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4.11.07. -
높은 서가 꼭대기에 꽂힌 책을 집으려고 까치발로 섰는데도 닿지 않을 때, 손을 뻗은 사람의 마음은 타들어 갑니다. 그 책이 꼭 필요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다리가 없다면 그냥 바라만 보다가 포기해야 합니다. 다행히 손이 닿는 곳에 필요한 책이 있다고 해도 공공도서관의 책은 빌릴 수만 있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다 못 읽었다면 한두 번 연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연체라도 한다면 다시 책을 빌릴 수도 없습니다.
시인은 아파트를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공공도서관의 서가에 빗대어 한국의 주택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발상에 감탄하다가도 시에 비친 현실에 입맛이 씁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