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가 극찬한 정여립을 기리는 정여립공원과 정여립로가 들어섰다.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자취를 찾아서
이틀 동안 방송을 촬영하며
감회가 남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조선의 알토란 같은 지식인
천여명이 죽은 정여립 사건
족보에서도 지워진 정여립,
근현대들어 정여립 사건의 재조명에 첫 번째로 불을 지핀 사람은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최치원이 중국 유학생으로 떠날 때에 그 아비가, “10년이 되어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하여 일개 한문 절럽새오딤을 바랐을 뿐이다. 최치원이 돌아와서, “12세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중국에 들어가 28세에 신라에 금의 혼향하였더,:를 노라하여 최치원 자신도 일개 한문졸업생 됨을 남에게 자랑하였다.
사상은 한나라나 당나라에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교경전이나 불교 경전을 꿰뚫었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읽지 못하였으니, 그 사상은 조선을 가져다가 완전히 중국화 하려는 것 뿐이었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으로 백일白日을 짝하며 황화로 녹죽을 짝하는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날 뿐이었다.
이렇게 최치원을 평한 신채호는 정여립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愚見)으로 이상에 대하여 개인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느니, 이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局面)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구석에서 정통이 다 무엇하는 것이냐’고 하여 공자․주자의 역사 필법에 반대하니, 그 제자 신여성(辛汝成)등은 ‘이미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 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자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부식(扶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 같은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한 장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하고, 확장할 뿐이니, 인물 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마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버림으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을 파묻어버리고 변성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 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신채호는 위의 글을 통하여 정여립을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로 바라보면서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로 높이 평가하였고, 덧붙여 “사색 당쟁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분석할 수 없어 역사의 가장 어려운 점이 된다”고 하였고, <단재전집>에서 정여립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정죽도(여립)선생은 민중군경(民重君經)을 주장하다가 사형을 입으니……정여립은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타파하려했던 동양의 위인’이다. 그러나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 되지 못한 것은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채호 선생의 말이 들어맞아, 거의 오백여 년이 지나 전주 혁신도시에 정여립로가 들어서고, 그가 태어난 완주군 상관면에 정여립공원이 들어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 서울 한 복판에 모반자라는 이름으로 죽은 전봉준의 동상이 들어서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들어섰는데,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지금도 역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언제쯤 전주의 큰 도로에 정여립의 동상이 들어서고,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이 정여립이 꿈꾸었던 대동세상이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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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년 4월 8일, 금요일
정여립 공원
정여립로
죽도
대동계를 조직했던 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