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은 답이 없다>는 말이 법륜 스님의 우문현답인 줄로 만 알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여자인 줄 알았어요. 노! 노! 아니에요. 마리아 릴케는 <존재의 이유>에서 "아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면 된다"라고 하더이다. <존재의 이유>를 신에게 물어볼 것도 없고 내가 내게 부여 한다며, 나의 고유성을 나누어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답니다. 멋지 지 않습니까? 이제 내 롤 모델은 없습니다. 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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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가 "죽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인이"라고 한 것도 죽음은 적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반자라고 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왜 왜 릴케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여인'으로 노래했을까? 릴케에게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죽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서 함께 자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만의 죽음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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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외면하는 사람은 삶도 얕아지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깊게 살아갑니다. 그에게 죽음은 파괴자가 아니라 삶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연인입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릴케와 살로메의 만남입니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릴케보다 15살 연상이었습니다. 그녀는 릴케에게 철학을 소개했고 러시아 여행을 함께 했으며 종교와 예술의 깊이를 열어 주었습니다. 심지어 '르네(René)'라는 이름도 '라이너(Rainer)'로 바꾸도록 권한 사람이 살로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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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공! 아비가 너희들의 예명을 심사숙고해 보았다. 예영(예주), 에영(공/에스더) 어때? 살로메는 릴케에게 첫사랑이라기보다 정신적 스승이었습니다. 그녀를 만나면서 릴케는 사랑과 죽음을 서로 반대가 아닌, 같은 깊이에서 만나는 경험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살로메는 프로이트와도 학문적으로 깊이 교류했습니다. 물론 둘의 죽음 이해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프로이트는 죽음은 인간 안의 파괴 충동(죽음 본능, 타나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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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본능과 끊임없이 긴장하는 힘으로 본 반면, 릴케는 죽음은 파괴 본능이 아니라 <존재가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했고 릴케는 죽음을 시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조각가 로댕은 릴케에게 또 다른 스승이었습니다. 릴케는 로댕의 비서로 일하면서 가장 큰 가르침을 받습니다. "사물을 끝까지 보라" 로댕은 조각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관찰했습니다. 릴케는 죽음도 끝까지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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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음을 피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존재로 노래합니다. 세 사람을 연결하면 릴케에게 있어서 살로메는 사랑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열어 주었고, 로댕은 예술을 통해 존재를 끝까지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프로이트는 인간 무의식 속 죽음 충동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릴케는 이 모든 것을 시로 승화하여 죽음은 삶의 가장 깊은 동반자이며,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히려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2.
죽음은 삶의 적인가, 마지막 동반자인가? 릴케를 읽다 보면 죽음을 말하는데도 삶이 더욱 선명해지는 역설을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릴케에게 죽음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장입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면 된다"는 그의 사유는 존재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기보다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롤모델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끝내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삶을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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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와의 만남은 릴케에게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깊게 만드는 통로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로댕은 사물을 끝까지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심어 주었고, 프로이트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을 해부했습니다. 그러나 릴케는 그 둘을 넘어서, 분석이나 설명이 아닌 시의 언어로 삶과 죽음을 화해시켰습니다. 프로이트가 죽음을 본능으로 이해했다면, 릴케는 죽음을 존재의 성숙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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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릴케의 죽음 이해는 기독교 신앙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릴케에게 죽음은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완성이지만, 성경은 죽음을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죄로 인해 들어온 마지막 원수로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그 원수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패배했기에, 죽음은 더 이상 절망의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릴케가 죽음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면, 복음은 죽음의 권세 자체를 넘어서는 소망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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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글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살로메, 로댕, 프로이트, 릴케를 하나의 사유의 흐름으로 연결한 시도입니다. 사랑은 존재를 열고, 예술은 존재를 끝까지 바라보게 하며, 심리학은 존재의 심연을 분석하고, 시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노래로 승화시킵니다. 여기에 신앙을 더한다면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새로운 생명의 문입니다. 그 지점에서 릴케의 시와 복음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걷습니다.
2026.8.3.mon.앙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