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점의 유형에 따른 시적 특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점의 유형은 사고나 정서에 맞추는 <관념형(觀念形)>, 대상의 물질적 외관에 맞추는 <즉물형(卽物形)>, 무의식에 맞추는 <무의식형(無意識形)>, 분석적 인식에 맞추는 <기호적(記號的) 상징형(象徵形)>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이들에 초점을 맞출 경우 시적 특질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살펴보기로 합시다.
1) 관념형
영미 신비평가(新批評家)들은 사고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관념시는 예로부터 써 오던 유형이며, 또한 현대 시인들의 대부분이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는 근본적으로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념에 초점을 맞추면 그 작품의 의미와 정서가 뚜렷해지면서 시인의 고뇌가 잘 드러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 김현승(金顯承) <절대 고독>
영원의 '먼 끝'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니 대단하지요?
이와 같이 관념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화제의 지향성은 자연히 <화자 지향형>이나 <청자 지향형>일 수밖에 업습니다, 그로 인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주변 상황을 표현하는데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어조로 말할 것도 강조하여 정서과잉(情緖過剩)에 빠지게 되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 현대 독자들은 외면하게 됩니다.
옳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될 게 아니냐고요? 하지만, 시의 화제는 옳고 그름이 분명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의 경우, 대부분의 독자들은 정말 꽃을 뿌릴 작정이냐고 묻고 싶을 겁니다. 반대로 안 보내겠다고 하면, 떠나려는 사람을 무슨 수로 막겠느냐고 말할 겁니다.
그래서 관념시는 리듬을 부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리듬을 이용하여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리듬화하려면 음보 수를 맞추기 위해 섬세하게 표현할 것도 줄이거나, 반대로 불필요한 어휘를 끼워 넣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 부자연스런 작품이 되기가 일쑤입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관념시가 이미지즘의 비판을 받고 문학사조의 뒷전으로 밀려난 것도 이 때문입니다.
2) 즉물형
즉물형은 시적 대상의 외관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이미지즘(Imagism)의 시, 신비평에서 <즉물시(physical poetry)>라고 부르는 것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음 작품은 대상의 물질적 감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 오 오 오 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 오 오 오 오 연달아서 몰아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썩, 처얼썩, 철썩, 처얼썩, 철썩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사이사이로 춤을 추어
- 정지용(鄭芝溶) <바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자잘한 파도가 밀려오고, 누군가 바다를 향해 환호를 지르며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언어로 아침 바다의 모습(외관)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상의 물질적 감각에 초점을 맞추면 시가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해집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언어로 그리려면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하고, 리듬화도 피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시인의 고뇌와 정서가 사라지고, '의미 없는 텅 빈 그림(meaning-less picture)'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이미지즘 운동에 앞장섰던 파운드(E. Pound)가 그 대열에서 이탈하여 ‘은유의 그림(picture of metaphor)’을 주장한 것이나, 엘리엇(T. S. Eliot)이 의미와 형상을 함께 그리는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를, 리차즈(I. A. Richards)가 ‘포괄의 시(inclusion poetry)’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3) 무의식형
무의식형은 무의식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 상으로는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시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신비평에서는 이런 유형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평가들이 도덕과 이성의 세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
시에서 이런 초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 다다 운동을 전개하던 차라(T. Tzara)가 파리로 돌아와 브르통(A. Breton), 아라공(L. Aragon), 엘뤼아르(P. Eluard)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을 전개한 뒤부터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초반 이상(李箱)이 이 이론을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뒤부터입니다.
다음은 1940년대 우리나라의 초현실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후반기(後半期) 동인> 가운데 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열 오른 눈초리, 한 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이얗게 화석(化石)이 되어 갔다.
- 조향(趙鄕), 「EPISODE」 전문
이 작품은 일상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3개의 에피소드로 짜여져 있습니다. 우선 소녀가 손으로 총구를 가렸는데도 그냥 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손바닥 구멍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라고 말하고, 총소리에 놀란 갈매기들이 산비탈 황토바기에 머리를 처박으며 ‘하이얀 화석’이 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프로이드나 융의 이론에 의해 설명하면, ‘총’은 남성 성기, ‘구멍’은 여성 성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바다’는 ‘모성’, ‘새의 비상’은 성적 쾌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손으로 가렸는데도 총을 쐈다는 건 소녀가 거절했는데도 소년이 사정(射精)했다는 걸 의미하고, 갈매기들이 산비탈로 날아올라 화석이 되었다는 건, 아, 아... 그만 설명할랍니다.
이와 같이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인간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가 용이합니다. 또 무의식의 풍경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독자성을 확보하기도 용이합니다. 현대 시인들은 누구나 조금씩 무의식을 끌어들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이론을 빌리지 않으면 해석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입니다.
4) 기호적 상징형
대상을 분석적으로 인식하면 추상적인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래의 시에서는 이에 초점을 맞출 경우 과학적인 산문으로 바뀌어 거의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입체파(Cubist), 미래파(Futurist), 다다(Dada)가 이런 초점을 채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초점을 채택한 것은 오히려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인류가 애써 발전시켜온 이성주의와 과학문명이 수백만을 살해한다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의미 없는 음운, 기호, 도형, 숫자 같은 기호적 상징을 구사합니다.
다음 이상의 작품도 이와 같은 기호와 숫자로 표현하면서 분석적 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환자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 : 1 26·10·1931 -이상 책임 의사(責任醫師) 이 상(李箱)
- 이상(李箱), 「오감도 시 제4호」 전문
과거 이상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나열한 숫자들을 개성을 상실한 현대인으로, 숫자들을 뒤집어 쓴 것은 가치관의 전도(顚倒)로, 진단 결과인 ‘0’은 여성 상징으로, ‘1’은 남성 상징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개성을 상실하고 가치관이 전도된 상태에서 성(性)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게 이 작품의 주제라는 겁니다.
하지만 다다이스트들이 왜곡된 현대문명에 저항하기 위해 이런 기호적 상징을 구사했다고 해도 오히려 대상을 철저히 분석한 결과를 기호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해도 <자동기술(自動記述)>한 결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무의식이 ‘들끓는 가마솥’ 같은 것이라면 이처럼 질서정연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시의 주된 어법인 비유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자기 애인을 ‘꽃’으로, 그녀의 시련을 ‘바람’으로, 그녀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을 ‘진딧물’로 은유하고, ‘가녀린 꽃에 세 번의 바람이 불어왔다/그 뒤부터 진딧물이 꽃잎을 뒤덮기 시작했다’라고 쓸 경우, 쓴 사람은 은유화라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은 기호적 상징으로 받아들입니다. 오르테가(Y. G. Ortega)가 은유에는 비인간화 내지 기호화의 속성이 담겨 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점은 서사나 교술로 갈 경우 더욱 자주 채택됩니다. 프라이(N. Frye)가 <로망스(Romance)>, <노블(Novel)>, <고백(Confusion)>, <분석(Anatomy)>으로 나눈 소설의 유형 가운데, ‘분석’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교술을 <서정적 교술>, <서사적 교술>, <고백적 교술>, <분석적 교술>로 나눌 경우, 분석적 교술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시보다 긴 장르라서 설명적 언어를 채택한다는 점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호적 상징 내지 추상적 인식의 반응은 전 장르에 고루 나타나는 유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분석적 인식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가 전달하려는 논리와 질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서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설명하다 보면 산문화됩니다. 종래의 시에서 이런 초점을 취하는 작품들이 드물었던 것도 이와 같은 전달의 차단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석적 인식은 인간 정신의 전 영역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각 장르에서 채택하는 초점이므로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할 일】 ○ 각 유형에 초점을 맞췄을 때, 어떤 장단점이 생기는 시작 노트에 정리해 두십시오. ○ 이제까지 자기가 쓴 작품의 초점을 분류해 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