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경회루(敬會樓)- 국보 제224호...........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이조를 건국하고 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1394년 12월 4일 개토를 시작하여 1395년 9월 경복궁이 조성.
광화문의 해태조각상과 근정전의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들
경회루 및 영제교의 조각들은 이조후기를 대표적인 미술품들.
경회루와 방지 연못 주변은 이조의 대표적인 궁중정원이다.
경회루는 태종이 신하와 함께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한 누각.
이조 건국 때 작은 누각이었지만 세종대왕이 집현전으로 사용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시해 후 이조는 1910년 국권을 잃는다.
태종 12년(1412) 누각을 헐고 방지를 파고 경회루 건축.
세종 15년(1433) 경회루 지붕을 수리하고 집현전으로 사용.
성종 6년(1475) 경회루를 다시 짓고 그 돌 기둥에 용을 조각.
중종 16년(1521) 경회루 보수후, 청기와 덮기는 신하들 반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을 포함 경회루도 소실.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중건하였고 경회루를 다시 건축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이 불탔지만 우선 창덕궁만 복원.
그후 창덕궁은 약 276년 간 13대의 이조 왕들이 정사를 펼쳤던 본궁.
창덕궁은 비원이 아름답지만, 연산군이 주로 정사를 보았던 곳이다.
연산군은 경복궁에서 북한산까지의 민가를 헐어 사냥터를 만든 폭군.
연산군은 재임 당시 경복궁과 경회루에서 흥청망청 향락을 일삼았다.
창덕궁은 인조반정 때 불탔다가 1647년(인조 25)에 옛 모습대로 복구.
효종, 현종, 영조가 즉위식을 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창덕궁.
'임진왜란 이후 무려 276년 간 방치된 경복궁.'
경복궁은 고종황제때 재건되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된다.
고종황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승용차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종은 이조 26 대 왕(1864∼1907)이자, 마지막 실권 황제.
고종은 즉위 4년(1867)에 수백년간 폐허였던 경복궁을 복원.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주권을 잃고 경복궁은 순종때 헐리고 만다.
일제는 경복궁 4000 칸 건물을 헐어 그 자재를 일반에게 방매한다.
1917년 창덕궁 화재 후 교태전 강녕전 동행각 경성전 연생전을 철거
그 재목으로 대조전, 희정당을 건축하고 광화문을 북쪽으로 이전한다.
19세기 말, 고종황제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을 마감한다.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이 그 이름을 지었다.
덕수는 '오래 산다.'는 뜻으로, 순종의 효성어린 마음이 담긴 궁이다.
순종(1874∼1926)은 이조 27대 마지막 왕(재위 기간 1907∼1910).
1907년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 책임을 묻는 일본의 압력으로 하야.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후 1910년 8월 29일 하야.
일본의 무력 점령으로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 이왕
경복궁의 역사는 1395년 9월에서 1910년 8월 29일로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청궁 터에 미술관 건축.
경회루 북쪽 북악산 아래에 조선총독부 관사를 건축(지금의 청와대).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는 정부청사로 이용된다.
1996년 조선총독부청사는 헐렸고 1995년 강녕전과 교태전이 복원,
1999년 자선당이 복원, 2001년 10월 흥례문(興禮門)이 복원되었다.
2001년~2003년 정전인 근정전이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복원되었다.
근정전은 원래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지금보다 2배 규모의 건물.
사정전(思政殿)은 근정전 뒤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 단층건물.
사려 깊게 정치를 한다는 뜻이며 옥좌가 있고 그 뒤로 벽화인 쌍용도.
사정전 동쪽 만춘전과 서쪽 천추전은 좌우대칭 건물이자 왕의 집무실.
사정전은 마루방 집무실이고 날이 추워지면 만춘전이나 천추전을 이용.
사정전 남쪽 자고는 임금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사고는 서쪽부터 차례로 천자문 순서를 따라 천자고, 지자고 등등의 이름
수정전은 경회루 남쪽 건물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집현전.
자경전은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에 오르도록 했던 조대비의 처소.
자경(慈慶)이란 왕실의 웃어른의 경사와 무병장수 등을 기원하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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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는 광화문에서 들어서야 그 의미를 알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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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역사를 모르면 경회루의 역사 또한 알 수 없다.
아울러, 경복궁에 얽힌 이조 왕실의 역사 또한 오리무중.
경회루를 이해하려면 그 첫 관문 광화문부터 알아야 한다.
원래,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인 곳은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중종 반정을 맞고 임진왜란으로 인한 소실,
일제시대 헐릴 위기에서 구사일생 후 6.25 전쟁에 폭격.
박 정희 대통령이 철근으로 복원한 후 직접 쓴 현판 글씨.
광화문 앞은 세종대왕 이후로 정치, 행정의 육조거리였다.
오늘날까지도 광화문에서 종로 거리 일대는 서울의 심장부.
이방원이 정도전과 이복형제 방석의 계책을 피해 말을 세운 곳.
왕자의 난을 일으켜 훗날 왕위에 올랐던 그가 천명을 기다린 곳,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 주역들이 그당시 반군의 진을 쳤던 곳.
중종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자 천여명 유생들이 눈물 흘렸던 곳.
광화문은 이성계가 1395년 경복궁을 지을 때 남문이란 뜻의 ‘오문’
세종이 광화문으로 개명 후 그 앞에 육조거리를 만든 '정치의 산실'.
왕이 누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 앞 광장에서 과거시험도 치룬 곳.
과거에 급제하면 홍예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던 곳.
육조거리 관청 숙직자들이 일도 안하고 기생과 밤새도록 술마시던 곳.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 폐허로 버려졌다가 1867년 중건으로 부활한 곳.
1925년 조선총독부를 지으며 근정전 앞문 흥례문과 함께 헐기로 했던 곳.
경복궁 동문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옛 모습을 부지했던 광화문.
광화문과 경회루 사이 부지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며 이전된 것.
이전된 광화문은 6.25 사변으로 소실 후 1968년 현재 자리에 재건.
그러나, 역사적으로 여러번 불에 소실되었기에 콘크리트로 재탄생.
광화문은 경복궁 수난을 대변할 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안고 있다.
광화문은 경회루와 그 앞 전통정원의 규모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
경회루 일대는 과거 대통령을 경호하는 수도사령부 30 여단 주둔지.
10.26에 이어 12.12 사태의 권력 암투의 숨겨진 비화가 담겨있는 장소.
경회루는 이조에서 군신 간에 첨예한 정치적인 대립을 조율하던 연회장.
8.15 해방 이후 잠깐 개방되었다가 청와대 경호를 위해 43년간 통제구역.
따라서, 경회루는 역사적으로 일반에게 알려질 수 없었던 곳.
그러나, 2005년 4월 일반인에게 개방을 앞두고 마감 공사 한창.
경회루 개방에 앞서 그 건축물의 특성과 역사를 자세히 알아보자.
경회루는 왕과 군신 간 쟁점을 조율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곳.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아진다.' 속담의 산실인 경회루.
직사각형의 인공연못인 방지 위에 떠있는 듯한 다락집 경회루
국내 최대 규모의 다락집이고 방지 연못에는 인공섬이 3개 있다.
그중 가장 큰 섬에 경회루가 있고, 돌다리로 향원지 외부와 연결된다.
나머지 두 개의 인공섬에는 석축 위에 나무만 자라고 있다.
경회루는 북쪽 향원정과 함께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1412년 그 건물이 기울자 이를 수리하면서 위치를 서쪽으로 옮기고,
원래보다 크게 증축했고 습한 기운을 막으려고 누각을 허공에 띄웠다.
경회는 '왕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야 경사가 모인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1473년 4년 성종 때 경회루 누각 아래층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였다.
연산군은 경회루 연못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고, 배를 띄워 흥청망청.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1867년 고종 때 경복궁을 다시 중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간, 측면 5간이고 35간 넓이의 이층 누마루집
돌기둥이 받친 삼각형의 단면이 생기는 팔작지붕 목재 건축물.
정상은 용마루를 쌓고 그 양끝에는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
흙을 구워 추녀 마루의 시작 부위에는 용의 머리 용두를 놓았다.
추녀마루 끝에는 짐승 모양을 얹는 것을 잡상이라고 한다.
잡상은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장식효과
잡귀들이 경회루에 범접하는 것을 예방하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취두, 용두, 잡상은 지위와 품격이 높은 건물만 설치할 수 있다.
정전인 근정전은 일곱 개,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는 아홉개다.
경회루에는 11 개가 있고 연못 둘레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경회루는 경복궁의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접근로.
경회루는 경복궁 내전에 딸린 누각이고 정원인 셈이다.
원래, 내전에 살던 왕과 왕실의 전용 목적으로 만든 구조.
'경회루는 흥청망청이란 고사숙어 산실인 누각.'
'흥청망청'은 연산군의 경회루 주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494∼1506년 재임한 연산군은 왜구 격퇴 및 국방에 주력.
즉위 초에 치적을 쌓았으나, 재임 후기에 실정을 저질렀다.
연산군은 성균관 용도로 씌여왔던 경회루를 유흥장 삼는다.
사간원 기능을 마비시키고 이조 민생을 혼란에 빠뜨린 폭정.
중종반정 이후 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되어 운명.
'연산군은 경회루를 어떻게 사용했던 것일까? '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신하들에게 꽃을 내리며 시를 짓게 했다.
사계화 한분, 연꽃 세송이, 철쭉 한가지, 작약 몇 송이 같은 시제.
'봄기운에 취한 복숭아 꽃이 빗속에 붉다'란 시제를 남기기도 했다.
연산일기에는 1506년 경회루 앞 방지(方池)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고
화려한 꽃을 심고 봉래궁,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壁雲宮)
등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어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
연못에 비단 연꽃을 띄우고 산호를 꽂아 밤엔 물위에 등불로 장식.
연산군은 황용주(黃龍舟)를 타고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경회루 아래 비단 장막을 치고 흥청, 운평들과 어울렸다.
흥청과 운평과 같은 왕실 기생은 천여 명 있었다고 한다.
'방지에 비단연꽃과 산호로 장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꽃은 맑은 물에서 살 수 없고 늪에서 자라는 식물.
산호는 맑은 물에서 만이 그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다.
즉, 방지는 연못이 아닌 수중 궁궐로서 쓰였던 연회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