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정예군 1만 1천 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만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 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설계두(薛 頭) 열전
『…무덕(武德) 4년 신사(621)에 몰래 바다 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마침 태종 문황제(文皇帝)가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으므로 스스로 천거하여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가 되었다. 요동에 이르러 고구려인과 주필산(駐 山) 아래에서 싸웠는데 적진 깊숙이 들어가 민첩하게 싸우다가 죽으니 공이 일등이었다. 황제가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서 신라 사람 설계두라고 아뢰었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여 좌우를 살피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데 외국인으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어떻게 그 공을 갚을까?” 하고는 시종하는 사람에게 물어 그의 평생의 소원을 듣고는 어의(御衣)를 벗어 덮어주고 대장군의 관직을 주고 예로서 장례를 치루었다.』
본기의 기록이 중국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면 이 기록은 우리나라 자체의 기록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기록자체가 주필산 전투에 대한 승패를 바꿔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을 살펴본다면 적어도 당군이 중국사서나 고구려본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용감무쌍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자체를 바꿔놓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필산 전쟁과정에서 당군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추측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吾人尙畏死 顧望不前:우리사람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여 이리저리살피느라 앞으로 나가지못하는데”라는 기록을 보면 당병사가 고구려군과 싸우는 것에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필산 전투에서 혹 당군이 이겼다라고 할 지라도 중국사서에서처럼 일방적인 승리는 거두진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사론인 유공권의 소설은 진절머리나게 많이 인용하면서 이 기록을 인용하는 책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지...