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재에서 버드내로
가을이 이슥해진 십일월 셋째 일요일이다. 그제 겨울을 재촉할 강수가 있었고 어제 새벽엔 남녘에서는 보기 드문 눈이 철 이르게 내렸다. 하루 기온이 최저를 보인 여명에 백설이 분분히 날리다 그쳤다. 적설량이 적기는 해도 첫눈은 세상을 일시 순백으로 덮었다가 햇살이 퍼지자 연기처럼 연방 사라졌다. 올가을은 그간 이상 고온을 보이던 날씨가 이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첫눈과 함께 닥친 추위가 누그러지는 기미를 보인 아침이다. 앞으로 추위는 풀렸다가 한파가 찾아오길 반복하며 겨울 문턱을 넘어서지 싶다. 내가 보내는 일상에서 주말 일정으로 마산역 광장으로 나가 노점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산역 광장으로 나가면 노점은 토요일 새벽이 가장 성하고 다른 요일은 세가 약했다. 일요일 아침 장터는 토요일 버금갈 만큼 물건이 펼쳐졌다.
가을 역전 광장 화단을 장식하던 화사한 국화는 퇴장하였고 그 자리에 겨울과 봄을 대비한 팬지가 심겨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이면 이른 사간부터 역전 광장에는 동창회와 산악회에서 떠나는 중년들의 단풍놀이 관광버스 행렬은 여전했다. 이번 비와 눈과 함께 바람까지 심해 먼저 물들었던 단풍은 낙엽이 졌을지라도 우정과 친목을 도모하는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하는 듯했다.
나는 단풍놀이를 떠나는 군상들과 달리 홀로 산행을 나섰다. 역 광장 모퉁이 농어촌버스 출발지에서 서북동으로 가는 73번 버스를 탔다. 합성동 터미널과 삼성병원을 둘러 어시장과 댓거리를 거쳤다. 밤밭고개를 넘어가 시야에 드는 산자락은 갈색 단풍이 엷게 물드는 기색이었다. 진동 환승장에서 진북면 소재지를 지나 덕곡천을 따라가는 논은 벼를 거둔 들녘에 볏짚 더미만 보였다.
종점에서 내릴 때 한 할머니가 끄는 무거운 물건이 담긴 쇼핑카트를 덥석 안아 내려주었더니 고맙다고 했다. 내가 시골 버스를 탄 보람은 노인이 올라와 좌석이 없어 두리번거릴 때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켜줌과 무거운 짐을 올리고 내릴 때 조금이나마 거들어줌이다. 이 두 가지 상황은 도심이 아닌 외곽 근교로 운행하는 농어촌버스를 이용할 때만 겪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장면이다.
서북동 종점에서 암자로 가는 들머리 임도로 향하다 내가 들어온 덕곡천과 학동마을을 바라보니 그 바깥은 겹겹이 산이고 윤슬이 비친 광암 바다가 아득하게 드러났다. 서북산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오르자 한동안 진한 향기를 뿜었을 산국은 무서리를 맞아 시들어갔다. 산허리에 T자로 난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금산 편백숲이 아닌 비탈을 잠시 오르니 감재 이정표가 나왔다.
여항산에서 건너온 낙남정맥이 서북산을 거쳐 대부산을 거쳐 봉화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고개를 넘으면 버드내로도 불리는 별천이었다. 버드내는 옛적 버드나무가 자란 냇가라고 버들 류(柳)에 시내 천(川)을 순우리말로 부른 지명이다. 별천은 조선 중기 함안 부사 한강 정구가 거길 다녀가면서 경치가 좋아 이백의 싯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서 줄여 별천이라 불러 줬다.
고갯마루에서 배낭을 벗어두고 전정 가위와 접이식 톱을 꺼내 달포 전 잘라둔 헛개나무를 찾아 잘게 도막 내었다. 헛개는 열매를 약용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으나 건재도 간이나 배뇨에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약성은 마찬가지다. 나는 여름 산에서 찾아 말려둔 영지버섯을 달일 때 헛개나무 가지도 같이 넣는다. 생나무 가지를 옮기자니 무거워 미리 잘라 놓았으니 무게가 가벼웠다.
잘게 자른 헛개나무 가지를 배낭에 챙겨 감재에서 산중 농장을 거쳐 버드내로 내려갔다. 건너편으로 뻗친 봉화산 산등선 너머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이 펼쳐졌다. 길섶에는 연보라 쑥부쟁이꽃이 제 임무를 다해 시들었고 높은 감나무 가지는 까치밥으로 빨간 홍시가 달려 있었다. 가야에서 들어온 군내버스를 타고 봉성으로 나가 소고기국밥을 먹고 열차를 타고 복귀했다. 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