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같이 들으면 좋은 음악 ->Secret Garden 의 Gates of Dawn
사카모토 류이치의 Merry Christmas Mr.Lawrence(리믹스버전도 굿!)
쏴아아-
기분 좋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풀잎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상쾌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전체를 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인 언덕의 정상에 올라서 유스젠은 잠시 멈추었다.
자신의 발아래에 펼쳐진 마을, 웨일즈를 내려다보면서 웬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당연한 느낌이다-, 그래. 당연히 집이니까.
유스젠은 단번에 가파른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의 아래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 있었다. 녹이 슬어버린 대문의 간판에는 노란 필기체로 무언가 휘
갈겨져 있었다.
‘프란시스 공방’
“유스젠 왔느냐?”
야외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담뱃대를 입에 물은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물었다.
허리가 굽어서인지 왜소한 노인의 이목구비는 훤칠해서 젊었을 때는 필경 시원시원한
모습을 했을 것이다. 유스젠의 뒤를 따라 오는 에일린에게도 그 노인은 간단한 고갯짓
으로 인사했다. 유스젠이 뚜벅뚜벅 노인에게 걸어와서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멋쩍게 웃으면서-,
“가면.. 깨져 버렸어요.”
월광화 (月光花) , The Fourth Story
본명은 크리아 샬롯. 기명(妓名)은 세실리아. 혹은 플로라의 세실. 또는..
수많은 이름을 가진 그녀는 천천히 침대의 이불 속에서 나와서 침대 옆에 위치한 창문
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햇빛이 조금 눈부셔서 미간을 찌푸리며 크리아는 기지개를
오랫동안 했다. 기지개를 켜면서 창밖으로 곁눈질하자 크리아의 눈에 어떤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귀중한 손님이 오셨네..”
허리께까지 흘러내리는 긴 갈색머리를 엉성하게 땋아 내리면서 꿈결같이 중얼거렸다.
소박한 치마를 걸쳐 입고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탁탁 털면서 크리아는 야외로 나왔다.
.
.
.
“어디 보자... 완전히 망가졌구먼..”
프란시스 공방의 노인. 정확히 말하자면 윌리엄 로체 D. 프란시스는 유스젠의 외할아버지이
자 에우스리아 최고의 장인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무기나 갑옷 등은 모두 나라의 최고급
품으로 통했다. 프란시스 노인이 제작하는 물품에는 모두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따라서 유스젠이 걸친 검은 비로드 상하의에도 그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 보자.. 이 가면은 63호인가..? 왼쪽면 얼굴에 금색으로 수놓은 아주 정교한 작품
이지.. 코 아래까지 얼굴을 가려주고 눈 부위에 구멍을 뚫지는 않았지만 이걸 통해서 앞을
볼 수 있게 하지.. 아깝게도 부서져 버렸네.“
“죄송해요. 다시 만들어주셨으면 하는데;”
프란시스 노인이 갑자기 얼굴을 들어서 손자의 얼굴을 침침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던가..?”
“..네. 간신히 시간을 맞춰서 웨일즈에 도착했네요.”
“나쁜 녀석.. 쯧쯧. 그런 일이 아니면 이 할아비는 보러 오지도 않구..”
허리에 등짐을 지고 힘겹게 일어서서 노인은 지팡이를 짚었다. 얼마 간 시간이 지나자
노인은 찻잎을 띄운 따끈한 잔을 유스젠의 앞에 놓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얼마간 어색함이 흐르자 유스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알아내지 못했어요. 제 정체에 대해서.”
“..그럴테지. 매일 밤마다 머리칼이나 눈동자 색이 변해버리는 사람이 이 나라에서
너 말고 누가 있겠느냐?“
유스젠은 하기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곧 입을 떼었다.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라.. ”
프란시스 노인은 잠시 깊은 묵상에 빠졌다. 유스젠의 아버지는 노인에게도 앙숙임이
자명했다. 대략 16년 전 자신의 딸과 외손자를 내버리고 고향을 짓밟은 작자. 또한
자신의 딸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남자.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머리가
약간 혼란스러웠다.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이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자신을 짓밟아버렸는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만나고자 하는 것인가.
필경 사위는 유스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모를 터이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여
버릴 것이다. 노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가 또 어색해지자 노인은 화제를 전환시켰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성묘라도 갔다 오너라. 제프랑 너희 인그리트가 많이 기다리겠다.”
자신의 절친한 소꿉친구와 어머니의 이름을 듣자 유스젠은 말없이 시선을 자신이 쥐고
있는 찻잔으로 옮겼다. 한참동안 찻잔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스젠은
말없이 천천히 일어나서 코트도 안 걸친 채 프란시스 공방의 밖을 나가버렸다.
“오늘도 아주 긴 밤이 되겠군..”
턱을 괴면서 프란시스 노인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제프와 어머니의 묘는 웨일즈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그리트 프란시스.
‘사랑받았던 딸이자 어머니.’
묘비에 새겨진 글이었다. 유스젠은 천천히 어머니의 묘비 앞에 꿇어앉아서 묘비를
오른손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어머니는 묘비에서조차 ‘어머니’
새겨졌지, ‘사랑받았던 아내’로써 새겨지지 못했다.
유스젠은 그 묘비명 뒤에 덧붙히고 싶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받았던 딸이자 어머니. 그리고 존경받았던 후비.”
조금 놀라울지 모르겠지만 유스젠의 어머니는 분명 후비였다. 현재 왕으로써 군림하고
있는 요하네스 헤메르 1세의 두 번째 부인이니 즉 왕비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만약... 만약에 요하네스 헤메르가 유스젠의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평범한 소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하네스 헤메르라는 작자가 어머니를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유스젠은 제 2 왕위 계승자로써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으리라.
유스젠은 천천히 일어나서 묘비를 오랫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야. 유스젠.”
그의 등 뒤에서 어떤 소녀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유스젠은 아무 미동도 없이
시선을 한 곳에만 집중시키고 있었다.
“.. 너무하네.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소녀의 흰 팔이 유스젠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는 얼굴을 그 등에 서서히 기대었다.
유스젠은 가만히 있었다. 등 뒤에 있는 소녀의 도발적인 행동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는 짧게 한 마디만 말했다.
“...세실리아 양..”
“그렇게 부를 건 없잖아. 소꿉친구한테.”
“너도 많이 변해버렸구나.”
“..넌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어.”
유스젠이 ‘세실리아’라고 부른 크리아 샬롯은 유스젠을 안았던 팔을 천천히 풀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건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닌 자괴감이었다. 에우스리아의 남자들의
우상인 ‘플로라의 세실’이 유일하게 유혹하지 못한 남자. 그것이 소꿉친구인 유스젠
이었다.
이제 소꿉친구로 돌아갈 수 없는. 너무나도 커버린 유스젠의 뒷모습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면서 크리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변해버릴 수밖에 없는 거잖아. 유스젠.”
“......크리아, 난-,”
기명이 아닌 본명을 불렀지만 그 말을 단호하게 끊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래. 변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내가 가수가 된다고 했을 때 너는 나를
말리지도 않았어.“
조금씩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듯 하다가 엷은 눈물이 크리아의 뺨을 타고 흘러서
바닥을 적셨다.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유스젠에게. 사실은 잊으려고. ‘널 잊기 위해서’ 가수가
된 거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유스젠 또한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은 아니
었지만 모른 척하는 그가 너무 야속했다.
에우스리아의 가수는 곧 창기였다.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낭랑하고 얼굴 모양새도 꽤 매력적이어서 가수가 돼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 온 나라에서 열광하는 ‘플로라의 세실’이 되었지만
서도 전혀 기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황홀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진한 매력을 자아내는 외모. 그런 외모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유아 시절 때 얻은 상처를 때우고
때우느라 처참하게 망가져 버렸다는 것. 그 정도는 크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조차 몰라주는 그가 또 야속했다.
“하하.. 요즘 들어서 자꾸 미움 살 짓만 하네. 나는..”
유스젠은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날 처음으로 크리아는 유스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눈물이 한 줄기 떨어졌다.
“미안해.. 크리아..... 미안해.”
“나도 느닷없이 껴안아서 미안. 그냥 한 번쯤은 구멍 난 상처를 메워주지 않으면 안
돼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거라면 언제든 해줄게. 그니까 그만 울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유스젠이 자상하게 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크리아가 물었다.
“오늘 밤에 너희 집으로 가도 돼?”
“보름달이 뜰 거야...날 만나는 건 힘들어.”
“알아. 널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너희 할아버지를 뵙고 싶어서야.”
“... 그래.”
자신의 집으로 온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유스젠은 곧 자신이 우스웠다.
크리아는 변함 없는 그를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널 좋아할 수밖에 없나봐.’
.
.
.
이제야 조연다운 조연이 나왔군요 ㅇㅂㅇ
유스젠의 가족 관계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도 유치하게 설레네요;
저는 리플은 없든 말든 별로 상관은 안 합니다만 리플이 없으면 좀 섭섭합니다.
그니까 지나가다 읽으셨다면 발자취 정도는 남겨주세요 ^^
첫댓글 “가면.. 깨져 버렸어요.”......크하! 유스젠에게서 이 말을 듣는순간[...응?] 어찌나 설레이던지!< 들어나기 시작한 유스젠의 가족사..... 오호. 이거 제가 다 놀라운데요. 흠흠, 어쨌든 애독하고 갑니다. 그럼, 쭈욱 건필해주세요♡
올인님도 건필하시길 바라고 매번 리플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