
웬일로 경림은 걸고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제법 그럴싸한 핑계를 댄 건가.
“엘리베이터는 왜 탔는데?”
“응?”
“니네 집 2층이라며. 2층 살면서 엘리베이터는 왜 탔냐고.”
“......”
“......”
“...한번 타 보고 싶었어.”
역시 이 여자는 굉장하다.
우리 집이 2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나에 대한 뒷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졌구나.
그나저나 니네 집이라니.
이제 아주 나를 장기판의 졸로 보는구나.
내가 두 살이나 많은데.
“난 갈테니까 인수인계는 니가 혼자 알아서 하시지. 늦게 온 책임으로.”
“그러지 뭐.”
다행이다.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거구나.
매일 늦게 오니까 이제 별로 화도 안낸다.
그건 그렇고
이게 또 반말이구나.
늦은 건 늦은 거고
그래도 예의를 갖출 건 갖춰야지.
“야, 아무리 내가 잘못했기로 오빠한테 너가 뭐냐 너가.”
“그래서?”
“한번만 더 그랬다간 봐라.”
오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도 꽤나 강해 보인다.
역시 사람은 성장하기 나름이다.
“어쩔 건데?”
“뭐?”
“한번만 더 그러면 어쩔 거냐고.”
“......”
“......”
“...아니...뭐...꼭 어쩌겠다는 건 아니고...”
아직 쫌 덜 성장했구나;
나는 왜 이렇게 비굴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학창시절부터 그 흔한 쌈박질 한번
해본 적이 없으니.
“사장님은 옆에 ‘넷존’ 갔으니까 좀 있으면 올거야.”
‘넷존’이라면
옆 건물에 있는 피씨방이다.
그집 사장은 우리 사장과 꽤나 친하다.
“응? 아 그래? 근데 그건 왜?”
“사장 어디 갔냐고 물어볼 거잖아.”
“응.”
겨우 한달 반 정도,
그것도 교대타임에 잠깐씩만 봤을 뿐인데
이 여자는 나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 행동패턴이 단순한 탓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역시나 무서운 여자다.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우리 부모님과
군대 시절 우리 중대 행정보급관밖에 없다.
야속하게도
경림은 진짜로 퇴근해버린다.
인수인계라는 건
경림이 출근한 시간부터 교대한 시간까지
매출액을 계산해서 금고 안의 돈과 맞춰보는 건데
이게 상당히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다.
특히나 산수에 약한 나로서는
하루 업무 중에서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이 돈계산 하는 일이 제일 싫다.
게다가
펑크가 났을 경우
순전히 내 돈으로 메꿔넣어야 하니
피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이걸 나한테 떠넘기고 가버린 것은
결국 펑크난건 니가 알아서 메꾸라는 뜻이다.
하긴 뭐
지금까지 경림이 펑크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긴 하지만.
컴퓨터로 오늘 매출액을 집계하고
금고의 지폐를 세고 나서
동전을 세기 위해
카운터 위에다 촤르르 쏟아부었다.
오백원 짜리는 오백원 짜리대로
백원 짜리는 백원 짜리대로
한개 두개 열심히 세고 있으려니
동전 위로 무언가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
그녀들이 왔다.
“안녕하세요 재석씨?”
“아...네...아 안녕하세요.”
겨우 아침밥 한끼 같이 먹었을 뿐인데...
채연의 태도는 지금까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다.
미소를 띠면서 이토록 밝게 인사해줄 줄이야.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이만원을 내밀고는
이천원을 돌려받고 자리로 걸어간다.
귀염녀와 볼륨녀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다.
채연과 함께 아침밥을 먹은 것은
이미 그녀가 다 얘기했을려나.
그나저나...
이 동전들
다시 처음부터 세야 되겠구나;
역시나 새대가리인지라
그녀들의 얼굴을 보고 나니
어디까지 세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할수없이 오백원짜리부터 다시 세기 시작한다.
오백원짜리는 총 마흔 두 개니까 이만천원.
자, 이번엔 백원짜리 하나 둘 셋...
별안간
무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한 무리의 저글링이 카운터를 습격한다.
“아저씨! 열시 넘었는데 왜 말 안해줘요!”
“엄마가 열시까지 오라 그랬단 말이에요.”
“아저씨 왜 우리 안 내보내요!”
나 아저씨 아닌데 이새끼들;
늦게온 탓에 애들을 보내야 한다는걸
깜박 잊고 있었다.
십분이나 늦었으니
당연히 경림이 다 보냈을줄 알았지.
얼핏 보기에도 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계산을 하고
고사리 손에 쥔 천원짜리와 동전을 내민다.
그 사이에 핫바를 줏어먹고
동전을 한번 더 던져주는 녀석들도 있다.
순식간에 카운터는 초토화됐다.
그것보다 문제는...
다시 첨부터 세야 되잖아 씨발;
이번에는 지폐도 다시 세야 된다.
아 나 이거 되게 싫어하는데
또 해야 되잖아;
수십 분이 걸려서야 간신히 계산을 끝냈다.
다행히도 펑크난 것은 없다.
역시 성실하게 생긴 경림은
일처리도 완벽하구나.
카운터에서 일어나서
가게 안을 둘러보니
애들이 머물다 간 자리들이
아주 난장판이 되어 있다.
이래서 애들이 싫다.
경림은 매일같이 이 녀석들을
도대체 어떻게 상대하고 있는 걸까.
꼬마들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카운터로 돌아와서 잠깐 쉬려니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넷존’의 사장도 함께다.
“뭐 이상없냐?”
“예. 별일 없어요.”
특별한 일 없다는 소리에
금고를 한번 열어보고
오늘 손님 수를 확인한 다음
옆 피씨방의 사장과 함께 다시 나갈 태세다.
“나 저기 건너편에 ‘블랙홀’에 갔다올 테니까 가게 잘 보고 있어라.”
“예. 다녀오십쇼.”
‘블랙홀’은 길 건너편에 있는 피씨방 이름.
오늘 각 겜방 사장들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요금 문제인 것 같다.
시간당 팔백 원이던 요금을
하루아침에 천원으로 올렸으니
손님들이 급감할 수밖에.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요금을 내리겠구나.
사장이 나가고 나니
다시 한번 긴장이 풀린다.
오늘은 생각보다 손님이 많다.
어느 온라인게임 길드에서
정모라도 하는 듯하다.
처음 보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두 정장을 입은 채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보아하니 퇴근을 하고는 바로 모인 듯.
열두시가 가까워지자
길드원들 모두가 일어선다.
평일이니 내일도 출근해야할 터.
계산은 한사람이 한다.
길드 마스터쯤 되나 보다.
길드원들이 나가고 나니
피씨방 안은 썰렁해졌다.
자리를 정리하고 카운터로 돌아와 티비를 켠다.
별로 볼 것은 없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 채널을 돌린다.
한가할 때의 피씨방은 심심하다.
[심심해요]
“또로롱” 소리와 함께
메인컴퓨터에 쪽지가 뜬다.
심심해요? 무슨 소리지?
컴퓨터 번호와 좌석을 확인해보니
그녀들이 앉아 있는 곳이다.
다름아닌 채연이다.
어...어쩌라는 거지?
놀아달라는 건가?
다시 한번 맑은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쪽지가 뜬다.
[게임 가르쳐줘요]
아아
오늘 아침의 그 얘기구나.
그러고보니
어떤 게임을 권해야할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사실 나조차도 게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므로.
티비를 끄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그녀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막막하지만
그렇다고 쌩깔수는 없는 거니까.
또한
귀염녀의 화가 풀렸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그녀들의 자리로 다가가자
채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본다.
지금까지 생각도 안해봤지만
그러고보니 채연은
셋 중에서도 항상 가운데에 앉아 있다.
채연을 중심으로 왼쪽은 귀염녀가,
오른쪽에는 볼륨녀가 앉는다.
“요즘 재미있는 게임 뭐가 있어요?”
“아...어떤 종류로요?”
“뭐...아무거나...쉬운 걸로요.”
채연과 대화를 시작하자
그제서야 귀염녀와 볼륨녀도 이쪽을 돌아본다.
귀염녀는 딱히 화가 난 표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표정도 아니다.
그냥 예전과 같은 무표정 그대로다.
“이왕이면 셋이 같이 할 수 있는 걸로 가르쳐줘요. 혼자 하는거 말고.”
“아...네...음...”
사실
어떤 게임을 권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 또한 게임을 하질 않으니.
내가 하는 거라고는 카트라이더밖에 없는데...
한번...말이나 해볼까?
“음...저...혹시 카트라이더라고 아세요?”
“뭐예요 그게? 게임은 하나도 몰라요.”
“아 그러니까...자동차 경주하는 게임인데...”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진 못하겠다.
접속하는 순간 애기들 게임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
“님하 이거 내가 젤 좋아하는 게임이삼. 조낸 재밌으셈.”
라고 하자니
이십사년간 쌓아온 자존심이 허락칠 않는다;
“쉬워요?”
“아 네...애들이 많이 하는 거라 쉬워요.”
“애들이요? 에이, 되게 유치한 게임 아니에요?
“아뇨. 이거 되게 재미있는 거예요!”
아뿔싸.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
간접적으로나마 내가 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광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그녀들이 직접 게임을 해보고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얼마나 찌질이처럼 보일까.
채연은 피식 웃더니
다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한번 해줘봐요. 얼마나 재미있나.”
“아...네...네.”
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그녀가 쥐고 있던 마우스를 넘겨받아
바탕화면에 있는 카트라이더에 접속한다.
우선은 내 아이디를 입력하고 들어간다.
일단은 보여만 주는 것이므로.
접속을 하고 내 캐릭터가 뜨자
옆에 있던 귀염녀가
갑자기 와핫-
하고 웃음이 터진다.
“아이 귀여워.”
내 디지니를 보면서
연신 싱글벙글하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그러는 그녀가 더 귀엽다.
동시에 풉-
하며 채연도 웃음을 터뜨린다.
“아하핫, 얘는 이름도 귀엽네요. 쿡쿡.”
아차.
그러고보니 내 대화명이
[귀염둥이재석]
......
......
...죽어버릴까.
일요일은 쉽니다.
12시만넘으면 글보려고 새로고침 5초마다 누른다는 ..;
첫댓글 ㅋㅋ 엑스지님 하고 욱쓰님 덕분에 또 잼있는 글 읽고 갑니다..god!
14편은 언제 올라오나요??
이거 디따 잼나요~~ ^^ 감사합니다~~
14편 언제 나오나요? 오늘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는뎅.... 이거 완전 중독입니다...ㅋㅋ
이거 어디서 퍼오는거죠 ㅡㅡ;; 담얘기 무지하게 궁금하네요 ㅠㅠ;;
매일(평일저녁)늦은12시이후에 올라옵니다..이거 기다리시는분 엄~청많아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