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이산*의 옹벽
메주 고 제 웅
삼 년 전부터 수해 방지를 위해 석축을 쌓고 있다. 화엄사의 섭진교*에서 공덕전(구 공덕사)의 해탈문 쪽으로 올려다보면 냉장고 크기만 한 바위 네댓 개가 도랑에 누워있다. 녀석들이 어디에서 굴러온 것일까?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터는 도랑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건너편 언덕은 낮은데 비해 사찰의 용지는 높은 절벽이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태풍 매미가 몰아치던 순간에 사찰 측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으리라. 그런데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다리를 놓고 진입로가 바뀌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곳이다. 그런 곳이 입구가 바뀌면서 정황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이들 바위는 한 시각이라도 빨리 처리하고 벼랑이 무너지지 않도록 옹벽을 쌓아 주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더욱이 절벽 위는 요사에서 공덕전으로 오르는 길이다.
석축 공사는 전문 업체에 맡겨 전문가가 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화엄사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식구끼리 시공하기로 작정했다. 식구라야 나와 김 보살 단 둘 뿐이다. 예전에는 딸아이와 심신 수양을 위해 잠시 절에 의탁하여 생활하는 젊은이들을 비롯해 스님이 되려고 행자*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요사에서 공덕전으로 오르내리는 길을 낼 때는 모두가 거들고 놉도 얻어 여러 사람이 매달려 시공하였기에 큰 어려움 없이 단시일 내에 완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형편이 사뭇 다르다.
초창기 화엄사 부지를 닦을 때 석축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자칭 기술자라고 하는 이들이 시키는 대로 시공했는데 석축이 똑바로 쌓여 올라가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그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과가 뚜렷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되 메우기 한 흙이 빗물을 머금어 흙탕이 되는가 싶더니 석축이 토압을 이기지 못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재공사를 하는데 큰 돌은 큰 돌대로 잡석은 잡석대로 골라내고 흙은 흙대로 파 올릴 수밖에 없었다. 시공보다 더더욱 힘들고 품이 많이 들었다. 결국 하나의 공사를 세 번이나 반복해 공사를 한 꼴이었다.
완벽한 석축 공사를 위해 일류 석공을 찾아 나섰다. 마침 화엄사 인근에 석공으로 늙은 문 노인이 살고 있었다. 부산 동구의 잘 쌓인 축대는 거의 문 노인 솜씨라는 전언이었다. 석축으로 돈을 벌어서 의사 아들을 탄생시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얼마나 맵고 짠 솜씨일까? 의아심에 몇 군데 둘러보았다. 정연히 쌓인 담은 미적인 모양도 모양이었지만,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치 견고해 보였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서 몇 덩이 돌을 빼낸다고 할지라도 돌과 돌이 맞물려 쌓였기 때문에 끄떡없을 것 같았다. 제아무리 센 토압이라도 거뜬하게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곧바로 문 노인을 찾아뵙고 공사를 부탁드렸다.
안전을 위해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戒)를 현장의 좌우명으로 정했다. 견치석(犬齒石)은 사나운 개의 이빨과 같다. 돌을 잘못 다루어 발등이라도 찧는다면 부상으로 이어진다. 또 목도질*하다가 발을 삐끗해 높은 데서 돌과 함께 굴러 떨어지면 치명적이다. 술을 마시면 실수하기 십상이다. 당시의 공사는 석공 한 사람 밑에 조수를 두고 목도질, 잡석 운반, 공골 등의 작업을 위해 십여 명의 인부가 조를 이루었다. 하루는 문 노인에게 “퇴근 후, 술 드시면 안 됩니다.”라고 당부를 드렸다. 그랬더니 “인원이 이렇게 많은데 술을 들 수 있나.”라고 말씀하며 퇴근했다. 그런데 이튿날 결근이었다. 공사장에서 인부를 부르면 작업이 무산되어도 일당을 지급해야 한다. 그보다 문제는 인부들을 돌려보내면 공사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용기를 내어 문 노인을 대신해 석축을 쌓았다.
다음날 “제가 쌓아 봤습니다.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처럼 쌓으면 되지!”하시었다. 몇 년 후 당신이 쓰시던 함마와 자그만 지렛대를 건네었다. 기능인으로서의 깊은 인증이었다. 이때부터 승려지만 석공이 되어 화엄사와 공덕전과 정토원의 석축을 쌓았다. 석재는 불연성, 내화성, 내구성이며 풍화와 습기에 강할 뿐만 아니라 겉모습이 장중하고 아름답다. 반면 단점은 무게 때문에 운송이 어렵고 석축을 쌓는 기능공이 드문 탓에 시공의 단가가 높은 것이 단점이다.
석축 또는 성곽에 대한 전문학자가 아닌 문외한이다. 이 때문에 전문지식이 전혀 없다. 하지만 돌을 쌓으며 어깨너머로 살핀 돌 쌓기를 간추려 본다. 석축은 축조의 형태에 따라 견치석 쌓기, 장대석 쌓기, 성 돌 쌓기, 자연석 쌓기로 분류된다. 그리고 채우는 돌과 재료에 따라 메쌓기와 찰쌓기로 구분된다. 또 거친 돌 쌓기, 다듬돌 쌓기, 조경 석 쌓기와 철사로 엮은 망태 안에 돌을 채워 옹벽을 만드는 캐비온 공법(cavion method of construction)등이 있다. 석축에 대한 축조의 공법을 한두 번 보면 흉내를 낼 수 있는 재간이 가슴에 스미어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우공이산의 의지가 가슴에 북극성으로 떴다. 나침반도 없이 산림, 사막,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면 어찌해야 할까? 북극성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듯이 석축을 쌓을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찰의 주지로서는 우공이산을 지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돌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팠었다. 땅을 파면 돌이 나왔다. 큰 돌로 축을 쌓고 작은 돌은 모아서 채움재로 사용했다. 공사의 전후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작업하는 듯 마는 듯 진척의 속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걸음 한 걸음 완공을 향하고 있었다.
30여 년 동안 화엄사를 맴돌았던 K 씨의 얘기를 하련다. 용돈이 필요하면 찾아와 몇 푼 벌었다 싶으면 술을 마시고 싶어 안달했다. 또 작업하다가 어려움에 맞닥트리면 주변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올해 삼월에도 제 딴에는 난공사라 생각되었는지 막말을 하며 품삯을 챙겨 달아나 버렸었다. 그리하더니 형편이 풀리지 않는지 두 달 전부터 핸드폰으로 뻔질나게 전화질이다. 술친구들에게 폼을 잡는 혀 꼬부라진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당을 올려달라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듣다못해 마음속으로 술값을 올려 “주나 봐라….”를 반야심경처럼 되뇌인다. 하지만 K씨는 일을 “하나 봐라….”를 중얼거리고 있으리라. 아아! K씨여 못난 메주를 용서치 말아다오!
하루에도 여러 차례 핸드폰 벨이 울렸다. 늙어빠져 힘없는 영감쟁이 스님아! 무거운 돌을 움직여 석축을 쌓을 수 있겠느냐? 턱도 없다. 일당을 올려줄 터이니 빨리 오라고 사정하리라 생각하고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속담이 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문제일 뿐이다. 거창의 석산에서 25t 덤프트럭 한 대 분량의 견치석을 샀다. 정토원에 갈 때마다 애마 1t 리베로로 실어 날랐다. 채움재인 잡석도 거창의 석재공장에서 실어 오며 우공이 산을 옮기듯이 추진해 왔던 일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 망팔(望八)에 샅바를 매었으니 졸수(卒壽)까지는 돌과 씨름하다가 싱긋이 웃으며 저 언덕을 넘을 수 있으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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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공이산(愚公移山) : 중국의 태행(太行)과 왕옥(王屋) 두 산맥은 오래전엔 북산(北山)을 사이에 두고 지금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북산에 살고 있던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높은 산에 가로막혀 왕래하는 데 겪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두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둘레가 700리에 달하는 큰 산맥의 흙을 퍼 담아서 왕복하는 데 1년이 걸리는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하는 우공(愚公)의 모습을 보고, 친구 지수(智叟)가 그만둘 것을 권유하자 우공(愚公)이 말했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과 손자가 있고, 그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산은 불어나지 않을 것이니, 대를 이어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산이 깎여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산신령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옥황상제가 두 산을 멀리 옮겨주어 노인의 뜻이 성취되었다.”
* 섭진교(涉塵橋) : 번뇌의 세상을 건너 진리의 세계로 드는 다리란 뜻.
* 행자(行者) : 출가한 후 아직 사미계나 사미니계를 받지 않은, 정식으로 승려가 되기 위한 입문 과정에 있는 사람
* 목도질 :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짝이 되어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일.” 물건을 밧줄로 엮고 밧줄을 긴 막대기의 중앙에 꿴 후, 긴 막대기의 양쪽에 한 사람씩 서서 뒷덜미에 긴 막대기를 얹어 힘을 쓰며 물건을 나르는 일이다. 요즘은 장비의 발달로 거의 사라졌다.
첫댓글 ㅎ
鑑賞 잘했습니다.
수필은
輕隨筆(miscellany)과 重隨筆(essay)로 구분 짓곤하는데
<우공이산*의 옹벽>은 그 전문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重隨筆(essay)에 든다고 하겠습니다.
필자께서 돌다루기에 이미 전문가적인 소양이 갖춰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끌어가시니 그 격이 남다릅니다.
格이 높은 수필 한 편 감상하는 즐거움이 쏠쏠합니다^^*
읽고 감상문겸 평을 써 주시니 고맙기 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