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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치열입니다. 펄펄 끓는 아침 펄펄 끓는 떡 만둣국으로 시작합니다. 그날 이후 구마모토에 여진이 300회 이상 발생했고 36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압니다. 제발 더 센 태풍 '돌핀'이 오키나와를 패스하고 9일까지는 평온을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구촌에 사건 사고 없는 날이 없을 테지만 오늘도 헤드라인 2폐지를 가득 채웠네요. 경산 화제 사건 형사 과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고, 민주당 명-청 대전(충청/부산) 현재 스퀘어 1:1 누가 이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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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이란과의 종전 선언 한 걸 두고 이스라엘이 패싱 당했다고 발끈하고 있고, 기저 질환 없는 40대가 온열 질환으로 사망, 김포에서 말라리아 주의보, 해병대 부사관이 영외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한 사건(3일)이 발생했습니다. 통영 살인 사건을 공개 수배한 가운데 몽타주는 없고 현상금 1억짜리 복면 쓴 175cm 남자로, 수사도 행방도 아직까지 오리무중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현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중요한 사상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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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약화시킨 <주체>와 <진리>의 개념을 다시 세우려는 철학자입니다. 대표작 <존재와 사건>에서 그는 존재론과 정치철학, 수학, 진리 이론을 하나의 체계로 엮어 냅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수'이다" 바디우에게 존재는 하나의 완성된 실체가 아닙니다. 존재는 끊임없이 열려 있는 다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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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서라고 부르는 사회, 국가, 제도는 이 다수를 하나로 묶어 이해하기 위해 만든 체계입니다. 그는 이것을 '일자로 셈하기(count-as-one)'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분류하고 규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언제나 그 질서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바디우의 핵심 개념은 <사건>입니다. 사건은 어떻게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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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기존 제도나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의 출현입니다. 혁명, 사랑, 새로운 예술,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처럼 기존 질서를 흔드는 일이 모두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결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건>을 우연한 해프닝으로 지나치지만, 누군가는 그 사건을 자신의 삶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충실하려 합니다. 바디우는 바로 그 사람을 <주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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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바디우는 기존 철학과 크게 다릅니다. 그에게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자아가 아닙니다. <주체는 사건에 충실할 때 비로소 탄생>합니다. 메커니즘을 펼처보면 사건이 일어나고, 누군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그 진리에 충실할 때, 비로소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주체는 존재의 출발점이 아니라 <사건의 결과>입니다. 바디우는 진리를 영원히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사건 이후 계속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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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교과서처럼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에 충실한 사람들이 끝없이 만들어 가는 <운동>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완성품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여기서 잠깐! 하이데거·들뢰즈·라캉과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를 사유하지만, 바디우는 존재보다 사건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봅니다(가장 바디우와 비슷함). 들뢰즈는 생성과 차이의 흐름을 강조하지만, 바디우는 그 흐름 속에서도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 사건>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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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주체를 결핍과 욕망 속에서 이해하지만, 바디우는 <진리에 충실한 실천>속에서 주체가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바디우의 <사건>개념은 성경을 읽을 때도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출애굽, 십자가, 부활, 오순절은 모두 기존 질서를 뒤흔든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했다고 자동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부활 사건에 끝까지 충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가 되었습니다. 구원론<칭의는 1회적 사건이 아닌 연속적>에서도 사건과 진리 개념이 적용된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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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디우에게 <진리>는 인간이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형성되지만, 성경에서 <진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계시하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사건이 주체를 만들고, 복음은 그리스도가 새사람을 만드십니다. 주의할 것은 <사건>을 만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건>에 충실할 때 비로소 새로운 주체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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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는 둘로 나누어집니다. '현재 있음의 존재'와 '도래할 존재'가 그것인데요, 현재 있음의 '나'라는 존재의 나는 과거에 반복적으로 있어 왔고, 현재 눈에 보이는 자체로서의 '나'입니다. 물론 '도래할 있음의 '존재는 오지 않은 도래할 존재이지요. 이 두 존재 간의 차이는 같은 한 사람이지만 차이가 있어요. 현재 있음의 존재가 현재의 상태로 미래를 맞으면 그 현재의 존재는 미래에도 현재의 존재와 똑같은 '있음의 존재'로 존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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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재 있음의 존재가 도래할 있음의 존재로 도약하는 데는 뭔가 개입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건'의 개입'이 필요해요. 그리고 '사건'은 어느 날 불쑥 터져 등장합니다. 아주 사소하거나 예기치 못한 '사건'에서 출발하지요. 그 사건이 터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피하거나 참여를 거부해요. 물론 드물게 누군가는 참여하기도 합니다. 현재 있음의 존재가 도래할 있음의 존재로 변화하는 계기가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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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사건'에 특정 존재가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사건'을 변화시키는 '촉성'(forcing)으로 작용합니다. 촉성은 촉진하는 힘이자 에너지죠. 이 촉성이 있음의 존재를 도래할 존재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이때 '사건'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체성을 가진 '주체'(나)입니다. 단 한 명의 주체적 존재가 사건의 부름을 받고 사회와 역사 앞에 등장했을 때, 역사는 거친 변화와 혁명의 물살을 만들어 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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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프로이트-이순신-광주 항쟁에서 죽음으로 참여했던 '주체'가 그러했습니다. 나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주체'로서 사건을 맡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리고 바로 어제 <사건>을 만났습니다. 기존 질서를 넘어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을 여는 역사적·윤리적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은 아니지만, 돌발 상황(사건)을 만나 존재가 도래할 있음의 존재 사건을 만나는 메커니즘을 적용하시라! 에스더를 학원으로 픽업해 주고 진접으로 귀가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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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30분 숙대-시청-충무로-청계천-종암-북부간선도로 경유 코스입니다. 청계 5가에서 8가로 빠져나가려면 직진을 해야 합니다. 1차선 도로에서 우측 길로 500m쯤 진행하다가 길림 길 고무 통이 발견되었고 급하게 끼어들기를 했는데 뒤차가 어림없다는 듯 틈을 주지 않았어요. 염병할 하필 그때 신호가 멈출게 뭡니까? 9620은 갈림길 코너에 끼어 엿 같은 상황이 돼버렸어요. 악어들이 잡아먹을 듯이 긴 크랙 손을 울려대는데 1분이 왜 이리도 긴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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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 가스실 인가, 지옥인가 했어요. 지랄, 니들은 끼어들기 안 하냐 C-bar! 이왕지사 모양은 빠져버렸고 기어이 나는 지옥 구간을 통과해 차를 멈춰 세운 후 동대문 사우나 앞 가로수 수풀 숲으로 들어갔어요. 만땅 이빠이 찬 보일러 물을 빼면서 나는 지금 나의 나와바리에서 영역 표시를 한 것뿐이라며 혼자 웃었어요. 물론 내가 절대 잘했다거나, 나를 본받으라고 한 말은 아니니 너무 미워하지 마시라. 여기서 불량 주체는 9620 그랜저(김효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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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주체)가 복귀 중에 '우연의 사건'을 만납니다. 운전 경력 35년인데 1차 선에 끼어들기 가드레일이 있을 줄 몰랐어요. 코너로 처박힌 상황에서 신호체계-관습-타자의 자존심-윤리 따위를 모두 패스 오버 하고 북부 간선도로를 탔다는 것이 오늘 '존재와 사건' 관련 '주체'의 핵심 개념입니다. 물론 내 의지가 '진리'이어야 한다는 차원에서는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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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1. 우연한 사건을 만나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2. 힘겹게 진리(자기 뜻)를 쟁취하는 것까지의 '주체'라는 겁니다. '사건의 흔적'을 이어받은 '주체', '사건과 진리를 연결'하는 '주체' 말입니다. 대상은 없고(다수) 사건의 산물 속에 '주체'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에예공! '주체'가 없으면 진리도 없어요. 불량 '주체' 말고 진리의 '주체'가 되시라.
2.
사건은 어떻게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가? 알랭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해 온 대표적인 좌파 사상가입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약화시킨 <주체>와 <진리>의 개념을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대표작 <존재와 사건>에서 존재론, 정치철학, 수학, 진리 이론을 하나의 거대한 철학 체계로 엮어 냅니다. 바디우 철학의 출발점은 뜻밖에도 단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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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수(multiplicity)이다" 그에게 존재는 하나의 완성된 실체가 아닙니다. 존재는 끊임없이 열려 있는 다수이며, 우리가 질서라고 부르는 사회, 국가, 제도는 이 다수를 하나로 묶어 이해하기 위해 만든 체계입니다. 바디우는 이를 일자로 셈하기(count-as-one)'라고 부릅니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분류하고 규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언제나 그 질서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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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디우 철학의 핵심 개념인 <사건>입니다. 사건은 기존 제도나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의 출현입니다. 혁명, 사랑, 새로운 예술,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처럼 기존 질서를 흔드는 일이 모두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결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건을 우연한 해프닝으로 지나치지만, 누군가는 그 사건을 자신의 삶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충실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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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는 바로 그 사람을 <주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바디우는 기존 철학과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그에게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자아가 아닙니다. <주체>는 사건에 충실할 때 비로소 탄생합니다. 메커니즘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누군가 그 사건을 진리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끝까지 충실할 때 비로소 주체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주체>는 존재의 출발점이 아니라 <사건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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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에게 진리는 교과서처럼 이미 주어진 명제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건 이후 그것에 충실한 사람들이 끝없이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운동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완성품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여기서 하이데거, 들뢰즈, 라캉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를 사유하지만, 바디우는 존재보다 <사건>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봅니다. 들뢰즈는 생성과 차이의 흐름을 강조하지만, 바디우는 그 흐름 속에서도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 사건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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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주체를 결핍과 욕망 속에서 이해하지만, 바디우는 진리에 충실한 실천 속에서 주체가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성경을 읽을 때도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출애굽, 십자가, 부활, 오순절은 모두 기존 질서를 뒤흔든 거대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했다고 자동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 사건에 끝까지 충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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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습니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인간이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형성됩니다. 반면 성경에서 진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계시하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사건이 주체를 만들지만, 복음은 **그리스도가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 바디우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에스더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청계천 부근에서 갑작스럽게 차선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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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차는 틈을 내주지 않았고, 신호는 멈췄으며, 차량은 갈림길 한가운데 갇혀 버렸습니다. 사방에서는 경적이 울렸고, 짧은 1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디우가 말하는 역사적 의미의 '사건'은 아닙니다. 혁명도 아니고, 새로운 진리를 여는 윤리적 전환점도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비유는 될 수 있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 앞에서 사람은 기존의 계획을 수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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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는 결국 자신의 몫입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 역시 바로 이런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사건은 우연히 찾아오지만, 주체는 우연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존재와 사건』이 말하는 주체란 사건을 한 번 만난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 열어 놓은 진리의 가능성에 끝까지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디우 철학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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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순히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새로운 주체가 되는 사람인가? 사건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에 충실한 사람만이 진리를 살아 냅니다. 불량 주체가 아니라 진리의 주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6.8.4.tue.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