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미의 화자들은 제 불안을 레이더 삼아 사물과 사태의 기미를 탐지한다. 그러므로 그 불안은 민감함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제 앞에 펼쳐진 길을 외롭게 걸으며 불안정한 것의 아름다움을 만든다.
-불안이라는 이름의 레이더
외롭고 병든 영혼, 세상의 美를 알아차리다
조용미(43)의 첫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96년. 이하 ‘불안은 영혼을’)의 표제시에는 “신성한 외로움에 빠진 나의/ 둥근 영혼을 누가 불안하게 하는가”라는 시행이 보인다. 화자의 이 발언은 푸념이나 넋두리의 맥락에 얹혀 있지만, 그 불안은 보기에 따라 숨겨진 축복이기도 하다.
쓰기에 따라 독(毒)이 약(藥)이 되듯, 화자의 둥근 영혼을 뾰족하게 갉아먹는 불안은 한국어의 얼개에 심미적으로 접합되며 한 편의 버젓한 시를, 더 나아가 한 권의 버젓한 시집을 만들어냈다. 기실 모든 미적 지향은 크든 작든 일종의 심리적 불안과 동거한다. 극도의 안정은 극도의 무딤과 통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그 때 그 때 조절은 해야겠지만 송두리째 제거해서는 안 될 미적 원기소다. 그렇다면, 제 영혼의 불안에 대한 화자의 푸념 앞에서 독자가 하염없이 안쓰러워할 일만은 아니겠다.
다시 처음의 시행으로 돌아가자. “신성한 외로움에 빠진 나의/ 둥근 영혼을 누가 불안하게 하는가.” 어쩌면 화자는 답변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외로움일 수 있다. 그것이 설령 ‘신성’하다고 하더라도, 외로움은 드물지 않게 불안의 선행(先行) 감정이다. 앞선 것이 꼭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 되란 법은 없지만, 화자의 불안이 화자의 외로움 때문일 가능성을 미리부터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시행에서 벗어나, 그리고 이 시행들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에서도 벗어나, 시집 ‘불안은 영혼을’의 공간 전체에서 화자(들)를 불안하게 만드는 게 누구인지를 한 번 톺아보자. 아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화자는 ‘누가’라고 묻고 있지만, 그것을 ‘무엇이’로 바꿔놓는 것이 좋겠다.
시집 ‘불안은 영혼을’의 공간 안에서는 인물들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불안은 영혼을’의 서정적 자아를, 그의 영혼을 불안하게 하는가?
그것은 “따르르릉// 혼미한 꿈을 두 쪽으로 가르며/ 내려치는 소리의 벼락”(‘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이거나 “파편이 되어 나를 찌르”는 “어제 내가 한 말들”(‘어제 한 말들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 이 시집의 화자(들)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병치레인 듯하다.
대체로 동일한 자아의 분신들인 듯한 이 시집의 화자들은 몸이 아프다. “적십자병원에서 돌아오던 길/ 꽃그늘 아래에선 죽음의 냄새가 났다”(‘그 길’)거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밤이 와도 불이 꺼지는 일 없는/ 75병동의 긴 회랑을 지나 몽유병자처럼/ 밤새 병원의 여기저기를 헤매다니네/ 스르륵스르륵 긴 옷자락을 끄을며”(‘여름 새벽’) 같은 시행들에서 병원과 인연이 깊은 화자의 처지가 드러난다.
화자의 병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것이 치명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럭저럭 견디며 지니고 살 만한 것인지는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로 하여금 병원을 들락거리게 하는 병이 무엇이든, 그의 허리가 실하지 않다는 것은 이내 알 수 있다. “등뼈는 편할 날이 없었다/ 요통의 생(生)이여”(‘직립’)라거나, “석고로 만든 척추를 달고/ 고름같이 누런 달 품에 안고/ 나 여름내 비 맞고 다녔네”(‘허리에게’)라거나, “오늘 밤 거리의 보도블럭을 핥고 다니는/ 음험한 안개처럼/ 척추의 마디마디가 다 풀어져 내려/ 나는 등뼈 없는 생선처럼 허옇게 떠/ 방바닥에 놓여 있다”(‘쓸쓸한 편지’) 같은 시행에서 허리 아픈 화자의 힘겨운 일상이, 그의 불안이 읽힌다. 화자가 “몸의 어딘가에 통증이”(‘몸의 어딘가에’) 있다고 털어놓을 때, 그 통증은 대체로 허리 쪽에서 그를 공격한다.
아픈 사람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 민감함은 주위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신경질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사물과 사태의 기미(幾微)를 섬세하게 탐지하는 레이더 노릇을 할 수도 있다. 시인에 대한 그럴싸한 정의(定義) 하나가 보통 사람들이 무심코 흘리는 기미를 대뜸 알아채는 사람이라면, 시인은 누구나 조금씩은 아픈 사람인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을 정도의 아픔은, 거기에 따르는 불안은, 그러니까 시인됨의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다.
‘불안은 영혼을’의 화자들이 기미를 알아채는 데 능한 것도 그 아픔과 불안이 베푼 축복일 것이다. 조용미의 화자들은, 그 부실한 몸에 기대어, 하늘 흐린 날 “젖지 않는 가벼움에 몸 떠는 공기들(‘흐린 가을날’) 속에 무엇인가가 있음을, “굴광성 식물이 되어/ 햇살을 향해 일렁이는”(‘햇볕 쬐기’) 솜털을, “소리보다 먼저 냄새로 오”(‘비는 다 내게로 왔다’)는 비를, “후, 약한 입김에도/ 스케이트 선수가 되어/ 물 위를 미끄러져가”(‘먼지의 힘’)는 먼지를, “광활한 한 페이지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먼지 같은 발걸음”을 내딛는 “바람 부는 날의 책벌레”(‘책벌레’)를, “새벽 4시”의 “벽오동나무 푸른 정맥들”(‘벽오동나무 꽃그늘 아래’)을 알아차린다. 그들의 아픔과 불안은 세상의 기미를 섬세하게 밭아내는 촘촘한 체다.
그 아픔과 불안을 숙명처럼 지닌 채 화자들은 길을 걷는다. 병 못지않게 ‘불안은 영혼을’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 길 이미지다. 위에서 인용한 ‘그 길’에서도 “적십자병원에서 돌아오던 길”이 언급되었지만, 조용미의 길이 시간의 선형성(線形性)에 대한 오래된 은유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구약성서의 한 대목에서 이미지를 취한 “소금기둥이 된 뒷덜미를 버려두고/ 내가 가야 할 길”(‘동화사에서’) 같은 시행에서 길은 그저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를 피해 “젖은 땅이 두 다리 사이를 과속으로 달리”도록 서둘러야 할 길이다. 이 ‘길’에서 인생여로의 은유를 읽어내는 것은 과잉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면서도 줄곧 내가 끌고 가야 하는 이 무겁고 질긴 끈, 줄이 끝나는 곳에 길이 끝날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만 내릴 수 있으리라”(‘줄이 끝나는 곳에 길이 끝난다’)라거나, “사람을 만나러/ 낯선 길을 찾아나선다”(‘사로잡힌 영혼’) 같은 시행에서 길은 시간이나 인생역정에 대한 고전적 비유에 닿아 있다.
또 “외로운 영혼들은/ 전부/ 길 위에 있다”(‘<내 책상 위의 천사> 그리고’) 같은 잠언투의 시행에서, 길은 어떤 과정이나 삶의 역정이라는 고전적 함축과 한데(露天)라는 함축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렇게 조용미의 길은 여러 겹이다.
노골적으로 ‘길’이라는 표제를 단 시도 있다.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네/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있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서로 어긋난 길에 대해서, 누군가와의 어긋난 인연에 대해서 얘기한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 길은 고전적 함의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 첫 연은, 아마 시인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한국어 통사구조의 내재적 부실함 탓에(어쩌면 그 덕분에) 의미의 다층성을 획득하고 있다.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물론 ‘(내가) 용서하고 싶은 사람’으로 읽어야겠지만,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은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물론 ‘(내가) (그에게) 용서받고 싶은 사람’ 다시 말해 ‘나를 용서해주었으면 하고 내가 바라는 사람’으로 읽어야겠지만,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싶은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행을 뒤쪽으로 읽으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이 또렷해져 시의 맛이 한결 밋밋해질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의 화자가 만만찮은 음악 애호가라는 것, 특히 첼로 음악에 관해선 거의 전문가의 귀를 지닌 듯하다는 것을 지적해두자. 그는 첼로 대가들의 연주를 이런저런 나무에 비교할 줄 알고(‘첼로주자를 위하여’), “한없이 내려가는 정신의 두레박”(‘무반주첼로’)으로 (아마 바흐의) 첼로 음악을 길어낼 정도다.
기미를 알아차리는 데 능한 이 시인의 재주가 표나게 드러난 것이겠으나, 일반 독자가 그 시행들에 온전히 감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2000년)에 실린 ‘벚꽃나무가 내게’라는 작품에는 “그의(첼리스트 모리스 장드롱의--인용자) 연주는 너무 프랑스적이라/ 사실 나를 사로잡진 못했지만”이라는 시행이 보이는데, 이런 진술은 시인이 화자(의 경망이나 허영)를 조롱하거나 야유하는 맥락에서가 아니라면 듣기 거북한 게 사실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불안은 영혼을’의 조용미는 제 앞에 펼쳐진 길을 외롭게 걸어가며, 아픈 몸과 불안에 잠식된 영혼을 다독거리며, 불안정한 것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 2월
상한 마음의 한 모서리를
뚝뚝 적시며
정오에 내리는 비
겨울 등산로에 찍혀 있던 발자국들이
발을 떼지 못하고
무거워진다
응고된 수혈액이 스며드는
차가운 땅,
있는 피를 다 쏟은 후에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나
비의 피뢰침이 내려꽂히는
지상의 한 귀퉁이에
바윗덩어리가 무너져내린다
우듬지가 툭 끊어진다
겨울산을 붉게 적시고 나서
서서히 내게로 오는 비
글: 고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