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기본적으로 나는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것을 인도철학이나 인도학과 관련지어 가면서 좀더 넓은 시야에서 행해가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학문은 그 연구대상이 인간이다. 넓게 말하면, 불교학이나 인도철학이나 모두 인문학의 영역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복지가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불교학이나 인도철학에서 문제 삼는 인간보다 사회복지가 문제 삼는 인간은 매우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여있는 실존(實存)적 인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불교학의 약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싯달타 태자는 출가 이전에 우리 인생이 겪어야 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실존적 고통에 대해서 경험을 했음이 틀림없다. 그러한 이야기를 극적으로 구성해 놓은 것이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거기에는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싯달타 태자의 만남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태자의 문제의식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에 대한 태자의 해결책은 복지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아니라 “인간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접근을 통해서 모색된다. 그 결과 깨달음을 얻게 되고, 불교가 형성된다.
어쩌면 그것이 보다 근원적인 처방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거기에 장점도 있다면 약점도 있다. 그렇기에 불교, 또는 불교학이 보편적인 인간의 존재양상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있는 한편으로 구체적인 인간의 존재양상에 대한 접근에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볼 수 있다면, 불교의 역사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전개가 바로 그것이다. 자비의 어머니, 관세음보살을 말하게 된 것도 결국 구체적인 실존 속에 놓여있는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자비를 말하고 있다. 그것뿐이다. 자비는 말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일 터인데 말이다.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이웃들을 내가 늘 존경하는 까닭이다.
2.
불교대학원 27기 사회복지학과 원우들이 일본으로 연수(2005.1.12〜16)를 다녀왔다. 사회복지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입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참할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 동참한 이상 뭔가 모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나를 길동무로 부르는 데에 어떤 차원에서 나는 응답해야 할 것인가? 전체 4박 5일의 여정 중에서 복지시설 견학 이틀과 오고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은 일본불교를 달리는 말 위에서나마 살펴보는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시간을 위하여 뭔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찰을 둘러보면서 일본불교의 이모저모를 단편적이나마 설명해 드리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소임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예를 들어서 나라 동대사(東大寺) 대불을 구경하고 돌아 나오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1년에 얼마나 될까? 그 중에서 불교인들은 얼마나 될까? 그 중에 수학여행이나 문화교류 차원에서 일본의 사찰을 둘러보는 우리나라 학생들은 또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누구도 통계를 내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엄청난 숫자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그런데, 불가사의하게 생각되는 것은 동대사나 법륭사를 비롯한 일본불교의 사찰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견문할 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나 중국에 다녀와서 쓴 여행기라든가 견문록은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은 책이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 일의 시급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각설하기로 한다. 다만,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볼 뿐이다.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 불교학자들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어지는 궁금증이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불교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왜 아직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일본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것과 일본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알기로 일본에서 일본불교를 공부하는 우리나라 유학생이 몇 사람은 있다. 그분들이 귀국하여 학문 활동을 한다면 상황이 달라지리라 보지만, 지금까지는 대개 일본에서 일본의 불교를 공부한 분이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 역시 일본에서 일본불교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인연은 없다. 겨우 1년 동안 있었을 뿐인데, 그것도 일본불교만을 오로지 공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불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관심있게 견문하려고 했다는 것뿐이다.(이때 나의 견문기는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속에 정리되어 있다. 이 원고는 출판사에 가있는데, 아직 출판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 덕분에 그렇게라도 설명을 하면서 안내를 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은 적지 않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일본불교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은 욕망을 나는 갖고 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믿음의 개념과 관련하여 힌두교 텍스트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박티(bhakti)라는 개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개념을 생각함에 있어서 하나의 극단적 사례를 제시한 것이 바로 일본의 신란(親鸞)이다. “내가 곧 부처다”라고 하는 선(禪)에 있어서 믿음을 가장 우파적(右派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신란이 말하는 믿음 개념은 가장 좌파적(左派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의 가피는 어떠한 적극적인 노력의 댓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신란의 믿음 개념을 제외하고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는 것은 힘들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함께 생각하기”(共觀)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정립해 보는 것은 내 꿈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3.
이번에 우리가 살펴본 것은 정토신앙의 현장(정토종 총본산 지은원, 정토진종의 서본원사와 동본원사), 선종 사찰(용안사와 금각사), 밀교 사찰(동사), 관음신앙의 도량(삼십삼간당), 그리고 북법상종(北法相宗)이라는 종파적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일본불교의 속화된 모습을 잘 드러내는 청수사 등이다.
그런데, 사회복지를 하시는 분들과 함께 견학을 다니는 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현재 일본의 불교계는 어느만큼 사회복지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의문은 이내 “일본불교사 안에서는 사회복지가 어떻게 실천되어 왔던 것일까” 하는 또 다른 의문으로 확대된다. 교토에 도착한 첫날 저녁, 일본 정토종 서산파(西山派)에 소속한 한 청년승려를 만났다. 그는 닌쇼(忍性)를 말한다.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도 닌쇼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닌쇼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교수를 통해서이다. 내가 현재 번역하고 있는 책 『스님들을 통해서 본 일본불교사(お坊さんの日本史)』의 후기를 통하여, 마츠오 교수는 닌쇼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일본불교사 연구라는 학문활동을 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한센병(나병) 환자를 비롯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의 구제에 힘쓴 닌쇼(忍性)나 마더 테
레사의 예에서 단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종교인의 사회 구제활동은 21세기의 불교인 역
시 크게 실천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나와 일본불교와의 만남은 에이존(叡尊) ․ 닌쇼 등
의 한센병 환자에 대한 구제활동을 학부의 졸업논문에서 다룬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 당시의 한센병 환자가 처해 있던 상황을 이해하면 할수록, 한센병 환자의 구제에
힘썼던 에이존 ․ 닌쇼 등의 활동이 갖는 중요성 ․ 곤란성 ․ 혁신성 등이 실감났던 것입니
다. 지금 일본불교 연구자의 말석에 자리해 있는 것도 에이존 ․ 닌쇼 외 가마쿠라 신불
교를 건설한 불교인들의 활동이, 중세라는 시대적 제약을 받으면서도, 현재의 우리들에
게 시간을 초월하여 인생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학시절 학부 졸업논문으로 에이존(1201〜1290)과 닌쇼(1217〜1302) 사제 간의 나환자 구제활동을 다룬 마츠오 겐지(山形대학) 교수는 근래 다시 닌쇼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자비가 지나치다, 닌쇼』(ミネルヴァ書房, 2004)를 저술하고 있으며, 『지계의 성자, 에이존 ․ 닌쇼』(吉川弘文館, 2004)를 편집하고 있다. 특히, 닌쇼를 “일본판 마더 테레사” 혹은 “가마쿠라의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 장애를 가진 나환자를 업고 다니며 동냥을 했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감동을 금치 못한다.
관원(寬元) 초(1243〜1244 경)에는 중병으로 인하여 보행이 곤란하여 며칠씩이나 걸식을 하지 못한 나환자의 비인(非人, 당시 나환자와 같은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여 非人이라 불렸음 ---- 옮긴이)을, 닌쇼는 여명이 틀 무렵 나라언덕(奈良坂)으로 마중 나가서 등에 업고서는 나라 시내의 걸식하는 곳으로 함께 갔으며, 저녁에는 다시 등에 업고서 나라언덕으로 돌아갔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에나 춥고 더운 날에나 닌쇼는 나환자의 마중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환자는 임종에 이르러, “나는 반드시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닌쇼를 모시면서 닌쇼의 은덕을 갚고 싶다. 몸을 바꾼 때에도 얼굴에는 부스럼(瘡)을 남겨두어서 그 증거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뒤에 닌쇼의 제자 중에 얼굴에 부스럼이 있는 자가 있어서, 사람들은 ‘과연 이 나환자의 후신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원형석서(元亨釋書)』의 닌쇼전(忍性傳)이 전하는 일화이다.(細川凉一, 「忍性の生涯」, 『持戒の聖者, 叡尊 ․ 忍性』, 117쪽)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과문의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불교사의 정사(正史) 속에서 닌쇼와 같은 보살행을 한 스님을 찾기가 쉽지 않다. 소설 『동의보감』 속에서는 나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애쓴 삼적대사의 존재가 그려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죽을 일은 없다. 닌쇼 스님이 바로 우리의 스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인간구제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 불교라는 점을 공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가 일본불교를 공부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도 이런 데에 그 이유의 일단이 있다. 우리가 배워와서 우리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할 자료를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는 마츠오 겐지 교수를 초빙하여 더 들어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
어쩌면 원효스님과 같은 분이 무애행(無碍行)을 했다고 하므로, 그분은 닌쇼와 같은 보살행을 행했지 않았을까.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당시 귀족화되고 있던 신라불교에 대한 저항으로서 스스로는 파계하여 “민중 속으로” 들어갔던 운동이 원효의 무애행이고, 그러한 흐름은 당시 원효에게서만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안 ․ 혜숙 ․ 혜공 ․ 사복 등의 이름을 우리는 『삼국유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의 사회복지 참여사(參與史)를 정리하는 분들이 그 시작을 어디에서 설정하는 지 알 수 없으나, 내 생각에는 원효를 비롯한 이들에게서 그 효시(嚆矢)를 설정할 수도 있을 것같다.
그런데, 원효스님과 같은 분들의 실천행을 우리는 흔히 불교의 대중화나 민중화로 부른다.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스님과 같이 대중불교 내지 민중불교를 실천하였던 분들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 불교사에서는 그에 대한 고유명사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우리의 원효스님과 같이 민중 속에서 보살행을 행한 스님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을 “히지리”(聖, 市聖)이라 부른다. 저자거리의 성자라는 뜻으로 말이다. 일본불교에 있어서 사회복지를 살펴본다면 히지리의 불교를 외면하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일본불교사회복지사의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닌쇼가 반드시 처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리를 놓아주고, 길을 바르게 하며, 하천을 파고, 사원을 건립하고, 또 도량과 못, 목욕탕 등의 다채로운 사회구제사업” --> 교키(行基, 668〜749)스님
“강에는 다리를 놓고, 도로를 정비하고, 들판에 버려져 있던 유해를 찾아내서는 한
곳에 모아 기름을 붓고 태우고” --> 구야(空也, 903〜972)
교키나 구야를 모두 히지리라고 합니다만, 우리 불교와는 달리 일본불교의 경우에는 이러한 히지리의 전통이 결코 방계(傍系)나 비주류(非主流)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천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는 관승(官僧)이 존재하는 한편으로 이러한 히지리의 전통을 받아서 구체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던 이웃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구제를 지향했던 스님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둔세승(遁世僧)이라 부르는 이들이야말로 가마쿠라 신불교를 창시한 존재들이라고 마츠오 겐지 교수는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 현재 일본불교의 거대한 종파들, 정토종이나 정토진종과 같은 경우는 바로 가마쿠라 신불교에서 발원(發源)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그들의 전통 속에서 이어져 오던 사회구제 혹은 사회복지의 실천을 오늘날 어떤 형태로 전개하고 있는 것일까?
정토종의 경우에는 그 종립 불교대학이 있고, 그 속에서 사회복지학과와 노인 요양 홈인 “화순(和順)의 마을”이 존재함을 보았다. 그러나, 다른 종단들, 혹은 정토종 안에서도 학교 차원이 아니라 사찰이나 스님들 차원에서 행해지는 사회복지 실천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번의 견학을 이어서, 다시 그와 같은 기회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확인해 보고 싶다.
4.
정토종 종립 불교대학에서는 노인 요양 홈을 견학하였다. “화순의 마을”만이 아니라 이번 사회복지 견학에는 불교대학 사회복지학과 박광준 교수님께서 시설을 소개해 주시고 또 안내도 맡아주셨다. 예정에 없던 “좌담회”에서도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번 연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좌담회” 시간에서야 정토종 종립대학인 불교대학에서는 “노인”만이 아니라 “호스피스”(일본에서는 “비하라”라고 함) 내지 “간호”에 대한 것 역시 견문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토신앙은, 쉽게 말하면 죽어서 극락가자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염불행 그 자체만이 아니라 죽음/왕생과 관련하는 제반 사항이 사실상은 정토행자의 관심사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불교대학원의 현 원장 보광스님은 정토신앙을 하시는 분이시다. 스님께서 장례문화학과를 만드시는 데에 앞장서신 일이라든지, 다시 장례문화학과 안에 호스피스 전공을 개설한 데에는 공적(公的)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신앙이 그 배경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일본 정토종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정토종 차원의 자격증이지만 “불교간호사” 자격증 제도가 있다거나 호스피스 활동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거나 하는 일들 역시 불교대학에서는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러한 활동의 중심에 서 있는 분이 무라오카 기요시(村岡 潔) 선생이다.
무라오카 선생은 작년까지만 해도 학과 소속이 불교학과(불교문화 전공)이었는데, 학제(學制)의 개편으로 학부 소속은 사회복지학부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다면, 무라오카 선생을 통해서 이런 측면에서(의료적 측면에서 복지로 접근해 가는 것) 이루어지는 활동들에 대해서 견문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은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물론, 우리에게 호스피스는 장례문화학과의 일로 학제가 구획되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딱히 구분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함께 행하는 학제(學際)적 노력 역시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같은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사실상 이번 연수에 동참하면서 나는 너무나 무심했던 것같다. 좀더 궁구해 보고,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제시해볼 수도 있었을 터인데……. 역시 교학부장 소임을 게으르게 살고 있는 평소의 태도가 반영된 탓일 것이다. 함께 했던 원우들, 그런 줄도 모르고 나의 “일본불교 가이드”에 대해서 감동(?)했다고 말씀해 주신 분들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다.
(2005. 1.23)
|
첫댓글 "일본불교사 공부방" 창간호에, 불교와 사회복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이라 했는데 제목을 좀더 분명히 고쳤습니다. 이태화 회장님의 후의로 공짜로 따라갔기 때문에, 이 글이라도 써서 회향하고자 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