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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고발함
24:1-9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행 24:1-9 / [바울에 대한 논고]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유대 지도자 몇 사람과 더둘로라는 법관을 데리고 와서 고소를 제기하였다. 2) 더둘로는 총독 앞에 불려 나오자 바울을 걸어 다음과 같이 고소하였다. `각하, 우리 유대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은 모두 각하의 덕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차별 대우의 문제도 크게 개선되고 있어 3) 우리는 늘 깊이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4) 이제 각하를 오래 괴롭히지 않고자 간단히 이자에 대한 고소의 줄거리만을 말씀드리려고 하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5) 이 자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을 충동질하여 로마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소요의 주동자입니다. 게다가 이 자는 나사렛당이라고 알려진 종파의 두목이 되어 6) 성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체포한 것도 그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당하게 이 자를 처벌하려고 하였습니다. 7) 그런데 파견대장인 루시아가 이 자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다가 8) 로마법으로 재판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각하께서도 직접 이자를 심문해 보시면 우리의 고소가 정당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9)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모두 입을 모아서 더둘로의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안전하게 가이사랴로 왔지만, 5일 후 대제사장의 무리가 이곳까지 와서 세 가지 거짓 고소를 하며 바울을 처형할 것을 요구합니다.
변호사 더둘로(1)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이번에는 달변가 더둘로를 앞세워 바울을 고소합니다. 이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100km가 넘는 먼 곳을 직접 찾아올 만큼 바울을 죽이려는 집념이 대단했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지난번에는 ‘칼’의 힘을 의지했다면 이번에는 ‘말’의 힘에 기대고 있습니다.
고발당한 바울(2-4) 더둘로는 총독의 마음을 훔치려고 사실이 아닌 말로 아첨합니다. 벨릭스는 역사가들에 의하면 태평이나 선견지명 등과는 거리가 먼 통치자였습니다. 폭정과 착취와 부정부패로 정치적 소요와 불안을 자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갖추는 것은 필요하지만 사실이 아닌 말이나 뇌물로 비위를 맞추거나 그런 말에 마음을 내주어 바른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5-9) 더둘로가 바울 사도를 고소한 핵심은 바울을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정치범으로 몰아서 바울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전염병 같은 자’라는 표현은 그의 활동을 방치할 경우, 유대 지역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 전체가 위태로워질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바울을 반대하면서도 그를 사회를 교란시키는 정치범으로 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쓰던 방식과 똑같습니다.
적용: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슈퍼 전파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때입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에 하나님나라를 무섭게 확산시켜 갔습니다. 싸스, 에볼라, 메르스, 코로나 같은 이 세상의 바이러스는 사람을 죽이지만, 예수는 사람을 살립니다.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5살 먹은 그의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와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호크마 주석
====24:1
닷새 후에 - 이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출발 때부터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Meyer), 그보다는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부터 닷새 후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Haenchen, Bruce,Holtzmann). 아나니아가...변사 더둘로와 함께 -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잔인한 성격에 대해서는이미 23:2에서 밝힌 바 있는데, 여기서도 그의 집요한 악함이 드러난다. 아나니아는바울이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떠났다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바울에게 저주를 당한것에 대한(23:3) 개인적 증오심 때문에 가이사랴까지 찾아와 바울을 끝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로마 법정에서 바울에게 불리한 판결을 확실히 하기 위해한 변사(辯士)까지 동원하였다. '변사'(* , 레토로스)유대교의 법과 로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서 뛰어난 언변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변사를 데리고 온 것은, (1)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 하려면 로마법의절차를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며, (2) 변사의 뛰어난 언변으로 재판을 받게 하려면 로마법의 절차를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며, (2) 변사의 뛰어난 언변으로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변사의 이름 더둘로(Tertullus)는 당시 로마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이름이다. 아마 그는 헬라계 유대인이었을 것이다(Bruce).한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 명의 장로들이 산헤드린 전체를 대표해서 온 것인지 아니면 바울에 대해 특별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특히 사두개인들, 23:6-9)이사적(私的)으로 온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격렬한 논쟁 후에 쉽사리 화해할 수 없으리라고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
=====24:2
바울을 부르매...송사하여 -아나니아 일행의 고소가 접수되었고, 바울이 법정에 불려나옴으로써 원고와 피고가 한자리에 모였고 재판장 벧릭스가 자리에 앉음으로써 재판은 시작되었다. 먼저 더둘로의바울에 대한 고발 논고가 시작된다.
=====24:3
벧릭스 각하여...감사 무지하옵나이다 - 더둘로의 논고는 의례적으로 재판장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낯간지러운 아첨으로시작되고 있다. 그의 아첨의 요지는 벧릭스의 뛰어난 통치력으로 민족이 개혁되었고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내용이며 이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나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는다(공동번역)는 것이다. 더둘로의 이 말은 아첨 이상의 어떤 진실성도 갖고 있지않았으며 이 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총독 벧릭스의 상습적 잔혹 행위는 그 당시에 널리 알려졌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역사가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벧릭스는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이용하여 뇌물과 여색을탐하는 등 온갖 악행을 도모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비위를 거스리는 자들은 암살자를동원하여 살해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또한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당시에 많이일어났던 소요를 진압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강도떼들을 부추겨 약탈하도록 하여그 약탈물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나중에 벧릭스가 총독에서 물러나 로마로 소환되었을때,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앞의 일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탄원하였기 때문이었다(Tacitus Ann, XII, 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찬사를 늘어놓는 더들로의 의도는 (1) 당시에 벧릭스가 가지고 있던 반유대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며, (2) 벧릭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거짓 찬사를 통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내려는 것임이 명백하다.
=====24:4
괴롭게 아니라려 하여 - 이는 실질적으로 할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총독 벧릭스를 불편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중심 내용만 말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당시관례적으로 법정에서 재판장에 대한 예의로서 한 언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더둘로의 변사로서의 노련한 언변을 엿보게 한다. '괴롭히다'를 뜻하는 '엥콰토'(*)는 '방해하다'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당신의 통치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위해'로 번역될 수 있다(Preuschen). 대강 - '쉰토모스'(* ) '간단히'(공동번역)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짧게 베다'의 뜻인 동사 '쉰템노'(* )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필요한 부분만을 베어내는 것, 또는 필요한 부분 외의 것을 베어내 짧게 한다는 뜻이다.
=====24:5
염병 - '염병'(* , 로이모스)은 흑사병과 같이 전염성이 강하고 일단 감염이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염병을 가리키며, 형편없는 사람에 대한 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더둘로는 바울이 전한 도(道)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그것이 마치 흑사병과 같이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고 잘라말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흑색선전이었을 뿐이다. 여하튼 바울을 염병(染病)이라고까지 부른 것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나갔음을 말해준다.
소요케 하는 자 - 아나니아 일행이 상당히 치밀한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떤 문제가 벧릭스의 분노를 유발시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고소 내용의 제일 첫번째 항목으로 그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정치적 혁명 세력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벧릭스는 유대를 통치하는 동안 여러 가지 소요 사건들에 직면하여 그 주동자들은 물론 추종자들까지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방식으로 강경하게 진압했다(Jos, Wars II). 그리고 그는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어떤 소요에 대해서도 즉시 잔인하게 진압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 - 이단(* , 하에레시스)은 '선택하다', '더 좋아하다'를 뜻하는 '하이레오'(* )에서 파생되어 어떤 '파'나 '당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며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택한 자'혹은 '파당'을 가리킨다. 더둘로가 이 표현을 썼을 때 종교적 견해 차이에 중점을 두는 의미에서 '이단'(개역 성경)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로마에 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도당'(공동번역)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종교적 교리에 대한 차이를 가지고는 로마 법정에서 시비를 걸수 없음을 더둘로 일행이 잘 알고 있었을 터인즉, 벧릭스가 그 말을 받아들일 때 후자의 의미로 생각하기 바라는 뜻에서 사용했을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한편 예수를 따른 자들을 가리켜 '나사렛당'(Nazarenes)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본래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에예수 이름 앞에 '나사렛'을 덧붙여 부른데서 시작되었다. '괴수'(*, 프로토스타테스)는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 )와 '서다'를 뜻하는'히스테미'(* )의 합성어로 '무리 중에 첫번째 서 있는 자' 즉 '지도자'나'주모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더둘로가 바울을 정치범으로 몰고 가려는 장면을보게 되는데, 이는 예수께서 당하신 모함(謀陷)과 상당히 유사하다(눅 23:2). 아마 누가는 주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자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인식하기 바랬을것이다.
=====24:6
성전을 더럽게 - 성전 즉 종교에 관한 것은 로마 법정에서 죄의 유무를 판결하는 자료가 되지 못함을 저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간략하게만 끝으로 언급하고 있다. 만약 여기가 유대교 법정이었다면 가장 먼저 중요하게 고발해야 할 제목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고반로마적인 행위에 관한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만든 것이 성전 정화 사건이었고(막11:15-19) 바울이 결정적으로 음모에 걸려든 것도 성전에서였다는 점은(21:27-30) 주님과 제자의 고난에 있어서 또 다른 공통점을 보여준다. 한편 어떤 사본에는 '유대인들이 바울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려고 했으나 천부장이 바울을 빼앗아갔다'고 더둘로가말한 내용이 들어 있지만 별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24:7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 만약 앞절에서 언급한 사본의 내용을 인정한다면 여기서의 '그'는 '루시아'일 수도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으로 보아 그렇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벧릭스가더둘로의 말대로 심문한 사람은 바울이었고 루시아를 부르도록 조치하거나 재판을 연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4:8
우리가 송사하는...아실 수 있나이다 - 총독 벧리스가 직접 심문하면 고발한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You will be able to learn from him about everything of shich we accuse him,RSV). 더둘로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한데 대해서는 의구심이 생긴다. 바울이 그의 고발내용을 시인하리라고 보았는가? 만일 그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는 판단 착오일 뿐이다. 아니면 동료들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할 셈이었는가?(눅 23:13-25) 어쨌든 분명한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궤변적, 허위적 자신감이나타나 있다는 사실이다.
=====24:9
유대인들도 - 본문은 아나니아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올 때 장로들 외에 다른 유대인들도 데리고 왔음을 시사한다. 아마 자기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많은 증인이 있음을 보영줌으로써 자기들의 의도대로 판결을 끌고가려는 속셈이 있었을 것이다.
< 설 교 >
바울의 변증
사도행전 24:1-27 / 정용섭 목사
데르딜로의 논고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바울 살해 기도가 파견대장 글라우디오 리시아의 완벽한 조치로 헛수고로 끝난 다음, 바울은 훨씬 안전한 총독의 손에 넘겨졌다. 이제 바울은 유대교의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는 그런 위험 지역을 벗어난 셈이다. 종교보다는 정치가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처한 삶의 자리였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가 열광주의 형태를, 정치가 합리주의 형태를 지닐 때라는 전제가 놓여 있다.
펠릭스 총독이 주관하는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완전히 로마 정치 체계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파견대장이 소집한 산헤드린 공의회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대사제는 전문적으로 법을 다루는 데르딜로 법관(변호사)을 대동했다. 데르딜로는 2,3절에서 우선 총독에게 아부에 가까운 발언으로 이 논고를 시작한다. “펠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각하를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아첨에 가까운 발언 후에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1) 바울은 몹쓸 전염병 같은 자로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이다. 2)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
이 고발은 그 당시 유대교 지도층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발 연설로도 뛰어난 것이다. 두 내용을 한데 묶어 중요한 개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전염병, 반란, 나자렛 도당, 성전 훼손.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를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기원후 80년대에 상당한 정도로 불어난 사실에 대한 유대교의 놀라움도 반영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반란’이라는 단어는 총독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요소인데, 만약 총독에게 이런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다면 이 고발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나자렛 도당’이라는 단어도 역시 그들의 불쾌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가 데르딜로의 입을 통해서 열두 사도를 제쳐놓고 바울을 나자렛 도당의 괴수라고 설명한 건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누가 자신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누가의 이런 판단은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누가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누가가 활동하던 80년대는 예루살렘 그리스도교가 몰락하고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헬라, 즉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도교가 주류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자기 변론
데르딜로의 논고 후에 총독의 허락을 받아 바울이 자기변호에 나선다. 바울은 데르딜로가 제시한 죄목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중심으로 변론을 시작한다. 그 핵심은 ‘대중선동’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명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 정권이 가장 심각하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전, 회당, 거리에서 아무와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군중을 선동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런 사실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겨우 12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날짜는 이렇게 계산된다. 첫째 날: 예루살렘 도착, 둘째 날: 야고보 및 장로들과의 회의, 셋째-아홉째 날: 정결예식, 열째 날: 산헤드린 의회, 열한째 날: 살해음모, 열 이틀째 날: 가이사리아 이송. 이런 짧은 기간에 바울이 사회를 소란하게 할 만한 사건을 저지를 수 없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2) 바울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발은 아무런 증거가 없다.
자신을 향한 고발 내용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더 규정한다. 물론 이 내용은 누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14절을 보자. “다만 제가 각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했듯이 80년대에 그리스도교는 이단, 또는 소종파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누가는 지금 그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누가에 의한 바울의 변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사람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 구약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울은 지금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구약성서가 최종적으로 유대교의 경전으로 결정된 때는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10여 년 전인 기원후 70년(얌니야 회의)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구약성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오늘 본문의 진술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왜 유대교로부터 분리 독립된 것일까? 여기에는 역사의 우연성이 작용한다. 정치, 종교, 사회적 충돌 사이에서 스스로 독립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우연하게 작동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출현이 우연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동시에 필연성도 작용한다. 그것은 곧 예수 사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오늘 본문은 주로 부활을 다루고 있는데,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키워드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인간 구원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무리 유대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곧 구원이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특히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라 할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부활 사건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업적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어둔 공동체였기 때문에 율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유대교와 불편한 동거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뉘앙스와 약간 차이가 나는 논리로 전개된다.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부활 일반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15절 말씀을 보자. “그리고 저를 고소하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느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진술은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를, 즉 유대교로부터의 박해를 피해야 한다는 위기상황을 전제하지 않으면 오해받기 안성맞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의 토대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는데,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는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우리도 역시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을 믿는다.
오늘 바울의 변론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이 유대인들을 선동한 적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다. 데르딜로가 마지막으로 논고한 성전 훼손 문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 문제는 자신이 유대인을 선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포함된 것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지금 산헤드린 의회로부터 고소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행위라는 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가는 지금 바울의 재판을 통해서 당시 그리스도교의 결백을 사람들에게 변론하고 있는 중이다.
총독 펠릭스
논고와 변호가 끝난 다음에 내려져야 할 총독의 선고가 유보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대장 리시아가 내려 온 다음에 공판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누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펠릭스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지만 그런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총독은 치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여러 정보망을 통해서 얻어들은 게 있었을 것이며, 더구나 며칠 후에 펠릭스와 함께 바울로부터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유대 여자라는 사실은(24절) 펠릭스의 종교적 취향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은 누가의 이런 글쓰기는 재판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고 한다.
어쨌든지 펠릭스는 공판과 선고를 연기하면서 피고인 바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친지들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펠릭스는 비교적 사태를 원만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고위 관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펠릭스는 부패한 총독이었다. 아내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드루실라는 처음에 코마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약혼을 했다가, 나중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한 에메사의 왕 아치스와 결혼했다. 펠릭스는 키프로스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 아토모스를 통해서 이 여자로 하여금 남편을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게 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뇌물을 좋아하는 관리였다는 것도(26절 참조) 사실이다.
누가는 펠릭스 총독이 공판을 연기한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는 후임 총독 보르기오 페스도가 부임할 때까지 2년 동안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다. 펠릭스는 뇌물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또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 누가는 펠릭스의 상을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으로 구별한다. 이게 모순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실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의로운 사람인 바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역사의 비극이며, 현실이다. 바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제 펠릭스를 역사에서 퇴장시키고 페스도를 등장시킨다. 그는 바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울을 고소하는 더들로
사도행전 24:1-9 / 서금석 목사
한국어판 Reader's Digest 금년 7월호 표지 이야기로 「산 사나이 엄홍길의 끝없는 도전」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대표적 산악인 엄홍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 금년 8월호에는 산악인 엄홍길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 세계적으로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산맥 중에 8000m 이상 되는 14고좌를 등반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바로 우리 나라의 엄홍길입니다.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인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처음 올랐지만 첫 등정에 실패했습니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지만 강풍에 몸이 50m나 날아갔다가 로프에 매달려 겨우 살았습니다. 그는 88년 세 번째 도전 끝에 정상을 밟았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여섯 번 도전해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왜 나는 하는 것마다 안되나 싶어 그만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면 지금은 산에 다니지 않을 겁니다. 쓰러지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죠. 그 뒤로는 정상만을 고집하는 욕심을 버렸습니다."
85년부터 15년 동안 오른 14고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의 영광의 기록 뒤에는 꼭 14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14번의 실패란 14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틀 동안 눈 속에 갇혀 텐트 없이 야영을 해야 했고 (비바크) 92년 남가파르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오른 쪽 엄지발가락을 잘라야 했습니다. 강풍에 몸이 날아가 죽을 뻔한 일은 부지기수. 98년 네 번째 시도한 안나푸르나 등정길에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크레바스에 미끄러진 셰르파를 구하려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오른 쪽 발목이 180°돌아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발목으로 응급조치를 하고는 이틀하고 반나절 동안 걸어 5100m의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다고 하는 산악인 엄홍길 그는 41세의 나이에 한국 외국어 대학 중국어과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도전과 모험-이것은 산악인 엄홍길 뿐만 아니라 의미있게 살아온 인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정신입니다. 도전과 모험의 치열한 정신을 잃어버릴 때 삶은 평안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건조해지고 의미도 상실되기 쉽습니다. 산악인 엄홍길의 끝없는 도전 정신이 저와 여러분 속에 언제나 살아 있었으면 합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2년이나 머물게 됩니다. 로마 시민권자로서 정당한 재판을 받고 빨리 자유의 몸이 되기를 원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에게로 온 후에 세 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첫 번째는 벨릭스 총독에게, 두 번째는 벨릭스의 후임이었던 베스도 총독에게 세 번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24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 받는 내용이고 25장은 베스도에게 재판받는 내용이고 26장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받는 내용입니다. 재판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 때문이든 나쁜 일 때문이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요.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辯士)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2절에 총독 벨릭스가 바울을 부르고 아나니아가 데려온 더둘로가 고소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정식 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변사 더둘로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변사란 한마디로 변호사와 같은 것인데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변호사 제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둘로는 헬라계 유대인으로 유대법과 로마법 모두에 정통한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왜 아나니아가 변사 더둘로와 함께 왔을까요? 바울을 제대로 고소하려면 로마법 절차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더구나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려면 뛰어난 언변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더둘로를 앞세워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에게 와서 바울을 고소합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몇몇 장로들까지 함께 왔습니다. 대제사장이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대제사장은 본래 성전에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이 대제사장의 중요 직능입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성전을 떠나서는 안되지요. 그런데 그는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바울을 고소하려고. 어떻게 하든 바울을 죽이겠다는 일념뿐입니다. 누구에게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총독 벨릭스. 총독 벨릭스는 분명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정통적인 유대 사람은 이방인 만나는 것조차도 꺼려합니다.
더구나 자기발로 이방인이 거하는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되지 않습니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발로 갔습니다. 이방인 총독 앞에 자기 민족인 바울을 고소하는 고소인 자격으로 섭니다. 여러모로 보아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자 이제 재판이 시작되어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말을 시작합니다.
1. 벨릭스에게 아부하는 더둘로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感謝無地)하옵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더둘로가 서두에 벨릭스 총독에게 인사를 하는데 내용은 대충 세 가지입니다. 우리는 각하의 덕분에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의 덕택으로 이 나라에서는 개혁을 많이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으로나, 또 어디에서나, 이것을 인정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아첨입니다. 왜 더둘로의 말이 낯간지러운 아첨인가는 벨릭스 총독의 사람됨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지요. 노예출신으로 총독까지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가 총독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총독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쓰고 하는 짓은 노예 같았다는 말입니다. 잔인했습니다. 못된 짓 많이 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벨릭스가 하도 정치를 악하게 하자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벨릭스는 암살단을 보내 대제사장을 죽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더둘로를 앞세워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각하 덕분에 평안을 누리고 있소.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이 나라가 많이 개혁됐습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이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하고 있으니 어디 제정신 가진 사람입니까?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유대민족의 자존심을 포기하면서 이런 말 쉽게 못하지요. 생각해 보면 이런 말하는 것은 반민족적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로마총독과 대제사장과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화해하기가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 가서 "당신 덕분에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이 나라와 민족이 많이 개혁되었습니다. 어디에 가나, 누구나 다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믿음도 없는 짓 아닙니까?
어찌하다가 대제사장이 이리되었습니까? 그들에겐 단 한가지 굳은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울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을 꼭 죽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민족의 자존심도 신앙도 다 팽개쳐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원수 앞에서 '당신 덕분에 평안을 누리고 이 민족이 크게 개혁되어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아첨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든 총독 벨릭스의 비위를 맞춰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단을 얻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을 이 세상에서 없애야겠다는 일념에 도무지 해서는 안 될 아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동족인 바울과 그렇게 원수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민족의식, 민족의 자존심을 모두 던져 버리고는 입에 담기 어려운 아부를 하고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 - 무서운 일입니다.
4절에서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이시기 원하나이다"
이 말씀은 '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간단하게 말씀드릴 터이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할 말이 많지만 총독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간단하게 핵심만 말하겠다는 의미이긴 하지만, 변사로서 재판 절차 과정에서 총독에게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대단한 노련함을 나타냅니다.
2. 더둘로가 고소하는 바울에 대한 세 가지 죄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는 바울에 대한 고소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소요죄입니다.
바울은 온 천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라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로마 총독들이 점령국을 지배하면서 다른 문제들은 비교적 너그럽게 지나가면서도 소요사건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나니아 일행이 얼마나 치밀하게 재판을 준비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떻게 하면 총독 벨릭스가 화가 나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판결, 자기들이 원하는 판결을 내리게 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울을 소요죄로 고발하는 것입니다. 당시 총독 벨릭스는 유대를 통치하는 동안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여러 소요 사건의 주동자들과 추종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학살했습니다. 소요죄는 결국 반란 음모죄이고 사실이라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아나니아 일행은 바울의 순수한 신앙고백적 행위를 정치적 혁명세력과 연관시켜 바울을 처벌당하게 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불만을 정치적 선동죄로 뒤집어 씌워 로마로 하여금 바울을 처형토록 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2. 나사렛 이단(異端)의 괴수(魁首)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말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당시 예수의 제자들 및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들을 무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표현이 나사렛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짓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단이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단이라기보다 한 당파를 의미합니다.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바, 유대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적 당파였고 목숨을 걸고 예수의 도(道)를 전하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민심을 소란케 함으로 로마 당국의 골치를 썩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도 21장에서 바울을 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의 거짓 선지자로 오인한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면 로마에 의하여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중죄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3. 성전 모독 죄입니다.
성전 모독 죄는 직접적으로 로마법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 제국은 유대 종교에 대하여 최대의 관용을 베풀고 있었으므로 유대법 상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성전 모독 죄를 강력히 내세운 것입니다. 즉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로마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대 당국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한 것 자체가 부당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이 로마법 상으로나 유대법 상으로나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완벽한 논리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3. 이 사람은 염병(染病)이라-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더둘로는 바울을 일컬어 염병같은 자라 했습니다. 염병이 무슨 병입니까? 보통 장티프스를 염병이라 하는데 원어로 보면 염병, 로이모스(λοιμ?s)는 흑사병을 가리킵니다. 이 병에 감염되기만 하면 치명적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형편없는 사람을 욕할 때 쓰이기도 하는 말이지요. '염병 앓 놈.' 더둘로가 바울에게 '염병 같은 자'라고 말한 뜻은 바울이 세상에 해로운 사상을,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야기인데 몇 가지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몇 가지 의미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염병 걸리면 변합니다. 염병 걸렸는데 안 걸린 사람과 같겠습니까? 아니지요. '복음은 염병과도 같다' 좀 느낌은 이상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3:33에서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루 속에 누룩을 넣으면 어찌됩니까? 시간이 지나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지금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나쁜 의미로 '염병 같은 자'라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아주 좋은 말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으면 반드시 변합니다. 예수 제대로 믿게 되면 반드시 변합니다. 안 변하는 것이 문제이지 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반드시 변합니다. 성격도 변합니다. 생각도 변합니다.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취미도 바뀝니다. 인간관계도 달라지고 세계관, 가치관도 변합니다.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 말씀을 바로 듣지 않는데 믿어지겠어요?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데 변하겠어요? 말씀이 들어가면 반드시 변합니다. 병균이 들어가면 병 걸리지요. 복음은 염병 같아 했지요. 병은 변화를 반드시 일으킵니다.
기왕에 예수 믿는 것,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점잖게 예수 믿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점잖게 예수 믿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일에 점잖게 차려 입고 교회에 가서 점잖게 예배드리는 것. 1주일에 딱 한 번. 그러다가 은혜 받고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예배드리고, 거기다가 새벽기도 나오고 무슨 훈련이다 봉사다 나설라치면, '예수 꼭 그렇게 믿어야 되느냐? 빠지지 마라' 빠질까봐 겁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매일 운동합니다. Golf를 치는데 1주일에 2번씩 Green에 나갑니다. 그러면서도 Golf 칠 때마다 자기는 Golf에 갈증을 느낀대요. 중증이지요. 운동은 하면 할수록 좋지요. 형편만 되면. 그런데 신앙생활 1주일에 한번 딱, 점잖게 예배드리고 나서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욕심이지요. 오래 걸리지요. 나는 먼저 우리 성도들이 예수병에 걸렸으면 좋겠어요. (이미 걸린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이왕이면 중증 예수 병에 걸렸으면 좋겠어요. 예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고 가만히 있으면 찬송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고 새벽마다 기도하면 하루 종일 힘이 넘쳐 나고 토요일이면 주일 예배와 말씀이 기다려지고 하나님 사랑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말씀을 읽으면 은혜가 마음에 흘러 넘치고 누군가 만나면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고 이것 저것 생각해도 그저 감사하기만 하고 며칠 만 보지 않아도 속도원이 보고 싶고, 선교회원이 보고 싶고, 장로님, 목사님이 보고 싶어지고. - 이런 증상이 예수병 걸린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예수병에 심하게 걸렸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게 됩니다. 역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 병을 심하게 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금 먹으면 반드시 물먹게 되어 있습니다. 7월 마지막 주간(8월 초에 걸쳐)에 서울 관악지방 여름 산상 부흥회가 강화도에 있는 성광 수도원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춘천중앙교회와 교회 건축을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면 지나친 자랑이 될 것 같아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사실은 얼마나 교회 얘기가 하고 싶었던 지요. 두 가지 때문에 말 잘 못했어요. 교회 부지가 1만 8천 평이라면 서울 사람들 그냥 기죽지요. 이만한 시설과 조건 쉽지가 않지요. 가끔 집에 있으면 교회가 오고 싶어져요. 누가 교회 건축에 대해 묻기만 하면 (묻는데 대답 안 할 수야 없지요) 신나요.
교회 생각하면 말 안 하기가 쉽지 않아요. 시험 잘 본 학생, 성적 얘기 안 하기가 쉽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은혜 받았는데 그 은혜 말 안 할 수 있어요? 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소금 먹었는데 물 안 먹어요? 어떻게 그렇게 좋고 귀한 은혜를 받았는데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도 변해야 하지만 이웃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누룩이 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지 않습니까? 은혜 받으셨습니까? 전하세요. 나누세요.
더둘로가 바울을 가리켜 염병같은 자라고 한 말은 맞는 말입니다. 병은 반드시 전염됩니다. 병 걸리면 반드시 변화됩니다. 그러나 염병은 나쁜 병이지만 예수병은 좋은 병 아닙니까?
정리
민족의 자존심과 신앙까지도 접어두고 어떻게 하든 바울 하나 죽이려고 더둘로를 앞세워 아부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 그가 고발하는 바울의 세 가지 죄. 그러나 저는 바울을 일컬어 '염병이라'고 한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병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나누어 이웃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은혜 받읍시다. 깊은 은혜 속에서 예수를 믿읍시다. 그 예수를 소금 먹고 물먹는 것처럼 전하며 / 나누며 사시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나사렛 사람처럼
행 24:1-9 / 이윤재 목사
일년중 가장 무더운 8월 첫주입니다. 전국의 날씨가 매일 경신되는 뜨거운 날씨에 여러분을 시원한 곳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한강이 발원되는 강원도 태백에 가 보셨습니까? 제가 오래전 태백에 있는 예수원을 다녀왔는 데 예수원 방문을 마치고 한강이 발원한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이름을 검룡소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함께 가 보시죠(동영상). 여러분, 한강이 얼마나 큰 강입니까? 남한강, 북한강 모두 합쳐서 총 길이가 497,25Km입니다. 이 큰 강이 이렇게 작은 수원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태백에는 한강 수원지 뿐 아니라 낙동강 수원지도 있습니다(사진1). 황지 연못이라고. 낙동강은 한강보다 더 깁니다. 그 큰 강이 이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왜 수원지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8월은 우리 교회가 시작된지 입당 20년 기념주일이 있습니다. 1996. 10.13, 허허벌판 판교의 빈들에서 기공식을 가진 우리 교회는 약 2년만인 1998.8.15, 민족이 해방을 맞은 역사적인 광복절에 봉헌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 날, 8.16, 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20주년이 바로 다음 주, 8.12(일)입니다. 그러면 어느 교회나 공동체나 그를 존재하게 한 수원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한신교회가 여기 있다면 그것이 시작된 수원지는 어디 일까요?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그 우물을 판자를 기억하라”라는 유대인 속담이 있습니다. 한신의 우물이 여기 있다면 그 우물을 판 자는 누구일까요? 그 분은 당연히 이 교회를 창립한 고 이중표목사님입니다. 그러나 우물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우물을 판 자와 우물 물의 근원은 다르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우물을 팟으나 그 우물에서 나온 샘의 근원은 조금 더 올라가야 합니다.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우리는 강원도 태백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가장 잘 베워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복음과 삶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실제로 이중표목사님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분도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8월에 5주에 걸쳐 우리 신앙의 샘의 근원이 된 사도 바울의 믿음과 삶을 추적하고 그 뿌리에서 우리 교회의 영적 수원지를 탐험하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바울이 로마에 끌려가기 전 총독앞에서 재판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모두 다섯 번 재판받았는 데 그중의 한번이 오늘 벨릭스 총독에게 받은 것입니다. 이 재판은 더둘로란 사람이 바울을 고발하여 그를 총독앞에 세움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는 데 더둘로는 이렇게 바울을 고발합니다. 행24: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을 전염병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여기에 “나사렛 이단”이란 말이 옵니다. 여기서 “나사렛 이단”은 누굴까? 나사렛 이단과 사도 바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다가 초대교회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행11장입니다. 행11: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더라”. 이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핍박때문에 흩어진 사람들로서 지금 터키 남부 지역에 있는 안디옥에 피난민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믿은 사람들이 생겼는 데 그들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이 대략 주후 50년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후 30년경에 죽고 부활했는 데 주후 30년에서 50년, 약 20년동안 예수믿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자, 이 도표를 보시죠.
주후30년경(예수님 죽고 부활) ? 주후 50년경(안디옥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주후 30년경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안디옥의 성도들이 주후 50년경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그 사이 20년간 초대교회를 이룬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들”입니다. 다시 도표를 보시죠.
유대인: 나사렛 사람들(주후 30년-주후 300년경)
예수님(주후 30년경)
이방인: 안디옥의 “그리스도인” (주후 50년경-현대)
예수님이 주후 30년경 죽고 부활하신 후 처음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12제자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성도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성경은 “나사렛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가 주후 50년경 스테반의 순교 이후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새롭게 형성된 기독교 중심지가 지금의 터키 안디옥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의 전도로 많은 헬라인, 로마인등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전도한 이방인 교회를 이끌며 오늘까지 2천년 교회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 두 종류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믿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나사렛 사람들”, 안디옥을 중심한 이방인 중심의 “그리스도인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나사렛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예수님도 나사렛 출신이라 “나사렛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적으로 나사렛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 거의 그들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재판에서 더둘로가 이 사람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요 가는 곳마다 마치 전염병처럼 예수를 퍼뜨려 천하를 어지럽게 한 자라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나사렛”이 어딘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갈릴리 남쪽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보금자리형 도시입니다(사진). 이 도시가 지금은 이스라엘의 5대 도시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1955년부터 기독교인 고고학자가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 시대의 나사렛은 인구 겨우 120명에서 15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후 500년이 지난 6세기 중엽에 쓰여진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갈릴리 지역의 마을 65개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나사렛은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6세기 까지 나사렛은 갈릴리지역의 65개 마을 속에 들지 못한 어주 작은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말합니다. 요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겠습니까? 그 정도로 나사렛이 작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중에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삽니다. 주일이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닫습니다. 성지순례할 때 반드시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나사렛입니다. 문제는 나사렛 사람들이 가졌던 신앙입니다. 예수님 부활후, 나사렛을 중심으로 살았던 초대교회 나사렛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것이 우리의 우물의 근원입니다. 우리 믿음의 수원지입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나사렛 사람의 우물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1. 열심있는 믿음
먼저 열심있는 믿음입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행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을 전염병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당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볼 때 초대교회 나사렛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열심이었습니다. 그것을 5절은 “전염병 같다”고 말합니다. 옛날 말로 하면 이 말은 “염병 걸렸다”는 말입니다. 열병은 열이 심하게 나 헛소리하고 머리가 빠질만큼 아픈 병입니다. 너무 열이 나니까 머리가 돌아버린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미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온 몸에 열이 날만큼 열병이 걸린 적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한 가지를 열심히 하다가 미쳐본 적도 있습니까? “열심”이란 말을 영어로 “인슈지애지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테오스” 즉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열심 있다는 것은 하나님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게 붙들리면 그때부터 사람은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미친다”, “미쳤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자주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막3:20-22,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삭사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본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안에 바알세불 귀신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인테오스”, 신이 들어가면 사람은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미친 여자 시리즈”라는 것이 있습니다. “10억도 없으면서 강남에 사는 여자, 20억도 없으면서 자식을 유학 보내는 여자, 30억이 있으면서 손자 봐주는 여자”. 이런 여자는 미친 여자라는 겁니다. 부산에 있는 태종대가 대학이라고 우기는 여자, 안중근 의사가 내과의사라고 우기는 여자도 미친 여자랍니다. “미친 남자”시리즈도 있습니다. “50대에 사업하겠다고 대출받는 남자, 60대에 이민 가겠다고 영어공부 하는 남자, 70대에 골프 선수 되겠다고 레슨 받는 남자, 80대에 장수하겠다고 보약 지어먹는 남자, 90대에 한 오백년 살겠다고 종합검진 받는 남자”, 우리 생각에 “미쳤다”는 말은 보통의 상식을 뛰어 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살아서 어떻게 성공합니까? 미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미쳐야 미치고 안 미치면 못미칩니다”. 바울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후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저는 2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많이 고생하고 힘도 들었지만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한 힘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그것은 제 가슴속에 타는 불입니다. 제 가슴에 속에 타는 불이 최고의 자산입니다. 가슴의 불꺼지면 다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제 속에 타는 불, 꺼지지 않게 도와 주세요. 제 가슴에 타는 불, 계속 타오르게 하옵소서”.
비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 아십니까? 우리속에 타는 불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존 맥스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은 가슴에 타는 불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감옥에 넣어 보라. 거기에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눈속에 파묻어 보라. 거기에 죠지 와싱턴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가난한 통나무집에 태어나게 해보라. 거기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소아마미에 걸리게 해보라. 거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귀머거리가 되게 해보라. 거기에 악성 베토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지진아가 되게 해보라. 거기에 아인쉬타인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삼진 1330개의 실패한 야구선수가 되게 해보라. 거기에 베이비 루스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귀먹고 말못하고 앞 못보게 해보라. 거기에 헬렌 켈러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사람의 꿈을 이루게 한 것은 가슴에 타는 불이다”. 여라분에게도 이 불이 있습니까? 가슴속에 인생의 불도 신앙의 불도 타오릅니까?
5절 중간을 다시 보십시오.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 “소요케 한다”는 말은 나사렛 사람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나사렛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상식적인 삶으로는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뒤집기 전에 우리가 미쳐야 합니다. 염병결려야 합니다. “인테오스”, 하나님의 신안에 있으면 우리가 미칩니다. 인생이나 신앙이나 이 하나님의 불이 여러분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이 열심이 있었는 데 그 열심은 어떤 열심이었습니까?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중세시대 어느 수도원에서 줄리어스라는 수도자가 평생 기도하며 살았답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꿈을 꾸었는 데 꿈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자랑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줄리어스에게 그 열심을 보여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자기 품에서 열심덩어리를 꺼내 그에게 주었습니다. 줄리어스의 열심덩어리를 받은 손님은 저울에 꺼내 달아보더니 “100근이나 되는군요” 했습니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속으로 매우 기뻤습니다. “내 열심이 100근이나 되다니…”.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열심덩어리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동안 분석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열심을 분석했더니 야심이 20근, 의심이 19근, 명예심이 30근, 기타 28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단 3근도 안되는군요”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열심히 중요하지만 대부분 나를 위한 열심히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의 열심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예수님에게서 왔고, 예수님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히3:1절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 “깊히 생각하라”는 말을 헬라어로 “카타노에사테”라고 합니다. 이 말은 “give attention to”,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말할 때 부하가 차례 자세로 듣는 자세입니다. 한 눈 팔지 않고 마음과 생각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집중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언제나 좋은 일은 의도적으로 집중할 때 생깁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향한 의도적인 집중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세상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나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열정은 집중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깊히 생각하라”. 깊히 생각해야 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깊히 생각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각나지는 않습니다.
타락한 육체적 본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우리가 결심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일을 예수님과 관련시키는 훈련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늘 물어야 합니다. 미국의 챨스 쉘던이라는 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을 오직 예수님께만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학시험, 취직시험을 앞두고 피곤에 지친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지치고 피곤하여 그만 때려 치우고 싶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생각합니까? 당연히 열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래야 해답이 나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는 데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회사를 그만 둘까를 말까를 고민하는 데 그때 가장 먼저 누가 떠오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떠오른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다. “예수를 깊히 생각하라”. “Give attention to Jesus ”,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어느날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도 쳤습니다. 막상 집을 나갔는데 갈 데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소주 한병을 마셨습니다. 시간은 점점 12시가 가까워 오는 데 정말 갈 데가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누가 떠오릅니까? 예수님입니까? 확실히 아닐 것입니다. 슬퍼서 어머니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속상해서 친구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올라야 해답이 있습니다. Jesus is the answer for everything. 예수님은 모든 것에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 해답됩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사 지원자를 면접할 때 늘 하는 질문이 있었답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 대부분의 선교사 후보자는 이렇게 말한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전 세계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여 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아직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님 밖에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갑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가 이렇게 말한답니다. “모든 동기가 다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이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당신을 끝까지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지켜줄 것은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빠지는 함정입니다. “왜 목회합니까?” “사명을 받았으니까요”. “왜 장로가 되었지요?” “교회 일할라고요”. “왜 성가대에서 찬양하죠?” “찬양을 좋아하니까요”. “왜 어린이 교사 하지요” “다음 세대가 우리의 희망이니까요”. 다 맞지만 이 대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과 지루함과 인내의 한계와 모독과 고난을 충분히 이기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해답이 있습니다. “Because I love Jesus”.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한다면 “ And he loves me, too”.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완전히 고쳐준 사건아니라 나를 완전히 바꿔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오른편 강도를 고쳐주셨습니까? 그의 모든 악행, 범죄, 나쁜 생각, 쩌들은 습관, 다 고쳐주셨습니까? 고쳐주지 않고 낙원에 갈 자로 운명을 바꿔주셨습니다. 민란을 꾸미고 사람을 죽인 강도 바라바를 다 고쳐주셨습니까? 그의 잘못된 가치관, 생활태도, 악한 습관, 생각을 다 고치셨습니까? 그대로 두고 예수님과 운명을 바꿔치기했습니다. 죽어야 할 바라바를 살리고 살아야 할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고치지 않고 바꿔주십니까? 고쳐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란 고치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와 예수님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가 살고 예수님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 우리가 살면 그때부터 성령으로 고치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변화는 고쳐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꿔서 고칩니다. 먼저 예수님과 바꿔서 살리고 살린 우리는 성령으로 고치십니다. 모든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안에 지금 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최고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3. 순교하는 믿음
나사렛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마지막은 순교하는 믿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면 그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나사렛에 가면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천사의 방문을 받은 수태고지교회가 있습니다(사진). 그 교회의 지하에 가면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중 가장 오래된 동굴이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이가 실제 살았던 동굴이라고 합니다. 그 동굴 기둥에는 낙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게노스와 엘피스를 도우러 오셔서.’ 그리고 거기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칼레스, 엘피디, 바울, 안토니스...”. 이 중에서 게노스와 엘피스는 열심히 주님을 믿던 나사렛사람이었습니다. 핍박의 시대에 그들은 붙잡혀 순교의 나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남아 있던 성도들이 그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낙서로 기둥에 쓴 것입니다. “주님, 오늘 순교하기 위해 잡혀간 게노스와 엘피스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를 도와주소서.” 당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잡혀 죽던 시대였습니다. 잡혀서 맹수의 밥이 되든지 십자가형에 처해지든지 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핍박의 시대에 잡혀간 사람도 순교자요 남은 자도 순교자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부활 후에 변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형제들은 변화되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좇았습니다.
이들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사렛에 남아 살다가 결국은 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 유다서를 쓴 유다가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다 순교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촌인 시므온은 120살까지 나사렛에 살다가 주후 107년 트라잔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고, 친동생 유다의 두 손자도 도미치안황제에 의해 순교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먼 친척 코논은 주후 249년 밤빌리아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순교의 믿음을 지키며 대략 주후 300여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요 나사렛 사람들이며 또한 우리들입니다.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 요시프 톤이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하에서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목숨을 바쳐야 순교는 아닙니다. 죽지는 않지만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교적 삶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일본에 한 나가노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도 교회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해서 저 북해도의 아주 작은 마을에 텐트를 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5년동안 신자가 한 명도 없었는 데 어느날 한 청년이 천막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반가워 달려갔는 데 콜록 콜록하면서 입에서 피가 나옵니다. 폐병환자도 중한 폐병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실망했지만 그를 있는 힘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그가 다름아닌 ”가가와 도요히꼬“, 곧 ”하천풍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아버지가 방탕하다가 기생에게서 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나마 5살에 부모가 죽고 큰 어머니, 곧 아버지의 첫 번 부인에게 얹혀 살다가 그나마 쫓겨나서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못먹어 폐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인생을 한탄하고 죽기고 마음먹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틀어 막으며 멀리 이곳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부모없이 살던 그에게 나가노 목사는 아버지처럼 대했고 못배운 그에게 나가노 목사는 훌륭한 선생이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면 밤새워 간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먼 훗날 그가 어떤 사람이 일본 최고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거지, 부랑아, 문둥이, 실직자들을 가슴에 안고 함께 먹고 함께 살았습니다. 어떤 환자가운데는 심한 치질 때문에 변이 나오지 않은 환자도 있었는 데 그때마다 가가와는 꼬창이로 변을 빼주고 하고 심지어 안되면 입으로 변을 빨아주기까지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너무 지나치게 한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우리 선생님은 나에게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내가 아플 때 한 잠도 자지 않고 나를 간호했습니다. 어떤 날은 내 속에서 나오는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합니다”. 나가노 목사는 일생 한 사람의 신자를 키웠지만 그 제자는 그 선생을 간데마다 자랑하고 다녀 나가노 목사는 결국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20년을 맞은 한신교회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배운대로 삽니까? 비울에게 배운대로 삽니까?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을 기억하시는 분들, “나는 목사님께 배운대로 합니다. 목사님이 나에게 그렇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에서 오직 에수님만 존귀히 되기를 원합니까?
나사렛 사람, 비록 적고 보잘 것 없는 무리였지만 오로지 예수님만 사랑하는 열심히 초대교회 순교의 시대 300년을 지킨 사람들, 그들의 열심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결국 죽음으로 로마를 이기고 세계를 소요케 하여 마침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든 것을 믿습니까? 우리도 이 믿음의 수원지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순교적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양향모목사 / 행 24:1-9
사도바울이 유대인 공회와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말이 나지 않아서 로마총독이 관할하는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 한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서 당시의 권력가들이 총집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인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함께 등장하고 로마 총독인 베릭스가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이름이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 지방에 파송된 로마군의 최고책임자인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바울을 이곳으로 보냈고 후일 총독이 이 재판을 위해서 다시 부릅니다.
우리가 당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면 더 이해가 잘 되고 좋기는 하겠지만 성경에서 그런 것까지 다 공부를 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이 이런 재판을 받는 과정이 전 세계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 의한 새로운 구원을 시작하시는 아주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사탄이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기 위해서 세상의 권력들을 다 동원해서 복음전파를 막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재판을 통해서 당시 유대교와 새로 출범한 기독교가 서로 다툼을 벌리고 있는 쟁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유대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그냥 누가 쓴 소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역사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 오셔서 이런 일들을 진행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실제로 역사 속에 있었던 유명한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실명을 써서 그들이 누군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교 지도자인 아나니아라는 대제사장이 총독이 주관하는 법정에 와서 바울을 고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고발하는 내용 중에 바울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라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본문 1-3절에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계획을 들은 천부장이 밤중에 몰래 군사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총독에게 보냈고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총독에게 가서 정식으로 바울을 고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닷새가 지났고 천부장의 말대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울을 고발하러 총독에게 왔습니다. 유대교 최고의 지도자인 아나니아라고 하는 대제사장이 장로들을 대동하고 또 특별히 더둘로라고 하는 변호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피고인인 바울을 변호하러 온 것이 아니고 원고 측 변호인으로 왔습니다.
본문에는 변호사인 더둘로가 우선 총독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둘로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거짓말쟁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원래 이름인지 나중에 붙여진 별명인지는 잘 모르지만 세상에 이름을 지을 것이 없어서 거짓말쟁이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말을 하는 것 보니까 평소에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거짓말로 죄 없는 사람을 죄인을 만들기도 하고 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 이 사람이 주로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보통 총독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먼저 좋은 말로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짓말로 아부를 하고 있습니다. “벨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오랫동안 평안을 누려왔습니다.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이 나라가 여러 가지로 개선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각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현대인성경 번역)
각하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우리가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고 각하의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나라가 여러 가지로 개선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각하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총독 벨릭스가 아주 악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 사람은 노예출신입니다.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되었고 총독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그가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에 아니라 돈으로 권력을 매수해서 이 자리까지 오르게 된 사람입니다.
노예출신이 총독이 되었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돌보아주면서 선한 정치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노예근성으로 더 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어렵고 가난한 때를 보상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더 착취하고 더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탁월한 지도력 때문에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 때문에 불안에 떨고 살았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고발을 당해서 그 자리에 쫓겨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감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지만 총독과 너무나 반대 되는 말로 아부를 하고 거짓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 아부로 인해 아부를 하는 사람이나 그런 칭찬을 듣는 사람이 다 어려움을 당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로 칭찬을 잘 합니다. 인사치례의 가벼운 칭찬은 괜찮겠지만 너무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칭찬을 하기 시작하면 자꾸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한 두 번은 고맙게 듣지만 나중에는 아 이 사람은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취급을 당해버립니다.
칭찬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칭찬을 할 때 정말로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진지하게 칭찬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것을 오히려 칭찬한다든지 거짓 칭찬을 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해롭습니다.
칭찬을 듣는 사람도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 칭찬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거짓 칭찬에 우쭐대고 교만하게 되면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이런 아부성 칭찬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이런 거짓 칭찬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으로 정말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로 건국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백성들에게 욕을 먹고 망명을 해야 했던 원인은 밑에 있는 사람들의 거짓 칭찬 때문이었습니다.
각하 잘 돼갑니다. 각하가 없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계속해서 각하가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됩니다. 이런 아부 때문에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장기집권을 하려다가 그런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분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이 주변의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여론을 조작하고 당신이 최고라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고 욕을 먹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말은 하나님께만 할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통해서만 그들이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갈 때 그들의 삶이 개선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이렇게 사람에게나 아부하고 세상권력에 따라 살려고 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큰 은혜인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채 안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당하고 성전도 다 무너지고 2천여 년 동안을 나라도 없이 떠돌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권력에 아부하고 의지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외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복음전파를 방해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4절에서 9절까지는 변호인인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원고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대신해서 바울의 죄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죄가 많지만 총독각하를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큰 죄 몇 가지만 고발을 한다고 했습니다.
1) 전염병 같은 자라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전염병이란 한 사람이 아프면 그를 아프게 한 세균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돼서 그 사람도 아프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꼭 육체적인 질병에만 이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잘못된 사상이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니까 마치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사람들이 바울을 만나기만 하면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만나기만 하면 다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나쁜 길로 인도하는 전염병 같은 사람으로 고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세계만방에 퍼지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가 바울과 함께 하심으로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그것도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 하나님의 일을 염병으로 취급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나쁜 길로 끌고 간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말대로 “우리가 보니”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냥 타락한 인간의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염병으로 보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2)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많이 연구한 유대인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었는데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난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고발하는 사람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유대교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기독교는 이단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작은 하나님으로 구약성경으로 같이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꼬리가 다른 이단으로 보지만 기독교는 유대교를 꼬리가 없는 잘못된 집단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따르지 않은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여서 천하게 여겼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면서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그리스도가 되심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3) 성전을 더럽게 함으로
바울의 죄목을 성전을 더럽게 한 죄라고 고발을 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과 다니는 것을 보고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감으로 성전을 더럽힌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전을 더럽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서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마21:13)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장사를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통해서 성전 제사를 통해서 그들의 이익을 챙김으로 성전이 장사하는 곳으로 바뀌게 하여 더럽혔습니다. 성전의 의미나 제사의 의미도 모르고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지 못함으로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성전이 이렇게 장사의 도구로 사용될 것을 아시고 다윗이 성전을 건축한다고 했을 때 다른 이유를 대면서 건축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 왕 때 와서 성전건축을 허락하시기는 하셨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던 대로 성전이 우상이 되고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성전은 없습니다. 교회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일 뿐입니다. 성전은 우리의 몸이 성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당 건물이 성전으로 일컬어지고 예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큰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교회당 건물을 자랑합니다.
교계 신문을 보면 교회를 소개하거나 광고를 할 때 빠짐없이 나오는 사진이 교회당 건물 사진입니다. 교회당 건물 사진이나 목사님 얼굴 사진이 자랑거리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얼마나 정확하게 선포되고 성도들이 얼마나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성도다운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교회일수록 목회자들이 재산을 탐하여 세습을 하고 부도덕한 삶을 삶으로서 성전이라고 하는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런 당치도 않은 것들을 가지고 바울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죄목으로 그들 자신들이 벌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른 진리를 따르는 바울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도 이런 아첨꾼들 때문에 세상이 바로 서지 못하고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복음을 따르는 우리들이 고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세계만방에 전파되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전염시키는 사람들
김상수목사(안흥교회) / 롬 8:1-2,행 24:5
몇 일전 핸드폰을 통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메르스바이러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를 조심하라는 글을 받았다. 아마 동일한 내용의 글이 SNS를 타고 급속히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수년전에는 사스, 신종플루가 유행했고 얼마 전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것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메르스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 현재까지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치사율이 40%에 이른다고 한다. 과거에는 듣도 보지도 못한 악성 변종 바이러스들이 계속 출몰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공포감과 함께 급속히 이와 관련된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요즘 유행하는 감기 독감 바이러스만 해도 얼마나 독한지 우리들이 실감하고 있다.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예전에 모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7500만 명 목숨 앗은 ‘흑사병’ 세균 지금도 떠돈다(2011.10.14 중앙일보).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이란 페스트(Pest)를 말한다. 이것은 페스트균의 감염으로 일어나는 급성 전염병인데, 주로 순환기 계통에 심한 고통과 40도 전후의 고열을 내며, 대부분 발병 후 24시간 이내에 사망하게 된다. 주로 벼룩이나 쥐 등이 사람에게 페스트균을 옮기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망 직전에 폐(肺) 페스트 환자는 피부가 흑색이나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렀다. 지금 유행하는 메르스바이러스도 더 무서운 질병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갖가지 형태의 재앙들이 쉬지 않고 인간을 괴롭혀 왔는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것 중의 하나가 1347년에 시작돼 1351년까지 5년 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黑死病·plague·일명 페스트)이다. 당시 서유럽 인구의 30~50%인 7500만 명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인데 고려의 인구가 21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희생자 숫자로만 본다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역병(疫病)임이 분명하다. 페스트는 19세기 말 파스퇴르가 페스트균을 발견하기까지 많은 고통을 인류에게 주었다. 영국의 BBC 등의 보도에 따르면 독일·캐나다 연구팀은 영국 런던시내 흑사병 사망자 매몰지에서 발굴된 유골의 치아 조직으로부터 페스트균을 얻어내서 DNA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14세기 당시에 대유행했던 페스트균이 요즘도 매년 전 세계에서 2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모든 페스트균의 조상이고, 그것에서 변형된 각종 균들이 새로운 전염병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병균 바이러스의 문제는 과학이 발달하면서 단지 육체적인 질병에만 국한 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최근에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상의 각종 바이러스도 문제가 되고 있다. 원자력이나 핵무기 등도 컴퓨터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컴퓨터의 오작동에 의한 재앙이 인류에게 올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육체적인 질병을 유발하는 질병이나 컴퓨터 바이러스들 보다도 더 심각한 악성 바이러스는 ‘인간 바이러스들’이다. 독한 세균보다 더 독한 인간 바이러스들은 사람들의 관계를 분열 시키고,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하고, 상습적으로 상처를 주며, 폭력적이며,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게 만드는 인간 바이러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罪)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라는 악성 바이러스 파일이 인간의 하드웨어 속에 침투해서 영혼육의 온갖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각종 질병을 유발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각종 삶의 질서들을 파괴함으로해서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 아침에 눈만 뜨면 죄짓는 생각을 하고, 죄짓는 행동을 하고, 종일 그리고 평생을 죄 가운데 살게 만든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8:2의 말씀에서 언급된 것처럼 ‘죄와 사망의 법’아래에서 꽁꽁 묶어 놓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성 죄악 바이러스들은 언제부터 인간에게 유포되기 시작했는가? 죄악 바이러스는 인류역사 초기에 침투해 들어와서 첫 사람 아담 하와 때부터 감염되기 시작해서(창세기3장 사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다 퍼져 있는 무서운 죄악 바이러스이다. 이 질병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부부간에도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망하고 싸우고 다투게 되었고, 형이 동생을 때려 죽이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작게는 한 개인, 한 가정의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간의 수 많았던 전쟁과 대학살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죄의 병균에 감염되어서 나타나는 증상들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이 병균에 감염되면 사람이 감염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비옥하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창 3:18)를 내게 되고 인간은 땀 흘려 노동해야 겨우 먹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증상들을 나타내다가 결국은 다 사망(死亡)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 사망은 그냥 생명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옥의 불못에 떨어져서 고통하게 되는 것이다(계 20:14).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죄의 병균에 감염되면 그 특징 중의 하나가 전혀 자기가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서운 파괴(인격, 가정, 인간관계, 사회)와 살육을 저지르면서도 자기들이 가장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상하게 바보 같은 짓들을 하면서 가장 고상하고 심오한 무슨 일을 하는 줄로 알고 그 어리석은 짓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무나 돌 또는 금속 같은 것들로 사람 모양의 물건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가 음식을 차리고, 피를 뿌리고, 복을 달라고 무수히 절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잠자는 신을 깨운다고 박수를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우기도 한다. 소나 쥐, 원숭이, 뱀 같은 짐승들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수 많은 고통과 죽음 그리고 이상한 행동들 하게 만드는 이러한 죄악 바이러스를 우리의 속에 유포한 범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어둠의 세력, “옛 뱀, 곧 마귀 사단”(계 20:2)이다. 이 사탄의 손아귀에 한번 사로잡히면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빠져 나오지 못한다. 더구나 마귀는 끊임없이 각종 죄악의 변종 바이러스, 악성코드 같은 것들은 무차별 뿌려댄다. 아무리 우상을 섬기고 미신을 믿고 귀신을 달래도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결국 멸망에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전 인류가 모두 이 죄의 병에 감염되어 고통 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죄를 없이 하시며,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고, 인류를 이 죄의 질병에서 고치시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시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죄의 근원인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요일 3:8),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셨다(히2:14-15).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어떤 악성 죄악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의 시스템(가정, 직장, 인간관계 등)가 완전히 망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피가 그 모든 죄악의 세균들을 완전히 없애고,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시고, 성령님은 말씀의 검(수술도구)으로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골수까지 쪼개어 수술하신다. 그래서 마침내는 죄악 바이러스로 오염된 사람이 오히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인간백신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같은 사람이 그 좋은 실례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에게 염병(a real pest)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염시키는 사역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확신 있는 믿음의 선포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a real pest)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행24: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더 나아가 이 사회나 악성 죄악 바이러스로 망가졌고, 그것을 유포하는 어둠의 영 마귀사단을 이기고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라는 백신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을 변화시키시고 그의 삶을 수술하신 생명의 성령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성령님을 내 마음의 거주자가 수준 정도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인정하고, 계속적으로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일종의 영적인 능력의 백신)을 받자. 그래서 파괴된 삶, 가정, 정신, 영적인 모든 것이 회복되게하자. 뿐만아니라 더나아가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전염성이 강한 성도와 교회가 되어서, 가정, 지역 열방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
행 24장 1~9절 /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여러분은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교통법규를 어겨서 간 것 말고, 진짜 재판이 걸려서 법정에 서 본 경험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뉴스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을 보면, 특히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일제 법정에 서는 장면을 보면, 저쪽에서 말도 안 되는 고소를 하고 없는 죄목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울분을 참지 못하다 제지를 당하거나 그냥 참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법정에 서서 억울한 고발을 당하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했다고 죄목을 씌우면 억울함을 느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를 당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고발을 당했습니다.
1. 벨릭스에 대한 아부 (1~4절)
지난 2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여 명의 유대인 암살단과 대제사장들은 로마군 요새 안에 갇혀 있는 바울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에 대해서 더 물어볼 것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바울을 다시 산헤드린 공회로 불러오도록 천부장의 허락을 구하면, 암살단원들이 로마군 요새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해서 바울을 암살한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음모가 바울의 조카에게 알려졌고, 그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로 그날 밤에 470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여 로마 시민인 바울을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로 이송했습니다. 바울을 암살하려고 했던 대제사장 무리와 암살단원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관련된 한 전설(?)이 있는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던 40여 명의 암살단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맹세 때문에 굶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약 65마일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그 정도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65마일이나 떨어진 가이사랴로 이송되었다고 해서,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을 없애려는 계획을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1절)
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된 지 5일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몇몇 장로들과 함께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갑니다. 자기들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라는 사람과 몇몇 유대인들까지도 데리고 그곳으로 갑니다(9).
주후(AD) 48년부터 59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아나니아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출신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성전에 바쳐진 십일조를 몰래 횡령했을 뿐 아니라, 적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는 폭력도 행하고 몰래 암살도 했던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고 영적으로 이끌어야 할 영적 지도자인데 암살까지 서슴지 않았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니까 당시 종교가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타이틀만 대제사장이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배 속만 채우는 종교 장사꾼이었습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요즘 여러 종교에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에도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서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기독교를 내세우고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하는 것을 보면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악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불의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 여러 명의 고소인단을 이끌고 멀리 떨어져 있는 총독 벨릭스의 가이사랴 법정까지 온 것입니다.
개역성경을 보면 대제사장 무리가 고용한 더둘로를 가리켜 ‘변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에서 나온 ‘레토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rhetoric’(수사법)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웅변가’나 ‘연설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의 시기가 대략 AD 58~59년경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별도의 자격이 없어도 누구든지 돈을 받고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변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그리스 수사학으로 무장한 웅변가들 중에서 법률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정식으로 전문 법률교육을 받은 정통 법률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법정 변론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법률 자문이나 정책을 세우는 일을 하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 법률가들은 그 당시 웅변가들이 직업적으로 법정에서 변론하는 데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더둘로도 정통 법률가가 아니라 웅변가 또는 연설가로서, 돈을 받고 자신이 가진 법적 지식을 가지고 변론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법정에서 변론한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변호사와 비슷하지만, 나라에서 준 법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웅변가내지 연설가였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변호사와 다릅니다.
바울이 로마 총독에게 온 이상, 대제사장 무리가 총독 법정에서 바울에 대한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천부장으로부터 바울을 고소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서 4일 동안 열심히 대책회의를 하고 더둘로를 데려다 변론하도록 하며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그들의 종교법만으로도 바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는 바울을 로마제국의 법으로 옭아매어야 했습니다. 로마법을 어겼어야 로마법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인 바울은 로마제국의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무리는 웅변가이자 법정에서 변호도 하는 더둘로라는 사람을 고용해서 총독의 법정에 온 다음, 바울에 대한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더둘로의 연설 기술과 웅변술을 이용하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또 더둘로는 돈을 받았으니까 최선을 다해 바울을 옭아매서 사형을 받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2-3절)
총독 벨릭스가 헤롯 궁에 갇혀 있던 바울을 법정으로 데려오니까, 더둘로는 수사학과 웅변술로 무장된 사람답게 총독 벨릭스에 대한 찬사로 먼저 시작을 합니다. 먼저 고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재판관인 벨릭스에 대해 찬사로 시작을 하는데, 이 찬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더둘로(Tertullus)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이며 라틴식 이름도 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다가 헬라인으로 바꾼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나 라틴어를 아주 잘하는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시의 수사학을 잘 사용하여 자신의 변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AD 52년부터 59년까지 유대 지방의 11대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총독으로 있는 동안 유대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소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노예 출신으로 총독이 되어 매사에 뇌물을 밝히던 벨릭스는, 심지어 도둑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는 도둑 떼를 방관하고 놓아준 사람입니다. 그에 의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좋아진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벨릭스가 로마 황제 네로에게 불려가게 되어 무대에서 사라지는데, 그것도 역시 그가 권력을 남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더둘로가 벨릭스에게 “벨릭스 각하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덤덤하게 말한 게 아니라 아주 크게 높은 톤으로 “오~~ 벨릭스 각하~~시여!!!”라는 식으로 아부하며 연기를 한 겁니다. 벨릭스 덕분에 백성이 태평을 누리고, 그의 선견으로 많은 것들이 개선된 것을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을 보십시오. “여러 가지로”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라고 하며 아부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 마구 띄워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실제가 아니라 가짜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벨릭스는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항상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물론 벨릭스 역시 유대인들에 대해 반유대인 감정을 기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네로 황제에게 벨릭스에 관한 탄원서를 올립니다. 그 기록이 요세푸스와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더둘로가 유대인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일방적으로 벨릭스에게 찬사를 보내며 특별히 ‘우리’ 즉 유대인들이 그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기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냥 겉으로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적대감을 해소하고 벨릭스와 유대인들이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지만, 실제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벨릭스가 재판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말입니다. 적어도 벨릭스가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쉽게 묵살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54년에 네로가 로마의 황제가 되면서 벨릭스와 그의 형인 팔라스가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덕분에 팔라스가 성공했고 그 덕분에 벨릭스도 그랬으며 원래 노예 출신이었던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까지 오른 것인데, 황제가 바뀌면서 위기에 빠졌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자기가 선 줄에 뭔가 이상이 생기면 위기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그 동안 폭정을 일삼았던 것에 대해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니까 그의 입지가 아주 좁아진 상태였습니다. 팔라스는 54년에 네로가 황제가 되자마자 잘려서 바로 사라졌고, 벨릭스는 그 후 5년이나 더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59년에 계모를 살해한 네로 황제가 드디어 벨릭스를 파면하고 소환합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59년에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벨릭스 앞에 선 때는 그의 통치 말기인 AD 57~58년 정도 됩니다. 2년 동안 가두어놓았다고 나오니까 이때가 57년 정도가 됩니다. 즉, 그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있고, 황제가 바뀌어 형도 파면당하고 아주 취약한 상태일 때 유대인 지도부가 와서 주장하는 것을 이전처럼 무시하고 강하게 거부하기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것을 알고 이 사람들이 와서 벨릭스를 찌르고 있는 겁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원성을 더 이상 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바울을 죽이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4절)
이것도 더둘로의 굉장한 수사법입니다. 통치자를 향한 더둘로의 달변이 여기서 더욱 돋보입니다. 그는 벨릭스가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더 많이 찬양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우호적으로 생각하는지를 더 많이 말해야 하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을 줄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뭐가 있어야 더 칭찬을 하지.’ 한 게 없으니까 겉으로 조금 칭찬해준 다음에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을 짧게 요약하는 것조차도 너그러이 들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더둘로 자신과 유대인들이 총독을 지극히 위하고 있도록 느끼게 만드는, 아주 기가 막힌 수사법입니다.
2. 바울에 대한 고소 (5~9절)
이제 더둘로의 고발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5-6절)
고발 내용은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바울을 로마법으로 옭아매기 위한 핵심 사항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둘로의 첫 번째 고발 내용을 보면, 바울이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요’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폭동’이나 ‘반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자꾸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의료 수준이나 방역 수준에서 전염병이 돌 때 그것을 막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실 전염병 때문에 그 후에도 역사를 보면 전염병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1세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전염병처럼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왜 위험한가 하면, 전염병이 퍼져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처럼, 바울이 가는 곳마다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종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면 벨릭스 입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고 나올 텐데, 가는 데마다 이 사람이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하면서 정치적으로 연결을 시키니까 벨릭스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총독으로 있는 기간 내내 크고 작은 소요와 여러 가지 소동으로 인해서 골치가 아픈데, 더둘로가 고발하는 내용이 만약 사실이라면 총독 벨릭스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두 번째 고발 내용은,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5)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하이레시스’인데, 여기서 ‘이단’이라는 영어 단어 ‘heresy’가 나왔습니다. 이 단어가 원래는 ‘당파’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더둘로는 ‘불순한 무리’를 가리키는 ‘도당’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나사렛 도당’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빗댄 표현입니다.
전염병처럼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하여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게 하는 바울은 한 개인이 아니라 불순한 무리의 집단인 나사렛 도당(이단)의 우두머리이므로, 바울이 하는 것에 따라서 그를 따르는 나사렛 무리들의 무장봉기가 언제든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둘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고발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6). 이것도 벨릭스가 종교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성전을 더럽혀서 소요가 일어났다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더둘로가 고발한 이 세 가지 내용 중에 바울에게 실제로 해당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가짜이고 거짓말입니다. 더둘로는 단지 자신의 웅변술을 사용해 그렇게 주장할 뿐입니다. 여기는 간단히 나와 있지만 억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연기력까지 더하면서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고발 내용을 가만히 보면, 이때로부터 약 30년 전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던 내용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사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예수님이 받으셨던 잘못된 고발들과 지금 바울이 당하는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이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문제를 삼았던 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여, 정치적으로 소요를 일으키고 황제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그래야 로마법에 따라 예수님에 대해서 반역자에게 가하는 십자가 사형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더둘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모함으로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유대인들에게 고용된 웅변가이나 연설가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을 반란과 폭동으로 고소했습니다. 단순히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종교법이 아니라, 무장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정치범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그래야 바울이 로마법에 반역죄로 걸려서, 자기에게 이 사건을 의뢰한 종교지도자들이 원하는 사형 판결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치열한 법정 다툼이나 거짓 주장은 똑같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6절 뒷부분에 괄호 치고 “6하반절에서 8상반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달려 있는 주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24:6 하반절-8상반절에 다음 내용이 더 있다. ‘그래서 우리의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으나 7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 8 그리고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하였나이다’”
이 내용이 어떤 사본에 있는데 그 사본이 적기 때문에 빼고 지금처럼 해놓았습니다. 큰 지장이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입니다.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8-9절)
더둘로는 자기가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지난주 <생명의 삶> 공부 때의 내용이 ‘성경’이었습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성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조작을 했다거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했다는 등 음모설이 많은데, 다 사실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것들에서 가짜를 뺀 것이지, 기독교인들에게 유리한 것만 가려서 뽑은 게 아닙니다. 거꾸로입니다. 오히려 가짜들을 뺐습니다.
그런데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뭔가 하면, ‘사건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사상만 이야기하는가?’입니다. 1세기 당시 실제로 살았고 직접 보았던 사람은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살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나중에 유다나 빌립이나 도마 등 유명한 사도의 이름을 슬쩍 끼어 넣어서 도마복음이라는 식으로 나중에 나온 것들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살았던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상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주로 몽롱하고 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사실이 아니니까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냥 그랬다고 주장만 합니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총독 벨릭스에게 ‘당신이 친히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말을 마칩니다. 이것은 ‘이 연사, 이렇게 주장합니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더둘로는 총독 당신이 바울을 직접 심문하면 ‘내가’ 고발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고발하는 이 내용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포함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고발 내용이고, 이 모든 내용이 다 사실이란 말입니다. 자기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본문의 시점은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지 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대제사장들은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자기들의 기득권을 더 넓히기 위해서 총독 벨릭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니까 더둘로의 마지막 결론은, ‘총독 당신은 당신에게 오랫동안 뇌물을 바쳐온 대제사장들이 원하는 대로 판결을 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습니다. 사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안 해주었다가 밝혀버리면 위험해지지 않습니까. 역시 더둘로는 노련한 웅변가였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이 말이 옳다”라고 하는데, 대제사장들이 유대인들 여러 명을 데려온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응원단이나 박수부대입니다. 항상 뭘 할 때 보면 응원단을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 “와~!” 하고 박수를 치며 앞에서 바람 잡고 분위기 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려와 일제히 “옳소!”라고 박수 치고 난리 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가 더 압박감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철저히 준비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3. 이 시대의 ‘더둘로’들
더둘로는 수사학으로 무장한 ‘레토르’, 즉 웅변가였습니다. 웅변가는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이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지적이어야 합니다. 또 상대방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품위와 예의도 있어야 합니다. 부드러워야지, 자기가 아무리 옳아도 ‘당신 말은 쓰레기요!’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주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둘로가 겉으로는 굉장히 예의를 갖추고 지적인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보면 굉장히 정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은 품위 있고 고상하고 지성인이고 다 좋았지만, 속에 든 내용은 다 가짜였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다 거짓말입니다. 흔히 나쁜 말을 하는 것을 가리켜 ‘세 치 혀를 놀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 혀를 사용해서 거짓말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이야기하고 고발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는 돈 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재판을 진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법에 바울을 옭아매어 죽이기 위해, 자기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수사학과 웅변학과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지금 바울이 사형을 받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포장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을 하겠습니까? 요즘 민주주의 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옛날 고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로마가 이런 식으로 법 제도를 갖추어놓아서 이 정도이지, 다른 나라들은 형편없었습니다. 왕이 원하는 대로 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겁니다. 조선 역사만 봐도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죄인이 아닌데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더둘로도 나쁘지만 더둘로를 고용해서 바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도록 부추긴 대제사장들도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누가 더 악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둘로도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고, 사실이 아닌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오직 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갖 거짓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더둘로와 같은 사람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 나오는 그 사람들만 더둘로 같은 사람들입니까? 나는 아닙니까? 나는 진실만 이야기했습니까? 만약 내가 말한 모든 것이 다 녹음되어 지금 여기서 튼다면 나는 다 진실만 이야기했다고 100%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가끔 전화가 잘못 걸릴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 전화했던 것이 나중에 잘못 눌려서 걸린 겁니다. “여보세요” 했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서 그냥 끊는 게 보통인데, 가끔은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혹시 저쪽에서 내 욕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으십니까? 조금 전까지도 “안녕하세요? 예, 예!” 하고 끊었는데 “그 사람 말이야, 사람이 못됐어.”라고 합니다. 남들이 보고 들을 때는 “벨릭스 각하여”라는 태도인데, 뒤에서는 “저거 뇌물이나 밝히고 말이지”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나에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더둘로는 옛날 벨릭스 법정에만 있던 것도 아니고, 지금 저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바로 더둘로인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6계명이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여기 살인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보통 사람은 살인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총 쏴 죽인 것도 없고 칼로 찔러 죽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유명한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라가”라는 말은 ‘바보’라는 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자매를 가리켜 ‘바보 멍청이다.’ 또는 ‘미련한 놈이다.’라고 욕하는 것 자체가 벌써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격 살인, 언어 살인입니다. 지금까지 상처 받은 것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때가 언제입니까? 누가 나를 팍 때렸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상처는 평생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내가 무슨 죄인인가? 나는 죄 지은 게 없는데 자꾸 죄인이라고 하나? 왜 기독교는, 교회는 자꾸 죄인, 죄인 하나?’라고 합니다. 그것은 범죄(crime)를 생각하니까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준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자녀 있는 분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화가 나서 막 소리 지를 때 아이에게 상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그 상처가 아이의 평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또 나 자신도 부모님으로부터 아니면 어떤 어른으로부터 “너는 쓸모도 없는 놈이야”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평생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단 한마디도 정말 그런 적이 없었는가? 어떻게 없을 수가 있습니까?
앞에서 남이 볼 때는 부드럽고 지적이고 고상하게 하지만, 그 사람과 헤어져서 올 때 ‘인간이 틀렸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겠습니까?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죄가 없고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다 듣고 계십니다. 말로 죽이는 게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실제로 살인을 하지는 않았다 해도, 말로 살인을 하는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내가 그 사람을 욕하는 순간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원래 분노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거가 요한일서 3장 15절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며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자.”라고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흉기를 들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뿐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그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말로도 하지 말아야 하고, 말로 내뱉지 않았다 할지라도 생각까지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돈 때문에, 자기 이익 때문에 서슴없이 남을 죽이는 일, 그리고 실제로 남을 죽이는 일까지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라고 하셨습니다. 왼뺨을 맞는다는 것은 왼손으로 맞는 것인데, 왼손으로 맞는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니면 손등(백핸드)으로 맞는 것은 더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욕적으로 맞았다 해도 왼뺨도 돌려대며 ‘여기도 때려주세요’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손해 보는 게 아니고 오히려 평안을 얻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샘솟아 오릅니다. ‘야, 내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나? 이전에는 말로 상처를 주고 남을 해코지하려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맞으면서도 기쁨을 느끼나?’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주는 삶, 원하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줄 때 거기에서 나오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더둘로라는 사람은 돈 때문에 자기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한 수사학과 웅변학 등을 사용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형을 받게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벨릭스에게 뇌물을 줄 수 없었고(물론 있어도 주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사람을 복음으로 살리려고 하다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함께 있지, 거짓으로 혀를 놀리는 더둘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헤롯 궁에 갇혀 있는 가난한 바울과 함께해주셨고, 그를 통해 인류의 역사까지 바꾸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인생입니까!
우리도 평소에는 고상하고 지적이고 문화인이고 현대인이지만, 내 이익이 딱 걸린 어떤 일이 있으면 더둘로 같이 돌변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더둘로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가난해도 영혼을 살리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서의 몇 십 년 또는 100년 정도가 다가 아닙니다. 이후의 삶은 셀 수 없는 영원한 삶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너무나 긴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올 때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해주십니다.
어떤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삶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주님의 종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의 변론과 강론
이동휘목사 / 행 24:1-27
1.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바울이 이방인들 지역에 전도하면서 그곳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말을 따르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던 것입니다. 바울에 대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거짓 소문, 요즈음 말로 가짜 뉴스(Fake News)를 퍼트려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Fact)은 사도 바울이 전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하거나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또 다른 구실을 내세워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붙잡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우리를 도우십시오. 이 사람은 어디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성전에 해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방인 헬라 사람까지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습니다.” 바울을 증오하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지독한 편견 속에 바울이 드로비모라고 하는 에베소 사람(이방인)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함을 질러대며 선동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하여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내어 은밀한 곳에 감금하고 바울을 폭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 이방인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고, 또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소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고래고래 소리쳐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고, 그들이 나가자 문이 닫혔으며, 그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의도로 감금하여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둔군 천부장이 알고 즉시 부하들을 거느리고 현장에 달려가 바울을 체포한 후,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사유를 알지 못한 천부장은 주둔군 영내로 끌고 갑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그 진상을 알고자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모으고 그곳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법정에서 공회원들은 바울의 유죄를 증명하지 못하고, 소송으로는 바울을 죽일 수 없게 되자 40명의 자객단을 세워 바울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이러한 음모가 바울의 생질에 의해 천부장에 알려지자 천부장은 수 백명의 경호를 붙여 안전하게 벨릭스 총독에게 호송하여 재판을 받도록 합니다. 이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그 일행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지 바울을 처단하겠다는 일념으로 직업적인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고 내려왔습니다. 더둘로는 헬라의 교육을 받은 자로서 그의 송사는 먼저 “거의 메스꺼울 정도의 아첨”으로 시작됩니다.
(행24:3-4)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햄릿:“저기 저 구름은 마치 낙타처럼 생겼군.”
포르니우스:“정말이지 맹세코 낙타 같습니다.”
햄릿:“나는 족제비 같다고 생각되는데....”
포르니우스:“족제비처럼 후퇴하는군요.”
햄릿:“아냐, 고래 같지 않아?”
포르니우스:“꼭 고래 같군요.”
아부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아부하는 말과 행위 속에는 자기라는 개체를 주성분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소멸되어 가는 그 주성분으로 하여 마침내 자기라는 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기 아부라는 치졸한 악덕이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포르니우스는 한덩이의 구름을 두고 낙타에서 족제비로, 족제비에서 다시 고래로 세 번씩이나 자기를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세 번씩이나 죽인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햄릿이라는 한 사람에게 영합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무참히도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첨하는 입술과 혀를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러나 이러한 아첨 내용과는 달리 벨릭스는 몇 번의 반란을 너무나도 야만스러울 정도로 잔인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감사”가 아니라 혐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송사 내용은 세 가지 혐의였습니다.
(행24:5-6)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여기서 보면, 첫째 혐의는 “전염병”(λοιμ??, 로이모스-흑사병)이라고 표현된 소요에 대한 혐의였습니다. 대제사장이 고용한 변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두고 ‘전염병’(NIV,troublemaker)같은 존재라고 했는데, 이는 비유적으로, 그가 전하는 도를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로마에 전염병, 흑사병처럼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백성을 정치적으로 선동하여 유대인에게는 물론 로마 당국까지 해를 끼치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각 식민지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최대한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엄히 다스려 중죄를 받았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여러 소요 사건의 주동자들과 추종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학살했습니다. 그러므로 더둘로가 바울에게 적용한 소요죄 즉 반란 음모죄는 실로 사형을 당할 만한 중죄(重罪)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더둘로를 내세워 자신들의 종교적인 불만을 정치적인 선동죄의 명목으로 탈바꿈시켜 로마로 하여금 바울을 처형하도록 계략을 꾸몄습니다. 둘째 혐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예수의 제자들 및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들을 무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짓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적인 당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예수의 도를 전하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민심을 소란케 함으로 로마 당국의 골치를 썩힌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면, 그는 로마에 의하여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중죄인 임에 틀림없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혐의는 성전 모독죄였습니다. 성전을 더럽힌 자는 반드시 로마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대 당국의 차원에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이송(移送)한 사실 자체가 부당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더둘로는 바울이 로마법상으로나 유대법상으로 볼 때,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임을 그의 완벽한 논리로 송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염병과 같이 무섭게 퍼져나가는 기독교가 유대교를 배신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저버리는 악한 세력으로 커갈 것을 염려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말살시켜 버려야 할 집단으로 생각하면서 집요하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2. 이에 대한 바울의 변증은 이렇습니다.
첫째(12-13절), 유대인들을 소요케 했다는 더둘로의 송사가 허위임을 밝히기 위해 자기는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12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선동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성전에서 사람들과 변론하거나 회당과 성 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목격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붙잡혔을 때는 혼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 중이 소동하고 천부장이 출동한 것은, 바울을 이전부터 죽이려고 따라 다니던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항변은 소란죄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전 모독죄에 대한 무죄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14-16절),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혐의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이 나사렛 이단이라고 부르는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담대하게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좇는 도는 결코 유대교와 어긋나는 이단이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과 율법 및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 즉 유대교와 같은 것임을 밝혔습니다. 비록 도(道)를 받는데 있어서는 아나니아나 장로들의 방법과는 달랐으나, 도를 지키는데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지켰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기독교가 결코 이단이 아니며, 유대교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께 향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바울의 부활관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부활관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성경의 가르침과도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17-21절), 성전 모독죄에 대한 혐의에 대하여 바울은 그 당시 성전에서 결례의식을 행하며 조용히 지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은 소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보를 전달하기 위한 종교적인 목적이었으며(17절) 결례 의식대로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동안에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사실과(18절),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문책받을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은 죄밖에 없음을 밝혔습니다. 다시말해 자신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오로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성전 모독죄라는 더둘로의 고소는 사실에 근거한 바울의 변증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유대교의 신앙과 부합되는 것이므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송사당하고 로마 당국에 의하여 처벌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바울의 변증을 듣고 총독 벨릭스는 재판을 연기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가 도착하면 그의 증언을 듣고 결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벨릭스는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를 받고 이미 모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바울의 변증을 통해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기 때문에, 연기 결정은 바울에 대한 무죄판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비교적 자유로운 연금상태이지만 석방시키지 않은 것은, 총독 벨릭스가 마치 빌라도처럼 유대인을 의식했기 때문이며, 또한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고자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연금 상태의 바울을 자주 불러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서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드루실라는 바울이 믿는 기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남편 벨릭스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단지 호기심에 의한 것이었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벨릭스 역시 바울의 설교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행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면전에서 수차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육신에 정욕에 눈이 어두어서 돈에만 관심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졌든지, 복음 증거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써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이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설교한 내용은 의(義)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것으로 이들의 실생활 속에 가장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시대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의 문란하고 허영된 생활을 했던 이들은, 마음에 찔려 두려워하며 바울을 아예 멀리하고 말았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벨릭스는 본디 로마 황제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황제의 모친이었던 안토니아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고 황실의 어린 왕자의 친구였던 팔라스의 영향으로 사마리아의 하급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아첨과 간교한 사술이 뛰어난 자로, 후에 부정한 방법으로 유대 총독까지 되었던 자였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파렴치한 관리였습니다. 국가의 공복으로 국가와 사회의 공익을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온갖 짓을 자행했던 불의하고 부패한 관리였습니다. 이조 시대 연산조(연산군,燕山君, 1476∼1506년) 때 윤석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풍기 군수가 된 그는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혼자 임지로 부임했습니다. 그러자 고향에 남은 아내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견디기가 어려워, 선대(先代)로부터 내려오던 몇 가지 물건을 팔아 밭 한 뙈기를 장만했습니다. 채소라도 가꾸어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윤석보는 편지를 보내 아내를 책망했습니다. “옛 사람이 촌척의 땅이라도 넓혀가지고 임금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국록 이외에는 탐을 내지 말라는 뜻이오. 이제 내가 관직에 올라 임금의 녹을 받으면서 전에 없던 밭을 장만했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빨리 그 밭을 되돌려 주도록 하시오.” 청렴 결백함도 여기까지 다다르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관직의 중요성을 대단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라의 일을 한다는 긍지와 나라로부터 그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명예였기 때문입니다. 청렴한 사람에게서는 신중함과 근면함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직(公職)에 임하는 가장 대표적인 몸가짐인 것입니다. 청렴은 그 뿌리를 양심에 두고 있습니다. 양심이 병들지 않는 한 청렴은 언제나 건강합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습니다. “명예는 밖에 나타난 양심이며, 양심은 안에 잠기는 명예이다.” 성서의 지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시37: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탐관오리 총독 벨릭스는 그의 결혼 생활 역시 부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벨릭스는 이미 두 여인과 살았고 드루실라와는 세 번째 결혼하여 사는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멘사 왕 아지즈의 아내였던 드루실라의 미모에 이끌려 마침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드루실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야고보 사도를 살해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로서 아지즈와는 두 번째 결혼 생활을 했고 벨릭스의 유혹에 이끌려 세 번째 남편을 맞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한결같이 무절제하며 자기 욕망대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정부패와 불의를 일삼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추악한 행위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자신의 불의한 생활과 무절제함과 온갖 방탕과 방종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히 죄의 짐에서 놓일 수 없으며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4. 본문의 벨릭스 부부는 바울의 이같은 설교를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더 이상 설교듣기를 보류함으로써 그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이처럼 회개할 기회를 다음에 미루고 다음 기회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곧 긍휼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한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을 하러 나가던 중에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집 마당에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던 것입니다. “향기가 기가 막히게 좋군.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난생 처음 보는 것 같다. 생각같아서는 이 꽃들을 보며 하루를 즐기고 싶지만, 오늘은 양털을 깎아야 하니 빨리 털을 깎고 와서 이 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즐겨야지.” 그러나 그가 양털을 깎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꽃들은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름다운 새 소리에 잠을 깨며 생각했습니다. “무척 아름답고 황홀한 소리구나. 하지만 지금은 우유를 짜야 하니까, 일을 마친 후 저 소리를 즐겨야지.” 그러나 양치기가 우유를 짜고 와 보니, 이미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또 다음 날 아침 양치기는 집 밖에서 들려오는 말 울음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창문을 열어 보니 아주 잘 생긴 백마 한 마리가 자신의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듯 천천히 울타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지금은 울타리를 고쳐야 하니까....빨리 고치고 나서 저 말을 타봐야겠다.”
그러나 그가 급히 일을 끝마치고 왔을 때는 이미 백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양치기 자신이 원하던 일을 뒤로 지연시킴으로써, 결국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한 채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인간입니까? 우리는 매사에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모색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회란 언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지금 여기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지금 여기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이러한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릭스처럼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지 말고, 조금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에드워드 영은 “지연은 시간의 도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연은 또한 영혼의 도둑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받기에 가장 알맞은 때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총독 벨릭스의 마음에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조금 더 알아가려고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바울을 조금 더 붙잡아 두고 그 재판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말씀을 듣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걷어 차 버린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그는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꾸물거리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25절 하반절).
(행24:22-25)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수많은 현대인들도 벨릭스와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영접하지 않거나 아니면 깊은 죄책감으로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좀 곤란하군요.”
그런데 그들은 다른 기회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다시 두드리시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벨릭스가 그리스도께로 나온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죄악들, 부도덕과 불결함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드루실라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교만했으며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 이 세상의 것들을 선뜻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그들의 죄악을 버렸다면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치는 날 그들은 하늘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런데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의로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서 “언젠가 나중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코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한 벨릭스는 하나님 없이, 소망 없이 죽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는 아무런 변명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에게 성실하게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바울처럼 하나님께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틈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입니까? 틈이 있거나 없거나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 삶의 최우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밥은 못먹어도 성경은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일은 다 못해도 주일은 지켜야 합니다. 예배시간은 지켜야 합니다. “내가 틈이 있으면” 교회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겠다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최권능 목사님이 버스를 타고 그 복잡한 데서 예수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마침 채필근 목사님이 그 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최목사님은 채목사님이 앉아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앞에 가서 예수믿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최목사님이 채목사님한테도 배운 바가 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모를 턱이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채목사님 왈 “최목사! 나야 나!” 자기를 못 알아보고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최목사님 한마디 더하십니다. “벙어리 교인이구만.” 채필근 목사님이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채필근 목사님이 쓴 글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했노라’하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벙어리 교인은 없는 법입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금 먹은 녀석 물 안먹겠나” 복음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즐거운데 어떻게 말 안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가장 좋은 때는 지금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 어느 때 보다 ‘지금’이 복음 전도의 가장 적기임을 깨닫고, 사도 바울처럼 지금 보다 더욱 더 저돌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 구원받는 것입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갖습니다
유민용목사 / 행 24:1-9, 24-27
작가이며 철학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뉴욕 특파원 자격으로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1906-1962)의 재판을 취재했고, 재판을 참관한 후에 한편의 기사를 썼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한 인간의 폭력과 잔인함으로 꼽는 사건이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의 모습에서 ‘악의 특별함’이 아닌 ‘악의 평범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가 지은 죄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입니다. 겉으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악이 세련돼 보이기도 하고 고상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인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뛰어난 변호사 ‘더둘로’가 나옵니다. 그는 로마의 법과 유대의 법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더둘로는 Tertullus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유대문화를 잘 이해하는 헬라계 유대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본문은 닷새 후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가이사랴로 옵니다. 이유는 로마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닷새동안 치밀한 준비과정에서 적임자로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선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악의 치밀함과 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40여명의 암살단을 조직해서 은밀히 살해하려고도 했는데 실패로 돌아가니까 로마법 전문가를 동원해서 가이사랴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더둘로는 본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지 않도록 사건을 파악했을 것이고 법정에서 바울에게 최고의 형량이 내려지도록 고소장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무법천지 세상입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는 하지만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가장하고, 생명을 죽음의 방법으로 가리웁니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에 있는 600개가 넘는 율법을 두가지 강령으로 축약해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법’입니다. 종교가 율법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를 주목했다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해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아래 누구도 ‘양심의 법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스스로 피고인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사형선고를 받으셨기에 우리의 양심이 치유가 되고, 옛사람이 변화가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만일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서게 되면 보이지 않던 죄가 보이게 되구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인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안경을 끼고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피고인일 뿐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만이 더럽혀진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둘로의 송사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2…존경하는 벨릭스 각하, 우리 유대인들은 각하 덕분에 오랜 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누려 왔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 덕분에, 이 나라의 많은 것들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3 우리는 모든 면에서 탁월하신 총독 각하께 대해 항상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4 이제 각하를 오래 괴롭히지 않고자, 이 사람에 대한 고소의 줄거리만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잠시 제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로마법과 유대법에 능통한 당대 뛰어난 더둘로는 바울을 고소해서 재판에 승소하기 위하여 총독 벨릭스를 칭송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시 벨릭스는 역사가 타기투스에 의하면 “그는 포악하고 음흉하며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누린 자였다”고 합니다. 2년후에 벨릭스가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사람들은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6년의 재임기간에도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더둘로는 벨릭스의 명예심을 자극하여 재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고 좋은말로 아첨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더둘로는 3가지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합니다. 첫째는 바울이 말썽쟁이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개역개정은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번째는 나사렛 도당의 두목이며, 이단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이후 세번째 죄로 바울이 유대인 성전을 더럽혔다고하는 죄목도 슬쩍 끼어 넣었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내용을 보면 첫번째 두번째는 로마사회의 소요죄와 반란죄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만일 사실이 입증이 된다면 로마법에 저촉(抵觸: violate)한 것이기에 사형에 해당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고소문들이 종교적인 문제 같아 보이지만 더둘로는 로마의 반란죄와 소란죄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 로마 정부는 종교에 있어서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허락하였기에 유대인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심각한 범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회에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 것은 바울을 정치적 선동가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보여집니다. 오늘날도 전염병이 얼마나 위협적입니까? 바울이 이런 존재라는 것은 로마 제국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망있는 변호사 더둘로가 터무니 없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를 비꼬는 말이지요. 이렇다 보니 같은 죄를 지어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른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에서도 종종 발생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더둘로의 고소장을 듣고 바울 너가 어떤 말을 하나 보려고 무시하는 듯 머리로 표시하며 반론의 기회를 줍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소한 죄들로 인해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안되었고 그 중 5일은 옥중에 있었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 내가 어떻게 소요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능성도 없는 일이며, 내가 사람을 선동하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두번째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까지 믿는다고 총독 앞에서 오히려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는 로마 황제의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소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때 총독은 복음의 도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바울의 처결을 연기합니다.
14절로 16절은 바울이 전하는 신앙고백입니다.
“14 그러나 저는 각하 앞에서 이것만은 분명히 인정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예수의 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도에 따라, 저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저는 유대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부 믿습니다.15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올바른 사람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16 이런 까닭에, 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을 보면 올바른 사람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25절에도 보면 “예수의 도를 말하면서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설교하자, 벨릭스는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자, 그만하면 되었소. 이제 가 보시오. 기회를 봐서, 당신을 다시 부르도록 하겠소”
바울의 강론을 듣고 뵐릭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잔인함과 탐욕으로 불의한 사람이었고, 여러번 결혼하며 절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강론을 들으며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삶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죄는 숨기고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는 매주일 사도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믿는 것’이 실제적 믿음입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상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복된 말씀이지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후 본서 어디에서도 벨릭스가 회개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26절을 보면 바울이 가진 돈을 탐내어 자주 불렀다는 사실만을 전해줍니다. 벨릭스 총독은 뉘우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26 그러면서도 총독은 바울이 자신에게 뇌물 바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그를 자주 불러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바울이 몇 해 동안 고국을 떠나 있다가, 민족을 위한 구호금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했을때에 바울이 돈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회개하는 커녕 탐욕의 미각만 자극됩니다. 벨릭스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어질 기회를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육망의 허망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삶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쌓고 있을지라도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찬양하리 여호와 하나님 내 주를 찬양하리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안에서 참 기쁘리” 이 곡은 Donya Brockway쓴 찬양인데 1948년 창설된 중앙대학교 최초의 기독 학생 동아리에 의해서 번역된 곡입니다. 75년 전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했을 때 이 찬양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도도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으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몸으로 날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겸손도 내안에서 수없이 부서지고 무너져야 나오는 감정이구요. 온유함도 하나님 안에서 철저히 다스림 받아야 나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아첨과 거짓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도들에게 있는 선한 영향력은 우리가 모인 자리에 미움이 멈춰지며, 부패해져 가는 것이 멈추고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양쪽에 동일하게 다 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돈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 돈의 종이 되고 탐욕의 종이 되어 버리지만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 삼으면 한번 뿐인 인생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끌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말로 감옥에도 갇혔었지만 성경은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형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형통한 자에게 하나님은 이길 힘도 주시고, 견디고 버틸 힘도 주십니다.
21세기에 우리는 마른 뼈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어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마른 뼈와 같은 것입니다. 물이 없어 마시지 못하고 양식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빈곤한 삶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죄를 미화(美化)시키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들은 밸릭스 총독은 유대인과 바울의 대립이 단순히 그들의 종교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바울에게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하지만 밸릭스는 바울을 즉각 석방하지 아니하고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판결하겠다는 핑계로 재관을 연기하였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더둘로나 벨릭스는 오늘날 세상의 유익만 쫓아가는 현실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후 바울은2년간 가이사랴에서 구금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년의 구금생활이 바울에게는 10여년에 걸친 전도여행 가운데 지친 몸을 회복하시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지역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도 당시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로마에서의 전도계획을 세우며 충전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럽지역에 복음이 전해졌기에 청교들에 의해서 이땅에도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도 뜻하지 않는 환경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반응할 때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반응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 기울어지게 되지요. 그러면 오늘날 모든 직업이 성직이 되고, 모든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한주도 상황과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교우들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가이사랴의 재판
행 24장 1~9절 / 이동원목사
오늘도 김밥 씨리즈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김밥 가게 옆에 참기름 가게가 입주했습니다. 참기름 가게는 종종 김밥을 이용해 주었는데 김밥은 전혀 참기름을 팔아주지 않자 참기름이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넌 어쩌면 그렇게 인색하냐?”고. 그러자 김밥은 참기름에게 “나에겐 네가 필요 없는 존재”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열 받은 참기름이 김밥을 먼저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밥은 옆구리가 터지고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김밥만 철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답은 <참기름이 고소해서>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고소당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라는 이름의 법률가(본문에 변호사-1절, 실제로는 검사의 역할)를 고용하여 그를 고발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이사랴 재판정에서의 바울에 대한 고소와 응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닷새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더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행전21장에 보면 밀레도를 떠난 바울은 배로 두로까지 온 다음(21:1-6)다시 두로에서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21:7-14)그리고 그는 육로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21:15-16)(제3차 전도 여행 지도) 그는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매듭짓고 그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고 또한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참으로 오랜만에(사실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무고하게 고발함으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21:30) 심문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심문을 받는 중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밝혀 최악의 고문을 면합니다.(22:25-29)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전23장에 보면 바울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발생합니다.(23:12-14) 로마의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하고자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되고(23:31-35) 여기서 약 2년여의 옥중 생활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고소자들이 도착한 후 가이사랴에서 진행된 바울의 재판 장면을 보도합니다. 여기 그들은 바울을 애매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이 고소 내용은 역설적으로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재판 석상에서의 바울의 모습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재판정에서의 바울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 복음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사람
바울에 대한 첫째 고소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자, 우선 여기 이 구절에 사용된 ‘전염병’, ‘소요케 하는 자’라는 표현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 전염병은 본래 페스트 같은 질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역설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얼마나 급속하게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는가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대 종교의 전통주의자들이 그의 목숨을 해코자 한 것입니다.
복음이 진리라면 진리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리였다면 그 진리가 유대인 사회를 격동하고 변화시킴이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의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함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요? 저는 오늘의 기독교가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전하지 않거나 아니면 복음을 알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비겁한 침묵 속에 안주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 1세기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음과 동일한 복음이라면 이제 우리는 다시 복음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전염병처럼 페스트처럼 이 복음을 우리 사회 모든 구석구석마다 퍼트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한 거룩한 소요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1세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거룩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을 사는 사람
본문 5절에 보면 또 하나의 고소의 제목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바로 ‘나사렛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를 한결같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2:23에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의 경험을 고백하는 장면을 행22:8에서 읽어 보십시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를 나사렛 예수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최근 <열린다 성경>씨리즈를 출간하고 있는 이스라엘 류모세 선교사는 나사렛이란 단어가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래 나사렛은 히브리어로 ‘나쯔라트’인데 이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 ‘네쩨르’에서 온 말로 본래 메시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11:1의 메시아 예언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것은 그만큼 그가 철저하게 나사렛 사람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실상은 어떠한지요? 정말 우리는 우리의 대화, 우리의 교제,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그리스도 그 분을 높이고 그 분을 자랑하고 그 분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사실 우리가 행전 11장에서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안디옥에서 처음 성도들은 불신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임을 불신자들조차 알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 이런 증거를 남기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실은 우리는 대부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뿐 우리의 실제 대화와 교제의 중심은 여전히 <나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그것이 오늘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닌지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 바울이 추구한 삶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모습이 아닌지요. 바울의 유명한 갈2:20의 신앙 고백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
바울 사도에 대한 세 번째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소를 당한 연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비난의 배경을 바울이 체포되던 행22:28-30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이 곧 닫히더라”
진실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출신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아마도 이방인의 뜰을 거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 나온 것으로 넘겨 집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 법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거나 이들의 출입을 도와주는 유대인들은 돌에 맞아 죽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실수를 범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가까이서 서성거린 것은 위험한 일이었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물론 여기서부터 조금은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에베소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에 까지 동행한 에베소 출신의 이방인 신자 드로비모에게 바울은 가능한 한 이 거룩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의 사건을 잘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과 나란히 성내를 다정히 걷는 바울의 모습이 유대인들의 레이다 망에 포착되는 순간 갑작스런 예기치 않은 사태로 발전해 간 것입니다.
결국 진실은 한 영혼에 대한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친절이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가아사랴 감옥에서 2년, 다시 로마의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사건을 후회한 흔적은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의 존재의 목적, 생존의 이유가 영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그것이 바로 바울이었고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드로비모를 언급한 기사를 그의 마지막 서신 디모데 후서4:20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그것은 드로비모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기후 좋은 항구도시 밀레도에서 병든 그가 요양을 하도록 선처한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바울의 도전은 그가 만난 한 영혼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틴 루터 킹은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1964.12.11)의 대미에서 요한 일서4:7이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고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사랑만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입니다.”(Love is the key to the solution of the problems of the world) 1968년 2월 9일 그는 그의 조부가 목회하고 그리고 그가 부친과 동역했던 그의 고향 교회 조지아 주 애틀란타 에벤에젤 침례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그는 사실상의 유언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내가 죽는 것을 보실 분이 있다면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부탁을 꼭 전해 주십시오. 긴 조사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해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것도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그밖에 수상한 상들이 300-400개가 있다는 것도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들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언급이 필요하다면 다만 말틴 루터 킹이 이웃을 섬기는 일에 그의 인생을 드리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틴 루터 킹을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해 주십시오.” 이 마지막 설교 후 꼭 2달 만에 그는 암살당했고 그가 남긴 이 마지막 설교문은 그의 장례식에서 녹음으로 다시 전달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말틴 루터 킹 목사처럼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고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우리 곁에 다가오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바울이 경험한 그리고 말틴 루터 킹이 갈망한 세상 변화의 드라마는 바로 오늘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오늘의 사도행전의 드라마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이란 시간을 살고 계시는 지요?
당신은 당신의 삶의 마당에 결코 숨길 수 없는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계십니까? 당신은 참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고 계십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 오늘을 살고 계십니까?
전염병이라 불리는 사람들
행 24장 5절 / 배 혁목사(샌안토니오교회)
여러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당신을 어떻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일컫는 호칭들이 나옵니다. 고상하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26절에 보면,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이 그리스도인, Christian라고 불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뜻인데,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인들을 보고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더둘로라고 하는 사람이 사도 바울을 일컬어,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a pestilent fellow,KJV)’라고 말합니다. 요즘 상황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자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욕적이고 심각한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말을 듣게 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교인들이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지 않았기에, 예수를 메시야, 구세주로 전하는 바울 일행을 핍박한 것입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당시 로마의 총독 벨리스의 법정에 바울을 고소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더둘로가 바울에 대해 고발을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전염병,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염병이라고 듣는 것은 억울한 말이지만, 그를 통해서 복음의 영향력이 그 만큼 강하게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보다는 코로나19가 더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사회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을 비롯한 경제생활에도 손해를 주고 있고, 학생들도 학교를 가지 못함으로 학업에도 지장이 많이 있습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불안과 두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식료품 가게가 문열기 전부터 줄을 서고 있다가 물건을 사는 광경은 이제 낯설지 않아 보입니다.
지난 3월 18일, 호주의 수퍼마켓 중에 하나인 콜스(Coles) 에서 개장시간에 몰린 고객들이, 화장지를 사려고 한꺼번에 쇼핑 카트를 몰고 몰려가는 바람에 13세 소녀가 바닥에 넘어지고 쇼핑 카트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에 따르면, 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모두들 아이를 넘어 화장지를 집어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게에 사고자 하는 물건이 품절이 되자 직원을 폭행해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불안과 공포가 강하게 퍼져가는 이 때에, ‘전염병’이라고 불렸던 기독교인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력을 더욱 발해야 할 때일 것입니다. 어떤 영향력을 끼쳐야 할까요?
1.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누리며 퍼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이 주는 공포에 동요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영국의 성공회 목사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기에 열심을 냈습니다. 웨슬리는 미국, 죠지아로 선교를 가기위해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입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대서양을 항해하다가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 전,( 1736년 1월 25일에,) 심한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배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혔고, 존 웨슬리 목사님도 죽음의 공포속에서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가운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기도와 찬송을 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기독교 공동체 중에 하나인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이었습니다.
같은 배에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죽음의 공포가운데 있었고, 어떤 이들은 평안함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풍랑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던지, 전염병을 마주하던지 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앙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그 모든 것들을 일으키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시기 위해서, 재앙을 허락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전염병을 허락하셨습니다.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앨을 구하시려고 애굽에 전염병을 내리셨습니다. (민수기 14:12절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는 전염병으로 그들을 벌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염병이 구원으로 쓰이던, 재앙으로 쓰이던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재앙들을 일으키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염려할 때에,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말씀을 읽고 들으십시오, 기도하며 찬양을 하십시오. 그럴 때에 세상이 주는 공포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어 주님이 주는 평안과 소망을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2.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더욱 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교인들로부터 전염병이라고 불리며 핍박을 당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은 구원이 모세가 받은 율법을 지킴으로 그 공로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고,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환상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180도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만한 완전한 존재가 못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고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들을 돌이키고자 하나님은 전염병과 같은 재앙을 내리곤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염병과 같은 재앙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의 죄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어머니께서 회초리를 드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부모님께 아주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에게 회초리를 들으셨던 것을 보면, 제 생각이 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회초리로 때리시기 전에 꼭 하시는 질문이 있으십니다. “너 뭘 잘못했는지 알아?” 그 질문을 받으면 제가 그 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동생하고 싸웠던 일이 있는지, 아니면 어머니께서 시킨 일들을 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는지? 등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잘못한 일을 말씀을 드리면, 때로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몇대 맞을래?” 이 때 참 고민됩니다. 안 맞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양심상 몇대 맞게다고 말씀드리면, 그 만큼만 때리기도 하시지만, 어떨 때는 묻지도 않고, 원하시는 대로 때리실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커서 아이를 키워보니까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 매를 맞을 때는 그 회초리가 무서웠고, 어머니가 무서웠는데, 이제는 나를 때리셨던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회초리를 드신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지 않으면 그 죄를 깨닫지 못하고 멸망당할 것을 아시기에, 아프시지만 회초리를 드시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물어서, 이 세상을 당장 멸망시킨다고 할지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입니다.
지금 이 세대가 노아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세대보다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시대보다 의롭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염병을 통하여서 우리의 죄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이 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힘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해결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는 시간이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이 때를 주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재앙이 있을 때에 마음이 상하게 되고, 상호간에 적대감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 도리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삶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 가 쓴 ‘기독교 발흥’ (The Rise of Christianity)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소제목은 이 책의 저작 목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미약했던 예수 운동이 어떻게 짧은 몇세기를 거치면서, 서양세계를 점령하는 종교적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 입니다. (How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a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가 크게 성장한 이유 중 하나로, 로마시대에 있었던 전염병을 예로 듭니다. 로마시대 165년경 전염병이 일어나 15년 동안 로마제국의 인구가 최소 25%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100년 후에 또 전염병이 일어나 하루에 수천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더욱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에 보통 사람들은 아픈 자를 내 쫓았고 죽지도 않는 사람들을 매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를 살아가던 기독교인들은 부활 신앙으로 아픈 자를 안심시키고, 위험을 무릅쓰고 병든자를 간호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코로나 19 전염병 확산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하신 불들은 더욱 불안해 하시기도 하십니다. 직장에서 Lay off 당하거나 그 불안감에 있는 분들도 계시고, 하시는 사업이 안되어 막막해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식들이 들리곤 합니다. 하와이에 계시는 한 권사님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손수 마스크를 제작해서 나누어주셨다고 합니다. 한국에 기초생활 수급자 되시는 분은, 그 동안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신세를 지면서 살았는데, 작지만 전염병으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써달라고 기부금을 내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전염병을 앓고 계시는 독거노인이나 장애우를 간호하기 위해, 방균복을 입고 함께 생활하고 계시기도 한답니다.
우리교회도 지난 임원회 때에, 우리 주변에 이번 전염병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도울 것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실제적으로 도울 일이 있으시고 교회에 필요한 도움이 있다고 판단되시면 말씀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가 사람에게 염려와 두려움을 퍼트렸다고 한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퍼트리는 일에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가깝게는 우리 가족과 교우, 이웃들을 선대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시며,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재앙을 내리실 때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멸망하려고 하심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으로,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선한 뜻이 있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앙속에서 나타나는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에 사로 잡혀야 합니다. 이 땅에 재앙을 내리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며 회개하는 영적인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재앙으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고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으로, 우리의 영이 각성하며, 주님과 더욱더 가까이 함으로, 주님의 평강과 은혜가 넘치고, 이를 세상에 흘려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의 죄목
행 24장 1~13절 / 신성종목사
바울은 역사에 남는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죄인으로 보였습니다. 그것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되는 제거시켜야 하는 그런 몹쓸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의 죄목으로 고발을 당했습니다.
1. 그러면 왜 바울이 죄인으로 보였는가? 그것은 “개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바울의 위대함이나 그의 진실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바로 보려면 첫째는 적당한 거리에서 보아야 하고, 둘째는 이해관계에서 보지 말아야 하고, 셋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따라 보아야 하고, 넷째는 신앙으로,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언제 모든 것이 잘못 보이는가? (1)편을 갈라서 보기 때문입니다. 편을 갈라서 저 사람은 내 편이고, 이 사람은 상대편이다라는 전제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아전인수]격으로 보기 때문에 잘못 봅니다.
(2)외형만 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는 눈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야 잘 보입니다.
(3)자신의 평가 표준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울과 자에 문제점이 있을 때 잘못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정경(canon=standard)이 필요합니다.
(4)이해관계로 보기 때문입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영원히 격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객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죄목은 무엇이었는가? (1)당시 바울은 염병과 같은 죄로 정죄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롭게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의하게도 보입니다. 최근에 테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로 인해 세계가 시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테러로 규정하는 것들이 과격 이슬람 단체서 보면 순교라고 해서 유족들에게 돈도 주고, 순교자로 올려 세우기도 합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염병과 같은 바울의 열심과 선교로 인해서 기독교가 전 세계에 번지게 되어 오늘날 세계적 종교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염병이란 전염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전염병의 문제점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무서운 전염병은 첫째로 에이즈 같은 성병입니다.
둘째는 마약입니다.
셋째는 유행이란 것입니다. 넷째는 뉴 에이지 운동입니다. 다섯째는 이단종교입니다.
에이즈란 영어의 약자입니다.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즉 후천성 면역성 결핍증을 말합니다. 본래는 원숭이의 병이었는데 수간을 통해서 전염된 것으로 동성애를 통해서 가장 빨리 전달이 됩니다. 이것을 흔히 a(아), i(이제는), d(다), s(살았다)는 뜻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약이 전염병처럼 빨리 전달되는 것은 그 쾌감 때문이고, 중독성 때문입니다.
셋째로 뉴 에이지 운동은 저의 글, 영적 전쟁에서 많이 언급한대로 현대에 가장 무서운 운동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있는 것은 평화, 환경보호, 통일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를 보면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특별히 뉴 에이지 음악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매력을 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이단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줍니다. 전통적인 기성종교는 도덕이란 귀찮은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매력이 없는데 이단종교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번지고 있습니다.
(2) 바울은 소요죄로 정죄되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항상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변하고, 제도가 변합니다. 습관이 변합니다. 그래서 시끌벅끌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생활과 습관까지 변하기 때문에 소요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처음에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를 미풍양속을 해치는 종교로 낙인 찍혔습니다.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는 지금은 제사를 인정해서 전통적인 습관과 화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 만큼 부모에게 공경을 강조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다만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에 대한 공경이 아니라 우상에서 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뿐입니다.
또 기독교가 오해를 받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부모와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논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땅에 있는 부모나 남편에 대한 사랑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부모를 위하게 되고, 남편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해는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이 세상의 왕과 나라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나라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롬13:1절에 보면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더 국가에 충성하는 종교입니다. 다만 국가를 절대시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켰는데 로마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에 가장 큰 소요는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고, 성찬식을 식인종식으로 오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소요을 일으키는 것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정죄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유대교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구약교회를 인정하고, 율법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유대교는 인정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것은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다시 옛날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단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입니다. 이슬람교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미워하고, 전쟁을 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오늘날의 전쟁은 대부분 종교전쟁입니다. 그것은 빈대 잡는다고 집에 불을 지르는 것처럼 잘못된 것입니다.
4. 나의 죄목은 무엇인가?
나의 눈으로 나를 보면 나는 그저 무난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면 바울처럼 나는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 거듭난 분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화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죄가 보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명지대학 교수로 있었을 때에 교수회 때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에 제가 우리는 다 죄인이라고 했더니 나중에 총장이 제게 와서 자기는 한국의 법을 만든 사람으로서 죄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섭섭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crime, 다른 하나는 sin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회적 죄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도덕적 죄,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다 있습니다.
선인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그것도 죄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 남을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 기도하기를 쉬는 것, 의심하는 것, 음란한 마음을 가지는 것 다 죄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첫째로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죄는 회개하고, 지금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3) 셋째로 오늘도 찬송하며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끝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나의 작은 목숨과 재능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을 전염시키는 교회
김영대목사 / 행 24:5, 막 16:15-16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관통하면서 이 땅에 남긴 것은 수재민들의 낙심과 실의에 찬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재산을 잃고 절망에 처한 그 심정이 우리들의 가슴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위로해주시고, 회복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6·25 전쟁과 I.M.F 관리체제를 능히 극복한 저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 태풍의 피해도 능히 극복할 줄 믿습니다. 이 일에 우리 성도님들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미 수재헌금을 해 주셨지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은 헌금 시간에, 혹은 로비에 설치된 수재 헌금함에 여러분의 정성을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은 국민일보에 기고하신 "이 땅을 고쳐주옵소서"라는 글에서 태풍 루사가 남기고 간 상처, 엄청난 재앙을 통해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목사님은 태풍 루사를 통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운행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애끊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이 땅을 고쳐주소서."
성경에는 물에 대한 기록이 650번이나 나옵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물은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물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적도 많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가 오고 안 오는 것,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으로 인한 재해와 고난이 닥칠 때,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즉,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싸인에 민감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자신이 경성하고 또한 그것을 세상에 알릴 의무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시련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회개 기도를 요구합니다.
1. '교만'입니다. 우리 민족적으로 제일 먼저 회개해야 할 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너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의 먹구름에 가려 겸손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많이 참아 오셨습니다. 남아도는 쌀을 가축 사료로 사용하려고 한다든지 심지어 술을 만들 생각을 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얼마나 됐습니까?
하나님은 굶주림에 한이 맺힌 이 민족에게 '떡'과 '복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이 옛날처럼 굶지 않도록 풍년을 선물하마"하시고 우리에게 풍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요가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모르고, 또한 그것으로 가난한 이웃,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은 안하고 술을 만들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백성으로부터 행여 축복의 촛대를 옮기시지 않을지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겸손함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타락'입니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4강을 일궈냈지만, 우리의 도덕 수준도 과연 그만큼 높아졌습니까? 아닙니다. 한반도를 휘감고 있는 사치와 방탕과 향락의 먹구름을 제거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고, 비싼 영국제 위스키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고, 흡연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삐뚤어진 원조교제와 인터넷을 통해 청소년들에게까지 깊숙이 파고든 성적인 타락은 우리 사회를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구제역, 콜레라, 장티푸스, 아폴로 눈병 등 각종 전염병의 창궐은 이 민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또렷한 음성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나 피해를 보는 개인에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내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임을 알고 회개하고 타락한 우리의 삶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3. '증오와 미움, 시기와 질투'입니다. 여야의 이기주의적 정쟁은 태풍 루사보다도 더 강력하고 집요해 보입니다. 이런 미움과 증오의 희생자는 항상 무고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과, 경제대국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끼리 미워하고 헐뜯는 '증오의 싸움'을 벌일 여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증오와 미움이 어디 정치판 뿐입니까?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격려와 칭찬, 이끌어줌과 세워줌이 있습니까? 남 잘되는 것 못보고 어떡하든지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심보가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부터 회개하고 새 맘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만'과 '타락' 그리고 '미움과 시기'를 회개하십시다. 오늘 저는 예배의 부름으로 역대하 7장 14절을 읽었습니다.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 이 말씀은 바로 태풍의 상처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이 말씀 또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아폴로 눈병이 전국적으로 번져 많은 학교들이 휴교하고, 안과들마다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눈병이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지 한 명만 걸렸어도 하루 이틀 사이에 전 학급, 전 학교로 급속하게 번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미 이 눈병을 알아 본 경험이 있어서 면역이 되어 괜찮지만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토요일 학생 예배에 눈병 걸리고도 교회에 나온 학생이 있더라구요. 제가 보고 다른 학생들에게 전염될 것을 염려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힘없이 돌아가는 그 뒷모습이 너무 안스럽더라구요. 그래서 학생이 집에 도착할 때 즈음에 전화를 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이 아폴로 눈병을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할 계획까지도 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전염병을 영어로 Contagious Disease라 합니다.
그런데 Contagious라는 단어는 "전염시키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영향력을 미치는"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쓰여지고 있습니다.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Willow Creek)교회는 교회의 표어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Building a Contagious Church. 즉 "전염시키는 교회, 감화시키는 교회,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어를 보는 순간 제 가슴에 너무 진하게 그 의미가 다가 왔습니다. "그래!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염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감화시키는 교회,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 되게 하여야 한다"라고 마음에 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일컬어 염병 즉, 장티푸스나 콜레라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요케 하는 자'라고, 백성을 선동해 소란을 피우며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라고 고소합니다. 이 '염병'이란 말과 '소요케 하는 자'란 두 가지 말 다, 전도에 힘쓰는 바울의 영향력이 엄청나고 그 파급 효과가 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염병(染病)의 염자는 '물들다' '옮기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을 악평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나쁜 의미로 바울의 존재를 염병,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기쁜 소식, 복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시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자신이 직접 체험적으로 경험하였기에 전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복음의 역사가 너무 커서 마치 전염병 같이 구원의 역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의 용서를 통해서 세상도 바꾸고 사람도 바꾸어 놓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본래는 죄인이요, 추한 인간들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용서받고 "새사람"이 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새사람 됨, 천국 백성 됨, 하나님의 자녀 됨은 내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대신 죽으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약속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그저 믿음으로 이런 큰 선물, 큰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나 혼자만 받고 내 가슴에 묻어두기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사랑을 내 가슴속에 묻어 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사랑을 모르거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나누어주라고 요구하십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주어 그 사랑으로 그를 변화시켜서 하나님께 인도해 오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요구요, 명령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별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단지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게 구제비나 물품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참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 생명을 나누어주는 교회! 그런 교회 그런 성도가 참 사랑을 가진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복음 전도,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명령이 아닙니다. 전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가장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경험한 분이라면 오늘 결단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담대하게 복음을 외치십시오. 세상이 어둡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신앙인이면서도 늘 현실과 타협하며 사는 사람은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교회 다니는 것을 가능하면 숨깁니다. 그래서 주일에 친목회가 있다 하면 가고, 회식이 있다 하면 술도 한잔 마십니다. 이런 사람은 인간관계는 원만할 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한 사람입니다. 맛 잃은 소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이 복음, 이 기쁜 소식, 하나님의 사랑을 전염시키고 퍼뜨려 온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케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력한 영향력
문기태목사 / 행 24:5-9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더 온갖 나쁜 말, 나쁜 행동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다툼과 갈등이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범죄 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청소년, 어린이들에게 까지 범죄 연령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악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갖 악한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선하고 강력한 영향을 끼쳐 변화시킬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는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비추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밝음을 통하여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별로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큰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믿음이 되어 우리로 정말 영향을 별로 끼치지 못하는 인생을 살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세상을 변화시킬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명을 주셨고 동시에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도시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 나라에 온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을 제사장 아나니아가 벨릭스 총독앞에서 고소하며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 24:5)'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당시에 거쳐간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난 해 메르스로 인해 온 나라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경기는 급속히 얼어붙었습니다. 사람들이 아파도 병원을 못 갔습니다. 다른 지역에 갈 일이 있어도 꺼렸고 심지어 집 밖에 나오기를 꺼렸습니다. 불과 100여명이 감염되었을 뿐인데 30여명의 사망자를 내었을 뿐인데도 그 영향은 놀랍도록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의 전염병이 돌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옵니다. 치료약도 거의 없고 속수무책입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유대교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를 전염병 같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율법에 매여 종으로 살다가 그리스도를 믿어 자유를 얻고 기뻐하며 새롭고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과 같이 강하게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사단을 두렵게 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 단 몇 사람만 있어도 그로 인해 온 도시가 시끄러웠는데 오늘 우리는 천 만 그리스도인을 자랑하는데 무슨 영향을 나라와 민족에 우리가 살고 잇는 도시에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향력이 약화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향력이 지도력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지도자라고 생각합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위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위치에서 어떻게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불신세계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위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면 좋겠습니다. 부정적인 영향력이 확산되는 세상에 긍정적이 영향을 강력하게 끼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치며 세상에 강력한 도전을 주며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강력한 영향력 가지려면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미래가 불투명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어둡고 전망이 흐릴 때일수록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럴 때 사명을 잃어버리면 삶의 의미도 사라지고 그저 누워서 먹고 마시고 밖에 못하는 식물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깨닫고 붙잡으면 어떤 고난도 극복하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사명감에 불타면 어떤 역경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비전을 성취하게 됩니다.
저는 32년전에 딱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창원에 교회를 개척하러 내려왔습니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후원해주는 교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구체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교회를 개척시키고 발전시키겠다고 플랜도 청사진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명감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서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서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창원침례교회 간판을 걸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날마다 전도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6개월만에 집주인에게 쫓겨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단칸방에서 아내와 아기 그리고 어머니까지 모시고 살기도 하고 수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고 창원침례교회를 개척하라는 사명을 주셨음을 확신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창원침례교회 하면 다들 알잖아요. 창원뿐 아니라 경남 땅에 유명하잖아요. 창원침례교회를 통해 구원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창원침례교회를 통해서 기도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여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사명을 발견하고 함께 헌신하여 수 많은 일군을 배출하여 지금 전국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아 평생 사명을 안고 살았습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힘썼습니다. 그래서 세 번의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는 꿈을 가지고 닥치는 대로 전도했습니다. 사명이 있었기에, 사명을 붙잡고 확신하며 살았기에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영향을 끼쳐 유대인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고 사단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깨닫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며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다 사명을 주십니다. VIP들에게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여서 영적 성장을 돕는 사명도 있습니다. 목자 목녀가 되어 몇 명의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목양하는 사명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저와 같이 한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사명, 교회를 개척하는 사명, 또는 선교의 사명 등 다양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명을 깨닫고 사명감에 붙잡혀 살 때 강력한 영향력이 주어집니다. 바울과 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도 어떤 방해도 극복하고 정말 아름답고 복된 강력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명을 깨닫게 되기 바랍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기 바랍니다. 사명감에 불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기 바랍니다.
2.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려면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농사 지을 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냉해입니다. 1년 농사 잘 지었다가도 한 보름만 일찍 찬바람이 불면 그 해 농사는 끝장납니다. 사람도 건강에 제일 해로운 것이 차가운 것입니다. 몸의 온도가 조금만 내려가도 위험합니다.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피가 많이 돌기 때문에 온도가 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냉랭해졌습니다. 차가워진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범죄가 점점 늘어가고, 청소년 탈선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너무 냉랭해졌습니다. 결혼식 하기가 바쁘게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냉해를 누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불을 붙여 주실 때 변화되고 치료될 줄 믿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하면 모든 심령의 냉해, 모든 관계의 냉해가 치료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여 가슴이 뜨거워지고 열정으로 불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품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헨델은 56세에 병들어서 모든 영광이 떠나갔습니다. 어느 눈 오는 날 밤, 그는 교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가슴이 성령으로 뜨거워졌을 때 만든 작품이 그 유명한 헨델의 '메시아'입니다. 베토벤도 실의에 빠졌을 때 주님을 영접하여 은혜 받고 '심포니 9'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의 '심포니 9'과 헨델의 '메시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그 작품을 들으면 같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를 차갑게 만듭니다. 어디를 가도 차갑습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심령이 뜨거워져 그 뜨거워진 심령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교육을 일으키고, 사회를 일으켜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가 잘되는 이유는 가슴을 뜨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뜨겁게 되어 열정에 불을 붙입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는 심령의 불을 꺼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의 길을 가던 사람도 예수를 믿으면 그 안에 성령의 불이 붙게 됩니다. 그 불로 인해 죄를 이기고 불의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야 변화됩니다. 성령의 불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친구를 사귈 때도 가슴이 뜨거운 친구를 사귀기 바랍니다. 결혼을 할 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만나야 가정에 오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왜 기도합니까? 왜 예배를 드립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불을 붙이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불이 붙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밝게 빛나고 건강해집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레는 영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이라!"고 외쳤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어난 이 성령의 불길로 영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도 다들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이 나라에 붙을 때, 이 민족이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 열정을 품읍시다. 삶에 대한 열정, 사명에 대한 열정, 사역에 대한 열정을 가집시다. 우리도 열정적인 삶을 살며 부지런히 사명을 다 감당하고 마지막 순간에 바울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리"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들, 인류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킨 바울 역시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열을 다해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생을 불태웠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감당하려고 세 번이나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소아시아 일대를 누볐습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까지 찾아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절반에 해당되는 열 세 권의 편지를 썼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러 가기를 열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자기 백성의 구원에 대하여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동포인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자신은 지옥에 가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병든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며, 잃어버린 자들의 구원하려는 열심으로 가득 찬 사람을 찾습니다.
불타는 마음의 전도자 요한 웨슬레에게 동료 사역자가 어떻게 청중을 모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웨슬레는 "전도자가 불탄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불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의 불이 붙어 계속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악한 사단이 죄의 영향력을 강력하고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악하여가고 불신앙에 사로잡혀 살며 불행해지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설 강력한 영향력이 필요합니다. 어둠을 몰아낼 강력한 빛이 필요합니다. 불신을 몰아낼 강력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악을 몰아낼 강력한 선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강력한 능력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 속에 거하며 사명을 발견하고 성령 충만하여 열정으로 불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력한 능력이 임하여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이 주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빛을 발하며 어둠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