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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져오면 되는겨?” 남산 아래 빽빽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해방촌 성당. 오전 11시 미사가 끝나자 자리에 남은 신자들은 하나 둘 씩 쌀뜨물을 담은 페트병을 꺼냈다. 이번 사순시기부터 시작한 ‘즐거운 불편 운동’의 일환으로 마련된 EM 발효액 만들기 교실이 열리는 날이다. 대부분이 40대부터 70대 사이의 여성들이지만, 뒷줄에는 할아버지 대여섯 분도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들은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은 빈손이 어색한 듯 미리 나눠준 유인물을 뒤적이며 강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EM은 유용 미생물군(Effective Micro-organisms)의 약자로, EM 원액으로 쌀뜨물을 발효시키면 악취제거와 산화방지에 효과가 있는 다용도세제가 된다. 오염을 분해하는 능력이 탁월해 세제 대신 사용한 EM 발효액을 하수구에 흘려보내기만 해도 생활하수 정화에 도움을 준다. 강사의 안내에 따라 신자들은 쌀뜨물에 넣을 EM 원액과 당밀, 설탕을 계량했다. 여성 신자들이 삼삼오오 조를 짜고 재료를 받으러 움직이는 사이 할아버지 신자들은 조용히 성당을 빠져나갔다. 대신 본당 주임 사제 이영우 신부가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이영우 신부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대신해 재료를 계량해주고 재료들이 잘 섞이도록 페트병을 거꾸로 세워 흔들었다. “신부님, 성당에서 이거를 큰 통에다 만들어서 나눠주면 좋겠어요. 호호호.” 페트병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한 어르신이 즉석에서 제안을 하자 이영우 신부가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합성세제 줄이기, 장바구니 사용하기, 걸어 다니기 평균연령이 높은 해방촌 성당에서 ‘새댁’ 세대에 속하는 최미란 씨는 “거실과 주방, 화장실에 EM 발효액 스프레이를 여러 개 두고 사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전에 EM 발효액을 접했지만 꾸준히 사용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최 씨는 사순시기동안 즐거운 불편 운동의 실천 목록을 하나하나 따라해 보면서 “내가 먼저 실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솔직히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작은 실천이라도 직접 해봐야 의식하게 되고 생각이 변화되는 것 같아요.” 해방촌 성당 여성총구역장을 맡고 있는 서영희 씨도 “즐거운 불편 운동이 환경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 씨는 장바구니를 이용한 뒤로 집안에 쌓이던 지저분한 비닐이 사라진 것이 제일 좋다면서 “앞으로도 불편하지만 즐겁게 생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해방촌 성당의 즐거운 불편 운동은 사순시기 특강과 보속의 내용을 고민하던 이영우 신부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맹주형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교육기획실장이 올린 즐거운 불편 운동 소개 글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신부는 분과별 회장단 모임에 즐거운 불편 운동을 소개했고 회장단들은 흔쾌히 이 신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에 도움을 받아 본당 교육분과장과 사무국장, 수녀, 신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방촌 성당의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작년 초부터 즐거운 불편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고척동 성당의 사례도 도움이 됐다. 해방촌 성당은 사순 시기 5주 동안 주일 미사 강론 대신 환경 전문가들을 초청해 특강을 배치하고, 봉헌 시간에는 헌금과 별도로 한 주간 실천한 즐거운 불편 목록을 작성해 봉헌하고 있다. 신자들이 실천을 봉헌한 만큼 십자가를 든 예수의 그림 조각을 하나씩 떼어내는 그림판도 성당 앞쪽 벽에 부착했다. 이영우 신부는 신자들의 실천이 모여 조각이 다 떨어지면 환하게 웃는 예수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고 귀띔했다. 이밖에 사순 시기 동안 소공동체 모임에서 즐거운 불편을 주제로 생활 나눔을 하도록 장려하고 주보 한 면에 환경과 관련된 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지난 달 정월대보름에 열린 윷놀이 대회에서는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신자들에게 휴대용 실리콘 컵을 선물하기도 했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우리시대의 십자가” 본당 차원의 환경 운동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영우 신부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지구와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우리시대가 지고 있는 또 하나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순절은 고통을 이겨내고 부활의 삶으로 나아가는 시기잖아요. 죽음의 문화와 탐욕의 문화를 넘어 생명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부활의 모습이 아닐까요?” 또한 이영우 신부는 작은 실천이 다른 피조물과 지구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키고 결국에는 생명의 소중함과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할 거라고 기대했다. 합성세제 사용하지 않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시장바구니 사용하기, 불필요한 전등 끄기 등 작지만 환경을 위한 실천에 참여하는 것이 곧 주님의 십자가를 덜어드리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삶을 사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해방촌 성당은 사순시기가 끝난 이후에도 즐거운 불편 운동을 본당 사목의 주요 내용으로 계속 이어간다. 부활 주간에는 즐거운 불편 운동 수기를 모아 강론 시간에 신자들과 실천 소감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고 사순 기간 동안 절약한 만큼 2차 헌금을 모아 어려운 이웃과 나눌 계획이다. 어린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쁨잔치에 즐거운 불편 운동과 연결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도 준비 중이다. 이영우 신부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성당 마당에서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연령대의 신자들이 모여 고추장과 된장 등 장을 만들고 싶은 원대한 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사순시기 동안 해방촌 성당은 불편한 즐거움을 맛을 알아가며 주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초록 공동체의 꿈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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