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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벨릭스 총독 앞에 세우다
행 23:23-35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31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3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행 23:23-35 / [벨릭스 총독에게 호송된 바울] 파견대장은 곧 장교 두 사람을 불러 명하였다. `오늘 밤 아홉 시에 가이사랴로 출발할 수 있도록 보병 200명을 대기시켜라. 그리고 창병 200명과 기마병 70명도 함께 데리고 가거라. 바울을 말에 태워 벨릭스 총독에게 호송할 것이다.' 25) 그러고 나서 그는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26)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을 드립니다. 27) 여기 호송되어 가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할 위험한 순간에 본인이 군사를 보내어 구출해 낸 사람입니다.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8) 그후 본인은 이 사람을 그들의 의회로 데리고 가서 그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29) 그 결과 그는 자기네 유대인들의 신앙문제로 고발당하였을 뿐 투옥을 하거나 사형에 처할 만한 죄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30) 그런데도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므로 이제 각하께 그를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또한 그를 고발하고 싶거든 앞으로는 각하 앞으로 고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31) 군인들은 명령받은 대로 그날 밤에 바울을 안디바드리까지 호송하였다. 32) 다음날 아침이 되자 거기서부터 가이사랴까지 바울을 호송하는 일을 기병들에게 맡기고 병영으로 돌아갔다. 33) 기병대는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파견대장이 보낸 편지와 함께 바울을 총독에게 넘겨주었다. 34) 총독은 편지를 다 읽고 난 다음 바울에게 어디 출신인가를 물었다. `길리기아입니다' 하고 바울이 대답하자 35) 총독은 `당신을 고소하는 자들이 온 후에 자세히 조사해 보겠소' 하고 말하고는 그리고 그는 헤롯왕의 관저 안에 있는 감옥에 바울을 감금하여두라고 명령을 내렸다.
40여 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백부장과 천부장을 통해서 그리고 470명의 군병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빼내어 가이사랴로 옮기셨습니다.
470명의 호위를 받는 바울(23-24) 천부장은 백부장 둘을 불러 매복해 있는 사람들을 피해 바울을 총독 벨릭스가 거주하는 가이사랴로 보낼 수 있도록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 그리고 창병 200명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뿐 아니라 빠른 호송을 위하여 천부장은 바울을 태울 짐승까지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고도 기이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군대를 사용하여 바울을 그의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자는 40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470명을 준비시켰습니다.
죄가 없는 바울(25-30) 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인 천부장은, 바울에게는 결박하거나 죽일 죄가 없다는 취지의 편지를 총독에게 보냅니다. 바울에 대한 고발내용이 로마 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며, 산헤드린 공회의 청문회에서 드러난 대로 단지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율법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기술했습니다. 고소를 당하기는 하였으나, 사형을 당하거나 결박할 사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미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불법과 불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불의에 우리가 영합하지 않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가이사랴로 간 바울(31-35) 바울은 로마 군인 470명의 호위를 받으며 안디바드리까지, 또 거기서부터는 기병 70명의 호위 속에 약 106km 거리를 밤새 이동하여 가이사랴로 들어옵니다. 총독은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임을 파악하고 난 후 고소인이 도착한 후에 바울의 말을 듣겠다고 약속하고 바울을 헤롯 궁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로써 사도바울은 안전한 가운데 완전히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놀랍고 오묘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 간에 교제와 사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와 사귐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집 저 집에 모여 떡을 나누면서 성도들의 사귐을 끊임없이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복음 전파와 교회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과의 사귐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혹시 성도들 간에 불화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워하고 시기하지는 않았습니까? 서로 돌아보며 사랑하며 성도간의 교제와 사귐을 다시 한번 새롭게 다져봅시다.
호크마 주석
=====23:23
밤 제 삼시에 - 현대적 시간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저녁 9시를 가리킨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의집요함과 폭력성을 익히 잘 알던 터라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을것이다. 그래서 당장 그날 밤 음모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바울을 빼돌리려 했다. 바울 한 사람을 호송하는 데 호위 병력을 무려 사백 칠십명이나 동원하는 것은 천부장이이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했던가를 말해준다. 물론 천부장의 이러한 조치가 바울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로마 시민이 자기의 관할 구역에서무고한 희생을 당하도록 방치했을 때 그 자신도 책임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아무튼 바울로서는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23:24
총독 벧릭스 - 바울을 가이사랴에 보내려 한 것은(23절), 총독이 주재하고 있는 그곳에서 바울을정식으로 재판받을 수 있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총독 벧릭스는본래 노예였으나 글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모친 안토니아(Antonia)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안토니우스 벧릭스(Antonius Felix)라고 불렀다.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역시 같은 노예였으나 그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고그의 총애를 받는 총신(寵臣)이 되기까지 하였다. 벧릭스는 그의 형제 팔라스의 도움으로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A.D. 52년에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A.D. 58년 까지 자리를 지켰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벧릭스는 잔인하고 음탕하며노예의 정신으로 왕의 권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Tacitus, History, V.P). 그의 음탕함은 결혼을 세 여자와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한 여인은 안토니아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고, 또 한 여인은 헤롯 아그립바 I세의 딸 드루실라(Drusilla)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짐승을 준비하라 -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90km 정도 되는 거리였으므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탈 것을 이용해야 했다. 여기서 '짐승'(* , 크테네)은 전쟁용 말이 아닌 일반 운송용 나귀나 말을 가리킨다.
=====23:25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 이 표현은 대략적인 내용을 적는다는 뜻으로, 누가가 루시아의 편지를 입수하여 그전체를 축자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하여 대략의 중심내용만을 기록하였음을 말해준다. 루시아가 이 편지를 벧릭스에게 쓰는 것은 로마법에 의한 절차를 보여준다. 로마법에 의하면 하급 관리가 상급자에게 어떤 사건에 대하여 보고할 때에는 서면(書面)에 기록된 진술서를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23:26
글라우디오 루시아 - 천부장의 이름이 여기서 밝혀진다. 이름의 전반부는 로마식이고 후반부는 헬라식인데, 이는 루시아가 헬라인으로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였음을 암시한다(22:28 주석참조). 각하 - 헬라어 '크라티스토스'(* )는 '강한', '고귀한'을 뜻하는'크라튀스'(* )의 최상급으로, '가장 숭고한', '지존하신'의 의미이나 이말은 본래 로마의 원로원 의원 다음 서열에 속하는 기사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문안하노이다 - 벧릭스에게 보내는 루시아의 사건 진술서는 당시의 전형적인 편지형식을 취하고 있다. (1) 발신인의 이름을 먼저 밝히고, (2) 다음에 수신인의 이름을적고, (3) 이어서 문안을 하는 말로 내용을 써나가는 형식이 그것인데, 성서 가운데히브리서와 요한 일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신들이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23:27
이 사람이...구원하여다가 - 루시아는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경우를 우려한 나머지 보고 내용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지닌 것을 안 것은 이미 바울을 체포하고 채찍질을 명한 이후였지만 보고 내용에는 이 사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21:33;22:24).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로마 당국이 바울의 로마시민권을 처음부터 존중해 주었다는 것이다(Haenchen).
=====23:28
알고자 하여 -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든 것은 단순히 사형(私刑)을 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적(公的) 차원에서 제재를 가하기 위함이었다(21:27-32). 따라서 그들은 로마 당국의 허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결박한 것은 군중들의 소요 사태를일단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21:32, 33). 만일의 사태로 인해 자신에게 불이익이 초래될지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23:29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 - 이런 일은 이미 예전에 갈리오 총독 때에도 있었던 일로 총독 갈리오는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것이라는 점을 들어 재판을 거부하였었다(18:15). 여기서도 천부장 루시아는 문제의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판별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은 율법에관한 문제일 뿐 형사 처벌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루시아가 바울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을 의미한다.
=====23:30
해하려는 간계 - 40여명의 단식 맹세자들의 음모를 가리킨다(12, 13, 20, 21절). 송사하는 사람들도...하였나이다 - 천부장이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준 때는바울을 호송하는 군인들이 안전한 지대로 빠져나간 후였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해 누가가 본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넣었다고 이해하지만(Haeanchen) 근거가 회박한 견해이다.
=====23:31
보병이...안디바드리에 이르러 - 안디바드리(Antipatris)는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사이에 있는 도시로 본래의 이름은카바르 - 사바(Kaphar-Saba)였는데, 헤롯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후 그의 부친 아티바터(Antipater)의 이름을 따서 이처럼 명명했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않는데, 학자들은 예루살렘 북서쪽 유대 구릉의 끝에 있는 현재의 라스엘-아인(Rasel-Ain)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루살렘에서 안디바드리까지가 56km 이상이라고볼 때 밤새 이 먼 거리를 로마의 보병들이 바울을 호위하여 걸었다면, 비록 밤의 기온이 선선하여 걷기에는 힘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당한 강행군(强行軍)을 한 셈이다.
=====23:32
마병으로...돌아가니라 - 바울은 안디바드리까지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추격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더이상 중무장한 군대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빠른 속도로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으므로 마병을 제외한나머지 군대는 철수하게 했다.
=====23:33
가이사랴에 들어가서...그 앞에 세우니 - 안디바드리에서 가이사랴까지의 39km를 기병들에 의해 바울은 무사히 호송되어 루시아가 보낸 편지와 함께(26-30절) 벧릭스에게 직접 인도되었다. '세우니'의 헬라어 '파레스테산'(* )은 재판정 앞에 출두시킨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이다(롬 14:10).
=====23:34
어느 영지 사람이냐 - 벧릭스는 일종의 예비 심문(preliminary interrogation)을 행하고 있다. '영지'에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르케이아'(* )는 '지배한다', '통치한다'는 뜻의'아르코'(* )에 '위에'(upon)를 뜻하는 전치사 '에피'(* )가 붙은 말로통치권이 미치는 곳이란 뜻이다. '어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아스'(* )가 '어떤 종류의' 영지, 즉 황제의 영지인지, 원로원의 영지인지를 묻는 것으로 보는견해와(Wendt, Robertson) 황제의 직할지인가 아니면 지방 총독의 속주인가를 묻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Haenchen, Bruce), 후자가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지금 그의 출신지를 묻는 이유는 바울의 출신지에 따라 재판 관할권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바울의 출신지가 지방 총독의 관할권이라면 그를 그 지역의 총독에게 보내 재판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본서 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대 제도' 참조).
=====23:35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자, 그곳은 로마의 직접 통치 지역이었으므로벧릭스는 자기가 재판을 담당하기로 결정하고서 바울을 송사하는 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한다. '헤롯 궁'은 본래 헤롯 대왕(B.C. 37~A.D. 4)이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위해 가이사랴에 크게 지은 궁전이었는데 후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 및 본영으로 사용되었다. 총독의 관저로 사용될 때의 명칭은 '브라이도리온'이다(막 15:16). 대개의 고대 궁전이 그러하듯이 헤롯 궁도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재판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지하에는 감옥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울을 이 지하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지 아니면 따로 방을 하나주어 그곳에 머무르게 하면서 감시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로마 시민이었고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이고 루시아의 편지 내용이 바울의 무죄를 암시하였으므로(29절) 벧릭스는 바울을 죄수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바울은 가벼운 구금(拘禁)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 설 교 >
담대한 믿음으로 살라
사도행전 23:22-24 / 이한규 목사 / 20200303
<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
며칠 전 인도네시아로 출장 간 57세 한국인 여성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걱정하다가 호텔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녀는 1월 22일 중국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2월 8일 아침 목에 약간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는데 특별한 조치는 없었다. 그 후 2월 16일 인도네시아로 출장 가서 5일간 불안해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사후 검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없었다. 혼자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대상 때문에 죽기보다 염려나 두려움 자체로 죽는 경우가 더 많다. 건강에 주의하되 건강 염려증에 걸리지는 말라. 바이러스 공포에 싸여 수시로 체온을 재고 목의 통증을 살피고 확진자들 동선을 좇으면 멀쩡한 사람도 두려움에 빠지기 쉽다.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감염된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거나 예민하다고 하지 말고 차분하게 괜찮은 이유를 설명해주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라. 진짜 두려워할 것을 보건 지침을 어기는 부주의다.
보건 지침만 잘 준수하면 신종 코로나도 일종의 독감으로서 노인 폐질환자한테는 위협적이지만 보통 사람은 감염되어도 거의 완치된다. 신종 코로나로 아이들이 죽는 사례가 거의 없는 것은 건강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코로나 감염 상황을 감춰 주변인을 감염시키는 것과 가짜 뉴스다. 가짜 뉴스에 빠지면 두려움이 심해지고 의존적 우울증에 걸려 이단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가짜 뉴스는 심약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난도질하는 비수가 될 수 있다. 신종 코로나에 감염되면 다 죽을 것 같은 보도도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확진자 중 사망자가 적은 편이고 사망자 중에도 평소에 기저질환 있었던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매년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신종 코로나도 독감의 일종으로서 건강하면 치료를 안 해도 대개 2주 안에 낫는다.
백신이 아직 없기에 공포 대상이 되지만 조만간 백신이 나오면 매년 찾아오는 감기에 불과하다. 토종 감기나 독감도 면역력이 약하면 죽을 수 있고 면역력이 강하면 치료 없이도 낫는다. 안 걸리면 좋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80% 정도는 일반감기 정도로 저절로 치유된다. 코로나보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심이 더 문제다. 이 유행도 또한 지나간다. 특히 하나님이 설정하신 계절 변화의 무서운 힘으로 코로나 문제는 조만간 잦아들 것이다.
예전에 화장실 주변에 모기가 크게 번성하면 아무리 모기약을 뿌리고 심지어는 석유를 하수구에 뿌려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계절 변화로 대지에 차가운 기운이 깃들면 어느 새 없어져버렸다. 그때 하나님이 변화시키는 계절의 힘을 오싹할 정도로 무섭게 체감했었다. 지구상에 추운 겨울이 있다는 것도 사실상 큰 축복이다.
사람 몸속에서 기생하는 작은 바이러스를 어떻게 죽이는가? 너무 작아서 바늘로 찔러 죽일 수도 없고 망치로 때려죽일 수도 없다. 약으로 죽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강추위가 닥치면 노출된 바이러스는 생존할 수 없어 거의 사라진다. 남극에는 바이러스 자체가 없어서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바이러스 숙주 동물도 거의 없지만 강추위로 바이러스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여름에도 생존이 힘들다.
하나님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밸런스를 좋아하신다. 그 밸런스에 맞춰 살면 비상 가능성은 커진다. 자연 활동도 하나님의 밸런스 원리가 깊이 투영되어 자연의 어느 부분이 훼손되면 곧 복원 시스템이 작동된다. 동양의 음양철학은 자연을 밸런스 있게 운행시키는 하나님의 원리를 부분적으로 인식한 철학자들이 하나님과 성경을 모른 채 발전시킨 철학이다. 하나님은 겨울이 있으면 여름도 있게 하고 따뜻한 부분이 있으면 찬 부분도 있게 하고 훼손된 부분은 곧 반작용 복원이 이뤄지게 해서 균형을 맞추신다.
지구 에너지 총량도 균형이 맞도록 여름이 덥지 않으면 겨울은 춥지 않을 때가 많고 여름이 아주 더우면 겨울은 아주 추울 때가 많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덥지 않아서 좋았지만 그때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겨울은 춥지 않겠구나.” 겨울이 따뜻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땅이 얼었다가 녹는 부분이 적어서 수분과 영양분이 촉촉이 스며든 옥토 형성이 줄어들어 농사에는 안 좋고 바이러스 박멸 가능성도 줄어들어 독감이 창궐되는 나쁜 점도 있다.
바이러스는 기생체이기에 생물체에서 떨어지면 곧 죽고 공기 전파가 안 되기에 사람 간에 2미터 이상 떨어진 야외에서는 전염 가능성이 희박하다. 또한 습기와 자외선과 강추위에 약하기에 습도가 높고 자외선이 강한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거의 사라진다. 바이러스 창궐 시기는 건조하면서 일조량이 적은 초겨울이나 초봄 시기다. 지금 코로나가 창궐해도 봄비 후 맑아진 하늘에 자외선이 넘치는 햇빛이 몇 번만 내려쬐면 신기하게 사라질 것이다.
자외선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외선은 피부를 태워 늙어 보이게 만들지만 피부가 비타민 D를 합성해 뼈를 튼튼하게 만든다. 결국 피부를 자외선에 노출시켜 피부 노화를 감수하고 강골로 만들든지 아니면 자외선을 차단해 약골을 감수하고 피부를 젊게 만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강골도 만들고 피부도 젊게 하려면 자외선에 피부를 덜 노출시키면서 뼈를 강화시키는 비타민 D가 많은 고등어 같은 생선이나 버섯을 많이 먹는 것이 좋다.
만약 지구에 여름 자외선과 겨울 강추위가 없었다면 바이러스는 훨씬 더 창궐했을 것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습도가 높고 자외선이 강한 여름이 찾아오면 계절 변화의 무서운 힘에 의해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늘 잠깐 사라지고 기회가 되면 또 찾아오기에 진짜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를 이기는 내성을 갖추는 것이다.
사람은 바이러스의 침투를 완벽히 막지 못한다. 또한 바이러스가 없는 환경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바이러스가 없는 남극의 세종 기지에 기거하는 대원들은 감기를 모르고 산다. 문제는 그곳에 오래 머무는 대원은 감기 면역력이 약해져서 그곳을 떠나면 바이러스 침투로 인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를 주의는 하되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라. 사실상 일반 독감으로도 많이 죽는다. 미국에 지난 주까지 코로나 확진자 수는 35명이었지만 2월 중순 한 주간의 독감 사망자만 1만 6천 명이었다. 우리나라는 매년 독감으로 약 5천 명이 죽고 미국은 약 8만 명이 죽는다. 매년 계절 독감으로 토착화된 독감에 비해 신종 코로나는 아직은 사망자가 훨씬 적기에 백신이 없다는 점 때문에 주의할 필요는 있지만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평생 수백 번 감기 바이러스가 침투한다. 어렸을 때 감기에 잘 걸리는 이유는 면역체계가 약하기 때문이다. 점차 크면서 면역력이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에 건강 약화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바이러스 침투를 통제하지 못해 비극적인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면역력을 갖추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결국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용서로 마음을 잘 관리하고 몸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해 면역체계를 강화시키려면 하나님의 생명 리듬에 나를 맞추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힘써 순종하라.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 리듬을 타게 하는 또 하나의 위대한 도구가 기도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리듬을 맞추면 충일한 생명력이 나타나 건강도 좋아진다. 하나님의 생명 리듬을 따라 살면서 수시로 다가오는 두려움을 이겨내라.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선용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 담대한 믿음으로 살라 >
유대 극렬분자들의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바울의 조카를 통해 들은 천부장은 백부장 둘을 불러 밤 제삼 시인 오늘날 저녁 9시에 예루살렘 서쪽으로 약 110킬로미터 떨어진 로마 총독이 있는 행정 수도 가이사랴로 갈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을 준비시켰고 바울을 태울 짐승도 준비시켰다. 바울의 호송에 병력을 470명이나 동원한 것은 자기 관할에서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유대 극력분자들에 의해 무고하게 죽으면 자신도 큰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아는 순간부터 바울을 상당히 배려했고 심지어는 두려움도 가졌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이 때로는 필요하다.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떤 나쁜 일이나 사람이나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에 나쁜 두려움은 버리라. 실패가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쁜 두려움을 버리라. 성도는 로마 시민권보다 훨씬 더 권세 있는 천국 시민권을 가졌기에 담대하게 살면 오히려 대적과 마귀가 두려워한다. 담대한 믿음은 놀라운 능력의 원천으로서 인생의 어떤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을 옮기는 겨자씨 믿음’은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믿음을 뜻하지 않고 바르고 온전한 믿음을 뜻한다. 바르고 온전한 믿음은 과시적으로 허황되게 믿음을 사용하지 않기에 실제로 “백두산아! 제주도로 가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산을 옮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산’은 인생의 어려운 장벽과 문제를 뜻한다. 바르고 온전한 믿음은 그 문제를 이기게 한다는 뜻이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문제 앞에서 좌절하지 말라. 문제가 아무리 커도 한가지만은 분명히 알라.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비틀거리거나 좌절하거나 나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백두산을 제주도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장애물을 만나도 장애를 받지 않는 사람이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믿음으로 극복해내라. 문제 해결 이전에 마음으로 그 문제를 극복하고 넘어선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이다.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도 때로는 병들어 죽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 하는 것이다. 죽을 때도 노예처럼 두려워하며 죽지 않고 담대하게 천국 소망을 품고 죽는 삶이 복된 삶이다. 늘 담대한 믿음으로 의미 있게 살면서 복된 내일과 천국을 예비하며 살라.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바울
행 23:23-35 / 신성종 목사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과는 전혀 무관한 초대교회의 상황으로 생각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언제든지 과거의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능력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주님의 제자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문제점은 과거에는 순교도 하고, 핍박도 받고 고통을 당했지만 오늘날은 아무런 희생 없이 믿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수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여 지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날도 바로 믿으려고 하면 첫째로 시간적인 희생이 따릅니다. 주일날 겨우 쉬는 데 교회에 나와야 하고, 또 와서 봉사를 하면 이런 저런 희생이 따릅니다. 어디 그냥 나옵니까? 봉헌할 물질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경제적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롬8:17절,“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딤후2:3절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부러 고난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에는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하면 더 큰 고난이 올 수도 있고 문제는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보호하시고, 때로는 권능으로 힘을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병 200명, 마병 70명, 창군 200명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총독이 움직일 때와 같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죄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공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예방키 위하여 500명에 가까운 군대로 호위했던 것입니다. 마치 왕을 보호하듯이 바울을 보호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천군천사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당시 바울을 호송한 사람들은 두 백부장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부장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마8: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큰 믿음을 이스라엘서 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했고, 십자가에 달릴 때 백부장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가 바로 고넬료 백부장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폭도들로부터 바울을 구해준 사람들이 바로 백부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바로 이런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떤 상황에 놓여도 하나님께서 가장 신실한자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구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편 17:8절에서는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교훈은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나고 나면 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오묘함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 충현교회에서 사임을 하고, 미국에 있다가 국내에 와서 YS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표를 내었는가? 하면서 저를 나무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것이 한국을 떠나기를 거절하는 저희 부부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둘째 아들은 국내에서 고칠 수 없는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 감으로 인해서 모든 병원비도 무료이고, 생활비도 미국에서 또박또박 주고, 일생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게다가 결혼을 해서 좋은 아내를 얻고, 지금은 부모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습니다. 큰 아들도 벤처를 하다가 망해서 갈 데가 없는데 우리들로 인해서 미국에 거주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저의 부부는 죽음을 준비하러 한국에 올 수 있게 되었으니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굴하지 말고, 견고하게 서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을 교훈해줍니다.
마가복음 13:9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왜 바울이 총독 앞에 섰습니까?
1. 바울이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는 재판을 받기위해서지만 실제로는 총독과 그 밖의 관원들을 영적으로 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증거하고, 저들을 영적으로 책망하기 위해서입입니다.
2. 바울의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간구했을 때 그는 죄수의 몸으로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선교사의 몸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지금의 형태로 로마에 보내기를 윈 했던 것입니다.
만약 죄수의 몸이 아니라면 어떻게 총독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 7:7-11절에서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또, 막 11:24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갔기 때문에 박해자들에게는 복음을 증거 하는 기회가 되었고, 방관자들에게는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기도가 응답될 때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었을 때에 우리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아멘? 따라서 우리는 나의 방법만을 고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우리의 생사화복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다 성공자입니다.
물론 때로는 고난이 있고, 때로는 눈물과 한숨이 있지만 지나고 나면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감사밖에는 없습니다. 고난을 두려워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귀의 고등 수법
행 23:27-35 / 이필재 목사
오늘 성경말씀을 우리가 영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는데, 문제가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극렬주의자들이 생겼습니다. 이 극렬주의자들은 바울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이 극렬주의자들의 눈동자와 주장하는 내용을 보니까 마치 바울을 찢어죽일 것 같이 생각되어서 “이거, 큰일 나겠다.” 철저하게 바울을 보호하려고 군대 470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랬더니 극렬주의자들은 매복하여 있다가 바울을 호송할 때 몰래 암살해 죽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사태가 험악해진 내용을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사람을 암살해 죽이려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지금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안 먹겠다!” 지금 바울은 재판 중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재판을 하려면 원고와 피고, 재판관이 있고,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이 있어야 그 재판이 진행되는 것인데 그 모든 과정을 다 무시하고 “죽여 버리면 끝나니까 재판이고 뭐고 떠들 것 없다! 어서 빨리 죽이자.” 이렇게 험악하게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미치광이처럼 되어버린 상황을 분석해보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고유 권한의 축복을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나가서 전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교리를 흔들어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혈통된 후손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왜 이방 사람들에게 주었느냐? 그리고 네가 에베소 이방사람 드로비모를 감히 성전에 들고 들어오지 않았느냐? 넌 죽어라!” 이렇게 이방인에 대한 시기 질투가 이렇게 고약하고 심술 맞게 살인극이 벌어질 만큼의 문제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한번 여기에 비추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의 고등 수칙!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것이면 끝납니다.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점잖고 경건하게 기도 많이 하고 욕심 없고 조용히 사는 훌륭한 신앙인도 시기와 질투 문제에 부딪히면 정신없어집니다.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이것은 극단적 살인으로 죽여야 되는 것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시기와 질투는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는 마귀의 고등 수칙입니다. 이 시기와 질투심이 있게 하는 것은 철저한 마귀의 수법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아주 비극적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LA에서 꽤 잘 나가는, 교인도 2,000명이나 되는 교회로 그 교회 목사님이 아마 저희 갈보리교회에 와서 여러 번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이렇게 목사님의 은퇴와 더불어서 교회가 시험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 목사님이 오셨는데 교인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싸우기를 시작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권위가 다 없어집니다. 오직 이겨야 되는 그 한 가지만 남습니다. 이 시기와 질투심은 주일날 예배드리다 말고 험악하게 싸우는 중에 부목사님 한분이 어떻게 말릴까 하고 앞에 나가서 쳐다보다가 갑자기 교인들의 눈동자와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시고 ‘어휴, 이게 뭐야?’ 쇼크를 받으셔서 40대 초반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소식을 제가 어제 들었습니다. 지금 바울 죽이기 작전에 나선 자리가 이렇게 된 겁니다. 이런 거 저런 거 전혀 생각이 안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오직 내 마음 속에 일어난 증오와 복수심, 이것이 마귀의 고등 수칙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정신이 없어집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우리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운 마귀의 역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을 말씀드리면, 어느 교회나 여신도가 더 많지 않습니까? 우리 갈보리교회는 남성도가 많아서 거의 반반이라고 생각되는데, 지금까지 집회하러 나간 교회들을 보면 4분의 3정도는 언제나 여신도들이고 4분의 1정도가 남신도입니다. 유일하게 남자가 많은 교회가 군인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우리가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 교회에 여신도가 많으니까 교회 지도급 인사도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여신도들을 위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균형이 맞고 남자들이 알지 못하는 여인들의 신앙적 부분을 잘 알아서 정보를 줌으로 목회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진국의 교회들은 거의 다 여성 지도자를 50퍼센트 이상 세웁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 교회는 없지만 장로를 세워야 한다면 여성을 반드시 장로로 세워야 됩니다. 필수적으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있던 PCUSA 총회는 총회장 선거에 여자가 나오면 거의 다 당선이 됩니다. 안 나와서 그렇지 나오기만 하면 당선됩니다. 그래서 흑인 여자가 나와도 당선이 되고 백인 여자가 나와도 남보다 훨씬 표를 많이 얻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수천 명 모이는 한인교회는 여자들이 거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여성 지도자를 세우는 것에는 인색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노회가 명령을 합니다. “너희 교회는 성차별이냐?” “성차별 하는 것 없다.” “없다니? 여자가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여성 장로를 안 세우느냐? 이것이 성차별이 아니고 뭐냐?” 그러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여자 장로감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핑계를 댑니다. “그래?” 그러면 노회장 미국 목사는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네 아내를 장로로 세워라.” 그래서 실제로 목사 아내가 장로가 된 분이 계십니다. “아니면 네 딸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성 지도자를 교회에서 세워라. 아니, 목사 사모 정도라면 충분히 장로할 수 있다. 왜 안 세우느냐? 그렇지 않으면 성차별이다.” 그래서 이것부터 물어봅니다. “교회 교인이 몇 명이냐?” “천명이다.” “남자 장로가 몇 명이고 여자 장로가 몇 명이냐?” 그래서 제가 목회했던 교회도 이 문제를 지적을 받아서 여자 장로를 세우기 위해 그 작업을 제가 해 나갔는데,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주 지끈지끈 아픕니다. 여자 장로를 세운다고 했더니 끝도 없이 찾아오고 전화가 오는데 “목사님, 누구를 시키실 겁니까?” “아니, 내가 시키는 게 아니고 교인 총회에서 뽑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그래도 목사님, 입김이 있잖아요?” 아니, 그러면 입김이 없으면 숨 막혀 나보고 죽으란 말입니까? 여성 장로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출이 되었다고 금방 되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 이상 수련 과정을 거쳐서 그 다음에 장립식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겪은 일이 소설 같습니다. 뽑힌 장로에 대한 비난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 여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바람둥이였다”라는 둥 못 견딜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집단으로 “여자가 장로가 되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말씀하시기에 “그러면 할 수 없다. 당신은 PCUSA에서 나가라! PCUSA에서는 오래전에 이 문제를 해결했고 성서적으로 이미 다 정리했다. 당신은 PCUSA 교단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도 누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을 못 견디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고등 수책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도를 없애자고 제가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 교회에 지도급 장로 제도를 없애는 것이 교회에 훨씬 유익하고 하나님 기뻐하시겠다.” 여신도들 모아놓고 “여러분! 대한민국의 여권 신장은 여인들이 망칩니다. 만약 극렬하게 반대하는 당신이 여기 장로가 되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할 수 있지.”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제가 겪은 일은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정착이 되어서 그야말로 24살짜리 여자 장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거, 장로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누구든지 “OK!” 하면하고, 또 2, 3년 지나면 그만 두고 또 다른 사람이 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유대인들의 이방인들에 대한 시기, 질투가 “바울을 찢어 죽여야 돼!”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떤 이상한 일을 불러왔느냐 하면 보통 죄수를 호송하는 간수들은 죄수가 도망갈까 봐 신경을 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라는 죄수는 가만히 태연하게 있으면서 절대 도망을 안가고 죄수를 못살게 구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되어 한명 호송하는데 470명이 동원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죄수를 오히려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의 판단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죄도 없는데 피살된다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돌아오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동원해 바울 보호에 나서는 것입니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식민지로 그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가이사랴입니다. 그곳에 유대를 통치하는 로마의 총독 관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잘못하면 로마와 유대 간에 어떤 정치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총독 재판에 회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람들이 없는 밤을 틈타 안전하게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호송하는 비밀 죄수 호송 작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뀌어서 벨릭스라는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는 해변 도시로 옛날에는 서로마라고 불리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그 항구를 통해서 오고 가기 때문에 편리상 그곳에 총독 관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벨릭스 총독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상을 잠깐 봐야 합니다. 안토니우스 벨릭스라고 하는 사람으로 본래는 노예 출신입니다. 팔락스라고 하는 형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처세술에 아주 능해서 네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락스 형의 은혜로 말미암아 노예였던 사람이 자유인이 되었고, 급기야 지방 장관까지 되어 유대 나라의 총독까지 오게 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사마리아 총독으로 와서 2년을 지냈고 유대에서 5년째 총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형을 닮아 처세에 매우 밝고 출세에 필요한 주변을 만드는 기술과 지혜에 아주 민감합니다.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알려지지 않았고 두 번째 부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클레오파트라의 손녀를 데리고 사니까 유명세를 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한국 사람들의 귀에 까지 익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여자를 데리고 사는 사람이 유대 나라 온 후에는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유대 여자를 데리고 삽니다.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맏딸 두루실라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래서 9년 동안이나 총독 자리를 유지하고 처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이 총독은 ‘이 바울도 내가 잘 이용하면 무엇을 얻을까?’라고 머리를 쓰는 게 나옵니다.
이제 사건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바울이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백부장, 천부장의 군대 470명을 동원해 밤잠도 자지 않고 비밀 호송 작전을 하는데 목적지는 총독에게 보내는 겁니다. 바울 선교사 한명 때문에 총독까지 동원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영적 관찰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 앞에서 23장 11절에 보면 환상 중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부르기 위해 벌써 작정하시고 이미 환상으로 약속을 하시고 그 작업을 하고 계신 겁니다.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위해 천부장, 백부장의 군대를 동원하고 계십니다. 후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빌립보서 1장 12절에 말했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군대가 동원되고 자기가 감옥에 갇히고 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이다.” 이제 바울은 신변의 보장을 받으면서 총독에게 가게 됩니다. 31~32절을 읽어보면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 가니라” 안전하게 호송해줍니다. 33절에 보면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라고 말했습니다. 총독 앞에까지 무사히 갔습니다. 결국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40명의 결사대는 그 후로 굶어죽었는지 살았는지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영적 관찰을 해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 택한 자의 길은 무엇인가?’ 찬송가 38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그 다음에는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하나님이 다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자는 일거일독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움직이는데 바울 주변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자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애를 보면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누구나 다 있었습니다. ‘아! 그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렇게 곤고한 지경에 내버려 두셨는가?’ 나는 그것이 나의 손해라고 생각되고 다소 원망스러운 감도, 그리고 한으로 남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했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지혜로 그렇게 해야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에 나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손길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다윗은 유대나라를 지키는데 공헌한 일등 공신입니다. 또한 그의 믿음은 누구보다도 투철했는데 그렇게 큰일을 한 다음에 13년 동안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쫓겨 다녔습니다. 거지가 되어 산속을 헤매어 피해 다니고, 사울의 정예 부대 3,000명이 얼마나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 나섰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둘람 동굴 사망의 음침한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그곳에 숨어있으면서 배도 얼마나 고팠겠습니까?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틈틈이 밥을 얻어다 주면 동굴 속에서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해서 제사장 85명을 끌어다가 먹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 속에서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한 달, 두 달이 아닌 13년 동안 쫓겨 다니면서 험악한 생활을 살았던 그 시간에 다윗이 지은 시가 무엇입니까?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이때에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이 순간에도 안위하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훈련된 다윗이기 때문에 히브리 민족사에 가장 빛나는 40년 통치를 했고, 그 다음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솔로몬이 또 40년 통치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다윗, 솔로몬 시대와 같이 될 때가 이때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민족사에 가장 빛이 나던 때가 언제이냐 하면 다윗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의 깃발 기억나십니까? 하얀 바탕에 파란 색깔로 별 하나를 그린 것이 이스라엘 깃발입니다. 그게 무슨 별입니까?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과 같이 이 나라가 영원히, 영원히 빛나라!” 그런 뜻입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궁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우리 상식으로 죄수된 사람이 어떻게 총독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왕궁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하나님이 로마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보호하시는 겁니다. 누구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이때는 바울의 생명을 보호해야 되니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로마에 들어가서 로마를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역사가 온 세상에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로마에 뭐가 있습니까? 교황청이 자리 잡고 바티칸이라는 세계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베네딕트가 한마디 하면 금방 온 세상에 전파되고, 우리나라에도 “한국에 추기경 한 자리 더 주겠다.” 그 사람이 말하니까 하나 생기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도 로마 바티칸 광장에 가보면 바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한쪽에는 베드로, 한쪽에는 바울! 성지순례를 가시면 베드로와 바울이 언제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손에는 언제나 칼이 있습니다. 성령의 검입니다. “이만큼 성령의 검을 이룬 사람이 없다.” 이런 뜻이고, 베드로의 손에는 열쇠가 주어져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그것을 보시고 바울과 베드로를 구분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한번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더듬어 보세요. 한이 맺혔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한이 되어서 괴로워했지만 결국 그 수련을 통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시면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을까? 나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이것은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때는 네가 나서라.” 목적이 있어서 나를 쓰실 하나님의 계획이 남아있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서 오늘 이 자리에 우리를 세우신 겁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안에서 만사가 형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승리 아래서 이렇게 3·1 예배를 드리오니 오늘 말씀에 나타난 바울을 행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영적으로 저희들이 잘 깨닫고 나의 생애도 하나님의 크신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관찰과 보호를 받으면서 쓰임받기 위해서 오늘에 이르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여 주시고 주님이 쓰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주시고 나의 것을 써주옵소서.’ 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과 역사가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바울에 대한 더불로의 고발
행 23:33-24:9 / 김영규 목사
벨릭스가 일차 법정을 열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로 이송되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우선 바울이 어디 출신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행23:33-35) 당시 로마 제국은 여러 종류의 식민지들이 있었습니다. 황제 관할, 원로원 관할의 영토가 있었고, 직할 식민지도 있었고, 세금만 거둬가는 식민지도 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출신 지역을 물은 것은 자기가 직접 취급할 사안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이었습니다. 길리기아는 황제 영지이고 수리아 관할이었기 때문에 벨릭스 총독의 관할 지역입니다. 총독은 이 사건을 자신이 다루기로 결정하고, 바울을 헤롯궁에 가두라고 지시합니다. 헤롯궁은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에 건설했던 왕궁으로 당시에는 총독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장소를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했는데(막15:16), 총독관저(the praetorium)란 뜻입니다. 총독 관저는 바로 재판정으로 사용되었고, 대개 이런 건물의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총독부 건물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일종의 혜택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고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관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은지 닷새 후에 재판이 열렸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습니다. 고소자의 대표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공회를 대표하여 몇 명의 장로들과 변호사를 대동했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24:1) 변호사를 데리고 온 것이 특이합니다. 말 잘하는 유대인들이 왜 굳이 변호사를 선임했을까요? 특히 아나니아는 유대 최고 법정인 산혜드린의 의장입니다. 말하자면 법을 다루는 최고의 판사입니다. 그런데 왜 변호사를 선임했을까요? 당시 바울을 심문하는 법정이 로마 법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식의 변론에 밝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법정에 고소하는 이유는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법정이 주력하는 것은 정의의 문제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리적인 공방입니다. 특히 민사 소송의 대부분은 서로 이기기 위해 벌이는 재판입니다. 이런 재판은 정의보다는 이기기 위한 모든 수단이 동원됩니다. 유대인들이 굳이 로마 변호사를 선임한 것은 그 재판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더둘로의 아첨의 말
변호사는 더둘로(터툴루스)란 사람입니다. 터툴루스란 이름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더둘로가 유대인을 위해 변론하게 된 것은 그가 유대인 출신으로 로마법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둘로의 변론을 봅시다.
우선 그는 변론의 절반을 재판장에게 아첨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24:2-4)요약하면 이런 얘깁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벨릭스 때문에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벨릭스가 선견(provnoia : providence)이 있어 잘 다스렸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유대 사회가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유대인들은 항상 벨렉스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둘로의 아첨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입니다.
벨릭스에 대해서 앞서 말씀드렸지만 벨릭스는 노예에서 돈으로 자유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형이었던 팔라스 역시 안토니아 왕비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로,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벨릭스는 세 명의 부인을 뒀는데, 그 중에 첫째는 안토니와 클레오프트라의 손녀였고, 셋째 부인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 드루실라였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 요세푸스는 다 같이 그를 최악의 총독으로 꼽고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벨릭스를 가리켜, “노예 근성으로 왕권을 휘두른 자”라고 요약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유대인들은 환성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단지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 아첨하고, 그것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이 비겁하고 가소롭습니다.
더둘로는 한 마디 더 아첨을 합니다. 변론을 길게 하여 조금이라도 총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짧게 변론을 하겠으니, 널리 관용하여 들어달라고 합니다. 형편없는 아첨이기는 하지만 당시 변호사로써는 상당히 유능한 발언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더둘로의 발언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처세를 위한 어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게 유익하다면 무슨 말이든지 다 합니다. 상대가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입에 발린 말을 합니다. 성경은 아첨에 대해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5:9)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2-3)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잠26:28)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잠29:5) 아첨보다는 진실한 말을 합시다. 우리 시대에 정말 듣고 싶은 말은 유창한 말, 유식한 말, 똑똑한 말이 아닙니다. 진실된 말, 진심이 담긴 말, 중심이 실려 있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어법입니다.
세 가지 왜곡
더둘로가 고발한 바울의 범죄는 세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다 당시 로마 법에 위반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유대인의 종교적인 문제를 어떻게 하든지 로마 법으로 얽어 매려는 억지 논리에 불과합니다. 더둘로는 바울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왜곡했습니다.
1. 바울을 천하의 유대인들에게 소요를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자라고 고발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24:5) 사회적 소요는 로마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문제였습니다. 벨릭스 자신도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애굽인들의 반란이나, 시카리라고 하는 도적떼를 진압한 경력이 있습니다. 더둘로는 이런 점을 교묘히 엮어서 바울을 사회적 소요를 일으킨 자로 고발합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울이 아니라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은 단지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누구를 선동하여 유대인을 반대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살아나셨다는 점을 알렸을 뿐입니다.
한국 사회도 보면 언제부터인가 복음 전도를 교묘하게 막으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전도 활동을 종교 편향이란 이름으로 가로막습니다. 창군 때부터 있었던 군 선교 활동을 비롯해서, 경찰 선교 활동, 학원 선교 활동, 직장 선교 활동 등등.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던 거의 모든 선교 활동이 각종의 명목으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하면서 전도 활동은 종교 갈등이란 명목으로 제한을 합니다.
복음전도를 사회적 문제로 삼으려는 세력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 해서 복음 전도를 막아왔습니다. 북한 내에는 명목상 교회, 전시용 교회는 있어도 진정한 교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위에 김일성이 있는 것이 북한입니다. 지금도 김일성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대한민국의 교회들을 견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북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한 요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휘젓고 다니면서 모든 기사마다 교회를 비방하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비리를 고발하는 척 하면서 각종의 루머와 악평을 일삼습니다. 반교회적인 사회적 여론을 조성합니다. 이런 작용을 한 결과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로 인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나쁜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에서 교회는 큰 기여를 했습니다. 교육, 의료, 문화, 한글 보존, 여성의 지위 향상, 사회 복지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교육과, 사회 복지에서 기독교가 담당하는 몫은 대단합니다. 태안반도에 기름이 유출되었을 때 다녀간 사람의 절반이 교회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악평하여 모든 교회가 쓸모 없는 존재인양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다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복음 전도에 대한 끝없는 왜곡의 결과입니다.
2. 복음에 대한 왜곡입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24:5) 이단(ai{resi")이란 말은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 같은 종파(sect), 혹은 학파(school)란 의미의 말입니다. 나중에 이 말은 어떤 분당이나 분파, 나아가서는 이단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인들이 이 말을 쓴 것은 정통파 유대교와는 상당히 다른 분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이단이란 바로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자신에게 이 이름을 붙였지만 나중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나사렛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한 것은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후로 줄곧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대로 메시아가 나타나니까 이단자라고 배척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오신 분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십니다. 성경대로 동정녀에게서 나셨습니다. 성경대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성경대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입니다. 성경대로 승천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모든 정죄와 심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 자녀로 인정해 주십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왜곡합니다. “예수에 대한 열 가지 의혹” “예수는 과연 역사적 인물인가?” “예수는 불제자였다” 등등. 온갖 루머를 퍼뜨려 예수 그리스도를 비하하고 왜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마다 지옥의 파멸에서 구원하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십니다.
3. 성전에 대한 왜곡입니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24:6)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고발했습니다. 이렇게 고발한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의 금지 구역에 끌어들였다는 루머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인 일이 전혀 없습니다. 군중들이 루머를 듣고 흥분했을 뿐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부화뇌동 한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면서도 같은 죄목을 씌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막15:29)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눅23:1-2) 성전을 모독했다! 백성을 미혹했다! 가이사를 배반하게 했다! 자칭 왕이라 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문제를 교묘하게 로마 법에 저촉한 죄로 각색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 때문에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위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면 로마 군에 의해 돌 하나 남김없이 다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건물, 보이는 교회 재산 너무 위하지 마세요. 그 마음으로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위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동조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목청을 높여 환영했습니다. 어떤 사본에 보면 6-8절에 이런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율법에 의하여 심판하려 하였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가고 고소하는 자들은 당신에게 오도록 명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좀더 유력한 사본들에는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도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구절이 본문에 들어 있다면, 다음 구절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24:7-9) 여기서 “그를 심문하시면” 할 때에, “그”란 천부장 루시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더둘로의 변론은 유대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만족해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가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루하루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참고 인내합니다. 때로는 병들어도, 재산을 잃어도, 모욕을 당해도 예수님 때문에 이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방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는 불신자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합니다. 왜곡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비난합니다. 때로는 종교의 이름으로, 철학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반박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걷는 길입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담대하세요.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8-11)
당신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나요?
유민용목사 / 행 23:23-35
지구 건너편 전쟁의 바람이 불고 있어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일은 이 시대의 큰 슬픔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의 생명의 가치가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될 때에 인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은 부정적 감정들로 인해 인간의 영혼을 빈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외에도 로마 총독과 천부장, 로마의 군사들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로마사를 다시 펼쳐보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로마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기원전 29년은 로마사에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때입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공공연히 독재를 행했고, 황제에게는 주인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라는 칭호가 성행했습니다. ‘위대한 자’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주’ 또는 주인’이라는 칭호로 격상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된 것이지요. 그의 권력은 카이사르 조차 소유해 본 적이 없는 로마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막강한 군대의 지휘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황제의 조각상이 세워지고, 그를 위한 각종 경기들이 열렸으며 법정에 계류중인 재판의 사면권과 각종 귀족들의 지위를 하사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1세기 로마 제국에는 제국을 지탱하는 ‘후원자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상위 계층의 사람이 ‘후원자’가 되어 하위계층의 ‘피후원자’를 돌보는 것인데, 얼핏 보면 약자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하층민은 후원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가 로마제국을 떠받치는 핵심 구조였습니다. 피라미드의 계급의 질서에 가두어 로마 질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로마제국의 질서안에서 사람들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부속품인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최상의 가치로 숭배 받던 것이 로마의 힘이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것을 내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이땅에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나 정치도 참된 평화를 제공할 수 없기에 세상에 참된 평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23 ○ 천부장은 즉시 백부장 두 사람을 불러 명령했다. “너희는 오늘 밤 아홉 시에 가이사랴로 출발할 수 있도록 보병 200명과 마병 70명, 그리고 창을 쓰는 병사 200명을 대기시켜라. 24 또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무사히 호송할 수 있도록 그를 태울 말도 준비하라.”
31 ○ 천부장에게서 명령을 받은 대로, 군인들은 그날 밤에 바울을 안디바드리까지 호송했다. 32 이튿날, 군인들은 바울을 호송하는 일을 마병들에게 맡기고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470명의 군사들의 보호속에서 야간 행군으로 62km 떨어진 ‘안디바드리’까지 가게 됩니다. 32절에 보면 이튿날 도착했으니까 그날밤에 400명의 병사들이 62km를 걸어 간 것입니다. 70명의 마병과 400명의 보병이 바울을 밀집 대형의 중간에 두고 보호하며 걸었을 것입니다. 초기 로마군대의 보병은 여덟줄 내지 열두줄까지 밀집 대형을 이루고 진군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병사 개개인은 긴 창을 들었고, 병사는 왼팔에 바짝 밀착시킨 방패와 투구, 몸통 갑옷과 온통 쇠로 된 정강이 받이로 자기 몸을 보호했습니다. 아마도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라면 하룻밤 만에 중무장 한 상태로 이 거리를 행군하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말을 타지 않은 채 밤새도록 진군하는 일도 고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안디바드리’에 도착했을 때 400명의 보병들은 온 길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후 말을 탄 병사 70명과 계속해서 32km 떨어진 예루살렘의 북서쪽 해안도시인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법정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내면에는 두려움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섭리를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그 밤에 들렸을 마병의 말발굽 소리는 구원역사를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심장소리처럼 들렸을 것이고, 무장한 병사들이 행군하며 나는 소리는 바울을 보호해 주시는 불말과 불병거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제국의 질서와 지휘체제 안에서 명령에 복종하는 길이지만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로마에도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주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가이사랴에 도착한 이들은 로마의 총독 벨릭스에게 그를 인계했습니다. 당시 52년에서 59년 사이에 유대지역 로마의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노예의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총독의 지위에 오르게 된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태생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신분상승을 위해 정치적 야망으로 살았던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벨릭스의 생애를 보면, 그는 공주의 신분이던 여인들과 3번이나 결혼을 했으며,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던 야심찬 인물로 소개가 됩니다. 교활하고 속임수가 가득한 인물입니다. 당시 총독의 자리는 정치, 군사, 사법의 모든 통치권으로 관할하는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 지역의 총독들을 황제가 직접 임명했으니 로마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 누구였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천부장의 이름도 언급됩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인데 앞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큰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사고 나서, 본래 이름 루시아 앞에 로마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천부장이 총독에게 쓴 서면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해줍니다.
26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을 드립니다. 27 제가 보내는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제가 군인들을 보내어 구출해 냈습니다.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알고서 구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21장을 보면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바울이 이전에도 소요를 일으켜 자객 4천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 사람인 줄 착각 했습니다.(21:38) 그래서 천부장은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해서 끌고 가서 채찍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대인들의 소요를 그치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바울은 스스로 로마 사람임을 밝힘으로써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게 했습니다. 따라서 천부장이 로마 사람인 줄 알고 구출해 내었다고 쓴 편지의 내용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흠은 은폐하고 로마인을 보호했다는 공로만을 인정받기 위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의 두번째 내용을 보면,
28 “저는 유대인들이 왜 이 사람을 고발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그를 유대인의 공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결박한 것은 소란이 벌어진 연유를 알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의 소요로 인해서 자신에게 초래될 불이익을 염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벨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마치 온 마음을 다 쏟아서 사태의 진실을 철저히 파악하려고 공정한 노력을 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제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의인인 채 가장해서 출세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던 사람입니다.
편지의 세번째 내용을 보면,
29 그 결과, 저는 그가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를 감옥에 가두거나 혹은 사형을 시킬 만한 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30 그런데도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어, 곧바로 그를 각하께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한 자들에게도 앞으로는 그에 대한 사건을 각하 앞에 제소하도록 일러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 당했지만 바울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쓴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부장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바울을 석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일어날 유대인들의 소요를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를 로마 총독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470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가이사랴에 바울을 보낸 것입니다. 결국 천부장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일로 사용하십니다. 이로 인해 바울을 죽음의 위협에서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천부장이 쓴 29절의 상소문의 기록으로 인해 바울은 이후에 받게 될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에 서게 되는 3차례의 재판에서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때론 악인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과 헛된 욕망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한 나라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결수 신분으로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판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대로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의 일생은 들풀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원을 노래하는 인생이 얼마나 존귀한 삶인가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에 다른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있고, 부족해도 인생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세상의 끝이 올때에는 사람들이 돈과 쾌락을 사랑하고 난폭하고 무정하고 절제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마음안에 있는 인간의 죄성, 절제하지 못하는 자기욕망, 쉬고 있어도 알수 없는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는 평안은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1세기 로마가 제국의 힘을 의지했다면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시며 부활하셨습니다. 2천년 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펼치셨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셨고, 확장 시켜 나가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우리는 소비사회를 살아가며 여전히 선택의 문제 앞에서 생각이 충돌합니다. 소비사회속에서 마음의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순간 문질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상품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슬로우패션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이 해시태그는 저가로 만들어 얼마 안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 의류산업에 대항하여 나온 새로운 운동입니다. 패스트 패션에서는 옷이 점포에 들어오자마자 곧 유행이 지나가 버려 어떤 브랜드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상품을 그대로 폐기합니다. 슬로우 패션 운동은 사람들이 천천히,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권합니다. 항상 최신 유행을 따라가려는 강박감에 이끌리는 대신, 몇 벌을 사더라도 오래 입을 수 있는 질 좋고 윤리적으로 근거가 있는 품목들을 사라고 권장합니다.” 신앙은 ‘패스트 패션’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서서히 변화시키시고, 점진적으로 이루어 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믿음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그분의 뜻을 지속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앞에 서는 일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눈을 피해 살아 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천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린 결과 놀라운 결실을 삼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아픔과 고통,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있느냐고 질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6:9,10)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어느 소속의 사람인지 묻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지만 그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편지하기를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던 삶에서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도록 지음 받는 존재라고 편지합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 3:12)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거룩한 사람이며, 셋째는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됩니다. 소속이 변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됨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고 거룩한자로 사랑받은 자는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과 믿음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정진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한주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은혜가 삶을 감싸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 행 23:25~35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해서 역사하실 때가 많습니다. 미국 시민권자인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국 시민권을 받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더 어려워졌다고 하고 또 신청비용도 이전에 비하면 아주 비싸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마 지금까지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 중에서 저처럼 신비스럽게 시민권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시 신학생이던 저는 제가 다니던 학교와 자매결연이 되어 있는 한국의 신학대학원으로 가을학기부터 1년간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 공부하러 나가려면 시민권을 받고 나가는 게 좋다고 하여, 당시 저는 이민 온 지 5년이 지나서 시민권을 신청해둔 상태였는데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8월 말에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봄 학기가 끝나는 5월 초가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학기 후에 남은 학생들끼리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저보다 한 학년 위인 미국인 남학생의 약혼녀가 있었는데, 이전에도 학교에 가끔 방문을 오다가 그날도 와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가야 하는데 시민권 신청했지만 아무 연락이 없고, 곧 한국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약혼녀 자매가 마침 자기 오빠의 와이프(올케 언니)가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있는 이민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 번 알아봐줄까?” 하고 물어봐서 저는 이게 웬 일이냐 하며 그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안 이민국에서 전혀 소식이 없었는데 바로 며칠 후 그분에게서 전화가 와서 이민국 인터뷰 날짜도 잡아주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8월 초였습니다.
약속된 날이 되어 제가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정부 건물에 있는 사무실로 갔더니, 딱 양복 입은 남자 두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조금 후 선서하라고 하고 악수를 건네면서 ‘축하한다. 너는 이제 미국 시민이 됐다.’라고 해주었습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는 딱 저 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로 시민권을 주겠다고 사진 가져온 것을 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날 사진을 가져오라고 해서 일어나자마자 부스스한 모습에 머리도 안 깎아서 장발인 채로 찍어서 가져갔는데, 그 사진이 지금까지도 제 시민권 증서에 붙어 있습니다. 8월 말에 한국으로 나가야 했는데 8월 2일에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마침 제가 살던 그곳에는 이민국도 있었고 여권국도 있었고 한국 영사관도 있어서, 여권도 내고 비자도 받는 등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8월 말에 한국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인터뷰한 두 사람이 저 한테 물어보기를 ‘너, 한국에 군대 간다며?’라고 해서 저는 ‘군대 아닌데? 교환학생인데?’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군대 가는 줄 알고 우리가 빨리 해준 건데?’ ‘군대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여간에 축하한다. 잘 가라!’라고 했습니다. 저처럼 신기하게 시민권 받으신 분은 여기 안 계실 겁니다. 만약 제가 영주권으로 나갔으면 결혼하고 초청하는 데에도 몇 년 걸릴 수 있었는데, 제가 시민권자가 된 덕분에 몇 달 안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후 공부하고 사역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고 우연 같지만, 어떻게 우연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겠습니까? 오래 전 영국국교회 대주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를 하면 우연한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그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해주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지금도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 바로 바울에게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1. 천부장이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 (25~30절)
우리가 지난번 본문에서 본 것처럼, 바울의 조카로부터 유대인 암살단이 바울을 암살하려 한다는 음모를 천부장이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바울의 조카에게 전해진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높은 천부장 앞에까지 가서 보고한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중간에 막았으면 못 가는 건데 술술 풀렸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날 밤 9시에 예루살렘에서 약 60마일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극비리에 이송하기로 결정합니다. 거기 그냥 있었을 수도 있고 다음 날 유대인들이 보자고 한 곳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그 한밤중에 그런 결정을 내리고 바로 이송합니다. 그리고 백부장들에게 명령하여 그것도 중무장한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등 총 470명이나 되는 로마 정예 군사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이송합니다.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천부장이 바울이라는 미결수 한 사람을 위해 그 한밤중에 무려 470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고, 또 미결수에게 타고 갈 짐승(말)까지 제공했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천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편지를 써서 군인 편에 보내게 됩니다.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5-26절)
천부장은 바울을 호송하는 군인들 편에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Felix)는 주후(AD) 52년부터 59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그의 형 팔라스(Pallas) 덕분이었는데, 이들은 원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벨릭스가 노예 출신으로 총독까지 된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팔라스는 먼저 글라우디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고, 그 후에는 네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동생 벨릭스도 출세하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아주 무자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노예 출신으로 그렇게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니까, 그 중간에 삶이 얼마나 힘들고 험난했겠습니까? 그 치열한 로마제국의 권력 암투 속에서 살아남아 높은 데까지 올라갔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총독 벨릭스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한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글라우디오(Claudius)는 로마식 이름이고, 루시아(Lysias)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천부장은 22장 28절에서 바울과 대화하는 가운데, ‘나는 돈을 많이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하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원래 헬라(그리스) 사람이었던 루시아가 로마제국의 군인이 된 다음에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돈을 많이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원래 이름인 루시아 앞에 로마식(라틴어) 이름이자 당시 황제 이름인 글라우디오를 붙인 것으로 보아, 황제와 연관되어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을 지닌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의 편지는 일종의 서면 보고서인데, 이것을 통해 그가 출세지향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로마 사람이 아니니까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 얼마나 많은 애를 썼겠습니까? 출세지향적인 사람은 평소에는 괜찮은데, 결정적일 때 진실하지 못하고, 자기 야망 때문에 허세와 과장과 자기포장과 과시와 거짓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에게 보여준 호의를 보면, 이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의외로 신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아주 진실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편지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유대인들에 의해 죽게 된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자기가 먼저 알고 군사를 동원하여 구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7절)
이것이 사실입니까? 거짓말입니다. 물론 반은 사실입니다.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던 루시아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돌로 치고 때려죽이려 하는지 사실을 파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바울이 4천 명의 칼잡이를 동원하여 소요를 일으켰던 이집트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부하들을 시켜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한 다음 요새로 끌고 가 채찍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채찍질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줄 끝에 짐승 뼛조각이나 쇳조각이 달려 있어서 한 대만 맞아도 살이 찢어지고 파이고 몸에 박히는 공포의 채찍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채찍질을 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죄수인지 뭔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죄도 확정되지 않은 로마 시민을 함부로 채찍질할 수 있느냐는 바울의 항의를 백부장에게서 전해 듣고서야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천부장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을 재판절차도 없이 쇠사슬로 결박하고 채찍질하려 한 것을 만약 바울이 조금이라도 문제 삼게 되면, 천부장은 더 이상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바울이 천부장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 그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울에게 더 호의를 베풀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천부장은 로마 시민인 바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을 자기가 먼저 알고 달려가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 시민인 바울을 구해냈다는 식으로 거짓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나서 군대를 동원하여 구해낸 것이 아니라, 일단 구해놓고 채찍질 하려다가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멈추었던 것인데, 살짝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총독 벨릭스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봐달라고 과시하며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은,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고발하는지 알기 위해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해 보았더니, 그들의 율법에 관한 문제일 뿐이었고 로마제국의 법에 위반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28-29절)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천부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예루살렘의 치안 책임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그가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권한으로 바울을 무죄 석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가 풀어준 로마 시민 바울이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서 유대인 암살단원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아무도 모르게 바울을 자기 관할지역(예루살렘) 밖으로 호송해주고 내보내어 자기 길을 가도록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인 470명을 동원하면서까지 바울을 한밤중에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냥 풀어주면 되는 것을 왜 이렇게 470명이나 동원해서 6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로 가게 합니까?
로마 시민인 바울의 케이스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가 비상합니다. 건수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려는 데에는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지금 로마 시민인 바울이 걸렸으니, 로마 시민에 대한 재판권을 지닌 총독에게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중에도 평소에 참 인격도 좋고 착하고 부드럽고 합리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 믿는 사람들보다 인격이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특히 자기의 이익이 걸린 순간에는 살짝 바뀌거나 돌변하거나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바울에 대한 암살 모의가 알려져서 바울을 총독에게 이송하며 바울의 고발자들에게도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도록 자기가 말해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30절)
이것도 반만 사실입니다. 출세지향적인 사람은 항상 정확한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 살짝 틀어서 말합니다. 그는 바울의 조카로부터 유대인들의 바울 암살 계획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바울을 가이사랴로 이송시키게 됩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암살단원들에게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몰래 한밤중에 이송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이 총독에게 이 편지를 쓰던 그 시간은 아직 바울을 데리고 떠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떠나는 군인 편에 편지를 보내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바울이 아직 여기 있고, 바울을 고발한 사람들이 아직 그러한 천부장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로 다 자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천부장은 바울의 고발자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시간 전에 바울을 총독 앞에서 고소해도 좋다고 자기가 이미 통보해놓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분명히 날이 밝고 나서야 이야기했을 텐데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고 이미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은 어떻게든 총독 벨릭스에게 로마 시민 바울을 통해서 잘 보여서 자신의 공을 인정받고자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자기 포장을 하여 진실이 아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사실 이것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데, 반만 진실인 편지를 보냅니다.
사실 항상 100% 거짓말은 없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100% 거짓말이라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금 하는 거짓말이 항상 문제입니다. 그런 것 역시 세상에서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성경에 안 나오니까 알 수는 없지만, 이 거짓 보고서를 보낸 천부장이 총독 벨릭스에게 잘 보여서, 그 후에 승진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을 받았을 수도 있고, 돈을 받았을 수도 있고, 높이 올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계속 잘 나가면서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몇 십 년 살다 죽었을 텐데, 허위 보고로 아무리 자기포장을 잘하고 과시하고 높아졌다 해도, 인정을 받았다 해도, 그에게 결국 돌아간 것은 고작 몇 년의 성공 후에 그저 한줌 흙이 되어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허망한 죽음뿐이었습니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벨릭스가 기껏해야 거기 7년 있었는데, 벨릭스에게 줄을 섰다가 그 사람이 떠나면서 그냥 끝났을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천부장이 얼마나 귀한 기회를 얻은 사람입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묻고는 대답도 안 듣고 그냥 나가버린 당시 유대 총독 빌라도처럼, 이 천부장도 2천 년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여겨지는 바울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한 번 만난 게 아니라 바울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바울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변증을 하는 것을 두 번이나 직접 들었습니다. 바울의 언행에 감동도 받았습니다. 바울에 대한 호감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삶을 본받거나 바울이 증거하는 주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보다는, 오히려 로마 시민인 바울이 자기에게 걸렸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끝까지 자신의 성공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과시와 자기포장과 허위로 가득 찬 어리석은 인간으로 사도행전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도 구원과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그 기회를 내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굳이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쓰면서 특히 이름까지 여기서 밝히는 것은, 1세기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아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인생이 허망하게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 기록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허세와 자기포장과 왜곡과 과장으로 나아갔을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분명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허망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고, 이것을 우리가 꼭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가끔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할 때는 있겠지만, 이렇게 의도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하여 진실을 살짝 틀거나, 사실은 사실인데 반만 사실이거나, 순서를 바꾸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다른 삶,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호송되는 바울 (31~35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470명의 로마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게 된 것은, 그냥 ‘유대인 암살단이 몰래 죽이려 했는데 거기에서 벗어나 살아났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살려주셨구나. 참 좋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로마군 요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의 곁에서 바울에게 이미 약속해주셨습니다(11). 바울이 잡힌 그 날 밤에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마지막 생명을 던져야 할 최종 목적지는 지금 여기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중심인 로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루살렘을 출발한 바울은 단순히 로마 군인 470명의 호위를 받으며 가이사랴로 가서 ‘나 이제 살았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언약하신 그 로마를 향해 가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제 살았다. 끝났다.’가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길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그날 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그것도 470명의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감격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감사했겠습니까? 이미 인생말년에 접어들었고, 여러 번 고문을 당하고 배가 파선하고 물에 빠지고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긴 바울입니다. 이제 인생의 말년이 되어 건강도 몹시 좋지 않은 바울인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런 자기를 계속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그것도 로마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사용해주시겠다는 것에 얼마나 큰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해주시다니! 이런 상태에 있는 나를 사용해주시다니!’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계속해서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성경 말씀이 단순히 글자를 기록하여 인쇄해놓은 책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의 삶을 이끌고 인도해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느라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면 당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들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계속 말씀을 붙들고 그 길로 나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해주시는 것,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체험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1-32절)
바울을 호송하는 470명의 군인들은 밤새도록 행군하여 이튿날,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35마일 떨어진 안디바드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것은 생소한 지명인데, 구약에서는 ‘아벡’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말을 타지 않은 보병 200명과 창병 200명이 하룻밤에 35마일을 도보로 행군했다면 아주 강행군이었습니다.
이 안디바드리에서 보병 200명과 창병 200명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부터는 기병 70명만 바울을 호송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35마일 떨어진 안디바드리라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암살단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4절에서 바울을 위해 짐승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는데, 말을 타고 가는 기병인데 다른 느린 짐승을 탔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도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병 70명과 보조를 맞추어 또 거기서부터 북서쪽으로 20~25마일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3절)
가이사랴에 다시 들어갔는데, 가이사랴가 어떤 곳입니까? 오늘 제목도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라고 했습니다. 왜 ‘다시’입니까? 가이사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전에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고, 그곳 성도들과 교제도 나누었고, 그러다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특히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 자기 손발을 묶고, ‘바로 이 허리띠의 주인이 이렇게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곳입니다(21:10-11). 그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 다시 바울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가이사랴에 다시 왔을 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뜨거웠겠습니까?
그곳을 떠날 때는 다들 말렸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 가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 하면서 떠났는데, 아무 상함 없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감격과 감동의 장면입니까?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가이사랴의 빌립과 그의 딸들과 그곳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이제 가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으면서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다시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제 가이사랴에 도착한 기병들은 총독 벨릭스에게 천부장의 편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웁니다. 그러니까 총독의 법정에 바울을 미결수 신분으로 세웠다는 말입니다.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4절)
총독은 이때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의 편지를 받아서 읽은 겁니다. 조금 전에 본 것처럼, 천부장이 쓴 편지는 자기 포장도 있고 과시도 있고 허위도 있는 거짓 보고서였습니다. 그런데 총독이 그 편지만 읽고서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총독 벨릭스는 평소에 아주 뇌물을 밝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밑의 사람들 중에 누가 의로운지, 누가 정직한지, 누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지를 헤아릴 능력도 없었고 판단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뇌물을 바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벨릭스였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벨릭스가 바울로부터 돈을 좀 받을까 해서 바울을 자꾸 불러냈다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도 자기 위치를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불의한 방법을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몇 년 못 갑니다. 벨릭스도 유대 총독을 그저 7년 정도 하고 나서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가 있다면 그것을 맡기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위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고 사회적 위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청지기다.’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
이제 천부장의 편지를 읽은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어느 영지 출신인지 물어봅니다. 바울이 누구의 관할지에 속한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는 수도 로마처럼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데도 있고, 또 원로원이 관할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데 출신이라면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관할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총독 벨릭스는 그곳으로 바울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침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그때 유대 총독 벨릭스는 당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의 대리대사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하니까 ‘내가 재판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35절)
총독 벨릭스는 바울의 고발자들(유대인 고소인들)이 오면 재판을 열기로 하고, 부하들에게 바울을 ‘헤롯 궁에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이 헤롯 궁은 그 유명한 헤롯대왕이 지중해 연안 도시인 가이사랴에 자신을 위해 건축한 궁전이었습니다. 가이사랴도 헤롯이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황제를 위해 지은 도시였습니다. ‘가이사’ 즉 ‘시저’의 이름을 넣고 지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유대 지방의 행정수도가 예루살렘에서 해상교통이 편리한 가이사랴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궁은 유대 총독의 관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에서 유대로 파견된 총독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평소에는 이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에서 살다가, 유월절이나 유대인들의 명절 같이 특별한 경비가 필요할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그때 마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와서 재판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 궁전에는 지하실에 감옥이 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가 부하들에게 바울을 ‘헤롯 궁에 지키라’ 하고 명령한 것은 헤롯 궁의 지하 감옥에 그를 가운 것일 수도 있고, 24장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미결수인 바울이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궁전의 한 방에 넣어서 거기 있으라고 하며 감금시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감옥일 수도 있고 방 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헤롯 궁 안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의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군인 470명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를 향해 첫 발을 내디딘 바울에게, 가이사랴는 중간 경유지입니다. 거쳐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 대한 재판이 속히 열려서 바울이 하루라도 빨리 가이사랴를 떠나 로마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상황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됩니다.
나중에 24장에 보면 총독 벨릭스는 보통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흔히 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즉 돈을 자기에게 바치면 죄가 있어도 무죄이고 돈을 안 바치면 죄가 없어도 유죄라고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벨릭스였습니다. 그러니 돈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심지어 바울에게까지도 돈을 좀 받을까 해서 불러냈습니다. 사실 바울은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데 그를 신흥종교의 우두머리로 생각해서, 신흥종교는 돈이 많으니까 바울도 돈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서 불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안 나오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무려 2년 동안이나 그냥 가두어놓았습니다.
벨릭스 때문에 로마로 빨리 가야 할 바울이 2년 동안이나 별 할 일 없이 가이사랴의 헤롯 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지금 바울이 개인적으로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로마에서 그가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도 해주셨는데, 그렇다면 빨리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빨리 가이사랴를 떠나서 로마에 가야 하는데, 부패한 관리인 총독 벨릭스의 뜻에 막혀서 2년 동안이나 가이사랴에서 그냥 있었습니다. 일종의 허송세월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무 뜻도 없이 별 이유도 없이 헤롯 궁에 갇혀서 2년 동안 지냈지만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세 차례나 오랜 기간 동안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시아(터키) 쪽으로, 그 다음에는 그리스까지 갔습니다. 심지어 저쪽 멀리 지금의 크로아티아까지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부분 걸어 다녔고 배를 타기도 했는데, 배 멀미가 얼마나 심합니까? 그러니까 고생고생하면서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매질도 당하고,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도 하고, 바다에서 배가 파선해서 정말 죽을 뻔하고, 물에 빠져 물도 많이 먹고, 채찍질을 당해서 등이 다 찢어지고, 거기에 바닷물이 들어가고 균도 들어가고, 또 강도의 위험, 광야의 위험, 동족의 위험, 가난, 추위, 굶주림 등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가만히 있으면서, 2년 동안 육체의 휴식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몸만 가만히 쉰 것이 아니라, 그 2년 동안 주님과 깊고 친밀한 대화의 시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아주 귀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년이라는,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 같은 시간을 주셨겠습니까? 바울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몸도 나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지금까지 가본 어떤 데보다도 영적으로 강력한 저항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꽉 잡고 있는 곳입니다. 이런 영적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에 가기 전에, 몸도 회복되고 영적으로도 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통해 준비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로마로 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실 헤롯 궁은 건축광이라고도 했던 헤롯 대왕이 자기를 위해 건축한 궁전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바울 당시 예루살렘 성전도, 바벨론 포로를 다녀와서 스룹바벨이 다시 세운 아주 초라한 성전을 헤롯대왕이 금도 입히며 굉장히 화려하고 웅장하게 개축한 성전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궁전도 가이사랴에 짓고 가이사랴 도시 자체를 아예 로마 황제를 위해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롯대왕은 자기가 만든 그 좋은 궁전에서 별로 오래 살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그 후에 후손들이 살아서 이었지만 그들의 차지가 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총독이 그 궁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기껏 만들어놓은 게 남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물론 그 궁전도, 가이사랴도 다 유적만 조금 남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헤롯 궁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의 헛됨을 보여주는 상징일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러한 인생의 헛됨을 보여주는 헤롯 궁에서 2년 동안이나 바울이 준비되도록 주님께서 이끌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합니까? 헤롯대왕이 자기 이름을 내고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고 또 자기 편리와 화려함을 위해 만들어놓은 이 궁전이, 놀랍게도 바울이 로마에서의 영적전쟁을 준비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벨릭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2년 동안 헤롯 궁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갇혀 있던 그 2년이라는 기간은 놀라운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잘 준비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거기서도 감옥에 갇혔지만 복음을 전하고,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잡혀와 로마에서 마침내 순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서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그리스 북부의 마게도냐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인데 옥중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나중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이 말을 쓴 바울은, 지금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에 갇혀서도 똑같은 말을 성도들에게 했을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한 이런 말씀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영적 경험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삶 속에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지금 아무 불의를 행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잡힌 그 상태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는 기간으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따라,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다 보면, 의외로 잘되고 복 받는 게 아니라 억울하게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깨지고,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감옥이 되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직장에서 잘리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거나, 자녀가 말을 안 듣거나, 다른 사람과 관계가 나빠지거나, 부모님과 관계가 틀어지거나, 이웃 또는 형제자매와 틀어지거나, 교회생활이 복잡하게 되거나, 마치 감옥에 갇혔다고 할 만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감옥이 아닙니다. 왜 그런 어려운 상황을 주십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섬세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의 삶의 이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잘 살펴서, 마침내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라고 하신 사명, 나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 각하께
행 23장 25~35절 / 양향모목사
우리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을 합니다. 착하게 생겼는지 험하게 생겼는지, 좋은 직업을 가졌는지 좋지 않은 직업을 가졌는지, 부자로 여유 있게 잘 사는지 가난하게 못 사는지, 말을 부드럽게 잘하는지 험한 말을 하는지 이런 외형적인 것들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제일 예쁜 여배우와 제일 멋있는 남자배우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혼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사람들이 참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최고로 멋있는 남자와 최고로 예쁜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왜 이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해석을 하기를 그 여자배우는 남자배우 그 자체를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나오는 그 남자 배우의 멋진 연기를 보고 사랑을 했고 남자배우도 여자배우의 본래 모습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여배우의 멋있는 모습을 보고 결혼을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멋있을 것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보니 원래 속사람의 모습은 그런 멋진 모습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 나오던 그 착하고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인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정말로 실망이 되어서 서로 이혼한 것이 아닌가 추즉을 한답니다.
우리 주변이 그런 착한 모습으로 연기를 하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속에는 죄악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착한 척하고 우리들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착하고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바른 길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진리를 알지 못해서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뭘 잘 알지 못해서 엉뚱한 길로 가면서 다른 사람들도 망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목사들 중에 착한 일을 많이 하면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형적인 모습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들의 영혼, 영원한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목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다른 복음을 전하여서 엉뚱한 길로 성도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 착한 행실을 가지고 사람들을 멸망에 빠지게 하는 정말로 나쁜 사람입니다.
착하고 훌륭한 것 때문에 그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아멘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반신반의 하면서 따져보고 따르든지 말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말을 하면 무조건 아멘하고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와 반대로 악한 사람인 것 같은데 착한 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바른 삶을 산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아주 악한 사람이 되어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방인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본문 25-26절에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라는 이름은 오늘 본문에 처음 나오는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하지만 사실은 21장부터 이 사람이 주욱 등장을 하는데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로마군의 천부장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이 천부장이 비교적 착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의 직책으로 볼 때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 군인으로 점령지인 이스라엘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서 파송된 부대의 천부장이었습니다. 착하고 순한 사람이 맡을 수 있는 그런 직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어려서 일제 강점기 시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 시대에 우리나라에 파송된 일본 군인들은 아주 악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인간이하로 취급을 하고 악하게 대하였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이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와 비슷합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때였고 점령군으로 파송된 로마군은 우리나라에 파송된 일본 헌병들 못지않게 악하게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로마군의 천부장인 글라우디오 루시아라는 사람이 유독 바울에게만큼은 아주 선하게 대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과 자신의 고통점인 로마 사람이 아니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과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진짜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으로 착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이 천부장이 당시의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사람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총독에게 편지를 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옳은 일을 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죽게 된 것을 내가 그 바울이 로마 사람인 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천부장이 잘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내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런 소동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천부장이 백부장과 부하들을 데리고 출동하여서 바울을 영내로 끌어들여서 죽음을 면하게 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소란을 피울 때 거기서 구원했다가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 세우고 바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의 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제시하지도 못하고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판단하기로는 바울이 죽임을 당하거나 결박을 당할만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다만 유대인들의 종교적 율법에 관한 문제로 서로 다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생각할 때 바울은 죽임을 당하거나 구속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가 없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무조건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총독께 급히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도 역시 우리가 살펴본 대로입니다. 바울의 생질이 이런 유대인들의 계획을 알고 바울을 거쳐 천부장에게 고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지체하지 않고 그 밤에 군사들 4백7십 명을 준비하여 바울을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1)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천부장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에게 고발을 당한 바울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를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이 율법을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가 아주 큰 문제였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율법 자체를 하나님께서 주신 엄한 계명으로 보고 누구든지 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바르게 잘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고 누가 반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될 수 있는 대로 율법의 말씀처럼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율법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인생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그 이상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원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주신 좋은 것이지만 문제는 타락한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내용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칭찬을 받고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해서 벌을 받고 저주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런 실패를 잘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잘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정작 자신들도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서 겉으로는 잘 지키는척하는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바울은 이 지구상에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줄 깨닫고 이런 죄악에서 나를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그것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이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유대인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과 바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병존해있습니다. 외형적이지만 비교적 율법을 지키고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되고 선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타락한 습성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을 자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번 똑바로 살고 싶습니다. 똑바로 보고 똑바로 알고 똑바로 걸으며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박수도 받고 좀 잘난 척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데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2) 또 하나 깨달을 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천부장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악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선한 일에 쓰임을 받았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착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큰 재물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 큰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 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일이 소중하다고 여기고 그 일에 쓰임받기를 원하면 하나님께서 능히 그 일을 감당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고 잘난 척 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몇몇 가지 선한 일을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보다 선한 일을 하지 못해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부족한 사람을 통해 일하실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총독 벨릭스
천부장 루시아와는 달리 총독 벨리스는 바울에 대해서나 하나님의 일에 그렇게 선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바울을 정죄하여 처벌하지 않고 정식으로 재판을 받게 하고 바울을 유대인들의 요청대로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천부장이 보낸 편지를 읽고 바울에게 어느 영지 사람이냐고 묻고 길리기아 사람이라고 하자 천부장의 편지대로 바울을 고발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헤롯 궁에 가두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벨릭스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 사람은 아주 대단한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우선 벨릭스는 원래 노예였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노예가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예로 있다가 자유인이 되고 총독에까지 오르게 된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노예가 총독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이 들었을 것이고 엄청나게 머리를 써서 그런 기회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늘 돈을 좋아하고 돈이나 모든 환경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뒤에 보면 이 사람이 바울을 자주 만난 것은 돈을 좀 받을까 해서이고 바울을 쉽게 풀어주지 않은 것 또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고 그것도 한나라를 다스리는 총독까지 올라왔다면 멋있게 정치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억울한 노예가 없는가를 살펴서 자유인이 되게 해주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하고 그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해서 돈 생기는 일만 찾아다니며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고 폭정을 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착취하려고만 했습니다. 부인을 세 사람이나 얻었고 그것도 정략적인 결혼으로 귀족이나 왕족과 결혼을 하여 자기의 신분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결국은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노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자유인이 되었으면서 스스로 다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돈을 버는 일에 목숨을 걸고 돈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참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누구에게 속박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들에게 또 다시 노예가 되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은 참 좋은 것입니다. 요즈음은 돈 가지고 못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고 돈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세상입니다.
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평생 돈벌이를 위해서 돈돈하면서 삽니다.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고 돈에 얽매여서 삽니다.
요즘은 재미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오락 스포츠 영화 인터넷 이런저런 편리하고 좋은 것들이 나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핸드폰 참 좋은 것입니다. 핸드폰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됩니다. 모든 정보를 알 수도 있고 네이버에 물어보면 박사도 모르는 것 다 알려줍니다. 재미난 영화도 보고 모든 사람들의 소식도 보고 게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핸드폰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아마 예수님 믿는 사람은 핸드폰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 핸드폰 가지려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 많을 것입니다.
좋은 것들을 가지고 편리하게 누리고 좋은 일에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에 너무 빠지면 그것의 노예가 되고 불행한 삶을 자초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죄의 종에서 죽음의 종에서 사탄의 종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그 죗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다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와 총독 벨릭스가 한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는 악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선하고 중요한 일을 행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노예에서 해방이 되어서 높은 총독의 자리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돈의 노예 명예의 노예 쾌락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비록 죄악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을 때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노예에서 해방이 되어서 참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쾌락 때문에 다시 노예가 되는 비참한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3장 / 조정의목사
본문은 바울이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 서서 심문당하고 이후 유대인 암살단의 위협을 피해 가이사랴로 이동하는 역동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바울이 전에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롬 9:28).
“모든 것” 안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모두 있다. 원하는 일과 원치 않는 일, 덕이나 해가 되는 사람, 좋은 상황과 나쁜 상황, 실수, 죄, 우연 등 모든 게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말씀을 통해 당신 삶에 허락된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길 원한다.
1. 바울에게 허락된 모든 것
① 부패한 지도자들
천부장은 바울이 흥분한 다수의 유대인 회중 앞에서 변명을 했는데도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보고는 채찍질하여 바울의 죄를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나서 이튿날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소집, 정식 재판을 받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부패했다.
당시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는데(2절), 48~59년까지 세도를 누린 자로 세속적이고 탐욕스럽고 불 같은 성질을 가진 자로 유명했다(요세푸스 기록). 본문에도 그의 불의함이 잘 나타난다. 바울이 공회 앞에서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진심을 고백했지만(1절), 대제사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입을 치라”고 명했다(2절).
이런 사람이 의회를 이끌고 있으니 심문이 바르게 될 리 만무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장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지도자들이 이토록 부패했다. 바울의 무죄와 유죄 판결 여부가 이들에게 달려 있었다. 하나님은 왜 하필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까?
공회에 바울을 맡긴 천부장 역시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사고 자기 입지에 방해 되는 것을 최대한 감추려는 기회주의자였다.
나중에 이 천부장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면서 그곳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할 때(26-30절), 이렇게 말한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천부장 이름)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26-27절). 불법적인 채찍질로 심문하려다가 로마 사람인 줄 알게 된 사실은 쏙 빼버렸다.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을까? 바울의 상황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하는 부패한 사람들이라니…
② 무서운 암살단
바울을 둘러싼 상황 중 최악은 바로 사십여 명의 유대인으로 구성된 암살단(시카리)이었다(12-15절). 날이 새매(공회 다음날)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12-13절).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 계획을 말했는데, 부패한 관리들은 이 악한 일을 흔쾌히 수락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14-15절).
오늘날에도 악플러나 스토커 때문에 크게 고통받다가 소송하는 유명인들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셀 수 없고, 심지어 맹세하면서까지 암살하려는 수십 명의 자객들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어떻게든 바울을 죽이려고 곳곳에 숨어 있었다. 게다가 바울을 보호해 줘야 할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들과 결탁하여 뜻을 함께했다. 참으로 두렵고 억울하고 무서운 일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환경을 바울에게 허락하셨을까? 바울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통해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당신도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까? 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그 의문이 길어져 의심과 불신을 낳는다.그때도 우리가 끝까지 믿고 바라봐야 할 분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다.
2. 모든것을 선으로 바꾸심
하나님은 바울이 처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① 부패한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히 증언하게 하심
마틴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종교재판 앞에서 자기 주장을 모두 철회하라는 압박을 받았을 때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라고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담대히 외친 것이다.
바울도 그랬다. 바울은 자기 입을 치라고 명령한 대제사장을 향하여 아주 담대하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라고 반박했다(3절). 대제사장이 속은 균열되어 있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외식 주의자(회칠한 담, 마 23:27)라고 비판하면서 율법대로(레 19:15) 사람의 죄를 묻고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냐고 따진 것이다.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한다고 문책할 때도 바울은 주눅 들지 않고 자기도 율법을 잘 알고 있지만(출 22:28), 율법을 이렇게 어기면서 사람을 치는 자가 설마 대제사장일 줄 몰랐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우회적으로 지도자들 모두를 책망했다(5절).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왔을까?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9, 11).
부패한 지도자들, 자기 목숨을 쥐고 있던 그들 앞에서 바울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가 할 말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 지혜를 주셔서 이 불의하고 무익한 재판을 와해되게 하셨다. 그렇게 선을 이루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공회에서 바울이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말했을 때(6절), 공회는 완전히 둘로 쪼개졌다(10절). 부활, 천사, 영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과 그것들을 믿는 바리새인이 바울을 가운데 두고 크게 다투었다(찢겨질까 하여, 10절). 권력다툼, 진영논리가 워낙 심했던 터라 바리새인 중에서는 바울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9절).
이처럼 성령 하나님은 바울에게 담대함과 지혜를 주셔서 부패한 지도자들 앞에서 용감하게 변론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② 무서운 암살단을 인하여 안전히 호송되게 하심
바울에게 허락된 최악의 상황은 무서운 암살단이었는데, 하나님이 이를 선으로 바꾸시는 모습은 정말 경이롭다. 이름도 모르는 바울의 생질(10-20대)이 ‘우연히’ 암살단의 계획을 듣게 됐다(16절). 이는 곧 바울 그리고 천부장의 귀에까지 들리게 됐다. 천부장은 이를 계기로 바울을 예루살렘보다 안전한 가이사랴로 호송하기로 결정한다.
만일 바울이 유대인들 손아귀에 있었다면 부패한 유대 지도자들 손에 금방 살해됐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결박을 받아 이방인 손에 넘겨지게 됐고, 자기 권력과 명예를 끔찍하게 여긴 이방인 관리 천부장은 로마 시민인 바울 때문에 자기가 책임질 일이 생기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아주 파격적인 보호를 하며 바울을 넘긴 것이다. 23-24절.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저녁 9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바울이 자비로 여행 경비를 충당할 필요도 없고, 곳곳에 매복한 자객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유대인의 돌에 맞아 죽을 염려도 없고 심지어 가이사랴까지 걸어갈 필요도 없다(노새, 당나귀).
무려 470명의 완전무장한 군사들의 보호를 받아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했다(물론 아직까지는 피의자 신분이지만). 게다가 천부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판결을 전달했다.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29절). 로마법에 따르면 무죄라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간 구금되어 있는 동안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에게 받을 재판의 판례가 됐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
3. 적용
우리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우리가 알거니와”, 롬 8:28).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의심과 불평이 나올 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할 수 있는가? 그게 문제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동안 바울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었을까? 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바울 곁으로 오셨다(‘위를 덮다, 압도적 임재’).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주님을 증언하도록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담대하라고 격려하고 위로하셨다. 그런데 주님이 바울에게 허락하신 선이 무엇인가? 바울 개인의 행복? 평안? 안락한 삶? 부와 명예?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다. 로마서 본문에서도 ‘합력하여 이루시는 선’은 다른 게 아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그 목적을 위해 우릴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날까지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이다(롬 8:29-30).
하나님은 오늘 이곳에 당신 곁에 임재하여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나를 증언한 것 같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증언할 수 있도록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 말씀은 대위임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 20).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통해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신다. 당신의 약함을 드러내 하나님의 강함을 보이신다. 당신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통해 오히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나타내신다. 당신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당신의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당신의 가난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유함을 선포하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을 증언하도록 이끄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당신에게 허락된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가 달려갈 길 곧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도록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정교하게 맞춘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셨다.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 자기 목숨을 당신을 위하여 버리신 가장 큰 사랑의 주님이 당신 곁에 서서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나를 증언할 것이다’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바울처럼, 루터처럼 담대히 답하라.
“아멘, 주 예수여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도우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