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GfgBORsUhW4?si=tE2x7RYihEUIIQXF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낭만파 음악가였던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리스트의 집안은 귀족 출신으로 에스테르하지후작가의 회계를 맡고 있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바이올린이나 플루트, 기타를 연주하고 문학과 미술에도 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도 음악을 사랑하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고 손님이 찾아오면 예술이나 문학에 관한 대화를 즐겼으며 접대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이와 같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리스트는 6세에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피아노 연주를 했다. 겨우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피아노 협주곡을 기억하고 연주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하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 후 리스트는 아버지를 따라 빈으로 가서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 체르니(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교본 작곡자)와 살리에르(모차르트를 독살했던 하수인의 의심을 받는 작곡가)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의 빈에는 아직 베토벤이 생존해 있어, 리스트가 베토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최초로 베토벤의 집에서 연주했을 때는 건성으로 듣고 있었으나 다음에 리스트가 연주회를 개최했을때는 베토벤도 참석하여 리스트의 연주가 끝나자 마자 무대로 뛰어올라가 그를 끌어안았다고 한다. 그 후 파리로 가서 파에르와 라이히에게서 피아노의 지도를 받고 연주회 에서도 평판을 얻었다. 그때가 1824년, 리스트는 12세였다.
천재소년 리스트의 이름은 유명해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가 연주회를 개최하고 또 버킹검궁전에도 초대되어 조지 4세 앞에서 어전연주를 하고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리스트는 충동적이며 사물에 열중하기 쉬운 성격이었으나 아버지의 올바른 지도로 성장했다. 당시 리스트는 프랑스의 국왕 샬를 10세를 섬기는 대신의 영애 카롤리느 샹크리크를 사랑하지만 높은 산의 꽃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층 우울한 증세가 힘해져 귀족 계급과 예술가의 자유로운 세계 사이에는 깊은 수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롤리느와 후년 재회했을때, 여전히 과거의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고 한다.
리스트가 21세가 된 1823년경, 파리는 콜레라의 유행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무렵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통해 사람들은 콜레라의 공포를 잊으며 열심히 들었다고 한다. 리스트도 파가니니의 훌륭한 연주를 듣고 강렬한 감동을 받았으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곡을 어떻게 해서 피아노로 모방할 수 있는가에 리스트의 관심이 끌렸다.
리스트는 또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듣고 그것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베를리오즈에게 바쳤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이 처음으로 만난것은 베를리오즈의 집에서 였다. 두사람의 사상과 경향이 많은 점에서 유사했으므로 깊은 우정이 생겼다. 부인의 아이가 병이 들었을때 함께 간병을 하여 두 사람의 애정은 한층 깊어졌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고, 부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죄에 대한 응보를 한것이라고 믿었다. 리스트는 이 경험을 통해서 <죽음의 사색>의 작곡을 완성했다. 1835년 8월 리스트는 다구 부인에게 남편과 이이들을 버리게 하고 스위스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 파리에서 리스트는 파렴치한 간통을 범했다고 비난 받았다.
두 사람은 제네바에 거처를 정하고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 사이 리스트는 피아노 소곡집 <순례의 연보>를 작곡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하고, 리스트의 인기는 점차 넓게 퍼져갔다. 다구 부인은 리스트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하고, 그의 구술을 필기하여 그를 도왔다. 두 사람 사이에 2남 1녀인 3명의 아이가 생기고 이 중의 한 사람인 코지마가 훗날 바그너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리스트는 자비롭고, 우정이 깊고, 포용력이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격려하며 비호했다고 한다. 또 무보수로 자선사업을 위해서 연주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1838년 3월 헝가리가 전국토에 걸처서 홍수가 일어났을 때는 빈에서 여러번 음악회를 개최하여 그 수익을 이재민의 지원을 위해 기부했다고도 한다. 후에 슈만의 아내가 되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크는 이 무렵의 리스트의 연주에 대해서 "리스트와 같은 연주가는 더이상 없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는 음울해진다. 리스트의 열정은 측정할 수 없다. 그는 때때로 멜로디를 파괴하고 미감을 상하게 한다." 고 일기장에 적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1834년부터 1844년의 10년간 몇번이나 스위스나 이탈리아로 여행하고 체류했으며 1844년은 리스트와 다구 부인의 사랑이 파탄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사랑의 도피행각까지 했던 두 사람이 이별하기에 이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리스트의 거듭되는 여행에 의한 별거생활 상호 이해의 결여증대, 권태라는 것이 그들의 길을 갈라서게 했던것 같다. 이는 리스트의 충동적인 성격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리스트가 폴란드 출신의 카롤리느 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을 알고 그녀가 몇년전부터 별거하고 있었던 남편으로부터 떠나게 한것은 러시아의 키에프의 땅이었다고 한다. 카롤리느는 섬세하고 예민하며 또 혜안을 구비한 여성으로 많은 점에서 다구 부인보다 뛰어났었던 것같다. 그녀는 다구 부인과는 달라 주제넘게 나서는 일은 없고 그녀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음악에 깊은 소양이 있고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리스트의 작곡에 올바른 평가를 하여, 그의 관심을 관현악 대편성 방향으로 돌리게 했다.
리스트는 면밀한 프로그램에서 도피하여 일정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사치가 심했던 반면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서도 힘을 썼다. 슈베르트의 사후에 파묻혀 있던 여러 작품들을 세상에 발표하고 베토벤을 빛내는 기념행사의 발기인, 주최자가 되기도 했다. 또 베를리오즈가 실연으로 고민하고, 병으로 쇠약해졌을때 그를 격려하고 북돋웠다.
바그너와 리스트는 1841년 3월 파리에서 열린 리스트의 연주회에서 만나 계속해서 친분을 나눠 1853년 바이마르에서 연주되었던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지휘는 리스트가 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국민학파 무소르크스키, 큐이, 보로단, 프랑스의 세자르 프랑크 노르웨이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도 리스트에 의해서 공개 연주되었다. 발라키레프, 보로딘, 생상도 리스에게 자기의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2곡의 교향시,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 교향곡 <파우스트> 대미사곡 교향곡 <단테> 가곡등 리스트의 많은 작품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는 바이마르시대(1848~1860) 12년간에 걸쳐 작곡되고 있었던 것들이다. 그것은 카롤리느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힘이 컸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1881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리스트의 작업 능력은 떨어지지 않아 <태양의 송가>를 계속쓰고 최후의 교향시 <요람부터 무덤까지>를 작곡했다. 1886년 7월 31일 리스트는 <트리스탄>이란 최후의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nzhYgzl2RYI?si=4JFxZNq5WumFUXjf
Liszt - Sonata in B Minor - Evgeny Kissin - Live -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