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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앞에 선 바울
행 22:30-23:11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2:30-23:11 / [의회 앞에 선 바울] 이튿날 파견대장은 바울을 묶었던 사슬을 풀고 대제사장들에게 유대인 의회를 소집하도록 명령하였다. 바울을 거기에 데리고 나가서 그 소동의 원인을 알아보려는 심산이었다. 1) 바울은 의회원들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말을 시작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2)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3) 바울이 그에게 소리쳤다. `이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여! 회칠한 돼지우리와 같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나를 치라고 명령하면서 당신 스스로 이렇게 율법을 어기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놈의 재판이오?' 4 바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대제사장에게 그런 언사가 어디 있소?' 하고 나무라자 5) 바울이 말하였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은 몰랐습니다. ㄱ) `네 백성의 지도자들을 욕하지 말라'고 성경에 씌어 있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ㄱ. 출22:28) 6) 그러고 나서 바울은 의회 안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두 파가 있는 것을 알고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조상 대대로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서 재판을 받는 것은 단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7) 이 말을 듣자 의회는 둘로 갈라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8) 사두개파는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고 영도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9) 의회가 크게 소란해졌다. 그때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은 나서서 바울이 다 옳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어떤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 모양입니다.' 10) 소란은 점점 더 커지고 양편 사람들은 서로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당기며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 결국 파견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죽을까 염려하여 군인들에게 그를 빼내어 병영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바울아, 염려하지 말라, 네가 여기 이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전하지만 전도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바울과 대제사장의 충돌(22:30-23:5) 천부장 루시아는 유대의 사법기관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바울을 공회 앞에 세웁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입을 떼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바울은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대응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재판을 받기 전에 처벌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신 25:1-2). 이에 바울의 대응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라는 율법(출 22:28)에 근거하여 자신의 다소 감정적이었던 대응을 거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는 바울의 말은 예언이 되어 아나니아는 유대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친로마파로 낙인 찍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바울의 영리함(6-9) 바울은 영리한 방법으로 공회를 분열시킵니다. 공회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나뉜 것을 인지한 바울은 두 파의 오랜 논쟁거리를 쟁점화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과 내세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힌 후 자신이 심문을 받는 이유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공회 내부에서 부활과 내세를 믿는 바리새파와 믿지 않는 사두개파가 서로 갈라져 다툼으로써 큰 소란이 일어납니다. 급기야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이 일어나 “혹 천사가 그(바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며 바울을 옹호합니다.
담대하라(10-11) 두 파의 큰 분쟁으로 바울의 안전을 염려한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피신시킵니다. 바울의 몸은 안전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심한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주님은 그날 밤 패배의식에 빠진 바울을 찾아와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방문은 시기적절하였습니다. 다음날 40명의 결사대가 바울의 목숨을 노리지만 바울은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낙심한 바울을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종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적용: 주님은 바울에게 왜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사명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사명은 전도하는 것이며, 결과는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의 대역은 80-2만khz라고 합니다.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소리는 아무리 존재해도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은 육체의 오감과 육감의 한계에 제한을 받는데, 특히 영적인 세계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감각이 있어도 감지하지 못하는 극 초월대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악의 수준마저도 초월하십니다. 그 위대하신 영광은 친히 옷소매를 들어, 가려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어쩌면 녹아버리고 해체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범접할 수 없고, 인식할 수조차 없는 그 심대한 차원에 계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찬양과 경배입니다.
호크마 주석
=====22:30
결박을 풀고...온 공회를 모으고 -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심문할 수 있었으므로 고소자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바울을 심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원인 규명을 해야 했고 또 그 문제가 종교적인 것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이다. 이것은 천부장이 바울 사건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흥분된 군중에 의한 여론 재판을 피하여 그래도 유대 민족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사실을 규명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상 산헤드린은 바울을 적대하고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무리들이 가득한 반(反) 기독교 집단이었고 거기에서의 심리(審理) 결과가 바울에게 불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지만 천부장이 그것까지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바울이 산헤드린에 서게됨으로써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23 장).
=====23:1
공회를 주목하여 - 공회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바울에게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인지아니면 먼저 공의회회원들로부터 바울에 대한 비난과 고소가 있은 다음 바울에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본절에서의 바울의 변론 직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과 그것에 대하여 바울이 즉각 강경(强勁)하게 맞서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변론에 앞서 그에 대한 여러가지고소가(21:28)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 바울에게로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누가가 유대인들의 고소장면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Howard Marshall). 바울에 대한 고소는 그가 율법과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21:28). 여하튼 바울은 공의회의 증언대에 섰고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 앞에조금도 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변론에 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주목하여'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테니사스'(* )는 '노려보며'의 의미를 지니며 담대하게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바울의 이런 담대하고 강한 태도는 3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형제들아 - 22:1의 '부형들'과는 또다른 표현인 '형제들'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공의회와 같은 공식석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반적인 인사말이었다(Lenski). 공의회에서는 회원들을 존중해 주는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4:8).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바울이 이런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두가지의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이 모임이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모임이었으리라는 추측이나 설득력이 약하다. 둘째는 이 모임이 공식적인 모임이기는 하였으되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양심을 가졌으므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부당하게 굴복할 수없음을 도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추측이다. 그럼으로써 바울이 어설픈 권위나 무력에 의해 굴복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양심을 따라...섬겼노라 - 이 '양심'은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RSV)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바울의 이 선언적인 진술은 전날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고발에대해(21:28) 무죄함을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적어도 율법의 기준으로 볼때 바울 자신은 흠 없음을 의미하고 (빌 3:6)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명한 자의식(自意識)과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23:2
아나니아 - 이 사람은 네데배우스(Nedebaeus)의 아들 아나니아(Ananiah)로 48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군림했으며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다.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稅)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탐욕적이고술수에 능한자였으며 그의 친로마 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받았다. 66년에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나니아의 집은 국수주의자들에 의해방화되었으며 아나니아는 헤롯 대왕의 궁전으로 피신하여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숨어있다가 그의 형 히스기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Jos. Wars II, 426). 곁에 섰는 사람들...입을 치라 -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나니아는 바울의 당당한 태도에 즉각적으로 흥분했다. '곁에 섰는 사람들'(*, 토이스 파레스토신 아우토)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산헤드린 의원들이라고 보는견해와(Lenski) 그곳에 있던 시중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Haenchen), 눅 19:24와요 18:22의 예를 볼때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도 뺨을 맞은 일이 있었지만(요 18:22).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뺨이나 입을 때리는 행위는 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모독하는 표현인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의 한 마디 말에 대해 사리를 따져보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입을 치라 명하는 아나니아의 행위는 그의 폭력적(暴力的) 성격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여실히 드러난다.
=====23:3
회칠한 담이여...치시리로다 - 바울은 아나니아의 불법적이고도 인격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강력하게 맞서고 있다. '회칠한 담이여'라는 표현은,일찍이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회칠한 무덤이여'(마 23:27)라고 맹렬히 질책한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둘은모두 위선자에 대한 질책의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회칠한 무덤'이 겉은 깨끗한것 같으나 속은 썩어빠진 상태를 뜻한다면, '회칠한 담'은 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해흔들거리면서도 겉에 흰 회를 칠해서 튼튼한 것처럼 꾸미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단지 아나니아의 위선을 질책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에게 저주를 선언하기까지에 이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형식이 율법에 기록된 저주 방식이기 때문이다(신 28:22). 혹자는 바울의 이말을 단순히 관용적인 저주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한다(Jacquier). 아나니아가 66년에 살해당한 것을감안한다면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 율법대로...율법을 어기고 - 바울은 아나니아의 위선을 풍자적 대조법을 사용하여지적하고 있다. 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자가 법을 어기고 있으니 얼마나 우수운 꼴인가! 재판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며(레 19:15),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형벌이 집행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도 정치 않는 상태에서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처벌을 명하였으니 그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행위였다.
=====23:4
하나님의 대제사장을...욕하느냐 - 유대 사회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로서 대단한 권위와 존경을 받고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대제사장의 권위에 맞설 수 없었다(신 17:12). 이런 종교적 풍토 속에서 살고 있던 그들로서는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맞서는 것이, 그 내용에관계없이 제사장을 욕되게 하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일찍이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대답한 것이 불손한 행위로 간주되어 매를 맞으신 사실을 생각한다면(요18:22), 바울의 저주 선언은 매우 불리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23:5
형제들아...알지 못하였노라 - 본절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한 자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는가 하는 점이다. 혹자는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알고 있으면서도 빈정되는 말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자를 대제사장으로 생각할 수있겠느냐는 의미로 말했다고 본다(Zahn). 그러나 '형제들아'라는 정중한 어투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출 22:28), 그리고 그의 신앙적 인격으로 보아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참이라고 봄이 무난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눈에는 질환(疾患)이 있었는데(갈 4:13, 14), 이 눈질환으로 인해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누가 대제사장 직책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본다(Chrysostom). (3) 바울이 자신의 변증에 너무나열중했기 대문에 자기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본다(Bengel).(4) 지금 모인 공의회는 정기적인 산헤드린의 모임이 아니라 로마 관리에 의해 긴급히소집된 회의이므로 대제사장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옷을 입지 않았고 공식 좌석에도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본다(Bruce). 이가운데(3), (4)의 견해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무난하다. 관원을 비방치 말라 - 이 말은 출 22:28을 인용한 것으로 바울이 저주를 선언한 인물이 대제사장인 것을 정말로 몰랐으며 또한 그가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율법에충실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다.
=====23:6
사두개인 - 이들은 당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그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때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에까지 거술러 올라간다. 사두개인들이 구체적인 집단으로두각을 나타낸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 166-63) 부터이다. 이들은 순수 유대적전통만을 고수하고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는데,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라 하여 배격하였다.이들은 철저히 현세 지향적이고 친로마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민중들의 생활과는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바리새인 - 이들 역시 사두개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났는데, 이들은'하시딤', '하시디안'으로 불리어진 경건 집단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달리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동일하게 권위있는 정경으로 취급하였고, 죽은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보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 사과의 뜻이 담겨 있는 바울의 변론(5절)에도 불구하고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아무 대책없이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헤드린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던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논쟁(論爭)을 불러 일으켰다. 바울이 이렇게 한행동에 대해 혹자는 노련한 수를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Preuschen), 마 10:16에 언급된 소위 뱀 같이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보기도 하는 반면(Nestle),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너무 근시안적 해석이라 할수 있다. 적어도 바울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고, 또한 그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1절). 자
믿는 것이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이 예수의부활에 근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와 관계없이 전승되어온 신앙에 근거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는다.
=====23:7
다툼이 생겨 - 바울의 발언은 즉시 효과를 나타내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신학적 논쟁을불러 일으켰다. '다툼'(* , 스타시스)은 '놓다', 또는 '두다'의 뜻을 갖는'히스테미'(* )에서 온 단어로 '세움'을 뜻한다. 즉 서로 다른 입장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맞세우는 것이다. 이 두 종파는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들 간에 대립되는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는 첨예한 분열상(分裂相)을 드러내었다. 이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기회만 있으면 논쟁을 일삼는 소위 비신앙적신학자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23:8
부활도...천사도...영도 없다. - 사두개인들은 합리적이고 현세지향적이며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았다. 특히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복음서에서도 예수와 부딪히는 주제로 등장한다(마 22:23).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천사, 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주제들은 두 집단이 가장 첨예한 대립을보인 부분이었다. 이 두 집단 사이에는 신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감정적대립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논쟁은 필요 이상으로 격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견해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지배 원리 - 바리새인 : 역사는 신적 목적을 가지며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 진다고 믿었다. 사두개인 : 바리새인의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역사 자체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천사론 - 바리새인 : 천사와 마귀의 계층이 있다고 믿었다. 사두개인 : 천사도 없고 마귀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 - 바리새인 : 자유 의지나 또는 하나님의 주권만으로는 다른 일(사람)의 운명을 취소할 수 없다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한다. 사두개인 : 자유 의지란 궁급적으로 역사 과정의 한 결정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회적 활동 - 바리새인 : 인간 평등을 주장하면사 다방면에 걸쳐 순수한 민족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두개인 : 자신들의 이해 득실(利害得失)에 민감하여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23:9
훤화 - 헬라어 '크라우게'(* )는 '비명을 지르다', '울부짖다'란 뜻의 '크라조'(* )에서 유래한 말로 큰 외침이나 고함 소리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것은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이 매우 격렬해졌음을 시사한다. 서기관이...가로되...혹 영이나 혹 천사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 가운데 누가는 몇 사람의 바리새인이 말한 바울에 대한 변론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서기관은 율법 전문가를 가리키는데 바리새인이 대부분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말인즉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다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다고 할 때 그것이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인지(22:6-10), 아니면 그후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22:17-21)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한편 바울을 옹호하는 쪽으로 돌아선 몇몇 바리새인은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들의 변호성 발언도 바울에 대한 지속적 지지의 입장을 나타낸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이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어도 관대한 입장을 지닌 자들이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중 다수는 그생활 양식에 있어 다른 유대인들과 별로 상충(相沖)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10
큰 분쟁이 생기니...빼앗아 가지고 - 급기야는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험악해지고 말았다. '찢겨질까'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서가파스데'(*)는 '깨뜨려 버리다', '산산조각을 내다'는 뜻의 '디아스파오'(* )의 제1부정 과거형으로서 천부장이 특별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바울의 신상에 큰 위험이 있었을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빼앗아'라는 표현도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폭력을 가하려 했기 때문에 강제로 떼내어 데려가야만 했던 상황을 현장감 있게 묘사한다.
=====23:11
주께서...담대하라...증거하여야 하리라 - 주님께서는 일찍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같은 말로 위로했었다(1:18;요 16:33 참조).이제껏 바울은 그의 생을 통해 많은 환상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만(16:9;18:9;22:17;27:23, 24) 그 상황이 지금처럼("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가깝게느껴지도록 묘사된 경우는 없었다. 이는 현재 시점의 긴박성을 시사한다. 그는 일찍이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운 바 있고(19:21)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이미 각오한 바 있었지만(20:23;21:10-13),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적잖이 당혹감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공해주셨다. 22:21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씀이 여기서는 '로마'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제 로마로 가는 것은 단순한 바울의 바램이아니라 주님이 부여해 준 사명(使命)임이 분명하게 제시되며 지금 그에게 매우 가깝게감지되는 격려의 말씀은 이후 2년간에 걸친 로마 전도 여행에서 많은 위험이 따름에도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큰 힘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 설 교 >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양향모목사 / 행 22:30-23:5
제가 설교준비 하나는 정말 열심히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본문이 주는 의미와 오늘날 우리가 받을 교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설교를 하고 난 후에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제가 한 설교를 들어보면서 설교가 어땠는지 살펴봅니다.
가끔 어떤 때는 제가 한 설교에 은혜를 받기도 하는데 보통은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가집니다. 제 설교만 아니라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때로는 뭔가 좀 부족하다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좀 더 재미있고 좀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연구를 하고 설교에다가 이것저것 첨부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인용하고, 특별한 경험담도 이야기하고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들도 덧붙여서 설교를 흥미진진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니까 설교가 재미는 있고 삶에 유익은 더하여 주는 것 같지만 정작 성경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복음에서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기는 하는데 흥미를 더하거나 삶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것을 섞다가 보니까 정작 전하여야 할 복음이 변질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들도 복음과 함께 전해짐으로서 사람들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설교라고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복음이 부끄러운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습니다. 내가 네 죄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서 부끄러운가? 아무 공로 없이 그냥 구원해 준다니까 자존심이 상하는가? 먹고 살만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 달갑지 않은가? 이런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의 공회 앞에서 증언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변명을 했을 때 군중들은 오히려 난동을 부리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들어와서 스스로 심문을 하려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자 정식 재판에 회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모으고 재판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려고 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과 대제사장의 설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를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부분들이 회칠한 담처럼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가짜들로 되어 있습니다. 회칠을 한 겉모습 때문에 진짜의 모습을 모르고 속는 일이 많습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본문 22장 30절에서 23장 1절에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공회’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통치단체를 말합니다. 법적인 일이나 종교적인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산헤드린공의회라고 했고 유대 최고 법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제사장들까지 소집을 한 것을 보면 천부장이 바울의 죄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바울의 문제를 처리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에게 확실한 죄가 있으면 구속을 하고 재판에 회부할 것이고 죄가 없거나 그 죄가 로마의 법적인 분제가 없으면 석방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증언할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말을 현대어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대강 적당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그것도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급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양심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양심대로 산다고 해서 다 바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배우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양심은 각각 다릅니다.
바울은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뜻을 바르게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양심이 따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발견하고 따른 사람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 이름은 2절에 기록된 대로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헬라식 이름이고 그의 유대식 이름은 ‘아난야’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사람 같지만 사실은 그런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대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 가진 권력이 탐이 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 되면 실제적인 최고의 권력가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치부를 누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많이 하고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오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또 자신은 양심대로 산다고 생각했지만 회칠한 무덤처럼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일뿐이었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일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바울처럼 철저하게 선한 양심으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지 못한 양심 즉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잡다한 것이 뒤섞인 다른 복음을 듣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양심을 가지고 그저 세상 복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본문 2-3절 말씀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자 거기 참석했던 아나니아라는 대제사장이 바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는 바울을 치라고 한 것은 바울의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그 속뜻을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바울을 치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바르지 못한 비뚤어진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척하지만 나는 정말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화풀이로 바울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 말을 듣고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 있으면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네가 나를 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를 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말처럼 아나니아는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암살자에 의해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핍박하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로마의 종노릇을 했기 때문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회칠한 담이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회칠한 무덤이란 무덤에 회칠을 하여서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 것 같으나 그 무덤 안에는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깨끗하게 보이나 그 속에는 더러운 죄로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회칠한 담은 담이 튼튼하지 못하여서 곧 무너질 것 같은 연약한 담인데 거기에다가 회칠을 하여서 아주 튼튼한 새벽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담이나 회칠한 무덤은 다같이 위선자들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선한척 하지만 악한 마음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회칠한 담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한 것은 대제사장이 가지고 있는 위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재판을 하는 것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을 하기도 전에 먼저 그 입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은 법을 위반한 처사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가려서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벌을 내리는 것이지만 억울하게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무죄인이 되도록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검사도 있어야 하지만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재판정입니다.
대제사장은 그런 율법의 정신을 살려서 바울을 변호하고 바울이 가진 복음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가진 대제사장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였고 그 자리로 인한 이익만 챙기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도 이런 회칠한 담과 같은 모습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바른 삶을 사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속에는 악한 생각들을 품고 살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냥 겉으로만 신앙이 있는 체 하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회칠한 담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복음을 왜곡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본문 4-5절에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비난의 말을 하자 바울 곁에 있던 사람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2장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지도자이면서 지금은 재판장 자리에 앉아서 바울을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모독하거나 저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재판을 받는 바울이 재판장이자 민족의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모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잘못을 지적하자 바울은 즉시 사과를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치라고 한 사람이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성경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말 속에도 대제사장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이 좋지 않아서 편지를 쓸 때에도 대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입은 옷이나 그가 앉은 자리를 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대제사장인 줄 짐작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재판하러 모인 공회원들을 잘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정말로 그에게 말한 사람이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는 숨은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 숨은 뜻은 대제사장이 대제사장으로서의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대제사장이요 그렇다면 어떻게 입을 치라고 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대제사장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기에 나도 당신이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고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 숨은 뜻을 이해하고 부끄러워했는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을 향하여 회칠한 담이라고 비난하고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라고 저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에 창피한 줄 알고 그냥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말이 이런 말일 것입니다. 네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냐? 네가 집사냐 권사냐 장로냐? 네가 목사냐? 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제일 창피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일이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일이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직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런 비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교회의 직분들을 명예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의 성격을 잘 안다면 이런 직분을 맡은 것이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소식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보람 있는 직분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도 가장 큰 복을 주게 되는 너무나 귀한 직분입니다.
이런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기쁘고 즐겁게 이 직분들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직분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서 맡은 일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시리로다.”라는 바울의 말을 제목으로 본문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자신도 회칠한 무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는 아닌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의 신앙고백이 이런 위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를 살펴보시고 진실한 고백을 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공회 앞에서의 바울의 설교
공회 앞에 세워진 바울 / 행 22:30-23:10
이제 바울은 천부장이 지휘하는 로마군의 영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천부장은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유대인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행22:30) 공회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이미 설명드렸습니다. 공회는 명실상부한 유대인 사회의 최고 기구입니다. 산헤드린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었고, 각 지파별로 선출된 총 72인의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종교, 윤리,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고, 사형 판결을 제외한 상당한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하도록 한 것은 바울에 대한 군중들의 소란을 유대 사회의 내부적인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자기 변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청인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설교는 두 가지 고백, 즉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다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 받는다는 고백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고백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첫 번째 고백입니다.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23:1) 바울은 양심 발언을 자주 했습니다.(행24:16, 고전4:4, 고후1:12, 딤전1:5, 딤후1:3 등 21회 사용)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주관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말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만, 그 율법을 판단하고 적용하는 일은 바울이 양심껏 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양심껏 섬겼다고 하니까 아나니아가 버럭 소리쳤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2) 여기 나오는 아나니아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아나니아가 아닙니다. 바울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란 유대인 중에 흔한 이름으로, 히브리식으로 하나냐(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NEBEDAEUS의 아들로, 헤롯 안티파스 2세에 의해 주후 48년에 대제사장이 되어 주후 59년까지 대제사장 지위에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성격이 난폭하여 사람을 잘 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니까 바울도 정면으로 맞받아쳤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3) 회칠한 담이란 말은 유대인 무덤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을 보면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넣은 후에는 봉하고 회칠을 하여 치장합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안에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당장 법정에서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율법 어디에도 죄목 없이 사람을 붙잡아 가두고, 법정에 세우라는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죄를 정하지 않은 미결수의 입을 발언하는 도중에 때리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5-16)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66년 친 로마 정책에 반감을 품은 셀롯당원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회칠한 무덤 같은 공중 하수도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고 책망하니까 대제사장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4-5) 바울은 즉시 사과했습니다. 아, 그런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 유대인 바울이 아나니아를 정말 몰랐을까? 학자들의 해석도 두 가지입니다. 아나니아를 이름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와 대면한 일이 없기 때문에 얼굴은 잘 알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고, 반면에 유대인 바울이 아나니아를 모를 리가 없지만, 짐짓 모른 척 하고 책망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아나니아를 비난한 일에 대해서 사과했습니다. 개인적 사과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란 공적 직분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입니다. 대제사장을 욕한 것은 예의에 어긋나기도 했지만, 율법에도 어긋났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 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사과는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실제로 증명해 준 행동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양심껏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절대 판단의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이전의 양심은 제대로 된 양심이 아닙니다. 인본주의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반쪽 누더기 양심입니다. 죄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거듭난 양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해도 아직도 100% 온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양심”이란 말은 헬라어로 “suneivdhsi"”인데 “함께” “知覺한다”, 즉 공통의 인식이란 뜻입니다. 영어 단어의 conscience란 단어도 같은 맥락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양심 자체는 각자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판단은 결코 주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공통으로 인식하는 판단의 범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껏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 양심이 기준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표준으로 해서 공통의 인식 아래 각 사람이 적용해 나갈 뿐입니다.
내가 양심껏 하나님을 섬긴다면 다른 사람도 양심껏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아나니아가 왜 화를 냈습니까? 자기 양심은 양심이고 바울의 양심은 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남의 양심에 개입할 만큼 훌륭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남이 양심껏 한 일을 가지고 함부로 비판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사람만 은혜를 주시고 인도하시나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외 없이 다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양심은 내 양심만 양심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감동만 성령의 감동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특정 성도의 양심만 감싸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의 마음에 작용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도 양심입니다. 존중해 주세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세요.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고, 하나님 법대로 섬기세요.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에 감히 개입하지 마세요. 내 양심을 지켜가세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모든 삶에 대해서 각자 하나님과 계산하시면 됩니다.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받는다
두 번째 주제는 부활입니다. 바울은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6-8)
부활 소망 때문에 법정에 섰습니다. 굳이 서지 않아도 될 법정입니다. 여러분, 법정에 서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교회 교육관 보증금 떼어먹은 사기꾼 때문에 법정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평생 살면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곳입니다. 가지 마세요. 바울은 죄수가 아닙니다. 붙잡혀 재판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살벌한 법정에 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세 차례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수십 개 국가, 수백 개의 도시를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은퇴한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것도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상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남은 생애를 죄수의 신분으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으로 있을 때보다 죄수로 있을 때에 더 많은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재판 받으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남은 기간을 죄수 신분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중간에 풀려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붙잡혀 순교당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의 감옥에 2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천부장의 법정, 유대인 공회, 헤롯 아그립바, 베스도 총독, 벨릭스 총독 앞에 서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변론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을 심문한 사람마다 결론은 한 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죄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굳이 풀려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갔습니다. 황제 앞에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은 위험한 곳입니다. 그릇된 판결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죽음에 도전했습니다.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바울은 삶의 매 순간 죽음 앞에 서서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부활 소망을 든든히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발언은 공회를 두 쪽 내고 말았습니다. 공회원의 절반은 사두개인이고 절반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서로 다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주로 제사장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신약성경 시대 당시 헤롯 왕가나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정치적인 특권도 누리고 성전의 지배권을 누렸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대중적 인기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전승과 율법을 거부하였고, 구약은 윤리적인 부분만 채택하였습니다. 천사, 영적 존재, 영혼 불멸, 육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가 곧 천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내세나 영적 세계를 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얘기한 바울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9) 부활 문제 때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잘못하면 바울을 서로 잡아당겨 찢어지게 생겼습니다. 공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난장판이 됐습니다. 천부장은 군인들을 명하여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도록 했습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9-10)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 양분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혼도 믿지 않고, 세상 종말도 믿지 않고, 천국도 믿지 않습니다. 부활 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세상에서나 잘 먹고 잘 살자고 합니다. 현세에 매인 사람으로 살게 만듭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부활 소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 웰빙을 위해 살 것인지?
두 가지 결론입니다
1. 양심껏 하나님을 섬기세요.
하나님 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세요. 그러나 내 양심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을 불완전합니다. 양심껏 살되 겸손해야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처럼 남의 양심에 간섭하지는 마세요. 내가 양심껏 섬기듯이 남들도 다 나름대로 양심껏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해야 될 일까지 대신 하지 마세요. 교회를 세우시고 움직여 가시는 원동력이 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까지 대신 하지도 마세요. 성령님은 지금도 각 사람의 양심에 작용하고 계십니다. 내 양심을 움직이고 계시듯이 남들의 양심도 움직이고 계십니다. 모든 섬김, 모든 잘잘못에 대한 계산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서서 하시면 됩니다. 미리 앞당겨 계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묵묵히 내 할 일만 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알아주실 겁니다.
2. 부활 소망으로 사십시오.
저는 저녁에 침상에 누우면서 내일 다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잡니다. 하나님이 일어나게 해 주시면 계속 사는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면 그냥 부활 대기자로 가는 겁니다. 매일매일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살아날 부활을 바라보세요. 아마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질 겁니다. 너무 세상 일 혼자 다 할 것처럼 나서지 마세요. 교회 일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원동력은 성령이십니다. 사람은 그저 성령님께 사로잡혀 맡은 부분을 감당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 하려고 끼어들지 마세요. 너무 거창하잖아요? 그냥 겸손히 내 앞에 놓인 일을 하면서 다가 올 부활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이성우 목사 / 행 23:1-11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책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누구라도 금방 일하시는 하나님을 그 성경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많은 분량에 아주 많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책임에 틀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기본적인 대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시작하자마자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통해서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죽은 자이지만 살아 있는 자와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후대 사람들에게 귀한 유산을 물려주거나 생전에 이룬 귀한 업적을 통해서 그 열매가 지속적으로 맺히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알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 순간 모든 일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일찍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인 다윗 왕은 그가 인생 말년에 기록한 시편 23편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고백을 남겨 놓았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 왕은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이 아버지의 양 떼를 돌봤던 목동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마치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다양한 일에 비유해서 묘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는 우선 양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안전한 길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양들이 맛있는 풀을 먹을 수 있도록 풀밭으로 인도하며, 또한 목이 마를 때는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물가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이 인도하는 일은 양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서 두 번째는 양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양은 다른 짐승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순한 짐승일 뿐만 아니라 3미터 이상 앞을 멀리 보지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사나운 맹수들의 공격을 미리 알아차릴 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보호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목자의 존재와 목자의 보호의 역할은 양에게 있어서는 역시 생명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서 세 번째는 양의 필요를 공급하고 채워주는 역할입니다. 양의 우리를 만들어서 밤중에는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를 공급해야 하며, 풀이 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건초를 준비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며, 나머지 모든 필요를 제때에 채워줌으로써 양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며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서 네 번째는 양이 병이 들었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치료해 주는 역할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생명체는 살다보면 병도 들고 상처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때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행복지수가 낮아져서 삶의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존재와 역할을 통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존재와 그 역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인생 말년에 자기 인생 여정을 회고해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며, 치료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삶이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기를 원하는 바램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 하나님의 품에 거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 기록된 다윗 왕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일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믿음의 눈을 통해서 가만히 읽으면서 묵상해 보게 되면, 누구라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는 복잡한 내용들도 많이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치료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행복한 존재로 살아가되 그런 삶을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얻으시고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토대로 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국은 생명을 살리고 지키심으로써 생명을 생명 되게 하시는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생명을 생명의 길로 이끄시며 지키심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화와 복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생명을 주시고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육체의 생명의 원천이심과 그 육체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 37장 1-1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된 모습을 죽어서 마른 뼈가 된 모습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5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마른 뼈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한 9절 말씀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두 구절의 말씀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국은 이렇게 영적인 생명을 살리시는 일인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와 반대로 그 생명을 지켜 가실 뿐만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해 가시는 분이신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는 사사나 왕을 세우셔서 일하시기도 하시고, 또한 예언자나 제사장을 세우셔서 일하시기도 하시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역사를 감당하게 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직접 찾아오셔서 모든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그 몸을 내어 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생명 살리는 일을 계속 이어나가셨는데,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사도행전 이후의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몸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12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특별히 훈련시키셨으며,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생명 살리는 일을 이어나가도록 역사하신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23장 1-11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 살리는 일에 부르심을 받고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서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고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나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 가서 선교할 계획을 세우고 그 동안의 선교 결과를 보고할 뿐만 아니라 로마 선교 추진을 위한 후원을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갔다가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을 방해하던 유대교 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는 상황 가운데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로마인 천부장의 손을 통해서 그의 생명을 지키게 하셨는데, 바울은 천부장의 손에 체포당해서 천부장의 영내로 끌려가는 와중에서도 성난 유대인 무리들을 향해서 침착하게 자신의 무죄함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정은 바로 생명을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열정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심문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 끌려 나간 사도 바울이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함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변증하는 과정 중에 있었던 일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1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살기등등한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설교 때문에 더 위험에 처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천부 장을 통해서 보호하시고는 그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겠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주신 위로와 격려, 그리고 소망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 중에 열성당원 40명이 바울을 살해하고자 하는 결사대를 조직해서 구체적인 살해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함으로 사도 바울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번에는 바울의 생질을 통해서 바울과 천부장이 그 정보를 알게 함으로써 천부장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서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로 호송되게 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국 로마 총독인 벨릭스와 그의 후임자인 베스도 총독, 그리고 유대인의 마지막 왕인 헤롯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과 더불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갔지만 로마 황제 앞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살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쉼 없이 일하시는 분으로서 이 거룩한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시며, 오늘도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부족하지만 저와 여러분을 사도 바울처럼 일꾼으로 부르셔서 세우시고는 언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도우심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그 역사를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초대교회 이후부터 복음을 전함으로써 생명 살리는 일을 감당했던 모든 사역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일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이 이 일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일하시고 계신 사실을 믿으시고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생명 살리시는 일을 쉼 없이 해 나가시는 하나님과 함께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귀하게 쓰임을 받으시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로마를 향하여
서명성 목사 / 행 23:1-11
■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입니다. 그는 30년 동안 아프리카 내륙을 횡단하며 오지에 문명과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아프리카에 간 11년 동안은 한 사람도 회심시키지 못했고 어떤 선교지도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들 간의 알력에 시달렸고 가족과 환경에 매어 지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며 기다렸고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내부로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수천의 마을들을 향하여 내륙으로 들어갔고 결국은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맹수와 질병과 원주민들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의 어려움을 듣고 친구들이 그를 도우려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그러자 리빙스턴은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언젠가 한 번은 리빙스턴이 사자에 물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이 한 말이 있습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죽지 않는다.” 그 확신대로 그는 살아났으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칠 때까지 정글 속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지난 주 살펴 본 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오늘 우리의 시대는 도전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개척해 놓은 편안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은 길이 없던 길을 가며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익숙한 것은 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량이나 달란트를 잠재우게 만듭니다. 새로운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의 인생을 투자할 만한 길입니다. 그 길은 바울이 걸었던 길이고, 리빙스턴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바울의 헌신이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열매를 거둡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바울을 지키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바울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리빙스턴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은혜 가운데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나는 사명자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명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잠시 정리해볼까요?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혔다가 로마 당국에 죄수의 몸으로 넘겨집니다. 바울이 끌려가다가 잠시 말미를 얻어 성난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유대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과정을 말하는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군중들이 다시 폭발합니다. “이러한 놈은 없이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만 선택하였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한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분노하여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소란을 벌이니 치안을 맡은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공회에 섭니다.
바울이 그냥 석방된다면 유대인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으므로 천부장은 실상을 파악하고자 산헤드린 공회 소집을 요청합니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었지만 바울을 제거하기 원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인지라 그 요청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공회에서 정치나 사회문제는 다룰 수 없었고 오직 종교나 풍습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었습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서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바울은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 오히려 당당합니다. 바울은 공회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변론을 시작합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입을 엽니다. ‘섬겼다’는 단어는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든 일에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이 올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면 바울에게 대적하는 자신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당찬 바울의 진술을 들으면서 화가 치민 대제사장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47-59년에 재위했던 대제사장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성질이 급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주저 없이 그를 ‘회칠한 담’ 즉 위선자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그를 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으로 통치해야 할 사람이 앞장서서 율법의 참된 정신을 훼손하고 공정한 재판의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레 19:15).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자신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했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바울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59년 대제사장직에서 면직되고 66년에 로마에 반기를 든 무장 세력에 의하여 피살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주의 종의 말은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때 곁에 선 사람들이 대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과격한 언사를 나무랍니다. 대제사장에게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줄 몰랐다고 응수합니다. 바울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노골적으로 어기는 자를 어떻게 대제사장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과합니다. 불의에 맞설 때라도 법과 질서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공회에서 소동이 벌어집니다.
공회의 분위기로 보아 바울이 어떤 변증을 해도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합니다. 그때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이 서로 대립해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임을 주목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하면서 자신은 바리새인의 조상에서 피를 받았고 철저하게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았다고 하면서 바리새파에 속한 공회원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은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을 전하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말하지 않고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인 부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부활에 대해 말함으로써 바리새파의 호응을 기대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대로 이 발언은 사두개인들을 자극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 중에서도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는 그룹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였기에 유대인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사두개인들은 ‘부활? 말도 안 돼.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죽으면 그만이지’하며 흥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기는 왜 없어’하며 맞받아칩니다. 졸지에 공회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손가락질하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때 바리새파에 속한 유력한 서기관 몇 사람이 일어나 발언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부활 문제로는 바울을 정죄할 수 없다고 바울을 지지하고 나섭니다. 이 진술은 가말리엘이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에 관해 공회에서 말했던 중립적인 발언을 떠올리게 합니다(5:35). 바울의 문제로 모였는데 바울은 빠지고 엉뚱하게 두 그룹 사이에 교리논쟁이 크게 벌어졌고 과격해진 논쟁은 소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천부장이 바울을 그 가운데서 데리고 나와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산헤드린은 늘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는데 바울은 상황을 지혜롭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11). 바울은 성령님이 주신 지혜로 산헤드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위로하십니다.
공회원들끼리 벌이는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 바울이 다시 부상을 당할 것을 염려한 천부장이 그를 무리 가운데서 빼내어 영내로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일단 위기는 넘겼지만 바울은 공회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현재 죄수의 상태로 있는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도 하였을 것입니다. 위기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처럼 앞에서 계신 것이 아니라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다정한 격려의 제스처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디모데 후서 4장을 보면 로마 감옥에 갇혀서 그동안의 사역을 돌아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묵상을 할 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4:17) 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물론 주님이 육체적으로 바울 곁에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셨는데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의 뜻이 무엇입니까?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 주님이 우리 곁에 있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자 예수님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바울이 험난한 사역 가운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은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곁에 계시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곁에 계신 주님 때문에 바울은 고독한 상황, 위험한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곁에 계셨던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혼자하려면 두렵고 떨릴 수 있으나 주님이 곁에 계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인간인데 계속되는 위험 속에 어찌 염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위험이 지나면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결박과 환난은 결국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이고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로마에 갈 때까지는 아무도 그의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지키실 것이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로마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로마까지 가는 동안 위험이 계속될 것을 암시합니다. 반면에 공회원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기에 몰라서 믿지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문제 다양한 방법으로 예상치 않게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다가옵니다.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섭섭해하거나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인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저 멀리 계시는 분, 무관심한 분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지금 어떤 고난을 지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나 문제 자체가 아니라 바로 믿음 없는 우리 자신입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가 점점 더 커 보이고 나중에는 그 문제에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삶의 일부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때로 위기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1. 선한 양심을 따라 삽니다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아는 최고의 표준을 따르려는 내적 능력을 말합니다. 때문에 양심은 최고의 표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즉 양심은 영혼의 눈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양심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완전함으로 향하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해줍니다. 대신 우리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에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모든 상황이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할 기회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는 없습니까?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사도행전에는 3명의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첫째, 아나니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시력을 잃은 바울을 찾아와 안수하며 기도해주던 경건한 인물입니다. 둘째 아나니아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바나바를 흉내 내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부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 아나니아가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서 아주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할 때 그를 안수해 준 경건한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였기에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연약한 인생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켜보실 뿐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건을 가장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지식과 가르침을 전함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분노하시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이란 겉을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외면보다 중요한 내면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즘 신문 광고를 보면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준다는 성형 광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을 꾸미는 노력의 일부만이라도 속을 다듬는 데 쓴다면 우리의 내면이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름답게 보이는 행실과 말과 삶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소리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나아갈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3. 지혜를 구합니다.
대제사장의 방해로 공회에서 변론이 방해를 받자 바울은 공회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것을 알고 그들을 교리 논쟁으로 끌어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니 공회는 바울을 제쳐두고 자기들끼리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그 틈을 타 바울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바울은 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사용하였습니다. 영적 싸움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피할 길을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는 문제에만 온통 신경을 쓰기 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왕좌왕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구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시련의 날에 성도의 바른 자세는 인내 속에 기도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4.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시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의 생애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주어졌기에 바울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아는 자는 지금의 고난도 지나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비결은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 위로를 주시고 환난 가운데 피할 길을 마련해주십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은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바울은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는 열정이 생겼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그가 자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누가 시켜서 된 것입니까 어머니가 서원기도해서 된 것입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부름을 받았기에 바울은 로마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그의 곁에서 그를 위로하시고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일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습니까? 각자 생각해 보세요. 로마로 가야 하리라 그 말씀이 바울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순종하여 로마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나의 로마’가 어디입니까?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은혜로 나를 부르신 주님, 그 뜻을 이루어지기까지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님을 붙들면서 회복을 경험하고 주님의 주신 사명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양심을 따라 섬기는 성도
강성찬목사 / 행 23장 1절
전에 어떤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연구를 해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버튼만 누르면 사람이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는 여러 친구들과 유명한 과학자들, 정치가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축사도 했겠지요. 여러 가지로 예식을 한 다음에 버튼을 눌렀어요. 아 그러니까 사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물우물합니다. 눈을 번쩍 뜹니다. 눈을 굴립니다. 아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섭니다. 보니까 키가 9척이요 또 얼굴을 잘 만들어서 미남인 아주 진짜 같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인공 인간이 어정어정 기어 나옵니다. 과학자와 그 부인이 서 있는 곳 까지 어정어정 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 다짜고짜로 과학자 머리를 내려칩니다. 단번에 쓰러졌습니다. 아 그러더니 과학자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정치가니 과학자의 친구니 모두가 혼비백산이 돼서 사방으로 도망합니다.
이처럼 그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한 가지만은 실패를 했다고 그럽니다. 뭔고 하니 그 속에 양심을 못 넣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스운 예기지마는 현대 문화의 풍자입니다. 현대문화가 모든 인간의 외부적인 것은 다 만들지마는 인간 속의 양심은 못 넣어 준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한경직- 양심을 넣어주지않은 로봇)
양심(良心 Conscience suneidesis)은 선악의 판단위해 인간에 내재하는 기능(롬2:15,고후4:2)입니다. 양심(슈네이데-시스)은 어원적으로는 어떤 일을 누구와 함께 안다(슈노이다)는 말에서 발전한 개념으로서, 보편적인 선의 공지(共知) 곧 같이 아는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글자대로 말하면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지식으로서 이것은 마치 [이성]이 진리와 허위를 구별하는 기능이듯이 선과 악을 식별하는 기능입니다(롬 2:15,고전 10:25,딤전 4:2).
양심은 인간에 대하여 재판관의 입장에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양심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율법의 지식이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복종을 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율법의 명령과 비교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의,불의의 판결을 스스로 내리게됩니다. 선한 양심은 신앙싸움의 무기가 되고, 신앙의 배로서 항해 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 됩니다(딤전1:5,19) 이 새로워진 예리한 양심을 갖지 못하거나 그 가졌던 것을 버릴 때 신앙의 싸움은 패배되고 배는 파선됩니다. 착한양심 새로워진 양심으로 예리해지지 못했거나 이것을 버리는 자는 또한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고 또 헛된일 의의없는 일에만 마음을 두어 마침내 믿음에 파선되어, 파멸되고 맙니다(딤전 1:18-19)
보다 중요한 점은 양심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약에 있어서의 양심은 보편적 선에 대해 같이 아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 실제적 행위 및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을 같이 아는 일입니다.
양심의 기능은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벧전 4:19). 이방인도 그 양심에 의해 율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롬 2:15).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을 뿐더러,(롬 1:32) 그 양심은 더러워지고, 양심이 화인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로 되었습니다(딤전 4:2,딤 1:15,히 9:9).
또한 이런 양심은 다만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깨끗해지고 사람은 하나님께 쓰이는 자로 됩니다(히 9:14).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사람은 그 이성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롬 12:2,벧전 4:19). 그리하여 사람은 그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하나님께 쓰이며(행 23:1,딤후 1:3) 세상의 정치적 권위에도 복종합니다(롬 13:5). 이러한 양심은 신앙과 결합되어 있습니다(딤전 1:19,3:9)
그리하여 양심은, 성령과 함께 자기의 진실을 증거하고(롬 8:16,9:1,고전 4:4,행 23:1) 또한 다른 사람의 진실도 증거합니다(고후 4:2, 5:11). 즉 양심은 자기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함께 자기와 관계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 관계합니다.
다시 양심은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양심] 위해 쓰이고, 사랑하며, 모든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 감사합니다(고전 8:7-8,10:28,29).
선교하시던 바울 사도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대제사장들과 대화를 하며 변호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 종교의 지도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1절)왔노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하여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1절) 살아왔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양심을 따라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는 성도로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야에 기도 함으로 은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험을 참고 섬기지고 했습니다. 이 달은 양심대로 섬기자 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다라 섬기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슴을 kd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섬깁시다
행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고합니다.
바울은 손상되지 않은 훌륭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의 믿음 또한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의 신비는 믿음의 순수한 양심 안에서 최고도로 유지됩니다. 거짓이 없는 양심은 그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목적과 소망은 "꺼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범죄를 유발시키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 싶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유발시키지 않는 양심 악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아첨하지도 않으며 기만하지도 않으며 무슨 일에든지 오도하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자 애써 왔다"는 뜻입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써 왔다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내 마음이 나를 꾸짖지 아니 할 것이라"는 욥의 고백과 같은 내용입니다. "양심을 꾸짖을 일을 결코 아니하고자 힘쓸 것입니다. 결백한 양심을 지니는 것, 또한 영혼의 선함을 더럽히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어떤 행동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늘 사귀는 친구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습니다. 그리고 속해 있고 의존하고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영혼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인 까닭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바울의 세심한 노력을 힘쓰노라고 합니다. 즉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을 것이며 이 취지에 따라 생을 다스릴 것이고 자신을 훈련시켜 법도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내 성향이 유혹하는 많은 요소들에 대해 자제할 것이요 가장 영적인 신앙의 실행에 전념하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힘씀의 정도는 "항상"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려고 힘썼고 또 큰 죄를 없이 하려고 힘썼다."고 합니다. 그가 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리낌이 없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자 힘써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무 전반을 이행함에 있어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힘씀의 동기는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있을 세계에서의 생명을 믿는 까닭으로 나는 이와 같이 애쓴다고 합니다. 미래의 삶에 대한 염려는 현재에서의 우리의 삶을 양심적이게 하는 큰 요인이 됩니다.
우리도 항상 양심에 거낌 없이 섬기는 성도가됩시다.
밀턴이 그의 청년기 시절 6년 가량을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보냈었는데, 거기서 그는 정신 지체를 갖고있는 마이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마이런에게 있어 무척이나도 우울해 보이는 시기였고 집 이외에는 갈 곳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도시 근교에서 할 수 있는 특이한 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물을 키우는 재능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곳은 아주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잔디 깎기, 우거진 관목, 그리고 울타리를 치는 것과 꽃을 키우는 일 등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 그리고 사랑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이런은 그런 일들을 자원해서 했습니다. 그는 과부나 스스로 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잔디를 깎고 잎사귀를 긁어내며, 꽃들을 심곤 했는데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을 그러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기름 통"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뒷 주머니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조그마한 기름통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삐걱거리는 문이나 돌쩌귀, 그리고 대문 같은 곳이 있으면 마이런의 기름통을 "공짜"로 발라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기 때문에 그는 아무 곳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꼬마 아이들은 그를 놀려대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주 낙천적이며 유머기질이 뛰어났고 아주 침착했기 때문에 아무도 마이런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마이런은 밀턴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곳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밀턴은 그의 장례식을 보러 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았던 것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나 장례식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므로 그 장례식에는 다른 사람의 배나 되는 인원이 참석했습니다. 왜냐하면 밀턴처럼 아주 먼 거리에서 그 곳에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마이런은 그 작은 도시에서 정말로 중요한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아니, 그는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존경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로빈 리치는 그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였고 낙관론주의자였으며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섬김의 정신덕분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섬김의 자세)
위도 항상 양심 따라 섬기는 서로가 됩시다.
다음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섬깁시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합니다
이말은 원래 '국민적 의무를 잘 감당하는 생활'의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섬기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사명과 의무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교 관원들처럼 '형식주의'로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라 '오직…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빌 1:20)는 목적으로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신앙은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생명을 건 '전인적인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빌 3:14 약 2:20-22).
바울이 유대교의 최고 법정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변론을 하면서 담대합니다. 그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더욱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신앙대로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도덕적인 선과 악을 구별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 교활한 사람이 결코 아닌 제 분수에 맞게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지시하는 바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하였습니다(1절).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비록 실수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떳떳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행동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항상 떳떳하게 살아가며, 그런 양심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지 간에 그는 한결같이 양심을 지켜나가는 자입니다.
20세기 정신적 거성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하던 중에 행복한 자기는 불행한 자들을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 봉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30세 까지는 자기를 위해 살고, 그 후부터는 남을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30세에 이미 목사로, 신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또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면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 무슨 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인가? 생각하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그의 인생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 콩고 지방에서 흑인에게 의료 봉사를 할 하나님의 일꾼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닫고 의학공부를 7년간 한 후에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90세가 되도록 흑인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우리도 범사에 양심 따라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 한 사람이 어느 날, 가게에서 신발을 한켤레 사고 난 후 주인에게 "돈은 내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 제자가 돈을 들고 찾아가니 주인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양심에 걸려 매일 고통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신발이 '흉측한 가시' 같았습니다. 결국 그는 돈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가게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제게는 살아 있습니다."
한 철학자의 제자가 양심 따라 살았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더욱 양심 따라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청결한 양심으로 섬깁시다.
딤후 1: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라고 합니다.
"청결한 양심"은 '거짓 없는 양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에 있어서 거짓이 섞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를 경배해야 됩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마 5:8) 이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마 5:8)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국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그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청결한 신앙 양심'을 소유치 못했기 때문입니다(딤전 1:5-7). 그리고 그처럼 '청결한 양심'을 소유하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도 저급한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포기는 곧 영원한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된 양심'을 따라 오직 범사에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갈 2:20).
군의 자격을 말할 때에 딤전 3:9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라고합니다.
여기서 '깨끗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양심으로서( 히 10:22)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는 것입니다(행 24:16). 하나님이나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사는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1787년 10월 28일 27세의 젊은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고 20대 초반에 유능한 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런 그가 친구 밀너를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류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품위를 위한 교양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 날 이후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모두 떨쳐버렸습니다. 당시 영국은 노예 무역을 통해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얻고 세계 최고의 해군력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그는 암살 위협, 중상 모략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매진했습니다. 결국 의회에서 싸워온 지 50여년만에 노예 무역 폐지라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또한 조지 3세를 독려해서 '관습 개혁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도록 했고 몸소 개혁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영국 노예 제도를 통해 얻는 2천만 파운드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란 고백을 남기고 그분께로 갔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양심! 양심! 본능이며 하늘의 소리요, 지성 있고 자유로운한 존재의 확고한 안내자여, 선악에 대한 올바른 심판자여, 인간을 신과 닮게 하는 자여, 그대야말로 인간 본성의 우수성과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낳게 하는 자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어서 잘못만을 저지르는 슬픈 특권을 느낄 뿐이며 그때 나는 하나의 동물일 따름이다."
우리의 양심이 청결한 양심 고침 받은 양심이 되기위해 할일이 있습니다.
영국 화가 레이놀즈는 양심 치료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와 진리에 순종함으로 밝은 양심을 갖게 된다.
둘째, 양심을 건강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셋째, 반성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자문하여 심사숙고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실 지를 생각해 보라.
넷째, 믿음이 좋고 경험이 많은 분들께 상담을 하라. 왜냐 하면 좋은 경험이 많은 사람의 지도를 받는 것은 양심을 강하게 하는 영약이 되기 때문이다."(양심치료법-인터넷 정보클럽)
성경은 말씀합니다.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딤전 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되 항상 범사에 청결한 양심으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공회 앞에 선 바울
이준원목사 / 행 23장 1~11절
지난주일 설교 때 언급한 술꾼을 기억하십니까? 지난주 못 오신 분들을 위해 재방송(?)을 하겠습니다. 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자신을 걱정해서 그를 아끼는 은사가 술이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한 책을 주었고, 그는 그 책을 밤새 읽고 나서 이제는 정말 끊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됐습니다, 책 읽기를.
그 후 그 은사가 그를 찾아와 만나서 간곡히 그에게 술을 끊으라고 권면하며 또 다른 책을 주면서 이것을 읽고 거기에 적힌 대로 실행해보라고 했습니다. 비록 다시는 책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였지만, 자신을 생각해주는 은사가 직접 찾아와서 주고 간 책이기 때문에 그것을 또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정말 굳은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이제는 정말로 끊어야겠다, 저 선생님과의 관계를!’
그 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술을 많이 마시던 그는 결국 위에 구멍이 나고 간이 나빠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 은사는 병원으로 그를 문병 왔습니다. “자네 결국 이렇게 되었구먼. 이제는 정말 정신 차리고 술을 끊어야 하네.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정말 끊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지 몰라.” 은사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간곡히 그에게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그 술꾼도 병상에 누운 채로 은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조금 후 은사가 병실을 떠나고 나서 마침내 그는 큰 결단을 하게 됐습니다. ‘더 이상은 정말 안 되겠다. 이러다 내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 비록 돈이 아주 많이 들더라도 실행에 옮겨야겠다.’ 그리고 그는 그 병원에서 제공하는, 가격이 아주 비싼 술 끊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특실로 옮겨서, 자기가 허락하지 않은 한 절대 아무도 방문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냥 술을 끊으면 간단한 것을 왜 이리도 어렵게 삽니까? 자기를 사랑해서 술을 끊으라고 권면하며 그토록 도우려 애써준 선생님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고 보지도 않겠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물론 이것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겠지만,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과 아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 복음에 접했을 때 마음을 열고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닫고, 그 다음에는 더 닫고, 그 다음에는 아예 닫아버리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1. 바울과 대제사장 아나니아 (1~5절)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날이 새자 천부장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소동을 일으키며 바울을 죽이려 했는지, 그 진상을 밝히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합니다. 70명 또는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요즘의 우리 국회와 비슷합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였고,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이 자꾸 종교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해달라고 하니까, 종교문제는 자기들이 다룰 수 있도록 공회를 만들게 허락해주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에 관련된 사건을 재판하고 사형 판결도 내릴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확정하는 데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사형 집행은 로마 당국(총독)의 승인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도록 해놓았습니다.
지난 22장 30절에서 천부장이 바울의 결박을 풀어 주었는데, 아직 범죄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로마 시민 바울을 자유인의 신분으로 이 산헤드린 공회에 데려갔다는 말입니다. 그 유대인 공회에 선 바울이 먼저 무슨 말을 합니까?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1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바울은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공회에 니고데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새 무덤에 안치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우상을 숭배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눈으로 바울이 이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존경하는 공회원님들’이라고 하지 않고 바울은 그냥 “여러분 형제들아”라고 하며 정말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의 첫 마디는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신앙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고 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면에 있어 자기는 믿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이때 바울은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볼 때 이미 인생의 말년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가난 속에서 박해를 견디며 살아온 것, 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러 차례 예언을 받았던 그 예루살렘에 그가 목숨을 걸고 찾아 온 것도 다 믿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책임감에 따라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따라 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제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침상 또는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 가는 그 길에 어떤 고백을 하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변에 모여 있는 가족들과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지금까지 모든 면에 걸쳐 믿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당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작은 일이 쌓여서 지금 나의 인생이 된 겁니다. 특별이 영적 습관을 바로 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 꾸준히 예배하는 습관, 예배에 늦지 않고 일찍 오는 습관, 예배에 오면 앉아서 기도하는 습관,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습관, 특별히 격려하고 세워주는 말을 하는 습관 등.
이런 작은 습관들이 쌓여서 우리 인생이 되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쌓였을 때 마지막 순간에 ‘내가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살고 있는 것들이 쌓여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말에 대해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2절)
그 당시의 대제사장 이름이 아나니아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당시에 그 전 해에는 안나스였고 그 해에는 가야바였는데, 이때는 아나니아입니다. 이 사람은 주후(AD) 47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아주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성전에 드린 십일조를 횡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이었는데도 폭력과 암살까지 일삼던 아주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폭력을 행하고, 심지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정적을 살인교사하고 죽이는 악한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득만 챙기는 악독한 종교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그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입을 치는 것은, 최대의 인격 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데가 아니라 입을 치라고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게 함으로써, 신앙 양심을 따라 자기가 하나님을 섬겨 왔다는 바울의 인격을 짓밟아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저런 자의 말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3절)
바울도 이때 굉장히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지 자기 입을 치라고 하며 인격을 모독했다고 화가 난 게 아니라, 여기 있는 공회원들이 유대인들의 지도자이고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율법을 어기면서 자기 입을 치라고 하니까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눅 들지 않은 채 아나니아를 향해 “회칠한 담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심한 욕입니다. 욕을 한 겁니다.
예수님도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3:27). 당시 유대인들은 우기가 끝난 후 길가에 버려진 가난한 사람들의 무덤에 하얗게 횟가루를 뿌렸습니다. 그것은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게 아니라, 시체가 있는 무덤을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지나가다가 하얀 횟가루가 칠해진 것을 보고 거기가 무덤인 것을 알고 쉽게 피해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덤에 하얀 횟가루를 뿌리면 겉으로는 굉장히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시체가 썩어 있어 아주 더러운 무덤인 것처럼,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그렇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자신의 입을 치라고 한 아나니아를 향하여 “회칠한 담이여”라고 외친 것도 같은 뜻입니다.
율법에는 반드시 두세 증인들의 증언이 있을 때에만 사람의 범죄를 확정할 수 있습니다(신 19:15). 그 전까지는 누구든 무죄로 인정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것이 ‘무죄 추정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따른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것도 대제사장인 아나니아가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처음부터 바울의 입을 치게 하여 바울을 아예 처음부터 죄인으로 확정하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얗게 회칠한 담이 깨끗해 보이지만, 그 담 너머에서는 온갖 더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에 빗대어서, 아나니아의 이중성을 ‘회칠한 담’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다”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뭐라고 합니까?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4-5절)
원래 대제사장은 공식석상에서 입는 의복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옷만 봐도 대제사장인 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변 사람들이 대사장에게 어떻게 욕을 하느냐고 말해줄 때까지 바울이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는 말은, 그날의 산헤드린 공회가 천부장에 의해 갑자기 소집된 임시회의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자기 의복을 갖춰 입고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평상복을 입고 참석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지난 20년 이상 세계를 다니며 전도여행을 했기 때문에 본토 유대교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제사장이 된 아나니아의 얼굴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에 대한 바울의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제사장을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그들의 아첨의 표현이었을 뿐이지,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정말 욕하고 저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말은 사실 아나니아의 불법 행위에 대한 정확한 지적입니다. 물론 약간의 감정도 들어가 있었겠지만, 그것은 정당한 비판이며 경고였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출애굽기 22장 28절 말씀까지 인용합니다. “너의 백성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율법을 따르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율법을 거스르고 도리어 폭력을 명령한 사람이 설마 대제사장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 중 한 명이 그랬어도 놀라운 일인데, 가장 높은 대제사장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는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공회원도 그렇지만, 특히 대제사장이라면 이런 공회 석상에서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때리라고 폭력을 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인용한 것은 자기가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에 따라 자기가 대제사장을 비방하지 않는 것처럼, 대제사장도 율법에 따라서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죄인처럼 처음부터 다루면 안 된다.’라는 항의였습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 70명(또는 71명)이 바울 한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 일제히 바울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율법에 근거해서 해야 할 말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게 하여서 바울의 인격을 짓밟아 버리려고 할 때, 만약 바울이 같이 흥분해서 절제력을 잃고 바울 역시 비인격적으로 반응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배교자라고 낙인을 찍고 바울을 못 죽여서 안달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은 당연히 만장일치로 율법 모독죄, 성전 모독죄, 대제사장 모독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부장은,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의 종교법을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아무리 로마 시민이라고 해도 공식석상에서 비인격적인 언행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그를 더 이상 보호해줄 명분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공개적으로 자신의 인격이 짓밟히는 모독을 당했지만,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거기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무엇을 해야 할지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바울이 한 말입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만약 제가 어디서 이상한 짓을 해서 어떤 사람이 저를 가리키면서 ‘나는 그가 목사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라고 한다면 상당히 뜨끔한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 있으십니까? 특히 우리 가운데 직분을 맡으신 분들? 만약 내가 장로인데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나는 그가 장로인 줄 알지 못했다.’ 안수집사라면 ‘나는 그가 안수집사인 줄 알지 못했다.’ 그 말이 뭡니까? 만약 우리가 ‘목사로, 장로로, 안수집사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는가? 저런 사람이 무슨 목사, 장로, 안수집사인가?’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이걸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아, 이분은 정말 장로님이시죠.’ ‘이분은 정말 안수집사님이시죠.’ ‘이분은 정말 목사님이시죠.’라고 하는 우리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나는 그가 목사인 줄, 장로인 줄, 안수집사인 줄 몰랐다.’라는 삶이 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큰일이 아니라 작은 일, 작은 영적 습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습관을 빠뜨리면 안 됩니다. 특히 직분자일수록, 교회 리더일수록 그렇습니다. 말씀, 새벽기도, 십일조, 예배, 공 예배 참석, 예배시간에 졸지 않는 것, 예배시간에 늦게 오지 않는 것 등은 사실 보통 크리스천도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안수 직분자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가 장로인 줄, 안수집사인 줄 알지 못했다.’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이 말이 바로 나를 향한 말이구나.’ 하고 깨달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아휴, 다행이다. 나는 장로로, 안수집사도 아니니까 괜찮겠지.’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저 사람이 크리스천인 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면 큰일입니다. 누가 나를 봐도 ‘저 사람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지. 이 사람처럼 예수 믿어야 돼!’라는 말을 듣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바울과 바리새인들 및 사두개인들 (6~10절)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6절)
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70명(71명)의 의원 대부분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만으로도 구별할 수 있었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신학적인 위치와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완전히 서로 반대에 있었습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주전(BC) 2세기경,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제사장들이 성전 관리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사두개파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바울 시대의 사두개파는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의원들 같이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기득권을 지닌 지배계층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제사장들이 대부분 이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권위만 인정하고, 시편이나 예언서와 같이 다른 구약성경의 권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기만 하셨을 뿐, 우리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나 부활과 영생과 같은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 세계였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살고 끝나는 겁니다. 내세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다 잃어버린 물질주의자들, 현실주의자들, 세속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룩해야 할 성전의 제사의식마저 악한 장사꾼의 상거래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은 일반 유대인 시민들에게는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된 자’ 혹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주전(BC) 4세기경 유대교 개혁에 앞장섰던 하시딤의 후예답게 누구보다 율법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 비율법적인 것들, 불경한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여 스스로 분리된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바리새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명칭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부 다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또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고 하는, 자기 조상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전통을 다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 그리고 부활과 영생을 다 믿었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유대교를 잡고 있는 것에 반대하면서,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한 바리새파는 서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쳤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거룩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들이 위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전통을 더 따르며, 문자 그대로 따르면서 그것을 안 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거룩한 척, 남들에게 잘 보이는 시장 어귀에서 거룩하게 옷을 입고 나와 손들고 기도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었지만 예수님은 “저건 거룩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진짜 거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신학적으로도 완전히 다르고 삶도 달랐기 때문에, 평소에 두 진영 사이에 늘 다툼이 있었습니다. 공회에도 사두개인들이 있고 바리새인들이 있으니까 항상 싸우는 겁니다. 요즘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어서 계속 싸우는 것처럼, 그들도 계속 싸웠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보니까 사두개파도 있고 바리새파도 있는데, 공회에서 자신은 원래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밝힙니다. “나는 바리새인이다.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일뿐 아니라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바리새인’이 복수로 되어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자기 대에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바리새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계속 바리새파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곧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나뉘어 원래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을 놓고 다 함께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가 바울이 자기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니까 바리새파가 돌변합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7-8절)
이 다툼의 원인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리새인은 천사와 영과 부활과 영생을 다 믿는데 사두개인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 두 진영 사이에 지금까지 오랫동안 서로 이 차이로 인해서 싸워왔는데, 그것이 여기서 드러나서 싸운 겁니다. 그들은 원래 한마음으로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고 죽이려 했는데, 바울이 언급한 부활 때문에 두 진영이 원래 분열되어 있었던 것처럼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때도 그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인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디바(안티파스)가 서로 원수였는데, 예수님을 죽이는 일로 하나가 되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처럼 이 사람들도 원래 싸우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는 일로 하나가 되었는데, 바울이 ‘나는 바리새인입니다.’라고 했더니 이제 바리새인들은 그를 보호하려 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 부활을 막연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한 부활은 그냥 막연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이고 바리새인이고, 모든 유대인들이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들이 신성 모독죄로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고 바울이 자꾸 증언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지금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이 사람은 우리 바리새인이다. 보호해야 한다.’라고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앙숙이었던 사두개인들과 맞서서 갑자기 바울의 변호자들이 되었습니다.
“크게 떠들 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9절)
여러분, 이걸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바리새파 사람들도 “저 놈 죽여라! 성전 모독죄를 범한 놈이다. 죽여라!”라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바뀝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우리 편’이라는 겁니다. ‘우리 편이니까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하여간에 괜찮다. 우리 편이다. 보호해야 한다. 착하다.’ 조금 전까지는 ‘죽여라’였는데, 지금은 ‘우리 편이니까 착하다’입니다.
이것이 ‘진영논리’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진영논리를 우리가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편이면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상대편이면 어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것이고, 우리 편은 어떤 나쁜 일을 해도 좋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만히 있을 사두개인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0절)
천부장이 볼 때 바울이 찢겨질지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큰 분쟁”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력을 동원한 다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치고받고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회원들 같이 고상하신(?) 분들이 치고받고 싸우고, 그들에게 붙은 추종자들도 치고받고 싸우며, 무력으로 밀고 당기고 치고받고 주먹을 날리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흥분하면 나뉘어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국회라든지 그렇게 하고 있고, 옛날에도 다 그랬습니다.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찢겨지다’라는 말이 ‘산산조각 나다, 박살나다’라는 뜻인데, 가만히 놓아두면 바울의 몸이 다 찢겨지고 박살나고 죽을 것 같아서 천부장이 빨리 가 구출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요새로 다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처럼 천부장이 큰 역할을 합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처음 잡혀왔을 때 말할 기회를 주었고, 로마시민인 것이 밝혀지자마자 정중히 대하고, 지금도 바울이 죽지 않도록 보호해줍니다 천부장이 이 위기를 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분명히 인간들이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고 역사하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줄 아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그냥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항상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다툼 속에서 위기에 처한 바울을, 천부장을 통해 구해내신 것입니다.
3. 바울과 주님 (11절)
왜 구해내셨습니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1절)
이때는 “그 날 밤” 즉 엄청난 위기에 처했던 그 날의 밤입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천부장이 영내로 들어가서 안에 가두어놓았는데, 그때 바울 옆에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날 위기를 모면했다고 해서 무슨 높은 분이 와서 자기를 돌봐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때가 노년인데, 바울이 그 동안 굉장히 고생해서 몸도 안 좋고 나이도 많아서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아주 찬 감방에서 밤을 맞이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밤,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그 밤에 주님께서 거기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이 안전한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 황제의 황궁보다 더 좋은 곳이 이곳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곳에 가보아도, 제일 럭셔리한 곳, 엄청나게 비싼 곳, 아주 화려한 곳에 가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잠깐 좋고 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곳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은 곧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뿐 아니라 “담대하라” 하셨습니다. 왜 담대해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네가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생 말년에, ‘이제는 내 할 일을 다 했나’ 싶은 시기에, 새로운 사명을 또 주시는 겁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자기가 로마로 가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한 번 이 차디 찬 감방에서 확인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막막한 밤이어야 했을 그 밤이, 놀라운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밤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편안하고 넉넉하게 사는 것만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왜 그런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추구하는 그 방향에서 어느 정도 넉넉하고 성공하고 뭔가 이루고 안전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정말 재앙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이런 죽음의 위기에 닥친다 할지라도, 그곳에 함께하신다면 그곳이 천국이고 바로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이 어디이든지 바로 이러한 소망과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장소가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한 주 동안 우리가 살아갈 때 매일 매순간 ‘지금 나는 주님과 함께 하는가’ 묻기 원합니다. 사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나를 지켜주시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주님의 이 뜻 앞에, 겸손히 주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로마로 가는 길
이동휘목사 / 행 23:1-35
1.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유럽 동부 지역 등에 대한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여러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결박되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며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말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1:13)..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 바울 예루살렘에서 결박되어 핍박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아주 험악하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 지역에 전도하면서 그곳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말을 따르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려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완성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셨듯이 사도 바울 역시 율법에 어느 한 조항에 대해서도 어긋나게 행동한 적이 없었습니다.
(마5:17-19)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바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된 소문은 바울의 적들이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자기 자신을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빌3:5-6)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한 마디로 정통 유대인, 정통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그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니니 상당수 유대인들이 바울을 율법을 배신한 자로 몰아 호시탐탐 죽여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곧 바로 거짓 소문, 요즈음 말로 가짜 뉴스(Fake News)를 퍼트려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Fact)은 사도 바울이 전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하거나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또 다른 구실을 내세워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붙잡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우리를 도우십시오. 이 사람은 어디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성전에 해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방인 헬라 사람까지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습니다.” 바울을 증오하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지독한 편견 속에 바울이 드로비모라고 하는 에베소 사람(이방인)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함을 질러대며 선동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하여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내어 은밀한 곳에 감금하고 바울을 폭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성소를 분리하고 있는 벽에는 큰 팻말이 있었고, 거기에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성소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사형에 처한다.” 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무 이방인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고, 또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고, 그들이 나가자 문이 닫혔으며, 그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의도로 감금하여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행21:29-31)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이러한 사건으로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주둔군 천부장에 보고되자, 로마군 경비대의 장교인 천부장은 군중을 보고서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가 즉시 부하들을 거느리고 현장에 달려가자, 폭도들이 로마군 부대장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 바울에게 폭행하던 것을 그쳤습니다. 천부장은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묶게 한 후,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대답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그들이 외쳐대는 소란 때문에 진상을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부대 안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그 진상을 알고자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모으고 그곳에 데려갔습니다.
바울은 먼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며 소위 양심선언을 합니다. 그러자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바울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며 대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항의합니다. 김성한 작가의 <바비도>라는 소설 내용입니다.
바비도는 헨리 4세 때 이단으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봉재 직공이었습니다. 당시는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도 부패되어 영역(英譯) 성경을 읽거나 ‘성경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단죄되어 사형을 당하던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바비도 역시 영역 성경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종교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근엄한 사제(司祭)는 가슴에 십자가를 엄숙히 그은 후 바비도에게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바비도는 “쉬운 우리말로 성경을 읽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불쌍한 죄인이 아닙니까? 당신은 신앙의 양심이 썩은 산 송장이죠. 구더기가 가득 들어 있는......” 이라고 말하며 사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는 화형 선고를 받고 곧 형장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형장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바비도의 재판을 처음부터 지켜본 당시의 태자 헨리도 있었습니다. 태자는 바비도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바비도, 너도 사람인 이상 죽고 싶지 않겠지?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 그러자 바비도는 대답했습니다. “구태여 죽고 싶은 심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양심을 팔면서까지 악착같이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태자가 말했습니다. “할 수 없다. 화형을 집행하라.” 불은 순식간에 바비도를 삼키려고 타올랐습니다. 그 순간 태자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자, 바비도! 이래도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 바비도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거부의 몸짓이었습니다. 태자는 불 속에서 죽어가는 바비도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할 수 없구나, 잘 가거라. 나는 오늘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바비도 네가 무섭구나.” 이는 영국 헨리 4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단으로 몰린 한 봉제공이 목숨을 스스로 버리면서까지 신앙 양심을 지킨다는 실로 눈물겨운 사건입니다. 요즘 우리의 주변에는 조그마한 물질이나 쾌락, 권력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온갖 파렴치한 부정과 패륜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면서도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양심은 영혼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썩으면 우리의 영혼도 자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즉 양심이 파선되면 우리의 구원도 파선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양심”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양심과 뜻이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선>, <진실> 등의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양심은 이스라엘적 개념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선을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1:12에 그 해석이 나옵니다.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예수 믿는 사람의 자랑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데, 그 말은 인간들의 지혜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에 비추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려 사는 소위 은혜생활, 하나님 앞에 양심을 따라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 “(행23:1)....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자신이 인간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하나님을 섬겼다.” 는 헬라어로 “페포리투마이”(pepolitumai)인데 직역하면 “하나님께 시민노릇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분과 그 소속을 명료히 한마디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육신을 두고 살지만, 이미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자격과 긍지,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7-21에서, 자신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로 그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삶의 자세를 말했습니다.
(빌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1)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 곧 그리스도의 피, 그 은혜, 예수의 사랑을 무시하는 자는 천국시민이 아닙니다. 2) 배를 신(최고의 보람)으로 삼는 자, 즉 쾌락주의,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도 천국시민이 못됩니다. 3)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인데도 자기의 영광으로 만드는 행위,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즐기는 자는 천국시민이 아닙니다. 4)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즉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면서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자도 천국시민이 못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는 천국시민으로서 살아왔다는 신앙고백은 이러한 4가지 면에서 승리한 생활을 뜻합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반면에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산헤드린 회의를 주재(主宰)하고 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소위 ‘양심선언’을 했던 바울의 “그 입을 치라.” 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행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라고 하나님의 대언자로 준엄하게 그를 책망합니다. 민족 앞에 불의를 행하였던 아나니아는 결국 바울의 예언대로 주후 66년, 헤롯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 숨어있다 붙잡혀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타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일개 사도로서 평생 진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부끄럼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유대 민족을 이끌어가는 종교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에 있어서 동등한 기회를 가진 두 인물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사는 고귀한 성도의 삶과 더불어 타락과 부패한 길을 걷는 신앙인의 위험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복음을 위해 수고한 사도 바울의 선한 양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다 듣기도 전에 “그 입을 치라”고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10여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군림했던 아나니아는 잔인함과 탐심이 가득한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세(稅)를 받아 착복하였으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정권과 결탁한 권세자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대단한 축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성직자들의 소유인 십일조를 폭력을 행사하여 빼앗기까지”했습니다. 이렇게 타락과 비양심으로 점철된 그는 바울의 선하고 진실된 말을 들을 때마다 고통이 가중되었기에 더 이상 바울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죽은 자의 소망, 즉 부활”을 그들에게 증거합니다.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좌우에 버티고 앉아 의인 바울을 재판했던 사람들을 보면,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존재도 내세도 부정하며 오로지 권력에 집착하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백성의 소유를 빼앗고 오직 현실과 육체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다른 한 쪽에는 바울을 정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외식자요 위선자로서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율법 조문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율법의 올무에 얽어매 놓은 자들입니다. 겉으로 그들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한 가지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고아와 과부 및 가난한 자들의 가산을 착취하였습니다. 이같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예수께서 일찍이 신랄하게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지적하며 심판을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마23:1-34)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이와같이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무리들은 소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라고 자처하지만,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이들이 위협적으로 바울을 공격하고 해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두 파,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소수파였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고 부인했으며 천사, 영혼, 귀신들, 마귀 등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인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숫적으로는 다수였으며, 사두개파보다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인임을 자처하였으며 자기가 이 재판을 받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 다시 말해 자신이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소망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로 산헤드린은 둘로 갈렸고 난폭한 살인적인 논쟁으로 바울은 거의 찢어질 뻔 했습니다. 그를 난폭한 행동에서 구출하기 위해 천부장은 그를 다시 영문, 주둔군 진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3. 산헤드린 법정에서 바울에 대해 유죄가 입증되지 않고 유대인들 사이에 분열만 조장되자, 바울에 대하여 극도의 적의감에 불타고 있었던 유대 열성 단원 40명은 더 이상 정식 재판 과정을 통해서는 바울을 처형하기 곤란하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산헤드린 공회와 합작하여 이제 바울을 살해할 무서운 음모를 세웠습니다. 이른바 자객단(刺客團)을 세운 것입니다. 그 살해 음모는 먼저 천부장에게 바울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볼 것이 있다는 구실로 일단 그를 로마인들의 주둔군 요새 밖으로 유인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좁은 길에 매복해 있다가 일시에 습격하여 바울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그들이었으나, 자객단은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들의 음모는 바울의 생질에게 알려졌고, 그는 주둔군 진영으로 들어가 바울에게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이에 바울은 한 백부장에게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 데려다 줄 것을 요청했고, 천부장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악랄함을 잘 알고 있었고 바울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생질의 말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40명의 자객단이 바울의 생명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을 비웃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두고 경험했던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은 결국 헛된 일이며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리라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시2:1-4)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유대인의 손에 방치하심으로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대적자들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40명의 자객단이 꾸민 음모는 결국 탄로되어,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데 당시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절반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백부장을 불러 이렇게 명령합니다. “오늘 밤 9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200명과 마병 70명과 창병 200명을 준비하라. 그리고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그를 태울 말도 몇 마리 준비하라.”(행23:23-24) 하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해서 벨릭스 총독 앞에 인도되었고, 얼마 후 그 후임 베스도 총독에게 자신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 로마 황제 가이사의 재판을 받겠다고 말함으로 이탈리아 로마로 가는 호송선에 인도됩니다.
(행25:11)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이로써 유대교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으며 <로마로 가는 복음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진리의 도를 증거한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재판정에 수차례 서게 되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족의 미움을 받아 야심한 밤에 유대교의 모태인 예루살렘을 떠나는 바울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나, 그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며, 또한 로마 전도에의 꿈을 간직한 채 담대하게 순례자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한 부활의 복음으로 인한 산헤드린의 분열과 그에 따른 살벌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로마 주둔군 진영으로 들어간 그 날 밤, 사도 바울은 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재판을 받기 원한다고 말하므로, 자신을 이렇게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 것입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이들,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바울을 감금하고 폭행했던 일, 그 일로 로마 주둔군 지휘관 천부장에 이끌려 주둔군 진영으로 들어갔던 일, 그리고 바울을 살해하려는 자객단의 음모가 탄로되어 주둔군의 철통같은 경호속에 벨릭스 총독에 이송된 것 등은 결국 바울이 예수를 증거하러 로마에 가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전도 사역에 있어 중대한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이번 사건에도 개입하시어 현실의 고난을 감내(堪耐)할 수 있도록 뚜렷한 목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했듯이 로마에서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암담한 현실 가운데 있던 바울에게 원대한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로 향한 더 큰 비젼과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명까지 감당하도록 격려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인간은 자기 사명을 끝낼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Man is immortal until his work is don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위해 로마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교 여행을 다 마친 후에 로마에 가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로서 로마에로의 복음의 진출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러한 비젼과 확신은 바울로 하여금 앞으로 닥쳐올 많은 환난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격려하고 바울에게 용기를 준 것은 정보를 제공한 생질도 아니요 호송작전을 지휘한 천부장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로마 무대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숨은 손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최대의 소원은 <복음을 로마에!>입니다. 그는 체포되어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면서도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여 석방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대에 의해 그대로 로마까지 호송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암살자의 위험을 피하여 로마에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더 시끄러워지고 매맞고 고생해도 로마 시저에 대한 상소의 길이 열리면 로마행이 가능해지므로 바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무렵 바울은 로마행을 하나님의 섭리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인생해석은 빌립보서 1:12에서 분명합니다.
(빌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 “진보”는 전진을 뜻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복음의 전진에 있습니다. 복음의 전진을 위해서라면 옥살이라도 의미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헤롯 궁에 홀로 감금당한 바울은 이제 또 다시 주어질 변증의 시간을 기다리며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 전도에 열정과 그의 따른 고난을 이렇게 말합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전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발가벗기우신 채로 십자가에 못박혀 온갖 수치, 창피, 부끄러움과 멸시 천대를,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면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시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창피와 수치, 멸시를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그 창피와 수치, 그리고 멸시와 고통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도 최후 심판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를 전파하다가 높아진 위신이 떨어질까봐 두려워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차라리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환영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책자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만삭이된 어떤 여인이 무릎까지 눈이 쌓인 추운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눈 위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기진맥진 쓰러져 죽게 됩니다. 때마침 이른 새벽 선교사 한 분이 새벽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짚차를 타고 눈길을 가는데 불빛에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아기 울음소리가 눈 속에서 들려오고 왠 여인이 나체로 눈 위에 죽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기를 낳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속옷까지도 다 벗어서 아기를 싸놓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것입니다. 후에 이 아기는 선교사의 양아들로 훌륭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양 선교사가 그 옛날의 상황을 그 양아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네 어머니의 신분을 사방에 수소문 해 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 산 어디에 네 어머니를 묻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네 어머니가 너를 살리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두문불출합니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드러 누워만 있던 이 청년이 눈이 펑펑 쏟아지자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무덤을 부둥켜 안고는 “오 어머니 내가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다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어 놓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는 또 웁니다. “오 어머니 그때 이 만큼 추웠습니까?” “이 만큼 부끄러웠습니까?”
여러분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무덤도 남겨 놓지 않고 이 땅에 자신의 몸된 교회만을 남겨 두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이 교회를 부둥켜 안고 주님께서 남겨놓으신 남은 고난을 감당하면서 “주여, 이만큼 고통스러웠습니까? 주여! 이만큼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까? 주여!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섭리를 믿으시고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복음의 전진을 이루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이상웅목사 / 행 23:1-13
우리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그 일로 인하여 예상되는 어려움을 따져보고, 어려움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시작합니다. 너무 쉬운 일은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일일 경우가 많습니다. 의미있는 일, 가치있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움을 예상하고 각오했다고 어려움이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할 때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 그곳에 가면 결박당하고, 고초를 당할 것이니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죽음도 각오했습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순례객들이 폭도가 되어 바울을 잡아 성밖에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마침 로마의 천부장이 이를 저지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변호할 기회를 얻어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간증을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는지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저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번도 천부장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무슨 일로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 알고자 채찍질을 해서 심문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에는 시민법과 만민법이 있었습니다. 시민법은 로마에, 만민법은 로마가 다스리는 이방사회에 적용되는 법이었습니다. 만민법의 핵심은 이방사회에서 로마시민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지역에 파견된 백부장, 천부장이 만민법을 집행할 법무관이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얼떨결에 로마시민을 보호한 셈입니다. 그런데 죄도 정하지 않고 로마시민을 채찍질할 뻔했습니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천부장은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결박한 것을 풀어주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만으로 바울은 천부장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3:20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런데 우리는 하늘 시민권자입니다. 하늘 시민권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당시 주님께서 하늘 시민권자인 바울을 어떻게 보호하셨는가 살펴보겠습니다.
1. 산헤드린 공회에 선 바울
천부장은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였습니다.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 세워졌습니다. 1절입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공회를 주목했습니다. 한때 그들은 바울의 동료였습니다. 약 25년전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에게 다메섹의 예수 믿는 자를 재판에 회부할 권한을 얻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바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그 자리에 섰습니다. 이번에는 재판에 회부되어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 공회원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변화가 은혜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섬긴 결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그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바울은 당당히 그 말의 부당함을 지적했습니다. 피고의 권리는 유대 율법에 의하여 엄격하게 보호되었고, 죄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죄로 인정되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재판해야 할 사람이 스스로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주변에서 감히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냐고 했습니다. 대답 대신 권위로 입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대제사장인지 몰랐다며 율법에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과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며,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고자 하는 순전함이 세상의 권력에 당당하게 맞서는 힘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말했습니다. 6절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자신을 고발하는 이들의 모순을 천부장에게 단번에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한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바리새인들은 믿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출신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잡혀왔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는 말에 바리새인들은 바울의 편에 서서 사두개인들과 싸웠습니다. 순식간에 공회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0절입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그들의 다툼이 얼마나 심한지 바울의 몸이 찢겨질 뻔했습니다. 또 로마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벌써 3번째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시민권자인 바울을 로마의 군대를 통해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처럼 하늘 시민권자인 우리도 보호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명이 있는 자는
거듭 반복되는 위기를 겪은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또 보호할 것이라 확신하고 평안했을까요? 유대인들로써는 바울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무산되고 나서 자신들이 바울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2-13절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식음을 전폐하고 바울을 죽이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40명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자객을 고용하여 원수를 암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40명의 바울 암살결사대가 조직된 것입니다. 바울에게 다시 공정한 발언권을 주는 척하며 다시 산헤드린 공회에 출석을 요구하면, 나오는 길에 죽이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모의가 진행되는 동안 바울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자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그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왜 근심이 없었겠습니까? 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다 할지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사도행전 19:21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의 계획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이 어려운 형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왜 답답하지 않았겠습니까? 주께서는 아셨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래서 담대하라,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것은 너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기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리빙스톤은 처음 11년동안 한 명의 회심자도 없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사자에게 어깨를 물렸습니다. 다들 죽는다고 했는데 그는 다시 일어나서 “사명자는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잘 감당하나 뒷짐지고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앞장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격려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바울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맡겨진 그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과 동행하시고, 무엇을 해야할 지 가르치시는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무엇인가 신비한 방법으로 내게 찾아와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에 생각나는 것이 모두 성령의 인도가 아니기에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하여 순종하기 시작하면 그 소리가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때는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하늘 시민권자 바울을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40명의 암살결사대의 음모를 우연히 바울의 조카가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천부장에게 전해졌습니다. 23-24절입니다.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천부장이 보유한 병력은 최대 천명입니다. 그중에 470명을 동원하여 가이사랴로 보냈습니다. 바울을 태워갈 짐승도 준비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시민을 보호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바울의 암살단은 굶어 죽었을까요? 궁금합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가이사랴로 가서 벨릭스 총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천부장의 편지를 통해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34절입니다.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총독은 왜 바울에게 어느 영지 사람이냐고 물었을까요? 당시 총독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의 사람만 재판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당시 유대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유대인의 율법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이익될 것이 없는 재판이었습니다. 회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이라서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낸다면 암살단은 굶어 죽을 위기를 넘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을 머물게 됩니다.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총독이 바뀌고, 결국은 로마황제에게 상소를 해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됩니다. 가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로마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증언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어느 도시를 방문하여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그렇게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리라 계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로마에 가게 하셨습니다.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아마 중간에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럴까봐 주님께서는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억하고 잊지말고 인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로마서를 썼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을 갔다가 로마로 가서 만나게 될 로마교회에 미리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로마서 1:9-10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했습니다. 이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습니까? 바울이 로마까지 가게 된 이 험난하고 긴 여정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른 좋은 길이었습니까?
당시 로마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수도 로마는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해 있었지만, 그 길마다 도적과 해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안전하게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갔습니다. 죄수가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죄수가 되어 자신을 심문하는 총독과 왕들과 권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던 바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일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끝나나’ 절망감이 들 때마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며 견디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이르러서야 다 이유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가는 좋은 길로 인도하셨음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 시간을 뒤돌아볼 때 ‘그때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묵묵부답인줄 알았는데, 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응답하셨군요’라고 고백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게는 그때는 답답해서, 힘들어서, 불평했는데 지나고 나니 은혜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주님만 의지하고 나아간다면 앞으로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마중물 성도님들! 지금 무슨 일로 답답해하십니까? 왜 하는 일마다 막으시냐고 원망하고 계십니까? 왜 빨리 응답하지 않냐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3년이나 이어지는 코로나로 계획은 엉망이 되고,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곧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텐데, 불의하고 잘못된 후보라고 판단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저의 답답함이며, 저의 근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의 길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깨닫게 되듯이, 지금은 몰랐지만 앞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유민용목사 / 행 23:1, 6-11
오늘은 세계성찬 주일로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찬의 빵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지요. 포도주는 인류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에 연합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서로가 자기의 의로움만 주장하는 세상속으로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찬식이며 세례식,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기도회 등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우리는 어떤 열매들을 맺어가야 할까요? 믿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나서 천부장은 다음날 결박을 풀고, 산헤드린 공회로 바울을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의장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성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의장을 포함하여 총 71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마음에 담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 1642)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이 일로 당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 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서 창조와 구속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의 발견은 피조물인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세상 너머의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어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발견하려고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믿음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니까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깨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보든 안보든, 상황이 좋은 안좋든 하나님을 내 옆에 모시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헬라어는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입니다. ‘쉰’(συν)이라는 함께’라는 뜻과 ‘알다’라는 ‘에이데시스’(εἰδησις)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울의 고백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인격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과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공회원들 앞에 죄수의 옷을 입고 서 있었지만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고 거룩한 직분을 받았어도 양심이 죽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형만 그럴듯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긍휼의 눈으로 회원들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류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그의 살은 십자가에서 찢겼고,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성찬은 이것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매주마다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두려운 현실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유대교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에서도 복음은 예루살렘 반경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과정입니다. 지속적으로 믿을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어려워 하고 두려워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조용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그저 눈만 감고 있어도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서로 다른 방식, 서로 다양한 모습을 인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깊은 영성의 세계를 알아가게 됩니다. 어릴 적 모태에서 부터 신앙을 배우고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태 신앙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 뜨겁지 않아서 ‘못해 신앙인’이라고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뜨겁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슬비에 옷 젖듯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도 하시고, 뜨거운 경험을 통해 회심 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은 말씀을 연구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지체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만나는 방법이 다양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모든 만남 중에 놓쳐서는 안될 만남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 그 자리, 뜨겁지 않은 그 자리를 자라게 하시고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6절 7절입니다.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하니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인데 반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은 세속적인 사람들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의 소망을 전하는 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눠집니다. 이는 서로가 신학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로 인해 매우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부대에 담으려면 우리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한 구원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이들은 쟁기를 손에 들고 밭에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을 얻게 되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표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돈에 대한 역설입니다.
잠언 11장 24-25절을 보면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구제를 한다는 것은 주머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인데 더욱 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흘려 보내면 오히려 복은 들어 오게 되는 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현실일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복은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성만찬 주일에 장학헌금을 통해 실제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앙과 하나가 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지식을 참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일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어려운 가운데 공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가난한 자들이 부요케 되기를 원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베품의 즐거움에 참여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심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 그날 밤은 위기의 밤이고, 고난의 밤이었습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은 그날 밤에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바울 곁에 늘 가까이 계셨던 주님은 그날 밤에 ‘담대하라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적극적으로 위로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고난의 밤일수록 주님의 음성은 또렷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주님을 만난 경험들, 서로가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딘 쟁기로 밭을 갈아야 하니 힘만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밤은 찾아 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만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1996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적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은 정지선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거의 희박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개그맨 이경규씨는 지금도 잊지 못했던 촬영 기억을 언급했습니다. 그날은 새벽 4시까지 양심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포기하려던 순간 한 차량이 나타나 정지선을 지켰는데 이경규씨는 PD가 방송을 위해 사람을 보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4시에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있던 아내도 장애인이었는데 “왜 정지선을 지키냐고 하니까 지켜야 하는거 아니에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났었다고 회상합니다. 실제 해당 방송은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이경규씨는 지금도 정지선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운전 양심을 높였다고 회상합니다. 그 당시 그 프로그램은 위기 상황이었고 다른 방송사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변화가 없이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때였다고 합니다. 야심한 밤에 도로에 잠복하여 안전선과 속도를 지키는 사람을 찾는 방송 프로가 모두의 우려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과 질서를 깨치는 계기가 되었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양심을 지니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헐뜯고, 고난이 온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억압받는 일은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과 피를 묵상하며 주님의 피가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 나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주님께서 여러분의 굳건한 마음에 믿음의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네 마음을 일으키라
행 23장 1~11절 / 김경년목사
요즘 여러 가지 기상이변 때문에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현대인이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스트레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과도한 일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적인 긴장 또는 압박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과도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전혀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적당한 긴장은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 긴장이 과도할 때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기타를 어깨너머로 배워서 치는데 제일 힘든 것이 기타 줄을 맞출 때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팽팽하게 당겨서 줄이 끊어지고, 또 너무 느슨하게 해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악기도 너무 조이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연주를 할 수 없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한 긴장은 필요하지만, 너무 과도한 긴장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과도한 긴장은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면 염려와 불안, 초조와 두려움, 죄의식과 수치심, 낙심과 좌절 등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스트레스가 정신적인 문제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를 영적인 문제에까지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긴장을 가져다주는 원인과 그 해결책을 말씀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실수와 실패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은 참으로 중요한 곳에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공회 앞에 서서 설교했다고 했습니다. 공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산헤드린 공회인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7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오늘날 국회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어찌하여 국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참으로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신앙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던 대제사장이 그것은 망언이라고 생각을 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본문2절입니다.
“데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보통 때 같으면 사도 바울이 그냥 입을 한 대 맞으면서 계속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울은 이렇게 대응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바울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 입을 치라는 소리가 들려오니까, 바울은 급한 성격에 화를 참지 못하고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감히 앉아서 율법으로 나를 판단한다고 하그랬더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이렇게 바울이 대제사장을 욕하는 순간, 거기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변론을 들으려고 하다가 마음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그런데 바울이 왜 대제사장을 몰라봤을까요? 사도 바울은 안질을 좋지 않아서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안경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분위기는 험악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아,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아"고는 하셨으나"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세운 조직이지만 제사장은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기름을 부어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왕도 사울 왕을 끝까지 손대지 않았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사람이 욕하는 것은 허락된 일이 없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오늘날 국회와 같이 여당과 야당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두 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인하고 영도 부인하고 천사도 부인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인정하고 영도 인정하고 천사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위기를 면하기 위해 본문 6절 말씀을 합니다.
“바울이 그 한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내가 부활을 전하는 것 때문에 오늘 이 핍박을 받는다!" 라고 했더니, 부활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 우리가 들어보니까 저 사람 별로 죄가 없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반대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7절과 10절에 보면, 다툼이 생겨 큰 분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국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국회에서 삿대질하고, 욕하고, 멱살 잡고, 그 다음에 육탄 돌격, 막 치고 받고 난리가 나는 것처럼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그 날 밤에'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바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화를 참지 못해서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또 감옥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지금쯤 스스로 포기 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 속에 깊은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곁에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놈아, 아직도 그 성질머리를 못 고쳤냐!”
그렇게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곁에 서서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여기서 “담대하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네 마음을 일으키라”는 의미입니다.
너의 낙심한 마음을, 너의 슬픈 마음을, 너의 괴로운 마음을 다시 한법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1.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 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 후렴)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2.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를 힘 주시며 늘 지켜 주시리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세상 근심은 사라집니다. 나의 실수는 감추어집니다. 나의 과거는 떠내려 가 버릴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스트레스가 많은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까요? 늘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라, 나를 보지 말고, 내 과거를 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주님이 위로가 있었던 바로 그 다음날 더 심한 고난이 사도 바울에게 불어 닥칩니다. 음모가 있었습니다.
본문 12-13절 말씀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 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명이더라.”
여기보면 40여명의 특공대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 어려운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주위 어떤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입니다.
우리는 때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가장 힘이 들고 가장 심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40여명이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도 알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이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가 되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다시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그게 무엇인지 아세요?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바울아! 너의 생명은 이 예루살렘에서 끝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택했다. 너는 나의 도구이기 때문에, 네가 반드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
우리가 죽을 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우리는 세상의 병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사고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언제 죽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마치는 그 날, 이 땅을 떠납니다. 그때까지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 바울아! 걱정하지 마라. 그까짓 40명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이 역사의 주인이다. 내가 이 세상을 한 손에 쥐고 있노라. 나는 섭리의 하나님이야!"
섭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의 불순종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 섭리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40여명이 매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바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안전하게 그 곳을 벗어났는지 성경이 나머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 말씀입니다.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여기보면 호위병 470명을 준비해서 바울의 생명을 지키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왜 수많은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는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때로,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나약한 분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합니다. 쓰러집니다. 이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쓰러진 마음, 좌절과 낙심과 심각한 스트레스 때문에 지친 마음을 다시 일으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과거를 보지 말고, 우리의 실수를 보지 말고, 오직 위로의 주님, 용서의 주님, 능력의 주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루어 드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주께서 곁에 서서
행 23장 1~11절 / 조재진목사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든지, 기도응답을 받는다든지, 질병이 낫는다든지, 어떤 신비한 체험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면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하나님 체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동시에 체험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받은 하나님의 일군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자기에게 찾아온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힙니다. 그 말씀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졌고, 그 말씀 때문에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한 번 감동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따라 죽을 때까지 그 말씀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평생을 헌신하기도 합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들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평생을 주님께 드리게 되었지요. 또 제가 전도에 충격을 받고 전도현장에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가지고 일년을 살게도 하시고 5년을 살게도 하시고 10년을 살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 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황하는 까닭은 이런 하나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그 체험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흔들리기 때문에 삶도 흔들립니다. 목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끌고 가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생을 돌아보면 그의 삶을 이끌어 갔던 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체험, 곧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니라” 이 예수와의 만남이 그의 생을 아예 그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또 이어서 주님께서 “너는 이방인을 위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이 바울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에 그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복음을 위해 고난과 핍박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로마까지 죄수로 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의 1/3을 쓸 만한 지성인이었어요. 그는 능력있는 학자였어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 말씀하나 붙잡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함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의 팀을 이루고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도, 또 2차 전도여행때 소아시아가 아니라 유럽 쪽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꿀 때에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아테네에서의 선교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고린도에 왔을 때에 주님은 의기소침해 있던 바울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목적이 아니라 저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성 때문에 바울은 로마를 향한 전도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또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갈 때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너와 함께 한 자들을 다 네게 주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삶의 순간 순간, 특별히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주님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생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하나님 체험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삽니까?
하나님을 체험한 사도 바울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과 정말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기도하고 응답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전도하는 사람과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 바울의 삶은 달랐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담대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아니니아의 법정에 섰을 때에도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을 두렵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에게 들려진 주님의 음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담대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바울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면서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헬라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는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것을 가르친다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동이 일어나자 천부장은 치안을 핑계로 바울은 결박하여 감옥에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바울은 영문으로 들어가는 돌계단에 서서 소동하는 많은 유대인들을 향해 히브리어로 간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간증이 끝나기도 전에 ‘이런 놈을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라고 소리를 질러고 옷을 벗어던지고 난리를 쳤습니다. 놀란 천부장은 바울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천부장은 나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정식 재판을 받게 합니다. 그래서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저들 앞에 세우게 되지요.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공회에 서서 먼저 “나는 오늘 날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말했습니다.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양심에 따라’ 라는 말은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서든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 말이기도 합니다. 양심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자존심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는 사람을 시켜서 그의 입을 치라고 합니다. 바울의 양심선언을 물리적인 힘으로 막으려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네 입을 치실 것이다” 바울의 성격도 대단하지요.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바울은 그 법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어떤 권력도 바울을 두렵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 때 우리는 바울의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그러면서 그는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말도 안되는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잘못된 명령을 내리는 권위에 도전하고 항거하려는 태도를 갖습니다. 돌을 들고 데모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분신자살까지 합니다. 체제를 부인하고 권위에 도전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권위에 희생당했습니다. 밤이 맞도록 신문 당했고, 불법재판을 받았고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재판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판 자체를 거부하거나 재판장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순식간에 자기의 입장을 바꾸고 권위에 순종합니다.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란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권위를 잘못 사용하면 그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이 희생당합니다. 아버지라는 권위 때문에 술을 먹고 방탕하고 아내를 때려도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정부가 권위주의에 빠져 국민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권위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겁니다. 정부가 싫어도 그 권위는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권위가 타락되거나 권위주의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취한 태도는 참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는 권위에 도전하는 대신 지혜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6절을 보면 재판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두 그룹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두개인입니다. 부활도 천국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입니다. 또 다른 그룹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으로서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죽은 자의 부활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보십시오. 만약 바울이 항의하고 체제에 도전했다면 그들과 바울이 싸워야 했겠지만 바울이 진리를 선포하자 자기들끼리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흥미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혁명이나 데모하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폭력도 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어둠에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의 손으로 악인을 죽게 하지 않습니다. 악인으로 악인을 죽게 합니다. 물론 억울할 때 소리도 지르고 데모도 하고, 돈을 던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려울수록, 억울할수록 더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더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물론 핍박당하기도 하고 순교당하기도 하겠지요, 억울하게 그냥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은 순교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혁명을 일으키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빨리 보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순교하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을 때 그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한국교회가 부흥한 것이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억울하게 피흘렸습니다. 소리없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흘린 피를 보고 그들이 흘린 눈물을 보고 하나님의 부흥을 이 땅에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도 이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억울한 것 다 떠들고, 속에 담아두지 않고 소리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소리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빛을 드러내자 자기들끼리 분쟁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빛대로 살면 세상은 변한다. 빛은 결국 어둠을 이긴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진리를 드러낼 수 있습니까? 누가 데모하거나 혁명을 도모하지 않고 지혜를 사용하고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입니다. 진짜 보고 들은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신 주님
본문을 계속 보면 바울의 말 때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큰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군사들을 보내 바울을 보호하고 다시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아주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서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소요가 일어났던 그 날 밤에 주님이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라는 이 말씀이 얼마나 저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삶의 위기를 당했을 때나 중병에 걸려 병원에 누워있을 때 누군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괴롭고 지쳐있을 때 날 이해하는 친구가 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게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가 힘들어 할 때 가족 중에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곁에 있잖아요” 곁에 서서 위로하는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너무 큰 위로가 됩니다.
1988년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때 저는 원주제일교회 부목사로 있었을 때입니다. 종손이었던 저는 아버님의 장례 모든 것을 주관해야 했습니다. 제가 손수 아버님의 몸을 알콜로 닫고 옷을 입히고 입관을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집안 어른들 사이에서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저는 긴장해 있었고 또 오시는 조문객을 만나야 했고 시간이 되면 곡하는 대신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슬픔에 잠길 시간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의연하게 일들을 처리해 나갔지요. 그런데 원주제일교회 김명기 감독님이 구미까지 심방을 하셨습니다. 조화를 들고 시골집에 들어와서 그냥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제 손을 잡아주는데 그 때 저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손만 잡아주시는데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요. 저는 그 때 ‘아 목사가 심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곁에만 있어주고, 손만 잡아주어도 이렇게 위로가 되는데...그런데 여러분 지금 바울은 다른 분이 아니라 주님께서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곁에 서 계시는 주님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속에서 담대하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고 감옥에 있는 이 악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악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곁에 서서 격려한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주님이 곁에 서서 격려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의 길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생을 보낸 리빙스톤을 잘 알고 계시지요?. 그가 한번은 글래스고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한 학생으로부터 “뱀과 맹수, 독충과 질병, 그리고 식인종들이 들끓는 위험하고 무더운 정글에서 어떻게 혼자서 몇 달을 지낼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도 통하지 않고 적개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무엇이 나를 이 시간까지 지탱하도록 만들어 주었는지 알고 싶습니까?” 라고 되묻고는 잠시 말을 끊고 사자에게 물어 뜯겨 힘없이 늘어 붙은 왼팔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한 마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저는 이 말씀에 제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이나 리빙스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 큰 비전과 사명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두 번째 말씀은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했던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좀 어려움을 당해도 바울이 결국 가야할 곳은 로마입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로마로 가게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환난은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으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더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을 바울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비전과 사명을 가진 사람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리고 재판 받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바울은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눈을 열어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 로마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 로마 황제 가이사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그 면류관을 벗어 드리는 아름다운 장면을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꿈은 바울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이 비전 때문에 바울은 핍박도 환난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비전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어려움은 견딜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은 늘 바울의 가슴속에 더 큰 비전과 사명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을 때 주님은 소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실 소아시아는 바울이 너무 잘아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바울을 유럽, 즉 세계의 중심지로 몰아가신 것입니다. 바울은 철학의 도시 아테네를 보았습니다. 그 철학의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 고린도도 보았습니다. 고린도 역시 비너스 신전을 중심으로 음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병든 유럽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복음이 필요한지를 본 것입니다. 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왔을 때 주님은 이제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 로마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세계의 중심이 로마, 그 곳에 복음을 전하는 비전으로 바울의 가슴을 불붙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큰 비전, 더 큰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환란도, 핍박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있는 것, 재판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리고 비전으로 바울의 삶을 몰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바울은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가서 2년 동안을 감옥에 있게 됩니다. 사실 그는 별로 죄가 없었습니다. 2년 후에 유대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주의자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 재판보다 길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아마 바울은 주님이 주신 말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했던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자국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최고의 시민권리가 바로 로마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프로보카치오”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프로보카치오를 사용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일단 가이사에게 호소하면 그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사 앞에서만 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법적으로만 보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가이사에게 호소하고 로마로 갈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비전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그가 가서 복음전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감옥에서 나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를 가슴에 품고 로마에 복음 전할 계획을 세운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이 비전이 된 사람들은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냥 교회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체험 없이 교회 다니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곁에 서서 “두려워 하지마, 내가 있잖아!!” 이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또 우리의 눈을 열어 나와 내 가정, 직장을 넘어 부산을 보고 민족, 세계 열방을 보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존심지키려고 아웅다웅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격려와 주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격려로 그리고 주님 주신비전으로 세상을 이기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께서 곁에 서서 말씀하시되
행 23장 1~11절 / 서금석목사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밥 앉히고 불을 때라고 일렀습니다. 갓 시집 온 며느리는 밥 짖는 경험이 없었던 터라 밥 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은 시커멓게 타버리고 솥은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놀란 며느리가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시어머니는 "얘야, 괜찮다.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다"며 며느리를 위로하자, 옆에 있던 시아버지는 "아니다, 내가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랬으니 내 탓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신랑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닙니다.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와서 그리 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집 건너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그집에서도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 밥을 하라고 했는데 역시 밥은 타고 솥은 깨어졌습니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하자 새 며느리는 "내가 일부러 그랬습니까?"하며 시어머니에게 대들었고, 보고 있던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냐?"며 호통을 쳤고 지나가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자 새댁을 죽이라며 대들었습니다. 대판 싸움이 벌어져 집안은 순식간에 지옥처럼 돼 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집안은 어떤 집안이기를 바라십니까? 첫 번째 집안. 이 나라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무너지는 가정, 흔들거리는 나라, -'내 탓이다'라고 인정하며 이해하고 사랑할 때는 평화와 기쁨이 있지만 '네 탓이다'라고 책임만 추궁할 때는 미움과 싸움 밖에 생기는 것이 없습니다. 잘 안되면 -'내 탓이다' 잘되면 -'네 탓이다' 천국의 생활 원칙과 윤리, 그리고 그 기쁨을 이 땅, 여러분 가정, 여러분 삶 속에서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좋은 가정 -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 임을 밝혔지만 그냥 석방되는 대신에 바울은 로마군인들에 의해 성전 내에 있는 대회의장에 인도되었습니다. 그를 묶었던 모든 쇠사슬은 풀어졌으며 산헤드린 의회 앞에 세워졌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바울에 대한 혐의를 들어보고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어떤 곳입니까? 바로 예수께 사형을 결정 내린 곳이 아닙니까? 대단히 위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1절로 10절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1. 본문에 나타난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
⑴ 양심을 따라 살아온 바울(1)
"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이 첫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먼저 몇 가지 단어 정리부터 합니다. 먼저 양심-원문에 보면 선한 양심이 더 가깝습니다. 양심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양심이란 거짓말하려고 할 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나쁜짓 하려고 할 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양심이라고 합니다.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것은 한면입니다. 양심이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좋은 일 할 때 마음이 기쁘고 행복감으로 꽉 차는 것이기도 합니다.
섬겼노라는 말.- '어떤 원리나 규칙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양심대로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자신의 믿음대로 - 어떤 철학적 학문 때문도 아니고 이해관계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믿음'대로 선하게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이미 바울은 사도행전 21:28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율법을 훼방하고 이방인을 성전에 함부로 들이므로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발에 대하여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은 흠이 없고, 강제로가 아니라 선한 양심대로 믿음대로 가장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겼다 - 믿음대로, 말씀대로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참 당당하지요? 예수께 사형결정을 내렸던 산헤드린 공회, 바울 하나 죽이라고 결정하는 것 큰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비굴하지도 않았어요. 담당하게 첫마디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 없어 믿음대로 말씀대로 살아왔노라" 이런 당당함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내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선한 양심대로 살아온 삶이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 확신이 교만입니까? 바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르게 산 사람, 믿음대로 말씀대로 산 사람은 언제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참 교만하네. 대단하네." 그런 생각입니까?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우리 주님 앞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대로 바르게 살았습니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른 하나는 천국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도 성도 앞에서 세상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도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 당당하게 '양심대로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⑵ 대단한 용기를 가진 바울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대제사장 아나니아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아나니아는 48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일했는데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稅)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로마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다가 66년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집은 불탔고 도수관(하수도)에 숨어 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바울의 첫 마디를 듣고 아나니아는 즉시 '그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나니아가 왜 그토록 화가 났을까요? 왜 첫마디에 '그 입을 치라' 했을까요? 아나니아는 바울의 당당한 모습이 화가 났습니다. '양심대로 바르게 살았다'는 고백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냥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오. 한번 봐 주오' 했더라도 그냥 넘어갈까 말까인데 너무 당당하게 '나는 잘못이 없소'하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견딜 수 없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바울의 당당함을 보니 자기의 추악한 삶-욕심 많고 잔인했던 삶이 마음에 걸렸고 스스로의 양심을 괴롭혔거든요. 그러니까 '그 입을 치라' 야단야단 했습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법입니다.
바울이 공손하게 당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강력하게 맞섭니다.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위선을 질책하셨습니다. 회를 칠해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지독한 것이 '회칠한 무덤'입니다. 겉은 깨끗하나 속은 썩어 빠진 상태를 뜻합니다. '회칠한 담'이란 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해 흔들거리면서도 겉에 흰 회를 칠 해 튼튼한 것처럼 꾸미는 것을 뜻하는데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꾸짖는 말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저주선언까지 합니다. 대단하지요?
그 이유에 대하여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 무슨 말입니까? 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자가 법을 어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형벌을 집행하지 말아야 하는데 죄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격모독을 하는 처벌을 명했으니 명백히 율법을 어긴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주하고 보니까 그가 바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인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다는 사람들도 있고 알았는데 '네가 무슨 대제사장이냐?'는 풍자적 메시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하게 위선과 잘못 됨을 꾸짖는 바울의 용기입니다.
결코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용기가 쉽지 않지요? 권력가진 자 앞에서 지금은 내가 옳다고 생각되어도 후에 어떤 일 만날는지 모르기에 조용히 입 다무리고 사는 것을 지혜롭다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양심대로, 믿음대로 살아온 자의 용기, 사람보다 하나님은 기쁘시게 하고,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자의 용기, 저와 여러분이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⑶ 지혜로운 바울
성경 읽는 것은 생략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을 성전 안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오해 때문에 맞아 죽을 지경에 천부장이 구해 줍니다. 유대인들에게 회심이야기 들려주다 소동이 일어나니까 천부장이 바울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채찍질하려 하지 로마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위기를 면합니다. 이제 천부장이 로마법으로 판단할 수가 없어 산헤드린 공회의 판정을 받아 보려고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공정한 재판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자 또 다른 지혜로 위기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산헤드린 공회 구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충 교법사,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인 바리새인들이 1/2이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인 사두개인들이 1/2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없애는 일에는 의기투합하여 하나가 되긴 했지만(왜냐하면 이해관계가 같았기 때문에)내용으로는 도저히 두 종파가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파는 야당이고 사두개파는 여당입니다. 바리새파는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는데 사두개파는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초자연주의자들이었는데 사두개파는 인간의 의지를 믿는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천사와 악마를 믿는데 사두개파는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는 모세 오경과 구전전승들을 다 믿었는데 사두개파는 모세 오경만 인정했습니다. 바리새파는 국수주의자로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했는데 사두개파는 부유계층으로 로마와 친했습니다.
이런 갈등을 알고 있는 바울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싸움을 유도합니다. 6절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이 선언의 결과 어찌되었습니까?
9절에 '크게 훤화가 일어날 때' '훤화'가 무슨 뜻입니까? '비명 지르다' '울부짖다'는 뜻으로 큰 외침이나 고함 소리를 나타내는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단번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울편을 들고 나오지요?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바울이 위기를 피해갈 지혜를 써서 재판 자체는 무효가 되었지만 10절입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자, 묻습니다.
바울의 지혜는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성공한 듯 보였지만 실패했어요. 조용하게 문제가 처리가 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도 있지 못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실패가 좋습니까? 성공이 좋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성공이 좋겠지만 실패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이 만일 설득에 성공해서 편안해졌다면 예루살렘에 오래도록 머무르려 했을지도 몰라도 실패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즉시 떠나야 했습니다. 실패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라고 여겨지는 많은 문제들 속에서 겸손도 배우고, 인내도 배우고, 더욱더 하나님 의지하는 것도 배우고 새로운 하나님의 뜻도 다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커다란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실패 속에서 축복을 발견하시는 신앙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만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신앙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과 머리로 믿는 예수, 관념적 신앙의 예수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나려 한다고, 우리가 찾는다고 만날 수 잇고,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만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간절히 찾고 찾을 때 예수께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찾으세요- 만나주십니다. 부르짖으세요-응답주십니다. 수많은 문제 속에 살면서 하나님 찾지 않고 기도 드리지도 않으면서 해결되기만을 바란다면 무지한 것입니다. 저는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주님 새벽마다 성도들을 만나주세요. 새벽에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주세요. 병 낫는 기적을 체험케 해 주세요. 문제 해결할 지혜도 주세요. 좋은 사람붙여 주세요. 부르짖는 자마다 복 받고 살게 해 주세요. 이 제단 가득 채워 주세요.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며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 만나면 기뻐요. 힘이 나요. 평안해요. 열매가 있어요.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자 당혹스럽기도 하고, 힘들게 여겨지기도 했겠지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갈등에서 피해 나오기를 했지만 이제 다시 로마군 영문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실패한 자의 고뇌, 처량함도 있었겠지요. 바로 그 밤에 예수께서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밤에 실패한 밤에, 힘들어 주저앉아 있는 밤에, 짐이 무거워 쓰러져 있는 밤에, 몹시 매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밤에, 그 밤에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위기의 밤, 고난의 밤, 그 밤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활짝 열리시기 바랍니다.
찾아오신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셨습니다. 그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덴 전도에서 별 재미를 못보고 시무룩해 있는 바울-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을 듣고 바울이 힘을 얻어 일년 육 개월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이 밤에도 환상 중에 바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가장 힘든 때 주님이 곁에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울에게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도 가장 힘들어 할 때, 가장 외로워할 때, 가장 괴로워할 때 곁에 계셔서 함께 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시려고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바로 저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뭐라 하셨습니까? "담대하라" -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는 말입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대제사장 로마 천부장 - 무서워 말라. 세상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 담대하라. 성도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세요. 누구 의지하며 사십니까? 남편요? 아내요? 부모요? 자녀요? 친구요? 동료요? 많은 경우에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떠날 사람 많지 않습니까? 참 의지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의지하는 사람은 담대해 질 수가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 의지하고 담대하라" 그리고 뭐라 하셨습니까?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먼저 바울을 칭찬하셨지요?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 같이"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선교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칭찬 들으면 힘이 나지요? 낙심해 있는 바울, 어깨 쳐져 있는 바울에게 칭찬하고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바울아 너는 로마까지 갈 것이다. 이 말 아닙니까? 언제 어떻게 갈 것이라는 언급은 없었지만 네 인생이 예루살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까지 갈 것이다. 할렐루야. 왜 할렐루야인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19:21절로 돌아가 봅니다.
"이 일이 다 된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서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리"
바울이 얼마나 로마에 가고 싶어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상된 곤욕이긴 했지만 뭔가 풀리지 않아 풀이 죽어 있는 바울에게 "담대하라 네가 로마에도 가리라" 그 동안 숙원인 로마 행을 드디어 주님께서 확인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제가 미국 유학비자 받으러 갔다가 한번 거부당했었습니다. 목사 신용도가 별로 좋지 않아서요. 소문은 다 났는데 참 낙심 되드라구요. 숨고 싶더라구요. 기도하는데 "내가 보낸다" 그런 주님 음성이 느껴지더라구요. 걱정이 사라지더라구요. 모세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5-6)
정리하면서
산헤드린에 선 바울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떳떳하게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꺼릴 것 없는 자가 당당한 법이지요.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꺼릴 것 없이 당당하게 양심으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용기있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실패 속에서도 당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낙심해서 로마군 영문에 있었던 그 날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로마까지 가리라"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주님, 내가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내 곁에서 "아무개야!" 부르시는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담대하라. 아직도 네가 할 일이 있다. 실패라고 여겨지는 그 속에서 사랑의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깨닫고 믿음 지키며 힘차게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행 23장 1~23절 / 신성종목사
오늘의 요절은 11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주께서 밤에 나타나 위로하시고 계시를 주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11절)는 말씀 중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언제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는가?
먼저 언제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항상 바울 안에 계셨고, 동행했지만 그러나 육의 모양으로 항상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특별한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 “그 날 밤에”(11절)라고 했습니다.
그 날 밤이 어떤 밤입니까? 10절에 보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이 서로 싸우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2)물론 바울이 처음 믿게 되었을 때에도 나타났습니다(행9:4절).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면서.
(3)선교지를 바꾸어야 할 때에도 주님은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16:9절).
(4)18:9-10절에 보면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서 “두려워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5)오늘은 그 다섯 번째의 경우입니다.
저도 주님을 만났지만 그것은 기도할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우는 제가 처음 믿게 되었을 때와 위기에 놓였을 때였습니다.
제가 주님을 최초로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10월경이었습니다. 부흥회 때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때에 185장의 찬송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는 말씀과 함께 로마서 14:7-8절의 말씀을 제게 주셨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는 말씀과 함께 갈라디아서 2:20절의 말씀을 제게 주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두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대전 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 새벽에 주님께서 요한복음 12:24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충현 교회에 있을 때에는 주님께서 직접 제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제게는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가장 화려한 때였지만 그러나 내적으로는 가장 힘든 때였습니다.
그러나 사표를 내고, 하와이 코나에 가서 두 주간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제게 나타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충현 교회를 해치지 말라. 너의 원수는 내가 갚아주마. 너의 할 일은 따로 있느니라“.
그 후에 미주 성산교회에서 만 6년간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목회를 했습니다. 거기서 두 번에 걸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위로의 약속이었습니다. 이사야 41:10절의 말씀과 예레미야 33: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월평 동산 교회를 맡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기도할 때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었습니다. 내가 네게 준 것을 다 사용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직접 나타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사명을 주실 때와 위기에 처했을 때 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체험은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체험을 모든 사람들에게 꼭 같이 공식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진리입니다.
2. 그러면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인가?
(1)첫째로 “담대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 담대하라고 했습니까? 그 환경이 바울이 담대할 수 없는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세웠을 때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했습니다(수1:6).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서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담대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할 때 주님은 나타나셔서, 혹은 성령을 통하여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2)둘째는 로마에서도 주의 말씀을 증거 하게 될 것이란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11절). 사실 당시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형편을 보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더구나 땅 끝인 스페인에 가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의 망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네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이 이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였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당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가 많았고, 또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은 이 위기가 바울에게는 그의 가장 큰 소망인 로마에서의 선교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온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3. 말씀을 듣고 바울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만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주의 음성을 들은 자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1)바울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먼저 바울은 천 부장을 만나 유대인들의 공모를 말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일러준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단순한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즉각적으로 해야 합니다.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4. 그러면 본문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크게 네 가지의 교훈을 줍니다.
(1)주님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큰 소리로 말씀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리들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름답고, 더 매혹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눈을 감고 기도할 때만 들여오는 아주 세미한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일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과 믿음을 의지해서 결단해야 합니다.
(2)[주의 음성을 듣지 않고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왕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의 뜻을 위하여 일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과 주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일이라고 다 주님의 일은 아닙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직접 주실 때도 있고, 성경을 통해서 주실 때도 있고, 설교를 통해서 응답이 올 때도 있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응답이 있을 때도 있고, 환경을 통해서 길이 열려 응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3)일단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면 그것을 위해서 내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반드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주님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주님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사용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사울의 병기나 갑옷을 다 버렸습니다. 자기가 목자로 있을 때 사용했던 지팡이와 물매 돌 다섯 개만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힘이 되신다는 것을 믿고, 말씀에 의지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내 이름으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4) 눅5:7절에 보면 베드로는 많은 고기를 잡에 되었을 때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불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한 동역 자들을 다 불러서 함께 일하는 partnership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노래는 아무리 잘 해도 혼자 부르는 것보다는 합창이 더 아름답고, 좋듯이 협력자가 다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도 여러 가지의 색깔일 때 더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항상 믿음의 창문을 열고, 곁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 같이 위대한 인물도 나 혼자인줄로 착각하고 절망 중에 있을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힘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동행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고백을 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바울을 향한 주님의 격려
행 23장 11절 / 김영규목사
격려하시는 주님 : 담대하라
본문의 첫 번째 주제는 담대하라는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때에 유대인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천부장의 영내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주님은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격려하시기 위해 나타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특별히 곤경에 처해 있는 여러분을 격려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주님께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경우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다메섹에서 바울이 회심할 때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예수님을 박해하러 다니다가 갑자기 주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네가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9:6) 두 번째 나타나신 것은 드로아에서입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역을 통과하여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날 바울에게 아시아를 떠나 유럽 마게도냐로 갈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9-10)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고린도에서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네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3차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적대적인 행동에 직면하여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행22:17-18) 다섯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본문이고, 여섯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바울이 로마로 압송당할 때입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서 보름 가까이 표류했습니다. 배를 움직이던 선원들은 기회를 봐서 도망치려 했고, 죄수를 호송하던 로마 병사들은 여차하면 죄수들을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에서 주님이 바울 곁에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4-25)
본문에서 주님이 하신 격려 말씀은 단 한 마디입니다. 담대하라!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천부장의 영내에 갇혀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재판을 더 받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풀려날는지, 혹은 더 붙잡혀 있을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차가운 돌방에 갇혀서 편히 잠을 자기도 힘듭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라 하셨습니다. 담대하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함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담대하려면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1:9) 여러분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일을 증언하라
두 번째는 주제는 주님이 주신 전도 명령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나를 증언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라! 우리가 담대해야 될 것은 바로 이 전도의 사명 때문입니다. 세상에 겁 없고 담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조폭들과 사기꾼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별로 없어요. 아무에게나 대들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담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기껏 범죄 와 사기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담대함은 폭력을 행사하고 사기 치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담대함,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 진리를 전하는 담대함, 천국을 전하는 담대함, 영혼을 구하는 담대함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바로 이런 증거자의 사명감, 전도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뭐라고 증거 했습니까?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19:35)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21:2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요일4:14)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행10:42)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사도 바울이 뭐라고 증거했습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일찍이 주님은 사도들에게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12사도를 보내시면서, 혹은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이 명령을 하셨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7-8)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마다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습니다. 하나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공로나 업적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용서를 받을 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당장 세상을 떠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확신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세요. 그래서 다 천국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영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범사에 잘 됩니다. 건강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셔서 영혼의 매임에서 풀려나시기 바랍니다. 죄의 매임에서 풀려나세요. 정죄와 저주에서 풀려나세요. 지옥의 파멸에서 벗어나세요.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고침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병 고침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혼과 육신의 치유 역사가 충만히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야 합니다. 직장에서 함께하는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통해서 이웃에게 예수님을 알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서 우리는 담대하게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처럼 로마에서도
세 번째 주제는 로마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변변히 전도하지도 못하고 고생만 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유대인 폭도들에게 쫓겨서 천부장의 병영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법정에 서서 심문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바울은 용감하게 예수님을 알렸습니다. 천부장에게, 유대인 군중들에게, 공회원들에게,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총독 베스도 앞에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은 굽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높은 사람들 앞에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알린 것처럼 로마에서도 알려라! 할 수 있다면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라!
바울이 로마로 가려 한 것은 주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미 여러 차례 로마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19:21)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원한 것은 로마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점령자요 약탈자였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한 원수들이었습니다.(요11:48, 행18: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한 것은 로마가 당대 세계 최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제국의 한 복판에 복음의 깃발을 꽂고 싶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주후 117년 경 제국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을 때에 지도를 보면 거창합니다. 오늘날 스페인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서유럽, 중부와 남부 유럽 전체, 흑해 연안, 터키,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지역을 포함한 아시아,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모로코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대부분이 로마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지금의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가 큰 영토와 인구를 자랑하지만 로마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는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거대한 지중해가 마치 로마 제국의 한 가운데 있는 호수와 같았습니다. 바울은 이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심장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꽂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도전은 상당히 무모해 보였습니다. 로마는 문명 도시였고, 세속의 중심이었습니다. 각종 우상과 환락의 도시였고, 감히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와 전통의 도시였습니다. 어떻게 감히 단신으로 이 로마에 뛰어들어 복음을 전한단 말인가? 저는 이 시대의 흐름을 보면서 때로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절대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사고, 법도 윤리도 없는 막 되어먹은 사람들, 자기주장만 하면서 소통을 외치는 사람들, 물질은 풍요한데 정신은 동물적이 되어가는 사람들, 향락과 코락주의, 아무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막가파식 대인관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문화,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면서 생명을 조작하는 과학, 돈이 지배하는 윤리, 어느 하나도 내 힘으로 도전해 볼 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껏 많지 않은 성도들 앞에서 매주 설교하면서 목청 높이는 것이 전부인 나! 세상을 언제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그러나 바울은 이 무모한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상륙한지 약 300년 후,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를 억압하지 못하게 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적극 믿도록 권장하였습니다. 복음의 자유만 보장한 게 아닙니다. 사회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죽음의 검투를 없애고, 법정과 군대의 주일 휴무 제도를 만들고, 축첩을 비롯한 비성경적인 풍속을 없애고, 우상 숭배를 제한했습니다. 바울 한 사람이 로마를 뒤집는 세계사의 변혁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로마에 도전해야 합니다. “나같이 연약한 사람이 무슨 전도를 하겠나? 저 강력한 사람들을 무슨 수로 변화시키겠는가?” 과소평가 하지 마세요. 전도는 내가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바울처럼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로마는 어딥니까? 불신 가족과 가문이 로마입니까? 가족 구원, 가문 구원에 도전하세요. 사장님 이하 전 직원이 돼지 대가리 놓고 고사 지내는 분위기의 직장이 로마입니까? 그런 직장 속에 복음의 깃발을 꽂아 보세요. 불신앙의 친구들이 로마입니까? 친구들 복음화에 도전하세요. 내가 아는 주변 복음화에 도전하세요. 하나님께서 결과를 주십니다. 로마를 보세요. 세속 도시, 문명도시, 화려한 도시, 번영하는 도시, 무엇 하나 뒤지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는 외형적으로 화려했지만 영적으로는 텅 빈 우상과 공허의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방황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과 주술에 빠져 어떤 평안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 환락과 쾌락, 술과 여인에 빠져서 살 수 밖에 없는 무료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도시가 그렇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화려한데 영적으로는 죽어 있어요. 복음을 들고 공격하면 다 정복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들고 도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