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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光武改革, 1897년)
제국의 때 늦은 불꽃
대한제국(조선)의 고종 황제가 1897년 광무 연호를 선포한 뒤 시행한 근대적 개혁을 말한다. 보통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중단되었다고 여겨진다. 아예 효과가 없는 것만은 아닌, 그나마 이 당시에는 훌륭한 개혁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뒷북성에 가까웠고 외부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여러 가지 문제점이 겹친 까닭에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 개혁이다.
광무개혁의 성격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절대왕정식의 개혁정책이다.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조선 구한말의 여러 개혁 시도 중 군사적 측면에서 나름대로 효과를 본 유일한 개혁이었다. 실제로 러시아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광무개혁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실제 광무 연호를 쓴 시간은 1907년까지이지만, 개혁 기간은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 까지거나 길게는 을사늑약까지로 개혁을 위하여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광무개혁의 이념은 동도서기론이나 중체서용론에 기반을 둔 구본신참(舊本新參 : 옛것을 기반으로 새것을 참고한다)이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대한제국이 갑오개혁 이전 옛 제도로 복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 철폐를 뒷받침하는 법적 조치나, 조세 및 토지제도의 개혁, 아울러 탁지부를 중심으로 한 재정운영체계는 광무개혁이 갑오개혁의 성과를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단지, 실제의 재정운영은 궁내부와 내장원이 주도를 하게되면서 있으나 마나했다.
토지개혁
토지개혁도 부분적으로 진행했다. 이를 흔히 광무양전이라고 부른다. 일부 지역에서 토지소유증서인 지계가 발급되고 토지의 소유주를 기재하였다. 토지의 소유주를 시주時主라고 부르고 이 사용범례를 칙령으로 반포하여 규정하였다.
문제는 이 시주(時主)는 문자 그대로 토지점유에 있어 '임시지주' 혹은 '임시점유자'로서 확실한 토지소유주로 지정된 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계작성 마저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실제 토지소유자와 시주명이 다르고 기초적인 삼각측량등은 시도조차 되지 않에 구체적인 면적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사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광무양전과 함께 시행된 광무사검 당시 토지의 소유실태를 고려하지 않은채, 민간과 국가의 소유권리가 얽힌 분쟁지를 전부 국유지로 환수함에따라 전국적인 국/민유지 분쟁으로 불거져 커다란 민심이반을 불러일으켰다. 이야기인즉, 당시에 국유지였던 아문둔전(衙門屯田 : 관아의 토지)과 궁방전(宮房田 : 궁방이 소유한 토지 즉, 왕실이 소유한 토지)등은 실질적으로 관이나 궁에 의해 소작료만 거둬지거나, 아니면 관리가 되지 않은체 인접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어, 문서상으로만 국유지이지, 실질적으로는 경작중인 농민소유에 가까워 소유권이 복잡하게 얽힌 중층적 혹은 다층적인 소유상태였다. 이미 광무양전이전 갑오개혁으로 이러한 토지를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국유지로 편입하여 분쟁소요가 잇따랏는데, 광무양전때에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주도하에 무리하게 국유지편입을 시도하여(이른바 광무사검), 다층적으로 소유권이 얽힌 농지에서 경작민의 경작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아, 국/민유지 분쟁소요가 일어났고, 이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기 전까지 해소되지 못하였다.
금융과 화폐
2013년 9월에야 겨우 공식반환된 호조태환권의 원판
금융과 화폐면도 파란만장하다. 고종은 갑오개혁 이전부터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882년 마제은을 수입해서 최초의 서양식 화폐이자 은화인 대동전(大東錢)을 만들었으나, 이 돈들은 모두 부유한 이들의 창고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유출되었고, 원료인 마제은의 가격 상승으로 1883년 생산이 중단된다.
이후 고종은 당오전을 만드는 한편, 1885년 차관을 도입해서 독일에서 근대화폐제조기계(압인기!)를 수입하고 전환국을 설치했다. 전환국 총판에 독일인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앉히고 1887년부터 전환국에서 화폐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금화, 은화, 적동화 체계였으나 소량 생산으로 그친다. 기본적으로 금본위제에 필요한 금이 부족했고, 조러밀약이 들통나자 뮐렌도르프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면서 주도할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892년부터 은본위제도 하의 화폐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당시 전환국 통판 안경수가 일본에 건너가서 차관을 도입하고 일본 기술자들을 끌어들여서 근대화폐가 제조된다. 워낙에 근대화폐 기술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은화의 기준 가치가 일본돈 1원이 된다. 거기에 맞춘 것이 조선은화 5원. 그리고 5원과 1원은 은화로 제조되었다. 1원의 1/10의 가치가 전, 전의 1/10이 푼으로 정해진다. 그래서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가 된다. 이 때 기존 화폐를 근대화폐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쓰려고 했던 것이 호조태환권이다. 문제는 여기서 기존 화폐 제조 이익을 가진 집단들의 이익이 꼬이고, 무엇보다 1894년부터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터진다는 것이다. 이후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당오전이 없어지고 신식화폐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게 된다.
문제는 갑오개혁을 포함한 이 시기가 워낙에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고, 조선의 역량으로는 은을 통제해서 대량의 은화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정부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백동화 뿐이었다. 실제로 이게 가장 주조 이익이 많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에 기존 화폐 발매권한을 가졌던 이들이 백동화에 달라 붙으면서, 정식으로 화폐를 만들 권한을 가진 경성과 인천의 전환국 외에도 주조의 특권을 얻어 행하는 특주(特鑄)나 환관이나 관리가 행한 묵주(默鑄)가 등장했다. 문제는 사주전이다. 사실 조선은 사주전을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화폐는 밀조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전환국의 기술은 일본에서 왔으니, 일본에서는 밀조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일본에서 밀조된 백동화와 제조기계가 조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밀조기계만 적어도 150대가 한반도로 밀수되었고, 수입된 백동화의 양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백동화 밀조는 국제적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1902년 일본에는 '한국의 백동화 위변조범 처벌령'까지 제정 된다. 실제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광무2년(1898년) 이전오푼 백동화인데, 이 시기 즈음에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다. 이 당시 통계를 보면, 서울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25%가량, 그리고 제2 도시였던 평양에서는 80% 가량이 불량 혹은 위조된 백동화였다. 백동화가 워낙에 풀려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은본위제를 포기, 1901년부터 금본위제도를 재도입한다. 20원, 10원, 5원은 금화로 제작되었고, 반원, 20전, 10전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과 반전이 청동화였다. 이 때의 본위화폐는 금화였다. 즉, 종종 잘못 알려져 있는 메가타가 금본위제를 처음 도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다시 나온다. 조선에는 금이 부족했다. 금화의 생산량은 적었고, 기존의 백동화를 포함한 화폐들은 회수되지 않았다. 사실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면 러시아와 합작해서 한러은행을 설치하거나 이후에 중앙은행설치 등이 따라야 했으나, 독립협회가 크게 반대했고 러시아의 의욕도 부족해서 엎어진다. 교과서에서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막아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일본 국립 제일은행이 제일 이득을 봤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립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아서, 중앙정부의 자금 상당수를 일본 제일은행의 한양지점에 예금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상인들에게 대출되고 있었다. 때문에 한러은행 설치는 일본 제일은행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는데, 독립협회가 이 한러은행의 설치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어 버렸다.
결국 금본위제도 하의 신식 화폐는 기존 화폐를 대체하지 못했고, 위조 백동화는 여전히 찍혀나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폐를 한번은 손 볼 필요는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환국을 폐지하고,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권을 박탈하였으며, 재정분야를 일본인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가 거머쥐게 만든다. 이후 위에 언급된 제일은행은 대한제국의 공식 화폐발행은행이 되었으며, 일본엔화가 조선 엔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폐가 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 화폐 소유자들이 대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화폐정리사업이다.
2.2. 군사 부문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이룩한 군사정책(외세의 간섭 때문에 전에 있었던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는 군사에 관한 개혁은 거의 없었다.)으로, 고종은 예전부터 한 밀덕해서 개국 직후부터 무기를 사들였고, 실제로 시위대/친위대의 무기 수준은 한 때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능가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사야하는지에 대하여는 무지하여 군대의 위용을 위해 외국에서 군복을 수입하는데 거액을 쓰거나, 상선에 대포 몇 개를 달았을 뿐인 배(양무호)를 군함이라고 사오기도 했다. 연안포함이나 정규프리깃도 아니고 상선에 대포만 얹은 시대착오적인 물건으로, 이와 같은 것은 서양에서 19세기 초중반 군사기술이 미개한 미개척지에서 강제로 물건을 팔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이었지 정규해군을 상대로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 이 배는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러스(Pallas)호를 일본 미쓰이 물산이 1894년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였는데, 1903년에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55만엔에 구입하였다. 출시당시 25만엔이었던 9년된 중고화물선을 가지고, 값을 깎긴 커녕 두배가 넘는 가격으로 인수한 것이었다.
더욱이 문제는 이 중고무장상선을 구입하는데에도 국방예산의 1/4 이상이 들어갔고, 이렇게 무리해서 구입한 군함(?)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수송선으로 쓰이다가 침몰했다.
그밖에도 평소 귀가 얇은 고종이 무기상인이 사라는 대로 무기를 사댔기에 대한제국군은 엔필드나 레밍턴 롤링블럭부터 독일의 마우저 M1871까지 실로 다양한 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총알 규격이 죄다 재각각이었기 때문에 보급에서 난항을 겪었다. 근대 무기를 얻으려고만 했지, 근대무기의 보편성과 통일성은 확보하지 못하였다. 무기의 보편성과 통일성의 중요성은 이미 이전부터 중요하게 여겨서 조선시대 문종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고종은 주먹구구식 호기심으로 무기를 구입했기에 이런 점은 고려하지 못했다.
물론 애초에 외국과 계약을 해서 공장을 통하여 무기를 생산시킬 근대적 기술이나 지식, 자금 등이 없었기 때문에 무기상에게 구매하는 것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어찌됐건 대한제국군은 무기만 마련했지 지도력은 부재하여 실전에서는 매번 털렸다. 경복궁이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을 때나, 을미사변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지방의 진위대 군사력은 제법 쓸만했지만, 러일전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대개 후일 일본군과 함께 최익현의 의병과 동학당을 때려잡는 역할이나 했다. 군대가 해산된 뒤에도 정미의병전쟁에 합류해서 나름 도움은 되었지만 전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2.3. 실적
대영제국 출신 고위인사였던 이사벨라 비숍이 쓴 '한국과 한국인들'이란 책에서 대한제국 직전 경제력을 서술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다. 1896년 조선에 입항한 화물선 자료. 1886년~96년간 조선의 전체 수출/수입량. 1895년~96년간 조선의 총수출량과 종류. 1895년~96년간 조선의 총수입량과 종류.
인삼을 전매 수출하고, 그 외에 목재, 쌀 , 소가죽, 면화, 금광의 금을 수출했다. 독자적으로 채굴이 힘들 경우에는 채굴권, 벌목권을 넘겨줘서 수출한 부분도 제법 되었다.
하여간 이 덕분에 수치상으로는 1898년에 나라의 빚을 대다수 갚았다는 말도 나온다.
더불어 원래 위에 언급한 두 사업에 대해서는 조정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엄청났으나 고종이 직권으로 궁내부 재원을 동원해서 진행해버렸다. 이런 점이 광무개혁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이며, 이태진 교수 등이 광무개혁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속도가 빨랐을지언정 황제의 독단적인 진행이었고, 또 고종이 막무가내로 해서 큰 문제가 생겼다. 또한, 대부분의 수출액은 황제나 채굴권, 벌목권을 가진 열강 상인들에게 돌아갔고 일반 백성들에게 별로 돌아가지 않는 통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나빠지지 않는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서양식 4개 연대를 갖출 수 있는 자금을 벌어들일 금광을 헐값에 넘기질 않나, 황제는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을 대부분 군비나 한성의 전기 회사 등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일제가 을사늑약 이후 들어선 이후로는 다시 1300만원의 빚을 강제로 졌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십 만 원 수준에서 운동은 중단된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국채배상운동을 하는 것 자체를 일제에서 방해하였고, 국채배상운동을 알게 된 일제가 이전보다 더 많은 빚을 조선 정부에 떠넘겼던 것이다. 애초에 처음 생긴 빚도 조선 정부가 필요해서 빌린 돈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필요하면 빚을 더 늘리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얼마를 모으든 무의미했다.
부족한 재정 자금
광무개혁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
일단 개혁을 위한 예산이 정상적인 정부 예산이 아닌, 비상수단인 황제의 내탕금에 의존했다. 이 내탕금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부터 벼슬을 돈주고 팔거나, 화폐주조를 남발하거나, 원납전을 걷어들이면서 마련하거나, 백성들의 민유지를 사실상 강탈하여 마련한 국유토지의 소작료등으로 이뤄졌다. 당시 고종의 공식적 비자금창고인 궁내부와 궁내부 산하 내장원 내탕금은 기존의 예산을 집행하는 탁지부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정부 예산보다 황제의 내탕금이 훨씬 컸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좌충우돌 움직일 수 있었다. 몇몇 학자는 예산마련을 내탕금에 의존하게 된 이유가 수세권이 일본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황제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내탕금에 주목한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제가 러일전쟁 이후 취한 조치 중 하나가 고종의 돈줄을 끊기 위해 수세권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정부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아래 언급되는 조세 수취 문제 때문이라고는 입장도 있는데 그건 아래 문단 참고. 그런데 정작 내탕금을 포함하더라도 인구나 국토의 규모에 비해 재정의 규모가 너무 적었다.
구체적으로 대한제국 세출세입 지표를 살펴보면, 1895년부터 1905년까지 11년간 대한제국의 총 세입은 87,318,941원으로, 1년 평균 세입은 793만 8천 원 가량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화폐단위인 원은 각각 달러와의 교환비율이 2:1, 엔과의 교환비율이 거의 1대 1로 조선 정부의 세입 값은 각각 400만 달러, 800만 엔 이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금액이 어느정도 규모인지 비교해자면, 미국에 이권을 이양한 운산금광의 초기 개발비용이 500만 달러로, 미국의 일개 기업이 낼 수 있는 투자금의 규모가 대한제국 1년평균 재정 수입을 능가할 정도였다. 세출금액을 제하면 실제 대한제국의 여유돈은 이보다 훨씬 처참한 수준이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 인구 3천만 명을 지닌 일본의 1년 세입이 약 2억 엔이었는데, 이는 800만 엔 이하의 대한제국 평균세입액의 약 25배, 11년간 총세입의 2배를 넘기는 규모였다. 한반도의 거주인구는 대한제국이 멸망 이후 1910년 1,300만 명이었는데, 인구차를 감안하더라도 조세의 수취 실적은 수십배 가량 차이를 보인다. 러일전쟁 직후 국채보상운동 시기 대한제국의 1년 예산이 600만원이고,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 차관으로 억지로 떠넘긴게 그 2배였는데, 만약에 대한제국이 정상적으로 조세수취를 했다면, 충분히 갚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한제국이 구체적인 세수파악과, 세수내에서도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취율이 불량했기 때문이었다. 지방관과 서리의 세금징수를 중앙정부에서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고 더욱이 외획(外劃)으로 인해 민간인인 상인도 조세수취에 개입하게 되면서 재정운영은 점점 더 비효율적으로 굴러갔다.
그렇다고 내탕금을 바탕으로 마련된 고종의 비자금이 많았냐면, 이조차 생각보다 규모가 적었는데, 헐버트를 통하여 맡겼다는 고종의 비자금은 25만엔, 미화로 불과 12만 5천 달러에 불과했다. 다른 비자금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잘해도 정상적으로 세금을 거둬서 운영되는 정부재정에 비해 규모가 적을 수 밖에 없고, 이런 소규모 내탕금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렇게 적은 예산으로는 2차 산업인 제조업을 위한 자금투자나 공장설립은 커녕 일개 한 지역의 천연자원조차 제대로 채굴할 자금을 대기도 어려웠다. 이러다보니, 산업이나 군사정책에서도 청나라나 일본처럼 근본적으로 제조업을 육성하여 통일된 규격의 무기나 의류 및 군복도 자체생산하고, 외화낭비를 줄이는 등의 본격적인 근대적 개편이 아니라, (산업유치할 만큼의 돈은 없으니) 외화유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미 완성된 무기나 군복들을 사들이는데나 치중하는 등 무늬만 근대를 표방하는 수박 겉핡기식 혹은 보여주기식 정책밖에 시행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마련한 내탕금이 나중에 밀지와 함께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나누어져 의병활동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간접적 방식은 고종이 직접 나서서 싸우느니만 못하게 효과가 떨어졌고, 내탕금 형성과정에서 행해졌던 매관매직이나 화폐주조는 사회분위기를 저해하거나 반란이나 민란을 야기하고, 경제나 유통상황 악화를 초래하는 등 부작용이 넘쳐났다. 게다가 이런 숨겨둔 내탕금은 도리어 경술국치 이후에 효과를 발휘했고, 고종의 망명 자금으로 쓰일 계획도 있었던 걸로 보이나, 고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세금징수의 문제점
대한제국의 재정자금이 부족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징세기구와 관련제도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슷한시기인 러일전쟁기때의 일본에서 정부재정 중 가장 큰 90%가량의 비중을 차지하던 것은 토지소유자에게 무는 지세(地稅)였다. 일본에서는 지조개정(地租改正 1873~1881)을 통해 전국각지에 있는 토지의 면적과, 소유권을 철저히 조사하여, 확실하게 세수파악을 할 수 있었고, 관련기구 정비를 통해 관료와 공무원등을 육성하고 체계적으로 세무와 회계를 처리했다. 그러나 반대로 대한제국에서는 광무양전의 성과가 좋지 않아 전국에 있는 토지의 면적과 소유권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즉 토지세를 거둘 구체적인 세수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체계적인 징세원과, 징세기구가 없고, 기존의 징세기구가 비효율적이고 부패했던 것이 큰 문제였다. 문제점을 세가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통적인 조선의 징세원은 지방의 이서배 즉 서리였는데, 서리는 세금의 징수와, 세수파악등을 하는 실질적인 공무원 내지는 관료였으나, 공식적으로 녹봉을 받는 관료는 아니었다. 앞서 광무양전의 사실상의 실패로 실제 세수와 세액을 거의 독점하며 파악하고 있는 것이 이 서리였는데, 토지의 1결당 얼마식으로 결가(토지 1결의 값)를 책정하여 세금을 수취하되, (정보를 독점하고 있으니까) 지방관에게는 자신이 거둬들인 실제 세액보다 적게 보고 및 납부하여 그 차액은 자신들의 경비로 유용하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있었고 대한제국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과 지방정부에서 세수와 세액을 파악하지 못하니, 여기서 얼마를 유용하던 서리들 마음대로였다. 이를 위해 자신들이 사용하는 장부를 자기들만 알아보게 암호문처럼 적어놓는 것은 덤이다.
둘째로, 갑오개혁을 거쳐 조세를 금납화하고, 현물을 납부하는 공납제를 계약제로 변경하였으며, 지방재정을 중앙재정 즉 탁지부 산하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실제 지방의 재정운영은 중앙정부에게 지시 및 간섭을 받지 않고 철저히 독자적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중앙정부에 필요한 현물을 국가에서 지정한 거래가격에 따라 구입, 교환하여 수취하는 형식으로 변경하였으나, 정부에서 지정한 가격과 시장의 가격이 다르고 또 시장의 가격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보니, 중앙정부의 현물 보유량을 정확한 현금세액으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현물수취를 담당하는 지방관리들이 현물가격의 시세차익을 이용하여 횡령이나 사리를 추구하기 쉬웠다. 예를 들어 갑오개혁이나 광무개혁 전인 1867년(고종 4년)의 서현현에서는 지방관이 쌀인 대동결작미(大同結作味) 633석을 1석에 18냥 3전으로 계산하여 화폐로 세금징수를 한 다음, 이 화폐를 가지고 다른 곳에서 쌀을 1석당 13냥 3전에 사들여서, 중앙정부에다가 쌀로 세금을 납부하여 3,800여 냥의 이익을 챙겼다. 방납이나, 대동법등의 제도는 이후에 폐지되었지만, 지방관들은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여, 차익만큼 그들이 이윤을 차지하고 반대로 정부나 백성이 손해를 보는 일은 매우 잦았다.
셋째로, 갑오개혁 이후 세금징수에 중앙이나 지방의 관료가 아닌 민간인인 제3자를 개입시켜 세금수취를 원활하게끔 했는데, 이를 외획(外劃)이라고 한다. 오늘날 처럼 국고를 이용하거나, 지방 및 중앙은행을 통해서 세액을 송금하는 일은 은행제도가 잘 자리잡지 않아 할 수 없었으므로, 세금이나 물자를 운송할만한 민간인을 개입시킨 것이다. 주로 탁지부가 민간상인에게 특정 지방의 세금상납영수증을 일정금액으로 갖다 팔아서 재정자금을 마련하고, 상인이 이 영수증을 토대로 그 지방에서 운송비나 기타 여비를 포함하여 되받는 식이었다. 문제는 상인들이 실제 탁지부에게 상납한 금액이나 실제 소요된 경비보다 월등히 높은 금액을 지방에다 청구해서 이윤추구에 나서기 시작했고, 탁지부가 간혹 지방 고관들에게 무상으로 영수증을 발부해놓고 대금을 받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은 지방관대로 영수증을 통해 세금대납이 가능하니, 탁지부의 세금 영수증을 바로 구입(?)하지 않고 내야될 세금을 연체 및 체납하여 이 금액을 자본금으로 삼아 두번째 처럼 물건거래 등을 통해 차익등을 얻거나, 사적으로 유용하면서 이윤추구에 나섰다. 게다가 영수증에 표기된 만큼만의 액수만 지불하면 세금납부의 의무를 마치니, 지방관이나 현령이 영수증을 통해 상납할 액수보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거둬들여도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방법이 부족했다. 자연히 백성들이 세금을 많이낸다 해도, 중앙정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의 양은 극히 적은량에 불과하여 세금 징수는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충분한 재정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재산조사, 이 경우 지적조사를 통해 명확한 소득조사와 세수, 세액파악을 하고, 수취를 위해 징세기구와 행정기구를 나누며, 일정한 봉급을 받는 징세조사원을 배치하였어야 된다. 또한 은행이나 국고기구를 정비하여 세금징수와 운송비를 절감 및 축소하여 민간인이 개입할 여지와, 관료가 세금을 사적으로 유용할 여지를 아예 주질 않았어야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재정정비를 위한 이런 사전작업을 단 하나도 실시하지 않았다. 그나마 행해졌던 징세제도 변화조치도 광무개혁이 아니라 갑오개혁기에 이루어졌던 것이었고, 대한제국은 이를 개선하기는 커녕 그저 유지 및 계승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세금수취상황은 결국 통감부나 총독부 등 일본이라는 외세세력이 들어와 대대적인 교통정리를 거쳐서야 정상화 되었다.
3.2. 인재의 한계
사실 이 장면이 광무개혁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으며, 한계이기도 했다. 당시의 인재풀은 대부분 광무개혁 자체에 반발이 심했다.
3.2.1.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
• 가장 곁에서 보좌해야 할 왕실은 가장 고종에 대해 반발이 심한 세력이었다. 고종에 대해서 외척에 대한 이야기만 많고, 종실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 그 때문이다. 흥선대원군계를 포함한 왕실세력의 태반은 오히려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최익현 류의 골수 수구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외되는데, 이 사람들이 원래 근왕주의자들의 기틀이 될 사람이다.
• 고종의 성향과 가장 비슷한 세력이라고 한다면 단연 온건개화파가 되는데, 이들은 고종 재위 초기에 비해 점점 숫자가 줄어든다. 이것은 갑오개혁 등 외세의 영향으로 전향해서 이기도 하지만, 갑신정변 등에서 떼로 죽어나간 것도 문제였다. 단적으로 갑신정변-갑오개혁-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유력한 온건개화파의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정동파니 춘생문 사건 관련자 등이고 여기에 포함되면서 부각된 인물이 바로 이완용이란 것에서 이 시기 인재풀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
• 개화파로서 독립협회류의 소위 계몽된 지식인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너무 이상만 쫓았다. 이들은 근대화에 대한 이상만 가지고 일본과 주변국들을 근대화의 스승으로 추앙하였고, 당시 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무지몽매한 민중들 역시 계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비단 일본 외에도 친러, 친청, 친미 등 다양한 선으로 자신들 중심의 판짜기와 자신들이 배운 이론의 현실화를 시도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무관세 자유무역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무관세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그걸 실행하면 조선의 상공업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수출품은 일본으로 나갈 쌀과 갓, 면포 정도였는데 정작 상대국들은 그냥 관세 적용하고 있었다. (쌀은 일본에 비해 정말 너무 쌌다.) 강화도 조약 등이 불평등 조약으로 불리는 이유가 일방적인 무관세라는 것도 크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건 그냥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허공 속을 날아다닌 부류. 이들은 결국 을사늑약과 강제병합,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보다 철저한 투쟁으로 가거나 아니면 일본과 동화되는 길로 가는 것을 강요당하고, 대다수는 후자를 선택했다.
• 광무개혁을 통해서 성장시킨 이른바 국가 장학생들과 학생들이 있다. 광무개혁에는 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전문기술 위주였지만 일본이나 미국으로 국비 유학을 보낸 경우도 존재했다. 문제는 이 사람들도 상당수가 유학기간에 친일이나 친미로 돌아서서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만난 문화적 충격에 더해서, 듣고 배운 것이 그런 것 뿐이니 당연한 수순이긴 하다.
3.2.2. 지지자들의 한계
그나마도 이용익, 홍종우 같은 충직한 측근은 드물었고 함량미달에 삽질이나 하는 측근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이 두 명도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은 받지 못했다. 홍종우는 결국 해보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고, 이용익만 내탕금 마련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망하고 만다.
외국인 측근도 마찬가지였다. 대한국국제를 작성할 당시의 외국인 고문은 미국인 의정부 고문 로젠드르(Charles W. LeGendre), 법부 고문 미국인 그레이트 하우스(Clarens R. Greathouse), 탁지부 고문 영국인 브라운(John M. Brown) 등이 교전소와 법규교정소를 거치면서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법규교정소 내에서 국제적 법 지식을 가진 소수의 인물들로 실무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은 대표적으로 1898년 4월, 로젠드르가 자문위원회 설립을 병행한 절대주의 정책을 주장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민영화나 만국법에 근본적으로 호의적이었던 열강의 시각을 대변하는 인물들에 불과했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바로 앞서 경제적 개혁 분야에서 언급한 전기 회사가 문제였는데, 교과서에는 이걸 긍정적인 사례로만 보지만 사실상 황제랑 친하다는 이유로 알렌이 소개한 이들의 미국 회사에 전기, 전차를 민영화해버렸다. 비록 1899년에 세워진 이 한성의 전차가 교토 전차가 만들어진(도쿄보다 더 먼저 만들어졌다) 1894년과 거의 연대가 비슷하며 한성의 근대적 면모를 일신했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그저 높으신 분들만을 위한 이야기였다. 또한 한성에 전철을 세울 때 실무진들(설계자+운전수) 면면을 보면 전부 일본에서 온 교토전철 직원이었다. 그리고 알렌 등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전차비를 왕창 끌어올렸고,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파업 + 폭동이 벌어졌다.
3.3. 시간과 역량 부족
거기에 더해 시간도 부족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대한제국 체제가 이 정도까지 길게 갈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에서 세력을 상실하던 일본이 이를 반전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것은 대부분 예상하고 있었고, 대다수는 러시아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때문에 고종이 전쟁에 승리할 러시아와 어떻게 외교적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더 골몰하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했다.
문제는 러일전쟁은 생각보다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미뤄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은 1부(負)=1아르(are), 1결(結)=1헥타르(hectare)로 전통적인 계량 단위를 서구의 미터법과 완벽히 일치시키긴 했으나, 양전지계사업을 완수하지 못했고, 국립은행 설치와 같은 장기 프로젝트는 시도하지 못했다. 문제는 당연히 정부가 멀쩡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 시간에 다 했으면 졸속 행정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다. 러일전쟁 후에 시도했을 때는 이미 일본이 모든것을 장악해서 어떤 의미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광무개혁은 사법제도의 법제화, 상업은행 설립,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 실시 등을 추진했지만 제대로 이룬 것은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손도 못쓰고 발린 것은 군사력도 군사력이지만 재정력과 기타 등등의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파산지경으로 갔으며, 실질적으로는 대러시아 정책에서 영국의 용병 노릇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금 소모가 엄청났다. 이 시기 일본과 조선의 인구와 산업기반 등을 고려하면 경제력의 차이가 엄청난데도 이 모양이었다. 단적으로 러일전쟁 시기 일본은 돈이 없어서, 미국과 영국돈으로 전쟁을 치렀다. 이렇게 말하면 가난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 일본의 1년 세입이 약 2억엔이었다. 당시의 엔달러 환율은 1:2였기 때문에, 일본의 1년 세입은 대한제국의 10배를 넘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덕인 것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전비가 20억엔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대한제국 재정으로 보면 100년치 예산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고, 이 시기 제국주의 정책 자체가 국력을 상당히 소진하는 정책이었다. 한 마디로 조선은 비교적 작았고, 굉장히 가난했고, 너무 늦었다. 최소한 임오군란 ~ 갑신정변 시대에 있어야 했을 정책이 10년은 늦었다;. 여기서 최소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이다. 즉, 광무개혁 때 진행한 개혁들이 실제 성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그정도는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고종이 미국에 넘긴 희대의 삽질 취급하는 운산금광에서 수익이 나와서 배당이 시작되는데만 7년이 걸렸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실제역사대로 터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개혁의 성과가 밖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에는 변화가 있어야 했고, 일본 식민지가 안되기 위한 조건으로 따지면,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부터 계산해도 장담 못한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시작된 순간, 대한제국의 운명은 정해졌다.
광무개혁은 뭔가 하려는 시도가 있는 개혁이었으나, 근본적으로 황제와 측근들 중심의 비상수단과 황제의 권위에만 의존한 막무가내 개혁이었다. 개혁은 지도자의 역량과 뒷받침 해주는 제도, 인재풀 그리고 기본적인 국가의 저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곰곰이 따지면, 지정학적 조건이 이렇게 살벌하지 않고 강대국의 눈에서 살짝 빗겨난 상대적인 주변국, 예를 들어 태국 정도였다면 어떻게 지지고 볶으면서도 해나갈 수 있었겠지만, 당시의 대한제국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첫댓글 1898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 1902년 파리 박람회를 통해서 대한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때 참가했던 사람들은 여비가 모두 떨어져서 가지고 갔던 물품과 악기들을 모두 기증하고 돌아왔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시카고 박람회때 미국 북태평양철도회사에서 태극기의 태극을 자신들의 회사 로고로 사용하겠다하여 흥쾌이 허락하고 북태평양철도회사는 80년대까지 기관차의 앞에 태극을 달고 달렸습니다. 시카고에 참가했던 악사들은 체류비용문제로 개막행사만 마치고 모두 귀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