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마음으로는 참가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지만 미리 참가 신청을 하지는 못했다.
교회 행사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별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난데없이 누군가로부터 "목사님, 우리 식목일에 어디 가기로 했는데 목사님도 같이 가시죠?" 하는 얘기가 들릴까 우려했는데
식목일 전 주일인 4월 3일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2)
경품 협찬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분으로 있는 성경책을 경품으로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쓴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책 역시 그렇다.
수필집이나 다른 일반 서적 같으면 혹시 모르겠는데
목사가 쓴 책인지라 죄다 "예수 잘 믿으라"는 얘기뿐인 책이다.
혹시 관심이 있어서 보내달라면 보내줄 용의는 있지만
휴지로 쓰기에는 종이 질이 안 좋고
읽기에는 내용이 지루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내가 쓴 책이기는 하지만 인세를 받고 원고를 넘겼으니
소유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출판사에 있다.
나 역시 돈 주고 사야 한다.(내가 사면 조금 싸기는 하다)
어쨌든 관심이 있는 동창이 있다면 보내줄 마음은 있다.
(다른 얘기로 하면 제발 예수 좀 믿으라는 얘기다)
3)
아내에게 같이 가자는 얘기를 그리 강권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가끔 있는 휴일이 밀린 살림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내도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더니만
출발 당일에야 마음이 바뀌었는지 같이 간다고 했다.
예상 참가인원에 잡혀있지도 않은 사람이 둘씩이나 나타나면
행여 밥이 없다고 구박 받을 수는 있겠지만
모른 척하고 그냥 집을 나섰다.
4)
집결 장소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동원이, 순영이, 창주, 순언이, 승훈이, 광수 등이 보였다.
동원이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 계속 참가 상황을 확인하는 중이었고
순영이는
내가 미리 참가를 밝히지 않은 아내와 함께 나타나자,
혹시 "작은 마누라"냐고 물었다.
5)
택근이와 홍이를 마지막으로 올 사람은 다 왔다며 출발했다.
길이 제법 밀렸다.
중간에 영기네 가족이 탔고
상계동에서 다시 상훈이, 성민이, 석현이, 경형이 등이 탔다.
석현이도 동부인이었다.
동창들 모임에 가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게 마련인데
상훈이, 성민이가 우선 그랬고
부록으로 석현이의 아내도 무지하게 오랜만이었다.
석현이 아내는 내 누이동생 친구이기 때문에 전에는 가끔 우리 집에도 놀러오곤 했었다.
6)
몇 마디를 얘기한 동원이가 5분간만 얘기하라며
마침 그 다음 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성경책 펴놓고 얘기하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얘기하겠지만
"만나서 반갑다"라는 제목으로 5분을 얘기할 능력은 없는지라
몇 마디 하고는 다음 자리로 마이크를 넘겼다.
창주에게 마이크가 넘어가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자기가 노래 한 곡을 뽑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제일 난처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꼭 노래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벌금 만 원으로 때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내가 솔로가 아니라 아내와 동행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7)
순영이의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늘 듣던 노래였다.
동원이는 부창부수로 자진 납세를 했고
광수는 맨정신으로 무슨 노래를 부르느냐며
지금까지 맨정신으로 불러본 노래는 애국가와 교가뿐이라고 했고
순언이는 노래 대신 난센스 퀴즈를 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가다가 산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손자가 뭐라고 했겠느냐는 문제와
예전에는 사과를 칼로 깎아서 먹지 않고 그냥 손에 들고 먹었는데, 사과를 한 입 베어먹은 것을 뭐라고 하느냐는 문제였다.
산타할아버지가 정답인 첫 번째 문제는 아무도 못 알아맞췄고
두 번째의 파인에플은 누군가 맞췄는데, 뉘집 아들인지는 모르겠다.
8)
마이크가 나에게도 왔다.
나는 지금도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적에는 반주자 눈치가 보이고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사람이다.
요컨대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처음 도와 나중 도를 구분 못한다.
다행히 아내는 성악가 뺨치게 노래를 잘한다.
(팔불출이라고 비아냥거려도 별 수 없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다.)
나는 당연히 아내에게 마이크를 넘겼고
그것으로 다 된 줄 알았는데
창주가 엉뚱한 시비를 걸었다.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다면서
노래를 너무 잘한 벌금 5천원을 내든지, 그게 싫으면 한 곡 더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곡 더 불렀고 만 원을 시상으로 받았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얘기는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나 같으면 벌금 만 원을 내야 하는 위기인데
아내는 같은 일을 놓고도 만 원을 버는 기회를 만들었으니
과연 세상이 공평한지 의문이다.
9)
서운동산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순표, 두현이, 남구, 석준이를 포함하여
경순이, 태영이, 영수, 봉수, 승희, 대선이, 계천이, 재철이, 용범이, 석홍이, 길수, 군이, 남규 등이 보였다.
10)
문과는 곤색, 이과는 하얀색으로 티셔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티를 입으니 전부 다 배가 가관이다.
누구 배가 가장 심했는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전부 다 계천이를 떠올릴 테니,
내가 그 얘기를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집에서 아내에게 배 나왔다고 구박을 듣는데
나 정도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
홍이, 영기, 상훈이, 남규, 재철이, 찬영이 등 몇 명만 빼면 나도 명함을 내밀만 했다.
아내가 그 사실을 느꼈기를 바란다.
11)
가장 먼저 축구를 했다.
축구를 한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나이에 과연 축구가 가능한지 의아했다.
나는 노래도 그렇지만 운동하고도 별로 친하지 못하다.(할 줄 아는 게 뭐란 얘기야?)
점잖에 앉아서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후반전에는 교체 멤버로 출전을 했다.
교회에서 축구를 할 때는
내가 공을 잡으면 적당히 비켜주기도 하고
나에게 골을 넣으라고 챤스를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가뜩이나 할 줄 모르는 축구를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애들하고 하려니
하여간 나에게 공이 안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동장 구석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12)
남규가 먼저 한 골을 넣었다.
역시 현역 군인이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내가 군 복무를 할 때, 부대장이 대령이었다.
그때 내 기억으로 부대장은
머리가 하옇게 센 할아버지였고
감히 얼굴을 마주 쳐다보지도 못하는 지엄하신 신분이었는데
그런 기억을 가지고 남규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길수가 또 한 골을 넣었다.
멀리 포항에서 왔으니 한 골 넣을 만도 하다.
또 한 골을 재철이가 넣었던가.....
스코어가 삽시간에 3:0으로 벌어졌다.
3:0이면 이미 끝난 게임인데,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승희가 팔을 늘어뜨리고 가슴으로 공을 트레핑했는데
주심을 보고 있던 순표가 난데없이 호각을 불었다.
헨들링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판정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기에 전부 다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프리킥이 아닌 페널티킥이 되었다.
나중에 한 골 더 추가하여 얼렁뚱땅 3:2가 되었고
거기에서 경기는 끝났다.
축구가 끝났으면
진 팀에서는 시계를 풀고
이긴 팀은 그 시계를 받아들고 동아반점에 가야 하는데
그런 절차는 생략되었다.
14)
돼지 바베큐와 도시락으로 준비된 푸짐한 점심을 먹고 장기자랑에 이어
공새미 가족 영기네의 사물놀이 공연을 보았는데
이제 8살이라는 영기의 작은딸이 단연 압권이었다.
예쁘게 차려 입은 한복에
노래 솜씨도 일품이었고
장구를 치는 모습도 귀엽다 못하여 앙증맞았다.
이제라도 딸 하나 더 낳아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인 것을 어떡하랴?
나에게는 고2인 딸이 하나 있다.
몇 년 전이었더라....
딸에게 물었다.
"수연아, 동생 필요해? 동생 낳아줄까?"
딸의 대답이 가관었다.
"아빠, 아빠가 애를 낳아? 차라리 내가 낳는 게 빠르겠다."
15)
보물찾기는 아빠가 보물을 숨기면 아이가 보물을 찾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얘기다.
하기야 나는 지금까지 소풍 가서 보물을 찾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내가 숨겨도 내가 못 찾는다.
교회에서 야외행사를 갔을 때
몇 번 보물을 숨겨본 적이 있는데
숨기기는 했는데, 찾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꼭꼭 숨겼다는 얘기도 아니다.
남들은 찾는데 나는 못 찾는다.
16)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피구가 끝난 다음
2인3각 경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집에서 연습을 하고 온 듯한 커플이 더러 있었다.
이어 계주를 하는 것으로 준비 된 순서가 다 끝났고 행운권 추첨을 했다.
내 번호가 몇 번인지를 확인하고 주머니에 도로 넣었는데
방금 본 숫자를 그 사이에 까먹고는 또 확인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머리가 다 된 모양이다.
추첨된 숫자를 부를 때마다
동원이는 연신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 당첨되는 법"이라고 했는데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평소에 덕을 쌓은 것과 행운권 번호에 당첨되는 것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노라니
6번을 불렀다.
내 번호가 6번인데, 내가 당첨되었다는 얘기다.
살다보니 별 일 다 있다.
머리에 털 나고 이런 일은 처음이다.
평소에 덕을 쌓은 사람이 당첨된다는 말이 다시 생각하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17)
짱돌가를 부르는 것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얼마 만에 불러보는 짱돌가더라....
백호기 경기 때도 불렀고
역전 마라톤을 하면
꼴찌로 들어온 선수를 둘러싸서도
마치 우리 학교가 일등이라도 한 것처럼 짱돌가를 불렀다.
짱돌가를 부르며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들을 보시옵소서. 이들을 기억하시옵소서.
저희로 하여금 일류 고등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기억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일류 인생을 살게하옵소서.
그 옛날, 예비고사를 볼 적에
일고 교복을 입고 고사장에 들어가면
주변에서 괜히 좋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 일이 앞으로도 있게 하옵소서.
저희 주변 사람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기뻐할 수 있게 하시고
저희가 받은 복이 저희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희에게서 흘러넘쳐 주변으로 퍼질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18)
두 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고작해야 축구 후반전 동안 운동장에 서 있었던 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피곤했다.
집에 와서 저녁을 챙겨먹는게 번거로울 것 같은데
몸이 피곤하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오는 길에 동네 중국집에서 아내와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들어왔다.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너무 길게 쓴 것 같다.
그 날 수고한 모든 사람들의 노고와 함께
끝까지 읽은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식목일날에 한 그루의 나무를 꼭꼭 밟으며 단단하게도 심었네. 각박한 삶 속에서도 제일인의 긍지를 잃지않고 한마음의 잔치를 치른 동창생들이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하네. 학종이 기도대로 분명 그대들은 일류인생을 살 것이네... 덧붙여 부득이 참석 못한 동창생들도 잘 보듬으며 나누는 삶들이 되길 바란다.
첫댓글 강 목사! 수고 많았습니다. 어제 수고한 고동원회장님과 그 동안 준비하시느라 애쓴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주에서 올라온 회장단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강 목~! 대단히 무료한 하루를 끝까지 같이한 자네의 고행에 감사드리네. 자네가 상세하고 잘꾸며진 하루일과에 덧붙일게 없을것 같네..이제 찬영이 솜씨만 기다리면 되는가? 오전에 비행기로 내려오는데 기류가 안좋아 마음 한구석엔 자네의 기도가 필요했었 는지도 모르네..하여간 반갑고 즐거웠네.....
재미있게 읽었네.. 강 목사 역시 글쟁이답네... 다들 수고 많았고, 강목사 이 글 재경소식란에 다시 올려줄 수 없나.. 자유게시판에 들르지 못하는 동창들도 있을 터이니까..
식목일날에 한 그루의 나무를 꼭꼭 밟으며 단단하게도 심었네. 각박한 삶 속에서도 제일인의 긍지를 잃지않고 한마음의 잔치를 치른 동창생들이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하네. 학종이 기도대로 분명 그대들은 일류인생을 살 것이네... 덧붙여 부득이 참석 못한 동창생들도 잘 보듬으며 나누는 삶들이 되길 바란다.
멀리서 참석못한 나에겐 즐거움이 펼쳐지는 글이군 .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 기쁜 시간을 보낸것 같아 언젠가 시간이 되면 나도 한번 가보고싶구나 .동원이를 비롯해 임원들께서 수고가 많으샸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