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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분별력을 청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5-6ㄱ.7-12
그 무렵 5 주님께서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7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8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있습니다.
9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10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다.
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12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28-30
형제 여러분,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44-52<또는 13,44-46>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시어,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고,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아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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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을 이어받은 솔로몬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신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겸손하게 청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기뻐하시며 지혜와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 주신다(제1독서). 주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모상이 된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의롭게 하시고 세상을 당신의 뜻에 따라 이끌어 가신다(제2독서).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그 보물을 산다. 그 보물을 간직한 사람은 하늘 나라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이미 누리는 사람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다시 비유를 통하여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살펴볼 것은 비교되는 대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비교가 되는 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그물입니다. 하늘 나라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밭에 숨겨진 보물처럼 값진 것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습니다. 값진 것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아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상인과 같이 역동적인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그물과 비교되는 하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모아들입니다. 하늘 나라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그들을 초대합니다. 무엇보다 값지고 역동적이며 모든 이를 모아들이는 하늘 나라의 모습은 구약 성경에서 일컫는 지혜와 닮았습니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지혜 7,9) 여겨집니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지혜 7,24). “지혜가 언덕 위,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네거리에 서 있다. 성읍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대문간에서 외친다”(잠언 8,2-3).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비유는 대부분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하늘 나라는 찾고 얻어야 하는 것으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 나라가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게 하여 줍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상상하기 힘든 하늘 나라에 비유로 조금 더 다가설 수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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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받은 인물로, 사람들은 흔히 ‘지혜’ 하면 그를 떠올리고 성경이 전하는 그의 판결은 지혜의 예로 꼽힙니다(1역대 3,16-28 참조). 솔로몬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듣는 마음’을 청하고 그것을 통하여 백성을 통치하고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청원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가 ‘장수’나 ‘부유’나 원수를 없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바랄 법한 것들이 아니라 ‘듣는 마음’을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원대로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2역대 1,1-12를 보면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와 지식’을 받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마음은 생각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두 이야기 사이에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롭고 분별할 수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듣는 마음’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솔로몬에게 지혜와 분별하는 마음이 소중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비유를 통하여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숨겨진 보물과 같고,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도 같습니다. 또 하늘 나라는 고기를 잡아들이는 그물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하늘 나라는 보물처럼 값지고, 값진 것을 찾아가는 상인처럼 역동적이며, 그물에 든 고기처럼 모든 사람을 모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에 우리 안에서 활동하며 완성을 향하여 가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선포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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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 말씀은 숨겨진 보물과 진주로 비유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불필요한 것을 모두 버려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려면 다른 무엇을 포기해야만 하지요. 세상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를 추구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버리는 결단과 끝없는 노력만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이고, 무엇이 필요 없는 것인지를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제1독서에 나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지혜를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말을 잘하려면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 1,19). 그러므로 제대로 말하려면 제대로 들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고요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만 하지요.
고요한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지요. 그리고 나에게 하느님 나라가 왜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늘 나라를 위해 불필요한 것을 자연스럽게 버리게 될 것이며, 참으로 투자할 곳에 투자하는 신앙인이 되어 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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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가 깊은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웠습니다. 아우는 금덩이 한 개는 형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동생이 금을 가지기 전과는 달리 금을 가지고 있으니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형도 “네 말이 옳다.” 하며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습니다.
형제의 아름다운 우애를 다룬 옛 이야기입니다. 그 형제는 우애를 깨뜨릴지도 모를 금덩이를 버림으로써 형제의 우애를 찾았습니다. 그들에게 보물은 금덩이가 아니라 바로 형제의 우애였던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그것을 당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이 있는 밭을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 보물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은 버려야 얻을 수 있고 포기해야 내 것이 됩니다. 텅 빈 것이 비로소 모든 것을 가진 보물이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님의 보물을 얻기가 힘든 것은 채우고 모으는 것보다 비우고 버리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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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이라고 하십니다. 보물이 묻힌 것을 알면 누구나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값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보물이 묻힌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습니다. 답은 신앙생활입니다. 기쁨의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보물의 밭을 알 수 있는 열쇠입니다.
어떻게 해야 기쁜 믿음이 될 수 있을는지요? 매일의 기도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은 매일의 고백이고 다짐입니다. ‘주님, 다시 시작합니다. 또다시 출발하렵니다.’ 이 선언이 매일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루의 첫 행위가 기도라면 신앙은 기쁨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아무리 믿음을 보물이라고 말해 주어도 건성으로 들립니다. 여전히 밭에 묻힌 보물로 남는 것이지요.
기도하면 무엇이 보물이며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사건과 만남’이 그것입니다. 모든 사건 속에는 주님의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늘 깨달음을 청해야 합니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만남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주님의 뜻을 찾는 작업입니다. 아니 보물의 밭으로 가는 실제 행동입니다. 모든 사건은 우연인 듯 보여도 사실은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밭에 묻힌 보물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주실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을 때까지 갖가지 병을 앓으면서도 곡식과 채소로 된 음식만을 그것도 아주 조금씩밖에 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병은 점점 악화하였지요. 그래서 곁에서 간호하던 형제들이 성인의 건강을 염려해서 몰래 음식에 약간의 고기를 넣어서 요리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설교하던 광장에 군중을 모이게 한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세속을 떠나 형제회에 입회하였으며 형제들을 인도하는 저를 보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만, 저는 아프다는 핑계로 고기와 그 국물을 먹었습니다.”
자신이 원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느님과의 약속이기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아는 일을 사람에게 숨기지 않는 성인의 솔직함과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솔직하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이 지금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과 이기심에 휩싸이고 맙니다.
사람에게 솔직한 사람이 하느님께도 진정으로 솔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하느님께 솔직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솔직한 삶을 살아야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데 말이지요.
‘하늘 나라’라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이것을 사들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밭을 사야 한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밭을 사고, 진주를 사야 한다면 역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진주를 삽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다 처분해서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곳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무엇이었고, 지금 하는 최선은 무엇입니까?
이 노력과 최선이 바로 하느님께 솔직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남들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남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라고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모두 주님과 같은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그 힘으로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 앞에 솔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라고 하느님께서 솔로몬에 질문했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청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받는 것, 사랑하는 것, 희망하는 것, 떨리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다(오귀스트 로댕).
J.알프레드 프루프룩의 연가(T.S 엘리엇)
나의 풀 먹인 모닝코트, 물을 먹여 턱까지 세운 옷깃, 화려하고 점잖으며 조촐한 핀을 꽂은 넥타이, 사람들은 말하지 근데 저 사람 팔과 다리가 너무 가늘잖아! 나는 늙어가…. 나는 늙어가…. 마치 밑단을 접어서 젊은 척 좀 해 볼까? 머리에 뒷가르마를 타면 어떨까 나는 흰 플란넬 바지를 입고 펄럭이며 해변을 걸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익사했다.
T.S 엘리엇의 시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꾸며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긴 ‘젊음’만큼 멋져 보이는 옷은 없으니 그 멋을 위해 꾸미는 것입니다. 그렇게 ‘멋짐’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죽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멋보다 영적 멋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남에게 보이는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잘 보이지 못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잘 나갈 때 일수록 더욱 겸손해져야겠습니다. 높이 올라갔을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윗 왕에 이어 등극한 솔로몬 왕은 초보 임금 시절 지니고 있었던 마음 자세나 각오가 남달랐습니다. 주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 같았으면 주변 강대국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왕좌를 잘 보필할 수 있는 지혜롭고 충성스런 신하들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왕권을 오래오래 잘 수행할 수 있는 건강과 무병장수를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을 한번 보십시오. 놀랍게도 그는 아주 특별한 것을 청합니다. 청하는 태도 역시 아주 겸손하고 갸륵합니다.
“저는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열왕기 상권 3장 7절, 9절)
그런 솔로몬 왕이 마음에 쏙 드셨던 주님께서는 크게 흐뭇해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열왕기 상권 3장 11~12절)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분별력을 선물로 받은 솔로몬은 슬기롭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둘도 없는 태평성대가 찾아온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됩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을 군사 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해외 식민지도 개척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성전을 예루살렘에 건설했습니다. 문학적으로도 탁월해서 아가, 전도서, 잠언 일부의 저자로 간주됩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적(政敵)들을 하나씩 가차없이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정적들을 제거한 뒤 측근들을 군대·정부·종교기관의 요직에 앉혔습니다. 또한 여러 주변 국가들과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백일 붉은 꽃 없다더니,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 부귀영화도 세월 앞에 부질없었습니다. 그 지혜롭고 영특하던 솔로몬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적당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그 끝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대적인 건축에 대한 솔로몬 왕의 과욕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 왕이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장정들은 3개월마다 한번, 1개월씩 강제노동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제성을 띤 행정구역 개편, 이해할 수 없는 세금 징수 방법 등이 백성들의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반대에 불을 지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년에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솔로몬은 우상 숭배에 깊숙히 빠져 들어갔고, 결국 왕국이 둘로 분열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처음 지녔던 마음, 즉 초심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솔로몬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깊은신심에다 겸손까지 겸비했던 솔로몬,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솔로몬이었지만, 잠시 방심하는 틈에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 초라하고 부끄러운 말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노년이 도달한 솔로몬 임금은 분별력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요즘 메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맛이 간’ 지도층 인사들처럼 추하게 변해갔습니다.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탁월한 지도자이자 선택된 왕으로서의 매력적인 모습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절대 걷지 말아야 할 우상숭배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노인 솔로몬 왕이 얼마나 분별력을 상실했던지, 거듭된 주님의 만류와 경고에도 전혀 ‘말빨’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위한 산당을 지었습니다. 잡신들 앞에 향을 피웠고 재물을 바쳤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그토록 급격히 추락하게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그가 거느렸던 이방인 아내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리분별력이 흐려진 그는 이미 간교하고 요사스런 이방인 아내들을 감당할 내공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으로부터의 큰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잘 나가던 솔로몬 왕의 급격한 쇠락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 하나를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잘 나갈 때 일수록 더욱 겸손해져야겠습니다. 높이 올라갔을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아무리 심연의 밑바닥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인생 100% 성공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희 어머니는 제가 “이제 연세가 많이 드셨네?”라고 말하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거야!”라고 노랫말을 되풀이하십니다. 그러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내가 다 늙었다!”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내가 많이 익었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과일도 익은 것은 맛이 있지만 늙은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도 이것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늙지 말고 익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늙는 것과 익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은 옳은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세계 최고가 된 파타고니아의 성공 비결과 ‘이본 쉬나드’의 60년 경영 철학을 공개한 최초의 책입니다. 파타고니아는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의 교복이라고 불리는 ‘파타고니아 조끼’의 주인공이자,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품절 대란을 일으키는 세계 최고의 아웃도어 기업입니다.
파타고니아의 창립자 ‘이본 쉬나드’의 인생 목표는 바로 ‘지구’입니다. 지구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그 사랑의 마음을 평생 키워왔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암벽 등반을 즐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그가 개척한 북한산 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벽에 박아 놓은 피톤들을 잘 빼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피톤의 머리가 너무 쉽게 부러졌기 때문입니다. “산에 갔을 때는 그곳에 갔던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철학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는 등반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파타고니아입니다.
그는 “우리 옷을 사지 마세요.”란 캠페인을 했습니다. 고쳐서 쓰면 되지 뭐하러 새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지나친 소비가 지구를 죽이고 있음을 알았기에, 자신의 제품부터 소비를 줄이라고 소비자들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품은 물론 타사의 제품까지 가져오면 다 수리를 해 주었습니다. 수리되지 않는 물품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 그의 경영 철학 중 하나입니다.
그는 옷에 들어가는 소재인 면을 일반 목화로 쓰지 않고 유기농 목화를 쓴다고 합니다. 목화는 많은 농약을 주어야 하기에 땅을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농부와 결탁하여 훨씬 비싼 재료인 유기농만을 사용합니다. 그런데도 매해 꾸준한 성장률을 경신하며 전 세계에서 열광적인 팬을 거느리게 된 기업을 일구었습니다.
만약 이본 쉬나드가 돈을 버는 것에만 전념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늙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안에 사랑의 씨앗을 키우는 것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씨앗을 키우면 성숙합니다. 사람은 성숙에 먼저 집중을 해야지 성공에 집중하면 안 됩니다. 성숙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성숙에 집중하면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존경받는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행복’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내가 일하고 있는 그 밭에 묻혀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일을 하건 그 밭에 행복이 묻혀있습니다. 다만 행복은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만 보입니다.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밭에 묻힌 보물’ 다음 비유로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금은방을 하시는 한 자매님이 지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지인은 인도 여행 중에 어떤 착한 사람에게 싼값으로 진주를 한 무더기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사를 할 때도 꼭 챙겨 다니며 10여 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보석상을 하시는 분이 그것을 보고 “아니, 왜 가짜를 그렇게 열심히 들고 다녀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결국, 그것들의 신세는 묵주 팔지 재료가 되었습니다. 진주도 양식보다는 자연산이 훨씬 비싸고, 양식도 민물양식과 해수양식이 있는데 바다에서 길러진 것이 더 비싸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그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상당히 다양하여 정말 비싼 진주의 가치는 그것에 관심이 있어서 많은 공부를 한 전문가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밭에 보물이 있어도 그것만을 절대적으로 원하여 그것을 위해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그 보물을 발견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원해야 인생의 성숙이 시작됩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나의 성숙만을 바라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지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함께 초대하여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을 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학생이 “그렇게 부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워런 버핏이 먼저 “인성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빌 게이츠도 동의하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돈이 아니라 ‘인성의 성숙’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고 그것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늙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익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인생 100% 성공하는 방법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기 위해 에너지를 쓰면 됩니다. 나의 밭에는 언제나 나의 인성을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보물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나의 인성적 성숙을 얻기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그것에 쏟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익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돌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의 돌잔치에 아이들이 고를 수 있는 물건을 준비하는 겁니다. 쌀, 실, 붓, 돈, 마패와 같은 것을 놓습니다. 요즘은 청진기, 마이크, 게임기, 비행기와 같은 것을 놓는다고 합니다. 돌잡이 물건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잡은 물건에 따라서 부모님은 아이들의 미래를 축하해 줍니다. 어떤 물건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미래를 축하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래 살고, 잘 먹고, 성공하고, 자손을 많이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의미의 돌잔치도 있다고 합니다. 지인들이 가지고 온 축하예물을 모아서 아이의 생애 첫 기부를 하는 겁니다. 가난한 이를 위해서, 아픈 이를 위해서, 난민을 위해서, 독거노인을 위해서 생애 첫 기부를 하는 겁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누군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배울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3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공감이 가기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말은 이집트 신화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저승의 사자가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았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유명해지기 보다는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유명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위대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누구나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으로 봉사하면 됩니다. 셋째, 항상 옳은 일을 하라는 겁니다.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때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때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옳은 일을 충실하게 한 사람은 영광의 세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톨릭 교리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시련의 때가 와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키와 같습니다. 지혜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와 같습니다. 지혜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지혜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진주와 같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 권력과 영화는 지혜를 따라오는 부산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항상 겸손과 함께 있습니다. 겸손을 잃어버린 지혜는 바벨탑이 되기도 합니다. 겸손을 잃어버린 지혜는 손잡이 없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겸손이 없는 지혜는 줄 떨어진 연과 같습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병 때문에, 돈 때문에, 욕심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 가진 것을 나누다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름이 긴 것 같지만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없이 긴 것 같지만 어느새 귀밑머리는 하얗게 변하고 해가 서산에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토록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잘 간직하고 지켜내야겠습니다.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오늘 나에게 ‘촌장’이 말했다. “은퇴 후 집 밖에서 자기 몸을 기댈 쇼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은퇴 후 여전히 일할 자기 자리가 있어 청춘을 사는 노인을 일컬어 하는 말이라고 풀이를 해준다. 그 말을 풀이해 준 ‘촌장’이 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의 모습이 여유롭고 편안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13,52).
각자 살아서 만든 자기의 곳간이 있다. 그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성숙함이 집주인 같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집주인과 같다는 의미는 집주인으로 자기 곳간에서 무엇이고 꺼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쯤된 제자는 성숙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인생을 살며 삶에서 자기에게 보물로 여길만큼의 중요한 핵심가치가 있었다. 인생을 살며 소중하게 간직된 가치가 즐거움과 기쁨의 가치로 증폭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촌장’에게는 은퇴가 없어 보였다. 나이는 늙어가지만 막힘이 없이 연속선상에서 물 흐르듯 더 큰 가치가 행복을 위해 더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운퇴가 없다. 자신이 기댈 쇼파가 집밖에 마련되어 있다. 천천히 여유롭게 옛것에 새것을 더해간다. 자기 주도성에 탄력을 받고 여전히 옛것에서 새것을 꺼내고 있었다. 제자가 집주인과 같아지는 인생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은퇴 후 집 밖에서 자기 몸을 기댈 쇼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꾸 촌장의 말이 오늘 따라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한다”(마태13,51)
‘예’라는 응답을 들려주는 제자들은 은퇴가 없다. 목숨 내놓고 세상을 유의미로 살아갈 것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하늘나라를 샀기 때문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는 겉도는 인사를 한다. 빈 인사이다. 건강하라, 행복하라! 라는 인사가 그렇다. 빈 인사가 만남에서 하루를 채운다. 그렇게 건강하고 행복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자가 건강과 행복의 의미가 집주인과 같은 유의미로 더 크게 자라나 옛것과 새것을 꺼내며 하늘을 향해 도약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삶이 또 있겠는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내 곳간에서 옛것도 새것도 꺼내며 집주인 닮아 더 큰 일을 시작해 보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성숙함을 보여주며 옛것과 새것을 끊임없이 꺼내며 집주인처런 그 생애를 행복으로 이어 갈 것이다.
<하늘나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는 숨겨진 보물
하늘나라는 보물을 찾는 사람
하늘나라는 보물을 찾는 길
하늘나라인 사람이
하늘나라로써
하늘나라를 품는다
하늘나라는 사랑
하늘나라는 사랑인 사람
하늘나라를 이루는 길은 사랑
사랑인 사람이
사랑으로써
사랑을 품는다
하늘나라는 정의
하늘나라는 정의인 사람
하늘나라를 이루는 길은 정의
정의인 사람이
정의로써
정의를 이룬다
하늘나라는 살림
하늘나라는 살리는 사람
하늘나라를 이루는 길은 살림
살림인 사람이
살림으로써
살림을 산다
하늘나라는 하느님
하늘나라는 하느님 닮은 사람
하늘나라를 이루는 길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 닮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을 모신다
하늘나라가
하늘나라로써
하늘나라를 이룬다
「찬미받으소서」 2장 창조의 기쁜 소식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 가정”을 이룹니다(『찬미받으소서』 89항). 창세기의 창조 설화(창세기 1-2장)는 하느님과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하느님의 모습, 곧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보시며 ‘좋다.’고 하셨고, 모든 생명체에게 번성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책무는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창조질서를 이룹니다(66항).
평화는 “정의의 작품”입니다(이사 32,17). 평화는 또한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곧 창조질서의 열매입니다(『기쁨과 희망』 78항). 따라서 정의는 창조질서의 보전이며, 그럴 때 평화가 옵니다. 이렇게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은 하나로 통합됩니다(92항).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발견됩니다. 첫째,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정의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둘째, 창조질서 훼손을 지속하는 것은 불의한 사회 구조이므로 우리 신앙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2항).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는 창조질서 보전이라는 하나의 정의의 두 측면입니다. 생태정의가 훼손되면 사회적 약자가 먼저 피해를 보고, 사회정의가 훼손되면 생태환경이 악화합니다(49항, 82항; 호세 2,4). 에너지를 덜 쓸 수밖에 없는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이 기후변화의 피해를 더 많이 입습니다. 코로나19 재난이 보여주듯이, 무분별한 개발과 채굴로 자연생태계가 파괴되어 바이러스 감염이 촉진되면 사회적 약자들이 먼저 재난의 희생자가 됩니다.
성경은 땅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소유권을 거부합니다(67항).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땅의 소유권에 대한 성경의 시각은 오늘날 자연에 대해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의 오만한 태도와 자의적 행태를 엄중히 경고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필요를 위해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지속가능성과 분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3장 세계를 ‘기계’로 보다.
기후변화에서 보듯이, 생태 문제는 인간의 활동으로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세상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생태 문제는 우리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17세기, 데카르트를 필두로 세계를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으로 분리하고, 자연을 물질적인 운동의 법칙으로 파악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이후, 이러한 세계관은 오늘까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물질로 보니 자연에서 인간의 행동을 제어할 장치가 제거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피조물이 인간이 ‘쓰기’에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근대 이전, 인간은 자연 자체의 “가능성을 존중하며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제약이 없어지자 기술을 앞세운 사람들은 자연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는 것”에 몰두합니다(『찬미받으소서』 106항).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등장입니다. 예전에는 가축이 적당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생명체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누렸지만, 이제는 몸도 가눌 수 없는 좁은 철창 속에서 짧은 생애를 마칩니다. 사람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균질한 ‘고기’를 시장에 공급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골몰합니다.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서 인간의 능력과 생태 문제는 비례합니다. 기술의 발전만큼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과 양심의 발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05항). “자연 질서의 착취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무시되고(106항),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술만능주의가 횡행합니다(109항). 공장식 축산과 유전자 변형 작물(GMO) 재배를 위해 숲을 없앱니다. 숲이 품고 있던 탄소가 풀려나며 기후변화를 부채질합니다. 서식처를 빼앗긴 야생동물과 거기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는 인간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자연생태계를 훼손하여 바이러스 감염의 가능성을 키우면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합니다. 두 가지 모두 ‘돈’이 됩니다. 이윤만 보장되면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은 무시된 채 새로운 기술이 쉽게 사회로 들어옵니다(109항).
아직, 절망은 이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 온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112항). 그러려면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기 위해 “속도를 줄여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14항).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기정만 에제키엘 신부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늘 나라를 차지하기를 희망합니다. 그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가 사는 이곳에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거나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큰 기쁨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의 성장”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하여 가진 것을 다 판 사람, 진주를 얻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질을 하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저 주어진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럼에도 노력과 수고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이 기쁘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왜일까요? 또, 그리스도를 닮아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복하고 기쁜 것도 아닙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참 기쁨의 기준을 하느님이 아닌 ‘나’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이 주시는 ‘보물’과 ‘진주’와 ‘물고기’가 아닌, ‘나의 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분별력”을 청한 그에게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장수나 부 또는 원수의 죽음을 청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옳음을 분별하는 마음’을 청한 솔로몬이 하느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것’을 찾고 분별하는 능력을 청함으로써, 삶의 참 기쁨의 기준을 하느님으로 삼은 것입니다.
참 기쁨의 삶을 위한 기준을 하느님에게 둔 이들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왜 노력하고, 무엇을 위해 수고하고, 어떻게 봉사하며 희생해야 하는지의 기준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는 것이 참 기쁨의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는 우리를 참 기쁨으로 이끕니다. 그 참 기쁨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먼저 수고와 희생을 통해 삶에 투신하기 전에, 우리는 진정 노력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여쭈어야 합니다. 마치 집회서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일에 앞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너의 길을 진실하게 인도하시도록 하여라”(집회 37,15).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넘치는 기쁨을 얻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 25,4)라고 먼저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함승수 신부님
사회학 용어중에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가질 수 없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것들의 가치를 기회비용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의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나의 삶에 더 중요한지, 무엇이 나에게 더 필요한지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오늘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원하는 것을 청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 천금같은 기회에 청한 것이 ‘겨우’ 지혜라니… 세상에 좋은 것, 귀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을 청하는지 우리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것을 선택하는 최선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물을 희생하고 욕심을 버림으로써 가장 귀한 것, 즉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기회, 즉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릴 소중한 기회 또한 얻게 되었지요. 그런 ‘투자방식’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확실한 쪽에 ‘올인’한,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는 몇 가지만 선택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다’ 주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과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얼마든지,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기호에 맞는 것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을 고르려고 하기에 ‘선택지’가 줄어들 뿐이지요. 자신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기에 엉뚱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은 ‘두 가지’를 청했지만, 주님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우리는 솔로몬이 삶의 후반부에 저지른 실수와 잘못들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이라는 핑계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파라오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우상숭배’라는 죄악이 스며들게 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1열왕 3,1; 11,1) ‘세상의 지혜’에 따라 주변국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이방여인들과 혼인을 맺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큰 환난에 처한 것이지요. 또한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는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풍요와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 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큰 슬픔까지 겪게 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상의 것들을 선택했을 때 어떤 슬픈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올인’해야 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둘 다 놓치게 될 뿐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은 하느님만을 간절히 바라는 ‘가난한 마음'이고,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된 마음이며, 모든 것을 초월하여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맘껏 누리는 자유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기꺼이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더 많은 소득, 출세와 성공의 기회를 포기합니다. 부부가 함께 있기 위해, 친구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지요. 그 희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음’이 소중하기에 본인들이 기꺼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력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기에 그것들에 속박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 나라에 숨겨진 보물이란 결국 ‘하느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그분과 일치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세속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에 한 가지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온전히 순명하며 당신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런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지만 이 말씀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란 참 어렵지요. 그런 분들에게 다음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녜스 수녀님은 성서를 공부하기 위해 로마에 유학을 나갔습니다. 학부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에 처음부터 진이 빠지는 힘든 과정이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철학과정 한 학기를 마치고나자 학업에 대한 의욕은 완전히 꺾여버렸고, 내가 왜 이 먼 타국에서 이런 힘든 일을 겪어야 하냐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그분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여름 방학 때 함께 공부하던 수녀님이 이태리의 알프스 지역에 있는 ‘돌로미티’라는 곳에 등반을 다녀오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거기 갈 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람도 쐴 겸 가기로 했습니다. 알프스에는 그 수녀님이 좋아하는 ‘에델바이스’ 꽃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왠지 그 꽃을 직접 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800미터 고지에 있는 숙소에 머물며 3일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에서 에델바이스 꽃만 찾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등반하고 있는데 수녀님은 제발 에델바이스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땅만 쳐다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녀님의 모습을 보며 이태리 사람이 하는 말이, 그 꽃은 매우 험준한 곳에 피기 때문에 이런 낮은 산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채취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서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때부터 일행들이 함께 에델바이스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예정했던 일주일이 다 지나고 로마로 돌아가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에델바이스를 찾지 못해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짐을 차에 싣고난 후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태리 사람이 뒤에서 “아녜스, 위를 봐!” 하고 알프스가 떠나가라 외쳤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었고 이슬비까지 내리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생전 처음 보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듯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녀님은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그렇게 갈구했던 것이 ‘에델바이스’였습니다. 그런데 그 에델바이스는 ‘알프스의 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땅 바닥에 피는 에델바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상의 에델바이스를 선물로 주려고 하셨는데 난 그분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땅만 바라보며 작은 꽃만 찾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때 얻은 힘으로 9년 만에 성서 석사 과정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뜻과는 상관없이 사는데 많은 재물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사는 이들을 볼 때, 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도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자꾸 생길 때, 신앙생활에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크고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선물의 참된 가치를 알지 못해 그냥 지나치는 것일뿐이지요. 우리가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산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엿보게 해 주십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라기보다 하느님과 그분 주권이 미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44).
모두가 소유하길 바라는 것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으면 너도 나도 달려가 취하려 할텐데, "하늘 나라"라는 보물은 숨겨져 있다고 하십니다.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 얻으려는 이에게는 자신을 드러내고, 보물인 줄도 모르고 관심조차 없는 이에게는 영영 숨어 있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로 나뉩니다. 물론 그 안에도 열성과 지향에 따라 무수한 층위가 존재하겠지요. 가령 하느님을 찾는 이들 안에는 열렬한 사랑꾼도 있지만 지적 탐구를 위해 신학을 하는 이도 있고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정도로 하느님 이름을 취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반면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 안에는 하느님 현존을 불신하고 거부하는 이부터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대항하는 자, 그저 무관심하거나 무용하게 여겨 외면하는 부류까지 다양하겠지요. 그러니 하늘 나라는 숨겨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치를 아는 이의 눈에만 드러나는 신비니까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아는 눈, 그 시력이 곧 지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이 주님께 청한 바지요.
"듣는 마음을 주시어 ...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대개의 사람이 추구하는 장수나 부, 복수와 권력 쟁취가 아닌 지혜를 청한 솔로몬에게 주님께서는 크게 탄복하시며 청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요(1열왕 3,13 참조). 지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축복입니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추구하는 "지혜"를 얻은 이는 모든 것을 얻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예수님은 또 하늘 나라가 상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상인은 좋은 물건을 구해서 좋은 가격에 팔아 이문을 남기는 사람이니, 물건을 보는 안목과 기준이 남다르겠지요. 알아보는 눈이 있는 이가 골랐으니 일단 가치는 보장된 겁니다.
상인은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걸 모두 처분해 그것을 삽니다. 찾아다니고, 발견하고, 주저없이 처분하고, 선택하고, 소유하는 역동적 추진력이 느껴집니다.
바로 하느님(하늘 나라)의 모습이 그러하겠지요. "우리 각자"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하느님께서 망설임 없이 가진 것을 처분해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를 속량이라고 하지요. 하느님은 당신 생명으로 우리의 값을 치르고 우리를 얻어내신 분입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를 소유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늘 나라를 소유했고요.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그런데 하늘 나라 그물 안에는 아직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밀밭에서 함께 자라는 가라지와도 같지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듯이, 그물 속 내용물의 선별 작업도 "세상 종말"까지 유예될 것입니다.
힘들지만 그때까지 "가라지"나 "나쁜 것들"을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밝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당장은 양분을 갈취하고 성장을 저해하며 생명력을 빼앗는 듯 보이더라도,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는 선을 향해 서로서로 작용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아무도 끝을 모릅니다. 오직 주님만 아시지요. 그러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더 큰 선, 더 큰 영광을 위해 묵묵히, 인내로이 이 지상의 순례길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청합시다. 아직 많은 것이 불완전하고 고통스럽지만, 하늘 나라를 찾는 지혜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하늘 나라를 소유했고, 하느님도 진주를 알아보는 사랑의 혜안으로 우리를 소유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참조). 하늘의 시민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합시다. 아멘.
참보물 -발견의 은총, 발견의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참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주여, 내 당신 법을 얼마나 사랑하였나이까” 이렇게 주님 가르침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 진짜 참보물을 발견함으로 샘솟는 기쁨을 지닌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은 부유합니까?
여러분은 자유롭습니까?
여러분은 보물이 있습니까?
한 번 뿐의 인생, 참으로 행복하고 싶고 부유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고 보물을 지니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살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문득 아주 예전 5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 봄-가을 소풍 때의 추억이 떠오릅 니다. 소풍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면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곧장 서둘러 흩어져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에 바쁩니다. 곱게 접어져 있는 보물 종이를 찾는 것입니다. 종이엔 보물 상품이 적혀있고 그것을 받습니다.
보물의 내용이 아니라 보물 쪽지 종이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 발견의 기쁨이 핵심입니다. 보물을 찾지 못해 상도 못받고 귀가할 때 그 쓸쓸했던 느낌도 생각납니다. 때로 보물 쪽지를 여러개 찾은 동무가 하나라도 주면 고맙고 맘씨 좋은 선생님이 찾지 못한 동무들에게도 골고루 작은 선물들을 나눠줬을 때의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소풍과 보물찾기, 참 기막힌 상징입니다. 한 번 뿐의 인생 소풍후 보물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보물이라고 다 보물이 아닙니다. 가짜 보물도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참보물인줄 알고 기뻐했는 데 막판에 가서 가짜 보물로 드러난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참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참보물이 무엇입니까?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참보물의 발견은 그대로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인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가 참보물찾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발견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은총처럼 뜻밖에 참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고 간절히 찾을 때 참 보물 진주를 발견하여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참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공통점은 기쁨이요, 모든 것을 투자하여 이 보물을 구입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런 참보물을 발견했을 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 구입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공통적, 본질적 욕구일 것입니다. 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수도자들입니다.
마음이 답입니다.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절실한 마음으로 항구히 한결같이 참보물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무지無知에 눈멀어 참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평생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말이 이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보물을 아무리 많이 소유했어도 마음의 갈증渴症과 허기虛氣는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참으로 마음의 갈증과 허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참 보물은 무엇이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솔로몬이 참 슬기롭습니다. 참보물을 선택하는 솔로몬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근원적 물음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여러 가지 답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하느님께 이런 참보물인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의 참보물을 선물받았을 때 솔로몬의 기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바로 참보물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가톨릭 교회의 불세출의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성인의 전기에 나오는 다음 일화는 늘 읽어도 새롭고 공감이 갑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성인은 경당의 십자가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지나던 수사가 문틈에서 나오는 대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인은 그가 그리스도교 믿음의 신비에 대해 쓴 것이 정확한 것인지 주님께 심각하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성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놀랍다. 너에게 무슨 상급을 주었으면 좋겠느냐?”
토마스가 그분께 드린 답변은 예수님의 친구들과 제자들이라면 언제나 그분께 드리고 싶은 다음 내용입니다.
“주님, 오직 당신뿐, 당신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Nothing but youself, Lord!)”-
얼마나 통쾌, 유쾌, 상쾌한 답변인지요. 세상에 유일한 참보물 예수님 당신 하나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욕심이요 정말 지혜로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파스카의 예수님을 모신자가 최고의 부자요 복자福者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모시면 줄줄이 보물들이 줄을 잇기 마련입니다.
이런 참 보물 예수님을 지녔을 때 참으로 세상 가짜 보물들, 우상들로부터 초연한, 이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부러울 것도, 탐낼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주님 맛’앞에 사라지는 ‘세상 맛’들입니다. 가난과 정결과 순종의 복음적 권고도 저절로 이뤄집니다.
도대체 행복의 샘, 지혜의 샘, 사람의 샘이신 참보물 예수님을 모신 충만한 삶인데 무엇이 아쉽겠는지요. 저절로 마음 깊이에서 샘솟는 고백일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그러니 참 보물은 예수님 하나뿐입니다.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하늘나라 하나뿐입니다. 셋인 듯 하나지만 하나입니다. 한 실재의 세 측면이 예수님, 하느님, 하늘나라입니다. 참보물 예수님과 함께 살아 갈 때 그물의 비유대로 최후의 심판을,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모두가 하느님 그물 안에, 하느님 수중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연인 듯 하나 결국은 하느님 섭리의 필연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참보물 예수님과 하나된 지혜로운 이들에게는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임을 압니다.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깨달았느냐?”
참보물 예수님을, 하느님을 깨달았느냐 묻습니다. “예!”제자들처럼 힘차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깨달아 있는 그대로 보고 알 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발견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깨달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더불어 주님과의 일치도 깊어지며 참으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행복하고 부유한 내적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처럼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헌것도 꺼내는 자유자재의 집주인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참보물을 찾아 밖에 나갈 것은 없습니다. 내 몸담고 있는 일상의 제자리가 보물밭입니다. 참보물 예수님이 숨겨져 있는 보물밭입니다. 다음 예닮기도, 행복기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보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참보물 예수님과 일치되어 눈이 열릴 때 온통 선물이요 보물입니다. 보물 가득 숨겨진 보물밭입니다. 예수님이 으뜸 참보물이라면 우리 보이는 형제자매들 역시 보물입니다. 여기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아니 미사에 참석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신의 한수요 하느님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보물입니다. 바로 참보물인 형제자매들은 다음 꽃과 산같은 존재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그러니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보물인 형제자매들을 소중히 대해야 하고 아껴 보살피고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무지에 눈멀어 참보물 하느님을, 이웃을 잊고 살았다면, 또 평생을 살아도 참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가짜 보물 속에서 가짜 인생을 살았다면 이보다 허무하고 허망하고 억울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 나눴던 일화 둘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우리 수도공동체의 보물입니다!”란 저의 찬사에 노선배 수도사제의 “아닙니다. 보물寶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입니다.” 참 유쾌한 유머입니다. 고물이란 겸손이 바로 보물인생 사제임을 입증합니다.-
-“신부님, 보속補贖이 아니라 빛나는 보석寶石입니다.” 면담고백 성사후 보속으로 써드린 말씀처방전에 기쁨의 환호로 응답한 수녀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정말 참보물인 주님의 말씀 또한 참보물입니다. 오늘 화답송도 참보물 말씀예찬처럼 들립니다.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복중의 복이 하느님 복입니다. 금수저, 은수저로 태어나지 못하고 흙수저로 태어났다 자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갓수저로 태어난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도 어제 갓수저가 뭔가 궁금하던중 인터넷을 통해 알고 웃었습니다. 갓은 영어로 God(갓, 하느님), 그러니 갓수저는 하느님 수저, 하느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보물인 당신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참보물이 되어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갓수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어제 써놓은 ‘꽃자리’란 시를 나누며 강론을 마칩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
꽃자리이니라”
어디든 자리 잡으면 오늘 지금 여기가
참보물 주님을 만나는 꽃자리 좋은 자리이기에
다니고 싶은 곳이 가고 싶은 곳이 없네”-아멘.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13세기의 어느날 나폴리 성 도미니코 성당의 제의실을 담당하던 카세르타의 도미니코 수사님은 경당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토마스 성인은 살아계실 때부터 비할 수 없이 위대한 신학자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수사님은 이 위대한 학자의 기도를 조용히 지켜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도미니코 수사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서 토마스 성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Bene scripsisti, Thoma, de me quam ergo mercedem accipies?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잘 썼구나. 그러니 너는 무슨 상을 받겠느냐?)
이 때 토마스 성인은 신학대전에서 그리스도론과 성체성사에 대한 부분을 완성하고 난 후였습니다. 그러자 수사님은 성인이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을 듣습니다.
Non aliam nisi te (당신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로 손꼽히는 성인은 49세의 나이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십니다.
오늘 1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찾고 사는지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하늘 나라였습니다. 버려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을 모든 속박에서부터 해방하는 하늘 나라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체험한 제자들은 온 세상에 이 해방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이 세상에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20억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성당과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골목마다 서 있는 성당과 교회의 종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숨겨진 보물처럼 우리 곁에 계십니다.
누가 그 숨겨진 보물을 찾을까요? 그 숨겨진 보물을 찾는 사람은 진심으로 토마스 성인처럼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저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을 갈망합니다."
토마스 성인의 이 대답은 예수님의 당부를 떠오르게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성당에 오시는 분들 중에서도, “신부님, 주일마다 미사에 빠짐없이 오는데 특별히 느껴지는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마음에 깊이 다가오지 않아요!”
또는 “제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어요!”
“제 억울한 마음을 해소할 수가 없어요!” 라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미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념하고,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 드리며, 감사를 드리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미사는 가장 좋은 기도이고, 우리 신앙 생활의 정점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지난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주신 주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다가오는 새로운 한 주간을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은총을 받아 나갑니다. 주일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인생의 길을 일러주시고, 참 진리를 일깨워주며,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펼쳐 주시고 비춰 주시는 우리의 앞 날을 바라봅니다. 한 주간의 피로를 풀고, 지난 한 주간 동안 사회에서 처절하게 부딪히며 살아온 모든 고민과 아픔과 번민과 갈등을 주께 봉헌하며 맡겨드리고, 주님 안에서 한 단계씩 조금씩 차근차근 풀어 나가며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생애에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을 내 삶 속에 실현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미사를 통해, 주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 전례와 성찬 저례를 통해 주님을 모시고 충만한 사랑을 품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 마음 속 깊이 다가오는 주 예수님의 평화를 얻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사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통해 갈구해왔던 커다란 은총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집중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주 예수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채널이 맞지 않아서 그런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아서 그런지, 여러가지 이유와 변수로 인하여 맹숭맹숭하게 돌아가면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더 이상의 기도나 성경공부나 단체활동이나 신심행위들을 하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과 함께하시는 주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주변을 맴돌게 되기도 합니다.
마음 속에서는 ‘나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으로서는 ‘나도 주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 주시며 보호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싶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 속에만 머물 뿐 더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우리 중에 누가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저기 저 밭에 보물이 있어.’ 라고만 생각하고 그친다면, 그 보물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또 내일 사야지, 다음에 사야지 하면서 미루면, 그 보물은 미루는 만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물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 보물을 얻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보물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그 보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영적으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에겐 그 보물이 더 이상 보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주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펼쳐 주시는 하늘 나라 이외의 다른 것 즉 사회적 출세와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보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펼쳐 주시는 하늘 나라가 보물이 아닌 사람이나, 보물인 줄 알면서도 미루고 망설이며 주저하거나, 또는 내가 가진 것을 더 중시하는 사람은 성당에 나와도 주 예수님을 느끼거나 마음에 담지 못하고 그저 무미건조한 삶을 살 뿐입니다.
주 예수님과 주 예수님께서 펼쳐 주시는 하늘 나라가 보물이라고 알아차리는 사람에게만 보물은 빛을 발합니다. 주 예수님과 주 예수님께서 펼쳐 주시는 하늘 나라에서 길을 찾는 사람에게만 그 길이 열립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 주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 주 예수님을 느끼고 싶은 사람, 그것도 간절히 느끼고 얻고 싶은 사람에게는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 보여주시고 함께하시면서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지켜 주시고 돌봐 주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주 예수님이 마음 속 깊이 다가오지 않으면, 마음 속 깊이 다가 오시도록, 아니 내가 그분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 간절한 마음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미사만 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다 안다고 하든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실천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예전부터 6시 아침기도와 미사, 9시 낮기도, 12시 삼종기도와 낮기도, 15시 낮기도, 18시 저녁기도, 20시 끝기도와 독서기도를 바쳐왔습니다. 이를 시간경이라고 하며, 시간에 맞춰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는 하루에 몇 번씩 예수님을 느끼고 살기 위해, 자주 아예 시간을 정해서, 잊어버릴 때쯤 되면 다시 또 상기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했습니다. 함께하고 싶어했습니다.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채널을 맞추기 위해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도 성무일도와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 성체조배 등 여러가지 자신의 취향과 방식에 맞는 기도 종류들을 골고루 선택하여 주님과 함께하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기도를 어떻게 바치든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 로마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그리고 또 주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직접 읽으면서, 그 말씀의 뜻을 찾고, 자기 삶에 적용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알아차린 말씀의 뜻이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신자들이 지도 신부님과 지도자들과 함께 식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함께 알아낸 주님의 뜻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함께 실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깨닫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듣는 만큼 더 실현하고, 실현한만큼 더 깨우쳐, 주 예수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29-30)
이 시점에서,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향한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있는지, 어느 정도인지 되새겨 봅시다.
예수님이 나의 탐욕스런 욕심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의 주님으로만 존재하는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께 자꾸만 다가서고 싶고, 예수님 앞에 서면 설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싶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겨서, 그 뜻을 깨우치고 또 깊은 깨달음을 얻고자 갈망하는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반드시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샘솟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구현하여 예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고 싶은 열정이 솟아오르는지?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지?
여기서 한 가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하나의 조건이랄까 수준이랄까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 남들의 눈에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자신도 바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바보. 그러면 오늘 복음 환호송이 마음에 그득 차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 11,25 참조)
기다리며 증언하는 교회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주님의 제자교육은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하였는데, 사도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주신 명령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붙잡고 사도들이 다급하게 여쭸습니다. ‘주님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가 지금입니까?’ 예수님은 대답을 거절하십니다. 그 시기는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너희는 성령을 기다려라.’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의 특성이 “기다리며 증언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겼으니, 그들은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도에 ‘언제까지입니까?’ 하는 물음은 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다리는 사람, 희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의 귀한 열매, 보물,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땅 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사도 1,1-14).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자녀들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값을 치르고 교회를 가득 채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당신 핏값으로 사들인 보물이고 진주입니다. 그러니 광채를 잃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이 감지되지 않는 생활, 세상일에만 급급하며 주님에 대해서 말하고 기도하기를 그만두면 광채를 잃은 것입니다.
인생결말 위해 신앙인 됩시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늘나라를 제대로 아시는 분은 인류사에 예수님뿐이라 저는 믿습니다.
하늘나라는 결국 인간이 영원 살아야 할 보물 진주 같은 최적지입니다.
흙에 묻힌 보물 모든 걸 팔아서 살 진주 인생은 그물 걸린 생선입니다.
인간이라면 천국 가야하는데 지옥 말고 하늘 갈 사람 말 들어야겠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선한 이들의 말 들으며 자기처신 해야 된다는 겁니다.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청하여 지혜롭게 분별하는 능력 지니면서 말예요.
기왕 두 귀가 붙어 있으니 마귀 말 천사 말 듣고 분별해서 살아야겠죠.
하늘천사가 참 보물 진주 주려고 가려낼 인생결말 위해 신앙인 됩시다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7주일>(2020. 7. 26.)(마태 13,44-52)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이 두 비유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의 ‘기쁨’과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고,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포기해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비유 안에 들어 있는 가르침을 생각하면,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보물을 차지하여라.”이고,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는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 진주를 사라.”입니다. 두 비유에 들어 있는 실천 지침은 두 가지입니다.
1.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라 (처분하여라).
2. 보물을(진주를) 차지하여라.
<여기서 가진 것을 다 파는(처분하는) 것은 단순히 밭의(진주의)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진주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파는 것이 아니라, 보물(진주)만이 영원히 가지고 있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전부 다, 계속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가, 또는 하늘나라의 복음이 숨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전해 받았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농사를 짓다가, 즉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발견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발견했든지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보물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복음을 듣게 되는 사람도 있고, 구원의 진리를 갈망하면서 찾아다니다가 복음을 듣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듣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복음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이라는 말씀은, 보물을 발견한 것에 대한 기쁨과 그 보물을 차지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고, 이 말씀 자체에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또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아무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함께 차지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보물을 차지한 사람은, 자기의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말해야 하고, 그리고 자기가 차지한 보물을 모든 사람에게 자랑해야 합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을 감추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추면 복음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ㄱ).”
여기서 ‘해로운 것, 쓰레기’ 라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고,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이고, 바리사이이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에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인데 (필리 3,5-6), 그것들은 세속 생활에서는 이로운 것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에서는 해로운 것일 뿐이고 쓰레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가문, 신분, 직업, 학위, 학력 같은 것들이 세속 생활에서는 도움이 되더라도, 신앙생활에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한다면, 그것들은 해로운 것들이고 쓰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11).”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1-22).”
여기에 나오는 부자 젊은이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을 버릴 수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재물을 선택했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음을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 가지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부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우리가 전부 버리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것들을 전부 다 차지할 수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세속에 속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미사 중에는 휴대 전화기를 끄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전부 차단해야 온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미사 참례 중에 마음과 생각이 세속을 향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은 것이고,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임상만 신부님
한 농부가 밭에서 일하다가 아주 큰 보물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너무 기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
유다인들은 대체로 귀한 보물을 땅속에 깊게 묻어두었는데 전쟁이 많다 보니 전사하거나 포로 혹은 피난 생활 후에 영구 귀가하지 못하는 경우로 인해 이 보물들이 다른 농부에 의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보물은 율법에 따라 현재의 땅 주인 소유물이기에 발견한 사람은 먼저 그 밭을 사야만 합법적으로 보물을 취득할 수 있었다.
공자는 「논어」를 시작하면서, 인간에게는 ‘배우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學而詩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배움으로 얻은 것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간 기쁨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발견하는 기쁨’이다.
발견하는 것이 배워서 알게 되는 것보다 훨씬 비약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능력으로 배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기쁨은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참 진리와 보물인 이것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없이 결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되는 발견의 기쁨은 우리 인생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이시며,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보물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고 헌신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일상 속에서 엄청난 가치의 보물을 발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즉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일궈온 기존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래서 농부는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팔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우리도 그 가치를 알고 있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부로서 가장 소중한 배를 버렸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버렸다고 한다.(필리 3,8)
이 같은 헌신을 통해 비로소 그들이 발견한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밭’인 교회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물을 얻을 수 있도록 농부의 지혜로운 삶을 구해야 하겠다.
우선 교회에서 주님을 발견하여 온전히 자기를 헌신할 수 있는 지혜, 우리가 만난 주님을 소유할 수 있도록 자기 소유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지혜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주님 안에 머무르는 기쁨을 깨닫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게 해 주셨으니 내 소유를 다 팔아 이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겠다는 고백보다 더 좋은 지혜로운 삶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2,3)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하시면서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과 진주를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지인 중에 개를 기르는 분이 계셨는데, 한번은 그 집 개가 아파서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수술비가 엄청나게 들어가게 되어서 병원에서는 그냥 개를 안락사를 시키는 게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권유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권유를 뿌리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개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 분 형편에 있어서 정말 많은 돈을 들여서 수술을 하게 되었고 결국 잘 회복해서 그 후 오랜 시간동안 그 개와 행복하게 잘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개를 수술하고 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거기에 들어간 돈의 액수에 초점을 맞춰서 그 주인이 대단한 정성이라고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주인에게 있어서 그 개는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인은 그 개를 그냥 사육한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진정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신 주님이십니다. 곧 주님께서는 마치 당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산 것처럼 당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보물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도 역시 그 주님께 사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주님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나도 역시 가진 것을 그분께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봉헌의 기도에서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이미 주님께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봉헌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은총과 축복으로 함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위대한 선택, 항구한 선택, 완성된 선택 <마태 13, 44-5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갈림길에 선 인생을 살아갑니다. 북쪽으로 갈 수도 있고, 남쪽으로도 갈 수도 있습니다. 바다로 갈 수 있고, 산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하늘을 보고 살 수 있고, 땅을 보고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선택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택은 다른 쪽을 버리거나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씀과 한번 내려놓은 것을 다시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보물을 찾은 사람은 찾아서 위대한 선택을 한 사람이며, 선택하고도 항구하지 못하고 완성을 보지 못하면 쓸모없는 선택이라고 하시며 “의인 가운데서 악한 자를 가려내어” 폐기처분 한다고 하십니다. 옛것과 새것을 가려내시겠다는 말씀도 시작하고도 완성하지 못한 옛것과 완성된 새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 살기 시작한 성직자나 수도자나 신자들이 처음과 같이 영원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남지 않으면 시작한 일을 실패 본다는 말씀입니다.
신품 때나, 서원 때나, 영세 때나 하느님을 믿고 섬기며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한 것 같지만 살면서 쟁기를 잡은 농군이 밭을 갈며 뒤를 보면 땅을 제대로 갈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주님의 벌을 받고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말은 버리고 온 것을 다시 그리워하거나 다시 돌아가려는 자세는 위대한 선택을 망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만을 섬기는 자세는 세상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잿밥인 권력, 재력, 명예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편만 위하는 지도자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학력을 위조하여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가 여기에 속합니다. 신앙생활 중에 이해타산, 이기심으로 자비심 없이 분열의 씨앗이 되면 시작한 일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어떤 수도자가 초심을 잃고 헤매는 사람과 긴 대화 속에 다시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하느님 찾아 하늘나라에 사는 것이 절대적 우위라 생각하고 마음을 돌리는 형제를 보고 기뻐한 꿈을 꾸고 일어나 ‘바로 그 사람이 나였지’하고 반성하며 이 글을 씁니다. 시편 안에 “야훼 하느님께 날마다 새 노래를 부르라”라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며 주님 앞에 우리는 늘 새 마음, 새 정신, 새로운 말, 새로운 행동을 통해 주님을 찬미 찬송하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야 합니다.
나이 들었다고 헌것이 되지 말고 언제나 싱싱한 제물을 바치고 주님의 변함 없는 보물을 간직한 채 세상 끝날까지 새 제물을 바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며, 위대한 선택을 항구하게 지키고 완성하도록 기도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
밭에
있습니다.
우리들 밭에서
보물이 나옵니다.
여행은
가 보지 않고서는
모르고
삶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삶은
보물같이
숨겨져 있기에
신비롭습니다.
하늘 나라는
삶이라는 밭에
숨겨진 나라입니다.
보물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은
보물이 됩니다.
우리 삶속에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보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살 그 마음으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하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아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보물입니다.
하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께
집중하는 충만한
나라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더욱 아름다운
우리들 삶입니다.
제게 학창시절에 제일 싫었던 것을 뽑으라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공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억지로 공부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특히 고등학생 때까지 수학, 과학 등의 이과(理科)에 관심 많았던 저로써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철학, 신학 등의 공부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들다고 신학교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지요. 신부가 되기 위해서 억지로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공부했던 저였기 때문에, 신부가 된 후에 “유학 한 번 가보면 어때?”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말도 안 된다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40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 저는 공부가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공부가 제일 쉬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이상한 취급했는데, 지금 제게 공부는 너무 좋고 또 제일 쉬운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는데 스스로 찾아서 공부를 합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이제야 생긴 것이지요. 이 열정이 왜 이제야 찾아왔을까요?
전에는 성적이나 진학 그리고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였지만, 이제는 하느님과 나 그리고 세상과 나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공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공부가 너무나 즐겁습니다.
즐기는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아프지 않기 위해서? 이런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의 참 만남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면 분명히 신앙생활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 그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물론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서 보물을 발견했으니 주인에게 먼저 알려야 하겠지요. 또한 세속적인 욕심에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진주를 구입하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부분을 강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밭의 보물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기쁨, 좋은 진주를 구입해서 바라보는 기쁨, 이러한 기쁨으로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보물이고 최고의 진주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모두 팔아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으며 또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에 관해 전 세계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은 ‘정해진 행복은 없다’라는 것이다(레오 보만스).
재미있는 삶
안식년 때에 저는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살았었습니다. 새롭게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높은 빌딩이 많고 또한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공원은 산책하기에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곳에 사는 것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살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재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빌딩이 촘촘하게 세워져 있는 서울의 도심지를 가면 재미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이고, 오래된 마을입니다. 실제로 신생 도시보다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오래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탈리아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탈리아의 도시를 다녀왔지만 그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도시는 베니스였습니다. 연극이나 영화 그리고 책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도시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도시에서 살 수 있을까 싶더군요. 아드리아 해의 황량한 갯벌 위에 수백만 개의 말뚝과 돌을 박아 기반을 다진 뒤에 도시로 건설한 곳이 바로 베니스입니다.
물 위에 있다 보니 걸핏하면 집들이 물에 잠깁니다. 오래된 도시의 집이라서 재건축을 하려해도 절차가 복잡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차가 아닌 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도 큽니다. 그러나 베니스는 삶에 대한 개개인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불편함도 많고 볼거리도 그리 많지 않은 곳입니다. 압도적인 건축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도시입니다.
어렵고 힘든 삶이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뻔한 삶을 재미없지 않을까요? 또한 지금의 내 모습이 초창기의 베니스와 같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뒤에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떻습니까?
우리네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한 체력’하는 젊은 형제들과 산을 오를 때였습니다.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꼬리에 따라붙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자꾸만 뒤쳐졌습니다. 할 수 없이 ‘먼저들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벌써 다가온 ‘저질 체력!’ 은근히 자존심 상했지만 ‘이것이 인생이다.’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이리저리 눈길을 주며 걷던 제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습니다. 정상만 생각하며 정신없이 올라갈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멋진 산세에 위풍당당한 나무들,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들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이 난 저는 키 작은 야생화의 순수한 자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췄습니다. 그랬더니 더 깜짝 놀랐습니다. 서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그 아래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대자연의 순환이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굉장히 멀리 있는듯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 하는 일상 안에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가 감춰져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가깝고도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보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너무 뻣뻣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커져버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삼대가 복을 지어야 맑게 갠 정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내놓으라하는 최고봉들은 웬만해서는 산정(山頂)의 신비로운 자태를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정점(頂點)에 위치해 있는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그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매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영약이 성체성사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식에 불과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철저하게도 편협한 고정관념과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연세들도 지긋하셔서 깨달을 때가 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 인생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질이 하등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추구하고 얻어야 할 인생의 긍정적인 가치나 덕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자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께 귀의(歸依)하는 신앙이 있고, 인생이 가장 큰 선물인 가족과 친구가 있고, 그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사랑, 우정, 신의, 겸손, 온유, 친절, 배려...
그런 아름답고 의미 있는 가치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저 기를 쓰고 올라가려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손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공동선이나 이웃들의 유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뱃속, 자기 식솔들 챙기기에 하루해가 짧습니다. 야수(野獸)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복음 13장 44절)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여기 저기 우리 주변에 묻혀있는 인생의 보물들을 찾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불성실로 인해 아직도 찾지 못한 인생의 깨달음, 신앙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나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런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갖가지 일들, 기쁨, 고통, 희망, 번뇌, 그 모든 것을 서로 나눠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인생의 보람이며 행복입니다.”(에디트 슈타인)
하늘나라의 가치
정중규 신부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는데, 저마다 다른 꿈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한 학생은 “나는 교회에서 종을 치시는 아버지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치는 종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기도하고, 일하고, 식사하는 것이 그 어린 학생에게는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 어린이에게는 대통령이나 변호사, 의사보다 종치는 일에 더 의미와 가치를 두었는지 모른다.
세상에는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이 많다. 사람에 따라 그 가지의 기준이 다르겠지 만…. 그렇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성찰은 자기반성이요 자기탐구의 삶이다. 이것은 물질의 세계를 넘어 초자연적 삶의 추구일 것이다. 보이는 것의 가치와 의미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추구일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했다.우리는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목숨을 담보한 한판의 승부를 거는 경우도 많고, 탐욕과 집착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동물적 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보이는 것에 절대 가치를 두는 자기소멸의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가 아닐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고유한 가치를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신다.
하늘나라의 가치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던져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닌다.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떤 가치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성찰 해보자.
기쁨을 살기 위한 선택과 결단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 가지 비유로 하늘 나라의 사정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13,44). 그것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기쁨 자체이시며, 온갖 기쁨의 샘인 하늘 나라를 발견하고 알아차리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습니다(13,45). 영원한 좋음이신 하느님을 찾는 상인은 이미 하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 또한 큰 기쁨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맛보고, 영원한 좋음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기쁨을 주는 분을 차지하려 합니다. 기쁨과 선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려 하지요. 그보다 더 좋고 가치 있으며 의미 있는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보물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음을 알기에 가진 것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렇게 기쁨과 선이신 하느님을 차지하고, 기쁨과 선의 나라인 하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상의 하늘 나라인 교회에 속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영원한 행복 안에 머무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자기 것으로만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게 되지요.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기쁨을 선포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좋음을 나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큰 기쁨에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렇게 모든 이를 사로잡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기쁨에 비할 수 없는 크고 영원한 기쁨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기꺼이 따라야겠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안다면 얼마나 더 열정적으로 그 기쁨을 선포해야 할지 모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보고 맛 들이며 그분의 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신해야겠지요.
아울러 하늘 나라는 그물과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지만, 결국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기쁨의 나라인 하늘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기쁨을 찾고 선이 아닌 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거짓과 탐욕의 어둠을 즐기는 이들은 추려져 버림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선에 감사드리며, 그것을 기꺼이 선포하고 나누는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하느님의 진리와 기쁨을 살겠다는 선택과 결단이 요청됩니다. 일상의 매순간이 바로 그러한 결단의 기회입니다.
지금 여기 바로 내 눈앞에 마치 밭에 묻힌 보물과 좋은 진주처럼 영원한 기쁨을 주는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것이 놓여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눈이 있습니까? 또 그것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기로 선택하고 결단하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다른 것들을 우선적으로 찾느라 ‘눈뜬 봉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영원을 좌우하는 순간의 선택!"
박미라 도미틸라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정말이지 하늘나라는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산다 해도 그 값이 하나도 비싼 것이 아니지요...
자신이 가졌다는 모든 것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다 그분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것을 내어 놓으면 하늘나라를 몽땅 주시겠다는데, 하나도 손해 볼 것이 없는데, 무엇이 그리도 아까운지....
자신의 것을 조금도 내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 꼴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면 얼마나 꼴불견이겠습니까?
밭에 묻혀있는 보물 그 이상으로.... 값진 진주 그 이상으로...
덤으로 주실 너무나도 엄청난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늘나라!!!
오늘은 우리에게 주실 무한한 은총의 하늘나라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네요....
아주 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어 놓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벌써 우리가 내어 놓은 것보다 백배도 더 큰 것으로 갚아 주시는데 그곳에서는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 주실 지...
당신께서 무상으로 주신 나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모든 것들...
자신의 영혼과 육신 그 안에 깃들이어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인이 당신이시니 마음대로 쓰시도록 내어 드리기만 하는 것을....
그것을 하지 못해 자신 안에 갇혀 숨이 막히고 자유롭지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밭에 묻혀있는 보물이나 값진 진주를 보고도 자신의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보다 몇 억 만 배보다도 더 값진 하늘나라를 사기 위해 자신의 것을 다 내어 놓는 것이 어떻게 아까울 수가 있겠습니까?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니 그냥 있는 그대로를 내어 맡기면 될 것을...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지막 날!
그 날은 이 세상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닥칠 자신의 일이건만 그것은 먼 나라의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누가 옆에서 죽는 것을 보면 그 때에는 죽음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데 곧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잊어버리고 말지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 악한 사람의 대열에서 착한 사람의 대열로 마음만 먹으면 줄을 바꿀 수 있지만 언제 어느 때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 내게 닥쳤을 때에는 이미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내게는 없다는 것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의 문구가 있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10년 20년이 아니라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게 되지요....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보면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명예를 얻고 지위를 얻는 문제보다도, 이 세상 그 어떤 문제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의 급선무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깊이깊이 깨닫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리는데 내가 그 버려진 곳에 놓여있는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것은 먼 나라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오늘이라도 내게 닥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 > 안의 복음까지 두 가지를 해서 좀 길었죠?
우리 모두가 당신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만을 바라며, 우리의 마음만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사랑 안에서 참으로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빌며 연중 제17주일 첫새벽 인사를 올립니다.
하늘 나라에서 우리 모두 만나서 기쁨을 누릴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도 거룩하고도 행복한 주일 되세요.
영원한 참 보물 -하늘 나라의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참 보물을 지닐 때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삽니다. 진정 믿는 누구나의 소원일 것입니다. 보물 앞에 ‘영원한’과 ‘참’이 붙어 있습니다. ‘일시적’인 ‘거짓’ 보물도 많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참 보물을 지닐 때 하늘 나라의 기쁨에 참 행복한 자유로운 삶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솔로몬이, 제2독서의 바오로가, 복음의 예수님이 영원한 참 보물을 발견한 분들입니다. 또 성경과 교회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영원한 참 보물을 발견하여 참 행복을 산 분들입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 많은 분들이 영원한 참 보물을 지니고 하늘 나라의 기쁨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참 보물은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금을 줘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참 보물입니다. 누가 빼앗아 갈 수 없도 없고 누구한테 빼앗아 올 수 없는 참 보물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간절히 항구히 찾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영원한 참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참 보물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보물밭입니다. 참 보물은 무엇입니까? 지혜가,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하늘 나라가 영원한 참 보물입니다. 말만 다를 뿐 모두가 한 실재에 대한 표현입니다. 참 보물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간절히 항구히 찾을 때 발견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찾아야 발견합니다. 찾아야 만납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영원한 참 보물이신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자란 뜻입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진정 영원한 참 보물을 원하는 자는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하늘 나라를 찾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간절히 끊임없이 찾을 때 발견한 영원한 참 보물입니다. 누가 갖다 줄 수 없는, 유산으로 상속할 수 없는 각자 스스로 찾아 발견해야 하는 보물입니다. ‘발견’이란 말이 참 중요합니다. 발명發明이 아니라 발견發見입니다. 참 보물의 발견이요, 발견의 기쁨입니다. 눈이 활짝 열려 있어야 발견하는 보물입니다. 깨달을 ‘각覺’자 안에 ‘볼見’자가 들어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깨달음은 발견을 뜻합니다. 깨달음의 은총, 발견의 은총입니다. 감사도 발견이요 행복도 발견이요 선물도 발견이요 보물도 발견입니다. 모두가 발견의 은총입니다. 눈이 가려져 있어 곁에 선물을, 보물을 놔두고 보지 못해, 발견하지 못해 불행하게, 가난하게 사는 이들도 참 많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습니다. 솔로몬 역시 간절히, 끊임없이 영원한 참 보물이신 하느님을 찾았기에 주님께서 한 밤중 꿈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치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롭게도 장수를, 부를, 원수 갚은 것을 청하지도 않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분별력을 청했습니다.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보는 눈을 청했고 하느님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하늘 나라가 영원한 참 보물입니다. 정말 하느님 은총에 눈이 열려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한번 발견했다 하여 영원한 소유가 되는 보물이 아닙니다. 어디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영원한 참 보물입니다. 찾지 않으면 묻혀 버려 하늘 나라 발견의 기쁨을 살 수 없습니다.
영원한 참 보물을 지닐 때 세상 모든 것들부터 초연한 이탈의 삶입니다. 무엇도 그를 유혹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참 부자의 참 자유로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심원한 깨달음의 말씀,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영원한 참 보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된 삶이었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결국은 잘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영원한 참 보물인 하느님을 발견한 이들은 자비와 연민의 사람들이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궁극의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느님 그물 안에, 하느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압니다.
오늘 복음의 세 번째 하늘 나라의 비유가 참 심오합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을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대로 세상 현실을, 교회 현실을, 종말 심판 현실을 보여줍니다. 선인과 악인이, 의인과 죄인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참 보물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이들은 판단을 보류합니다. 동료 형제들에게는 연민의 사랑을 지니며 자신은 한없는 겸손으로 처신합니다. 이 또한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새삼 자비로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영원한 참 보물이신 주님을 발견한, 만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영원한 참 보물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 자유자재自由自在 이런 분별의 지혜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영원한 참 보물인 하느님이요 하늘나라입니다. 간절히 끊임없이 찾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영원한 참 보물 하느님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발견’이요 하느님 쪽에서 보면 ‘선물’입니다. 선물이 먼저이고 발견은 다음입니다. 하느님 선물을 발견했을 때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 눈을 열어 주어 늘 새롭게 영원한 참 보물이신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영원한 참 보물이신 당신을 모시는 우리 모두를 하늘 나라의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고,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
최원석
오늘은 그 유명한 솔로몬 왕에 대하여서 독서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만약에 저에게 주님이 꿈에 나타나시어서 요한아 너는 지금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저는 바로 이렇게 이야기 할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빨리 졸업을 하여서 하루 빨리 돈을 벌고싶습니다. 라고 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4년동안 공부한다고 스트레스를 워낙 많이 받아서 이것을 해결해달라구 주님에게 말할것 같아요 ..그러나 솔로몬 왕은 지혜를 달라구 기도합니다. 돈과 권력 혹은 생명을 달라구 하지 않고 분별할수 있는 지혜를 달라구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님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 것인지 아닌지 식별할수 있는 은혜를 달라구 하는 것과 동일한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대견하게 보신것이지요. 저에게도 이와 같은 분별하고 식별할수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힘들어서 재발 이것만은 좀 치워주세요 혹은 나 십자가 싫으니 제발 가벼운 십자가 주세요 와 같은 기도가 저의 기도인 것 같아요 ..그러나 분별 식별 할수 있다면 지금의 고난이 좀 버거우나 저에게 이것을 이겨낼 힘을 주시고 그리고 이 십자가 안에서 당신을 찾을수 있게하여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기도 일것 같아요. 오늘 제 2독서에서도 잠시 머물고 싶은 것은 부르심을 받은사람은 좋은것이 상호 작용하여서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부르심을 깨닫고 그것을 위하여서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투신하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라는 말씀같아요 .. 오늘 복음에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하늘나라는 밀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이가 자신의 모든것을 팔아서 그것을 사는 이와 같다고 하시지요.. 지금 나에게 간절한 영혼의 갈증은 무엇일까 물어봐 집니다. 무엇이 나에게 영혼의 갈증일까 ? 아마도 투신하는 것이 부족한것, 이것이 나의 모습.. 인것 같습니다. 주님 말씀 믿고 나의 모든 것을 던지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문제인것 같아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졸업못하면 어찌하나 혹은 요번에 낸 논문은 제데로 평가 받아서 제발 빨리 끝내야 되는데 이를 어쩌지 하면서 내안에서 나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 하는 나의 모습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좋은 모습은 아닌것 같습니다. 결과가 어찌되든 믿고 의탁하고 나아가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의도하고 계신것이 있기에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기 위하여서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우선은 내안에 내것이 있으면 주님의 것을 볼수 가 없습니다. 비우고 바라보고 당신의 것을 찾을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주세요.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보물 혹은 진주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며, 갖고 싶어 하는 대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은 자기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버리면서 그 하느님의 나라를 얻으려 노력한다는 오늘 복음의 비유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그 진가(眞價)를 알면, 지금까지 추구해온 모든 가치들을 버리면서 그것을 얻으려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우리 안에 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질서가 지배하는 곳은,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에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질서를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삶 안에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많은 것을 바쳐, 그분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높은 사람들 같이 인간이 섬겨서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지,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요구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생명의 질서를 사는 사람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생명을 철저히 사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회 기득권자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생명이 살아있는 질서, 곧 사람들을 사랑하며, 용서하는 질서를 사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 혹은 좋은 진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의 진가를 알아들은 신앙인은 그때까지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있고, 그 함께 있음을 소중히 생각할 때, 그 함께 있음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기 위해 인간으로서 정당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부부가 함께 있고,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 희생은 그 함께 있음이 소중한 나머지, 본인들이 자유롭게 택한 것입니다. 함께 있음이라는 보물 혹은 진주를 얻기 위해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많은 것을 버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과 함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모는 한 인간 개체로서 정당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많이 버렸지만, 자녀와 함께 있고 자녀를 사랑하면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우리가 많은 것을 버리면서 얻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와 기쁨은 이기적인 우리의 시야(視野)를 벗어나서 하느님의 넓은 시야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물질의 소유에 내 삶의 모든 보람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평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겠다는 복수심에서 벗어나 용서하는 자유로운 마음, 대가 없이 사랑하고, 대가 없이 헌신하는 넓디넓은 마음, 이런 마음이 모두 하느님의 시야가 열어주는 넓은 지평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질서이고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에게 허락된 풍요로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질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하듯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심판하는 질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자비로울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사실을 이렇게 해설합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라 5,1).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무상(無償)으로 베푸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애착과 환상에서 해방되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질서를 살면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베풂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힘들게 또 드물게 베풀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베풂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습니다. 용서도 상대에게 새로운 미래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베풂의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면, 세상은 살벌하게 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들만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감사할 일도, 감동할 일도, 자기 스스로를 희생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 한 사람 더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더 잘되고, 도로상에서 나 한 사람 더 빨리 가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만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상이 아닙니다. 베푸심은 하나의 암호와 같이 우리 삶의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어 실천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남은 보물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기심, 욕심, 경쟁심의 대상이던 것들을 버리면서 비로소 그 실체와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 실체와 질서를 발견하고 영접하는 일은 나의 계획,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베푸심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그 숨결은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보이지도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지만, 그 숨결은 우리 삶의 깊은 곳에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그 숨결을 찾아 그 숨결 따라 흐르기 위해 돛을 달면, 나도 그 숨결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우리의 베풂은 보잘것없지만, 그것으로 우리도 그 하느님 나라의 흐름에 합류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물이나 진주와 같이 숨겨져서 혹은 암호와 같이 해독(解讀)을 필요로 하는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비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보물을 찾은 사람은 기도할 줄 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명품의 탄생>의 저자 이광표는 “예술작품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예술가의 손에서, 또 한 번은 그것을 느끼고 향유하는 사람, 즉 감상자나 컬렉터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작품이 있어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 작품은 모독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소개하려 했던 세례자 요한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그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위해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도 조선의 수많은 보물들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벽지로 사용되거나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정면으로 맞서 혼자 국보 12점 보물 10점이나 되는 엄청난 민족의 보물들을 수집한 인물이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라고 하는데 “나라도 없는 주제에!”라고 던진 일본인의 한 마디가 등에 박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문화재를 지키는 일로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무언가라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제일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재산을 물려받아 조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모든 문화재들을 사들였습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는데 10,000원을 주고 사온 것은 달랑 낡은 그릇 하나였습니다. 그는 1,000원만 주고 가져가라는 물건이 있어도 그 값어치를 봐서 10,000원 주고 샀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재산, 논 일만 마지기를 모조리 팔아 일본에 건너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의 문화재들을 다시 사왔습니다. 그가 모은 문화재는 고려청자, 조선 백자를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의 그림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수많은 나라의 보물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간송이 가장 아꼈던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었습니다. 당시 언어 말살 정책에 의해 한글이 몽고 말을 베낀 것이다, 혹은 문 창살 무늬로 창안해서 만든 것이라는 소문 등이 퍼졌었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훈민정음 원본에 의해 한글의 자음들이 인간의 구강구조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우리 언어의 우수성이 다시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훈민정음 원본을 잃지 않기 위해 6.25 피난 당시 항상 가슴에 지니고 다녔고 베게 밑에 두고 잤다고까지 합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만큼 지불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내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민족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다 써버렸던 간송 전형필에 비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는 ‘좋아하지 않으면 안 준다’는 명확한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그저 돌덩이일 뿐입니다. 그 가치를 안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이 무엇이 힘드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강의를 하다보면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안 될 때는 대부분 저의 준비가 부족해서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졸거나 거부하는 표정을 보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납니다.
‘그냥 대충 할까?’
그러면서 찾는 사람은 그래도 개중에 눈이 초롱초롱한 사람입니다.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을 보며 준비해 온 것을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제 강의가 무의미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 소중한 보물인 하늘 나라를 주시는데 아무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분별없이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하늘 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라면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로마 14,17)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하느님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행복이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야곱이 야뽁강에서 축복을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천사와 밤새 씨름하며 정강이뼈까지 부러지는 이야기로 표현됩니다. 이는 하느님도 인간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조금은 꺼려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을 거부하시며 처음엔 포도주의 기적을 원치 않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포도주란 결국 그리스도의 피이고 그래서 성모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하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지는 참다운 보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그분께서 주시는 보물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보물을 찾는 밭이란 ‘성령’을 만나는 장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을 만나는 밭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밭에서 우연히 발견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그 사람은 그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밭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내려주신 밭은 바로 ‘교회’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셨고, 또 성령강림도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밭에 묻힌 보물에 관련된 사람은 이미 교회에 열심히 나오며 그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밭에 묻힌 보물은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머물다보면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원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가게 된 피정을 통해서, 혹은 어떤 사람은 소공동체 모임을 하다가도 만나게 됩니다. 아니면 그냥 성체조배 중에 성령의 엄청난 은총을 체험하며 황홀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 단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하늘 나라의 행복을 맛 본 사람이 하게 되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은 다시 그 순간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 어떤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려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끊어야합니다. 만약 성령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맛보았다고 한다면 세상의 기쁨들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안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만난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비오는 밤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번개가 한 번 번쩍이면 가야 할 길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본 길을 더듬어 가게 됩니다. 번개가 치는 때가 보물을 만난 때고 길을 더듬으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 길을 찾는데 사용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 상당한 유산을 남겼지만 부자 청년처럼 되지 않기 위해 가진 것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간 곳이 사막이고 빵과 물과 소금으로 평생을 기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수도원의 기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된 것이 바로 보물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분을 떠났다면 그는 그 보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랐고 항상 그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면 반드시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성령을 통하여 누리게 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는데 어떻게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고 발견하지도 못한 것이거나 아니면 발견했더라도 그 가치를 몰라 그냥 묻어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밭을 가는 일 자체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주님을 만났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사 시간에, 어떤 사람은 성체 조배시간에, 어떤 사람은 피정에 가서, 어떤 사람은 소공동체에 가서,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다가, 어떤 사람은 영성서적을 읽다가 하늘 나라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기에 물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체험했고, 안토니오 성인도 성경말씀을 듣는 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기도하는 이에게 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을 합니다. 우선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기도를 합시다. 그러면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기도를 멈추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기도보다 소중한 시간은 없어질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오.13,44)
김종오 신부님
하늘나라의 보물을 발견하였던 소중한 때는 내 나이 스룸 셋 즈음, 육군 중위로 근무하면서 비인격적인 상관을 보며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면서 새롭게 나의 눈을 뜨게 되었던 때입니다.
당시 상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어릴 적부터 의무적으로 드렸던 기도는 그때부터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도로써 일치를 이루며 있던 순간들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시간이었고, 기도를 드리며 주님과 함께 하며 느꼈던 행복한 순간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하늘나라처럼 느꼈던 날들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며 행복감을 주었고, 비인간적인 상관에게 느꼈던 분노와 좌절감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복된 아픔으로 변화되면서 ‘이제 나의 생을 주님께 봉헌하겠다.’는 마음의 기도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주님만 믿고 따르며 봉사하는 삶의 행복을 맛보면서, 군인의 길도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고, 군인으로서 해야 할 나머지 의무복무기간도 신학교에 가기 위한 기도와 공부를 준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 후 남은 약 3년의 의무복무기간은 군인으로서 주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고, 미사시간과 기도시간은 무엇보다 기다려졌으며, 군대 생활의 어려움들은 그후 전혀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운 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믿으며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산다는 행복과 기쁨인 ‘밭에 숨겨진 보물’을 보았기에 군대를 전역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1987년 '예수성심전교수도회' 라는 밭을 샀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부르심을 받아 '가진 것을 다팔아' 산 밭입니다.
가장 잘 사는 방법!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의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사랑을 실천하면서 생활하셨나요?
육체적으로는 조금 더 피곤할 수도 있었겠지만 마음엔 주님의 평화가 가득 차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저희 학교는 어제 오후부터 한 주간 전체 휴가를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직원들에게 약속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목요일 저녁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휴가 첫날을 직원들과 함께 지내면서 11명의 직원들을 위해서 정성껏 요리를 준비해서 한 끼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냥 때우기식이 아니라 사랑을 담아서 요리를 했습니다.
입맛을 돋아주는 메론 에피타이즈,
셀러드와 마늘빵,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
나만의 소스를 만들어 숙성시킨 안심 스테이크,
후식으로는 지난 가을 만들어 둔 아이스 홍시!
힘이 들고 땀도 많이 흘렸지만 "신부님 직장 생활 중에 이렇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인사를 들을 때
저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면서 누구에게 행복을 준다면 나 자신도 더 큰 행복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체험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던 지혜를 가지게 된 배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솔로몬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을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느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하지도 않았던 부귀와 명예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엔 그 지혜를 보존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장수를 누리지도 못했고 그가 죽자 나라도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형제 자매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보물이나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보물이나 진주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과 지식이 있어야 하고 과감한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들인 사람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하늘나라는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차지할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올바로 아는 지혜가 필요하고 내 모든 것을 처분하고 그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형제 자매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우리들에게 익숙한 말 중의 하나가 ‘웰빙’일 것입니다.
음식도 웰빙, 음료수도 웰빙, 아파트도 웰빙, 화장품도 웰빙, 가전제품도 웰빙....
웰빙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웰빙족이라는 신종어가 생겨났습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잘 살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유 있게 좋은 것을 즐기며 살자는 것 곧 건강하게 오래 살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좋은 것을 먹고 넓고 깨끗한 아파트에 살면서 첨단 가전제품을 사용하며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정해주셨다(창세 6,3)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명이 65세, 평균수명이 79세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수명의 2/3 정도만 누린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 엉터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도 머리카락 실험이나 피부 재생 실험을 통해서 인간이 120살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수명을 인간의 잘못된 삶으로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뉴욕 주립대학의 로이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대기 오염이 2.9년,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3년,
술을 마셔서 3년,
담배를 피우면 8년의 수명을 까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한 스트레스는 33년을 까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반 자연적인 생활로 까먹는 수명이 40년 정도가 되고 결국 인간은 80년 정도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웰빙이라는 말은 이렇게 잃어버린 수명을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로이진 교수의 말에 따르면 비타민을 열심히 먹으면 0.4년,
과일을 많이 먹으면 1.4년,
올리브기름을 먹으면 1.8년,
포도나 오렌지를 먹으면 0.6년,
야채를 많이 먹으면 3년을 더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건질 수 있는 수명은 8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결국 요즘 사람들이 목을 매고 있는 웰빙족이 되어도 기껏 90세까지 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큰 스트레스 한 방이면 그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그런데 로이진 교수는 아주 흥미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감사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면 6년의 수명이 연장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힘든 친구와 친척을 위로방문해주면 8년,
친구와 늘 즐거운 전화 통화를 하면 8년,
매일 웃으면 8년의 수명이 연장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30년을 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감사하고 긍정적인 사고’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당연히 지녀야 하는 덕목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음을 믿는 사람이기에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분께서 내 위에 세우신 모든 계획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을 확신할 수 있고 긍정적인 시선과 마음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사랑의 삶이 하늘나라의 법임을 알기에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하느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내 수명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뜻이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참된 웰빙 즉 가장 잘 사는 방법은 좋은 음식을 가려먹고, 열심히 운동하며 아파트를 황토방을 꾸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감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미 성공한 웰빙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로 누리게 될 120년의 수명도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작은 표징에 불과합니다.
참된 웰빙족인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120년의 장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보물을 찾았습니다
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
타교구의 부제님 한 분이 6개월의 봉사활동을 위해서 소록도에 왔습니다.
사제서품 100일을 앞두고 스스로 사제직을 포기하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행동으로 옮기기 전 자신을 가르치신 신학교 신부님께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신학교 신부님은 사제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 대신에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에 소록도에서 6개월만 봉사활동을 해 보고 그 이후 결론을 내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 부제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존경하는 신부님의 충고이기에 받아들였습니다.
6개월의 자원봉사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제님이 일을 시작한 곳은 한센병 후유증이 가장 심한 행복병동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새벽 4시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5시까지 병동에 가서 환우들 얼굴도 씻겨드리고 식사를 도와주고 다 끝나면 양치질까지 해 드립니다. 이 봉사활동을 통해서 부제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이곳 환우들에게 병사 영성체 즉 봉성체를 다니면서 구체적인 체험을 합니다. 부제님은 무엇인가 부족했던 그 2%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6개월 동안 봉사자로 있으면서 부제님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사제품을 받고 소록도 성당에 첫 미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신부님의 첫 미사 강론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강론의 주제는 ‘밭에 묻힌 보물’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소록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강론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밭에 묻힌 보물은 바로 “고통”입니다.
살면서 당하는 굴욕과 손해, 이해받지 못함.
이것이 밭에 묻힌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밭에 묻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고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 때문에 손해 본 적이 있나요?
있다면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굴욕을 당한 적이 있나요?
있다면 마음 안에 보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그것으로 이해받지 못하고 외루우십니까?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주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을 직접 뵈올 것입니다. 주님께 자랑합시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보물 나도 있다고….
하늘 나라 향하는 마음의 눈
-정연정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신앙과 이성」, 1항)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1. 듣는 마음(1열왕 3,9)
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주성범」에서 “주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 있다 해도 그다지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변할 수는 있어도 나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최상선(最上善)”을 얻기 위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으로부터 “주 네 하느님의 길을 걸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1열왕 2,3 참조)라는 축복과 함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권을 공고히 하기에는 참으로 주변 상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솔로몬은 꿈에 나타나신 하느님께 “듣는 마음, 곧 분별력”(1열왕 3,9-11 참조)을 청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미쁘게 보시고 청하지 않은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1열왕 3,12-14 참조)
2.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로마 8,28)
얼마 전에 페루 리마에서 끝난 라틴아메리카 한국가톨릭선교사회(AMICAL) 연수회에 함께 했던 한 참석자는 “이번 만남을 통해 주님의 은총으로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아파하시는 그곳(선교지)으로 돌아갈 힘을 찾게 돼서 참으로 기쁩니다”라는 소감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 참조)는 확신을 선포합니다. 결국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에(로마 5,5 참조), 그분께서 원하신 뜻을 향하여 기꺼이 자신을 투신(投身)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낼 수 있게 됩니다.
3. 보물과 진주(마태 13,44-46 참조)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께서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 아니거나, 하느님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날 때”에는, 아주 단호하게 “사라져라! 여기에는 네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감출 수 없는 기쁨’입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던 중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채운 ‘독점적인(?) 기쁨과 밭의 구매 계획’은 너무나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줍니다. 또한 오직 좋은 진주를 찾아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상인이 고대하던 진품(珍品)을 발견했을 때 느낀 ‘천하를 얻은 듯한 감격과 진주 구매 계획’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결연함을 보여줍니다. 과연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이런 기쁨일까요?
4. 하느님을 가진 사람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하느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잘 분별하고 깊이 사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길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oculi mentis)”이 필요합니다.(「신앙과 이성」, 22항 참조) 부디 여러분 모두가 하늘 나라의 충만한 기쁨을 늘 고대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옳은 일 가려내는 지혜 청하자.
-염철호 요한 신부님-
솔로몬은 선친이었던 다윗의 규정에 따라 살며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자신이 너무 어린아이 같아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하니 백성을 잘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청하지도 않으며, 원수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오히려 옳은 일을 가려내는 분별력, 곧 지혜를 달라고 청하는 솔로몬을 보시며 하느님께서는 대단히 흡족해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지혜롭고 분별 있는 마음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왕기 상권의 이어지는 장면에서(1열왕 3,16-28), 우리는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를 듣습니다. 솔로몬에게 두 여자가 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누가 진짜 어머니인지 판결해 달라고 하자, 솔로몬이 아이를 죽여서 둘이 반씩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하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이를 자르지 말고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말하는 여인이 진짜 어머니고, 잘라서 나누자는 여인이 가짜였음을 밝힌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1열왕 4,9-14는 솔로몬의 지혜가 동방 모든 이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이스라엘 땅에 모여들었다고 전합니다. 그 가운데는 오늘날 에티오피아였던 세바의 여왕도 있었습니다. 이런 솔로몬이었기에 예루살렘에 하느님의 성전을 그토록 아름답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솔로몬의 시기를 태평성대였다고 묘사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지냈다.”(1열왕 5,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엇보다도 값진 하느님의 지혜를 간청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솔로몬과 같은 옛 선조들의 삶을 비추어서 진정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늘 나라를 위해 투신하라고 권고하시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고 말씀하시는데 솔로몬의 가르침은 하늘 나라 복음을 추구하는 우리가 꺼내어야 할 귀중한 옛것, 곧 옛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솔로몬이라는 옛것에서 배워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청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파라오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스며들게 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1열왕 3,1; 11,1) 거기다 말년에 가서는 많은 이방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백성들을 잘못 다스리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지혜에 따라 주변 임금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시도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많은 우상 숭배가 스며들게 됩니다. 결국 솔로몬이 죽은 뒤 예로보암의 반란으로 인해 약속된 땅이었던 왕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솔로몬마저 방심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솔로몬을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마지막까지 기억하실 것이고, 그들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어 그들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당신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더 큰 선을 이루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로마 8,28)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당신 계획을 반드시 이루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보물
이수락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은 깨달음을, 파는 것은 결단을, 사는 것은 실천에 옮기는 행동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은 이 세 단계를 거치는데, 사람에 따라서 그 속도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발견하여 깨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생의 마지막에야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 번째,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세속적인 지식이나 지혜에 의해 깨달아지기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세속에 묻혀 살게 되면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생을 보낼 수 있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참된 삶을 추구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과 부귀영화 가운데서도 참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실패와 좌절과 역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느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농부가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파는 단계는 결단의 시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 3장에서“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 8)라고 말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요, 해방된 마음이며, 모든 것을 초월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자유의 마음인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이에 얽매일 때 인간은 추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깨달음과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동의 단계입니다. 칼로 잘라 버리듯이 세속적인 인연이나 미련, 애착을 끊어 버리고 밭을 사는 실천의 단계입니다. 이제 농부는 완전한 기쁨 속에 머무르게 되고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다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의 신비이며 환희의 신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이 신비 속에 온전히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완전히 자유로워진 해방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참된 지혜
허철수 신부님
우리는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날이 저물자 추위와 사나운 짐승을 피해 동굴에서 잠을 청합니다. 자다가 심한 갈증을 느낀 원효가 의상이 떠놓은 줄 알고 그릇에 담겨있던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그 물이 그렇게 맛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다시 그 물을 마시려고 보니 해골에 담겨 있는 썩은 빗물이었습니다. 갑자기 구역질을 느낀 원효는 깨닫게 됩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해서 유학을 포기하고 득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귀한 보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원하는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은 무엇일까요?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성령의 현존이라는 위로를 체험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보장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류구원을 돌보고 계심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은 이미 하느님 편에서는 구원받았지만 인간이 고의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배척하는 무지를 범함으로써 이 구원 행위의 사슬을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오는 솔로몬의 이야기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려 기브온에 갔을 때 꿈에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십니다. 솔로몬은 주저 없이 왕으로서 사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기 위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청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이 내 길을 따라 살았듯이 내 길을 따라 살아 내 법도와 계명을 지킨다면 지혜뿐 아니라 네 수명도 길게 해 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지혜로운 왕이었지만, 말년에 솔로몬은 그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여 지혜도 잃고 죽은 뒤에는 그 왕국이 두 개로 갈라지는 파멸의 길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들이 이야기하는 요점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참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 했고 하느님이 참 지혜이십니다.
모든 신자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안다고 해서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가장 잘 아는 존재가 인간보다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 부족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만 아니라 마음 안에 찾아오시는 하느님까지도 영접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요, 참 지혜일 것입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세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이라는 밭에
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보물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난다고
다 보물은
아닙니다.
보물이 소중한 것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겨진 보물처럼
하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숨겨 두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만이
전부인 나라입니다.
가진 시간이
모자라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시간을
모두 하느님께
바치지 않기에
참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보물같은
하느님 사랑이
우리또한 보물로
변화시킵니다.
보물을
숨기신 하느님
마음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보물입니다.
하느님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쏟아부으시는
가장 맑은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게됩니다.
변명이 아니라
변명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게 된 ‘단지 15분’이라는 서양 연극 의 내용입니다. 주인공인 젊은이가 어느 날,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더니만 글쎄 시한부 인생이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불과 ‘단지 15분’이었지요. 얼마나 어이없겠습니까?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상태에서 한 통의 전보를 받습니다. 글쎄 억만장자였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는데 그 재산을 젊은이에게 모두 넘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또 하나의 전보를 받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올해 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온 결혼 승낙 전보였습니다.
모두 좋은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과연 15분밖에 남지 않은 이 젊은이에게 의미가 있을까요? 연극은 그 모든 것이 젊은이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15분이 지나고 숨을 거두게 되지요.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어떤 것에 있을까요? 우리들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재물과 명예, 높은 지위 등이 과연 인생의 진정한 의미일까요? 지금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게 15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도 소중한 것인지를 판단해 보십시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 비로소 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 그리고 좋은 진주를 찾은 사람.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과 진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밭에 묻힌 보물과 진주는 바로 주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세상 안에 그 소중한 말씀이 숨겨 있기 때문에, 주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소중한 보물과 진주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주님을 통해 소중한 보물과 진주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보물과 진주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지요.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세상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길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보물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매겨보시길 바랍니다.
벗이 너에게 화를 내거든 너에게 크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은 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다시 너를 사랑 하게 될 것이다(장파울).
잠을 충분히 잡시다.
다음은 신문기사의 내용입니다.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OECD조사 대상 18개국 가운데 가장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2일(현지시각) OECD 통계를 활용해 “한국인은 하루 평균 7시간 49분만 잔다”며 “이는 18개 조사 국가 중 꼴찌”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수면시간이 가장 긴 국가는 평균 8시간 50분의 프랑스로 조사됐으며 8시간 38분의 미국이 2위, 8시간 34분의 스페인이 3위였다.
수면시간이 7시간대인 국가에는 일본과 한국만 속했으며, 일본은 7시간 50분으로 우리나라보다 수면시간이 1분 더 길게 조사됐다.
이에 대해 FT는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이 적은 이유로 긴 근무시간을 꼽으며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지만, 노동생산성은 OECD 전체 평균의 66%에 머문 것으로 나타나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제가 비정상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많이 자야 5시간이거든요. 워낙 능력도 또 재주도 없는 저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서 잠을 줄여나갔는데, 효율성을 따져보니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님을 요즘에 많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음 역시도 잠을 줄여나가는 과정 안에서 생기는 것이었지요.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더라도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통해 어떤 효율도 낼 수 없겠지요. 그런데 무조건 오랫동안만 앉아 있고, 오랫동안만 행동하면 효율도 자동적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았음을 솔직히 인정하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여유 있는 삶 안에 있음을 요즘에서야 깨닫습니다. 맑은 정신과 깨끗한 마음은 바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오용환 신부님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보물찾기’였습니다. 숨겨진 보물을 찾았을 때 기쁨과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보물을 학생들이 찾기 힘든 곳이나 위험한 곳에 숨겨 놓지 않습니다. 보물이 숨겨진 곳은 학생들이 무관심하고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어렵고 힘든 곳에서 찾다 보니 찾지 못하고 허탕만 쳤던 기억이 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시어‘한 가지 소원을 내게 말해 보아라.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고 하신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사람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각자가 청하는 보물이 다를 것입니다.(돈, 명예, 권력, 건강, 자식, 사랑, 취업 등)
그러나 솔로몬왕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누리려 하는 부와 명예와 권력 대신에 선과 악을 가려내는 분별력과 지혜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기특한 모습을 보시고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게끔 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농부’와‘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비유는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농부와 상인은 모두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발견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아서 보물을 소유하게 됩니다.
두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는 보물처럼 소중하고 너무나 귀한 곳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투신해서라도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귀하고 참된 보물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참된 보물을 발견하고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순교자들도 그 보물을 발견하고서 자신의 소중한 목숨과 바꾸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태석 신부님과 같이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서 보물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참된 보물인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소유하면서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희생해서 참된 보물을 소유하겠습니까?
한국의 버드나무와 아스피린
박영식 신부님
펠릭스 호프만이 1890년 독일의 작은 제약회사인 바이엘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아버지가 관절염으로 고통 받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통증을 덜어드리려고 치료약을 찾으려 애썼다. 아버지가 그가 발명한 아스피린을 먹고는 오랜만에 통증이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그가 발명한 아스피린은 버드나무 잎에서 추출한 농축액이었다. 그가 버드나무 잎과 껍질을 짜서 만든 아스피린은 전 세계로 수출되는 명약이 되었다. 버드나무 추출물인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하는 아스피린을 하루에 한 알씩 먹으면 심장병, 성인병, 뇌졸중을 예방하고 치통을 치료하고 설사를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버드나무 껍질을 해열제로 상용했단다. 그뿐만 아니라 피부에 두진이 생겼을 경우 버드나무 껍질을 달여서 목욕제로 사용하면 효과가 크단다.
바이엘회사가 아스피린으로 대박을 터뜨리자 어느 나라의 버드나무가 효과가 가장 큰 것인지를 알려고 세계 각국에서 버드나무 표본을 수집했다. 한국산 버드나무가 단연 최고임을 알아냈다. 한국산 버드나무 잎은 유럽에서 생산되는 버드나무 잎에 비하여 약효가 두 배 이상이나 높았던 것이다. 바이엘 회사는 한국에서 버드나무 묘목을 가져다 독일 땅에 심었다. 버드나무는 꺾꽂이 하는 식물인지라 옮겨심기가 쉬운 나무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버드나무 줄기를 잘라다 독일에 심었더니 잘 자랐다. 그런데 가을에 잎을 따서 농축액을 뽑아 약을 만들었는데, 약효가 한국에서 자란 나무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것이었다. 한국 토양과 기후와 풍토에서 자란 버드나무라야 제대로 약효가 나오는 것을 깨닫고 한국산 버드나무 잎을 수입하여 아스피린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처럼 훌륭한 아스피린을 생산해내는 버드나무가 우리나라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도 우리는 바이엘 회사 직원들과는 달리, 위대한 발명을 꿈도 꾸지 않았다. 고작해야 봄버들을 보고 인생무상을 노래했을 따름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제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실 싣고 가거라.”(‘노들강변’) 우리 조상들은 버드나무를 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고 허리가 가냘픈 여인의 허리를 휘휘 늘어지는 능수버들 같다고 했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나무 한 포기, 곤충 한 마리, 풀 한 포기라도 그 속에 깃들인 약효와 값어치를 연구 개발하여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다. 자연 안에 내재한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내려는 눈을 가지면 아스피린이나 불로초뿐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늘 왕국을 밭에 숨겨진 보물에 비유하셨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면서 다시 숨겨두고 가진 것을 다 팔아 이 밭을 산다. 이처럼 하늘 왕국은 그 밭을 밟고 다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반면, 어떤 사람에게만 드러나는 엄청나게 값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왕권이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과 활동 가운데 와 있으나 믿음의 눈으로 깨달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왕권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반대자들을 제압하거나 세상 사람들을 압도하는 식으로는 임하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의 왕권을 발견한 사람은 뜻밖에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어 기뻐하는 사람처럼 기쁨을 가누지 못한다(로마 14,17). 이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사람처럼 우리도 자신과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마태 19,21.29).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 부, 성공, 지식, 명예, 건강, 가족, 애인…? 이런 것들이 나의 존재이유와 최상의 행복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돈이 많으면 건강도 권력도 명예도 사랑도 심지어 사람까지 다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재물이나 권력을 성공의 잣대로 여기는 사람은 그것들을 위해 방해되는 사람을 피하고 아첨하는 이들만 자기 곁에 두고 독선과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안하무인격의 인간이 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물질이나 일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대인관계가 아닐까?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떳떳할 정도의 명성이 있기 때문에,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를 꾸짖어주고 피곤한 내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행로에 등불을 밝혀주는 스승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성공작이다. 사람을 얻는 것이 세상을 얻는 것이고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행복과 기쁨과 생명은 대인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다. 사람을 보면 하느님의 모습이 보인다는 뜻이다. 버드나무에서 아스피린을 찾아내듯, 내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영웅적인 헌신을 하는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하느님이 그들의 감성과 지성과 마음속에서 권능을 행사하심을 감지할 수 있다.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녀들과 이웃의 마음, 지성, 감성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해내는 사람이다. 남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이라야 하느님을 뵐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비밀이 간직되고 소리 없이 봉인된 숨겨진 보물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이웃이 훌륭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내 정신의 보물이다. 마음이 슬픈 사람은 슬픔밖에 보이지 않고, 마음이 검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검게 보이는 법이다. 누구는 늘 기쁘게 사는가 하면 또 누구는 늘 미간을 찌푸리고 산다.
이웃의 삶 가운데 숨어 있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희생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런 모습을 갖추었음을 생각해야 하겠다. “내가 창조한 것은 모두 슬픔에서 나온 것이다.”(F. 슈베르트) 예술가의 비애와 고독에서 아름다운 가곡이 나온다.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내는 사람도 초자연과 내세를 내다보는 믿음의 눈을 떠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고통 속에 기쁨과 구원이 있다. 기뻐하는 사람은 그 근거를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기뻐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쁨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공부가 모든 공부 중에서 제일 중요하다.
날마다 만나는 이웃의 삶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하느님의 보물을 찾아내고 이 보물을 간직하면 천국으로 간다는 희망으로 늘 기쁘게 산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오13,44)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숨겨진 보물이라는 말에 눈이 머뭅니다.
숨겨졌다는 것은 숨긴 누군가가 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무엇인가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는 말일까요?
저는 후자를 선택하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세상에 나아가 마음껏 아름답게 살아보라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 많은 이유를 대어가며 스스로를 엉터리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이유의 이면에는 우리의 욕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보물을 찾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들고 좀 더 넓은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선한 세상이던, 악한 세상이던 상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찾아야만 하는 보물을 보십시오.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악은 우리의 눈을 가리려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눈을 가리려 하는지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영혼을 죽이는 것들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좇고 있는 것들로 인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볼 수 없다면 더 이상 바보스러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제 1의 가치로 여기며 살고 계십니까?
하느님 나라를 진정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약함은 보물을 손에 놓고도 뒤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 할 것이 보물이라는 것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매 순간 만나게 되는 악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찾아야 하고, 그 보물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삶이라는 여정의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숨겨진 보물”
김기현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보면 ‘숨겨진 보물’ 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그 단어를 듣고 떠오른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강아지입니다. 최근에 제가 키우는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요. 작아서 너무나 귀엽고,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무척 신기합니다. 언제 눈 뜨나.. 했는데 벌써 눈도 뜨고, 이빨도 나고, 뒤뚱뒤뚱 걷기도 합니다. 어미가 먹는 밥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오늘은 살짝 뛰어다니기도 하는데요. 그런 귀엽고 예쁜 모습이 내가 가진 시간을 다 내어놓게 만들더라고요. 시선을 떼기가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작년에도 병아리를 부화시킬 때 비슷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알을 부화기에 넣고 21일 정도 지나면 안에서 병아리가 알을 톡톡 깨고 나오는데요. 생명이 부화하는 그 장면이 너무 신기해서 몇 시간 동안 그 장면을 지켜 보았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하루가 지나면 털이 보송보송해지는데요. 아기 주먹만한 병아리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시선을 떼지 못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보여드렸더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시더라고요. 시간을 다 내어놓아야 할 것만 같은 귀여움과 신비로움이 새끼들에게 있는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밭에서는 나오는 열매들입니다. 요즘 밭에서 열매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감자로부터 시작해서 단호박, 양파, 참외, 수박, 옥수수, 고추.. 등 많은 열매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수확해서 거실에 늘어놓으면 부자가 된 듯한 충만함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이래서 힘든 농사를 짓나보다.. 하셨는데요.
봄에는 그 열매가 숨겨져 있습니다. 열매는 보이지 않고 땅을 갈아야 하는 수고로움과 중간중간 순을 따주고 잡초를 뽑아야 하는 고생이 있는데요. 그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이유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얻게 되는 수확, 곧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알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 열매와 보물들을 얻기 위해 가진 힘과 시간을 내어놓게 되는 거 같습니다.
세 번째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인 거 같습니다. 서로 마음을 열기도 어렵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주는 것도 쉽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한 마음이 되어 움직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함께 모여 친교를 이루고,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이유는 공동체 안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열매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전에 본당에 있을 때 공동체로부터 돌아서고 싶었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제 모든 힘을 다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안에서 행복하다..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 같습니다.
지금도 그 열매를 알기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일이 지금은 공동체의 구성과 틀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닥치는 대로 공동체에 필요한 연수들을 다니고 있고, 책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있습니다. 더디고 느리겠지만 밭에 숨겨져 있는 공동체라는 보물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힘을 다해야 할 거 같습니다.
네 번째는 예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숨겨진 보물입니다. 공동체 안에 보면 냉담자들도 있고, 몸이 불편한 이들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요. 그들이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보물이고, 그들을 찾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방문을 다니고, 봉성체를 늘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그 일은 저보다 본당 수녀님이 더 큰 열의를 보이시는 거 같습니다. 냉담자들이 돌아오면 그들 시간에 맞춰 재교육을 해주시고, 환자들을 버스타고 다니시면서 방문하시고, 아이들을 찾아내어 세례를 받게 하고 첫영성체를 시키시는 걸 보면 정말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을 사려는 사람인 거 같다.. 는 느낌이 듭니다. 그 일로 많은 분들이 신앙으로 돌아왔고, 환자들이 위로를 받고, 아이들이 성당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다섯 번째는 말씀과 성체입니다. 신앙 안에 숨겨져 있는 가장 큰 보물 인 거 같습니다. 그 가치를 아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매일 매일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면, 또 성체를 받아 모시고 그 앞에 머물러 기도하다보면, 그 안에 얼마나 큰 보화가 숨겨져 있는지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살리는 보물이 그 안에 있음을 조금씩 알고 확신하게 되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려고 할 겁니다.
오늘 하루, 숨겨진 보물을 찾고 얻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주에 내가 꾸르실료 교육을 가게 되어서,
까맣기로 유명한 동기 신부에게 주일미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평일 미사 강론 때 신자들에게 물었다.
“저보다 까맣죠?”
“아니요~ 신부님이 더 까매요~”
놀랐다. 동기 신부는 신학교 다닐 때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는데,
그 보다 더 까매진 거 같다...^^;
나의 보물 제1호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에 대해 기대하는 만큼 중하게 지키고 보호하고 간수하려 애쓰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일입니다. 여러분의 보물 제1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보면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값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 보다 못한 것을 처분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해 그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희생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갖고 저것도 갖고 모두를 소유하고자합니다. 그러다가 모두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도 큰 은총입니다. 하늘을 희망하면서도 세상을 꼭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 크면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물은 그 보물 앞에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억제할 수 없는 기쁨 때문에 아무리 갚진 것이라도 하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야말로 보물1호는 양보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바오로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둔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피3,8). 그리고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피1,21). 바오로에게 있어서 주님을 얻게 되는 것은 모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오로의 진정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10,17이하를 보면 ‘부자 청년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어떤 사람에게 “가 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갈망 하면서도 자기의 소유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정한 보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보물을 얻으려는 사람은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수 있는 희생적인 투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야말로 ‘봄에 씨를 뿌려야 가을에 거둘 것이 있는 법’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리라.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춤추며 환호하리라.”고 시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라는 보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루가17,21) 있습니다. “보 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21,3). 그러므로 진정한 보물을 아는 사람은 그만한 기쁨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화는 지금 여기서부터 주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보화가 있습니다”(성 암브로시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보물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물로 얻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또한 이웃의 보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진정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내가 다른 사람의 보물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기 때문입니다’(마태7,21).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손을 잘라도 도박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이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손이 크다.’ ‘손버릇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선한 일을 하면 고운 손이 됩니다. 손의 주인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을 갈 때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만 죄를 지은 마음은 손으로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천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기뻐해야 합니다.
학창시절 보물찾기 하던 생각나십니까? 선생님이 숨겨놓은 쪽지는 먼데 있지 않았습니다. 돌 틈에 있었고, 나뭇가지에도 있었고 그냥 길바닥에 흘려놓은 것은 아닌 줄 알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보물은 먼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볼 눈이 없었고 찾는 정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상품도 타지 못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흩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 놀라지도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보물 1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그분의 이름으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길 희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나라의 보물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삶의 자리에 있고, 이웃 안에 있습니다. 보물을 잘 찾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천상의 행복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이 이웃의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보물을 보물로 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사랑합니다.
버려야 주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녜스 수녀님은 로마에 성서를 공부하러 나왔습니다. 학부 과정부터 밟아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이 빠지는 힘든 과정이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철학과정 한 학기를 마치고는 완전히 풀이 죽어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여름 방학 때 또 다른 수녀님이 돌로미티(이태리 알프스 지역)로 등반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엔 거기 갈 힘도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바람도 쐴 겸 가기로 하였습니다. 가게 된 계기는 그 수녀님이 에델바이스(알프스의 별)를 좋아했는데 그 꽃을 한 번이라도 직접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왠지 그것을 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800미터 고지에 있는 숙소에 머물며 3일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에서 에델바이스 꽃만 찾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등반하고 있는데 수녀님은 제발 에델바이스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땅만 쳐다보고 다녔습니다.
결국 3일 만에 자신은 에델바이스를 꼭 찾기를 원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명은 같이 가자고 한 수녀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태리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태리 사람이 하는 말은, 그 꽃은 매우 험준한 곳에 피기 때문에 이런 낮은 산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채취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서 꿈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다음부터는 셋이 함께 에델바이스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일주일이 다 지나서 다음날 새벽 로마로 돌아와야 하는 한 밤중이었습니다. 에델바이스를 찾지 못해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짐을 차에 싣고 문고리를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태리 사람이 뒤에서 “아녜스, 위를 봐!” 하고 알프스가 떠나가라 외쳤습니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생전 처음 보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녀님은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그렇게 구했던 것이 에델바이스였습니다. 그런데 그 에델바이스는 ‘알프스의 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녀님에게 땅 바닥에 피는 에델바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상의 에델바이스를 선물로 주려고 하고 있었는데 수녀님은 땅만 바라보고 작은 꽃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때 얻은 힘으로 9년 만에 성서 석사 과정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자기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한다는 주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야만 합니다. 혹은 아주 귀한 진주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그것을 위해 내 자신을 비워낼 줄 알 때 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천상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찾아 헤매기 때문에 정작 그분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받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해지려면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율법을 잘 지켰지만 하느님 나라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재산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우울해 하며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부자는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재물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 팔아서 가난해 지는 사람이어야 보물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난해 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팔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친구를 사귈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버려진 술통을 집 삼아 살던 자유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를 초대하여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디오게네스가 말 할 시간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디오게네스가 그 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아까부터 침이 고여서... 근데 이 집은 너무 호화로워 침을 뱉을 수가 없네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과 평화와 정의로운 삶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나의 뜻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얻으려면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부자인 것이고 자기먼저 챙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뜻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바뀌어 주시기를 바랐던 사람이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꽃밭 길로 인도해 줄지 알았는데, 예수님은 계속 가시밭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팔아 가난해지고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아직까지 목숨은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묶여있는 만큼 그리스도를 딱 그만큼 따를 수 없고 딱 그만큼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가 현자의 제자가 되기로 하고 모든 것을 버린 하산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리던 때의 자존심과 명예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하산에게 마을 푸줏간에 가서 양의 내장 40킬로를 사서 등에 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산이 그것을 사서 등에 졌더니 거기서 흘러내리는 피와 오물로 온 몸이 젖게 되었습니다. 부와 권력을 누리던 그가 그렇게 마을을 지나오는 것은 진정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너무 많아서 큰 냄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스승은 하산에게 다른 마을 푸줏간에 가서 큰 냄비를 빌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억지로 순종하여 피 묻은 옷을 입고 얼굴을 숙인 채 냄비를 빌려왔습니다.
스승은 그가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린 뒤, 자신이 다녀왔던 두 마을로 가서 등에 양의 내장을 지고 가던 사람과 피 묻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을 보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가 돌아온 뒤, 스승이 물었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너를 보았던 것을 기억하느냐?”
“아닙니다. 아무도 제가 그렇게 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알았느냐?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만 관심 있지 남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이 너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모든 제자들에게 양의 내장으로 만든 스프를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먹어라. 이 스프는 핫산이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로 만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신을 따를 때는 집도 가족도 애정도 모두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꾸준히 고통과 멸시만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 하나만을 위해 다 팔아버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한 것입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얼마가 들지 미리 생각해 보아야하고, 싸움터에 나가려면 지금의 병력으로 이길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선물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내가 얼마만큼 내어놓을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둘(二)'에 대한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을 맞이하여 둘에 대한 묵상을, 공동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한 사람과 두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평범한 사실 같지만 깨달을수록 놀랍습니다.
한자의 두 '이(二)'자를 세워서 서로 기울여 놓으면 사람 '인(人)'자가 됩니다. 사람은 애당초 둘의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혼자는 공동체라 하지 않고 최소한 둘이래야 공동체라 합니다. 하여 예수님도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혼자는 때로 얼마나 위태하고 쓸쓸해보이는지요. 혼자 외로이 걸을 때, 혼자 외로이 밥 먹을 때, 혼자 외로이 일할 때, 혼자 외로이 살 때보다 둘이, 그 이상이 함께 거닐거나, 밥먹거나, 일하거나, 살 때 보기도 좋고 안전합니다. 하여 함께 안에 홀로는 축복이지만, 고립단절의 홀로는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홍천 수도원의 수녀님도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초창기 3개월 동안 혼자 지내다가 한 수녀님의 도반이 함께 할 때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다 합니다. 저 또한 혼자 산티야고를 출발하는 줄 알았는데, 하느님께서 뜻밖에 두 형제들을 선물로 보내 주시어, 순례를 앞두고 셋이 함께 걷기를 훈련하니 참 든든하며 배우고 깨닫는 바도 많습니다. 최소한 둘의 공동체 원형은 아마 남편과 아내의 부부공동체일 것입니다. 서로 다른 남편과 아내의 둘의 공동체보다 더 신비롭고 중요하고 힘든 공동체도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부부공동체를 살아냈다는 자체로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부부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이미 태중의 태교에서 또 태어나서는 신심 좋고 경건한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성모마리아님이 분명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주님은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는 정말 놀라운 축복입니다. 개인은 약하고 부족해도 주님을 중심으로 함께 모일 때는 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우선 찾은 것도 함께의 밥시간과 기도시간이 일과표에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장충동 수도형제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구체적으로 함께의 밥시간과 기도시간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줍니다. 함께의 밥시간과 기도시간이 무너지면 공동체도 개인의 내적 삶도 서서히 무너지며 안정과 평화를 잃게 됩니다.
사실 성전에서 함께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전례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날 보다 더 좋습니다. 바로 여기서 성전에서 받은 은총이 삶의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합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이들은 기도하는 만큼 삽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충고가 적절합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너희를 이곳에서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말라.-
삶 따로, 성전 전례 따로가 아닙니다. 삶에서 우리의 길과 행실을 고칠 때 성전에서 살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반면 거짓된 말,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의 역겨운 짓들을 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준엄합니다. 하느님을 떠날 때 이런 가라지들 만연된 세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
우리의 삶에 따라 주님의 거룩한 성전도 가라지들 무성한 강도의 소굴로 전락될 수 있음을 봅니다. 새삼 성전에서 정성을 다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우리의 길과 행실을 고쳐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오늘 '밀과 가라지'의 복음도 묵상하며 답을 찾았습니다.
가라지 없는 세상은 환상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세상 끝날까지 세상 안에, 우리 마음 안에 가라지는 존재할 것입니다.가라지를 무리하게 뽑으려 들 것이 아니라 밀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바로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주님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여 신심 깊고 경건하고 사랑 많은 공동체에는 가라지 세력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부부공동체에서 참 좋은 밀같은 성모마리아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 없이는 세상이나 개인의 내면은 가라지들만 무성하고 밀들은 서서히 질식으로 죽어갈 것입니다.날마다, 규칙적으로,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거룩한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은총이, 공동체는 물론 개인 안에 있는 밀의 세력을 왕성하게 하고,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며, 우리의 길과 행실을 주님의 뜻에 맞게 고치게 합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리이다(시편84,6.8ㄱ).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시편84,2)."
아멘.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오13,44)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숨겨진 보물이라는 말에 눈이 머뭅니다.
숨겨졌다는 것은 숨긴 누군가가 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무엇인가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는 말일까요?
저는 후자를 선택하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세상에 나아가 마음껏 아름답게 살아보라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 많은 이유를 대어가며 스스로를 엉터리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이유의 이면에는 우리의 욕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보물을 찾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들고 좀 더 넓은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선한 세상이던, 악한 세상이던 상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찾아야만 하는 보물을 보십시오.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악은 우리의 눈을 가리려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눈을 가리려 하는지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영혼을 죽이는 것들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좇고 있는 것들로 인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볼 수 없다면 더 이상 바보스러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제 1의 가치로 여기며 살고 계십니까?
하느님 나라를 진정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약함은 보물을 손에 놓고도 뒤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 할 것이 보물이라는 것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매 순간 만나게 되는 악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찾아야 하고, 그 보물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삶이라는 여정의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세상 하늘나라를 믿게 된 것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를 들면서 가르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좋습니다. 예를 쉽게 들려면 그 내용을 꿰뚫어 아주 잘 알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를 잘 드는 사람은 청중의 이해 능력정도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하고요.
강론할 때에 예화를 잘 활용하면 졸지도 않고 귀에 쏙쏙 잘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예화가 감명이 절로 나는걸 보면 역시 최고라고 생각 들더군요. 그래서 신앙인들은 다행히 영원세상 하늘나라를 믿게 된 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오 13,34)"
하늘나라의 가치
정중규 신부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는데, 저마다 다른 꿈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한 학생은 “나는 교회에서 종을 치시는아버지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치는 종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기도하고, 일하고, 식사하는 것이 그 어린 학생에게는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 어린이에게는 대통령이나 변호사, 의사보다 종치는 일에 더 의미와 가치를 두었는지 모른다.
세상에는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이 많다.사람에 따라 그 가지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그렇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성찰은 자기반성이요 자기탐구의 삶이다. 이것은 물질의 세계를 넘어 초자연적 삶의 추구일 것이다. 보이는 것의 가치와 의미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가치추구일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목숨을 담보한 한판의 승부를 거는 경우도 많고, 탐욕과 집 착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동물적 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보이는 것 에 절대 가치를 두는 자기소멸의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가 아닐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고유한 가치를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신다.
하늘나라의 가치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던져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닌다.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떤 가치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성찰해보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은 무엇입니까?
허영엽 신부님
‘수단의 돈보스코’ 이태석(1962-2010) 세례자요한 신부에게 얼마 전 국민훈장의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됐습니다.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를 통해 이 신부님의 삶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어린 시절 부산 송도성당에서 알로이시오(1930-1992) 신부님의 복사를 서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제가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미국 메리놀회 출신인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6.25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한국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해 평생을 불우한 소년· 소녀, 행려인 등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사셨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성당에서 본 다미안(1840~1889) 신부님의 일대기 영화는 이 신부에게 더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외딴 섬에 갇혀 지내는 한센인들을 희생적으로 돌보신 분입니다.
의대를 마치고 군의관 제대 후에도 사제의 꿈을 접지 못한 이 신부님은 가족의 만류에도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2001년 드디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선택합니다. 가난과 기아, 오랜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교사, 의사, 음악가, 건축가로 일인다역을 하신 것이지요.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이태석 신부님은 투병생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톤즈의 아이들에게 빨리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팔아 그 밭을 삽니다(마태 13,44). 한 소작농이 밭을 갈다가 보물이 가득 든 상자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는 그 보물을 다시 땅에 묻고는 집으로 돌아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살 것입니다. 그래야 땅에 묻힌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를 묵상하게 합니다. 귀한 보물의 가치는 누구나 잘압니다. 중요한 것은 보물을 알아보는 눈이 아닐까요?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돌멩이를 진주인 양 착각하고 부둥켜안고는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 리 주위에는 아직도 많은 ‘이태석 신부님, 알로이시오 신부님, 다미안 신부님’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 8,28)고 고백합니다. 신앙인이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한 보물을 발견하고, 그 보물을 이웃을 위해 내어 놓을때 분명히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를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보물을 찾는 사람들
안상호 신부님
소풍을 가면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선생님이 숨겨 놓은 보물을 찾느라 난리입니다. 어떤 아이는 숨겨진 보물을 찾고선 너무나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기도 하지만, 보물을 찾지 못한 아이는 풀이 죽어서 보물을 여러 개 찾은 아이에게 하나만 달라고 사정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소풍 날 찾게 되는 보물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소풍 날 어린이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보물을 찾듯이, 어른인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찾고 싶어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인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또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성경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이 주제를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됩니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들을 현명하게 잘 판단해야 합니다. 하루는 솔로몬이 꿈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의 고민을 잘 알고 계셨던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하여라. 내가 그것을 들어주겠다.” 솔로몬은 고민하다가 드디어 하느님께 청합니다. “이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지혜를 주십시오.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기특한 마음을 받아들이시어 지혜뿐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한편 복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값진 진주를 찾은 사람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삽니다. 오아시스에 시원한 생수가 가득 있어도 내가 떠서 마시지 않으면 결코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눈앞에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가 있어도 내가 떠먹어야만 배가 부르고 내 살과 피가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값진 보물과 귀한 진주와도 같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담배를 끊으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담배를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하며 도박에 손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인지, 어떠한 삶이 진정으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삶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삶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실제로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끝없이 긴 것 같지만 어느새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고, 금방 인생의 해가 서산에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솔로몬처럼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토록 소중한 것을 찾았으면 계속해서 잘 간직하고 지켜갈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래야만 인생의 가장 소중한 그것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새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하느님 존재와
하느님 나라의 본질을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 빠져있는
우리들을 향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살'만큼
가치있는 삶의 방향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매순간
빚어내시는 삶의 모든 것입니다.
보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안에 있습니다.
보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이
처음보는 보물이며
처음보는 진주입니다.
먼데서 시작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복잡한 하늘 나라가 아니라
가장 간단한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보물은 언제나
평범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바라보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뛰어들어 살아가야 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물은
존재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이며
일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보물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보물과 진주의 시작은
우리 마음을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보물을 잃지 않는
은총의 일상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주일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님
시작기도
제 삶의 인도자신 성령님, 오늘 말씀 안에 당신이 함께 계시어 당신의 위로가 저에게 전부이게 하소서. 아멘.
세밀한 독서(Lectio)
하늘나라가 밭에 숨겨진 보물이라서 꽤나 기분이 좋다. 십자가 짊어지고 애써야 얻어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보물이라 언급되는 하늘나라는 언제든 먼저 가지면 좋겠다는 기분 좋은 경쟁심을 유발한다.
보물로 번역된 그리스말 ‘테사우로스θησαυρός’는 ‘가치로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이 물질이든(루카 12,33), 인간 내면의 선함이든(마태 12,35), 보물 곧 하늘나라에 비유된다.
지금 내 삶에서 진정 가치로운 것이 하늘나라라는 사실이 새롭다. 하늘나라는 저 세상에나 가서야 추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내 삶에서 발견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 안에서 하늘나라에 비유될 수 있는 참된 가치는 무엇일까? 다시 복음을 보자면, 그 답은 간단명료하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얻고자 하는 그 무엇이 하늘나라에 비유되는 내 삶의 참된 가치다. 내 삶의 모든 것, 내 삶 전체와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와 맞닿아 있다. 돈과 내 생명, 내 삶 전부를 바꿀 수는 없다. 명예, 권력 역시 내 생명과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다.
하늘나라를 얻는 데는 결국 세 가지 전제 조건이 발생한다. 먼저, 하늘나라는 ‘지극히 가까운 거리’ 에 존재한다. 멀리서 또 다른 시간대에서 헤매는 어리석은 짓은 하늘나라와 별개다. 지금, 이 자리가 하늘나라다. 또한 하늘나라는 나에게 ‘모든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가치 판단의 전적인 의탁을 가리킨다. 그 어떤 것도 하늘나라에 견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하늘나라가 있고, 나머지는 없음 그 자체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하늘나라는 ‘유일한 것’이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게 아니다. 모든 것을 팔고, 모든 것을 처분해서 얻었기에 다른 무엇이 끼여들 틈이 없다. 하늘나라로 끝이고, 하늘나라로 전부다.
묵상(Meditatio)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른 채 돈을 벌어 하루를 살고, 또 살기 위해 돈을 번다. 어떤 이는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을 향유하는 이유이자 목적이 되어버린 서글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현실’을 잘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된다는 논리를 강요한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은 돈을 위해 쓰이는 소모품이 되어버린다. 잘 살고자 하는 현실은 더 잘 살고자 하는 미래에 저당잡혔다.
하늘나라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무엇을 찾았을 때 가능하다. 그것이 나일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내가 지켜야 할 신념일 수도 있다. 종교적 실천이나 교의에 대한 강요로 하늘나라는 찾아지지 않는다. 각자의 삶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주도적으로 챙겨나가는 주체성에서 하늘나라는 드러난다. 내가 값지다고 판단한 무엇이 있으면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말고 그것을 꾸준히, 열심히, 힘닿는 데까지 찾고 누려보자.
하늘나라는 나에게 주어진 지금의 현실을 등진 채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불가능하다. 돈을 벌면 벌수록 현실을 더 배고픈 곳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니까 말이다. 지금 배부르고, 지금 행복해하고, 지금 가치로운 것에 내 인생 한번 걸어봄도 좋으리라.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꺼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맞갖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고, 세상사에 지친 마음의 치유로 종교를 이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도(Oratio)
한분이신 주님, 제겐 당신이 전부라고 고백하게 하소서. 다른 그 무엇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하늘나라의 기쁨>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이 비유 말씀의 핵심은 '기쁨'입니다.
기쁨이 너무 커서 가진 것을 다 팔 정도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았다는 것은 '버림'이나 '비움'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전력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 값진 진주는 처음부터 그것을 구하려고 애쓰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발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을(또는 진주를) 차지했지만 그것을 투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보물을 더 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 차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기 위해서(소유하기 위해서) 차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하늘나라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입니다.
또 그 보물을 발견했다면 전력을 다해서 그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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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무아지경'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가치를 초월한 최상의 가치, 모든 것을 다 잊게 만드는 최고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밭에 숨겨진 보물이나 값진 진주가 정말로 가진 것을 다 팔 정도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가?
라고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을 얻었으면 더 비싼 값으로 되팔아서 부자가 될 것이지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하면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고 그냥 가난해지기만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묻는 것은 더욱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살다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황홀한 순간을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평생 잊지 못할 행복이나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순간'입니다.
만일에 그 황홀함이 마약 때문에 얻은 것이라면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고통만 남을 것입니다.
세속의 성공이 주는 행복은 추억으로는 남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만 합니다.
육체적인 쾌감과 황홀함이라면 지나고 난 뒤에 허무감만 남을 것입니다.
그런 황홀함을 추구하는 것은 갈증을 해결하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황홀함과 행복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고, 절대로 허무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마태 17,4)."
그냥 그대로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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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떤 '기쁨'을 추구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지나가면 허무감만 남는 그런 헛된 쾌감만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고 있는지...
지금 자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인생의 중요도 순서에서 신앙이 과연 어떤 순위에 있는지...
주일미사 참례 모습을 보면, 일을 안 하고 쉬는 날이기 때문에 성당에 가는 사람이 있고, 성당에 가는 날이기 때문에 일을 안 하고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같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다릅니다.
휴일이기 때문에 성당에 가는 것은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에는 절실함, 간절함이 없습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것입니다.
성당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을 쉬는 모습, 그 모습이 바로 보물을 얻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팔아버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팔아버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을 다 팔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 저울질부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저울을 버리지 않으면 그 보물을 얻지 못합니다.
진짜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
박용식 신부님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모파상 작품인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하급 관리 아내였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며 사는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장관이 주최하는 파티에 남편과 함께 초대받은 그는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빌려 한껏 멋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친구에게 빌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버립니다. 마틸드는 어쩔 수 없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얻어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줍니다.
그러고 나서 마틸드 부부는 빚을 갚기 위해 10년이나 허드렛일을 하며 고생합니다. 마침내 빚을 다 갚을 무렵 마틸드는 거리에서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준 옛 친구를 만나 그간의 일을 고백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 이를 어쩌면 좋아. 내 목걸이 값을 갚느라 10년이나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그 목걸이는 싸구려 가짜였어요."
마틸드는 가짜를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세월을 고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어떤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려고 온갖 비유를 다 만들어 내십니다.
하늘나라를 겨자씨, 누룩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다가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는 '보물'과 '진주'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5-46).
인생은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보물찾기를 계속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디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가진 것을 다 털어 그것을 사고, 어디에 병을 잘 고치는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하면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그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또 어느 나라에서 큰돈을 벌어 갑부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전 재산을 팔아 국외로 이민을 가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전남 진도군 죽도 앞바다와 울릉도 근해에 보물선이 침몰해 있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기도 하고 관련 주식에 투자자들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보물, 즉 재물ㆍ권력ㆍ명예ㆍ쾌락 등 부귀영화를 찾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상 보물은 일시적 기쁨과 행복을 주겠지만 결국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성경(시편 90,10)에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의 보물은 참된 보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보물은 대부분 모파상 소설에 나온 것처럼 가짜입니다. 그런데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여서 진짜보다 더 화려하고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가짜 보석 목걸이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단 하룻밤 꿈처럼 사라집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지요. 세상의 보물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다가 발등 찍힌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줄 진짜 보물, 발등 찍히지 않고 믿을만한 참된 보물은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구해야하는 참된 보물입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 사도는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세상 모든 보물들을 '쓰레기'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사제가 될지 말지를 고민하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면 가장 좋은 또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결국 그 신학생은 신부가 돼 지금까지 다른 어느 신부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좋은 보물, 하느님 나라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이 좋은 보물을 얻기 위해 재물, 명예, 세속적 성공 같은 가짜 보물을 아낌없이 버려야합니다. 그것들을 팔아서 하느님 나라라는 진짜 보물을 사야합니다.
용기있는 자만이 얻는 행운
최인각 신부님
밭의 보물과 좋은 진주의 비유
‘하늘나라는 얼마나 좋은 곳이며 멋진 곳일까? 또 그곳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하늘나라에 얼마만큼 관심을 두고 있는가? 정작 나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까?’ 저는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종종 해 보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얼마나 값지고 좋은 것인지 알려주시며,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며 차지해야 하는지를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십니다.
눈을 감고,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발견하여, 그것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장면’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이기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샀을까? ….’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을 잡고 흐뭇해하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려는 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생각만으로도 흐뭇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바로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팔아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와 닿았던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진주(하늘나라)의 가치를 알고, 서두름이나 다급함, 지나침 없이 그것을 찾아 나선 사람의 지덕(智德)입니다. 보물과 진주가 돼지에게는 정말 하찮은 것이지만, 그 가치를 아는 이에게는 정말 귀한 것임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숨겨진 보물’, ‘좋은 진주’를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항구히 그것을 찾아 얻으려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면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루카 11,9-10)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둘째, 보물과 진주(하늘나라)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는 이의 의덕(義德)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결코 공짜로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것을 다 팔아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삽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었음에도 이에 감사하는 겸손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셋째,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하늘나라)을 사는 용덕(勇德)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숨겨진 밭, 좋은 진주를 살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가치 있는 큰 행운이 주어지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면, 그 행운은 남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행운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소인배의 삶을 담대히 청산하고, 대장부로서의 삶을 항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넷째, 복음에 나타난 이들은 보물과 진주(하늘나라)를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절제의 덕(節德)이 가득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가 막힌 행운의 순간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며, 투자할 준비를 한 사람들입니다.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샀다’는 표현을 통해, 자기가 얻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고 땀을 흘리며 이를 준비한 사람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가 누리고 싶은 것 모두를 내려놓고, 절제와 정결의 삶을 살아온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이 기억났습니다. 이분들은 천주신앙이 민족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바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지덕, 의덕, 용덕, 절덕에 있어 남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평신도로서 겸손되이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며, 천주교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초석을 놓으셨던 큰 분들이십니다. 이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도, 민족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 배교의 누명을 쓰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 나라와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느님 모독죄로,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 혼란죄로, 신법과 율법을 어긴 죄로 누명을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한국교회의 신앙 선조들은 자신을 팔아 민족에게 구원의 신앙을 선물로 전해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신앙 선조들과 같이 보물로 후손들에게 전해줄 것을 생각하며, 지덕과 의덕과 용덕 및 절덕을 갖추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이것이 이번 한 주간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이라 여기며, 기도 안에서 여러분과 만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은 무엇입니까?
허영엽 신부님
‘수단의 돈보스코’ 이태석(1962-2010) 세례자요한 신부에게 얼마 전 국민훈장의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됐습니다.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를 통해 이 신부님의 삶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어린 시절 부산 송도성당에서 알로이시오(1930-1992) 신부님의 복사를 서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제가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미국 메리놀회 출신인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6.25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한국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해 평생을 불우한 소년·소녀, 행려인 등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사셨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성당에서 본 다미안(1840~1889) 신부님의 일대기 영화는 이 신부에게 더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외딴 섬에 갇혀 지내는 한센인들을 희생적으로 돌보신 분입니다.
의대를 마치고 군의관 제대 후에도 사제의 꿈을 접지 못한 이 신부님은 가족의 만류에도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2001년 드디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선택합니다. 가난과 기아,오랜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교사, 의사, 음악가, 건축가로일인다역을 하신 것이지요.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이태석 신부님은 투병생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톤즈의 아이들에게 빨리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마태 13,44). 한 소작농이 밭을 갈다가 보물이 가득 든 상자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는 그 보물을 다시 땅에 묻고는 집으로 돌아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살 것입니다. 그래야 땅에 묻힌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를 묵상하게 합니다. 귀한 보물의 가치는 누구나 잘압니다. 중요한 것은 보물을 알아보는 눈이 아닐까요?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돌멩이를 진주인 양 착각하고 부둥켜안고는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__ 아닐까요?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많은 ‘이태석 신부님, 알로이시오 신부님, 다미안 신부님’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고 고백합니다. 신앙인이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한 보물을 발견하고, 그 보물을 이웃을 위해 내어 놓을때 분명히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를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50대 이상 여성에게 꼭 필요한 4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그것은 돈, 딸, 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찜질방이라고 합니다. 맞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50대 이상 남성에게 꼭 필요한 4가지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아내, 두 번째는 부인, 세 번째는 처,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마누라라고 하네요. 그래서 예전에는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을 했지만, 요즘에는 ‘인명은 부인’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이야기겠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반성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제일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우리들은 주님보다 물질적인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요?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신하들에게 아름답게 빛나는 커다란 보석을 보여준 뒤에 당장 망치로 깨뜨릴 것을 명령했답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그렇게 값진 보물을 깨뜨린다는 것이 너무 아까워 설득시키기 시작하지요.
“임금님, 이렇게 귀한 보석을 깨뜨린다면 임금님 명예가 손상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임금님 말에 따라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곧바로 망치로 보석을 박살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이 신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저 귀한 것을 저렇게 박살내다니 저 사람 어떻게 된 것 아니야?”
하지만 임금님은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석과 왕명 중에 어느 쪽이 더 귀한 것이냐? 깨뜨리라는 왕명을 어긴 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어라.”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가치보다 훨씬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따르나요? 아니면 세상의 가치들을 먼저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보다도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다행히 주님께서는 이렇게 중요한 곳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즉, 당신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청하는 기도에 집중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제1독서의 솔로몬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 백성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분별력을 청해서 칭찬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내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행복은 밖이 아닌 안에,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지에 달려 있다(헨리 반 다이크).
입덧을 하는 이유
얼마 전에 제가 주례를 섰던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입덧이 너무 심하다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 입덧을 해서 산모를 힘들게 할까? 아기가 엄마를 고생시키네.”라고 말했더니만, 이렇게 답변을 하네요.
“신부님 당연하지요. 엄마와 아기 입맛이 서로 다르니까 입덧을 하는 거죠.”
사실 입덧 하는 산모로부터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이 부부는 아기 탓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다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다르다는 것을 핑계로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한다면 그 안에서도 긍정의 싹이 생겨서 진정으로 일치하고 화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
정희완 신부님
하늘 나라는(또는 신앙은) 정말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일까요? 우리 신앙인은 오직 그 신앙 하나에 의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살면서, 어디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마음의 무게추가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돌아보면,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정작 중요하고 소중한 것에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고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안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신앙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 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저 한 종교에 소속됨으로써 갖는 심리적 평안함과 종교를 매개로 얻는 사람들과의 유대감과 물질적 축복을 위한 신앙, 그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가끔 신앙의 소중함과 또 신앙이 맺어 준 사람들과의 인연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많은 것들이 우리 인생에서 다가오고 떠나가고 하지만, 오직 신앙만이 변치 않는 위로와 힘이라는 사실을 간혹 깨닫기도 합니다. 우리 생애에서 숱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지만, 참신앙 안에서 맺어진 인연들이 가장 깊은 인연임을 아주 가끔 알 것도 같습니다. 저도 정말 “우리 생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하느님만이 변치 않을 위로요 희망이며 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맺어 준 신앙의 인연들이 우리 생의 소중한 반려자입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소중하고 귀한 것에 대해서는 정작 마음을 놓치고 물질적 부, 성공, 외형적 화려함 등에 사로잡혀 안달하며 살아가는지.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님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발견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하여 투신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더해 주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리고 종말 심판 사상이 드러나는 그물의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 비유의 흐름을 살펴보면 ① 하나는 보물의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상인의 비유입니다. ② 농부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 하는데 (44ㄴ절), 상인은 “좋은 진주를 찾아” 얻었습니다. (45절) ③ 농부와 상인은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삽니다.” (44ㄴ. 46ㄴ절)
이 비유들 안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나는데, 한 부류는 ‘우연히 보물단지를 발견’ 한 어떤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잦은 곳이라 피난을 갈 경우 집의 보화를 단지에 넣어 남모르게 밭에 묻어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주인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때 보물단지는 오랫동안 밭에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곤 했습니다. 그때 발견된 보물은 법적으로 밭주인에게 속하기에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44절) 이렇게 보물을 발견한 ‘기쁨’ 은 그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애써 찾아다니다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 한 진주 상인입니다. (45 – 46ㄱ절) 고대 사회에는 인조 진주가 없었기에 진주가 매우 값진 보물로 거래되었습니다. 또한 상인이 발견한 진주는 그의 기대를 훨씬 넘었기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삽니다.” (46ㄴ절) 진주 상인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좋은 진주’ 라는 가치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연히 발견하든 또는 애써 찾다가 얻었든 값진 보물을 발견한 이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투자합니다. 그들은 보물이 자신의 모든 소유와 바꿀 만한 최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하느님 나라’ 를 ‘하늘나라’ 로 표현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한 통치로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애로운 보살핌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기쁨’ 가운데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놀라운 가치를 대면한 제자들은 그 가치에 압도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맞갖은 삶을 살아가고자 전존재를 바쳐 투신했습니다. (마태 19, 21; 마르 8, 34; 10, 32-39; 루카 9, 57 – 62 참조)
이처럼 하늘나라는 발견한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그 가치에 합당한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그물의 비유가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 22, 11 – 14; 루카 14, 24 참조)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있는 어부든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면 식용과 비식용을 가려내지만,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으로 금지된 금기 식품법에 의해 더욱 엄하게 구분하여 가려냅니다. (레위 11, 10 – 12; 신명 14, 9 – 10) 그러므로 그물의 비유에 배경이 되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는 이런 분리 작업을 하는 어부들을 쉽게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립니다.” (마태 13, 48ㄴ절) 이런 장면을 떠올려보니 종말 심판 때 나는 어느 쪽으로 가게 될까하고 지난 생활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뒤 “너희는 이것을 깨달았느냐 ?” 하고 물으십니다. 비유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 가치를 살아가는 제자들의 선택과 결단으로 실천되는 삶 안에서 드러납니다. 마태오는 13장의 결어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2절) 라고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 곳간에서 모든 것을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는 주인처럼 하늘나라의 가치를 익힌 제자들은 예수님의 언행에 비추어 행동할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된 율법학자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비유를 듣고 깨닫는 모든 제자한테도 촉구하시는 바입니다.
묵상 (Meditatio)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 삶을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놓습니다. 하늘나라가 보물과 진주처럼 진가를 확인하여 당장 소유하는 그 무엇이라면, 투신의 결단에 망설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에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는” (1코린 13, 12)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만 일상에 뿌리를 둔 믿음 안에서 하느님만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 되시는 기쁨과 평화가 무엇인지 체득할 때, 우리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투신하는 결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날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마태 13, 46ㄴ) 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지겠지요.
기도 (Oratio)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시편 119, 105)
지혜로운 사람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지혜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지혜를 얻는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 지혜를 깨닫고 얻는 것이 머리의 능력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머리 좋은 아이가 늙은이보다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보면 지혜는 머리의 습득이 아니라 체득적이고 경험적인 깨달음입니다.
담배가 나쁘다는 것은 머리로 안다고 지혜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담배가 나쁘다는 것은 머리로 얼마든지 알 수 있지만 담배를 끊는 것은 나쁜 것을 실제 겪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첫째로 끊어 버리는 능력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집착을 버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련을 버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욕심을 버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쓸데없는 근심걱정을 끊어버립니다.
틱낙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다섯 번째 계단을 오르려면 네 번째 계단에서 힘을 빼라!
다섯 번째 계단을 오르려면 네 번째 계단에서 발을 떼라는 거지요.
저는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 함은 다른 중요한 것들이 중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중요한 것들을 접어야 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또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큰 것을 품으려면 크게 비워 큰 그릇으로 만들어라.
둘째로 지혜는 취하는 능력입니다.
버릴 것은 버렸으니 취할 것을 골라 취하는 것입니다.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 것 중에서 더 소중한 것을 취하고, 더 가치 있고 덜 가치 있는 것 중에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취하는 겁니다.
문제는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 그 가치 기준이 문제이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돈의 가치를 너무 크게 생각해서 돈 때문에 건강을 잃고 돈 때문에 사람을 잃고 돈 때문에 행복을 잃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너무 중요하고 일에 빠져서 일 때문에 건강을 잃고 일 때문에 가정을 잃고 일 때문에 행복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잃고 난 뒤에야 잃은 것이 더 소중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 사람이 아니라 가능한 빨리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지혜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의 능력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능력입니다.
돈을 버리고 행복을 취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랑을 사는 것이고, 사랑으로 행복을 사고(to buy), 사랑으로 천국을 사는(to live) 것입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그 사건의 주인공은 이미 신부가 되어 있지만, 제 기억에 워낙 강하게 남은 사건이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97년 인천신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첫 해 신학생들은 등산로 개척을 위해서 또한 건강을 위해서 뒷산을 자주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신학생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칡이라고 주장을 하더랍니다. 다른 신학생들 모두 칡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그런가보다 싶었고 또 먹어도 된다는 말에 서로 나눠 먹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먹은 것은 칡이 아니라, 나무뿌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나무뿌리를 건강에 좋은 칡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한 신학생이 결국 한 밤중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습니다.
문제의 사건은 병원에서 생겼습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누워 있는데,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만 ‘급성맹장’이라면서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신학생은 아주 힘들게 이야기했지요.
“선생님, 저 맹장수술 했어요.”
그러자 의사 선생님께서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맹장도 재발 하냐?”
물론 의사 선생님께서 농담 삼아서 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칡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무뿌리를 먹고, 맹장수술 한 것을 몰라서 다시 맹장수술을 할 뻔 한 것 모두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값진 보물을 깔고 앉아도 그것을 알 턱이 없겠지요.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값진 보물을 주셨습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라는 보물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하늘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와 있어도 좋아하지도 또 감사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하늘나라를 제대로 알 수 없을까요?
바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라마단 시기에는 한 달 내내 금식을 한다고 하지요. 또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그들에 비해서 우리들의 정성은 과연 어떤가요? 주일미사 참석 한 번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우리들, 작은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남들보다 더 큰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들. 그러면서 내 인생에 어려움이 생길 때에는 가장 먼저 하느님을 원망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 때문에, 우리들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하늘나라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 뒤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상합니다. 하늘나라를 값나가는 진주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라고 말씀하시니까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란 현재보다 더 가치 있는 것, 귀한 것, 의미 있는 것을 구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를 산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려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열심히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치열하게 찾는 그 사람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내 곁에 과연 하늘나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고 있었나요? 그래서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를 내 안에서 완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하나씩 답변해 나가면서 하늘나라에 다가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편하게 신앙생활하려는 안일한 마음을 버립시다.
너나 잘 하세요(이외수,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중에서)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고전들 속에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가르침이 담겨 있다. ‘춘향전’에는 절개를 지키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고 ‘심청전’에는 효성을 다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고전의 가르침을 춘향이나 심청이가 신다 버린 버선짝으로 취급하면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부지기수다. 변사또 수청은 넙죽넙죽 잘 들어주면서 결혼은 반드시 암행어사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고 앞 못 보는 아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결혼은 반드시 임금님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방자가 춘향이를 넘보면 죽일놈이라고 생각하고 심봉사가 현모양처를 기대하면 꼴불견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향단이면서 이몽룡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자기가 뺑덕어멈이면서 임금님에게 꼬리를 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언제나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옳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금언을 들으면 즉시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 하세요’라는 대사로 되받아 친다.
영원한 행복을 찾는 사람
허영업 신부님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오늘날 가장 무서운 절망은 삶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인인 빅터 프랭클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죽음의 위험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내를 만나야 한다는 단 한 가지의 생각이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불행하게도 그는 아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처절한 삶 속에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처럼 그는 다시금 삶의 목적과 존재 의미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성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한계가 있습니다. 삶은 각기 제 무게를 가지고 있고 그 어떤 것도 완전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으며 영원한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미움이나 반목할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바라보며 어디에서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큰 위로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원을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라”
허성 신부님
오늘의 복음말씀 내용 역시 「하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의 예들이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고, 또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고, 또 바다에 그물을 쳐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첫번째로 밭에 묻힌 보물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역사가 오래된 옛 도시인 경주에서 누가 굴착기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에 문화재 관리규정이 있어서 발견한 사람은 국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지만 그런 규정이 없다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그 보물들을 발굴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묻힌 모든 보물들을 발굴한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옛날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중동지방에서는 민족들 간에 전쟁도 잦았고 때로는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도 심해서 생활터전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가거나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미처 운반할 수 없는 보물이나 살림도구 등은 땅을 파고 감추어 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찾겠다고 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몇년 후에 돌아와 보니, 사막이 대부분인 그 지역이 그동안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 자기의 보물을 묻었는지 몰라 끝내 못찾은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옛 보물들을 발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두번째로 장사꾼이 좋은 진주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던 진주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서부영화에서 금을 캐서 부자가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목선으로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와서 인디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까지 험한 산속에서 금맥을 찾다가, 마침내 큰 금맥을 발견했을 때엔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재산이건, 몸이건, 모험이건, 폭력이건, 권력들을 총 동원하여 그 광산을 개발하여 금을 캐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낚시꾼들은 월척의 고기를 낚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낚시터로 떠나지만 작은 고기만 잡힐 경우엔, 그 작은 고기도 소중히 낚시 바구니에 보관하다가 마침내 월척의 큰 고기를 낚게 되면 소중히 간직하던 작은 고기들은 그것이 얼마가 되든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 버리고 큰 고기만을 챙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르시자 즉시 자기들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왔던 가정, 재산,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도 바울로는 신도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코로 가다가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그가 그때까지 소중히 여기던 자기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 같이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가 내 생애의 전부』라고 까지 고백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무나 반한 나머지, 비 그리스도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자기의 몫으로 챙겼다. 아무도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번째로 하늘 나라가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가리어 담고, 못먹을 고기는 밖에 집어 던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서 공존하듯 이 세상도, 이 교회도, 이 사회도, 심지어는 내 자신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때로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고 체험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서로 가장 걸작품이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피조물인 우리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무절제한 욕심과 교만심을 자극한 악마의 작전에 넘어감으로써, 가치관의 혼돈과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어두움의 세력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죽음의 나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셨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어서 종말에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성령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전구하심을 구하며 용감히 싸워야 하겠다.
세상보화 버리고 천상보화 얻으리
배광하 신부님
숨겨진 보화
오늘 예수님의 숨겨진 보물 비유 이야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우선 보물을 발견하여 가진 것을 다 팔아 밭을 산 뒤의 결론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중간에서 절단되어 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물을 발견했다면 그 자리에서 파내어 집으로 가져올 일이지, 다시 묻어 두고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샀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밭의 주인이 보물이 숨겨진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대로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절대 그 밭을 팔 까닭도 없을 것입니다. 주인이 보물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데 밭을 몰래 샀다면 그건 훔친 것이나 다름없는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비유 이야기에 숨은 뜻은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생각하듯 보물섬을 발견한 횡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이야기가 중간에서 끝나버린 것은 어쩌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다음 이야기를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보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오는 기쁨, 보물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는 내게 있어서만 보물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밭주인에게도 그 보물은 아무 가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동창 신부 한 분은 최고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였고 아버님도 판사이셨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이 법조계의 길을 걷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길은 세상이 주는 명예와 안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길, 나아가 마음만 먹으면 권력과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동창 신부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사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만약 동창 신부에게 주님 밭에서 발견한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그 역시 예수님의 오늘 비유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발견한 보물 이야기는 세상 물욕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바보같이 들리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만이 간직한 기쁨에 천상 보물을 발견한 이야기를 중간에 그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은 어차피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사야할 값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 29)
하느님의 나라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처럼 교회 역사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여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하늘의 보화와 바꾼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 모든 것을 다 바꾼다 하여도 결코 살 수 없는 그야말로 보물 중에 가장 값진 보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은 한 개인만이 소유하며 누리는 세상의 보물과는 다릅니다. 모두가 공유해야 하며, 여럿이 힘을 모을 때 그 보물은 더욱 값진 가치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찾은 이들은 아직 보물을 찾지 못하여 세상 여러 물질적인 근심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고 참된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함께 찾을 것을 알려 주었고 같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기쁨과 평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이 작용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일찍이 온몸으로 체험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또다시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8)
세상이 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찾고 계시는 미국 메리놀회 선교 사제이신 ‘봅 멕카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슬람푸르라는 복잡한 거주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나무로 된 움막에 산다. 나지막한 양철 지붕으로 덮인 약 4x2미터 정도 되는 공간 속에서 나는 기도하고, 하루 두 번 식사를 준비하고, 휴식을 취하고, 내 자전거를 보관한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가까운 공동 우물에 가야 물을 길을 수 있다.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쓴다.
더운 철이면 사람들이 ‘천장에 선풍기가 달린 집에서 사시지 왜 이런 데서 사세요?’라고 몇 번이나 묻는다. 그러면 나는 ‘당신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저도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길이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밭의 보물을 찾은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 길을 사는 이들은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기쁨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치
홍금표 신부님
「진리를 파는 가게」라는 우화에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인용하는 부분은 진리를 파는 가게의 아가씨와 진리를 사기 위해 온 한 사나이의 대화부분이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전체 진리를 찾으세요 ?』/『전체 진리, 전체 진리를 보여 주시오 ?』『값이 몹시 비싼데요. 선생님』/『얼마요?』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 사람은 슬픈 마음으로 가게를 나오게 된다는 것이 이 우화의 내용이다. 아마 그가 가게를 슬픈 마음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리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평온과 안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진리를 입으로는 갈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얻기 위하여 치러야할 희생이 두려워 진리 앞에서 도망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리란 희생과 포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우화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보물과 진주의 비유를 보게 된다. 먼저 보물의 비유를 살펴보자! 보물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스라엘 지역은 오늘날도 세계의 화약고로서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성서의 시대에도 이 지역은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때 피난을 가곤 하였는데 피난을 떠날 때에는 중요한 것들과 이동이 가능한 소형의 물건들만 가지고 피난을 떠나고 몸에 지니고 갈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은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몰래 묻곤 하였다.
이러한 이유가 보물이 땅에 묻히게 되는 원인이 된다. 물론 보물은 묻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 왔다면 그 보물을 다시 찾을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죽음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면 땅에 묻힌 보물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사람 중에 아주 적은 수이겠지만 운이 좋은 사람들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유다법에는 땅위는 물론이요 땅 아래에 있는 것에 대한 소유권은 그 땅의 소유주에게 있다는 법이 있기에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보물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밭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물론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땅에 묻혀 있는 보물이 자신의 재산보다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밭을 사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물을 찾아 낼 수 있는 눈」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발견한 보물을 「획득하려는 의지」가 이 비유에서 또 다른 묵상을 제공하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땅에 묻혀 있는 보물」과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공통된 의견은 보물은 「하늘 나라」를, 그리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알아보고 매료된 사람들」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부모 형제는 물론 권력과 물질, 그리고 생명까지 포기하면서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비록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쳐질지라도, 이들은 하늘나라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늘나라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값진 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초점은 먼저 값진 진주를 알아 보는 눈과 그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버리는 장사꾼의 모습이다.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은 진주 하나를 위해 전 재산을 내던진 이 상인의 결단이다』란 어느 주석가의 말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은 값진 진주인 하늘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두 비유의 교훈을 생각해보자! 하늘나라란 모든 사람에게 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땅에 묻혀 있는 보물이나 숨어 있는 진주처럼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하늘나라라는 보물과 진주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고, 보물과 진주를 위해 재산을 처분하듯, 하늘나라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다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교훈인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
우리는 두 주 전부터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주일 복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번도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느님 나라는 마치 무엇에 비길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마치 밭에 묻힌 보물에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 하나를 더 들려 주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에 비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 두 개를 연속해서 들려 주시는 이유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두 비유는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농부와 상인은 모두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팔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원하는 보물을 삽니다. 세 개의 동사가 그들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찾다’, ‘팔다’, ‘사다’ 모든 동사가 적극적이고 열렬한 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두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귀한 곳이기에, 이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 나라에 들어가도록 애써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이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고,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사악한 짓들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찬란했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다 놓아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 큰 부담을 느껴 끝내 귀한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주인공인 농부나 상인도 모든 재물을 팔아 보물을 사려고 했을 때 많은 부담을 가졌을 것입니다. 위험한 모험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가졌을 것이고 가족으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닥쳤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자 청년과 달리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세례받을 당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최고의 보물을 얻는 법
이기양 신부님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의 작품 중에 「목걸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는 마틸드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장관이 주최하는 한 파티에 남편과 함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심정을 알고 아껴두었던 돈으로 옷을 사줬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했던 마틸드는 친구인 프레스체 부인에게서 진주목걸이를 빌려 치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파티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 부부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얻어 빌렸던 목걸이와 똑같은 것을 사서 프레스체 부인에게 말없이 돌려줬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십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게 됩니다. 마틸드는 빨래 일을 하면서 더러운 곳에서 먹을 것도 못 먹고 고생을 하는 동안 그 아름답던 얼굴은 비참하게 됐으며, 머리카락은 반백이 됐습니다. 마침내 빚을 다 갚았을 무렵 우연히 프레스체 부인을 만나게 되자 마틸드는 다소 자랑스레 그간의 일을 고백하게 됩니다. 얘기를 다 들은 프레스체 부인은 말합니다.
"내게 돌려준 그 목걸이 값을 갚느라 십 년이나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이를 어째! 마틸드, 그 목걸이는 싸구려 가짜였어요."
우리 인생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애지중지 여기고 평생을 뼈 빠지게 노력하며 매여 살았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재산이 다인 줄 알고 평생을 쥐어짜며 형제간의 의를 끊을 정도로 집착하며 살았는데 생의 끝인 죽음 앞에서야 그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건강도, 자식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물'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보물,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얻어야 하는 그 보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늘 제1독서에 나와 있습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지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느님께서 물으시자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1열왕 3,11-12).
솔로몬이 청한 것은 하느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놓았기에 솔로몬에게는 부귀나 장수나 원수 갚음들이 그냥 따라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보물이란 '하느님을 아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식이나 재산 건강보다도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되는 것이지요.
전도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고 했을 때 예수님을 보물로 알아보았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도 배도 가정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 천국의 열쇠를 맡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 '보물'은 재산도 건강도 원수 갚음도 아니라 솔로몬 왕이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입니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은 솔로몬과는 반대로 하느님을 청하지 않고 재물을 청하고 장수를 청하고 자식의 성공만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재물과 자녀 교육, 건강 등은 그것에 집착하게 만들고 결국 하느님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먼저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나서 재물을 쓰고, 자식을 교육시키고, 건강을 생각한다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속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순서가 바뀌었지요. 솔로몬왕처럼 지혜로운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사는 하늘나라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공자는 인생 40을 불혹(不惑)이라 하였고, 50세가 되어야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경지가 된다고 하였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참으로 깨달았다면,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결단이 요구된다.
1. 인생의 가장 귀한 것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공자는 일찍이 50 이 되어야 어느 것이 하늘의 뜻인지를 알게되는 지 천명(知天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이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는 삶의 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라 하겠다.
학생 때에는 대학 입시의 관문만 통과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릴 것으로 생각되지만, 취직과 결혼 그리고 기반잡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 없이 지내게 된다. 더구나 요즘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위한 몸부림을 계속해야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막상 "이제 어느 정도 살만해졌다."싶을 무렵이면, 앞으로 살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 보다 적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한 순간 갑자기 "그냥 이렇게 살다가 나의 생이 끝나버린다면, 내 인생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낼 수는 없다. 참으로 삶을 가치 있게 해줄 뭔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노후 걱정과 함께 한해 한해가 너무나 짧게 생각되고 쫓기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된다. 남들처럼 나도 대학에 들어갔고, 열심히 바쁘게 살면서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지냈다. 더 새롭고 비싼 것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죽자하고 일하며 쉴 사이도 없이 줄달음치며 살아서 이제 겨우 남부럽지 않을 만큼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벌써 저만치 생의 땅거미가 드리워지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모았는데, 그래서 제법 차지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모든 것이 다가오는 죽음 앞에 이렇게 초라하고 빛 바랜 깃발처럼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디서 나의 이 큰 공허함을 채워 줄 그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이런 넋두리 같은 고백은 교리 반에 나온 중년층의 예비신자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지금까지 허둥대며 그렇게도 열심히 쌓아 온 이 모든 소유가 나의 공허(空虛)를 메꾸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날 확인하게 된다.
2. 모든 것을 팔아서 사야 할 것.
'이것이 제일이다' 고 열심히 찾고 쌓아온 것들이, 참으로 별것 아닌 것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것에 눈을 떴다는 말이 아닐까! 우리에게 진정 살맛을 주고, 죽을 때까지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아닌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하는 참 사랑의 체험을 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며 그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하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든, 하느님 안에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쏟는 사랑과 봉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3. 소유형의 인간과 존재형의 인간.
에릭 프롬 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인간은 소유형과 존재형이 있다고 했다. 소유형의 인간이란 비싸고 새로운 것을 많이 갖는데 행복이 있다고 믿고 매사에 어느 것이 이익이 되느냐에 만 민감한 인간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계산적이다. 그에게는 사랑도 장사꾼 적인 거래의 일종일 뿐이다. 영악하고 한푼이라도 손해를 볼 짓은 결코 안 한다.
반면에 존재형의 인간은 손익(損益)이 아니라, 어느 것이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인간형이다. 이런 사람은 소유보다도 보람과 의미를 더 추구한다. 소유형의 인간이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품꾼'이라면, 존재형의 이간은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목자' 인 셈이다. 소유형의 인간은 위급할 때만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도와 달라'는 기도밖에 하지 못한다. 존재형의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은 항상 흠숭의 대상이며 섬겨야 할 분이며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할 분이시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이나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마태 13,44-45) 고 말씀하신다. 어느 것이 이익이냐에 만 눈먼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것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배를 채울 수는 있어도 가슴 뿌듯하게 할 가치와 보람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값진 진주는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 이다. 이것 외에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버린 것(시간 ,관심, 돈), 그것만이 참으로 내 것임을, 영원히 남는 것임을 잊지 말자. 이를 깨닫는 것이 참 지혜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야한다.
소유적입니까? 존재적입니까?
대구대교구 주보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면 모든 어린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숨겨 놓았을 보물을 찾으려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모릅니다. 어떤 어린이는 숨겨진 보물을 찾고서 너무나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곤 합니다. 어떤 어린이는 하나도 찾지 못해 울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보물찾기는 소풍 때의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소풍 날 보물을 찾듯이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가치로운 것 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학자는 인간의 유형을 “소유와 존재”로 구분하였습니다. “소유형의 인간” 이란 ‘새로운 것을 많이 갖는데 행복이 있다’고 믿고, 모든 일을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만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극히 계산적이어서 사랑도 거래의 일종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존재형의 인간”은 ‘어느 것이 의미가 있는가? 어느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중요시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보다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더 추구합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소유형의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어 서배는 채울 수 있어도 가슴 뿌듯하게 할 가치 있는 것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보물과 좋은 진주는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형의 인간 즉, 신앙인의 참된 삶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나의 모든 것을 쏟고 있습니까?
소유적입니까? 존재적입니까?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우리의 현실은 하늘나라의 기대와 모순되어 있어 의심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누구한테나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승리의 행진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창조 때부터 세상이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졌으면 지금 우리가 이런 갈등과 모순 속에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기쁜 소식은 알아듣기도 어렵고 알아보기조차 어려울까요? 뭐가 이렇게 복잡할까요? 설상가상으로 하느님 나라를 소개하는 비유 말씀도 ‘감추어진 것’에 속합니다.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효력은 온전히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한 농부가 남의 땅을 갈다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ㄴ절) 다른 이의 밭을 간 이 농부는 소작농이거나 날품팔이꾼일 것입니다. 그는 보물을 숨겨두는 치밀함까지 갖추었습니다. 그동안의 바람과 계획은 다 팽개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밭을 살 정도로 용감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이 납니다. 귀한 것이기에 더욱 정당한 방법으로 보물을 차지합니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46절) 그 시절에 천연 진주는 매우 값진 보석이었습니다. 이 상인은 오랫동안 값진 진주를 찾아 떠돌았습니다. 좋은 진주만을 취급하는 전문가이니 금방 이 진주의 값어치를 알아보았을 겁니다. 애타게 찾던 것이기에 이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이나 희귀한 진주는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런데 농부와 상인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가치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에 다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앞뒤 안 가리고 가진 것을 다 처분합니다.
짝을 이루는 이 두 비유는 하늘나라의 가치와 그 가치를 발견했을 때의 무한한 기쁨, 그리고 그에 따르는 노력과 대가를 잘 보여줍니다. 보물이 어느 날 갑자기 거저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늘나라의 가치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누리던 안정과 평화와 소유를 포기하고 수고와 노력을 다하여 기쁘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갑니다.
마지막 비유의 배경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어부들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면 뭍에 돌아와 그물에 걸린 고기를 가려내는 일부터 합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등을 구분해 냅니다.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부정한 것에 속합니다(레위 11,10-12; 신명 14,9-10).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렸다.”(48절)
우리가 하느님을 의식하든 안 하든, 하느님께 마음을 쏟든 안 쏟든 세상살이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듯 보입니다. 착한 사람한테나 악한 사람한테나 모든 것이 똑같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절) 고기를 잡을 때가 있고 그것을 가려낼 때가 있듯이, 선과 악이 명확히 구별될 때가 옵니다. 누구도 그때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맞습니다. 악을 가려내시는 하느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날까지는 악이 선과 섞여 있는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51ㄱ절) 제자들은 이 비유 설교를 알아듣지만 다른 이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이는 집주인과 같아 자기 곳간의 물건을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물건을 꺼낼 수 있을 뿐더러 오래된 것과 새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이것을 풀이하며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이는 예수님의 설교 주제인 하늘나라를 익힌 사람입니다. ‘새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이요, ‘옛것’은 구약성경과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 율법학자라면 예수님의 언행에 비추어 구약과 율법을 풀이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곳간 열쇠를 맡기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성경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곳간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곳간의 주인입니다. 현명한 이라면 그때그때 살면서 필요한 해답을 말씀에서 찾을 것입니다. 옛것과 새것을 적당하게 잘 끄집어 낼 줄도 알고 오래된 것에 새로운 것이 있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의 곳간에서 오랫동안 숨겨진 보물을 발굴해 낼지도 모르고,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서 기쁨을 찾은 이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말씀을 맞바꿀 것입니다.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51ㄱ절)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에다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곳간 주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은 모든 게 뒤섞여 혼란스럽지만 아무쪼록 선과 악이 판가름 나는 종말에는 하느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보물과 진주, 두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보물 혹은 진주가 사람을 현혹시키듯이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도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가진 것을 버리면서 추구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을 자기 안에 영접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살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잘 믿고,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의 마음에 들어서, 그분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교섭해서 환심을 사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지혜일 수는 있어도 신앙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복을 비는 신앙이나, 기적을 찾아다니는 신앙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몇몇 사람에게 기적하는 힘을 주고, 다른 사람들은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철저히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 혹은 좋은 진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야 하는 보물 혹은 진주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고 그 함께 있음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한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부가 함께 있고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것은 그 함께 있음이 좋아서 자유로이 택해서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고 함께 있음을 얻어서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이런 함께 있음은 인간이 자유를 잃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는 자유를 잃고 주인과 함께 있습니다.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은 자유를 잃고 교도관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된 사람은 한 인간 개체로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누리는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사람도 많은 것을 버렸지만, 부부로서 누리는 새로운 자유가 있고 삶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충실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렸지만, 친구와 함께 있어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맛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많은 것을 버리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 주고 우리의 이기심을 벗어나서 더 큰 자유를 누리게 해 줍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고, 우리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라 5,1). 이 자유는 하느님이 베푸심이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세상이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을 때,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십자가가 발생하였습니다. 내어주고 쏟는 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베푸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베풀면서 행복합니다. 우리가 이 베품의 가치를 부인하면, 이 세상은 동물의 세계가 되고 맙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베푸심을 알아듣지 못하면, 세상에는 감사할 것도, 용서할 것도, 희생할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경쟁만 있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잘 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도로상에서 빨리 가면 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인간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베품은 하나의 암호와 같이 우리 삶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고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물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 욕심, 허영, 속물근성 등을 버릴 때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암호입니다.
이 베푸심의 발견과 영접은 나의 계획, 나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푸심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일해야 합니다. 이 숨결은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보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이 숨결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삶의 깊은 곳에 흐르는 베품의 숨결입니다. 내가 이 숨결을 찾아 돛을 달면, 나도 이 숨결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베품의 이야기이지만, 나도 그 흐름에 합류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물이나 진주와 같이 숨겨져서 혹은 암호와 같이 해독(解讀)을 필요로 하는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숨결에 돛을 달고 함께 흐르는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확인 되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지혜로운 행복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아버지 다윗에 이어 임금이 된 솔로몬은 하느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에 하느님께서는 부와 권력과 같은 다른 것을 자기를 위해 청하지 않고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고 답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지혜를 청하면서 명석한 머리를 달라 하지 않고 듣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Heart to understand)을 달라고 하고 하느님께서도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지혜는 머리의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능력이라는 표시입니다.
머리를 어떻게 잘 굴리느냐가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잘 쓰느냐가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쓰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듣는 마음과 지혜롭게 분별하는 마음을 청하는 솔로몬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장수를 청하지 않았다고 칭찬하십니다.
즉, 칭찬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부와 장수를 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청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첫째로 보통의 우리는 나를 위해 무엇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우리는 小市民이고 이기주의적입니다.
그러나 크게 쓰이는 큰 인물은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자기를 포함한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원불교의 가르침 중에 大空大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크게 비우는 사람이 사회 公益에 크게 이바지 한다는 뜻이지요.
자기를 비우는 사람이 弘益人間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할 때 자기도 행복한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불행한데 자기만 행복하려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자신의 행복을 느끼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과 사랑을 잃어버리기에 결국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행복하려면 다른 사람을 나의 행복에 초대해야 하고, 그래서 현명한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자기의 고통과 문제만 가지고 동동거리는 옹색한 마음보다 다른 이의 아픔과 하소연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야말로 남의 행복으로 행복해지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의 행복한 마음입니다.
두 번째로 보통의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장수를 청합니다.
요즘 말로 하며 Well-being을 원하는 것입니다.
Wellbeing은 참으로 좋은 말이고 그래야 되지만 문제는 그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장수하는 것이 Wellbeing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부와 건강에 대해서 집착한다면 Mal(bad)-being이 될 것이고 그 인생은 불행해질 것입니다.
더 많이 벌려다 재산을 다 날리고 건강에 대해 너무 걱정하느라 건강을 상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되고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 행복을 위해서 돈이 건강보다 앞서서는 안 되고 돈이 사람보다 앞서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돈이 중요하다 하여 건강 상할 정도로 집착한다면 이 얼마나 바보짓입니까?
돈이 중요하다 하여 사람을 다 잃으면 이 얼마나 바보짓입니까?
더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이 세상 것이 하느님 나라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더 가치 있는 것과 덜 가치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팔아버릴 수 있는 마음이 오늘 솔로몬이 청하는 지혜로운 마음이고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하느님 나라의 지혜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체험담입니다.
한번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미국 청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신부님의 옆에서 자신의 약혼녀를 자랑하더래요.
“신부님, 제 약혼녀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아름다워서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답니다.”
1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자랑하기에 신부님께서는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얼마나 약혼녀가 아름다우면 이렇게 1시간 이상을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 혹시 애인의 사진 가지고 있소?”
그 청년은 “그럼요. 너무나도 예쁘고 아름다운 제 애인의 사진을 이렇게 늘 가지고 다니지요.”하면서 신부님께 사진을 꺼내서 보여 주었는데, 그 사진을 본 신부님의 소감이 재미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서 그렇게 못생긴 여자는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도 있지요. 물론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아마 이 청년에게 적용이 되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실제 우리들의 삶 안에서 그런 모습은 자주 목격이 됩니다. 그래서 비록 다른 모든 사람이 거부를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 때문에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사랑의 체험이란 것은 이 세상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사랑을 특별한 곳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단지 내 마음만 바꾸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특별하게 내게 다가오는 사랑을 꿈꾸고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착각을 할 때도 참으로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모습만이 사랑일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십니다.
먼저 보물의 비유에서 농부가 밭을 가는 것은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죠. 이것은 농부에게 있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의 비유는 그렇지가 않지요. 장사꾼은 처음부터 진주를 찾아 다녔습니다. 구하고 구하다가 드디어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 비유는 기대하지 않았던 발견과 기대하면서 찾다가 발견한 것이라는 큰 차이를 보이면서, 하늘나라도 이처럼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늘나라가 이렇다면, 하늘나라의 가장 큰 특징인 ‘사랑’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우리는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들은 더 뜨거운 사랑의 체험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특별한 사랑만을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왜 나는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생각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런 특별한 사랑을 할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요?
이러한 나의 이기적인 마음들이 사랑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결국 하늘나라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거룩한 주일이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주일을 만들어 봅시다.
좋은 생각 10가지
1.너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우리가 다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3.미래를 위해 내가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4.내가 안 해서 너를 섭섭하게 한 일이 무엇이 있지?
5.내가 무엇을 버리면 우리 모두 다 좋아질까?
6.돈을 앞세우면 실패하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성공합니다.
7.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하지 않으면 성공합니다.
8.처음과 끝이 달라지지 않으면 성공합니다.
9.누구를 희생시키지 말고 소생시키면 성공합니다.
10. 항상 진실하면 성공합니다.
珍珠를 차지하기 위하여
강영구 신부님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그대에게
우리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지금 무엇을 선택하는지, 어떤 결단을 내리는지에 따라서
당신의 운명은 물론 행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여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와 콩알만 한 진주(珍珠)가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가져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양의 많음에 현혹되어 쓰레기더미를 선택한 당신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당신이 쓰레기 더미를 선택하게 된 것은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貪慾) 때문이지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瞋痴)을 불가(佛家)에서는 삼독(三毒)이라고 가르치지요.
삼독(三毒)으로 흐려진 눈은 바른 선택, 올바른 행동과 처신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바른 선택을 하려면 바르고 밝고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입니다.
만일 당신이 진주를 선택했다면 당신은 오랫동안 행복할 것입니다.
영롱한 빛깔, 변하지 않는 모습, 작지만 고급스럽고 값진 보석을 손 안에 간직한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당신이 진주를 선택한 것은 맑고 투명한 눈
무엇이 값진 것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투자하여
그 진주를 차지하는 유능한 장사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당신의 눈을 맑고 밝게 닦으십시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가난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당신은 유능한 장사꾼처럼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一明)
올인
장동현 신부님
우리 학교에는 테니스부와 골프부가 있습니다. 운동부에 소속된 학생들이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밥 먹고 하루 종일 테니스와 골프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손은 온통 굳은살로 덮여 있습니다. 개인생활도 거의 포기한 채 운동에만 몰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즐겁게 운동을 합니다.
‘이기겠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되겠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겠다. ’
이런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낸 사람과 우리 학교 운동부 학생들의 공통점은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합니다.
아르바이트 하듯이 해서는 보물을 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느님 나라보다 귀하고 값진 것은 없습니다. 죽음도 좌절시킬 수 없는 영광이 하느님 나라 시민의 특전으로 우리에게 제공됩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몫은?
하화식 신부님
사람들은 돈 계산만큼은 빠르고 정확하다. 그것은 바로 돈이 내 삶에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값어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정작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생각의 범위가 현세에만 머물게 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닌데 우리는 거기에 모든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소중한 몫은 무엇일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삶의 최대 목적이 되고 또 가장 소중한 몫이 되고 있는가? 그 결과에 따라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팔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만일 화재로 인하여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가정할 때 이왕에 더 좋은 몫으로 내어놓으면 보람도 있고 더 큰 영광도 될 텐데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많은 돈을 잃어버리게 되면 돈에 대한 아까움도 있겠지만 그렇게 될 바에 차라리 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그럼 하느님 나라에 대한 나의 몫은 어떤가? 내가 내는 교무금·헌금은, 그리고 남을 위해 베푸는 자선은 얼마나 봉헌하면서 살아가는가? 한 걸음 나아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능과 시간과 재산을 어느 정도 팔 수 있는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또 우리의 모든 상황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하늘나라’ 또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그 물의 비유는 지난 주일의 가라지의 비유와도 유사하다.
그러면서 선과 악의 ‘결정적’ 구분과 선택에 관 한 종말론적 상황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13,49- 50). 이것은 항상 그리스도를 ‘철저히’ 선택하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 1열왕 3,5. 7-12 : 너는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 다
솔로몬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 솔로몬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통 치할 수 있도록 가장 소중한 것, 즉 ‘지혜’와 ‘분별력’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7-9절). 재력과 권 력이 그의 품위를 높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덕망 이 없다면 그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러한 모습은 일반 사회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지금 현재도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야훼께서는 솔로몬이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11절)을 청하 지 않고 지혜를 청한 것을 칭찬하시며, 그에게 “슬기롭고 명석한 머리”를 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은총도 무수히 베풀어주신다(12-13절).
솔로몬의 이 기도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서 가장 본질적 인 것을 꿰뚫어본 기도이다. ‘선과 악을 가려내고’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명석한 머리‘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 교회 안에서도 책임을 맡은 입장이라면, 바로 다른 사 람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하거나 이웃에 게 무관심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현세의 모든 것을 통하여 어디서나 그분 을 발견하고, 솔로몬이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께 청했듯이 우리 형제들을 위해 청하 기를 바라신다.
복음: 마태 13,44-52: 하늘나라 에 대한 비유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진주에 대 한 비유에는 다 같이 값진 보물을 찾자마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아버리고 그 보물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 46 참조).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엄청난 가치,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즉 하늘나라에 압도되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것을 소유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떠한 모험도 무릅쓸 수 있는 ‘용기’를 드러내게 된다.
여기서 이제 그리스도와 복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망설일 수 있겠는가? 그분 때문이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얻 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것은 그러한 가치를 알면서도 그것을 잡기 위해 용기있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또 그 것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하찮은 일들을 포기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나 유일한 진주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은 우리 자신 안 에 ‘새롭게 변모’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이 그렇게 작용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그러한 활동 즉 ‘새롭게 변모’시키는 활동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겨야 한다. 이 때에 우리는 그 보물과 진주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지혜’이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 에서 참된 제자의 모습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 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이 비유는 마태오의 개인 체험 뿐 아니라 그 의 복음을 연상케 한다. 그의 복음은 구약성서의 모든 내용(낡은 것)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빛에 비추 어 재해석된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앙의 유산으 로 전해진 복음의 무한한 ‘부’를 더 깊게 하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 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세대가 처음부터 발굴해서 세상에 드러내야 할 ‘보물’의 진가를 발견하고 또한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이다.
제2독서 : 로마 8,28-30 :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하셨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깊이 사고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 여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생각하셨고(에 페 1,3-14)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익’을 위하여 마련하시고 ‘미리 정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아들의 모습”(29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에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 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계획 속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실‘ 계획까지도 세워놓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을 드리고 그분을 ’다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란 무엇인가 ? 하느님 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뜻에 항상 일치하려고 하는 삶을 통하여 그분을 소유하는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참된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셨던 그리스도는 지혜 자체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닮으려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닮을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팔 수 있을 때, 하늘나라와 그분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 지혜와 함께 참된 봉사 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또 우리 의 삶을 노력하자.
보물과 그물의 비유
허성 신부님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라”
오늘의 복음말씀 내용 역시 「하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의 예들이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고, 또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고, 또 바다에 그물을 쳐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첫번째로 밭에 묻힌 보물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역사가 오래된 옛 도시인 경주에서 누가 굴착기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에 문화재 관리규정이 있어서 발견한 사람은 국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지만 그런 규정이 없다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그 보물들을 발굴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묻힌 모든 보물들을 발굴한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옛날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중동지방에서는 민족들 간에 전쟁도 잦았고 때로는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도 심해서 생활터전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가거나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미처 운반할 수 없는 보물이나 살림도구 등은 땅을 파고 감추어 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찾겠다고 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몇년 후에 돌아와 보니, 사막이 대부분인 그 지역이 그동안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 자기의 보물을 묻었는지 몰라 끝내 못찾은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옛 보물들을 발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두번째로 장사꾼이 좋은 진주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던 진주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서부영화에서 금을 캐서 부자가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목선으로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와서 인디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까지 험한 산속에서 금맥을 찾다가, 마침내 큰 금맥을 발견했을 때엔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재산이건, 몸이건, 모험이건, 폭력이건, 권력들을 총 동원하여 그 광산을 개발하여 금을 캐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낚시꾼들은 월척의 고기를 낚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낚시터로 떠나지만 작은 고기만 잡힐 경우엔, 그 작은 고기도 소중히 낚시 바구니에 보관하다가 마침내 월척의 큰 고기를 낚게 되면 소중히 간직하던 작은 고기들은 그것이 얼마가 되든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 버리고 큰 고기만을 챙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르시자 즉시 자기들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왔던 가정, 재산,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도 바울로는 신도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코로 가다가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그가 그때까지 소중히 여기던 자기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 같이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가 내 생애의 전부』라고 까지 고백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무나 반한 나머지, 비 그리스도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자기의 몫으로 챙겼다.
아무도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번째로 하늘 나라가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가리어 담고, 못먹을 고기는 밖에 집어 던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서 공존하듯 이 세상도, 이 교회도, 이 사회도, 심지어는 내 자신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때로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고 체험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서로 가장 걸작품이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피조물인 우리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무절제한 욕심과 교만심을 자극한 악마의 작전에 넘어감으로써, 가치관의 혼돈과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어두움의 세력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죽음의 나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셨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어서 종말에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성령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전구하심을 구하며 용감히 싸워야 하겠다.
하늘나라 문을 열어본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써 몇달째 뵙지 못했던 저희 수도원 '단골 할머님'께서 오셨기에 반가운 마음에 차를 한잔 대접했습니다. '자식들이 다들 효자이니 해외 효도관광이라도 다녀오셨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면 도로를 걸어가시던 중 한 운전자의 부주의로 대퇴부를 크게 다친 할머님께서는 장장 4개월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그동안 꼼짝도 못하시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 지금은 좀 어떠시냐?'고 여쭸는데, 할머님 대답은 저를 더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70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넉달 동안 꼼짝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처음 한두 달은 심신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통증도 컸지만, 가해자가 그렇게 원망스러웠고 미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석달째 들어서면서 마음을 바꿔먹게 됐다. 하느님께서 내게 대피정 한번 하라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아직도 운신이 온전치 못하신데도 할머님께서는 활짝 웃으시면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요즘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도 다치지 않았고, 뼈도 제대로 붙었고, 정말 고마운 일이다. 병실에서 지낸 넉달이 힘들었지만 내 평생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정말 하느님을 만난 시간이었다."
만만찮은 고통 가운데서, 이해하지 못할 불운한 사건에서도 하느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눈으로 만사를 바라보려는 할머님의 신앙이 참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할머님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진정 그분은 하늘나라의 한 귀퉁이를 목격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나라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할머님처럼 이 세상의 생활양식을 조금씩 탈피하고 초월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잠시라도 열어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너머에 있는 더욱 가치 있고, 한층 의미 있고, 더욱 영원한 것,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를 추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 중에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누가 보건 말건, 험악한 저잣거리에서건 거친 들판에서건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 어느 곳에서나 기쁘게 사는 사람, 열악한 상황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그 사람은 이미 천국을 맛본 사람, 천국을 사는 사람입니다.
월드컵 예선전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도 비본질적인 것들, 엉뚱한 것들에 목숨을 건다는 것입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창창한 어린 선수의 인대나 무릎을 걱정하기보다는 오직 득점만을 생각합니다. 선수 생명에 치명적 태클이나 위험한 파울도 좋은 작전이라며 거칠게 몰아붙일 것을 강요합니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것들, 지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대체로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고 기피합니다. 대신 즉각 효과가 나타나는 것들,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목숨을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생활양식은 조금은 달라야겠지요. 우리는 세상에 있는 많은 대상들 가운데서 좀더 고상한 것, 한층 가치 있는 것, 더 의미 있는 것, 좀더 덕스러운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변치 않을 것들을 추구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우선적 과제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보물 중에 보물이신 예수님을 더욱 적극 추종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라는 보물 중 보물을 발견한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다른 모든 것들은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입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포기'가 요청됩니다.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은 우리에게 있어 이제 예수님 이외의 부차적 요소들에 대한 점진적 이탈과 포기가 요청됩니다.
복 있는 그리스도인
이시찬 신부님
니에커크라는 사람이 아프리카의 오렌지 강가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친구와 대화하던 중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예사로운 돌이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니에커크는 그 돌을 장난감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한 후 다아아몬드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후 니에커크의 집에 토인 마법사가 찾아 왔습니다. 니에커크는 토인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크고 빛나는 돌을 보고 그것을 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 돌이 마법용으로 쓰는 것이라며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니에커크는 자기의 전 재산을 건네주면서 힘겹게 그 돌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감정하여 보니 그 돌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귀한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보석 상인에게 11만 파운드에 팔았고, 그 상인은 다시 어느 귀족에게 20만 파운드에 팔았습니다. 이것이 ‘남아프리카 스타’라고 불려지는 유명한 다아아몬드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며,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보화와 진주는 모두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는 것을 서두에서 말씀드린 예화에서 보았습니다. 천국도 이와 같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과 재물 그리고 나의 욕망과 영광을 포기해야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할 때 소유할 수 있는 그것이 천국입니다.
진정 인생의 최고 가치,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서 3장 8절부터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예수회 소속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은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이아몬드를 장난감과 바꾼 어린이와 같지 않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의 가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포기 없는 천국의 복을 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영원하고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복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낡고 오래된, 그리고 살아 있는
한상봉 이시도로
새는 아무리 높이 날아도 땅 위에 다시 내려앉는다고 했다. 무주를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처음 전북 무주 광대정이라는 산골에 자리잡을 때는 사뭇 유토피아적 환상이 나를 이끌었다. 농사짓고 살겠다고, 숲을 둘러치고 산비탈에서 채마밭을 일구고, 바람소리에 귀를 씻으며 정갈한 삶을 몸으로 감당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주(茂珠)를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 고쳐 불렀다. 주인 없는 빈 산에서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삶, 제 먹을 것 제가 지어먹고, 제 마실 물 제가 퍼서 먹는 삶, 남 속이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두는 삶을 희망했다.
이맘때쯤 장마가 지속되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산등성이 밭자락에 서서, 발 아래 흩뿌리는 비안개를 바라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 감탄했다. 산 논에 비옷 입고 물꼬 보러 가면, 때로 콧등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느끼며 그저 서 있곤 했다. 그것은 산에 사는 사람의 축복이므로…. 귀농한다고 산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러했다. 좁은 경작지와 하늘에 막연히 기대어 짓는 농사가 돈이 될 리 없었고, 한 이삼십 년 뒤에나 기대해야 할 여유로운 휴식을 어쩜 미리 당겨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 새끼처럼 적게 먹고, 언젠가 썩을 몸을 아끼지 않고, 내 안의 그늘진 숲을 맘껏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경상도 땅, 아니 아직도 신라 땅이라 불러야 옳을지 모르는 경주에 머물고 있다. 야트막한 건물이 소곳하니 들어앉은 시내를 벗어나, 불국사 앞자락 벌판에 지어놓은 저층 아파트 2층방이 우리 집이다. ‘아파트는 집이라기보다, 여러 개의 방으로 채워진 공간이겠지’ 생각한다. 그 방에서 비 맞는 토함산을 창으로 내다보며 가끔 광대정 산골을 추억한다. 이렇게 비 내리면 광대정에는 송진 냄새 가득하고, 마당에 고인 물도랑에는 송홧가루가 연둣빛으로 덮여 있었다.
문화적 고대(古代)를 회상하는 경주와 역사적 시원(始原)을 더듬는 무주는 어떤 면에서 닮아 있다. 낡고 오래된 것들과 생육번식을 반복하는 자연은 밝은 문명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이미 진작 벗어나 살지만, 또한 그것 없이는 허기(虛氣)에 시달리는 ‘무엇’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틈틈이 천 년 전에 살던 왕들의 무덤가를 헤매고, 그 시신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계곡물에서 나무 그림자에 싸여 세상의 간섭 없이 낮잠을 청한다. 이런 우리네 얼굴은 불쌍하다. 애처롭고 가엾다. 새는 아무리 높이 날아도 땅위에 내려앉아야 다시 날 수 있듯이, 사람도 그러하고 세상도 그러하다.
이수승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신다면 나는 무엇을 달라고 청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비유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온 재산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솔로몬 왕은 하느님께 바로 이 지혜를 청해서 받습니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숨겨진 지혜요, 보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손 때 묻은 인형이나 장난감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요,
어쩌다 생기는 동전 몇 푼, 과자봉지에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세상 것들을 보고 들을 만큼 성장한 후에는 더 이상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세상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현실적인 계산법에 익숙해져 내가 손해보는 짓일랑은 알아서 하지 않게 되고,
내 것, 내 이익에 관계되는 것이면 놓치지 않는 영악스러움이 몸에 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 이익, 내 것이라는 그 분명한 선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디에 가치 기준을 두고 있는지 문득 스스로에게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것처럼 한 가지 소원을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청할 수 있을지.
머리가 커진 나는 어린 시절처럼 단순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해서 이것 저것 따져보느라 선뜻 대답을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살만큼 소중한 것도 없이, 그저 남들처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니까 의미 없는 것들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한번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선택과 집중>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10년 전 쯤의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살아계실 때였습니다. 한 리서치 기관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현존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여성,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두명을 꼽으라고 했더니, 당시 1위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2위는 누구였겠습니까?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의 균형 잡히고, 인간미 넘치고, 호소력이 있는 말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세계적인 토크쇼의 여왕으로 군림해왔습니다. 지금은 큰 언론기업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기부도 많이 하면서 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행복하게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지만 어린 시절의 삶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 가족들로부터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량청소년의 길을 제대로 걸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녀의 발은 늘 맨발이었고 옷은 감자 포대를 개조한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도 친구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없다보니 바퀴벌레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가축들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이런 오프라 윈프리였는데, 지금은 전 세계인들이 존경하는 토크쇼의 여왕으로 변신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비결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기업들이 많이 강조하기도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언어에 대한 감수성, 독서에 대한 열정을 발견했습니다. 오로지 독서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자신의 비참한 인생 안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열악한 환경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그녀의 성공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성공을 위한 로드맵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1. 장점, 경쟁력, 가능성에 대한 파악
2. 우선순위 포착
3. 정확하고 간결하며 가능성있는 목표 설정
4. 모든 에너지를 투입한 전력투구
5. 옆으로 새어나가는 에너지 차단
오늘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이곳 기웃 저곳 기웃하지 말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최우선적 가치를 먼저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우선적 가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대상입니다.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참 사랑입니다.
보다 우리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고, 보다 우리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고, 보다 우리 나날을 행복하게 만드는 대상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가장 최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