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내 홍시
열흘 전 구산면 갯가로 산책을 나섰다가 난포에서 옥계를 둘러 온 적 있다. 가을이나 겨울이면 강둑이나 바닷가를 거니는 틈을 내서 들꽃이나 자연 풍광을 감상하곤 한다. 봄날은 북면이나 여항산 일대 산자락을 누비며 산나물을 뜯어오느라, 여름은 우중 틈새나 날이 무더워도 새벽에 길을 나서 근교 참나무 숲에서 영지버섯을 찾느라고 강가나 바닷가로 나가 볼 겨를이 나질 않는다.
구산 갯가로 나갔던 날 난포에서 작은 조선소를 돌아가는 울타리에는 늦게 핀 나팔꽃이 반겨주었다. 주민이나 낚시꾼들도 다니지 않은 외진 곳이라 그때 내가 지나면서 봐주지 않았다면 나팔꽃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시들어갔을 테다. 이제 서리가 내려 꽃잎은 물론 넝쿨과 잎사귀도 사그라졌지 싶다. 그날 난포 연안 갯바위에 앉아 합포만 바깥 호수 같은 쪽빛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 건너는 내가 교직 말년 3년을 보냈던 거제섬으로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겨놓고 와 감회가 새로웠다. 육지에서 섬을 연결한 다리는 연륙교이고, 섬과 섬을 잇는 다리는 연도교란 사실은 거기 가서 알았다. 거제섬에서 칠천도로 칠천대교가 놓여져 있었고, 칠천도에 딸린 황덕도로도 황덕교가 놓여 있었다. 무인도 수틀뱅이섬은 수야방도로 불렀는데 거기에는 수야방교가 놓여 있었다.
난포 바깥 갯바위에 앉았더니 건너편 수야방도에서 통영 견내량으로 떨어지는 석양과 낙조를 바라봤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서너 해 전 지나간 날을 회상해 보다가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봉화산 산허리 옥계로 가는 임도를 걸었다. 길섶에는 연보라 쑥부쟁이와 노란 이고들빼기가 늦가을 운치를 살려냈다. 그곳 역시 인적이 드물어 제철에 피어난 야생화들을 봐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옥계는 합포만 바깥 포구 전형적인 어촌으로 양식업 종사자도 있겠으나 고깃배로 생계를 잇는 순수 어촌이었다. 물때 맞추어 동네 어귀 산모롱이를 돌기 전 연안에서 채집하는 어패류도 있는 듯했다. 어촌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연안의 갯벌과 자갈밭이었다. 옥계 포구는 예전에 초등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마을이 컸으나 젊은 층이 없으니 학교가 문 닫은 지는 오래전이지 싶다.
내가 옥계 포구에 들렀던 날은 마을에 큰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정주형 어촌 공모 사업에서 상을 받아 외부 협찬으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과객이었던 나도 그 틈에서 점심을 잘 때웠다. 폐교를 단장한 운동장에는 간이식탁과 의자에 노인뿐인 마을 주민들을 한 자리 다 모셨더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구분 지은 좌석은 할머니 좌석이 할아버지 좌석의 곱절은 되어 보였다.
난포와 옥계 포구를 다녀온 뒤 어제는 이른 아침 마산역 광장으로 나가 서북동 산간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마산 시내를 관통해 진동 환승장을 둘러 종점 서북동에서 내릴 때 할머니의 무거운 쇼핑 카트를 안아 내려주었다. 그길로 서북산 임도를 따라 걸어 감재 고갯마루에서 건재로 달여 음용할 헛개나무를 잘라 여항산 깊숙한 마을 버드내로 내려 함안 버스를 타고 나왔다.
별천으로 불리는 버드내는 여남은 가구가 사는 산골로 당연히 노인들만 사는 동네였다. 서북산 산세가 우뚝해도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높이 자란 감나무 가지 끝에는 홍시가 다수 달려 있었다. 종점에서 읍내로 나갈 버스가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마침 할머니 두 분이 지나기에 인사를 나누었더니 반갑게 대해 주었다. 방문객이 드문 동네였으니 현지 할머니도 사람이 그리웠지 싶다.
여항 버드내를 다녀온 이튿날이다. 산골 동네 감나무에서 봤던 늦가을 홍시와 등 굽은 할머니 모습이 뚜렷해 시조를 한 수 남겼다. “삽짝 밖 가지 끝이 높기야 하지마는 / 이녁이 생각날 때 치올려 보려니까 /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리움만 쌓여요 // 마당귀 서성이면 피안에 걸어둔 듯 / 영감을 먼저 보내 따줄 이 없는 홍시 / 입안에 넣지 못하고 까치밥이 되었소” ‘버드내 홍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