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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사방(四方)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 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일찍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倭寇)를 방비했는데, 조금 후에 원(元)나라 야굴대왕(也窟大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침략하니, 목조는 두타 산성(頭陀山城)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곧 덕원(德原)이다.】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동북(東北)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고원(高原)을 지켜 원(元)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雙城) 이북【쌍성은 곧 영흥(永興)이다.】 지방이 개원로(開元路)에 소속되었고, 원(元)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철령(鐵嶺) 이북 지방을 취(取)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붙좇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께 따라오니, 산길(散吉)이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산길이 친히 옥배(玉杯)를 목조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 “공(公)의 가인(家人)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서로 친하는 지극한 정리를 알겠습니까? 부족하나마 옥배(玉杯)로써 나의 정을 표시할 뿐입니다.” 하고, 이내 서로 함께 맹세하기를,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 하였다. 목조는 이에 동종(同宗)의 딸을 산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목조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지나서 시리(時利)【곧 이성(利城)이다.】에 이르렀는데, 그 천호(千戶)가 군사로써 막으므로, 목조가 귀순(歸順)한다는 뜻을 말하니, 천호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목조도 또한 소와 말로써 그에게 보답하고, 마침내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이때가 송(宋)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1254)이요, 원(元)나라 헌종(憲宗) 4년이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이다. 【원전】 1 집 1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외교-원(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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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구려 영내에 진나라 유민을 받은게 사로신라의 시원이니...시원은 알타이인근 거기가 맞을 겁니다.
제가 남쪽이라 한 건...이후,고구려의 남진과 함께 당과 신라가 연합하면서 고구려와 대립할 땐 그곳에 있을수 없으니...
대륙남부가 사로신라의 새 것점이 됐을수 밖엔 없단 얘기입니다.
고지도상으로 보면...섬서일대에도.... 대륙남부에도 경주란 지명이 나타나는 이유라 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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