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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sh on You 1
:너와 나의 연결 고리
좋아요. 마지막. 사진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살짝 닿기만 하듯 앉아 한 쪽다리를 허공에 올리고 허리를 뒤로 넘긴 자세로 30분을 있었더니 찰칵- 마지막 소리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보 촬영은 좋지만,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아. 아흐.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매니저 용식이가 쿵-쿵- 달려와 내 허리를 받쳤다. 역시 주여니씨야. 사진작가의 목소리에 용식이 부축을 받으며 웃어보였다. 영화촬영을 다 끝내고 오랜만에 찍은 매거진 화보였다. 영화촬영을 할때면 다른 스케줄을 잡지 말라 그렇게 이실장님에게 경고를 했더니. 영화 촬영 끝난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 스케줄이 풀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 용식아. 용식이만 들을 만큼 작게 말하니 용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매니저인 만큼 나와 거의 한 몸으로 지내다 싶이 스케줄을 같이 소화하는 용식이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름 중학교 시절부터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착실히 연기 경력을 쌓았다. 치열하게 오디션을 보고 조연부터 주연까지 오기위해 남들하는 만큼 노력하고 그보다 더 하려 아등바등댔다. 물론 비슷한 상황의 다른 동료들 보단 운좋게 일찍 주연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아직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모든 여배우가 그렇듯 수없는 부도덕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니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스폰을 받지 않고 이만큼 올라오기까지 어린 나이에 별별 일이 다 있었다. 그 별별 일들을 겪으며 내가 느낀건, 지금의 자리를 지키려 바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자리에 맞는 에티튜드. 너무 많이 고개숙이지 않고, 너무 많이 미덕을 보이지 않는 것. 그렇다고 시건방지거나, 네가지 없는 행동을 일삼아서는 안되지만. 적당한 것. 제일 어려운 그 적당함을 유지하는 것이 었다. 몇 년 전이었으면 저런 사진작가의 말에 정말요? 라며 90도로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면. 지금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쁘게 찍어준 덕분이죠. 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 화보를 찍는 스텝들의 인사에 감사합니다. 보단 수고하셨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누나!"
"용식아. 9시 넘었어? 차 시동걸어. 나 빨리 갈아입고 가야해."
"10시에요 누나! 빨리 나오세요!"
화보촬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부모님 결혼기념일 날인데. 우리 집은 아들 하나 딸 하나있는 부모님말을 빌려 단촐한 가족이었다. 그러니 가족행사엔 무조건 참석할 것. 부모님이 내세운 신조였다. 연예인인 나도 예외가 없었다. 연예인은 그저 너의 직업일뿐 이라는 아빠의 말. 이렇게라도 모이지 않으면 다 큰 자식들과 나이들어가는 부모님 사이가 소홀해진다는 아빠의 말씀을 어릴때 부터 들어온 터라. 약속 시간에 늦더라도 참석해야만 했다. 게다가 엄마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빤 결혼기념일은 엄마의 제2의 생일 같은 거라며 화보촬영 떄문에 늦을 거라는 내 말에 연설을 늘어 놓으셨다.
수고하셨어요. 고생하셨어요. 촬영팀들에게 인사를 하고 같은 말을 들으며 대기실로 달려갔다. 일단 높은 힐부터 벗어 던지고 고가의 옷들은 조심히 벗어 개어두었다. 입고온 스키니진과 흰 티 가디건을 재빨리 입고 달려 나갔다. 시동을 걸어논 차에 올라타니 타이밍 좋게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보니 '우리집 백수' 가 떴다.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주 원이었다.
"어, 지금 가."
'한시간 지났다. 누나 너 촬영 끝나긴 했냐?'
"지금 간다고 했잖아 이자식아!"
'빨리와. 나도 약속있거든.'
"니가 뭔 약속이 있어. 이 백수야. 또 놀러가는거지? 죽고싶지?"
'누나 누나 카드 나한테 맡긴거 기억나?'
"어, 기억 너무 잘나. 우리 주 원이 약속있구나. 누나가 빨리 갈게."
'응. 나 인생 오늘만 사는 애인거 알지?'
되도 안는 협박질이다. 그치만, 두 분의 결혼식 기념일에 늦을 것을 대비해 카드를 원이에게 맡긴 기억이 생생하다. 작년 이 맘 쯤엔 드라마 촬영이 지연되어 늦었다. 당연 휴대폰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새벽에나 끝나 지친 몸을 이끌고 씻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내려고 침대헤드에 기댔다.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촬영하고 와 녹초가 된 몸이 팔팔해졌다. xx클럽에서 몇번을 긁어주셨는지 손으로 드래그를 하는걸 세 번은 한 것 같다. 몇 만원이면 그냥 넘어가주려 했다. 근데, 기본이 몇 십만원인 카드 금액은 군데 군데 몇 백으로 찍혔다. 그 클럽에서 골든벨을 울려주셨는지. 백 단위가 곧 천 단위로 바뀔 것 같았다. 그 길로 완전 무장을 하고 달려가 원이의 머리채를 잡고 나왔다. 잡고 나온지 1년 밖에 안됐는데. 생각만으로 이렇게 깊은 빡침이 밀려오는데, 내 백수 동생은 정신을 못차렸다. 화목한 가정에서 큰다고 다 바르게 크는건 아니랍니다. 보여주듯 내 동생 원이는 고등학교까지 잘 졸업하고 성적에 맞춰 간 대학을 6개월 만에 때려쳤다. 그리곤, 중학교때부터 연예인을 시작한 나를 보며. 그니까 우리집 우월한 유전자를 나보다 더 받고도 인생을 막 살고 있던 원이는 돌연 모델을 한다고 설치고 다니는 중이었다. 딱히 성과가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모델일이 흥미는 있는지 워킹 학원을 꼬박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이쪽 일은 나의 고난과 역겨을 보며 절대 반대라던 부모님도 한심하게 살아가는 것보단 이쪽 일이라도 하는게 어떤가 싶어 원이를 그대로 방치해 두고 계셨다. 그래서, 작은 집 구하는 것도 내 돈. 워킹 학원 보내는 것도 내 돈. 23살이나 먹은 원이를 먹여살리는 건 내 돈이었다. 능력있는 누나만 믿고 속편히 사는 원이가 요즘 내 최대의 고민이었다. 언제 모델 일 재미가 없어질지도 몰라 불안하기도 하고. 이쪽 일을 더 반대했던건 부모님 보단 나였으니.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아빠와 엄마는 교사셨다. 교육자 두 분의 손에 길러진 우리는 이상하게도 두 분의 머리를 닮지 못한듯 공부엔 흥미가 없었다.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으로 어린나이에 데뷔를 하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계속해서 연예인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어릴때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가르치신 부모님 덕에 나는 주체적으로 이 일을 계속 하겠다고 했고 부모님은 나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1순위는 변함없이 가족이다. 피치 못하게 일에 밀리고 있긴 하지만.
"용식아 밟아. 법 주수해서. 최대한으로."
"네!"
"나 데려다 주고 너 퇴근해."
"진짜요?"
"그럼? 기다리게? 나 그렇게 비양심적인 사람 아니거든. 너도 힘들텐데. 오늘은 쉬고 내일도 스케줄 있잖아. 내일 봐."
"최대한 밟아도 안전하게 도착할게요. 누나!"
/
"안오는 줄 알고 케이크 자르려 했지."
용식이를 닥달해서 30분 거리를 20분에 왔는데 문을 열자 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 원이의 손에 들린 성냥에 붙은 불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도 한적한 곳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시는 두 분이 특별한 날에만 들리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게다가 아빠 생신과 엄마 생신에는 미처 뺄 수 없는 촬영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1년만에 등장이요. 라며 가까스로 세이프 했다는 의미로 작게 박수치는 원이를 한 번 흘기고 자리에 앉았다. 어딜 간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지 왁스칠한 원이의 머리가 보였다. 하얀 셔츠에 슬랙스까지. 누구 동생인지 잘나긴 잘났다. 이게 바로 누나가 업어키운 정인건지. 저렇게 얄밉게 구는데도 그려러니. 무엇보다 이 자리에 늦은 내가 죄인이기도 하니까.
"얼굴 보기 힘들구나."
"여보, 바쁜 직업이잖아요."
"얼굴이 작년보다 반쪽이 되서 그렇지. 일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야지."
"아빠 괜히 그래. 너한테 심통나서."
내가 심통나 보여? 투닥이는 두 분을 보고 웃었다. 아, 좋다. 집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하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원이의 집중의 박수 덕분에 상황을 정리한 두분이 초에 붙여지는 불을 보며 미소를 띄우셨다. 케이크 치고는 비싼 3단 케이크가 예쁘다며 날 향해 웃는 엄마를 보니 오늘도 촬영 열심히 하길 잘했다. 생각이 든다. 불이 붙은 초에 두 분이 호- 동시에 불고 원이와 나는 박수를 짝짝짝- 그리곤 다같이 활짝 웃었다.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음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머, 주여니씨..아, 죄송합니다. 고객님."
"아니에요. 맞아요. 저. 저 알아보신 김에 저희 가족 사진 한장 부탁해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라며 핸드폰을 받아든 직원이 우리 네사람의 사진을 찍어주고, 원이가 발을 동동구른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음식만 아니면 뒷통수를 한대 때려주는건데..음식을 들고 들어오는 언니가 딱 봐도 내 팬이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먹을 꽉 쥐어 원이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이게 메롱이란다.
"주문하신 음식 다 나왔습니다. 즐거운 식사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 이것만 먹고 가요. 엄빠."
"츤츤히므그.(천천히 먹어)"
"빨리 먹어야 돼. 약속시간 늦었다니까? 이게 다 누나때문이야."
그래 내가 약속 시간에 1시간 반이나 늦긴 했다. 그렇다고 교양까진 없어도...게걸스럽게 먹을 건 또 뭐야. 원이가 포크질을 마구해대며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원이는 모델학원 다닐만 하고?"
"느에. 즈므쓰으(네, 재밌어요)"
"아빠가 말씀하는데, 죽을해 주 원?"
"느느가 느즈쯔느(누나가 늦었잖아)"
"원이 아까부터 약속있다고 했어. 너네 아빠가 유난인거야. 가족 같이 있는 건 봐야한다고 하셔서 원이가 못 일어나고 있었어."
"넌 어디 가는데?"
"나 오늘 재혁이형 알지?"
재혁이는 나와 같은 아역배우 출신이다. 나보다 연차도 오래 됐고. 아역배우에서 성인배우로 넘어가는 드라마에 같이 아역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친해지게 됐는데. 나보다 2살 어린게 꼬박 반말이었다. 그치만, 나름 친하다고 할 수 있는 배우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원이도 알게 되고.
"아, 맞다. 누나가 소개시켜 줬지. 오늘 여기 호텔 지하에서 만나기로 했어. 재혁이형 드라마 들어간다던데. 김원호 작가님꺼~?"
"뭐?"
"누나가 작품 같이 하고 싶어하는 그 작가님 맞지? 여름안에서 인가. 그거 쓰고 5년 동안 잠적하신."
"이재혁이 김원호 작가님 드라마 주인공이야?"
"어, 누나 몰랐나 봐. 난 또 누나가 다른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연예인이다 뭐 이런 이야기도 들리길래 톱스타인줄 알았더니..뭐 그것도 아닌가? 그렇게 좋아하는 김원호 작가님 소식도 모르고 말이야. 재혁이형이 그 드라마 연출하는 PD님 만나는 자리에 불러줘서 가는 길이야! 나 모델보다 연기자로 먼저 데뷔하는거 아니야? 누나 나한테 잘해라. 내가 누나보다 더 뜰지 어떻게 알아? 아빠 좋은 시간 보내세요! 누나가 여기 호텔 스위트 룸도 잡아 뒀어요! 이건 내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 헤헤. 그럼 저 먼저 가요!"
김원호 작가님이라니. 김원호 작가님이라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여름안에서> 시청률 40퍼센트를 넘긴 드라마를 쓴 작가님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보다 탄탄한 대본으로 유명했다. 5년 전 여름안에서 오디션을 봤을 때 최종까지 올라갔지만. 그 전에 찍었던 영화 촬영이 연장되면서 중도포기를 했었다. 워낙 드라마판에서 명성있는 작가님이고 작가님의 전작을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은 분이었다. 그런데 돌연 5년 동안 작품을 하지 않으시고 해외로 떠나셨다. 안타까웠지만 복귀작은 꼭 하고야 말겠다. 그런 다짐같은게 있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 한테도 김원호 작가님을 향한 내 애정을 알리고 다녔고.
최근에 영화를 끝내느라 드라마 시나리오는 처다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남주가 캐스팅 되어있다니...실컷 놀린 원이가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일어섰다. 내가 야심차게 준비한(물론 원이 머리에서 나온, 그치만 내 돈으로 준비한) 서프라이즈 까지 밝히고 테이블 위로 카드 키도 올려두었다. 다시 한 번 날 향헤 메롱을 하고 원이가 문을 열고 나갔다.
"어머, 여니야. 이런 것 까지..너도 바쁠텐데.."
"우리가 딸하나는 잘키웠어. 그렇지?"
"그러니까요. 그런데, 여니야 괜찮은거야? 원이가 한 말 때문에...네가 바라던 작가님 이야기 맞지? 너무 신경쓰지말고..."
"아, 아니에요. 엄마 아빠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 먼저 일어나요. 두분 30주년 축하드려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두 분이서 서로를 향해 웃는 걸 보며 급히 일어났다. 이 호텔 지하면 라운지와 달리 좀 더 어두운 바가 하나 있긴 했다. 이미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지는 원이를 한 번 보고 나에게 다가오는 직원에 아차 싶었다. 카드! 다른 카드가 있긴 했지만..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카운터로 데려가는 직원에 한 입도 먹지 않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며 웃어주었다. 결제하는 직원을 한 번 보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곧장 이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연예계 생활을 함께한 이실장님이 내가 김원호 작가님을 기다리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왜 나한테 소식이 없었는지 따져봐야 겠다.
"이실장님!"
'나 여보세요도 안했다.'
"지금 하셨잖아요. 그것보다 김원호 작가님 드라마 들어가는거 알고 계셨어요?"
'어, 맞다. 내가 너한테 말한다는게 잊고 있었네. 김원호 작가님 드라마 TBS에서 들어가. 김도우 PD라고. 젊은 PD랑 한다더라. 안그래도 그일로 회사로 한 번 오라고 하려 했어. 김원호 작가님 쪽에선 너 생각이 있다는데. 너 TBS에 한 30부 계약 남았기도 하고. 근데, 김도우PD쪽에서 여배우를 오디션보겠다고 해서 복잡해. 이 작품이 좀 평범한 여자가 주인공이라는데. 네가 너무 말랐다는게 김PD쪽에선 걸리나봐."
"이재혁! 아니, 재혁이 남자 주인공에 캐스팅 됐다는데..여자주인공은 오디션을 본다구요?"
이 실장님 말을 듣다 보니, 결제를 끝낸 직원이 명세서와 카드를 내밀었다. 답답하게 서론을 설명하는 이 실장님에게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여주를 오디션 본단게 무슨 소리야. 남주는 벌써 캐스팅이라면서.
간단히 목인사를 마치고 엘레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내려가지 않았는지 원이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놀리고 도망가?
"야! 주 원! 너 내 카드 내놓고 가!"
퍽- 소리가 나게 뒷통수를 쳤다. 키 유전자를 원이에게 몰빵해서..나는 작지만 한국여성의 표준키 162였다. 그에 반해 원이는 184이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우다다 달려가 퍽- 휴대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때렸다. 아까부터 치고 싶었던 일이라 후련했다. 근데 어. 뒤돌아 보면 짜증이 한껏 난 원이의 얼굴을 기대했다. 나는 정말이지 하얀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이 호텔에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치 않고. 당연 이 층에 이 스타일의 사람은 원이 하나라 생각하고 때렸는데.
"...뭡니까."
'그 쪽에선 참신한 소재이기도 하니까. 시나리오 보니 예쁘건 고사하고 첫 씬부터 남자한테 실연당하고 망가지는 일 투성이야..그래서 난 안했으면 하는데..네가 김원호 작가님껄 워낙 하고 싶어 하니까....'
".....누구세요..?"
'어? 여니야 내 말 듣고 있어?'
"..실장님..원이가 아니에요."
'어? 무슨 말이야. 여니야.'
실장님의 애타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졌다. 나..주여니인데.. 이 남자는 주 원이 아니다. 왁스칠을 해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도 아니다. 원이 보다 잘생기긴 했다. 원이보다 코도 오똑하고 입도 붉고 도톰했다. 눈은, 날 보는 눈은 무섭지만 어쨋든 굵은 눈썹과 어울리게 깊은 눈매를 가졌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니까 내가 지금 원이가 아닌 사람 뒷통수를 친거야. 그게 중요한거지.
세상에...주여니..미친거 아니야..?
"아..그게..제가 제 동생인줄 알고. 그니까 제 동생도 이렇게 똑같이 입고 있어서...어, 그러니까.."
"주여니씨?"
...나 망했어요. 실장님. 전화가 다 들리게 주여니!! 목이 터져라 부르지 않아도 이 뒷통수 남자는 내가 주여니인거 알아요. 이 실장님이 애타게 부르지 않아도 나인걸 알겠지. 나는 오늘 화보 찍고 와서 화장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데. 누가봐도 연예인이요. 인데. 사생활 소문 하난 끝내주게 깨끗했는데. 이 남자가 인터넷 어디에 글을 올리기라도 한다면...안 돼! 주여니 최대한 숙여야 해!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동생이...어, 그러니까 정말 죄송해요."
요 몇년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숙여본 적이 없는데. 90도로 숙여가며 사죄드렸다. 울먹이는 척도 좀 해주고..대충 남자의 표정을 보니 내 팬도 아닌거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건 정말 죄송합니다. 엄청 죄송합니다. 석고대죄 뿐이야.
"..네, 뭐. 일단. 실수라니 사과는 받죠. 엘레베이터 왔는데."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니 남자가 한 쪽 손으로 아래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엘레베이터는 텅 빈 채 와 있고. 남자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한 번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이건...타라는 의미지. 여기서 안타기도 그렇고..안 탄다고 핑계를 대기도 그러니 일단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감사합니다아. 다시 한 번 죄송해요."
되게 감사하게 인사도 했는데. 남자는 별 말 없이 1층을 눌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하 1층을 누르려다. 얌전히 엘레베이터 구석으로 갔다. 숨막히는 정적을 깨고 아직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내 손에 쥐어진 휴대폰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아, 이실장님. 너무 놀라 잊고 있었다.
"네, 실장님. 죄송해요. 뭐라 하셨죠?"
'무슨일 있는거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디션까지 들었어요. 근데, 어...조금 있다가 제가 다시..."
'김도우PD 한 번 내가 만나볼게.'
"아, 네. 네."
남자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하고 있는데 남자가 돌연 나를 홱 뒤돌아 보다 다시 앞을 본다. 뭐지. 왜. 무섭게. 실장님과 이야기중 이 남자가 알아들을 만한 일은 없을 텐데. 이실장님 전화를 끊고 엘레베이터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금새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뒤도 안돌아 보고 가는 남자를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나도 곧장 혼잡한 호텔 로비로 나가려다..생각해보니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이다. 호텔이 고급지다 뭐 해도 어쨌든 숙박업소인데. 여기서 나와 똑 닮은 원이나 부모님 없이 로비를 가로지르면..좀 그렇겠지? 괜히 신경쓰지 않고 빠르게 나가려 했는데. 아까 한 실수가 생각나 아무도 타지 않은 엘레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고 지하 1층을 눌렀다. 그 와중에 엘레베이터가 미처 내려가기도 전에 딩동- 소리가 울렸다.
[A카드
주여니님
4/28 23:08
800,000원
S호텔]
내가 긁은 레스토랑 값과는 다른 값의 문자였다. 주 원 이놈의 자식이 메롱 하며 나를 놀리던 이유가 다 있었다. 카드를 돌려받았어야 했는데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꼴이었다. 분노게이지가 차 올랐다. 원이로 착각하고 내가 실수한 그 남자의 일까지. 이게 다 주 원이 김원호 작가님이 어쩌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잡으러 가야지! 문이 열리자 감정을 실어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겼다. 좀 어두운 조명에 신나는 음악까지.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부모님께 깜찍하게 로맨틱한 선물도 하고 좋은 딸로 하루를 마무리 하려했다. 절대 누나 등쳐먹는 동생 잡고 하루를 마무리 하고 싶진 않았는데.
쿵-쿵- 심장을 울리는 음악이지만 클럽은 아니니 다행히 여기며 주위를 살폈다. 흰티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이곳으로 왔으니 당연 몇몇이 나를 쳐다봤다. 한 손을 들어 일단 얼굴을 반쯤 가려주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보니 구석진 자리로 재혁이 얼굴과 맞은편 불안하지만 확실한 원이의 뒷통수가 보였다.
재빨리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니 재혁이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일단 재혁이 너보단,
퍽-
원이 뒷통수를 한 대 쳐주고 빠르게 원이의 자리 옆으로 앉았다.
이번엔 확실히 뒤통수의 주인공을 찾았으니..
"주여니!!"
옆에서 들려야할 원이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리는건 착각인가..?
"...또 보네요. 주여니씨."
옆에서 아까 그 남자의 목소리가..아니라...그 이목구비가 보이는건 꿈일거야.
"누나 김PD님한테 뭐하는..."
재혁이 입에서 나온 김PD가..원이가 레스토랑 룸에서 말한..김원호 작가님의. 그니까 이실장님이 말한,
"전 주 원씨가 아니라. 김 도우입니다. 주 원씨랑 제 뒷모습이 정말 똑같은 가봐요. 두 번이나."
김 도우는..아니어야지..그건 아니어야 하는데????지금 나 되게 옆에 찰싹 붙어있는데.
"누나 너 미쳤어? 내가 아까 재혁이 형이 들어가는 드라마 PD님 소개시켜 준다고 했잖아!!!!"
내 앞까지 다가 왔는지 원이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남자를 멍하니 보던 내가 원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악에 찬 얼굴을 보니 내가 한 짓이 엄청난 짓이긴 했다. 앞에 앉은 재혁이도 원이도 이 한방에 새된 비명을 질렀는데. 난 사실 이 남자에게 아까도 똑같은 실수를 했어.
그 남자가...이 남자란 이야긴 안했잖아. PD가 남 배우 뺨치게 잘생겼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 PD가 키가 180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없었잖아. 왜 귓가에서 베토벤 비창이 울리는지.
주여니...인생
댕-댕-댕- 이번엔 종이 울린다.
벚꽃 로맨스를 더 수정 중이라..가볍게 시작한 글을 먼저 들고 왔어요.
부디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벚꽃 로맨스를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꼭..5월 안으로 들고오는게 목표이긴 합니다!
첫댓글 재밌네용
댓글 감사해요! 덕분에 힘이나고 2편도 즐거운 마음으로 들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